목록책 (1353)
건빵이랑 놀자
사고 기능의 지나친 중시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사고(思考)를 주 기능으로 할 때, 사상의학 용어로는 지방(地方)의 기능이 가장 잘 발달한 사람에게만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학식이 높은 소음인들 중에 이 부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사람과 토론할 때, 상대방에게 기준을 제시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것을 못하면 “기본도 안 돼 있으면서”라며 상대를 무시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 소음인을 ‘기본이 확실히 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할까? 천만에. ‘저런 꽁생원’하며 무시하고 넘어간다. 소음인에게는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 기능인 사고가 다른 사람에게는 보조 기능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고는 직관, 감성, 감각을 보조하는 기능에 불과하기에, 사고 기..
기준 세우기 락성(樂性)과 지방(地方), 보호에 대한 이야기도 기본적인 것은 대충 된 듯한데, 예를 조금 들어보기로 하자. 소음인은 기준을 잡는 일을 중시한다. 공부할 때도, 그 과목의 개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공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잘 아는 소음인 친구 하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꽤 들어서 전공을 바꾸어 다시 대학에 간 적이 있다. 나이 들어서 머리가 씽씽 돌아가는 고등학생과 겨룬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수능시험으로 과목이나 적으면 좀 나은데, 그 당시는 학력고사 시절이라 전 과목을 다시 공부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공부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 정리, 요약하기였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정치경제라는 과목이 있다. 예를 들자면 ..
예의(禮義) 이 정도면 기본적인 것은 대략 정리되었지만,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소음인의 분류 기능, 즉 지방(地方)의 기능이 사회생활에서 가지는 의미를 한번 따져보자. 분류의 기능이 강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다. 또 내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부분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도 여러 가지로 갈린다.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순순히 인정하는 수준 있는 태도부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무시하는 태도까지. 소음인이라고 다 같은 소음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 아무리 000없는 소음인도 최소한 인정은 한다. 이런 것들이 소음인이 가지는 민주사회에 어울리는 중요한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민주시민인 소음인을 보고 소양인들은 흔히 “예의가 ..
락성(樂性), 몰두(沒頭), 보호(保護) 그런데, 동무(東武)의 표현을 따르면 “소음인의 락성(樂性)은 사람들이 서로 보호함을 즐거워함에서 깊어진다”고 한다. 구분하고,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서 적합한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인 지방(地方)과 보호함이라는 것이 어떻게 락성(樂性)이라는 고리로 연결되느냐가 까다로우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락성(樂性)은 집중하고 몰두하는 기능’이라는 고리를 찾기 전에는, 이 부분에서 많이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무협지에서 적절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토리가 삼분의 이쯤 전개되면 꼭 주인공이 기연(奇緣)을 만나 절세신공을 연마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수련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마지막 운공(運功)을 할 때, 주변에서 동료들이 호위를 해준다. 내공(內功)을 ..
6. 지방(地方)과 락성(樂性) / 소음인의 소음 기운 지방(地方), 나누고 분류하기 소음 기운에 해당되는 천기(天機)를 지방(地方)이라고 한다. 지방(地方)의 방(方)이란 원래 원(圓)과 대비되는 말이다. 각(角)이 진 것이라는 뜻이다. 각이 진 것이라는 말은 방향을 잡는다는 것과 통하게 되고, 결국은 나누고 구분 짓는다는 의미와 통하게 된다. 결국 지방(地方)이란 이어진 것을 나누는 기능을 의미한다. 세상일을 뭉뚱그려 통째로 다루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다루기에 적절한 범위로 자르는 것이다. 기운이 모이는 핵심을 잡아내고, 그 기운이 뻗치는 범위를 정하고, 범위 안과 밖을 나누는 기능, 그것이 지방(地方)이다. 쉽게 생각하자면 학문을 세분해서 전공으로 분류하는 일 같은 것이 지방(地方)의 기능이다. ..
세회(世會) 인륜(人倫)의 차이 희락(喜樂)을 비교하면서 ‘받아들이다’와 ‘몰두하다’에 초점을 맞추느라 생략하고 넘어갔는데, 태음인의 희성(喜性) 역시 천기(天機)를 느끼는 것에서 비롯된다.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천기(天機)를 인륜(人倫)이라고 한다. 원문에는, 태음인은 ‘인륜을 냄새 맡는다’로 되어 있다. 그것이 도움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희성(喜性)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소양인이 보는 세회(世會)와 태음인이 냄새 맡는 인륜(人倫)이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보자. 세회(世會)와 인륜(人倫)의 차이는 목적 집단과 인연을 매개로 한 집단과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세회(世會)의 느낌은 적은 수의 룰을 정확히 지키는 일에 예민하게 만든다. 그 룰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된다. 서로 낯설게 만났기..
배려란 무엇인가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소양인이 서로 배려 없음을 노여워한다고 했다. 그건 주로 예절 없음의 문제이며, 모욕과 관련된다. 태음인이 서로 도움 주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실질적 도움에 더 가깝다. 구체적 문제 해결 방법의 제시라든가, 일의 한 부분을 대신 맡아준다든가 하는 따위의 좀더 실질적인 것이다. 태음인은 그런 부분에 무관심하면 배려가 없다고 느낀다. 둘 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음이라서 구체적 상황에의 대처에 관심이 있는 것은 같지만, 겉이 음/양으로 달라지기에 나타나는 차이다. 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너 그 옷 입고 나가면 남이 흉본다”고 말하는 것은 소양인 입장에서는 배려다. 아이가 모욕받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친절하게 말하기보다..
‘도움’에 대한 체질별 차이 도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체질과 도움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자. 앞에서 소양인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위로나 공감 같은 것을 가장 원하고, 또 남에게도 그런 것을 잘한다고 했다. 다른 체질은 각각 어떨까? 태음인은 ‘해결 방안 제시’, 소음인은 ‘상황의 정리’ 쪽의 도움을 각각 바라는 경향이 있다. 태양인의 경우는 관찰한 정도가 적어서 자신은 없지만, 아무래도 ‘동참’ 쪽을 바라는 것 같다. 방향은 이미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방향 잡는 일에 도움 되는 것보다는 동참을 바라는 듯하다. 각 체질별로 남이 문제에 부딪힌 것을 보고 도 우려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라면 바랄 만한 방식으로 도움을 주려 한다. 태양인 동참 소양인 위로나 공감 태음인 해결 방안 ..
‘받아들이다’와 ‘돕다’ 받아들이는 기능을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가 희성(喜性)이라고 표현했기에 웃음과의 관련을 한참 설명했지만, 태음의 기본 기능이 받아들임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적이 있다. 안팎이 다 음(陰)인 태음이라는 괘를 동양학에서는 주로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땅이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받아들이듯이, 그런 기능이 태음 기능이다. 이를 심리학적으로는 감각 기능으로 본다고 했다. 개별적인 감각이 모여서 서로 연결될 때까지 그냥 받아들인다. 받아들여 쌓아둔다는 것이다. 희성(喜性)이라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동무(東武)는 왜 그것을 ‘서로 돕는 모습을 기뻐하는 것’에서 깊어진다고 표현했을까? 여기에서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의..
웃음 락(樂)은 소음인을 이야기할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희(喜)를 검토해보자. 희(喜)를 나타내는 표현이 웃음이다. 사람들이 어떤 때 웃는가? 좋을 때도 웃지만, 우스울 때 웃는다. 여기서 이 ‘우습다’는 것이 뭐냐는 것이다. TV에서 개그맨이 개그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뻔한 말에서는 절대 웃지 않는다. 똑같은 개그를 두 번 하면, “에이 저거 저번에 본 거잖아”라며 식상해 한다.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말이 튀어나올 때 사람들은 웃는다. 일단 뭔가 상례(常例)에서 벗어난 것이 우스운 것이고, 우리의 예측을 넘어섰을 때 우스운 것이다. 그런데 상례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럼 언제 웃고, 언제 화를 내는가? 상례에서 벗어났지만 그 결과를 그럴듯하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사람..
5. 희성(喜性)과 인륜(人倫) / 태음인의 태음 기운 희(喜)란 받아들이는 것이다 태양인, 소양인의 경우를 검토하면서 성정(性情)의 배치에 대해 한 번 익혀 보았으니, 이제는 좀 쉬울 것이다. 음인(陰人)과 관련된 성정(性情)은 희락(喜樂)이다. 애노(哀怒)는 부정적인 것을 줄이려는 것이고, 희락(喜樂)은 긍정적인 것을 늘리려는 것이다. 태음인의 희성(喜性)은 사람들이 서로 돕는[助] 것을 기뻐함에서 발달하게 되고, 소음인의 락성(樂性)은 사람들이 서로 보호하는[保] 것을 즐거워하기에 발달하게 된다. 양인(陽人) 애노(哀怒) 부정적인 것을 줄이려는 것 음인(陰人) 희락(喜樂) 긍정적인 것을 늘리려는 것 태양, 소양인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태음인은 희성(喜性)과 락정(樂情)이 발달되고, 소음인은 락성(..
왜 태어난 대로 살지 않을까 다음은 태음인, 소음인의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인데, 너무 진도만 쫓아가면 계속 나오는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익히기에 머리가 피곤하니까,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 가자.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을 이야기하고 나면 다음에는 양인들이 음(陰)의 기운을 익히는 과정, 음인(陰人)들이 양(陽)의 기운을 익히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할까? 그냥 태어난 대로 태양인은 애성(哀性)과 직관만으로, 소양인은 노성(怒性)과 감성만으로, 태음인은 희성(喜性)과 감각만으로, 소음인은 락성(樂性)과 사고만으로 살지 않고 왜 다른 기운을 배우려 할까? 심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한다. “사람은 세 가지의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실..
