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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65. 소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65. 소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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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

()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

줄기만 남는.

 

소가구황(小家救荒)

첩의 집을 먹여 살리려고 토색질하는 것을 조롱하는 말이다.

 

소가복(蕭家僕)

소씨는 당 나라의 문인 소영사(蕭穎士)를 가리킨다. 10년 동안 그를 섬긴 종이 있었는데 모진 매를 자주 맞았다. 어떤 사람이 종에게 떠날 것을 권하자, 종은 내가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훌륭한 재주를 사랑해서이다.” 하고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신당서(新唐書)卷二百二 소영사전(蕭穎士傳)

 

소가부자(蘇家父子)

() 나라 때의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 노천(老泉)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동파(東坡)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문장이 뛰어나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었는데, 아버지 소순을 노소(老蘇), 형 소식을 대소(大蘇), 아우 소철을 소소(小蘇)라 하였으며, 삼부자를 합하여 삼소(三蘇), 형제를 이소(二蘇)라 칭하였다.

 

소가예아(蘇家譽兒)

소순(蘇洵)이 자기 아들 소식(蘇軾)과 철()의 이름을 정한 명이자설(名二子說), 그 두 아들의 좋은 점을 각기 거론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後集

 

소각(邵閣)

소옹(邵雍)의 인품을 표현한 말인 공중누각(空中樓閣)을 말한다. 정자(程子)가 소옹을 평하여 공중누각 같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명철(明澈)하고 통달(通達)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100

 

소간(宵旰)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 늦게 저녁을 먹는다(宵衣旰食)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말한다.

 

소갈사상여(消渴似相如)

당뇨병처럼 목이 말라서 물이 자꾸 먹히는 병. () 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사부(詞賦)에 뛰어난 문호인데, 일찍이 소갈병에 걸려 무릉(茂陵)에 살았다고 한다.

 

소갈위나군(消渴爲羅裙)

당뇨병(糖尿病)을 앓던 사마상여가 중랑장(中郞將)으로 사절(使節)을 받들고 고향인 서촉(西蜀) 임공(臨邛)에 와서 과부 미인인 탁문군(卓文君)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았던 것을 말한다. 나군(羅裙)은 부녀자의 화려한 비단 치마로, 탁문군을 가리킨다.

 

소갑(梳匣)

빗접.

 

소갑(素匣)

장식이 없는 상자이다.

 

소강(小康)

예전 하()나라의 왕이었다. 어려서 그의 아버지 상왕(相王)이 반역자인 예()라는 사람의 손에 죽고 왕위를 찬탈당하였는데, 소강이 커서 예를 잡아죽이고 나라를 중흥시켰다.

() 나라 임금 상()의 아들 이름인데, 한착(寒浞)을 멸망시켜 부왕(父王)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복구하였으므로, 보통 중흥(中興)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소강공(召康公)

소공(召公)으로서, 이름은 석()이고 강()은 시호(諡號)이다. () 나라 성왕(成王) 때 주공(周公)과 함께 삼공(三公)이 된 뒤 섬() 이서(以西) 지방을 주관하였다. 사기(史記)4

 

소강남(小江南)

순천(順天)에 있는 지명인데, 산수(山水)가 워낙 수려하여 이렇게 이름했다고 한다.

 

소강절(邵康節)

강절은 소옹(邵雍)의 시호이다.

 

소강호(小江湖)

강호 자연을 그린 그림을 주는 것을 작은 강호를 주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객반원계수추(騷客攀援桂樹秋)

가을철 산림(山林)의 정취가 시인 묵객이 유상(游賞)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말이다. () 나라 회남 소산왕(淮南小山王)의 유안(劉安)의 시 초은사(招隱士)계수나무 부여잡고 서성이며 머무르네[攀援桂枝兮聊淹留].”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소거(素車)

상사(喪事)에 사용하는 백토(白土)를 칠한 흰 수레. 흉사(凶事) 때 쓰는 수레로, 주례(周禮)에 의하면 졸곡(卒哭) 때 타는 수레라고 하였다.

 

소거(巢居)

새처럼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으로, 곧 미개인의 생활을 말한 것이다.

 

소거(素車)

친구의 장례에 감. 송장(送葬). 후한(後漢) 때 범식(范式)과 장소(張劭)가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장소가 범식의 꿈속에 나타나 자기의 죽음을 알리자 범식이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몰고 호곡하고 갔다. 그러나 장사 지낼 때까지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후한서(後漢書)81독행열전(獨行列傳)范式

 

소거괴일송(素車乖一送)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범식(范式)의 친구가 죽어 장례를 행할 때 상여가 움직이지 않다가, 소거(素車)에 백마(白馬)를 매고 범식이 찾아와 애도를 하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는 고사에서 연유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獨行 범식전(范式傳)

 

소거범장(素車范張)

소거는 흰 천을 씌운 수레이며, 범장(范張)은 후한(後漢) 때 사람인 범식(范式)과 장소(張劭)이다. 범식과 장소는 친하게 지냈는데, 장소가 죽어 장사 지낼 때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후한서(後漢書)81 독행열전(獨行列傳)范式

 

소겁(燒劫)

불교 용어로, 괴겁(壞劫) 즉 말세에 일어나는 큰 화재를 말한다.

 

소겁(小劫)

오랜 세월을 말하는데 불가와 도가의 말이 각기 다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큰 수재ㆍ화내ㆍ풍재(風災)를 모두 겪고 다시 인간이 생겨 순박해지는 것을 소겁이라 하며 이때마다 부처 하나가 나온다.” 하였다.

인간의 수명이 8만 살부터 1백 년마다 1살씩 줄어서 10세가 되는 기간, 또는 10세에서 1백 년마다 1살씩 늘어서 8만 살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소견(消遣)

근심 걱정 따위를 떨쳐버리다.

 

소결(素訣)

소왕(素王)의 비결(祕訣), 도덕경(道德經)를 말한다. 유가(儒家)에서는 공자(孔子)를 도가(道家)에서는 노자(老子)를 각각 소왕(素王)이라고 한다. 장자(莊子)天道 疏

 

소결청(疏決廳)

죄수가 적체되어 오래도록 처결되지 않는 폐단이 있으므로 중죄(重罪)로서 장기간 미결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청(). 당상(堂上)들이 사건을 분담하여 맡고 대신(大臣)이 그 일을 총괄하였다.

 

소경(少卿)

서한(西漢) 때 사람 이릉(李陵)의 자. 그는 농서(隴西)의 이름 있는 가문 출신으로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와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항복하자 무제가 그의 집안을 적몰시켰다.

 

소경(蘇卿)

()가 자경(子卿)소무(蘇武)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부절(符節)을 지니고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절조를 지키다가 19년만에야 귀국했던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이광전(李廣傳)

 

소경(疎磬)

이따금 들려오는 풍경소리. 희미해져가는 풍경소리.

 

소경뢰지상망(蘇瓊雷之相望)

송 철종(宋哲宗) 소성(紹聖) 연간에 소식(蘇軾)은 경주별가(瓊州別駕)로 폄척되고 그의 아우인 소철(蘇轍)은 뇌주(雷州)에 안치되었던 사실을 가리킨다.

 

소경백수우연옥(蘇卿白首憂燕獄)

소경은 자()가 자경(子卿)인 한() 나라의 충신 소무(蘇武)를 말한다. 소무가 젊은 나이로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온갖 고난을 겪고 나서 19년 만에 백발이 다 되어 돌아왔는데, 그의 아들인 원()과 안()이 연왕(燕王) 등의 모반 사건에 가담해 사형을 당하는 바람에, 갖은 핍박을 받고 끝내는 파면되었던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附 蘇武

 

소경분벽(素綆分碧)

소식(蘇軾)의 시에 대바구니에 나물 캐면 손톱 끝까지 향기롭고, 흰 밧줄로 퍼 담는 벽류(碧流) 은두레박이 얼 듯하네[筠藍擷翠爪甲香 素綆分碧銀缾凍].”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9 同正輔表兄遊白水山

 

소경설(蘇卿雪)

소경은 자()가 자경(子卿)인 한() 나라의 소무(蘇武)를 말한다. 무제(武帝)의 사신으로 흉노 땅에 갔다가 억류되어 온갖 고생을 다 하였는데, 땅속 움집에 갇혀 있을 적에 때마침 내리는 눈을 받아 먹고 담요를 씹어 먹으며 목숨을 유지하기도 했던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54 소무이광전(蘇建李廣傳)

 

소경장절심(蘇卿仗節心)

소무(蘇武)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

 

소경절(蘇卿節)

소경은 한 나라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지킨 소무(蘇武)를 가리킨다. 소무는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蘇武

 

소고(小姑)

남편의 서모(庶母), 또는 자매.

 

소고(小袴)

제주도(濟州島) 잠수(潛嫂)들이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는 물질할 때 입는 작업복. 조선 숙종(肅宗) 때 신광수(申光洙)석북집(石北集)(1840) 잠녀가(潛女歌)에는 소고(小袴)’라 하였는데 이는 작은 바지를 말한다. 또한 오기남(吳箕南)의 시 잠부(潛婦)에 잠수하는 부인들이 입은 옷을 달팽이잠방이[와곤(蝸裩)]’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다른 명칭들은 넓은 지역에 걸쳐 많은 사람이 입었다는 증거이다. 제주도 말인 잠녀(潛女)’,‘잠수(潛嫂)’이다. 이는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미역·소라·전복 등 해산물을 채취(採取)하는 제주 여성을 말한다. 1970년대까지 기록이나 실제 제주 전역에서도 주로 ’·‘()’라고 했다. 1702년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기록된 작업 장면이나, 실록(實錄) 및 개인문집 등 많은 자료에서도 잠녀로 불렸음이 입증되고 있다. 최근 연구보고서와 해녀연구(海女硏究)(1973) 등에서 해녀(海女)’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쓰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격하(格下)나 비하의 의미로 쓰였음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장에 가면 나이 들고, 경험이 많은 여자 어른[노고(老姑)]에게서 명백하게 입증된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 일인(日人)들이 낮춰 부르던 해녀를 관례(慣例)로 쓰고 있다. (출처한국민속대백과사전)

 

소고(召誥)

상서(尙書) 서주고문(西周古文)의 오고(五誥) 중 하나로 소공(召公)의 고()를 말한다.

 

소곡(巢谷)

열렬한 추종자(追從者)를 이른 것. 소곡은 송()의 미산(眉山) 사람.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이 유배를 당했을 때 걸어서 소철을 찾아보고 또 소식을 찾아보기 위해 해남(海南)으로 가다가 도중 신주(新州)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음. 송사(宋史)卷四百五十九

 

소공(蘇公)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지은 송()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공당(召公棠)

예전 주()나라 때에 소공이 행정을 잘 하여서 민심이 감복하였다. 그 가 지방을 순행할 때에 어떤 아가위 나무() 아래에서 쉬었는데, 백성들은 소공이 쉬던 나무라 하여 가지 하나 자르지 아니하고 잘 위하였다 한다.

