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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 홍대용의 신원(身元) 그 부친은 이름이 역櫟인데 목사牧使를 지내셨고, 조부는 이름이 용조龍祚인데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셨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숙潚인데 참판參判을 지내셨다. 모친은 청풍淸風 김씨金氏이니, 군수 방枋의 따님이시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으며,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고, 곧 돈녕부敦寧府 참봉參奉으로 옮겼으며, 다시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되고,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로 전임되었다가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갔으며,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처는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이다. 돌아가신 그해 12월..
8. 중국의 벗들이여 천하지사인 홍대용을 알려라 아아! 덕보는 생전에 이미 우뚝하여 옛사람의 기이한 자취와 같았으니, 훌륭한 덕성을 지닌 벗이 이 일을 널리 전해 그 이름이 한갓 강남에만 유포되는 데 그치지 않게 한다면 굳이 묘지명을 쓰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불후不朽가 되리라.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이 단락은 2편부터 6편까지의 서술을 총괄하면서 홍대용이 생전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었나 하는 점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런 다음,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은 이처럼 위대한 인간이 단지 중국의 강남에만 알려지게 하지 말고 천하에 알려지게 해 홍대용이 불후不朽하도록 해주기 바란다는 완곡한 말을 붙이고 있다. 여기서 ‘불후’라는 ..
7. 홍대용이 청의 위대한 학자인 대진을 만났다면 사실 항주의 세 선비는 문장과 예술에서 그리 빼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1879~1948)는 당시 홍대용이 대진戴震(1724~1777)과 같은 청나라의 석학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한 바 있다. 대진은 고증학자로서 기철학氣哲學을 토대로 다양한 학문 세계를 펼쳐 나갔다.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걸출한 교육가인 채원배蔡元培는 청대淸代의 가장 위대한 세 사상가로 황종희黃宗羲(1610~1695), 대진, 유정섭兪正燮(1775~1840)을 꼽은 바 있다. 홍대용 역시 기철학 위에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갔던 만큼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서로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대진의 사상은 크게 보아 구래舊來의 중국 철학의 틀..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그로부터 두어 해 뒤 엄성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였다. 반정균이 글을 써서 덕보에게 부음을 전하자 덕보는 애사를 짓고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쳤는데 그것이 전당에 전해진 그날 저녁이 마침 엄성의 대상大祥 날이었다. 서호西湖 주변의 두어 고을에서 대상에 참예하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해 마지않으며 혼령이 감응한 결과라고들 하였다. 엄성의 형인 과果가, 덕보가 보내온 향을 피운 뒤 그 애사를 읽고 초헌初獻을 하였다.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엄성의 아들 앙昻이 덕보를 백부伯父라 일컫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글을 모은 『철교유집..
5. 중국 친구인 엄성에게 출처관에 대해 얘기한 이유 덕보는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인 작은아버지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 육비, 엄성, 반정균을 유리창에서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집이 전당錢塘인데 다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덕보를 대유大儒로 떠받들며 심복心腹하였다. 덕보는 그들과 수만 글자의 필담을 나눴는데, 그 내용은 경전의 취지며 하늘의 명命이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이치며 고금古今 출처出處의 도리를 분변한 것으로, 그 견해가 웅대하고 걸출하여 기쁘기 그지없었다. 급기야 그들은 헤어질 때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천고千古에 다시 만나지 못할 테지요.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
4.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꼭꼭 숨겨라 하지만 덕보는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에도 그저 관아의 장부를 잘 정리하고, 일을 미리미리 처리하며,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연암은 홍대용이 일국을 경영할 만한 재상의 자질을 지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실제 홍대용의 삶은 어떠했는가? 이 점은 이 단락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바, 한두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관아의 장부나 정리하고,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있는가. 그런 학문과 재주와 식견으로 고작 작은 고을 수령을 하면서 장부나 정리했다..
3.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지닌 홍대용 그래서 덕보가 백사百事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는 걸 통 알지 못했다.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연암은 홍대용의 경세적 능력을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꼽아가며 명시하고 있다. “백사百事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여기서 ‘백사를 두루 잘 다스릴 수 있었다(綜理庶物)’는..
2.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학자를 멸시하다 중국 가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나는 항주杭州 사람들이 덕보에게 보낸 서화書畵며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詩文이며 이런 것 열 권을 손수 찾아내어 빈소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아아!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古雅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 특히 율력律曆에 정통하여 그가 만든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기구들은 깊이 생각하고 오래 궁구하여 슬기를 발휘해 제작한 것이었다.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는데 그 이론이 미묘하고 심오하였다. 그는 미처 이에 관한..
1. 왜 중국사람에게 홍대용의 부고를 알리는가? 덕보德保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떤 객客이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가는 길이 삼하三河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이름은 손유의孫有義이고 호는 용주蓉州다. 3년 전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토산품 두어 가지를 정표情表로 두고온바 용주는 그 편지를 읽어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떠나는 객에게 다음과 같은 부고訃告를 용주에게 전하게 하였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39. 홍대용과의 우정 癸卯哭洪湛軒. 先君中年交遊益鮮, 惟湛軒公終始無替, 有物外許心之契. 嘗於燕峽, 答湛軒書曰: “平生交遊, 不爲不廣, 挈德量地, 皆許以友. 然其所與者, 不無馳名涉世之嫌, 所見者, 惟名勢利而已. 今僕自逃於蓬藋之間, 山高水深, 安用名爲? 古人所謂: ‘動輒得謗, 名亦隨之’者, 殆亦虛語. 纔得寸名, 已招尺謗, 好名者老當自知. 每中夜自檢, 齒出酸㳄, 名實之際, 自削之不暇, 况復近之耶? 勢與利, 亦嘗涉此塗. 盖人皆思取諸人而有諸己, 未嘗見損諸己而益於人. 名兮本虛, 人不費價, 或易以相與, 至於實利實勢, 豈肯推以與人? 徒自近油, 點衣而已. 旣去此三友, 始乃明目求見, 所謂友者, 盖無一人焉. 俛仰今古, 安得不鬱鬱於心耶? 入山以來, 亦絕此念. 每念德操趣黍, 佳趣悠然, 沮ㆍ溺耦耕, 眞樂依依, 登山臨水, 未嘗不..