노정(怒情)과 교우(交遇) 이제 노정(怒情)을 살펴보자. 먼저 교우(交遇)라는 단어를 설명해야겠다. 교우(交遇)는 벗을 사귄다는 뜻의 ‘교우(交友)’가 아니라, ‘교우(交遇)’다. ‘우(遇)’는 우연(偶然)이라고 할 때의 ‘우(偶)’와 통하기도 하고, 뜻이 합쳐진다는 의미도 있다. 낯선 사람끼리 뜻을 같이 해서 모이고 교류하는 것이 교우(交遇)다. 천시(天時)를 사람 사는 일에 적용하는 것이 사무(事務)이듯이, 세회(世會)를 사람 사는 일에 적용하는 것이 교우(交遇)다. 사무(事務)가 애성(哀性)만으로는 잘 안 되듯이 교우(交遇) 역시 노성(怒性)만으로는 잘 안 된다.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느끼고 살펴도 때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져야 할 일이 생긴다. 소양인의 노성(怒性)은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싫어하고..
4. 노정(怒情)과 교우(交遇) / 태양인의 소양 기운 남을 배려(配慮)한다는 것 이번에는 노성(怒性)과 노정(怒情)을 비교해보자. 뭐 비슷하다. 노성(怒性)은 세회(世會)라는 천기(天機)에 해당되는 것을 느낄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고, 노정(怒情)은 기운을 모아서 교우(交遇)라는 인사(人事)에 해당되는 일을 할 때 터져 나오는 것이다. 원문의 구조는 완전히 같으니까, 원문은 생략하자. 노성(怒性)은 사람들끼리 서로 업신여기는 것【원문에는 모욕한다는 ‘모(侮)’자를 사용했다】이 세회(世會)에 밝은 소양인의 눈에 자연스레 비쳐서 생겨난다. 노정(怒情)은 태양인이 교우(交遇)를 행할 때, 타인이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터져 나온다. 애정(哀情)과 마찬가지로 기운을 모았다가 급격히 쓰는 것이다. 애정..
왜 인사(人事)는 정으로 이뤄지는가 대충 애성(哀性)과 애정(哀情)이 비교가 되었는데, 성과 정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은 다른 감정들, 즉 노(怒), 희(喜), 락(樂)을 이야기하면서 계속 조금씩 나올 것이다. 하지만 성(性)과 정(情)을 처음으로 비교하는 것이니까, 왜 인사(人事)가 성이 아니라 정으로 행해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조금 적어보기로 하자. 조선시대에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절대 속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다. 워낙 똑똑하고 직관이 강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차마 속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했다 한다. 워낙 사람이 어질고 바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애정(哀情)이 발현되는 모습 ‘태양인의 애성(哀性)이 단지 듣는 것이다’의 원문은 이렇게 된다. ‘(태양인의) 애성(哀性)이 멀리 퍼지는 것은 태양인의 귀가 천시(天時)에 밝아서 뭇 사람들이 서로 속이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니, 애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哀性이 遠散者는 太陽之耳가 察於天時而哀衆人之相欺也니 哀性은 非他요 聽也라】.” 이번에는 애정(哀情)을 보자. 애정(哀情)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소양인의) 애정(哀情)이 촉급한 것은 소양인의 폐가 사무(事務)를 행하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니, 애정(哀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哀情이 促急者는 少陽之肺가 行於事務而哀別人之欺己也니 哀情은 非他요 哀也라】. 둘의 차이를 정리해보자. 천기(天機)와 관련된 ..
사무(事務)에 관한 간단한 설명 사무(事務)란, 요즘 쓰는 표현으로는 일이다. 일은 일인데 좀 공적인 일, 여러 사람이 관련되는 일이다. 동무 시절에는 사무(事務)라는 단어를 송사(訟事)라는 뜻으로 썼다고 한다. 판결이란 여러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일에 대한 직관적인 판단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판결에서 ‘옳다/그르다’를 칼같이 나누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좋다/나쁘다’ 또는 ‘옳다/그르다’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경우는 둘 중 한쪽이 확실한 거 짓일 때나 나올 수 있는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 판결은 이 정도가 적절하다 하는 선을 긋는 일이다. 결국 판결이란 관계의 고찰을 토대로 한다. 상황에 대한 빠른 인식이 중요하며, 직관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인 것이다. 뭐 꼭 송사라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3. 애정(哀情)과 사무(事務) / 소양인의 태양 기운 성(性)과 정(情), 천기(天機)와 인사(人事) 태양인과 소양인의 기본이 되는 애성(哀性)과 노성(怒性)을 설명했으니, 이제 정(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출발점은 이렇다. 태양인은 천시(天時)를 들으며 직관에만 의존해서 애성(哀性)만 느끼면서 살아간다? 소양인은 세회(世會), 감성, 노성(怒性)으로만?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부족한 기운을 채우려고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은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기운을 다 얻으려고 들게 된다. 그럼 어떤 기운부터 노력하게 될까? 가장 만만한 것부터 하게 마련이다. 음이든 양이든, 겉에 드러난 기운이 우선 느껴진다. 그러니 태양인이 보기에는 소양의 기운이, 소양인이 보기에는 태양의 기운이 가장 ..
감정 문제 다루기 감정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개인의 감정을 중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객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의료를 예로 들어보자. GOT, 혈중 콜레스트롤 농도 같은 것은 숫자로 나온다. 하지만 자각 증상은 다르다. 상처 깊이가 0.5cm, 길이가 2cm라고 적을 수는 있어도, 통증은 그냥 애매하게 심한 통증, 가벼운 통증, 찌르는 듯한 통증, 묵직한 통증, 이런 식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속이 더부룩함, 메슥메슥함, 가슴에 무언가 막힌 듯한 느낌, 찌뿌둥함, 뭐 이런 것들은 정리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느끼는 정도와 표현하는 정도가 환자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작은 불편을 크게 이야기하는 사람, 큰 고통을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등등,..
모욕(侮辱)이란 무엇인가 태양인이 사기(詐欺)를 듣듯이, 소양인은 모욕을 본다. 서로가 업신여기는 것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모욕이란 무엇인지를 좀 이야기해보자. 모욕죄, 이른바 명예훼손죄도 법적으로는 제법 복잡하다. 허위 사실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고, 사실이라도 얼마나 알려져 있는 사실이냐에 따라 또 다르고, 어떤 경우는 이미 대중에게 다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명예훼손이 되기도 하고, 대중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폭로의 경우는 면책이 되기도 하고, 무지하게 복잡하다. 어쨌든 문제가 되는 것이, 본인이 느끼는 수치감, 모욕감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점이다. 일단 체질에 따라 모욕감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 다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소양인 아내와 태음인 남편이 같이 외출하는 경우에 종종..
2. 노성(怒性)과 세회(世會) / 소양인의 소양 기운 노성(怒性)은 세회(世會)를 보는 것이다 성정을 비교하려면 다음에는 애정(哀情), 즉 ‘우리가 슬픔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순서를 조금 바꿔보자. 애정(哀情)을 이야기하려면 소양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그러니 소양인의 기본 기운에 대해서 좀 친숙해지도록, 소양인의 소양 기운, 즉 노성(怒性)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자. ‘(소양인의) 화난 마음이 넓게 포용하는 것은, 소양인의 눈이 세회(世會)에 밝으니, 사람들이 서로 업신여김을 언짢게 여기는 것이다.’ 이게 동무 선생님의 설명이다. 따라서 노성(怒性)의 정의 역시 애성(哀性)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노성(怒性)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怒性은 非他요 ..
애성(哀性)이 실생활에서 나타나는 모습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앞에서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라는 이야기들을 할 때, 양(陽)의 기운은 부정적인 것을 줄이는 방향에, 음(陰)의 기운은 긍정적인 것을 늘리는 방향에 각각 중점을 둔다고 했다. 결국 태양인의 애성(哀性)은 서로 사기 치는 것을 막아보려는 노력이다. 한자로도 애성(哀性)이지만 우리말의 ‘애쓰다’라는 말과 뭔가 연결되는 듯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일들에 끼어들어서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 그게 태양인의 애성이다. 태양인의 애성(哀性)이 실생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우리가 사는 환경은 계속 바뀐다. 따라서 과거에는 어울리고 꼭 필요했던 관습이나 제도가 어울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걸..
사기(詐欺)란 무엇인가 딱딱한 이야기만 이어지면 재미없으니까, 이쯤에서 ‘사기(詐欺)란 무엇인가’를 좀 이야기하고 가자. 법적으로는 ‘유무형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정을 가지고, 본인이 거짓임을 인지하고 있는 내용으로 상대를 기망(欺罔)하는 행위’가 사기란다. 확실히 법률 책의 내용은 말이 어렵다. 쉽게 말해서 말하는 본인도 뻥인 줄 알면서 한 건 올리려고 남을 속이면 사기라는 것이다. 어쨌든 법적 정의가 그래서 법정에서 사기죄에 유죄판결 나는 경우가 일반인의 생각보다는 드물다. 말하는 본인이 거짓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필요하고, 사기의 결과로 실제적 이득이 있다는 것도 필요하고, 이런 것들이 사기꾼의 속을 뒤집어보지 않고서는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5,60년..