 

소공수(蕭公綬)

소공(蕭公)은 전한(前漢)의 소육(蕭育), 소육은 친구 주박(朱博) 등과 절친한 사이로 서로 추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이보다 앞서 왕길(王吉)과 공우(貢禹)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장안(長安)에는 소주가 인끈을 매자 왕공이 갓을 새로 썼다[蕭朱結綬 王貢彈冠].” 하였다. 한서(漢書)』 「소망지전(蕭望之傳)

 

소관(蕭關)

중국 관중(關中)4() 가운데 하나로, 수자리 살러 간 변방 요새지를 말한다.

 

소관시(素冠詩)

시경(詩經)회풍(檜風)행여나 보았던가 흰 관을 쓴 상주의 파리한 얼굴을[庶見素冠兮 棘人欒欒兮]”이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인심이 박절해져서 부모를 위해 삼년상 입는 것을 길다고 없애 버린 세태를 풍자하여 부른 노래이다.

 

소광영절(笑狂纓絶)

소광(笑狂)은 웃는 미치광이란 뜻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순우곤(淳于髡)이 제왕(齊王)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기가 막혀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자 갓끈이 뚝 끊어졌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세상일이 어처구니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卷一百二十六 골계열전(滑稽列傳)

 

소굉전우(蕭宏錢愚)

육조(六朝) 때 양무제(梁武帝)의 아우 소굉(蕭宏)이 돈을 3()이나 모으고도 인색하여 쓰지 않으매, 무제의 아들 수()돈만 모으는 바보론(錢愚論)을 지어 기롱(譏弄)했다.

 

소교(素交)

지금까지 지녀 왔던 맑고 순결한 교유(交遊) 관계를 말한다.

 

소구(騷九)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지은 이소경(離騷經)구가(九歌)를 말한다.

 

소군소재(蕭君蕭齋)

소군(蕭君)은 남조 양()의 명필 소자운(蕭子雲)을 말한다. 양 무제(梁武帝)가 절을 지은 뒤 소자운에게 큰 글씨로 소() 자를 쓰게 하였는데, 이약(李約)이 이 글자를 매입(買入)한 뒤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는 이름을 소재(蕭齋)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당() 나라 장회관(張懷瓘)서단(書斷)에 전한다.

 

소군원(昭君怨)

소군(昭君)은 한 원제(漢元帝)의 궁녀인 왕장(王嬙)의 자.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 나라에 미인을 구하여 비()로 삼기를 청하므로 그녀를 보냈다. 원제는 후궁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볼 수 없어 화공을 시켜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살펴보고 총애하였다. 그래서 궁인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 잘 그리게 하였으나 소군만은 뇌물 주는 것을 즐겨하지 않아 총애를 받지 못했는데, 흉노로 떠날 때 불러 보니 후궁 가운데 용모가 으뜸이었다. 당 나라의 문인들이 그녀의 한을 기술하여 세상에 전해지는데 동방규(東方虯)의 소군원(昭君怨)이 유명하다. 소군의 한은, 한 나라가 당시 전성 시대로 훌륭한 무신들이 많았으니 흉노를 정벌했어야 할 것인데 하필 한낱 첩을 보내어 화친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서경잡기(西京雜記), 한서(漢書)卷九十四 흉노전(匈奴傳)

 

소궁소상(少宮少商)

거문고 음률의 명칭. 거문고는 원래 다섯 줄이었는데, 문왕(文王)이 두 줄을 더하여 소궁ㆍ소상이라 했다 한다.

 

소귀지아희(所貴知我希)

이 말은 노자(老子)70나를 아는 자가 드물고 나를 본받는 자도 적으니, 그러므로 성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속에는 보배로운 도를 품고 있는 것이다[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被褐懷玉].” 한 데서 온 말이다.

 

소규(蕭規)

소하(蕭何)의 법. () 나라 유방(劉邦)이 나라를 세웠을 때 소하가 재상이 되어 나라의 율령과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한 나라 법의 근간이 되었다.

 

소균(韶鈞)

()는 우순(虞舜)의 악()이요, ()은 진 조간자(趙簡子)가 꿈에 하늘에 올라가서 들었다는 균천악(鈞天樂)이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소귤(蘇橘)

한 문제(漢文帝) 때의 선인(仙人) 소선공(蘇仙公)이 승천(昇天)하기 전에 모친과 이별하면서, “내년에 전염병이 크게 번질 텐데 우물의 물 한 되와 귤 한 조각을 먹이면 치료할 수 있다.”는 비방(祕方)을 알려 주어, 백성을 구제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신선전(神仙傳)」 「소선공(蘇仙公)

 

소금(素琴)

무현금(無絃琴)이다. 도잠(陶潛)이 음성(音聲)은 알지 못하면서 소금(素琴) 한 장()을 가지고 있는데 줄이 없었다. 매양 술과 쾌적한 일이 있으면 문득 어루만져 희롱하여 그 뜻을 붙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

 

소금(素琴)

아무런 장식이 없는 거문고. 예기(禮記)』 「상복사제(喪服四制)대상(大祥) 날에 소금을 타서 백성들에게 슬픔에 마침이 있음을 알림으로써 절제(節制)한다.” 하였으며,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는 도잠이 소금 하나를 갖추어 두었으나 줄이 없었다.” 하였다.

 

소금(素衿)

타고난 본심(本心)을 말한다.

 

소금장(銷金帳)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장막, 즉 아름다운 장막이라는 뜻이다. () 나라 때 학사(學士) 도곡(陶穀)은 첩()이 있었는데, 이 첩이 본래는 태위(太尉) 당진(黨進)의 가희(家姬)였었다. 하루는 눈이 내리자 도곡이 설수(雪水)를 가져다가 차()를 끓이면서 첩을 돌아보고 당씨(黨氏) 집에도 이런 운치가 있는가?” 하니 첩이 저 추한 사람이 이런 운치야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소금장 밑에서 주연(酒宴) 베풀고 노래 부르며 양고기 안주에 좋은 술 마시는 것뿐이랍니다.” 하자 도곡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는 고사가 있다. 서언고사(書言故事)豪奢類

 

소기(蘇己)

주가 가장 사랑한 비()달기(妲己). 달기는 유소(有蘇) 나라의 여자였기에 소기라고 쓴 것이다.

 

소기비(小器非)

논어(論語)』 「팔일(八佾)관중의 그릇이 작구나[管仲之器小哉].”라고 한 공자의 비평이 실려 있다.

 

소난(小難)

난형난제(難兄難弟)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계씨(季氏)를 가리킨다.

 

소남(所南)

송말의 충신인 정사초(鄭思肖)의 자. 그는 원병(元兵)이 남쪽으로 내려오자 오하(吳下)에 은거하면서 종신토록 장가도 들지 않았으며, 생전에 자기 위패(位牌)를 만들어 대송불충불효정사초(大宋不忠不孝鄭思肖)’라고 써 놓았다 한다.

 

소남(召南)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 나라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면서 훌륭한 덕화(德化)를 입힘으로써 훌륭한 민요(民謠)들이 채집된 것이다.

 

소남당(召南棠)

시경(詩經)에 소남(召南) 감당(甘棠)편이 있는데, 소공(召公)이 지방에서 정치를 잘하였으므로,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자주 쉬던 감당(甘棠)나무를 베지 말자고 노래를 읊은 것이다.

 

소내(素柰)

하얀 능금꽃.

 

소내(苕水)

정약용(丁若鏞)의 출생지인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 소천(苕川).

 

소내한(蘇內翰)

한림학사(翰林學士) 소식(蘇軾)을 가리킨 것으로, 소식의 이충시(二蟲詩)그대는 수마아를 보지 못했나 흐르는 물을 걸음걸음 거슬러 오르되 큰 강은 날마다 동으로 천리를 흐르건만 이 벌레는 팔짝팔짝 뛰어 길이 여기에 있다오 그대는 안람퇴를 보지 못했나 폭풍을 따라 급히 나는데 바람 따라 한번 가면 어디에서 묵는지 바람맞으면 다시 쑥대밭으로 떨어진다오 두 벌레의 어리석고 지혜로움을 모두 헤아리지 못하니 강가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 없음을 한번 웃노라[君不見水馬兒 步步逆流水 大江東流日千里 此蟲趯趯長在此 君不見鷃濫堆 決起隨衝風 隨風一去宿何許 逆風還落蓬蒿中 二蟲愚智俱莫測 江邊一笑無人識].”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卷二十一

 

소녀(素女)

옛날 신녀(神女). 노래를 잘하였다고 한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배우기 어려우니 젊을 때에 학문에 힘을 써라.

 

소년행(少年行)

악부(樂府) 잡곡(雜曲)의 가사로, 흔히 소년의, 삶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며 호쾌한 기분에 맞춰 여행을 즐기는 일을 노래하는 글인데 여기서는 타향에서 풍경을 노래하는 시를 말한다.

 

소노의(小魯意)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가 노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太山)에 올라가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소단(蘇端)

두보(杜甫)와 친지였는데, 두보의 시에 우과소단(雨過蘇端)’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다.

 

소단(騷壇)

시단(詩壇)을 말한다.

 

소단조(燒丹竈)

신선되는 단약(丹藥)을 연()하여 만드는 것이다.

 

소단집이(騷壇執耳)

문단을 좌우하는 종장(宗匠)의 지위를 말한다.

 

소당(召棠)

시경(詩經)소남(召南)감당(甘棠)을 말한 것이다. () 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팥배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팥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고 감당지시(甘棠之詩)를 지어 기렸다. 후세에 선정(善政)을 비유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사기(史記)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인용: 嶺南歎(윤현)

 

소당(燒當)

() 나라 때 서강(西羌) 일파(一派)의 종호(種號)이다.

 

소대(昭代)

태평 성대. 나라를 밝게 다스리어 태평한 세상. / 인용: 昭代風謠序(오광운)

 

소대(蘇代)

전국시대(戰國時代) 낙양 사람. 소진의 동생으로서 소진처럼 또한 합종ㆍ연횡설을 배웠다. 처음에 연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크게 등용되기를 구하다가 자식을 제나에 인질로 맡기고 나중에 송으로 갔는데 송나라가 그를 극진히 대우하였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함에 소대가 편지를 보내 연나라 소왕을 설득하였더니 소왕이 좋다 여기고 소대와 더불어 제나라 칠 것을 도모하여 제나라를 격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제후들에게 합종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소씨의 종약을 으뜸으로 여기게 되었다. 소대 또한 이 일로 인해 제후들에게 이름이 나게 되었다. 사기(史記)

 

소대궁(昭臺宮)

() 나라 때의 궁전 이름인데, 일찍이 선제(宣帝)의 곽 황후(霍皇后)와 성제(成帝)의 허 황후(許皇后)가 모두 폐()해진 뒤에 거처하던 곳이다.