12. 총평 1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학자漢學者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솜씨가 걸출하며” “호방하며 깨끗함이 마치 태사공(사마천)의 글 같다”고 평한바 있다. 2. 이 글은 문예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사적 견지에서도 중요한 글이다. 북학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르며 탄생하는 역사적 현장을 보여주고 있음으로써다. 3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른바 ‘단안單眼’으로 청나라를 봤다면, 이 글에서 확인되는 홍대용의(그리고 박지원의) 청을 보는 눈은 이른바 ‘복안複眼’이라 할 만하다. 놀랍게도 만주족 지배층과 한족 인민, 외관상의 변화와 본질적 연속성, 명분과 현실 등을 구분해 파악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 중국인 벗들과의 친분을 무조건 동아시아적(혹은 국제적) 연대라고만 말할 것은 아..
11. 홍대용의 필담으로 벗 사귀는 도를 깨닫다 마침내 홍군은 항주의 세 선비와 이야기 나눈 것을 적은 세 권의 초고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며, “서문을 부탁하외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탄복하여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홍군은 벗 사귀는 법에 통달했구나! 나는 이제야 벗 사귀는 법을 알았다.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고, 누가 그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며, 또한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지 않는지를 보는 것, 이것이 나의 벗 사귀는 방법이다.” 迺出其所與三士譚者, 彙爲三卷以示余曰: “子其序之.” 余旣讀畢, 而歎曰: “達矣哉, 洪君之爲友也! 吾乃今得友之道矣. 觀其所友, 觀其所爲友, 亦觀其所不友, 吾之所以友也.” 어째서 이 서문을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홍대용이 보여주는 우도友道에..
10.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으로 비난받다 17세기 후반 이래 조선 사대부들은 중국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비린내 나는 땅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야만국인 중국에서 배울 점은 없으며 이제 조선이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조선 사대부들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복식과 두발의 모양이 만주족의 방식으로 바뀐 것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중화 문명의 빛나는 전통이 그로써 사라졌다고 본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인 조선이 청나라를 쳐서 다시 한족의 나라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자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북벌론北伐論이 그것이다. 하지만 북벌론은 허구였으며, 기실은 효종과 노론 세력, 이 둘은 공통된 이해관계에서 나온 통치용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가증..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아! 우리나라에서 항주까지는 거의 만 리이니 홍군은 이제 다시는 세 선비를 만나볼 수 없으리라. 그런데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 친구 하지 않더니 지금 만 리나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고,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사귀지 않더니 지금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살마들을 벗 삼고 있으며,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언어와 의관이 같아도 서로 벗 삼지 않더니 지금 갑자기 서로 말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른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니 어떻게 된 일일까? 嗟呼吾東之去吳幾萬里矣, 洪君之於三士也, 不可以復見矣. 然而向也居其國, 則同其里閈而不相知, 今也交之於萬里之遠; 向也居其國, 則同其族類而不相交, 今也友之..
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홍대용과 연암이 북학(=중국 배우기)을 제창했다고는 하나 이런 현상(慕華思想)을 희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경계심은 경계심대로 지닌 채, 헛된 명분론을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움으로써 조선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조선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들의 청나라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兩價的’이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를 학습하자는 것, 이것이 그들의 기본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어찌 보면 모순 같기도 하나, 바로 이 모순에서 조선적 주체성이 발아發芽할 ‘틈’이 생겨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본다면 홍대용과 연암의 입점立點은 아주 ..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홍대용의 경우 중국인들과의 교유는 명예나 이익 따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그것은 인격을 담보한 퍽 순수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박제가 등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지는 듯하다. 즉 박제가의 경우 중국인과의 교유는 단지 순수한 동기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중국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얻게 되는 명예나 이익에 대한 고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박제가는 이른바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아주 강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중국 문인이나 지식인과의 친교는 그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으리라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의 친교는 박제가의..
6. 중국인과의 교류로 우리 홍대용이 달라졌어요 홍대용이 체험한 1766년 초봄의 이 만남은 이후 홍대용이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며, 한중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홍대용은 귀국 후 박지원과 함께 이른바 ‘북학’에 제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흔히 오해되고 있듯, 홍대용의 사상적 고취가 고작 북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홍대용은 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즉 그는 오랜 숙고를 거쳐, 진리의 배타적 독점성을 주장하던 당대의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 서학西學, 불교, 노장老莊, 묵가 등 모든 이단 사상도 그것대로의 장점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징심구세澄心求世’, 즉 인간의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그 장점..
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그리하여 몰래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환담했으니, 하늘의 명命이 사람에게 성으로 품부稟賦된 이치라든가 주자학朱子學과 육왕학陸王學의 차이라든가 세도世道가 성하고 쇠한 기미라든가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일의 영광스러움과 욕됨의 분간 등등에 대하여 샅샅이 논하며, 근거를 들어 고찰하고 입증하니, 서로 마음에 맞지 않는 게 없었다. 서로간에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하는 말은 모두 지성스럽고 간절한 데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에 처음에 서로 지기知己로 허여하다가 종국에는 의형제를 맺었다. 서로 흠모하고 좋아함은 마치 성색聲色을 좇는 것 같았고, 서로 저버리지 않음은 마치 하늘에 맹세한 것 같았으니, 그 의義가 족히 사람들을 감읍感泣시킬 만했다...
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시가지를 배회하고 여항閭巷의 좁은 골목을 바장이다가 마침내 항주杭州에서 온 세 명의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이 단락은 홍대용이 작은 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곳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세 선비를 만나 한 달 가까이 사귀며 학문적 토론과 인간적 친교를 나눈 일을 말하고 있다. “시가지(街市)” 운운했는데, 바로 ‘유리창’을 가리킨다. 지금도 북경에는 유리창이 남아 있어 그곳에 쭉 들어서 있는 점포들이 미술품과 골동품, 서적 등을 판매하고 있지만, 당시의 유리창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유리창은 자금성紫禁城 가까이에 있었고 게다가 그 인근에 조선 사신들이 묵던 조선관朝鮮館이 있었기에 당시 사행使行의 일원으..