1. 애성(哀性)과 천시(天時) / 태양인의 태양 기운 애성(哀性)은 천시(天時)를 듣는 것이다 애성(哀性)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애성(哀性)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애성(哀性)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哀性은 非他요 聽也라】.’ 조금 황당한가? 동무의 설명은 이렇게 된다. “(태양인의) 슬픈 마음이 널리 퍼지는 것은 귀로 천시(天時)를 들으니, 서로 속이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즉 천시를 들을 수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 속이는 것을 당연히 알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슬픈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니, 듣는 것이 바로 슬픔의 원천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런 식의 설명 때문에 사상체질에 관한 설명이 어려워진다. 동무의 주장을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쓴 책이..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직관, 감각, 감정, 사고라는 네 가지 단어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이 정도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이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본 성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본 성정만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결국은 이 체질은 이렇다는 식의 단정론에 빠지게 될 뿐이다. 기본 성정들이 어떻게 변해가며, 장점을 어떻게 넓히고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이르기까지 할 이야기가 많다. 이제부터 『동의수세보원』에 나오는 용어들을 하나씩 익혀나가도록 하자. 『동의수세보원』은 애노희락의 성정(性情)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즉 애성(哀性), 애정(哀情), 노성(怒性), 노정(怒情), 희성(喜性), 희정(喜情), 락성(樂性), 락..
3. 정보 처리의 문제 문제의 답은 잘 나왔는가? 정답은 ‘문제가 잘못되었다’이다. 어느 체질에 유리하고 불리하다는 답을 고른 독자가 많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정보 상호간의 관계를 잘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 적용할 것과 적용하지 말 것을 고르는 태양인의 직관 능력이 쓸모가 많아진다. 반면 정보의 교류에서 어려움을 받는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받는 쪽에서도 각각의 정보를 깊고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 경우 직관에 치우친 태양인이 말하는 정보는 아무래도 무시당하기가 쉽다. 태양인의 말은 사람들이 흔히 놓치거나 낯선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태양인의 주장은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들이..
실험과 관찰 현대 과학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때, 변수를 단순화시키고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방식이 바로 소음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실험은 소음인도 중시하지만 태양인이 더 즐기는 것 같다. 소음인은 아무래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치밀하고 늦는데, 태양인은 “긴가민가 하면 실험해봐”라며 쉽게 실행에 옮기는 차이인 듯하다. ‘사고 실험’이라고 실험적 방법을 머리 속에서 논리로 쫓아가는 방식이 있다. 현대 이론 물리학자들이 종종 사용하는 방법으로, 아인슈타인이 좋아했던 방법이다. 이런 것이 전형적으로 소음적인 방법이다. 반면 태음인은 관찰을 한다. 직접 나서서 조작하는 것을 별로 안 내켜 한다. 조작된 결과보다 자연스러운 결과들을 관찰하는 쪽이 원리를 찾아내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다량의..
소음인의 사고 특성 소음인의 사고는 집중한 일에 대한 판단이 설 때까지, 행동의 근거를 세울 때까지는 사고의 범주를 고립시킨다. 쉬운 표현으로 ‘사고의 범위를 좁힌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굳이 ‘범주를 고립시킨다’는 표현을 쓴 것은 사고 대상에 포함되는 것과 포함되지 않는 것을 좀더 엄격히 가른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태양인의 직관이 관계를 중시하는 것과 확실히 구분이 된다. 태양인의 직관은 넓고 엷게 퍼져 있다. 소음인의 사고는 좁고 깊다. 소음인은 사고 대상에서 빼기로 한 것은 과감히 자른다. 관계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좀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관련 안 되는 것, 관심 없는 것은 아예 모르고 깜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교육의 정도, 나이, 직업 등에 따라 ..
태양인의 직관에 관하여 태양인 이야기도 좀 해보자. 융 심리학에서 직관, 감각, 감성, 사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처음 읽었을 때, ‘감각은 인지 기능이 맞지만, 직관은 판단 기능이 아닐까?’라는 느낌에 좀 의아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사상(四象)을 공부하면서 괘상을 보고, 태양인(⚌)을 관찰하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근본적으로 판단은 인지와 행동을 이어주는 고리다. 그런데 이 연결이 자연스러우려면 음과 양을 다 갖추어야 한다. 어느 쪽이 안이 되고, 밖이 되건 괘 안에 음양을 다 갖추어야 완성된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으로만, 또는 양으로만 이루어진 패는 완성구조가 안 된다. 소음, 소양인은 부딪히는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간다. 그래서 언뜻 보면 스케일이 작아 보인다. 태양..
호감 중시/정보 중시 사례를 조금 들어보자. YS의 인사(人事) 스타일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를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다른 사람하고 일했을 때의 결과들이고, 나와 하면 달라질 수 있다’라는 식의 독선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대중적 지명도나 호감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더 큰 이유이다. 즉 그 사람이 호감을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중시하는 것이다. 종종 포퓰리스트(Populist) 경향이 있어서,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을 중용하는 경우가 생긴다. 지금은 인기도 있고, 지명도도 있지만 과거 행적을 놓고 객관적으로 따지면 곤란한 사람이 등용될 경우, 보안은 더 철저해진다. 언론이 물고 늘어지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 자료를 놓고 객관적으..
미래 예측 태도 소양인이 태음인과 논쟁이 붙으면 의외로 치열해진다. 둘 다 구체적인 사실에 관심이 있으니까, 포인트가 명확하다. 또 이론적인 것은 서로 긴가민가 하는 점이 있지만, 사실에 대한 것은 서로 자기 주장에 대한 확신을 잘 안 꺾기 때문이다. 특히 미래에 대한 예측 문제에서 부딪히면 꼭 문제가 된다. 태음인이 소양인을 주로 비난하는 점은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I wish…’와 ‘It will…’을 구분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쪽의 가능성은 과대평가하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쪽의 가능성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해서 엉뚱한 결론을 낸다는 건데, 어떨까? 감성에 치우치는 소양인의 판단이 태음인의 판단보다 부정확할 확률이 클까? 물론 소양인은 자기가 싫어하는 쪽의 ..
2. 직관, 감성, 감각, 사고 기능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례 ‘좋다/싫다’와 ‘옳다/그르다’ 서로 비교한다고 해도, 뭐 리그전 시합 붙이는 것이 아니니까, 그냥 생각나는 순서대로 적어보자. 우선 소양인의 감성이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하는 판단과 소음인의 사고가 정오(正誤)를 기준으로 하는 판단부터 비교해보자. ‘좋다/싫다’를 기준으로 판단할 경우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르다’를 ‘나쁘다’로 해석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양인은 자신의 오류를 지적당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다른 체질보다 좀 자주 있다. 그냥 ‘논리적으로 안 맞는다’라든지, ‘당신이 실수한 것 같다’라는 말들에 대해서 자신이 비난이라도 받은 듯이 화를 내는 것이다. 반면 소음인은 ‘나쁘다’라는 말을 듣고 ‘그게 왜 그르지?’라며 혼자..
융 심리학으로 본 사상기운 답은 직관-태양, 사고-소음, 감성-소양, 감각-태음이다. 많은 독자가 맞추었기를 기대한다. 융 이제마 내용 직관 태양 일이 돌아가는 이치, 원리를 수용하는 것 감성 소양 벌어진 현상을 수용하는 것 감각 태음 ‘좋은가/나쁜가’를 판단하는 것 사고 소음 ‘옳은가/그른가’를 판단하는 것 사실 답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다. 태소음양(太少陰陽)의 기운을 그 네 가지 기능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가 확실한 것도 아니니, 그냥 융 심리학과 사상의학을 연관해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견해라고 해두자. 뭐, 잘 맞으면 되는 거니까, 이런 배당이 잘 맞는지 한번 검토해보자. 직관이라고 하면 우리는 ‘천재의 영감(靈感)’ 같은 걸 떠올리는데, 정확하게 직관이라는 것은 ‘관계’를..
융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기본 기능 느낌이 좀 오는지? 뭐 이렇게 간략히 설명은 했지만, 이런 설명으로 태소음양(太少陰陽)을 다 이해하기는 좀 부족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라든지 ‘자유’라든지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단어의 뜻 이상으로 우리 마음에 뭔가 와 닿는 게 있다. 그런 식으로 ‘태양’ ‘소음’ 이런 단어에서 느낌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그런 단어만으로 설명을 해도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은 음양을 기준으로 하는 사고를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그런 수준의 느낌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러니 위의 설명은 일단 맛보기라고 생각하고, 요즘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다른 용어를 찾아보기로 하자. 칼 융이라는 서양 심리학자가 사용한 용어 ..
제2장 사상인의 성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기본적인 기능들 사상기운(四象氣運) 사상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책은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가 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는 책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바로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설명하면 대부분은 상당히 어려워한다. 일단 용어가 문제다.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이라는 용어부터가 그렇다. 동무 시절에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람에게는 태소음양(太少陰陽)이라는 말은 낯선 용어가 아니었다. 들으면서 무언가 감이 잡히는 말에 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음양이라는 표현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제일 좋기로는 독자 여러분들의 음양에 대한 이해를 그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 수준까지 끌어올려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3. 사상인의 마음 씀의 개요 이쯤에서 이 책에서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우선 아래의 표를 봐주기 바란다. 태양(太陽)기운소양(少陽)기운태음(太陰)기운소음(少陰)기운성(性)애성(哀性)노성(怒性)희성(喜性)락성(樂性)천기(天機)천시(天時)세회(世會)인륜(人倫)지방(地方)정(情)애정(哀情)노정(怒情)희정(喜情)락정(樂情)인사(人事)사무(事務)교우(交遇)당여(黨與)거처(居處)박통(博通)주책(籌策)경륜(經綸)행검(行檢)도량(度量)사심(邪心)교심(驕心)긍심(矜心)벌심(伐心)과심(誇心)독행(獨行)식견(識見)위의(威義)재간(才幹)방략(方略)태행(怠行)탈심(奪心)치심(侈心)나심(懶心)절심(竊心) 태양인소양인태음인소음인 표에 낯선 한자용어들이 잔뜩 나오고 있지만, 지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표..