 

소동(小僮)

소시(小廝)와 같은 말로, ‘사환ㆍ사동ㆍ머슴애 심부름꾼 아이를 말한다. 옛날에 잡일을 맡아 보는 남자 아이이다. / 인용: 餓婦行(성간)

 

소동릉(召東陵)

동릉은 소평(召平)을 말한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동릉후는 진() 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잃게 되었고 따라서 생활이 가난하게 되어 장안성 동쪽에 나아가 외를 심었는데, 그 외의 맛이 매우 훌륭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다.” 하였다.

 

소동파(蘇東坡)

동파는 송()의 문장가 소식(蘇軾)의 호이다.

 

소두(小杜)

두목(杜牧)’을 지칭한다.

 

소두(梳頭)

머리를 빗다라는 뜻이다.

 

소두(召杜)

지방민이 태수의 선정을 칭찬한 말이다. 전한(前漢) 때의 소신신(召信臣)과 후한(後漢)의 두시(杜詩)가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지방민들에 의해 소부두모(召父杜母)라고까지 일컬어졌다. 한서(漢書)召信臣傳후한서(後漢書)』 「두시전(杜詩傳)

 

소두양주몽(小杜揚州夢)

소두는 곧 두목(杜牧)을 가리키는데, 두목이 일찍이 천하에 가장 번화한 양주에서 노닐었던 옛날을 회상한 시에 십년 만에 양주몽 한 번 깨니, 박명한 청루의 이름만 남았구나[十年一覺揚州夢 羸得靑樓薄倖名]” 하였다.

 

소랑(蘇娘)

() 나라 사람 사침(謝耽)의 첩인 소자궁(蘇紫藭)을 이르는데, 그가 사침을 사랑하나 가까이 할 길이 없자, 시아(侍兒)를 보내서 사침이 항상 입는 작은 적삼을 빌려다가 낮에는 이것을 속에 입고 밤에는 이것을 덮고 잤더니, 사침이 그 사실을 알고는 시를 부쳐 이르기를 소랑과 한번 작별한 후 꿈마저 드물었는데 푸른 적삼을 빌려가니 목마름이 위로되누나 만일 그윽한 정을 거듭 펴고자 한다면 응당 사랑의 옷을 지어주기 바란다오[蘇娘一別夢魂稀 來借靑衫慰渴飢 若使閑情重作賦 也應願作謝郞衣]” 했다고 한다.

 

소랑(蕭郞)

() 나라 때에 남자의 통칭(通稱)이다.

소씨의 남자.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을 가리키는데, 그는 유교와 도교에 정통하고 불전(佛典)에 매우 탐닉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 나라의 소자운(蕭子雲)을 가리키는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였다. 양 무제(梁武帝)가 절을 짓고서 소자운에게 명하여, 비백체(飛白體)로 소()자를 크게 쓰게 하였는데, 뒤에 절은 무너졌어도 이 글씨만은 남아 있었다 한다. 양서(梁書)卷三十五

 

소래산(蘇來山)

인천(仁川)의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인천의 진산(鎭山)이다.

 

소량주(小涼州)

사조(詞調)의 이름이다.

 

소려작거(燒廬作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대가(大駕)가 임진강 나루터에 당도했는데, 밤을 밝힐 불이 없어 인가에다 불을 지르고는 그 불빛을 이용하여 나루를 건넜다.

 

소련(燒煉)

단사(丹砂)를 아홉 번 단련하여 영단(靈丹)을 만드는 것이다.

 

소련(少連)

예기(禮記)』 「잡기(雜記)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 했는데, …… 동이의 아들이다.(少連大連善居喪 …… 東夷之子也)”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소렴(小帘)

()’은 주기(酒旗)로서 작은 술집을 말한다.

 

소렴운우(疎簾雲雨)

두보(杜甫)의 시에 楚江巫峽半雲雨 淸簞疏簾看奕棋라 하였다.

 

소령(小令)

사체(詞體)의 하나. 58자 이내의 사()를 소령이라 한다.

 

소로(邵老)

()의 소옹(邵雍). 역리(易理)에 정통하고, 자기 사는 집을 안락와(安樂窩), 자호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할 만큼 부귀공명을 초월하여 일생을 유유자적하게 살았음. 송사(宋史)卷四百二十七

 

소로(蕭露)

임금으로부터 잔치를 하사받은 것을 이른다. 옛날에 제후(諸侯)들이 주() 나라에 조회하자, 천자(天子)가 사랑과 은혜로써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연주한 악가(樂歌)시경(詩經)소아(小雅) 여소(蓼蕭)기다란 저 쑥에 이슬이 농후하게 떨어졌네[蓼彼蕭斯 零露濃濃].”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로와(邵老窩)

송 나라의 소옹(邵雍)인데, 그는 낙양에 살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기로 유명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강절(康節) 선생이라고 불렀다.

 

소륵(疏勒)

외로운 산성을 가리킨다. 동한(東漢)의 경공(耿恭)이 단약(單弱)한 병사로 소륵성(疏勒城)을 고수하면서 흉노의 수만 군사를 상대로 온갖 고초를 겪는 속에서 수년 동안이나 절의를 지키며 끝내 사명을 완수한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19 耿邯列傳 附 耿恭傳

 

소릉(昭陵)

당 태종(唐太宗)의 능() 이름이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여 평생에 익힌 나머지, 천하에 흩어진 진적을 모두 수집하여 비부(秘府)에 두고서 자기가 죽거든 순장(殉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그래서 난정첩(蘭亭帖)을 포함, 모든 명적이 소릉에 묻히게 되었다.

소릉은 단종(端宗)의 생묘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으로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뒤 세조(世祖)의 꿈에 나타나 질책하였다 하여 능을 발굴해서 물가에 이장(移葬)하였다.

 

소릉(少陵)

() 나라 두보(杜甫)의 별호이다. 소릉은 본래 한 선제(漢宣帝) 허후(許后)의 능인데 그 규모가 선제의 능보다 작았기 때문에 소릉이라고 한 것이다. 두보가 일찍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불렀다.

이가환(李家煥)을 가리킨다.

 

소릉간(少陵看)

두보(杜甫)의 소한식주중작시(小寒食舟中作詩)늘그막의 꽃구경은 안개 속에 보는 것 같네[老年花似霧中看].” 한 것을 가리킨다.

 

소릉남목(少陵楠木)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고, 남목은 두보의 시 楠木爲風雨所拔歎에 나오는 나무로 훌륭한 재목감이 비바람에 뽑힌 것을 슬퍼한 것인데, 자신의 신세를 비유하였다.

 

소릉사(召陵師)

() 나라 군사. 제 환공(齊桓公)이 초()를 정벌하고 군대를 소릉(召陵)에다 임시 주둔시켰었음. 춘추(春秋)僖公 四年

 

소릉탄유관(少陵歎儒冠)

소릉은 두보(杜甫)의 별호이다. 두보의 시 봉증위좌승장이십이운(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유관이 대부분 신세를 망치었네[儒冠多誤身].”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바른 길로 가는 선비를 조정에서 알아주지 않아 일생을 궁하게 사는 것을 탄식하는 뜻이다.

 

소리(素履)

꾸민 것이 없는 짚신이라는 뜻으로, 본분(本分)을 지키며 순박하고 청백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離卦)초구효(初九爻)꾸미지 않은 짚신을 신고 가니, 허물이 없으리라[素履往 無咎].”라는 말이 있다. / 유의어: 玄翁說(신흠)

선비가 신는 신은 흰 신이므로 선비 노릇하는 것이다.

 

소리(小李)

() 이사훈(李師訓)이 산수 화가로 유명했고, 그 아들 소도(昭道)도 산수를 잘 그렸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리(大李), 아들을 소리(小李)라 불렀다. 또 전촉(前蜀)의 산수 화가 이승(李昇)도 촉()의 산수를 그려 절묘했는데, () 이사훈(李師訓)의 필법을 얻고도 더 유려(流麗)했으므로 사람들이 소리장군(小李將軍)이라 불렀다

 

소리(疎籬)

엉성한 울타리.

 

소리시(蘇李詩)

() 나라 소무(蘇武)이릉(李陵)의 시.

 

소리장군(小李將軍)

당 나라 화가 이소도(李昭道)를 가리킨다. 그의 아버지 사훈(思訓)을 대리장군(大李將軍)이라 한 데서 나온 것이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외면으로는 웃으면서 온화한 척 하지만, 마음속에는 음흉하게 칼을 품고 있다.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지만 속에는 해칠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유의어: 구밀복검(口蜜腹劍)

 

소린병(少鄰並)

당 나라 가도(賈島)의 제이응유거시(題李凝幽居詩)한적한 생활이라 이웃집 적고, 오솔길 거친 동산 뻗어 있구나[閒居少鄰並 草徑入荒園].” 하였다.

 

소림면벽(少林面壁)

소림사는 중국 숭산(崇山)에 있는 절 이름이고, 면벽은 벽을 마주 대한다는 뜻이다. ()나라 때 인도의 중 달마(達磨)가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좌선(坐禪)한 끝에 도를 얻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고승전(高僧傳)

 

소림선(小林禪)

소림은 중국에 있는 소림사(小林寺)를 이르는데,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일찍이 여기에서 9년 동안 면벽 좌선(面壁坐禪)을 하였었다.

 

소림일지(巢林一枝)

새는 숲 속에 둥지를 틀어도 단 하나의 나뭇가지에 한할 뿐이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함 또는 작은 집에서 만족하게 삶을 비유

 

소마(疏麻)

과실의 일종으로 훌륭한 과일을 말한다. / 유의어: 신마(神麻).

 

소만(小蠻)

()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희(侍姬). 별명은 양지(楊枝). 허리가 가늘고 춤을 잘 추었다. 거이의 기생으로 번소는 노래를 잘하고, 소만은 춤을 잘했으므로 앵두 같은 번소의 입이요 버들 같은 소만의 허리로다.”라는 백거이의 시가 있다.

 

소만(小滿)

지방관의 3년 임기(任期)를 이른다. 본래는 지방관의 임기가 6년이었는데, 송 문제(宋文帝) , 지방관의 임기 6년은 너무 오랜 기간이라 하여 임기를 3년으로 개정하고 이를 소만이라고 하였다.

 

소만요(小蠻腰)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를 말한다. 소만은 본디 백거이(白居易)의 무기(舞妓) 이름으로, 백거이의 시에, “앵도는 번소의 입이고, 양류는 소만의 허리이네[櫻桃樊素口 楊柳小蠻腰].”하였다.

 

소망지(蕭望之)

한 선제(漢宣帝)때 태자태부(太子太傅).