3. 연암이 홍군이라 호칭하는 이유 홍군洪君 덕보德保는 일찍이 한 필 말을 타고 사행使行을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다. 洪君德保, 嘗一朝踔一騎, 從使者而至中國. 이 단락에서 비로소 본론이 전개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홍대용을 “홍군 덕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아래부터는 덕보라는 말도 빼 버리고 아예 ‘홍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호칭 속에는 부르는 사람고 불리는 사람 양자의 관계와 친밀도 등이 함축되어 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지금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칭이 까다롭고 다양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에 따라 아주 섬세하게 호칭을 골라 쓰는 것이 일반적인 관레였다. 당시는 ‘예禮’를 강조하는 사회였던지라,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예’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옛날의 이른바 양자楊子ㆍ묵자墨子ㆍ노자老子ㆍ부처와 같은 유도 아니건만 네 가지 의론이 존재하고, 옛날의 이른바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도 아니건만 네 가지 신분이 존재한다. 단지 그 숭상하는 바가 같지 않아서일 뿐이건만 서로 헐뜯는 의론을 펼쳐 진秦 나라와 월越 나라가 소원한 것보다 더 소원하고, 그 처한 바가 달라서일 뿐이건만 신분에 차등을 둠이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다. 非古之所謂楊ㆍ墨ㆍ老ㆍ佛而議論之家四焉, 非古之所謂士農工商而名分之家四焉. 是惟所賢者不同耳, 議論之互激而異於秦越; 是惟所處者有差耳, 名分之較畫而嚴於華夷. 그리하여 그 의론이 다름을 꺼려, 이름은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 하지는 아니하고, 자체가 다름에 구애되어, 서로 접촉은 하면서도 감히 벗..
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삼한三韓 서른여섯 도회지에 노닐다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가없는데 이름난 산과 높다란 봉우리가 그 사이에 솟아 있어 백 리 이어진 들이 드물고 천 호戶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땅덩어리가 참으로 좁다 하겠다.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與天無極, 而名山巨嶽, 根盤其中,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其爲地也亦已狹矣. 대단히 거창하게 서두를 열고 있다. 아주 높은 곳에서 한반도의 땅덩어리를 내려다보면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 유언호ㆍ신광온申光蘊 등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 글은 그 이듬해인 176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東臨滄海)” 운운한 말에 전년도에 있..
5. 총평 1 이 글은 ‘개성인 양인수의 하루’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연암의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당대 개성인의 내면 초상을 접할 수 있다. 2 이 작품은 1편에서는 집을 그리고 있고, 2편에서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 풍경과 사람은 서로 잘 부합된다. 흡사 산수화 속의 점경인물點景人物처럼, 그 풍경에 그 인물이다. 이 집 이름이 왜 ‘주영염수재’인지는 글 어디에도 언급이 없지만, 사실은 글 전체를 통해 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연암이 지어준 게 아닐까 싶은 이 집 이름은 하릴없는 양인수의 처지와 기분, 그 일상을 잘 집약해 놓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연암은 그 스스로도 평생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기에 양인수와 같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하릴없이 세..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사회적 출구가 닫혀 있는 양인수 주영염수재의 주인 양인수는 개성의 사족士族이다. 개성은 전 왕조인 고려의 수도인지라 조선 시대 내내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따라서 개성 사족은 비록 사족이라고는 하나 그 처지가 영남이나 기호畿湖 사족과는 지체가 달랐다. 그래서 인삼 밭을 경영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재理財 활동을 벌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삼은 대청 무역에서 우리 측이 중국에 가지고 간 물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양인수의 물적 기반, 그리고 그런 물적 기반으로 인해 가능했으리라 짐작되는 그 서화골동 취향은 일정하게 당대에 이루어진 대청 무역의 상업적 잉여와 연결되어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기는 하나, 양인수의..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중국지식인들 밀실로 들어가다 그런데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이 보여주는 이런 취향의 문화적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명말明末에 이런 취향이 대대적으로 성행했으니, 당시 중국 사대부들은 정원을 그럴 듯하게 조성하여 그 속에 누각이나 서재를 지어 놓고 거기다 각종 고기古器나 고서화를 비치하여 수시로 감상했으며, 고급 향을 피우고 좋은 차를 마시면서 고상하고 운치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리나 세속을 초월한 깨끗하고 담박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이런 태도나 취향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수성을 확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대부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다시 말해 ..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양군은 성품이 게으르고, 깊은 곳에 거처하길 좋아하는데, 권태로워지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오피궤烏皮几 하나, 거문고 하나, 검劒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고서화古書畵 두루마리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는 사이에 벌렁 눕는다. 梁君性懶而好深居, 倦至輒下簾, 頹然臥乎烏几一琴一劒一香爐一酒壺一茶竈一古書畵軸一碁局一之間. 매양 자다 일어나 주렴을 걷고 해가 어디쯤 걸렸는지를 보는데, 섬돌 위로 나무 그늘이 언뜻 옮겨가고 울타리 아래 한낮의 닭이 처음 운다. 그러면 안석에 기대어 검을 살피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 몇 곡조를 타 보기도 하고, 한 잔 술을 조금씩 마시기도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혹은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고, 혹..
1. 작은 규모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다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는 양군梁君 인수仁叟의 초당草堂이다. 이 집은 오래된 소나무가 있는 검푸른 절벽 아래에 있으며 기둥이 여덟 개인데, 깊숙한 안쪽을 막아서 심방深房을 만들고, 격자창格子窓을 통하게 하여 탁 트인 대청을 만들었다. 높다랗게 다락을 만들고 아담하게 곁방을 둔 데다 대나무 난간을 두르고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으며 오른쪽엔 둥근창을 내고 왼쪽엔 빗살창을 내었으니, 집의 몸체는 비록 작아도 있을 것은 다 갖춰져 있어 겨울에는 환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집 뒤에는 배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대나무 사립문 안팎으론 모두 오래된 살구나무와 붉은 과실이 열리는 복사나무다. 개울 머리에 흰 돌을 두어 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세차게 흐르게 했고 멀리 있는 물을 섬돌 아..
6. 총평 1 이 글은 전체적으로 볼 때 굴곡과 기복이 심하다. 그래서 글이 더욱 생기 있고, 재미있다. 그리고 1단락의 문의文意가 마지막 단락에서 뒤집히는 극적 반전의 구조를 취함으로써 글 전체의 파란波瀾이 풍부하게 되었다. 2 박지원은 정치적인 이유로 한 때 연암협에 은거하였다. 박지원은 이 무렵 양호맹을 알게 되고, 그의 신세를 지게 된다. 박지원이 연암협으로 옮겨 간 것은 42세 때인 1778년이다. 하지만 2년 뒤, 자신을 박해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홍국영洪國榮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 후에도 박지원은 연암협을 들락날락하지만, 이 글 중 양호맹이 기문을 부탁한 지 어언 10년이나 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 53세 때인 1789년에 이 글이 씌어진 게 아닌가 추..