사상기운과 사상체질 이런저런 건강 가이드의 내용들을 보면 체질에 대한 간단한 설명들이 나온다. 또 한의원들 중에는 체질에 대한 한두 쪽 정도의 안내책자를 주는 곳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은 크게 신뢰할 바가 못 된다. 물론 체질별 음식, 건강 관리법 등의 이야기는 대부분 맞는다. 그러나 체질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제시하는 내용들은 틀린 부분이 많다. 특히 성격에 대한 부분은 거의 믿을 바가 못 된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그런 내용들은 체질과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들이다. 길고 자세하게 써놓은 책들도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체질에 따른 성격의 드러남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체질을 알고 체질에 따른 건강관리를 하고 싶으면, 체질 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한의사와 상담하여 정확한 체질..
2. 사상체질이란 무엇인가 체질과 마음 사상의학을 보통 사람을 체질에 따라 분류하여 약을 쓰는 한의학의 한 갈래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학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양 학문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탐구와 몸에 대한 탐구가 심리학과 의학으로 서로 갈라져 있다. 물론 신경정신과 등이 있어 이를 연결하는 노릇을 하기는 하지만, 의학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은 여러 곳에서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그러나 한의학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병, 특히 만성적인 병은 마음의 움직임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마음의 움직임이 기(氣)의 움직임을 만들고 그 기가 옳게 흐르는가 그르게 흐르는가에 따라 건강하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 중에서도 마음의 영향을 가장 크게 고려하는 것이 사상의학이다. 사상의학..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1장 사상체질에 관한 개요 1. 체질의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 ‘다름’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 비로소 중요한 ‘다름’의 내용들을 배울 준비가 된 셈이다. “왜 하필이면 체질의 문제를 중요한 다름의 하나로 취급하는가?” “체질의 문제가 중요한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오래 전에 읽어서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단적으로 조난(遭難)을 당했을 경우의 생환율(生還率)에 대한 연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연령, 성별 등이 비슷한 집단의 경우보다 남녀가 섞여 있고, 아이, 어른, 노인이 섞여 있는 다양한 구성원을 가지는 집단 쪽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내용이..
체질을 아는 것은 출발점을 아는 것 ‘코페르니쿠스적’이라는 말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는 찬사가 들어 있는 표현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것은 정확히 말해서 ‘지동설(地動說)’이라기보다 ‘태양중심설(太陽中心說)’이다. 천문학의 시초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천구를 그리고, 별들을 그 천구 위에 배치하여 운동을 측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천문학이 발달되면서 점점 단일 천구에 별들을 배치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2중의 천구라는 발상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늘 처음이 어려운 법이고, 다음은 쉽다. 천구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난다. 코페르니쿠스 시절에는 수십 개의 천구【80여 개였다고 읽은 기억이 나는..
4. 출발점에 대한 이해 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 다른 것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해도 당장에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생각을 늘 꾸준히 하고 있으면 점점 그쪽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어느 정도가 되면 다른 것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한의사가 한의학의 한 갈래인 사상의학을 토대로 쓰는 글인데 서양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좀 운치가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동양의 고전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편에 좋은 말이 나온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장주인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모르겠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다른 사람, 다른 접근 방식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라는 표현으로 남녀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경로의 존재를 강조하고자 함이다. 사회적인 문제,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도 들 만한 예가 많지만, 그런 부분들은 음양이니 체질이니 하는 부분들이 어느 정도 이야기된 뒤에 하기로 하자. 너무 복잡한 문제를 다루려면 주제에서 벗어나는 여러 논란이 뒤따르게 된다. 비교적 논란이 적을 만한 것으로, 교육 문제 쪽에서 예를 들도록 하자. 여자가 남자보다 수학과 과학에 약하다고 한다. 여러 통계자료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남자아이에게는 수학과 과학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그런 교육을 하지 않아서 빚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특..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 {죽임}의 문화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열세종(劣勢種)이 살아남기 위한 문화이다. 생존의 위협이 줄어드는 정도에 따라 {살림}의 문화의 비중이 커진다. 후천개벽이니 뭐니 하면서 음양의 교체가 일어나고, 여성적인 가치관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 있다.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지구의 최우세종(最優勢種)이 되었다. 이제 “우세종에 어울리는 문화” “우세종이 마땅히 가져야 할 문화”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다. {죽임}의 문화는 다른 종에 대해서도, 같은 종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열세종일 때는 강한 개체 위주로 살아남을 필요가 있다. 가장 강한 개체 위주로 문화가 형성될수록, 약한 개체들이 도태될수록, 종 전체의 생존은 유리해진다. 반면 생..
3.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가 이런 이야기를 예도 없이 원론만으로 이어나가면 너무 어려워진다. 독자들도 읽기가 힘들겠지만, 쓰는 사람도 뭐라고 써야 정확히 전달될 지 막막하다. 아직 체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체질이 다른 사람을 예로 들 수는 없고, 여기서는 남녀 문제를 예로 들도록 하자. 주제는 ‘다른 것 사이의 평등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이다. 필자는 남녀차별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단지 젠더(Gender)일 뿐, 섹스(Sex)의 차이는 없다”라는 식의 과격한 남녀동등 역시 배격한다. 분명히 남녀는 생리적으로 다르며, 그 생리적 차이로 인한 심리적 차이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남자는 이런 일만을, 여자는 이런 일만을 해야 한다는..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이 정도에서 본격적으로 ‘다르다’에 대한 이해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흔히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은 서로 맞지 않는 것,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그릇되어서 틀리거나, 아니면 둘 다 옳고 그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데도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정사각형의 타일은 같은 모양이며 서로 맞는다. 그러나 원형의 타일이나 정오각형의 타일은 서로 같은 것이지만 딱 들어맞게 바닥을 덮을 수 없다. 반면 우리의 성벽을 보면 서로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로 쌓았지만 아주 견고하게 맞아 들어간다. 즉 ‘같다/다르다’와 ‘맞다/틀리다’는 다른 문제이다. 서로 다른 것끼리 맞을 수 있을 때, ..
“알았어”라고 말하는 네 가지 방식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도저히 논점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한 사람은 “저게 어떻게 파란색이냐? 빨간색이지”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저게 어떻게 레몬 맛이냐? 포도 맛이지”라고 주장하면서 싸우는 격이다. 겉보기에는 공통된 단어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알았어”라는 말을 어떤 경우에 쓸까? 어떤 사람은 “네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생각해보겠다”라는 뜻으로 쓴다. 즉, “일단 당신 주장을 접수는 해두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상대의 주장에 동의할 경우에만 “알았어”라는 표현을 쓰지 동의..
2. ‘다르다’와 ‘틀리다’ 다름은 동등하다 인간을 유형으로 분류한다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유형을 접하면 이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려 들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 이런 폐해가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의 일이다. 많은 수의 인류학자들이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백인보다 열등한 종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 유럽에서 평등을 찾아간 사람들이 세웠다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역사를 약간만 거슬러 올라가도, 흑인 아이와 백인아이의 지적 능력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을 수두룩하게 만나게 된다. 이런 사이비 학자들의 연구가 인류에 공헌한 것은 단 한 가지다. 그들의 왜곡된 주장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통계..
프롤로그 ‘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 1. 갈등의 원인 인간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다른 것 자체가 갈등의 원인은 아니다. 남/여, 부모/자식, 스승/제자와 같이 확연히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별 갈등 없이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다르다’는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우선, 다른 것을 무리하게 같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다르게 놓아둔 채로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한 가지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려고 하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다름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다른 것을 같다고 생각하여 ..
책을 읽기 전에 사람이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과 이런저런 갈등 상황에 부딪힌다. 손해와 이익이 누가 봐도 뚜렷한 상황은 오히려 쉽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욕심쟁이거나 막무가내인 경우만 아니라면, 이치를 따져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상황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른 경우에 이야기가 어려워진다. 분명히 상황은 하나인데 서로 해석이 다르면 쉽게 정리가 안 된다. 보통 이런 경우는 별것 아닌 작은 일에서 벌어진다. 중요한 일이라면 이런 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사회적 규범이라도 있지만, 작은 일에서 서로 느낌이 틀려지면 기준이 없다. 그럴 때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끈질기게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이기는 사람은 기분이 좋겠지만, 지는 사람은 감정의 상처를 입는다. 이..