 

소매희(笑罵嬉)

시문(詩文)에 뛰어남을 비유한 말로, 소식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글 짓는 것을 마치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하여……비록 즐기며 웃고 성내어 욕하는[嬉笑怒罵] 말이라도 모두 써서 읽을 수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卷三百三十八

 

소멱(素簚)

흰 개가죽으로 덮은 수레의 손잡이. 흰색은 흉색(凶色)으로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의 복장에 흔히 쓰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버림을 받아 쫓겨날 때 상인(喪人)으로 자처하여 흉복(凶服)을 차려 입는다고 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소멸천친(劭蔑天親)

소는 남조 송 문제(南朝宋文帝)의 장자(長子)로 일찍이 황태자에 책봉된 유소(劉劭)를 가리키는데, 뒤에 부왕(父王)을 무고(巫蠱)한 사실이 발각되어 폐태자(廢太子)가 되어서는 마침내 시역(弑逆)을 자행하여 스스로 즉위하였으나, 의병(義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사가(史家)에는 원흉(元凶)으로 지목되었다. 송서(宋書)卷九十九

 

소명태자(昭明太子)

양 무제의 장자로 이름은 통()이다.

 

소모(小毛)

모형의 훈고전을 전수한 한() 나라 때의 모장(毛萇)을 말한다.

 

소목(昭穆)

사당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1세를 중앙에, 2세ㆍ4세ㆍ6세는 소라 하여 왼편에, 3세ㆍ5세ㆍ7세는 목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7()가 되며, 제후는 2소ㆍ2목으로 5, 대부는 11목의 3묘가 된다. 중용(中庸)19

 

소무(蘇武)

()의 두릉(杜陵)사람. 한 무제(漢武帝)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절월(節鉞)을 갖고 흉노(匈奴)에게 사신 가 항복하라는 선우(單于)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선우로부터, 큰 움 속에다 유치해 두고 음식을 주지 않거나 북해(北海)로 옮겨 양()을 먹이게 하는 등 19년에 걸쳐 갖은 고초를 겪었으나 소무는 그때마다 모직물의 털을 뜯어 눈과 함께 씹어 먹거나 땅을 파 들쥐를 잡아먹는 등 모든 방법을 다 써가며 죽지 않고 한에서 가져간 절월이 다 닳도록 버티다가 소제(昭帝)가 즉위하여 흉노와 화친(和親)한 후 비로소 수염과 머리가 다 흰 몸으로 돌아왔음. 한서(漢書)』 「소무전(蘇建傳)

 

소무간양(蘇武看羊)

한 무제(漢武帝)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어 그들의 항복 권유에 굽히지 않으므로 끝내 북해(北海) 가에 안치되었는데, 흉노는 소무에게 그 곳에서 숫양[]를 기르게 하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한 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19년을 지낸 뒤, 한 소제(漢昭帝) 때에 흉노와 화친을 하게 되어, 한 나라에서 소무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자, 흉노는 거짓으로 소무가 죽었다고 핑계대었다. 그러자 뒤에 한 나라 사신이 흉노에 가서 한인(漢人) 상혜(常惠)의 계책에 따라, 흉노 선우(單于)에게 천자(天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러기를 잡았는데, 기러기의 발목에 비단에 쓴 편지(帛書)가 매여 있었는바, 그 내용은 곧 소무 등이 아무 택중(澤中)에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마침내 소무가 한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五十四

 

소무내이대무외(小無內而大無外)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고,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至小無內 至大無外].”는 말이 있다. 장자(莊子)』 「천하(天下)

 

소무서(蘇武書)

한 나라 무제(武帝)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굴하지 않고 북해(北海)에 구금된 지 19년이 되었다. 흉노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속였는데 본국에서 그것을 탐지해 알고 기러기 발에 글월을 매어 부쳐 소식을 통하여 왔고, 거짓말로 흉노를 힐책하여 돌려왔다.

 

소무설(蘇武雪)

소무(蘇武)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

 

소무이릉(蘇武李陵)

두 사람은 다 한 무제의 신하로, 소무(蘇武)는 흉노(匈奴)에게 사신갔다가 억류되었고, 이릉(李陵)은 흉노와 싸우다가 항복했는데, 두 사람은 흉노국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 뒤 한 소제(漢昭帝)가 흉노와 화친하자 소무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릉은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이별시를 지어 소무에게 주었다. “携手上河梁 游子暮何之 徘徊蹊路側 恨恨不得辭 晨風鳴北林 熠燿東南飛 浮雲日千里 安知我心悲소무도 이 능에게 다음과 같은 이별시를 지어 주었다. “雙鳧俱北飛 一鳧獨南翔 子當留斯舘 我當歸故鄕 一別如秦胡 會見何渠央 愴恨切中懷 不覺淚霑裳 願子長努力 言笑莫相忘이상 시는 오언시(五言詩)의 조종이 되었다 한다.

 

소무절(蘇武節)

소무(蘇武)처럼 강직하고 절조 있는 인물을 오랑캐 땅에 사신으로 보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약 19년 동안이나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한절(漢節)을 몸에 지니는 동안 절모(節旄)가 모두 너덜너덜해졌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한서(漢書)54

 

소무절모(蘇武節旄)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을 억류되어 있는 동안에 깃발이 다 모지라졌으며,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소무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한서(漢書)54 소무전(蘇建傳)

 

소무탈신기(小巫奪神氣)

미숙한 무당이 노련한 무당을 만나면 자신의 미숙함을 실망하여 띠를 뽑아(拔茅)버린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학문과 기예의 미숙한 자가 노련한 자를 보고는 자신에 대하여 실망감을 갖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소문(昭文)

거문고의 명수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소문(蘇文)

고구려(高句麗)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말한다.

 

소문(少文)

남조 송(南朝宋)의 은사(隱士)로 금()ㆍ서()ㆍ화()에 뛰어났던 종병(宗炳)의 자()이다. 노장학(老莊學)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형산(衡山)에 은거하면서 고조(高祖)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수를 좋아하여 승경(勝景)을 찾아다니다가 병으로 강릉(江陵)에 돌아와 누운 뒤 그동안 유람했던 곳의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 방 안에 걸어 놓고 감상했던 고사가 전한다. 송서(宋書)』 「종병전(宗炳傳)

 

소문(召文)

의성(義城)의 고호이다.

 

소문고금(昭文鼓琴)

마진(馬臻)의 시에, “마음껏 소문 거문고 두들기네[任鼓昭文琴].” 하였다.

 

소문금(昭文琴)

소문(昭文)의 거문고. 소문은 고대 중국의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제물론(齊物論)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웃는 집에 온갖 복이 온다.

 

소문불고금(昭文不鼓琴)

모든 것이 다 끝나 이미 체념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여기 소문(昭文)은 왕휘지(王徽之)인데, 휘지가 자기 아우 헌지(獻之)가 죽었을 때 곧바로 그의 영상(靈牀)에 앉아서 헌지의 거문고를 들고 뜯었으나 곡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휘지는 탄식을 하면서, “! 자경(子敬), 거문고도 사람 따라 가버렸구나.” 하고 이어 기절하였다고 한다. 진서(晉書)卷八十

 

소문장소(蘇門長嘯)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완적이 일찍이 소문산에서 손등(孫登)을 만나 신선 도술을 이야기했는데도 등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물러나왔다. 그런데 반쯤 내려오다가 휘파람 소리를 들으니 난봉(鸞鳳)의 소리와 같았다.” 하였다.

 

소문휴성(昭文虧成)

휴성(虧成)은 결함과 완전, 성공과 실패를 뜻하는 말로, 세상 일에 손을 대면 결함이 생기고 아예 손을 대지 않으면 완전해진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가야금의 명인 소문(昭文)이 연주를 하면 성()과 휴()가 있고, 연주를 하지 않으면 성과 휴가 아예 없어진다.” 하였다.

 

소미(少微)

소미성은 처사(處士)의 위치에 해당한 별로서 일명 처사성(處士星)이라고도 한다. 회계(會稽)의 사부(謝敷)가 약야산(若耶山)에 은거(隱居)하는데 홀연히 달이 소미성을 범하였다. 때에 대규(戴逵)의 이름이 사부(謝敷)보다 더 알려졌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대규가 죽을 징조가 아닌가?” 하였는데 조금 뒤에 사부가 죽었다. 그리하여 회계 인사(人士)들이 오중(吳中) 사람들을 조롱하기를, “오중의 고사(高士)는 죽기를 구하여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 나라 때에 임금으로부터 소미선생(少微先生)이란 호칭을 하사받은 처사(處士) 강지(江贄)를 이르는데, 전하여 은거하는 처사를 말한다.

 

소미서(少微書)

소미는 송() 나라 때 처사(處士)로서 소미선생(少微先生)이란 호()를 하사받은 강지(江贄)를 말하고, 책은 그가 저술한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가리킨다.

 

소미숙사(少微塾史)

소미는 송() 나라 때의 은사 강지(江贄)의 호이고, 역사책이란 바로 그가 저술한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가리킨다.

 

소미우(燒尾牛)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전단(田單)이 외로이 즉묵성을 지키고 있다가, 천여 마리의 소에 붉은 옷을 입히고 뿔에 칼날을 매단 뒤, 소 꼬리에 갈대를 묶어 불을 붙여서 성 밖으로 내몰아 연() 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한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82 전단열전(田單列傳)

 

소미정광운(少微精光隕)

처사(處士)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소미는 별 이름으로, 이 별이 처사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한다.

 

소미지급(燒眉之急)

눈썹이 (불이 붙어) 타 들어가는 듯한 위급한 상황을 말한다.

 

소미회(燒尾會)

새로 임명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선배들에게 주식(酒食)을 한턱내는 모임을 말한다. 이 자리에서 상대별곡(霜臺別曲)을 가창(歌唱)하고 계축(契軸)을 만들어 제원(諸員)의 성명을 기록하고 나면, 비로소 허참(許參)을 하던 사헌부 내의 불문율(不文律)이었음. 꼬리떼기 모이다.

 

소반(蔬飯)

변변하지 못한 음식. 고기 반찬이 없는 밥.

 

소발(召茇)

소공(召公)이 임시 머문 집. 문왕 때에 주공은 안에서 일을 하고 소공은 밖에서 일을 하며 문왕의 덕화를 펴게 했다. 그래서 소공이 임시 쉬어간 곳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시가 있다. 시경(詩經)소남(召南) 감당(甘棠)

 

소백(召伯)

본시 연() 나라에 처음 봉한 소공(召公)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의 자손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연소왕(燕昭王)을 말하였다.