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아아, 양직은 정말 대나무에 벽癖이 있어 그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 겉으로만 봐도 그는 마음이 우뚝하고 커서 마치 기암괴석 같은데 그 속에는 아마 조릿대 떨기와 그윽한 왕대가 무성하리라. 이러하니 내가 글을 안 지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 가운데 대나무를 숭상하여 ‘차군此君’이라 부른 이가 있었거니와, 양직과 같은 이는 백세百世의 뒤에 ‘차군’의 충신이 되었다 할 만하다. 이에 나는 대서특필하여 정려旌閭하기를, ‘고고하며 곧고 편안할손, 양처사梁處士의 집’이라 하였다. 嗚呼! 養直豈眞癖於竹, 而愛之至哉. 觀於外可見其肝腎肺胃, 磐矹犖确, 如奇巖巉石, 而叢篠幽篁, 森鬱其中也. 余之文至此而惡能已乎. 古之人旣有尊竹而‘君’之者, 則如養直者, 百世之下, ..
4. 대나무를 닮아 간 사내 양직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지 어언 10년이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천 번 좌절되고 백 번 억눌려도 그 뜻이 바뀌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절절해졌다. 심지어 그는 술을 따라주며 나를 달래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여 촉구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묵묵히 응하지 않자 발끈하여 화를 내며 팔을 쳐들어 노려보는데, 눈썹은 찡그려 ‘个개’ 자 같고 손가락은 메마른 마디 같아, 굳세고 뾰족한 게 홀연 대나무 모양이 되었다. 所以請余文者, 今已十年之久, 而猶不少變. 千挫百抑, 不移其志, 彌久而罙切. 至酹酒而說之, 聲氣而加之, 余輒默而不應, 則奮然作色, 戟手疾視, 眉拂个字, 指若枯節, 勁峭槎枒, 忽成竹形.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10년이 지났다. 이 단락은 크..
3. 양호맹의 진실한 대나무 사랑 양梁군 양직養直은 개결하고 곧으며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죽오竹塢’라 자호自號하고 그 호를 편액扁額에다 써서 자기 집에 걸고는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응하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대나무를 소재로 한 글들에 대해 정말 괴로워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만일 편액의 글을 고친다면 내 당장 글을 쓰리다.” 나는 그를 위하여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쓴 기이한 호나 운치 있는 이름, 이를테면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행화춘 우림정杏花春雨林亭, 소엄화계小罨畫溪,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 우금운고루雨今雲古樓 등등 수십ㆍ수백 가지를 뇌까리며 그 중에 하나를 골라잡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2. 상투적인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 예로부터 대나무를 찬양한 사람은 무지하게 많다. 『시경』 「기욱淇燠」 시 이래로 읊조리고 찬탄하는 것만으론 부족해서 ‘차군此君’이라 일컬으며 숭상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에는 ‘죽竹’으로 자호字號를 삼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게다가 그런 호를 지은 까닭을 기문記文으로 적곤 하지만, 설사 채윤蔡倫이나 몽염蒙恬의 지필紙筆이라 할지라도, 대나무를 두고서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지조라느니 소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라느니 하고 서술하는 데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쓴 글이 죄다 진부한 글이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그 정채를 잃게 되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사람도 대나무의 덕성을 찬양하..
1. 대나무에 관한 글을 써주지 않으려는 이유 예로부터 대나무를 찬양한 사람은 무지하게 많다. 『시경』 「기욱淇燠」 시 이래로 읊조리고 찬탄하는 것만으론 부족해서 ‘차군此君’이라 일컬으며 숭상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에는 ‘죽竹’으로 자호字號를 삼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게다가 그런 호를 지은 까닭을 기문記文으로 적곤 하지만, 설사 채윤蔡倫이나 몽염蒙恬의 지필紙筆이라 할지라도, 대나무를 두고서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지조라느니 소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라느니 하고 서술하는 데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쓴 글이 죄다 진부한 글이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그 정채를 잃게 되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사람도 대나무의 덕성을 찬..
30. 권력자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연암으로 피하다 戊戌避世挈家, 入燕巖峽. 兪相公彥鎬, 於先君, 知照最深. 每有事難處, 輒就咨於先君. 以先君言議峻激, 多觸忤權貴, 深戒之. 一日朝退, 忽憂愁不樂, 夜訪先君, 握手歎曰: “君何大忤洪國榮也? 啣之深毒, 禍不可測. 彼之欲修隙, 久矣, 特以非朝端人, 故姑緩之. 今睚眦幾盡, 次及君矣. 每語到君邊, 眉睫甚惡, 必不免矣. 爲之柰何? 可急離城闉.” 先君自念: ‘平日言議徑直, 名譽太盛, 所以招禍.’ 遂有斂影息跡之意. 於是挈家入燕巖峽, 結數椽艸屋而居. 兪公乃求外, 得居留松京, 卽日簡騶徒入峽, 訪先君曰: “溪山大佳, 然白石不可煮. 此去松京一舍耳, 城府中有親知可爲之周旋者否? 近郭亦多精舍可僦, 盍謀之? 我在此, 日得與源, 源亦固喜也.” 時松京人梁浩孟ㆍ崔鎭觀, 慨然有氣義, 聞先..
4. 총평 1 동아시아에서의 고대 이래 무지개를 상서롭지 못한 자연 현상으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런 주류적 관점과는 달리 무지개를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삼은 문이나 예술가가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17세기에 활동한 중국의 걸출한 화가 석도石濤의 「수홍도垂虹圖」 같은 그림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나무 밑 석파石坡(평평한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두 고사高士는 무지개에서 어떤 황홀경을 맛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연암의 이 글은 석도의 무지개 그림처럼 무지개를 미적 관조의 본격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희귀한 글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2 이글에는 진부한 글자가 하나도 없고 모든 글자가 문맥 속에서 ..
3. 능청스러워 보일 정도로 깔끔하고 절제된 미학 말을 재촉해 10리 남짓 가자 문득 햇빛이 비치는데 점점 밝고 고와졌다. 조금 전의 험상궂던 구름은 모두 아름답고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해 오색이 영롱하였다. 말 머리에 한 길 남짓 무슨 기운이 어리는데, 누렇고 탁한 게 흡사 기름이 엉긴 것 같았다. 그것은 잠깐 새에 갑자기 청홍색으로 변하더니 높다라니 하늘까지 닿아 그것을 문으로 삼아 들어가거나 그것을 다리로 삼아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을 성싶었다. 처음 말 머리에 있을 때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멀어졌다. 이윽고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이르러 산기슭을 돌아 나오며 바라보니 강 따라 백 리 사이에 강화부 외성外城의 흰 성가퀴가 햇빛에 반짝거리고, 무지개 발은 아직..