사상체질(四象體質) 태양(太陽)기운소양(少陽)기운태음(太陰)기운소음(少陰)기운성(性)애성(哀性)노성(怒性)희성(喜性)락성(樂性)천기(天機)천시(天時)세회(世會)인륜(人倫)지방(地方)정(情)애정(哀情)노정(怒情)희정(喜情)락정(樂情)인사(人事)사무(事務)교우(交遇)당여(黨與)거처(居處)박통(博通)주책(籌策)경륜(經綸)행검(行檢)도량(度量)사심(邪心)교심(驕心)긍심(矜心)벌심(伐心)과심(誇心)독행(獨行)식견(識見)위의(威義)재간(才幹)방략(方略)태행(怠行)탈심(奪心)치심(侈心)나심(懶心)절심(竊心) 태양인소양인태음인소음인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목차 민병수(閔丙秀) 1. 서설(序說) 1) 한시연구의 과제 2) 자료의 선택 문제 ⑴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⑵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 ⑶ 『기아(箕雅)』와 절충론 ⑷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⑸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3) 작품의 평가 문제 ⑴ 고려의 시화집 ⑵ 조선의 시화집 2. 한시의 초기 모습 1) 대륙(大陸)의 노래 ⑴ 공후인(箜篌引) ⑵ 황조가(黃鳥歌) ⑶ 인삼찬(人蔘讚) 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 ⑴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⑵ 정법사의 영고석(詠孤石) 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 ⑴ 진덕여왕의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 ⑵ 김지장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⑶ 설요의 반속요(..
이은찬(李殷瓚, 1878 고종15~1909 융희3)은 양평 출신의 유생이다. 홍천에서 거의한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麟榮) 등과 함께 서울까지 진격하려다가 패퇴, 후일 밀정의 고발로 체포ㆍ처형되었다.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에 우국시 한 수가 전한다.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온 겨레 건지고자 바닷가에 이르렀네. 未得寸功身先溺 한 치 공도 못세우고 이 몸 먼저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뉘라서 동양 평화 도모하리요? 뜻한 바 있어 거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된 안타까운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정환직(鄭煥直, 1854~1907)은 영천(永川) 출신이다. 을사늑약에 통분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鏞基)와 이한구(李韓久) 등에게 거의할 것을 지시, 후..
이인영(李麟榮, 1867 고종4~1909 융희3)은 초기의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ㆍ이강년(李康秊) 등과 기의하였다가 후일 정미거의(丁未擧義) 때 다시 참가, 13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허위(許蔿)ㆍ민긍호(閔肯鎬)ㆍ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일거에 서울에까지 진공하였다가 중도에서 부친상으로 퇴거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다. 分明日月懸中州 밝고 밝은 해와 달 중주(中州)에 떠 있는데 四海風潮濫○流 온누리에 새 물결 넘쳐 흐르는구나. 蚌鷸緣何相持久 조개와 황새는 어쩌면 저렇게 붙들고만 있는가? 西洲應見漁人收 서양의 어부들이 틀림없이 쓸어 가리라.322) 이 시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이질 감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공연히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의병항쟁은 대체로 그 항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따라 이를 전후 2차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반포에 반발하여 기의(起義)한 것이 그 전기의 항쟁이며,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수호를 위하여 거의(擧義)한 것이 그 후기의 항쟁이다. 그러나 의병장 중에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척사파 지도자들과 같이 명망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항쟁에 참가한 의병장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의 궁유(窮儒)가 아니면 상민(常民)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이나 시문ㆍ잡저와 같은 문학적인 업적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에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국의 시편이나 임절시를 전하고 있는 의병장으로..
사조(詞藻)라면 일반적으로 한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하여 한말의 학술지에 마련된 사조란(詞藻欄) 즉 한시 발표에 제공된 문예란을 말한다. 학술지로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를 비롯하여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 「서우회보(西友會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 등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그 성격상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우회보(西友會報)」의 발행기관인 서우학회는 뒤에 서북학회로 통합되었다.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는 창간된 것이 1910년이므로 한말의 학술지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지지 못했다. 그..
이기(李沂, 1848 헌종14~1909 융희3, 자 伯曾, 호 海鶴)는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으며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다가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유형원ㆍ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여 당시의 전제ㆍ관제 등 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우국상시(憂國傷時)로 일관한 삶처럼 이기(李沂)의 시문(詩文) 또한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와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의 우국시(憂國詩) 중에서 「삼호사(三虎詞)」와 「독황성보(讀皇城報)」가 특히 유명하다. 「삼호사(三虎詞)」는 세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통하여 정부가 일본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피력하였으며, 「독황성보(..
이남규(李南珪, 1855 철종6~1907 융희1, 자 元八, 호 修堂)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ㆍ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의 예손(裔孫)이다. 북인(北人)의 중심세력에서 일탈하여 남인(南人)으로 색목(色目)을 옮기는 동안, 그 가문은 지배벌열(支配閥閱)에서 소외되었으며, 그 뒤로 그들은 문장(文章)과 풍절(風節)을 닦는 사대부의 수업으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가학(家學)의 전통에 의해 체질화된 수당(修堂)의 사대부적 사고는 격동하는 구한말의 정치적 와중에서도 불굴의 주체적 의지를 다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8세가 되던 해, 즉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던 해에 문과에 올라 갑오(甲午)ㆍ을미(乙未)의 격동 속에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영흥부사(永興府使)의 벼슬을 거치..
2. 우국(憂國)의 시인(詩人) 한말(韓末)이라는 역사 단계는 정확하게 말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에서부터 비롯하며, 그것은 근대화라는 시대적 임무 수행이 강조되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일단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찍이 한국사가 체험한 어떠한 역사 단계에 있어서도 서구의 ‘근대’를 스스로 시험한 일이 없는 전통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볼 때, ‘개국(開國)=개화(開化)’를 근대화의 결정론으로 파악한 인식체계는 한국의 근대사로 하여금 그 시발(始發)에서부터 망국의 민족사로 얼룩지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형식적으로는 국호가 ‘조선(朝鮮)’에서 ‘한(韓)’으로 바뀌고, 왕(제후)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격상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이..
박규수(朴珪壽, 1807 순조7~1877 고종14, 자 桓卿ㆍ瓛卿ㆍ鼎卿, 호 瓛齋ㆍ桓齋ㆍ桓齋居士)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그는, 북학파가 주창했던 실사구시의 학풍에 눈떠 중농주의적인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과 서유구(徐有榘)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배웠던 학자로는 박지원(朴趾源)ㆍ정약용(丁若鏞)ㆍ서유구(徐有榘)ㆍ김매순(金邁淳)ㆍ조종영(趙鐘永)ㆍ 홍석주(洪奭周)ㆍ윤정현(尹定鉉) 등이 있고, 남병철(南秉哲)ㆍ김영작(金永爵)ㆍ김상현(金尙鉉)ㆍ신응조(申應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김윤식(金允植)ㆍ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1848년(헌종14)에 증광시(增..
황현(黃玹, 1855 철종6~1910, 자 雲卿, 호 梅泉)은 전남 광양의 한미한 시골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긴 당시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소년 시절부터 청운(靑雲)의 꿈을 간직했으나 34세에 겨우 진사(進士)가 됐으며, 이것도 상경(上京)한 지 10여년 만에 얻은 결과였다. 창강(滄江)과 마찬가지로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서울의 문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시명(詩名)이 드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金澤榮) 등과 문우(文友)의 교분을 다지게 되었다. 그는 문보다는 시에서 빼어났으며, 특히 절구에서 보여준 굳센 힘은 강직한 그의 성품과 함께 타고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시절의 시 가운데 수작(秀..
김택영(金澤榮, 1850 철종1~1927, 자 于霖, 호 滄江ㆍ韶濩堂)은 개성출신이다. 개성은 정치적으로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정권에서 소외된 지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업도시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창강(滄江)의 가계는 무반(武班) 출신의 상인 집안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로 발신(發身)할 것을 꿈꾸었지만 41세에야 겨우 진사(進士)가 되었고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ㆍ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 겸내각기록국사적과장(兼內閣記錄局史籍課長) 등을 지냈으나 곧 귀향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세계의 이면에는 배척받은 개성 출신으로서의 비감이 도사리고 있으며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여기던 그의 모화(慕華)의 감정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그 해 그는 끝내 조국을 등지고..
이건창(李建昌, 1852 철종3~1898 광무2, 자 鳳藻ㆍ鳳朝, 호 寧齋, 堂號 明美堂)은 강화도 사곡(沙谷)에서 태어났다. 피난지(避難地) 수도(首都)라는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인 강화도는 이건창(李建昌)의 가문(家門)에 있어서는 신임옥사(辛壬獄事)와 나주벽서(羅州壁書) 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쟁(政爭)으로부터의 피신처이기도 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이라는 가학(家學)을 이룩한 고장이기도 하다. 이건창(李建昌)은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조부(祖父) 시원(是遠)의 순절(殉節)을 계기로 강화별시(江華別試)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였다. 그 뒤 벼슬이 참판에 이르는 동안 47년의 생애 가운데 태반을 묘당(廟堂)에서 보냈지만, 관인으로서는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문명(文名)으로 영채(英彩)를 발하였다. 그..
강위(姜瑋, 1820 순조20~1884 고종21, 자 仲武ㆍ堯章ㆍ韋玉, 호 秋琴ㆍ慈屺ㆍ聽秋閣ㆍ古懁堂)의 가계는 조선중기 이후 문관직과 멀어지기 시작하여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무반신분(武班身分)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벼슬이 차단된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일찍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잠시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시절에는 영의정을 지냈던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며 그의 손자였던 건조(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지목받던 민노행(閔魯行)을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으며, 민노행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에게도 5년 남짓을 배웠다. 그러나 민노행과 김정희(金正喜)는 모두 고증학에 매료된 대가였으므로, 강위도 또한 고증학..