 

소백당(召伯棠)

소백의 감당(甘棠)나무. () 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순행(巡行)하던 중 마침 농번기를 맞자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감당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등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감당나무를 베지 않고 기념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시경(詩經)소남(召南) 감당(甘棠)

 

소백온(邵伯溫)

송 휘종(宋徽宗) 때 사람. 소옹(邵雍)의 아들로 자는 자문(子文). 저서에는 역변혹(易辨惑)ㆍ하남집(河南集)ㆍ견문록(見聞錄) 등이 있다.

 

소범(小范)

() 나라 때 범옹(范雍)을 대범(大范)이라 일컫는 데에 대하여 범중엄(范仲淹)을 일컬은 말인데, 범중엄(范仲淹)이 일찍이 서하(西夏) 지역을 수어(守禦)할 적에 하인(夏人)들이 말하기를 소범로자(小范老子)는 가슴속에 수만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으므로, 속일 수 있는 대범로자(大范老子)와 비할 바가 아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범흉(小范胸)

소범(小范)은 송() 나라 때 범옹(范雍)을 대범(大范)이라고 한 데 대하여 범중엄(范仲淹)을 일컫는 말인데, 범중엄(范仲淹)이 수년 동안 변방을 지킬 적에 특히 하인(夏人)들이 서로 경계하여 침범하지 않으면서 소범로자(小范老子)의 가슴속에는 수만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卷三百十四

 

소별(小別)

호북성(湖北星)에 있는 산 이름이다.

 

소보(小保)

당 나라 설소보(薛小保)는 학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다. 두보(杜甫)가 그 그림을 두고 시를 지었다.

 

소보(巢父)

() 임금 때의 고사(高士). 요 임금이 천하(天下)를 양여(讓與)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산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 나라 때의 공소보(孔巢父)를 말하는데, 공소보는 벼슬길에 들어갔다가 뒤에 이회광(李懷光)의 반군(叛軍)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서(唐書)卷一百六十三

 

소보세이(巢父洗耳)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사양하였더니 허유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영수(穎水)에 귀를 씻었다. 소보(巢父)는 허유가 귀 씻은 물이 더럽다고 송아지를 상류(上流)에 몰고 가서 물을 먹이었다.

 

소본렴(篠本廉)

자는 자온(子溫), 호는 신재(新齋)로 강호 사람인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소봉(素封)

벼슬 없이 받은 봉작. 즉 벼슬을 않고서도 전원(田園)을 즐기면서 부()를 누리면 결과적으로 벼슬하여 봉군(封君)이 된 자와 같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화식전(貨殖傳)

 

소봉(召封)

()을 이른다. 연 나라는 맨 처음 주()의 소공(召公)을 봉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소부(疏附)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대아(大雅) (綿)

 

소부(少府)

천자의 사부(私府)에 공양(供養)하는 것을 관장하는 관청 이름이다.

소부감(小府監) 혹은 소부시(小府寺)의 준말로, 내부(內府)를 말한다.

 

소부두모(召父杜母)

전한(前漢)의 소신신과 후한(後漢)의 두시(杜詩)가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다 같이 덕정(德政)을 베풀었으므로 남양 백성들이 앞에는 소부가 있고 뒤에는 두모가 있다[前有召父 後有杜母].”라고 칭송한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89 순리전(循吏傳)소신신(召信臣), 후한서(後漢書)31 두시열전(杜詩列傳)/ 인용: 聞隣家哭(송순)

 

소부귀녕타녀교(少婦歸寧奼女嬌)

부인을 쫓아내고 기생을 집 안에 들여왔다는 말이다. 귀녕(歸寧)은 보통 부인이 친정 집에 가서 문안하는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영원히 모가(母家)로 돌아갔다는 의미의 대귀(大歸)의 뜻으로서 출처(出妻)를 의미한다. 타녀(奼女), 동한(東漢) 환제(桓帝) 때에 유행한 하간 땅 타녀는 어찌나 돈을 잘 세는지[河間奼女工數錢]”라는 동요에서 기인하며, 뒤에 가녀(歌女)나 창녀(娼女)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참고로 남조 양(南朝梁) 소강(蕭綱)의 대제(大堤) 시에 길쌈 잘 하는 아내를 몰아내고, 돈 잘 세는 요망한 계집 들여왔네[出妻工織素 妖姬悽數錢].”라는 표현이 있다.

 

소부환경경(蘇婦喚卿卿)

소부는 진() 나라 때의 재상 왕융(王戎)의 부인을 가리킨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경경(卿卿)은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진 나라 왕융의 아내가 왕융을 자네()라고 부르자, 왕융이 말하기를, “부인이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不敬)스러우니,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자네를 친하고 자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네를 자네라고 부르는 것이니, 내가 자네를 자네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자네를 자네라고 부르겠는가[親卿愛卿 是以卿卿 我不卿卿 誰當卿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불(燒佛)

중국의 고승(高僧) 단하(丹霞) 천연(天然)이 혜림사(慧林寺)에 이르렀을 때 마침 큰 추위를 만났다. 그가 법당에 들어가보니, 부처가 목불(木佛)이므로, 이를 도끼로 쪼개서 불을 놓고 있자, 그 절의 주인이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힐문하니, 단하가 막대기로 재를 뒤적이면서 석가(釋迦)의 몸은 화장하여 많은 사리(舍利)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에게서 사리를 받으려 하오.” 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하니, 단하가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님이오?”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소비(梳篦)

머리를 빗는 빗과 머리에 가르마를 타는 빗치개를 이른다.

 

소비(消髀)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유비(劉備)가 말하기를 내가 항상 안장을 떠나지 않아 볼기살이 다 빠졌는데 지금은 다시 타지 않으니 볼기에 살이 난다.’ 했다.” 하였다.

 

소사(少師)

관직 이름으로 삼공(三公)을 보좌하는 삼고(三孤)의 하나이다. / 인용: 無命辯(홍석주)

 

소사(所思)

그리운 사람. 산귀가 그리는 사람.

 

소사(蕭寺)

남북조 시대 양() 나라 때에 절을 많이 이룩하였으므로, 양 나라 황제의 성()인 소()를 붙여서 소사(蕭寺)라고 하게 되었다.

 

소사(素沙)

지금의 평택군 진위면(振威面).

 

소사(蕭史)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목공(秦穆公) 때의 피리의 명인으로, 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결혼하여 봉대(鳳臺)에서 살다가 몇 년 후에 봉황을 따라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열산전(列仙傳)

 

소사루(蕭史樓)

진 목공(秦穆公) 때 소사(蕭史)가 퉁소를 매우 잘 불었는데, 목공의 딸 농옥(弄玉)이 소사를 좋아하므로 목공이 농옥을 소사에게 시집보내고 봉루(鳳樓)를 지어 주어 둘이 함께 살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소사명(少司命)

아이들의 운명을 맡은 신으로 정의로움을 담당한다.

 

소사변(素絲變)

춘추시대(春秋時代) 묵적(墨翟)이 흰 실은 물들임에 따라서 황색으로도 흑색으로도 변할 수 있듯이 인간의 성품도 환경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다 하여, 이를 슬피 여겨 울었던 데서 온 말이다.

 

소사비(素絲悲)

옛날에 묵적(墨翟)가 흰 실을 보고는 그것이 물들이기에 따라서 노랗게 될 수도 있고 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

 

소사전(素沙戰)

선조 30, 직산(稷山)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왜장(倭將) 흑전장정(黑田長政)의 군대를 대파한 싸움으로, 평양(平壤), 행주(幸州)와 더불어 왜란(倭亂) 육전(陸戰) 삼대첩(三大捷)의 하나로 꼽힌다. 95일 새벽 명 나라의 부총병 해생(解生) 등이 왜군을 만나 하루에 여섯 번 회전(會戰)하여 모두 전승을 거두었고, 다음 날인 6일에도 전세를 만회하려고 달려든 왜군을 재차 대파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17 소사지첩(素沙之捷)

 

소삭(銷鑠)

마르다. 쇠하다. 파리해지다.

 

소산(小山)

() 나라 때 회남왕 안(淮南王安)을 사모하여 따르던 은사(隱士)들을 가리킨다. 초사(楚辭)회남소산(淮南小山) 초은사(招隱士)무덕무덕 계수나무 그윽한 산속(桂樹叢生兮山之幽)”이라는 구절이 있다. 본래는 회남왕(淮南王) 문객들의 문체를 소산(小山)과 대산(大山)으로 분류하였으나, 나중에는 산을 읊을 때의 표현으로도 곧잘 사용하게 되었다.

 

소산곡(小山曲)

()의 회남왕 안(淮南王安)의 노래. 회남왕은 자가 소산(小山)인데,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하여 당시 방사(方士)들과 어울려 놀다가 뒤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그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소산사(小山辭)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문하(門下)의 대산(大山)ㆍ소산(小山) 등의 무리들이 초은사(招隱辭)를 지었는데, 산중에 숨어사는 선비더러 세상에 나오라고 부른 것이다.

 

소산송계감초은(小山松桂堪招隱)()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불러모은 시인 묵객들 가운데 이른바 소산(小山)의 무리가 굴원(屈原)을 애도하며 지은 시 초은사(招隱士)의 첫머리에 계수나무 울창한 그윽한 숲 속[桂樹叢生兮山之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소산옹(笑筭甕)

망령된 계산. 옛날 가난한 옹기 장사가 옹기 속에서 자며 꿈속에 부자가 되어 기뻐하다 옹기가 깨졌다는 고사가 있다.

 

소산은(小山隱)

세속을 피해 산림에 은거하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한() 나라 회남 소산(淮南小山)이 초() 나라 굴원(屈原)을 추모하여 지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산초(小山招)

() 나라 때 회남소산왕(淮南小山王)이 박학하고 성품이 아담하고 또 옛 것을 좋아하여 천하의 은사(隱士)들을 불러모았던 데서 온 말이다.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

 

소삼(櫹槮)

잎이 지고 가지만 길게 있는 것.

 

소상(小祥)

1년을 소상이라 하고 또 1년이 지나면 대상이라 한다[朞而小祥, 又朞而大祥. 儀禮]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소상(蘇床)

() 소식(蘇軾)이 아우 철()에게 부치는 시(), “밤 깊어 꿈의 혼이 먼저 날아가느니, 풍우에 상을 대하여 새벽 종을 들으리[夜深魂夢先飛去 風雨對床聞曉鍾].”란 구절이 있다.

 

소상(瀟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 임금을 사모하며 흘린 눈물이 아롱져 대나무 무늬로 새겨졌다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을 말한다.