2. 동양화의 화법으로 구름을 묘사하다 바다 밖의 뭇 산에는 저마다 작은 구름이 피어올라 멀리서 서로 응하며 마구 독기를 품고 있었다. 간혹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거렸고 해 아래에서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니 사방이 온통 컴컴해져서 한 치의 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번개가 번쩍여, 겹겹이 쌓여 있어 주름이 잡힌 구름 1천 송이와 1만 이파리가 비로소 보였는데, 흡사 옷의 가장자리에 선을 두른 것 같기도 하고, 꽃에 윤곽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모두가 농담濃淡이 있었다. 천둥소리는 찢어질 듯하여 흑룡이라도 뛰쳐나올 성 싶었다. 그러나 비는 그다지 심하지 않아서, 멀리 바라보니 연안延安과 배천白川 사이에 빗발이 흰 비단처럼 드리워 있었다. 海外諸山, 各出小雲遙相應, 蓬蓬有毒. 或出電..
1. 자연을 담아내는 신채나는 표현 밤에 봉상촌鳳翔村에서 자고 새벽에 강화로 출발하였다. 5리쯤 가자 비로소 동이 텄는데 티끌 기운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해가 겨우 한 자쯤 떠오르는가 싶자 문득 까마귀 머리만 한 시커먼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를 반이나 덮어 버렸다. 침침하고 어둑하여 한을 품은 것 같기도 하고, 수심에 잠긴 것 같기도 한데, 잔뜩 찡그려 편치 않은 모습이었다. 햇살은 옆으로 뻗쳐 나와 모두 꼬리별을 이뤘으며, 하늘 아래로 방사放射되는 모양이 흡사 성난 폭포 같았다. 夜宿鳳翔邨, 曉入沁都. 行五里許, 天始明, 無纖氛點翳. 日纔上天一尺, 忽有黑雲, 點日如烏頭, 須臾掩日半輪. 慘憺窅冥, 如恨如愁, 頻蹙不寧. 光氣旁溢, 皆成彗孛, 下射天際如怒瀑. 글머리를 아주 간결하게 열고..
28. 芝溪公祭之以文曰: “維歲月日, 婦弟完山李在誠, 謹操文, 哭訣于燕岩朴公之靈曰: 嗚呼哀哉! 人固有言, 文章有定品, 人物有定評. 苟無眞知, 曷惟求定? 如彼法寶, 宏麗瓌宕, 心目所罕, 蓋難名狀. 龍文之鼎, 不便鎗鐺; 琱玉之觴, 不適瓠★康+瓦. 赤刀弘璧, 不列市坊; 天書雲篆, 不充篋箱. 神鏡炤妖, 靈珠攝忘, 續弦有膠, 還魂有香. 駭聞刱覩, 詭奇不常, 不見所施, 以爲無當. 嗚呼我公! 名一何盛, 謗一何競? 噪名者, 未必得其情; 吠謗者, 未必見其形. 嗚呼我公! 學不苟奇, 文不苟新, 切事故奇, 造境故新. 家常茶飯, 皆爲至文, 嬉笑怒罵, 亦見天眞. 流水紆遠, 烟瀾泫沄, 巖峀疊重, 乃興霞雲, 自然變態, 非故駭人. 管商功實, 學者羞稱, 賈陸詞華, 文苑不登, 敢問所安, 竊比於我, 何才之高, 何志之下. 病世爲文, 痴矜自古..
16-2. 연암이 지은 총석정시를 보고 놀란 홍상한 先君於金剛之遊, 有「叢石亭觀日出」詩一篇. 洪尚書象漢, 從子舍見之驚曰: “今世能有此筆力乎? 是不可空讀也.” 以湖筆大小共二百枝, 送門下客致之, 寄意鄭重焉. 해석 先君於金剛之遊, 有「叢石亭觀日出」詩一篇. 선군께서 금강산을 유람할 적에 「총석정에서 일출을 보며」라는 시 한 편을 지으셨다. 洪尚書象漢, 從子舍見之驚曰: 상서 홍상한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今世能有此筆力乎? 是不可空讀也.” “지금 세상에도 이러한 필력의 작품이 있는가. 이 시는 헛되이 읽을 수 없다.” 以湖筆大小共二百枝, 送門下客致之, 호주부에서 나는 크고 작은 붓 모두 200개를 문하의 객에게 보내 치하하게 했으니 寄意鄭重焉. 뜻의 정중함을 표시한 것이다. 인용 목차
16-1. 어렵게 금강산에 가다 乙酉秋, 東遊金剛. 時兪公彦鎬ㆍ申公光蘊, 方聯鑣入山, 懇先君偕行. 先君爲親在, 不敢自擅遠遊, 往謝且別而歸. 王考問: “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 顧無盤纏可帶. 時金公履中, 適至聞之, 歸撤買驢錢一萬以送曰: “此可以遊乎?” 顧無僮指可俱. 乃使小婢, 呼於巷中曰: “有能從吾家小郞, 襆被擔笈, 入金剛山者乎?” 應募者數人. 乃曉發, 抵樓院遇兪ㆍ申二公, 皆驚喜過素約焉. 遍踏表裏諸勝, 題名於萬瀑洞中而歸. 三日浦ㆍ四仙亭, 又有聯句縣板. 해석 乙酉秋, 東遊金剛. 을유(1756, 영조 41년으로 연암 29세)년 가을에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셨다. 時兪公彦鎬ㆍ申公光蘊, 方聯鑣入山, 그때 유언호와 신광온이 금방 말을 나란히 달려 산에 들어가려 하며 懇先君偕行. 선군께 함께 가길..