9. 한시(漢詩) 문학(文學)의 종장(終章) 1. 한말(韓末)의 사대가(四大家) 구한말(舊韓末)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에 이르는 4,50년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전의 전통시대와 그 이후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의 불연속상에 놓인 불행한 시기였으며 또한 전통질서의 극복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탈을 부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 주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서 지성인들의 대응 방식은 크게 개화(開化), 위정척사(衛正斥邪), 동학(東學) 등의 상이한 활동을 통해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당위는 그대로 표출되었다. 1890년대의 「독립신문(獨立新聞)」(1896)이나 「황성신문(皇城新聞)」(1898)에 게재..
황오(黃五, ?~?, 호 綠此)는 그를 알게 해주는 어떤 문자(文字)에도 그의 신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한 신분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최영년(崔永年)이 쓴 「황녹차선생시집서(黃綠此先生詩集序)」에 의하면, 황오(黃五)가 불가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가 없다[先生佛緣出世, 卓犖不羈, 寄托高風]. 두둥실 거침없이 내닫기만 한 그의 삶의 방식은 그가 이룩한 시의 세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재가 광범할 뿐 아니라 꾸미는 일을 도무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세고 거칠고 힘찰 뿐이다. 다음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小姑十四大於余아가씨는 열네살 나보다 큰데學得秋千飛鷰如그네를 배워서 제비처럼 나네.隔窓未敢高聲語창문 너머 감히 큰 소리로 말 못..
변종운(卞鍾運, 1790 정조14~1866 고종3, 자 朋七, 호 肅欠齋)은 역관 출신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이유원(李裕元)ㆍ윤정현(尹定鉉)ㆍ김공철(金公轍) 등과 깊은 친분을 맺고, 이들이 사행(使行) 길에 오를 때에는 반드시 수행했다 한다. 이유원은 변종운(卞鍾運)의 시를 가리켜 “고상하고 예스러우며 편벽됨을 피했다[高古避僻].”이라 하였고, 이재원은 “성정이 발하는 것에 수식의 화려함을 힘쓰지 않았고 음운과 격조는 고상하길 바라지 않아도 스스로 고상했다[性情所發, 不務藻華, 其音韻格調不冀高而自高].”라 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바로 변종운(卞鍾運)의 시가 대체로 평이하면서도 격조가 높음을 가리킨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그의 불평음(不平音)을 토로할 때에도 그 분위기는 안온하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장지완(張之琬, 1806 순조6~1858 철종9, 자 玉山, 호 枕雨堂)은 4대에 걸친 무변(武弁) 가계에서 율과(律科) 출신으로 변전(變轉)한 중인(中人)으로 처음에는 아버지 덕주(德冑)에게서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학서(李鶴棲)의 문인이 되었고, 김초암(金初菴)과 홍직필(洪直弼)을 찾아가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장지완(張之琬)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전이나 행장 등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역정은 알 수 없으나,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기술관(技術官)의 고뇌를 우회적으로 토로한 술회시(述懷詩)가 산견(散見)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인간경애(人間境涯)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가 문학에 바친 열성은 비연시사(斐然詩社)의 결성과 『풍요삼선(風謠三選)』의 간행에 주동적인..
현기(玄錡, 1809 순조9~1860 철종11, 자 信汝, 호 希菴)는 역관 출신이지만 시작(詩作)에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이 시신(詩神)이라 불렀다. 그는 출신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길이 없자 가난과 음주와 시작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서로 세한붕(歲寒朋)으로 일컫던 정지윤(鄭芝潤) 이 죽자 풍악산에 들어가 스스로 추담선자(秋潭禪子)라 하고 선문(禪門)에 의탁하였다. 많지 않은 그의 시작들이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 『희암시략(希菴詩略)』에 34수가 전하고 있다. 현기의 시세계는, 스스로 ‘기(奇)’를 좇지 않았지만 시상이 기발한 것이 특색이다. 「차동파운시매은(次東坡韻示梅隱)」을 보기로 한다. 飢時噉飯飽時眠 배고플 때 밥먹고 배부르면 잠드니 一粟人間寄渺然 창해에 좁쌀 같은..
정지윤(鄭芝潤, 1808 순조8~1858 철종9, 자 景顔, 호 壽銅)은 성품이 경개(耿介)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며 ‘벽오기굴(僻奧奇堀)’하였으나 문자(文字)에 매우 총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기이하게 여겨 정지윤(鄭芝潤)을 머물게 하여 소장한 도사(圖史)를 읽게 했다 한다. 최성환(崔瑆煥)이 그의 시고(詩藁)를 수집하여 하원시초(夏園詩抄) 1권을 간행하였다. 정지윤(鄭芝潤)의 문학론은 장지완(張之琬)과 마찬가지로 성령론적이다. 성령이 한번 붙으면 붓끝을 다할 따름이지 시체(時體)나 신풍(新風)을 좇거나 섬세한 것을 다투지 않는다 性靈一付央毫尖, 不遂時新競巧纖. 『夏園詩草」, 「丁未臘月」 其一 여기서 보이는 성령 역시 인간이 지닌 영묘한 정신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
8. 하대부(下大夫)의 방향(芳香)과 불평음(不平音) 조선후기에 이르러 시단에도 새로운 경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위항인(委巷人)의 진출이 상당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사실이다. 특히 하대부(下大夫) 일등지인(一等之人)으로 자처한 의(醫)ㆍ역(譯) 및 율과(律科) 출신의 중인들은 스스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신분의 굴레에서 일탈할 수 없는 한계를 감수하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향유하는데 성공한 시인들도 있다. 물론 역관 출신의 시인 가운데에도 회화시로 이름 높은 이상적(李尙迪)과 같이 이미 이들의 시작이 사대부의 권역(圈域)에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로써 자신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남기는 것으로 자족(自足)하는 위항시인(委巷詩人..
김정희(金正喜, 1786 정조10~1856 철종7, 자 元春, 호 秋史ㆍ阮堂ㆍ禮堂ㆍ詩庵ㆍ果坡ㆍ老果) 역시 신위(申緯)와 마찬가지로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발군(拔群)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시인, 서도가, 화가, 정치가, 경학자로서 그 어느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과시했다. 실제로 학문과 예술이 상호 융화되어 그 폭이 끝간 데 없이 호한(浩澣)할 뿐만 아니라, 교유관계도 역시 그 폭이 넓었다. 당시 청대의 석학으로 추숭받던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으로부터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 및 박학다식(博學多識)의 계몽(啓蒙)을 입은 바 있고, 일찌기 스승으로 삼았던 박제가(朴齊家)로부터 시서화(詩書畵)의 역량을 전수받았는가 하면, 당대에 명망 높은 신위(申緯)ㆍ조인영(趙寅永)ㆍ권돈..
신위(申緯, 1769 영조45~1845 헌종11, 자 漢叟, 호 紫霞ㆍ警修堂)는 시(詩)ㆍ서(書)ㆍ화(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79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을과(乙科)에 급제하면서 환로에 올랐고, 10여년을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1812년에는 서장관 자격으로 연행하여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진 청(淸)의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교유하였다. 이후 병조참판(兵曹參知)ㆍ병조참판(兵曹參判)ㆍ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ㆍ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차례로 지냈지만, 몇 차례의 유배와 탄핵을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순탄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시편은 김택영이 600여수를 정선한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활동에 직접적인 영향..
7.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당시(唐詩)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기본 성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실제로 제작한 한시작품의 대부분은 시의 뜻이 넓고 깊은 개념(槪念)의 시(詩)를 써 왔으며,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향의 시작(詩作)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한시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시인이 배출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곧 신위(申緯)이며, 이 시인에게 직접ㆍ간접으로 영향을 준 또다른 시인이 김정희(金正喜)다. 김정희(金正喜)는 신위(申緯)보다 17년 연하이지만, 신위 시의 창작에 직접 조언(助言)을 하는 등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위의 시적 성향은 율조(律調)를 중요시하는 당시(..
이서구(李書九, 1754 영조30~1825 순조25, 자 洛瑞, 호 惕齋ㆍ薑山ㆍ席帽山人) 역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인연으로 후세에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와 더불어 후사가(後四家)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이나 그가 향유한 문학세계는 이들과 함께 묶여지지 않는다. 그는 본관이 전주이며, 중종(中宗)의 7자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宣祖)의 12자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이다. 나머지 삼가(三家)와 달리 적출(嫡出)인 그는 20대에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시활동을 벌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료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사환(仕宦) 중에도 늘 은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저술로는 『척재집(惕齋集)』과 ..
박제가(朴齊家, 1750 영조26~1805 순조5, 자 次修ㆍ在先ㆍ修其, 호 楚亭ㆍ貞蕤ㆍ葦杭道人)는 본관이 밀양이며, 승지(承旨) 평(坪)의 서자(庶子)이다. 소년시절부터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1776년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시편이 올라 청(淸)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호평(好評)을 받았다. 1779년에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서리수(徐履修) 등과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배수되었으며, 1778년, 1790년(두 차례), 1801년의 연행을 통하여 대륙의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연행에서 청(淸)의 석학인 이조원..
유득공(柳得恭, 1748 영조24~1807 순조7, 자 惠風ㆍ惠南, 호 泠齋ㆍ泠庵ㆍ古芸堂)은 당대 서자는 아니지만, 서류가계(庶流家系)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曾祖) 이래로 일문(一門)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년시절부터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와 교유하였고, 20대에는 개경(開京)ㆍ서경(西京)ㆍ공주(公州)ㆍ부여(扶餘) 등을 유람하며 민간의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두루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 곧바로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 등의 죽지사(竹枝詞)를 낳게 하였음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역사서의 저술이나 31세에 지은 「이십..