 

소상강(瀟湘江)

중국의 상강(湘江)을 가리킨다. 그 강물이 깊고 맑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상문묵(蕭相文墨)

한 고조(漢高祖) 5년에 천하를 완전히 평정하고 논공행봉(論功行封)을 할 적에, 고조가 소하(蕭何)의 공이 가장 크다고 여겨 그를 찬후(鄼侯)에 봉하고 식읍(食邑)을 가장 많이 떼 주자, 다른 공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들은 몸소 갑옷을 입고 창ㆍ칼을 쥐고 많게는 백여 전(), 적게는 수십전을 치렀는데, 지금 소하는 한남(汗馬)의 노고는 겪은 적이 없이 한갓 문묵(文墨)을 가지고 논의만 했을 뿐이요 싸움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신들의 위에 두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불만스럽게 여겼던 데서 온 말이 다. 사기(史記)卷五十三

 

소상반죽(瀟湘班竹)

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서 나는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 전설에 의하면 순() 임금이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죽은 뒤 그의 두 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사모하는 정을 억누르지 못해 서로 통곡하면서 상강(湘江)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 위에 떨어지면서 얼룩이 져 소상반죽(瀟湘班竹)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술이기(述異記)

 

소상위가(蕭相爲家)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소하(蕭何)를 말한다. 한서(漢書)』 「소하열전(蕭何列傳)에 전답(田畓)과 저택을 사되 반드시 궁벽한 시골에다 사고, 담장과 집을 꾸미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후세에 나의 자손이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나 귀족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소상일안(瀟湘一岸)

소상강(瀟湘江) 근처에는 반죽(斑竹)이 나는데, 옛날 요() 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 임금의 비()가 되었다가 순 임금이 돌아가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피눈물을 뿌린 자국이 반죽으로 화했다는 전설이 있다.

 

소상장(瀟湘丈)

소상강에는 예로부터 반죽(斑竹)이 유명하므로, 즉 대를 미화(美化)하여 일컬은 말이다

 

소상환패(瀟湘環佩)

() 나라 정교보(鄭交甫)가 남쪽 초() 나라 지방의 소상강 가를 거닐다가 신녀(神女)인 강비(江妃)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신녀가 차고 있던 패옥(環佩)를 풀어 정교보에게 신표(信標)로 주고 떠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문선(文選)곽박(郭璞), 江賦

 

소상후어(蕭相後語)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담장과 집을 수리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뒤에 자손이 어질면 나의 검약함을 배울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勢家)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소서(素書)

고시(古詩)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에서 나온 것이다.

() 나라 때 신인(神人)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비결(秘決)이다.

 

소서(小序)

자하(子夏)가 지었다는 시경의 각 편(各篇) 첫머리에 서경(書經)와 같이 쓰여 있는 서문을 대서(大序)와 소서로 나눈 것을 이른다.

 

소선(小鮮)

노자(老子)60큰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치 작은 생선을 삶듯이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어야 한다[治大國 若烹小鮮]” 한 데서 온 말이다.

 

소선(疎仙)

호가 소암(疎菴)이었던 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다.

 

소선(蘇仙)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이 7월 기망(旣望)에 적벽(赤壁) 아래에서 배를 띄우고 놀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전적벽부(前赤壁賦)

 

소선적벽동소성(蘇仙赤壁洞簫聲)

소선은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소동파가 적벽강(赤壁江)에서 배를 타고 놀 때 퉁소를 부는 자가 있었는데, 소동파가 이를 아주 좋아하였다. 전적벽부(前赤壁賦)

 

소선학(蘇仙鶴)

소동파(蘇東坡)후적벽부(後赤壁賦)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다 쓴 것이다. 소동파가 적벽에서 놀 때 큰 학이 한 마리 날아와 뱃전을 스치고 지나갔었는데, 그날 밤 꿈에 한 도사가 찾아와 읍을 하며 인사하기에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으며, 이윽고 소동파가 정체를 알아차리고 어젯밤의 그 학이 아니냐고 하니 도사가 돌아보며 웃었다 한다.

 

소설암(小雪庵)

국사 보우가 우거하고 있던 미원현에 있는 암자.

 

소성망기미(韶聲忘嗜味)

소악은 순() 임금의 음악. 논어(論語)』 「술이(述而)공자가 제()에서 소악을 듣고는 고기 맛조차 잊어버리고 이처럼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했다.” 하였다.

 

소성재동(小星在東)

시경(詩經)희미한 저 작은 별, 셋 그리고 다섯 동천에 있도다[嘒彼小星 三五在東].”를 인용한 것으로서, 후궁이 임금의 사랑을 받아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초저녁부터 임금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소남(召南) 소성(小星)

 

소소(小小)

극히 작음, 나이가 어림

 

소소(所所)

나무 베는 소리, 곳곳, 여기저기

 

소소(悄悄)

모습과 소리가 몹시 경쾌하다[形容聲音很輕]’는 뜻이다.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소소(蘇小)

남송(南宋) 때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이름인데, 그의 묘()가 서호(西湖)의 서쪽 냉교(冷橋) 곁에 있다. 전하여 기예를 가진 기녀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소소소(蘇小小)라고도 한다.

 

소소(蕭蕭)

바람이 나무를 스치며 나는 소리를 말한다. 김시습(金時習)조이조수(嘲二釣叟)에서 바람과 비가 소소하게 낚시터를 휩쓰는데[風雨蕭蕭拂釣磯].”라 했다.

쓸쓸하다하다는 뜻이다. 윤계선(尹繼善)선연동(嬋娟洞)에서 가시나무 쓸쓸히 무덤 문을 에워쌌구나[荊棘蕭蕭擁墓門].”라고 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다라는 뜻이다. 권필(權韠)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에서 빈 산 나뭇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空山木落雨蕭蕭].”라고 했다.

말이 히잉히잉 울다는 뜻이다. 두보(杜甫)병거행(兵車行)수레 삐걱삐걱, 말은 히힝히힝[車轔轔 馬蕭蕭이라고 했다.

우수수 낙엽이 진다라는 뜻이다. 정사룡(鄭士龍)유풍악(遊楓嶽)에서 우수수 지던 낙엽이 나그네의 옷을 치네[蕭蕭落葉打秋衣].”이라고 했고 정철(鄭澈)산사야음(山寺夜吟)에서 우수수 낙엽소리를 착각하여 가랑비 소리라 여겼지[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이라 했다.

 

소소(慅慅)

불안한 모양

 

소소(昭昭)

빛나다. 밝다. 밝은 해.

 

소소(簫韶)

() 임금의 음악 이름으로, 아름답고 묘한 선악(仙樂)을 지칭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 “소소(簫韶)가 구성(九成)이 되자 봉황이 와서 축의하였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하였다.

 

소소(少少)

조금 약간

 

소소(笑笑)

화죽(畵竹)의 명가인 송() 나라 문동(文同)의 호이다.

 

소소구성봉래상(韶簫九成鳳來翔)

() 임금은 덕이 높아 나쁜 사람이 감화되고 짐승들도 즐거워했다는 뜻, 소소(韶簫)는 순 임금의 음악. 순 임금 때에 삼묘(三苗)라는 만족(蠻族)이 있었는데 완악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순 임금은 () 임금을 보내어 정벌하였으나 이들은 계속 복종하지 않자, 우 임금은 회군(回軍)하였다. 순 임금은 더욱 문덕(文德)을 닦았더니, 그들은 마침내 감화되어 항복하였으며, 또한 덕이 높아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한다. 서경(書經)大禹謨 익직(益稷)

 

소소단원악(蘇嘯但阮愕)

진서(晉書)완적전(院籍傳)완적이 일찍이 소문산에 올라 손등(孫登)을 만났다. 신선술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손등은 듣지 않고 가면서 휘파람을 부니 마치 난붕새 소리가 암곡에 울리는 듯하였다.” 하였다.

 

소소문(嘯蘇門)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완적(阮籍)은 소문산(蘇門山)에서 은자(隱者) 손등(孫登)을 만나 선술(仙術)을 물었으나 손등은 대답하지 않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는데, 마치 난봉(鸞鳳) 소리와 같은 음향이 온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한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소소봉래(簫韶鳳來)

소소금적막(簫韶今寂寞). 언제나 한 번 봉황이 이르러 올꼬. 서경(書經)』 「익직(益稷)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새가 이르러 왔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한 데서 온 말인데, 소소는 바로 순()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소소성(蘇韶成)

소소(蘇韶)는 순()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다는 말은 곧 음악 연주를 마치는 것을 말한다.

 

소소육미도불관(簫韶肉味都不管)

마음이 다른 곳에 있어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관심이 가지 않음. 공자(孔子)는 제()에 있으면서 순()의 악()인 소()를 듣고는 너무 심취가 되어 석 달을 고기맛을 몰랐다는 것을 원용하여 한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

 

소손(素飡)

() 없이 거저 밥을 먹는 일. ‘() 없이 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말한다.

 

소송부창주(蘇頌赴滄州)

반대파에 밀려 임금이 본의 아니게 외지로 내보냄. 소송(蘇頌)은 부필(富弼)로부터 고군자(古君子)라는 칭송을 받아온 사람인데, 그가 창주 지사(滄州知事)로 부임하게 되어 하직차 황제를 배알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짐이 경을 알고 지낸 지는 오래이나 경을 탁용하려고만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겨 탁용을 못하게 되니 그도 아마 운명인가 보다. 앞으로 세월이 가면 경이 곧다는 것이 자연 밝혀질 것일세.” 하였다고 한다. 송사(宋史)卷三百四十

 

소수수(小垂手)

의고악부(擬古樂府)이다. 소수수는 대수수(大垂手)와 함께 춤을 출 때 손을 놀리는 동작에서 취해 온 것이다.

 

소순(燒筍)

소동파(蘇東坡)가 일찍이 유기지(劉器之)를 요청하여 옥판화상(玉版和尙)에게 동참(同參)하자고 하니 기지는 혼연히 따라갔다. 염경사(廉景寺)에 이르러 죽순을 삶아서 먹는데 맛이 매우 좋아 기지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동파가 이것은 옥판이다. 이 노사(老師)가 설법을 잘하므로 그대로 하여금 선열(禪悅)의 맛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소순(蔬筍)

채소나 죽순만 먹고 육식(肉食)을 하지 않는 중의 맑은 풍기(風氣)를 말한다.

 

소순기(蔬荀氣)

방악(方岳)의 시에, “소순의 기가 있어 시는 더욱 좋아지고, 비단옷 입은 사람 없어 산은 다시 그윽하이[有蔬荀氣詩逾好 無綺羅人山更幽].”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탁한 육식의 맛이 없다는 뜻이다.

 

소순흠(蘇舜欽)

() 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미(子美). 당시 학자들은 시를 짓는데 모두 대우(對偶)하기를 좋아했으나, 순흠은 그것을 병되게 여겨 고문(古文)을 숭상하였다.

 

소슬(蕭瑟)

가을 바람이 쓸쓸히 부는 모양.

 

소슬요락(蕭瑟搖落)

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을 말한다. 초사(楚辭)』 「구변(九辯)悲哉 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소슬추(蕭瑟秋)

초사(楚辭)구변(九辨)悲哉 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구절이 있다.