6. 연암의 성향을 걱정한 장인 이보천 年十六冠, 就館於處士遺安齋李公之門. 處士謹嚴淸高, 以經禮律己. 其弟學士公亮天, 酷嗜書史, 文章甚高. 先君從處士受『孟子』, 從學士受『太史公書』, 已得其立言大致. 嘗倣『項羽本紀』, 作「李忠武傳」, 學士大加歎賞, 以爲有班ㆍ馬地步. 先君自弱冠時, 志氣高厲, 不拘拘於繩墨, 往往詼諧游戱, 而處士特愛重之, 誨責規切, 以古人事業期之. 嘗語學士曰: “某也, 見其才氣, 大非凡類, 必爲異日偉人. 但疾惡太甚, 英氣太露, 是可憂也.” 先君於處士, 平生服膺最深. 해석 年十六冠, 就館於處士遺安齋李公之門. 나이 16살에 관례를 하셨고 처사 유안재 이보천 공의 집안에 장가드셨다. 處士謹嚴淸高, 以經禮律己. 처사는 근엄하고 청렴하고 고결하여 일상적인 예법으로 자기를 구속하였다. 其弟學士公亮天, 酷..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고古’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의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는 진정한 자기회귀自己回歸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고’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고’에 대한 탐구다. 텍스트에 대한 사유와 자아의 확장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
5-1. 총평 1 이 글은 1770년(34세) 아니면 1771년(35세)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이 백탑 부근에 살 때다. 연암은 이 시기에 쓴 자신의 글을 모아 두 권의 책을 엮었으니, 하나는 『공작관 글 모음孔雀館文稿』이고, 또 하나는 『종북소선鍾北小選』이다. 전자는 1769년 겨울에, 후자는 1771년 겨울에 엮었다. 이 글은 당시 『종북소선』에 수록했던 글이다. 『과정록』에 보면 연암은 중년 이후 『장자』와 불교에 출입했다고 했는데, 이 글은 『장자』의 어법과 사고방식이 아주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연암이 『장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상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는 사유를 혁신하고, 감수성을 쇄신하며, 관점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자』를 활용햇..
7-1. 총평 1 이 글은 ‘문장을 짓는 건 진실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여, 창작의 비의秘義와 비평의 독자적 의의에 대해 언급한 다음, 최종적으로 이 모두를 종합해 독자에게 당부하는 말로 끝맺고 있는바, 앞뒤로 아귀가 딱 맞다. 2 이명과 코골이! 창작과 비평에 대해 말하기 위해 구사하고 있는 이 비유는 대단히 기발하고 참신하다. 한국문학사에서 길이 기억될 만한 창조적 비유가 아닌가 한다. 3 이 글은 창작과 수용의 갭에 대한 예민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창작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연암의 깊은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작가만이 볼 수 있는 내밀한 지점이 존재한다는 점, 작가만이 듣는 은밀한 소리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한 설파는 창작의 독자적 의의 및 창작 주체의 내면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는 불..
4-1. 총평 1 이 글은 연암이 그 제자인 이서구에게 독서의 방법을 설파한 내용이다. 아마도 연암은 이서구의 독서 태도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기에 이런 의론을 펼쳤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의 의의는 그런 쪽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글의 의의는 연암이 자기 시대의 독서법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암 당대의 조선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독서법이 있었으니, 하나는 성리학적 독서법이고, 다른 하나는 고증학적 독서법이며, 또 하나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독서법이었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연암의 시대에만 있던 독서법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왔던 독서법이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성리학을 하는 데 긴요한 책들의 목록을 정..
8-1. 총평 1 연암은 문학론과 관련된 글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글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연암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2 연암은 이 글을 서른두 살 때 썼으며, 4년 뒤에 개작하였다. 이를 통해 연암이 30대 초반에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 관점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3 ‘법고창신론’은 문학 창작방법론으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창조에도 유용한 원리가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포괄적 미학 원리다. 연암이 창안한 이 이론은 전통과 혁신, 과거와 현재, ‘고古’와 ‘신新’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 그것은 한국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4 ‘법고창신론’은 그 이론 수준이 아주 높으며..
5-1. 총평 1 이 글은 불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 연암은 불교와 관련된 글을 몇 편 남기고 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다. 2 연암은 동자승과 대사가 주고받는 문답을 그 곁에서 듣고 있고, 독자는 그것을 다시 엿듣는다. 3 연암은 동자승과 대사의 문답을 통해 심오한 이치를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의 개성까지도 잘 묘파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어려운 이치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은 여유롭고 생기가 넘친다. 4 이 글은 퍽 파격적인 글이다. 기문記文으로 작성된 글임에도 글의 대부분은 엉뚱하게도 대사와 동자승의 문답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 문답 속에 기문을 부탁한 사람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그 문답은 엉뚱한 것이 아니요, 주도면밀한 고려의 결과라 할 것이다. 이 ..
7-1. 총평 1 이 글은 서간문이다. 전근대 시기에는 서간문도 엄연한 문학 작품이었다. 연암의 서간문은 문예성이 퍽 빼어나다. 이 글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2 이 편지는, 처음에 서울에 있는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중간에 친구의 소중함을 설파하고, 끝에 백아의 고사에 빗대어 벗을 잃은 사람의 지극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이 보여주는, 백아의 심리적 추이에 대한 묘사는 연암의 대가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이 글 중 가장 빼어난 부분이라 할 만하다. 3 이 글은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인 1793년에 씌어진 것인바 연암 57세 때의 글이다. 노老 연암의 원숙미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4 이 작품은 ‘법고창신’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
2-1. 총평 1 이 글은 처음에 ‘백동수가 왜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려 하는가?’ 물은 다음, 물꼬를 바꾸어 연암협에서의 둘만의 은밀한 일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단락에서 연암협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오지인 기린협으로 떠나가는 백동수를 보는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은 앞의 두 단락과 각각 호응하면서 독자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은 하나의 가난이 또 다른 가난과 오버랩 되면서 생겨난다. 그 때문에 떠나보내는 사람의 슬픔이 곱절이나 크게 느껴진다. 이처럼 이 글은 그 구성이 아주 정교하다. 소품이지만 물샐틈없이 삼엄해, 토씨 하나 바꿀 수 없고, 쓸데없는 말이 하나도 없다. 2 이 글이 감동적인 것은 연암의 진정眞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떠나는 백동..
2-1. 총평 1 이 글은 연암 그룹의 예술 취향과 그 정신적 깊이를 썩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자유로움과 초속적超俗的 태도가 글 전편에 넘친다. 이 글은 길이는 짧되, 그 깊이는 아주 깊고, 그 운치는 한량없다. 2 이 글은 유춘오 악회를 기념해 쓴 글이라 할 만하다.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연암은 유춘오에서 있었던 두 건의 일을 두 개의 단락으로 병치해 구성하고 있다. 이 두 건의 일은 유춘오 악회의 수준과 분위기를 잘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연암이 유춘오 악회와 관련하여 쓴 글은 이것이 유일하다. 3 이 글은 이중二重의 교감과 소통을 보여준다. 하나는 인간 대 인간의 교감과 소통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 대 자연의 교감과 소통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연암의 예술철학이랄까 예술과 자연의 관..