이덕무(李德懋, 1741 영조17~1793 정조17, 자 懋官, 호 炯庵ㆍ雅亭ㆍ靑莊官ㆍ嬰處ㆍ東方一士)는 멀리 정종대왕(定宗大王)의 별자(別子)인 무림군(茂林君)의 후예(後裔)이지만, 부(父) 성호(聖浩)와 모(母) 반남박씨(潘南朴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시세계는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을 결합하고 진심(眞心)과 진상(眞象)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지원(朴趾源)이 「영처시고서(嬰處詩稿序)」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덕무(李德懋)는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의 옛시인에게 얽매일 까닭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진솔한 생활모습과 정서를 담은 풍속시를 많이 남겼으며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죽지사..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13~1805 순조5, 자 仲美, 호 燕巖)은 명문가(名門家)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과업(科業)에 특별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였거니와, 노론(老論) 벽파(僻派)로 몰려 당대의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을 피해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44세에 연행(燕行)을 하기도 하였다. 말년(末年)에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온포(蘊抱)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문장(文章)이다. 율문(律文)보다는 산문(散文)에 승(勝)하여서, 「허생전(許生傳)」ㆍ「양반전(兩班傳)」ㆍ「호질(虎叱)」 등은 그의 기지(機智)와 풍자정신(諷刺精..
6. 후사가(後四家)와 죽지사(竹枝詞) 천기(天機)ㆍ진기(眞機)ㆍ본색(本色)ㆍ진색(眞色) 등을 강조하면서 진솔(眞率)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삼연(三淵)의 문학론은, 홍세태(洪世泰)를 필두(筆頭)로 한 위항시인(委巷詩人)들과 정선(鄭敾)ㆍ이병연(李秉淵)ㆍ조영석(趙榮祏) 등의 백악사단(白岳詞壇)으로 이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왕성한 활동을 벌인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국내적으로는 삼연(三淵)의 문학론을 잇고 있다. 백악산(白岳山) 밑을 중심거점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동국진경산수화(東國眞景山水畵)의 거장 정선(鄭敾),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의 대가 조영석(趙榮祏),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이병연(李秉淵) 등이 똑같이 백악..
김매순(金邁淳, 1776 정조1 ~1840 헌종6, 자 德叟, 호 臺山) 역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와 같이 ‘대연문장(臺淵文章)’으로 일컬어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세도가벌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으로 이어지는 가계만 보아도 그의 문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 자신이 “경학과 문장이 합하여 하나가 된 사람으로는 오직 우리 집안의 여러 조상이 그러하였을 뿐[經學文章合而爲一者, 惟吾家諸祖爲然. 「答族姪士心」]”이므로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말이 이를 입증해준다. 20세의 나이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오른 그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예문관(藝文館)ㆍ홍문관(弘文館..
홍석주(洪奭周, 1774 영조50~1842 헌종8, 자 成伯, 호 淵泉)는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과 함께 ‘연대문장(臺淵文章)’으로 이름을 얻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선조의 부마였던 홍계원(洪桂元) 이후 꾸준히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영예를 누린 그의 가계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게 되었으며, 아우 길주(吉周)와 현주(顯周) 등도 현달(顯達)하였다. 김창협(金昌協)ㆍ박지원(朴趾源)의 뒤를 이어 한 장석(韓章錫)ㆍ김윤식(金允植)ㆍ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金澤榮) 등에 이르는 중간단계에서 고문가(古文家)의 전통을 빛낸 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풍산세고(豊山世稿)』를 간행하면서 “우리 집안이 문학을 전수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십팔대인데 그 성취한 바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 자손들이..
이가환(李家煥, 1742 영조18~1801 순조1, 자 廷藻, 호 錦帶ㆍ貞軒)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개척한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엄격한 학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다. 남인(南人) 가계(家系)의 학풍을 체감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그는 환경과,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그의 외숙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질 조건도 함께 곁들여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丁若鏞)ㆍ이벽(李檗)ㆍ권철신(權哲伸) 등 남인계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일찍이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이름을 얻은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가학(家學)에 숙달하여 실학자적 소양과 문장력을 겸비하였으나 그의 명성에 걸맞는 저술이 없는 것이 흠으..
5. 경세가(經世家)의 시편(詩篇) 실천적인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학자들은 물론, 사장(詞章)으로 이름을 얻은 문장가(文章家)들도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며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정약용(丁若鏞)은 그가 제작한 「탐진농가(耽津農歌)」 등을 통하여 농촌 백성들의 소박한 삶과 고난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으며, 홍석주(洪奭周)ㆍ김매순(金邁淳)도 고문(古文) 문장가(文章家)의 체질에 걸맞게 화평전실(和平典實)한 시작(詩作)으로 경세(經世)의 일념(一念)을 잃지 않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38~1836 헌종2, 初字 歸農, 자 美鏞ㆍ頌甫, 호 茶山ㆍ三眉ㆍ與猶堂ㆍ俟菴)은 진주목사였던 재원(載遠)의 4남 2녀 중 제 4남으로 경기도..
박윤묵(朴允默, 1771 영조47~1849 철종1, 자 士執, 호 存齋)은 정이조(鄭彛祚)의 문인으로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와 평신첨사(平薪僉使)를 지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정밀하여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우중배대학사석재윤공묘(雨中拜大學士碩齋尹公墓)」를 보기로 한다. 三十年間九度過삼십년 사이에 아홉 번을 지나는데法華山色尙嵯峨법화산(法華山) 모습은 아직도 우뚝하다.松深古道靈風起소나무 우거진 옛 길엔 시원한 바람 불고花落荒原暮雨多꽃 떨어진 거친 들엔 저녁비 내린다.楸舍簡編猶剩馥개암나무 집 책에는 남은 향기 가득하고梣灘樵牧亦悲歌침탄에 초동은 슬픈 노래 부른다.忽聞蜀魄啼無盡갑자기 저렇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 들리니可柰枝頭怨血何나무가지 위에 뿌린 피는 어찌 하겠는가. 박윤묵(朴允默..
천수경(千壽慶, ? ~1818 순조18), 자 君善, 호 松石園ㆍ松石道人)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서당의 훈도(訓導)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수경(千壽慶)은 시에 능했으며, 또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족적인 삶을 구가하며 초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도처에 투영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섭원(日涉園)」이다. 堆霞復拳石 上有松樹閒 쌓인 노을 거듭 돌을 휘감고 그 위에 소나무 한가히 서 있다. 誅茅寔爲此 柴扉溪上關 띠풀 베고 집을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니 사립문은 시냇가에 닫혀 있다네. 軒窓容我膝 林木怡我顔 처마끝 창가에 이 몸 하나 앉을 만하고 숲의 나무는 내 얼굴 편안하게 해준다. 有時看白雲 鎭日..
정민교(鄭敏僑, 1697 숙종23~1731 영조7, 자 季通, 호 寒泉)는 정래교(鄭來僑)의 막내 동생으로, 일찍이 사예(詞藝)로써 진사에 올랐으나 낙척자방(落拓自放)하다가 일찍 죽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형에 앞서 『소대풍요』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그 사람됨이 자못 소탕하고 구속되는 바가 없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멀리 여행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이들 형제는 삼연(三淵)을 추숭하며 삼연(三淵)의 문하생과 어울려 함께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홍세태(洪世泰)를 비롯한 여타의 위항시인들과 함께 백사(白社)를 결성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정민교(鄭敏僑)는 여행을 즐겼기 때문에 기행시가 많은데, 오원(吳瑗)은 이에 대하여 “여행의 뇌소(牢騷)를 읊은 것은 모두 정이 진실되고 시어가 새로우며 ..
정래교(鄭來僑, 1681 숙종7~1757 영조33, 자 潤卿, 호 浣巖)는 그의 아우 정민교(鄭敏僑)와 더불어 시문에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을 받았던 위항인이다. 1705년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곳에서 시명(詩名)을 날리기도 하였다. 사대부 문인(文人)으로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을 따랐으며, 위항인(委巷人)으로는 홍세태(洪世泰)를 좇아 교유하였다. 정래교(鄭來僑)의 시를 두고 이천보(李天輔)는 “그의 시는 소탕연양(疏湯演瀁)하여 시인의 태도를 얻었는데, 가끔 성조(聲調)가 강개(慷慨)하여 연조(燕趙)의 격축지사(擊筑之士)가 위 아래로 치고받는 것과 같은 점이 있다. 대개 그 연원은 홍세태(洪世泰)에게서 나온 것이니, 천기(天機)로부터 얻음이 또한 많다[其爲詩也疏..
차좌일(車佐一, 1755 영조31~1809 순조9, 자 叔章, 호 四名子)은 차천로(車天輅)의 후손으로 서화(書畵)는 물론 음율, 사예(射藝)에도 능했던 시인이다. 홍양호(洪良浩)ㆍ정약용(丁若鏞) 등과 시로써 사귀었으며, 잠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살기도 하였으나 송석원 시사의 일원으로 풍류를 즐긴 일생이었다.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으로 자처한 그였지만, 그는 끝내 “세세생생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겠다[哭曰: 世世生生, 不願爲本邦人也. (行狀)]”고 통곡하였다 한다. 차좌일(車佐一)의 「산양역(山陽驛)」은 그러한 그의 삶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落日山陽驛 歸程問牧童 산양역에 해가 질 무렵, 갈 길을 목동에게 묻는다.一身無煖氣 四面有寒風 온 몸에 온기라곤 없는데 사방에는 찬 바람이 분..