 

소승(小乘)

불교(佛敎)의 두 가지 큰 교파 중 하나. 대승(大乘)의 교리가 고상하고 심원한 데에 비하면 소승의 교리는 비근하여 이해하기가 쉽다고 한다.

 

소승(蘇僧)일본의 중 현소(玄蘇)를 가리킨다.

 

소식담수월(蘇軾談水月)

소식(蘇軾)46세 때인 송 신종(宋神宗) 원풍(元豐) 5(1082)가을 보름날 밤에 적벽강(赤壁江)에서 배를 타고 놀면서 지은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강물은 이처럼 흘러가지만 다시 계속 흘러가고 둥근달은 기울어졌다가 다시 둥글어지니,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온 천지에 한 순간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큰 안목으로 보면 만물과 내 자신은 하나이다.” 하였고, 이어 모든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어 내 것이 아닌 것은 함부로 가질 수 없으나 강상의 맑은 바람과 산 위의 밝은 달은 끝없이 쏘이고 쳐다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하였다.

 

소심익익(小心翼翼)

마음을 작게 하고 공경한다는 말로, ‘대단히 조심하고 삼가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소씨구의(蘇氏舊意)

() 나라 때 장군(將軍) 두도(竇滔)가 사막(沙漠)에 강제로 옮겨지자, 그의 아내 소약란(蘇若蘭)이 비단을 짜면서 거기에 즉 전후 좌우로 아무렇게 보아도 다 말이 되는 매우 처절한 내용의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지어 넣어서 남편에게 보냈던 데서 온 말인데, 그 시는 모두 840()로 되었다고 한다. 진서(晉書)』 「두도처소씨전(竇滔妻蘇氏傳)

 

소씨제(蘇氏弟)

소식(蘇軾)의 아우 소철(蘇轍)을 말한다. 소철이 소년 시절 공부하는 동안 자기 형 소식을 따라 독서하면서 하루도 서로 떨어져 있는 날이 없었는데, 그 후 벼슬길에 오르면서는 형제가 함께 있는 날이 적었다. 언젠가 위응물(韋應物)의 시, “누가 알리 비 오고 바람 부는 밤에, 또다시 침상을 마주하고 자련지[那知風雨夜 復此對牀眠].”를 읽고서는 서글픈 생각을 금치 못하고, 일찍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지내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소아(素娥)

서왕모가 남편에게 준 불사약(不死藥)을 훔쳐 먹고 달 속으로 도망가 달의 선녀가 되었다는 항아(姮娥)를 가리킨다.

 

소아난기강(小兒亂紀綱)

소아는 이보국(李輔國)을 가리키며, 서내(西內)는 태극궁(太極宮)을 말하고 고 장군(高將軍)은 고역사(高力士)를 가리킨다. 상황(上皇)인 현종(玄宗)이 파촉에서 돌아와 흥경궁(興慶宮)에 거처했으며 장경루(長慶樓)에 자주 나오니 부로(父老)들은 그 앞을 지나다가 우러러보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숙종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이보국은 장후(張后)와 짜고는 황제의 명령이라 사칭한 다음, 상황을 대내로 옮기고 상황의 심복인 고역사를 무주(巫州)로 귀양보냈으며, 진현례(陳玄禮)를 강제로 치사(致仕)시키니, 상황은 기뻐하지 않아 이때문에 고기도 먹지 않고 벽곡(辟穀)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신당서(新唐書)』 「숙종본기(肅宗本紀)

 

소아욕투비(宵雅欲投畀)

참소를 입어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이 참언한 자를 지극히 미워하면서 이리와 호랑이, 북쪽의 불모지, 하느님에게 던져주고 싶다고 탄식한 노래를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항백(巷伯)

 

소아유유음(宵雅有遺音)

시경(詩經)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를 말한다. 10월에 들어서서 일식(日蝕)과 천둥 번개가 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은 군신(君臣) 상하가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서 결과적으로 백성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소아치(小兒癡)

동방삭(東方朔)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天桃)를 도둑질하였다 한다.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의 호로, ()는 무숙(茂叔)이다.

 

소암자(疏庵子)

소암은 임숙영(任叔英)의 호이다.

 

소애(少艾)

젊고 아름다움을 이른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人少則慕父母 知好色則慕少艾라 했고, 조기(趙岐)의 주에, ‘少 年少也 艾 美好也라 하였다.

 

소양(昭陽)

소양전(昭陽殿)에 거처했던 한 성제(漢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을 말한다.

 

소양(昭陽)

십간(十干) 가운데 계()의 별칭으로, 이아(爾雅)석천(釋天), “태세(太歲)가 계()에 있는 것을 소양이라 한다.” 하였다.

 

소양전(昭陽殿)

한 성제(漢成帝) 때 황후 조비연이 거처했던 궁궐 이름으로, 이후 총애를 받는 후비의 궁전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소언(蘇堰)

소식(蘇軾)이 쌓은 제방. 소식은 광동(廣東)혜주(惠州)로 좌천되었을 때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고 그것을 사들여 방생지(放生地)로 삼았다 한다.

 

소여(所如)

뱃놀이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전적벽부(前赤壁賦)한 조각 작은 배 가는 대로 맡겨 두고, 아득히 만경창파 건너가노라[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라는 구절이 있다.

 

소여란봉(嘯如鸞鳳)

() 나라 완적(阮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손등(孫登)을 만났는데, 손등은 완적 묻는 말에 답이 없었다. 완적이 길게 휘파람을 불고 물러오며 산 중턱에 이르자 난봉(鸞鳳)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골짜기를 울렸는데, 그것은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

 

소연(蘇筵)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말한다.

 

소염(疏恬)

소광의 염퇴. ()의 소광(疏廣)이 태자 태부(太子太傅)로 있다가 관직과 명예가 너무 높으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까를 염려하여 태자 소부(太子少傅)인 자기 조카 수()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 여생을 즐겼음. 한서(漢書)卷七十一

 

소영(韶韺)

소는 순() 임금의 음악이고, 영은 제곡(帝嚳)의 음악인데, 일반적으로 옛날의 음악을 칭한다.

 

소영(素榮)

흰 꽃.

 

소영빈(蘇穎濱)

영빈(穎濱)은 송() 나라 소철(蘇轍)의 만년(晩年)의 호()이다. 태위(太尉) 한기(韓琦)에게 글을 올려서 자기를 소개한 일이 있다.

 

소옹(邵翁)

() 나라 때의 유학자 소옹(邵雍)을 말하는데, 자는 요부(堯夫)이다. 주역(周易)의 수리(數理)를 좋아하여 태극(太極)을 우주의 본체로 보았는데 상수(象數)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유일(遺逸)로 추천을 받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다 물리치고 소문산(蘇門山)에서 독서에만 심취하여 자기 거소를 안락와(安樂窩)라고 이름하고 자호를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하였다.저서로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송사(宋史)427 소옹전(邵雍傳)

 

소옹(疏翁)

호가 소암(疏庵)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다.

 

소옹루(邵雍樓)

청빈함을 비유한 말이다. 소옹(邵雍)은 송() 나라 때의 도학자로,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精通)하였고, 그가 거처하는 곳을 안락와(安樂窩)라 하였다.

 

소옹영해익탐선(蘇翁嶺海益耽禪)

소옹(蘇翁)은 송() 나라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이다. 영해(嶺海)는 그가 유배되었던 산하(山河)를 말한다. 동파가 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황주(黃州)의 적거(謫居)에서 여주(汝州)로 옮겼을 때,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 2()인 동림 상총(東林常總)을 참알(參謁)하였는데,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듣고 깨달아 여명에 지은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示人이라는 시는 특히 유명하다. 속전등록(續傳登錄)20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23 贈東林總長老

 

소옹적벽(蘇翁赤壁)

소옹은 송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키고, 적벽(赤壁)은 황강현(黃岡縣) 성밖에 있는 강으로 소식이 신종(神宗) 원풍(元豐) 5(1082)에 당쟁으로 혁신당에게 몰려 조정에서 쫓겨나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소옹조원량(蘇翁嘲元亮)

소동파(蘇東坡)의 이행중취면정(李行中醉眠亭)이란 시에 그대는 돌아가게 나는 자야겠네란, 도연명(陶淵明)의 이 말을 천연하다고들 하지만, 취중에 손을 대하고 자는 게 무슨 해가 되랴. 이제야 알겠구나, 도연명은 어질다 할 수 없음을.”이라 하였다. 원량(元亮)은 도연명의 자이다.

 

소옹해상(蘇翁海上)

소옹은 북송 시대의 소식(蘇軾)을 높여 이른 말이다. 소식이 일찍이 경주별가(瓊州別駕)로 폄척된 일을 가리키는데, 경주는 섬()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해상(海上)이라고 말한 것이다. 송사(宋史)卷三百三十八

 

소와롱환(邵窩弄丸)

소와는 소강절(邵康節)이 거처한 안락와(安樂窩)를 말한다. 그의 시에 송계의 조행과 앵화의 문재, 강산의 기도와 풍월의 정회. 그대들에게서 얼굴 모양 차용하고 그대들에게서 형체를 빌린 이 몸, 구슬 가지고 노는 여가에 한가로이 갔다가 한가로이 오노라[松桂操行 鶯花文才 江山氣度 風月情懷 借爾面貌 假爾形骸 弄丸餘暇 閑往閑來].”하였다. 격양집(擊壤集)12

 

소완(小阮)

죽림칠현 가운데 완적은 대완(大阮), 완함은 소완(小阮)으로 불렸다.

 

소왕(素王)

왕위(王位)는 없으나 왕의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유가(儒家)에서는 공자(孔子), 도가(道家)에서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소요(逍遙)

외물(外物)의 영향을 초탈하여 자기의 천성을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소요(逍遙)

장자(莊子)첫 편의 이름인데, 그 주지(主旨)가 세상의 준칙에 얽매이지 않고 물외(物外)와 무위(無爲)에 멋대로 거닒에 있다.

 

소요(逍遙)

어디에 매인 데가 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소요각석(蘇繇刻石)

주서(周書)』 「이기(異記)주 소왕(周昭王) 즉위 2448일에 강ㆍ하ㆍ천(江河川)이 갑자기 범람하여 우물물이 넘쳐나왔으며 산천이 진동하고 오색빛이 태미(太微)로 들어가 꿰어 서방에 퍼져 다 청홍색이 되었다. 태사(太史) 소유가 아뢰기를 대성인(大聖人)이 서방에 태어났는데 1천 년 후에는 성교(聲敎)가 여기까지 미치겠다.’고 하자, 소왕이 곧 영을 내려 돌에 새겨 이 사실을 기록하여 남쪽에 묻었다. 이것이 곧 부처가 태어난 때다.” 하였다.

 

소요결(逍遙訣)

조선 승려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의 문집이다. 부휴(浮休)에게 장경(藏經)을 배우고 서산(西山)에게서 선지(禪旨)를 깨우쳤는데, 지리산 연곡사와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부도탑(浮屠塔)이 있다.