5-1. 총평 1 이 글은 서른여섯 살 무렵의 연암의 자화상이라 이를 만하다. 연암은 자신의 착잡한 심리 상태와 자의식을 기복起伏이 풍부한 필치로 솜씨 있게 그려 내고 있다. 2 이 글은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힘겹게 버티며 저항하고, 또 힘겹게 버티고 저항하면서도 자신이 지치고 낙담에 빠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응시하는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슬프다. 연암의 산문 중 이 작품만큼 페이소스pathos가 그득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호기로움만은 젊은 시절 못지 않네 酬素玩亭夏夜訪友記 六月某日, 洛瑞夜訪不侫, 歸而有記. 云: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與廊曲賤隸相問答.” 所謂燕巖者, 卽不侫金川峽居, 而人因以號之也. 不侫眷屬, 時在廣..
6-1. 총평 1 이 글은 1773년(영조 49) 경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나이 37세 때이다. 당시 연암은 과거科擧를 포기한 채 곤궁하게 살면서 문학과 사상을 한층 더 높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가고 있었다. 이 글은 이 시기 연암의 감정과 태도를 잘 보여준다. 2 이 글을 읽으며 우리는 어떤 대목에서는 빙그레 웃게 되고, 어떤 대목에서는 이 글 속 인물들의 처지에 공감되어 슬픈 마음이 되기도 하며, 어떤 대목에서는 그 아름다운 묘사에 마음을 빼앗겨 황홀해지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흐뭇해지기도 하며, 어떤 대목에서는 정신이 각성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글은 파란과 변화가 많아, 배를 타고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강안江岸의 풍경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감정에 잠기게 되는 것..
3-1. 총평 1 이 글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고 그런 연후에 다시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등 굴곡과 변전變轉이 심한 글이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연암은 의도적으로 기억과 현재의 풍경을 마주 세우고 있으며, 이 마주 세움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글에서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요, 과거와 현재의 관계, 더 나아가 현재에 대해 발언하는 하나의 미적 방식이 되고 있다. 연암은 묘지명의 상투적인 형식이나 일반적인 격식을 무시하고 마음의 행로에 따라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이 글은 형식적으로는 아주 파격적이되, 내용적으로는 더없이 진실하고 감동적인 글이 될 수 있었다. 2 이 글은 연암의 누이에 대한 글이고, 삽입된 에피소드도 연암과 누이 ..
87. 혼자서 쌍륙놀이를 하다 先君於博奕諸器, 皆知其法, 特未嘗接手, 不肖惟見與人對棊者再. 一日雨中, 徘徊軒堂, 忽引雙陸, 以左右手擲骰, 爲甲乙對局. 時非無客子在傍, 而獨自撫弄. 已而, 笑而起, 援筆答人書牘曰: “雨雨三晝, 可憐繁杏, 銷作紅泥. 永日悄坐, 獨弄雙陸, 右手爲甲, 左手爲乙, 呼五呼六之際, 猶有物我之間, 勝負關心, 翻成對頭. 吾未知, 吾於吾兩手, 亦有所私歟. 彼兩手者, 旣分彼此, 則可以謂物, 而吾於彼, 亦可謂造物, 猶不勝私, 扶抑如此. 昨日之雨, 杏雖衰落, 桃則夭好. 吾又未知, 彼造物者, 扶桃抑杏, 亦有所私者歟.” 客笑曰: “我固知先生意, 不在雙陸, 乃爲拈出一段文思.” 해석 先君於博奕諸器, 皆知其法, 선군께서는 장기와 바둑의 여러 놀이 기구에 대해 모두 방법을 아셨지만 特未嘗接手, 다만 일찍이..
68. 백동수와 연암의 인연 白博川東脩, 與先君同庚. 膂力絕倫, 精悍有瞻. 畧事先君執禮, 如褊裨之事主帥, 夷險燥濕, 少無憚勞. 一日從他醉歸, 使酒於前. 先君曰: “君無禮, 可受杖.” 以剪紙板, 打其臀十, 戒其粗率. 白君初以爲戱, 後乃知其誨責也. 自是不復敢被酒入謁曰: “吾嘗被燕岩公責矣!” 해석 白博川東脩, 與先君同庚. 박천군수를 지낸 백동수는 선군과 동갑이다. 膂力絕倫, 精悍有瞻. 팔 힘이 매우 뛰어났고 정신은 예리하고도 담력이 있었다. 畧事先君執禮, 如褊裨之事主帥, 대략 선군을 섬김에 예를 갖췄으니 마치 부하장수가 장군을 섬기는 듯하여 夷險燥濕, 少無憚勞.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마르거나 습할 때 어느 때라도 조금도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一日從他醉歸, 使酒於前. 하루는 다른 데서 고주망태로 취해 돌아와..
6. 가짜 유학자를 나무라는 글을 쓰다 先君文篇, 或有譏切世儒之假飾盗名者. 於是人或有慍怒不平. 兪忠文笑曰: “此友所譏者, 僞儒耳, 特有激而發. 吾常怪君輩多事出氣力, 代爲僞儒攄憤耳.” 해석 先君文篇, 或有譏切世儒之假飾盗名者. 선군의 문장 중에 간혹 세상 유학자들의 가식적인 모습과 훔친 명성을 나무라고 꾸짖은 것이 있었다. 於是人或有慍怒不平. 그래서 사람 중에선 간혹 화를 내며 불평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兪忠文笑曰: “此友所譏者, 僞儒耳, 충문 유언호는 웃으며 말했다. “이 벗이 나무란 사람은 가짜 유학자일 뿐으로 特有激而發. 다만 격노하여 발설한 것이네. 吾常怪君輩多事出氣力, 나는 항상 그대들이 많은 일에 기력을 내뿜으며 代爲僞儒攄憤耳.” 가짜 유학자들을 위해 대신하여 분노를 피력하는 게 이상할 뿐이네...