장혼(張混, 1759 영조35~1828 순조28, 자 元一, 호 而已广ㆍ空空子)은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를 지낸 인물로, 시에 능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를 좇는 위항의 무리도 많았다 한다. 고대(古代)로부터 명말(明末)까지의 중국 역대 시를 넓게 선발하여 『시종(詩宗)』을 편찬하기도 하고,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장혼(張混) 문하의 위항시인들이 다음 시기의 위항문학을 선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시사적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장혼(張混)은 모든 것을 체관한 인생관, 생활관을 말해주는 이이엄(而已广)이라는 그의 자호(自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인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자오하였으며 오직 ‘문학지교(文學之交)’ 만이 영세(永世)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혼(張混)의 ..
고시언(高時彦, 1671 현종12~1734 영조10, 호 省齋, 자 國美)은 여러 차례 중국에 다녀온 한어역관(漢語譯官)으로, 역시 시에 뛰어났으며 경사(經史)에도 뛰어났다 한다. 채팽윤과 더불어 위항시의 집성인 『소대풍요(昭代風謠)』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지만 간행(刊行)을 보지 못하고 죽어, 그의 시편이 『소대풍요(昭代風謠)』「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다. 「소대풍요권수(昭代風謠卷首)」의 제사(題辭)를 통하여 그는 “『동문선』과 더불어 서로 표리를 이루어 한 시대의 풍아를 찬란히 감상할 수 있다. 귀천의 나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늘이 재주를 빌려주어 시를 잘 읊조리는 것은 한 가지다[與東文選相表裏, 一代風雅彬可賞, 貴賤分岐是人爲, 天假善鳴同一響]”라 하여 신분에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위항인의 문..
이언진(李彦瑱, 1740 영조16~1766 영조42, 자 虞裳, 호 松穆館)은 홍세태(洪世泰)ㆍ이상적(李尙迪)ㆍ정지윤(鄭芝潤)과 더불어 역관사가(譯官四家)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영조 때의 시단에서 혜성같은 존재로 평가된 바 있다. 특히 그는 24세에 일본에 통역관으로 따라가 그곳에서 시명을 떨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시재에도 불구하고 일찍 요절함으로써 천재시인으로서의 안타까움을 더욱 절실하게 돋보여 평가되기도 하여, 박지원(朴趾源) 등 여러 문인들에게서 입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文集) 『송목관집(松穆館集)』 이 전하고 있다. 이언진(李彦瑱)의 시의 특징은 전통적인 한시의 대부분이 칠언 일색임에 비해, 이언진(李彦瑱)은 파격적으로 육언절구(六言絶句)를 즐겨 짓고 있음을 지적..
4. 위항인(委巷人)의 선명(善鳴) 서울의 서대문 밖 인왕산 옥계 기슭에 천수경(千壽慶)ㆍ차좌일(車佐一)ㆍ최북(崔北)ㆍ장혼(張混)ㆍ왕태(王太) 등이 모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란 편액을 걸고 시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에서 삼사십명 때로는 백여명 씩 모여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위항문학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송석원시사는 1786년 여름부터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 존속하면서 당시의 사대부 문단 못지 않은 시문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을 사대부의 문학과 구별하여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이라 자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항시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
이용휴(李用休, 1708 숙종34~1782 정조6, 자 景命, 호 惠寰齋)는 이익(李瀷)의 조카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영정대(英正代)의 학계(學界)에 크게 영향을 끼친 문인이다. 시역시 학자풍 그대로 엄격하기만 하다. 그의 시세계는 이덕무(李德懋)의 말과 같이 격률(格律)이 엄고(嚴苦)하고 자구(字句)마다 근거가 분명하였으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지 않았다[詩力追中國, 恥作鴨江以東語, 格律嚴苦, 藻采煥曄, 別關洞天, 峭絶無隣, 博極墳典, 字句有根 …… 不徒作月露風花, 爲無用之言也]. 그래서 그의 시작의 대부분은 연작(連作) 송별시(送別詩)와 만시(挽詩)로 채워져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는 그의 관풍(觀風)의 의지를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용휴(李用休)의 시세계는 다음의 「전가(田家)..
김려(金鑢, 1766 영조 42~1822 순조 22, 자 士精, 호 藫庭)는 소위 ‘강이천사건(姜彛天事件)’에 연루되어 정조로부터 패관소품(稗官小品)에 힘쓰는 자라 지탄받고 유배됨으로써 유명해진 문인이다. 이 사건의 확대로 김려(金鑢)는 1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옥사와 유배생활을 통해 김려(金鑢)는 새롭게 역사와 문학을 바라보게 된다. 김려(金鑢)가 만년에 편집한 방대한 분량의 야사총서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는 당론에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김려(金鑢)는 자신을 비롯한 주위 문우들의 시문을 수집하여 『담정총서(藫庭叢書)』를 편집하였는데, 특히 이옥(李鈺)의 전(傳)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수집, 정리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김려(金鑢..
이학규(李學逵, 1770 영조46~1835 헌종1, 자 醒叟, 호 洛下生)는 이용휴(李用休)의 외손으로 그 계보는 남인계 실학자에 이어져 있는 문인이다. 일찍이 정조의 지우를 받으면서 문명을 얻었으나, 곧 신유사옥(辛酉事獄)에 연루되어 24년간이란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낙하생의 문학세계는 바로 이러한 유배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된다. 낙하생이 교유한 인물들로 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ㆍ신위(申緯)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낙하생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각기 유배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교유하였다. 8살 아래인 낙하생은 다산이 유배지 김해(金海)로 보내오는 시작에 크게 고무되어 왕성한 시작활동을 보이고 있다. ..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조선 숙종(肅宗) 연간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지연(地緣)과 혈연(血緣)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한 문인 학자들의 학맥을 지칭한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만년(晩年)에 강화도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천명하였을 때 그 문하에서 이광명(李匡明)ㆍ이광신(李匡臣)ㆍ이광려(李匡呂)ㆍ이광사(李匡師)ㆍ신대우(申大羽) 등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이 학맥은 구한말 이건방(李建芳)ㆍ이건창(李建昌)ㆍ정인보(鄭寅普)에까지 이른다. 이들은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여얼(餘孽)로 이 고경(苦境)을 걷게 되면서 양명학(陽明學)을 가학(家學)으로 이어 전하게 되었으며 후일 이건창(李建昌)의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에 이르러 강화도령철종(江華道令哲宗)이 등극(登極)함에 따라 처음으로 환로(宦路)..
홍양호(洪良浩, 1724 영조1 ~1802 순조2, 자 漢師, 호 耳谿)는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영정(英正) 양조(兩廟)의 인정을 받아 노론 정권 속에서도 벼슬길이 비교적 순탄하여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관풍(觀風)의 의지가 남다른 바 있어 여항인의 시선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에 천기론(天機論)을 개진하는 서문을 쓰기도 하였고, 또 시조를 한역하여 「청구단곡(靑丘短曲)」을 짓는가 하면, 민요를 채집하여 「홍주풍요시십장(洪州風謠詩十章)」을 짓기도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이계(耳谿)의 문학적 관심은 정통의 한시 뿐 아니라 여염의 민요에까지 매우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계(耳谿) 한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국문시가와 민요의 수용양상이라..
신광수(申光洙, 1712 숙종38~1775 영조51, 자 聖淵, 호 石北)는 미미한 남인 가문 출신으로 문명(文名)이 자자했음에도 과거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인이다. 그의 科詩인 「관산술마(關山戌馬)」는 당대에 노래로 가창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그는 끝내 문과에 오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석북은 평생 과거에 소용되는 글에 매달리면서도 한편으로 많은 기행시와 세태시들을 남기고 있다. 이 시들은 직접 자신의 어려운 삶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자기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몰락양반의 참상을 형상화한 「송권국진가(送權國珍歌)」,어린 계집종의 고난을 핍진하게 묘사한 「채신행(採薪行)」, 영릉참봉시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참상을 그린 「납월구일행(臘月九日行)」 등은 현실..
최성대(崔成大, 1691 숙종17~?, 자 士集, 호 杜機)는 문과 급제후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불기(不羈)의 기질로 벼슬살이에 매이지 않고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두기는 “지나는 곳의 산천과 고을의 풍요(風謠)와 물색(物色)이 마음에 와 닿으면 곧 시로 읊어내어 그 정취(情趣)와 성향(聲響)이 시원스럽게 옛시와 합치하였다[所過山川墟里 風謠物色 有感於心 輒發吟哦 情趣聲響 泠然合於古. -李壽鳳, 「杜機詩集序」].”고 한다. 이러한 그에 대하여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도 ‘고악부(古樂府)의 유조(遺調)’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실제로 『두기시집(杜機詩集)』에서 가(歌)ㆍ사(詞)ㆍ곡(曲)ㆍ편(篇) 등의 시제(詩題)를 유난히 많이 채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노래를 연상시키는..
3. 기속시인(紀俗詩人)의 낭만(浪漫) 조선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조선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엄격한 관풍(觀風)의 의지로 풍속을 징험하고 세태를 반영하려는 시작(詩作)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죽지사(竹枝詞) 또는 악부풍(樂府風)으로 변방의 풍속이나 민간의 서정을 사실적이면서 낭만적으로 그려내려는 노력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유한(申維翰)의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 홍양호(洪良浩)의 「북새잡요(北塞雜謠)」, 김려(金鑢)의 「사유악부(思牖樂府)」 등도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신유한(申維翰, 1681 숙종7~1752 영조28, 자 周伯, 호 靑泉)은 한미한 가문출신【서류(庶流)로 생각되기도 했음】으로 평생을 말단에서 전전하며 가난하게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