22. 과거시험에 급제시키려는 사람들과 그걸 피해 다니는 연암 庚寅, 赴監試, 俱魁初終場. 出榜之夕, 有特旨入侍卧內, 使知申讀奏試券. 上親叩書案以節之, 盛加奬諭焉. 先君欲不赴會圍, 親友多强勸者, 遂黽勉入場屋, 不呈券而出. 有識者聞之, 皆以爲進取不苟, 有古人風. 遺安翁時在鄕廬, 語其子曰: “某之會圍, 吾不甚喜也. 及聞其不呈券, 甚欣然也.” 盖先君兩場之魁, 皆遇然之得, 而及其偏被隆渥, 名聲益壯. 時議必欲於會圍援引之以爲功. 先君戒其或涉機也, 勇決如此云爾. 해석 庚寅, 赴監試, 俱魁初終場. 선군께서는 경인(1770)년에 감시에 응시해 모두 초종장에서 장원을 하셨다. 出榜之夕, 有特旨入侍卧內, 방이 붙던 날 저녁에 임금께선 寢殿으로 입시하라 명령을 내리고 使知申讀奏試券. 知申事에게 시권을 읽도록 하셨다. 上親叩書..
15. 과거급제엔 전혀 관심도 없어라 時先君文章之名, 已喧動一世, 每有科試, 主試者, 必欲援引. 先君微知其意, 或不赴, 或赴而不呈券. 一日在場屋, 漫筆畵古松老石, 一世傳笑其踈迂. 然盖示其不屑之意者. 해석 時先君文章之名, 已喧動一世, 당시 선군의 문장에 대한 명성이 이미 한 세상을 시끄럽게 할 정도로 유명해 每有科試, 主試者, 매번 과거시험이 있으면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 必欲援引. 반드시 끌어다 급제시키려 하였다. 先君微知其意, 或不赴, 선군께서는 은밀하게 그 뜻을 알아 혹은 시험장에 가질 않았고 或赴而不呈券. 혹은 가더라도 시권을 내지 않았다. 一日在場屋, 漫筆畵古松老石, 하루는 과거시험장에 있었는데 늙은 소나무와 묵은 바위를 일필휘지로 그리고 있었으니 一世傳笑其踈迂. 한 세상 사람들이 급제에 관심..
76. 연암의 시가 적은 이유 先君詩稿甚寡, 古今體共五十首. 古體則專學昌黎, 而奇嶮過之, 情境逼造, 而筆力不窮. 至於律絕諸體, 常病其拘束於聲律之間, 不可直寫胸中所欲言, 故往往一二句而止者, 有之. 李懋官『淸脾錄』稱: “燕岩文章玅天下. 而於詩獨矜愼, 不肯輕出, 如包龍圖之笑, 比河淸, 不得多見”云. 朴在先詩云: “從古文章恨橘鰣, 幾人看見燕岩詩? 優曇一現龍圖笑, 正是先生落筆時.” 해석 先君詩稿甚寡, 古今體共五十首. 선군의 시집은 매우 적어 고체시와 근체시 모두 합해 50수였다. 古體則專學昌黎, 而奇嶮過之,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를 배웠지만 기이하고 험한 것이 그를 넘어섰고 情境逼造, 而筆力不窮. 실정과 경치를 묘사함은 핍진하여 필력이 무궁무진했다. 至於律絕諸體, 常病其拘束於聲律之間, 율시와 절구의 모든 시체에 이..
1. 박지원의 문장관 先君之論文章也. 常以爲文無古無今, 不必模楷韓ㆍ歐, 步趣馬ㆍ班, 矜壯自大, 低視今人也. 惟自爲吾文而已. 擧耳目之所睹聞, 而無不能曲盡其形聲, 畢究其情狀, 則文之道極也. 又病吾東之士汨沒於功令之餘習, 綴拾陳談, 依樣畵葫, 而自附純質, 日就鹵莽也. 故曰: “法古者病泥跡, 刱新者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又曰: “苟得其理, 則家人常談, 猶列學官, 童謳里諺, 亦屬『爾雅』. 故文之不工, 非字之罪也. 彼評字句之雅俗, 論篇章之高下者, 譬如不勇之將, 心無定策, 猝然臨題, 屹如堅城. 其患常在於自迷蹊徑未得要領.” 又曰: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博, 旨意各殊. 故飛潛走躍, 或未著名; 山川草木, 必有秘靈; 朽壤蒸芝, 腐草化螢. 禮有訟, 樂有議. 書不..
3. 어디에도 쓸 데 없는 글 嘗言: “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哉?” 해석 嘗言: “不痛不癢, 句節汗漫,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가렵게 하지도 않고 구절마다 優游不斷, 將焉用哉?” 허황되며 우유부단하다면, 그런 글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인용 목차 연암의 글에 반하다 문체반정과 열하일기 순간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에 대해
34. 아버지의 세초된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 연암에 대한 세간의 평과 실질적인 모습 先君自少時, 頗有文酒跌蕩之事. 人或以喜繁華厭拘檢目之. 然天稟實澹泊於物, 最喜閑居靜坐, 究觀理致. 관조를 즐겨 수많은 작품을 남기다 其在燕峽也, 終日不下堂, 或遇物注目, 瞪默不言者移時. 嘗言: “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 毎臨溪坐石, 微吟緩步, 忽嗒然若忘也. 時有玅契, 必援筆箚記, 細書片紙, 充溢篋箱. 遂藏之溪堂, 曰: “他日更加攷檢, 有條貫然後可以成書.” 그 많던 작품들이 세초된 내역 後棄官入峽, 出而視之, 眼昏已甚, 不能察細字. 乃悵然發歎曰: “惜乎! 宦遊十數年, 便失一部佳書.” 已而又曰: “終歸無用, 徒亂人意.” 遂令洗草溪下. 嗟乎! 不肖輩, 時未侍側, 遂失檢拾焉. 해석 연암에 대한 세간의..
2. 돌베개 출판사와의 인연 실상 대학생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책은 거의 읽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공부 풍토 상 책읽기와 공부는 별개였고, 나 또한 그런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임용에 합격하겠다’는 만용과도 같던 꿈이 좌절된 후가 되어서야 드디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나의 역량을 키워야만 했고, 그 역량을 키우기 위해선 나보다 앞서서 산 선배들의 조언과 응원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책을 거의 읽지 않던 시기에도,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에도 나와 자주 마주쳐 공명하던 출판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출판사가 바로 ‘돌베개 출판사’다. 그 인연론을 한 번 들어보자. ▲ 파주에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