 

소요부(邵堯夫)

요부(堯夫)는 송() 나라 소옹(邵雍)의 자()이다.

 

소요유(逍遙遊)

장주(莊周)의 저서인 장자(莊子)제일편의 편명으로, 그 내용은 모든 사물에 구애됨 없이 마음대로 유유자적하는 뜻을 기술한 것이다.

 

소요재(逍遙齋)

자가 국화(國華)인 최숙정(崔淑精)의 호이다. 최숙경(崔淑卿)의 형.

 

소요형해외(逍遙形骸外)

형체를 떠나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사귀는 것을 말한다.

 

소용(昭容)

내명부(內命婦)의 하나로, 왕의 후궁에게 내린 정3품의 작호(爵號)이다.

 

소용단(小龍團)

송 인종(宋仁宗) 때 채양(蔡襄)이 복건로전운사(福建路轉運使)로 있으면서 조정에 세공(歲貢)하기 위해 만든 차의 이름으로, 품질이 상품이었다 한다.

 

소용합부전(踈慵合賦廛)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주택에 부포(夫布)와 이포(里布)를 부과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그 나라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주에 집터에 상마(桑麻)를 심지 않은 자에게는 벌금으로 일리 이십오가(一里二十五家)의 포()를 내게 하고, 일정한 산업이 없는 자에게는 벌금으로 일부 백묘(一夫百畝)의 세()를 내게 한 것을 말한다.” 하였다.

 

소우(邵虞)

소씨는 송() 나라 소옹(邵雍)을 가리킨 것으로, 소옹은 특히 역리(易理)에 정통하여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저술하였고, 우씨는 곧 삼국 시대 오() 나라 우번(虞翻)을 가리킨 것으로, 우번 역시 역리에 정통하여 역주(易注)를 저술하였다.

 

소우(蕭瑀)

() 나라에 벼슬하였으나 당() 나라에 귀순한 학자. 고조의 총애를 받아 송국공(宋國公)에 봉해졌다.

 

소운경(蘇雲卿)

송대(宋代)의 사람. 일년 내내 해진 옷 한 벌 짚신 한 켤레로 채소 심고 신 삼아 팔아 그것으로 자급자족하고 틈이 있으면 온종일 문 닫고 누웠거나 아니면 무릎꿇고 하루를 보내 주위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장준(張浚)과 다정한 사이였는데, 그 후 장준이 재상이 되어 끊임없이 서한을 보내고 많은 선물이 답지하자 다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음. 송사(宋史)卷四百五十九

 

소원(少原)

선인이 산다고 하는 곳.

 

소월(疏越)

종묘(宗廟)에 제사할 때 쓰는 아악(雅樂)을 말한다.

 

소월(素月)

희게 빛나는 달

 

소위(素位)

현재 처해 있는 자리를 말한다. 중용(中庸)14에서 군자는 그 지위에 처하여 행동하지, 그 지위 바깥의 일을 도모하길 원하지 않는다[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라고 했다.

 

소유(小酉)

대유(大酉)와 소유(小酉) 두 산에 동굴이 있어 그 동굴 안에다 고서(古書) 일천 권을 넣어 두었다 한다. 군국지(郡國志)

 

소유(巢由)

() 임금 때의 두 고사(高士)로서 요 임금이 천하(天下)를 양위(讓位)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일생을 산수(山水) 속에 은거했던 소보(巢父)허유(許由)를 합칭한 말이다.

 

소유(所由)

연유, 근원.

 

소유(少游)

후한(後漢)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종제(從弟)인 마소유(馬少游)를 가리키는데,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한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은 겨우 해결할 정도면 되고, 하택거(下澤車)에 관단마(款段馬)를 몰고서 군()의 연사(猭史)가 되어 분묘(墳墓)를 지키고 살아서, 향리(鄕里)로부터 선인(善人)이라 일컬어질 정도면 충분하다.”과 하였다. 후한서(後漢書)卷二十四

 

소유관단(少游款段)

관단마(款段馬)는 조그마한 말을 이르는데, 후한 때 마원(馬援)의 종제(從弟)인 마소유(馬少游)가 성품이 담박하여 일찍이 마원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한 세상을 살면서 의식(衣食)이나 겨우 떨어지지 않고 관단마나 타고 다니면서 …… 향리(鄕里)로부터 선인(善人)이란 말만 들으면 그만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二十四

 

소유동천(小有洞天)

도가(道家)에서 전해오는 동부(洞府)의 이름으로, 대라천(大羅天) 안의 36개 동부 가운데 첫번째인 왕옥산(王屋山)의 동부를 말한다. 그 안에는 신선이 산다고 한다.

 

소유방(小酉房)

중국 소유산(小酉山)의 석혈(石穴) 속에 고서(古書) 천여 권이 소장되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장서(藏書)가 많은 서실(書室)의 뜻으로 쓴 것이다.

 

소유선사(小遊仙詞)

선경에 마음을 놀리며 진속을 이탈한 것을 이른다. () 하소(何劭)ㆍ곽박(郭璞)이 다 유선시가 있는데 대개는 이 뜻에 근본하였으며, 그 뒤에도 조당(曹唐)이 소유선시를 지었는데 선인(仙人) 아녀(兒女)의 정을 많이 서술하였다.

 

소유어(少游語)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남정(南征)할 적에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독한 장기(瘴氣)로 고생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나의 큰 뜻을 애처로워하면서 그저 의식 걱정 없이 고향의 선산을 지키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였는데, 지금 소유가 평소에 하던 말대로 해 보려 한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24 마원열전(馬援列傳)

 

소유언(少游言)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정벌하러 갔을 때, 남방의 찌는 듯한 더위와 독기(毒氣)로 인해 소리개가 물속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仰視鳥鳶跕跕墮水中] 그의 종제(從弟)인 소유(少游)가 평소에 짧은 일생 동안 무리하게 큰 뜻을 품을 것이 없이 그저 고향 시골에서 마음 편히 살다 가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탄식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마원(馬援)

 

소유천(小有天)

도가(道家)에서 전하는 동부(洞府)의 이름이다. 대천(大天) 안에 36개의 동()이 있는데, 주위가 만 리나 되는 제일의 왕옥산동(王屋山洞)을 소유천이라고 한다.

 

소유택거(少游澤車)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평범한 삶 속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마원(馬援)이 남정(南征)하여 교지(交阯)를 정벌할 때 무더운 기후 속에서 장기(瘴氣)로 고생하며 탄식하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큰 뜻을 품고 강개(慷慨)하는 나에게 늘 말하였다. 산택 간을 다니는 수레(澤車)와 조랑말(款段)을 타고서 고향을 지키며 편히 사는 것이 제일 좋다고.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해 보려 한들 어떻게 되기나 하겠는가.” 하였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소유현(少游賢)

소유는 송 철종(宋哲宗) 때의 문장가 진관(秦觀)의 자이다. 문장이 뛰어나 소식(蘇軾)의 천거로 태학 박사(太學博士)가 되어 비서성(秘書省) 서적을 교감하였고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으로 실록을 편수하였는데, 소인들의 미움을 받아 말단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수난을 겪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그가 어질다는 것은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한 것을 뜻한 듯한다. 송사(宋史)卷四百四十四 진관전(秦觀傳)

 

소윤(少尹)

관직명이다. 통일 신라 시대, 오소경에 두었던 외관 벼슬이고 조선 초기 한성부·개성부·상서사 등에 두었던 정4품 관직이다.

 

소율(素律)

가을을 말한다. 가을이 오행(五行) 중 금()에 속하여 색깔로 보면 백()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소율(小律)

원래는 절구(絶句)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융(昭融)

시경(詩經)대아(大雅) 기취(旣醉)편의 소명함이 매우 밝다[昭明有融].”에서 나온 말로 제왕(帝王)의 예지(叡智)를 이른다. 두보(杜甫)의 투증가서개부이십운(投贈哥舒開府二十韻)모책(謀策)이 시행되니 전쟁을 안 해도 되었고, 마음이 서로 맞으니 소융(昭融)을 움직였네.” 하였다.

 

소은(素隱)

백거 신천익(愼天翊)의 자호(自號)이다.

 

소은(小隱)

속세를 완전히 초탈하지 못한 은사(隱士)를 이른다.

 

소은유원(小隱踰垣)

작은 은자(隱者)로 대은(大隱)과 상대되는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은자였던 단간목(段干木)은 위 문후(魏文侯)의 예방을 피하기 위하여 담을 넘어 도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맹자(孟子)너무 지나치다[是皆已甚].”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소은은릉수(小隱隱陵藪)

옛날에 학문과 재주가 있으면서 세상에 나와서 벼슬길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은사(隱士)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산림(山林) 깊숙한 곳에 살았었다. 그러나 그 중에 특별한 인물은 하급 관료로 자진하여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것을 조은(朝隱) 혹은 관은(官隱)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인물은 저자에 들어가서 조그만 장사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시은(市隱)이라 하였다. 그래서 큰 은사는 조정과 저자에 숨고[大隱隱朝市] 작은 은사는 산이나 수풀에 숨는다[小隱隱陵藪]는 말이 있었다. / 인용: 은자의 세 가지 유형

 

소은(小隱)

중은(中隱)

대은(大隱)

산수(山水)

리은(吏隱)

성시(盛市)

 

 

소음(所愔)

과도하게 술을 먹고 질탕하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 나라 좌사(左思)위도부(魏都賦)’잔치를 벌이고 흥겹게 술을 마시며 노닌다[愔愔醧讌].”라는 말이 나오고, 그 주()에 또 한시(韓詩)음음야음(愔愔夜飮)’이라는 말이 있다.” 하였다.

 

소음(篠飮)

육비(陸飛)의 호이다.

 

소의(宵衣)

소의간식(宵衣旰食)의 약칭이다. 날이 새기 전에 정장을 하고 날이 저문 뒤에 식사한다는 뜻이다.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말한다. 당서(唐書)소한의 근심이 없다[無宵旰之憂].” 하였다. / 인용: 進三國史記表(김부식)

 

소이(蘇二)

()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이상(蘇二相)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이다.

 

소인(騷人)

본래는 시인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선비, 사대부 등 지조 있는 지식인을 말한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말로, 근심에 걸린 것을 뜻하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그냥 시인을 말할 때 쓰이게 되었다.

 

소인(小人)

지위 낮은 백성을 말한다.

 

소인유(小人儒)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면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 선비가 되고 소인 선비가 되지 말라[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하였다.

 

소인택반음(騷人澤畔吟)

() 나라 굴원(屈原)이 모함을 받고 조정에서 추방된 뒤에, 초췌한 얼굴 모습으로 택반을 거닐며 읊조렸던(行吟澤畔)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84 굴원열전(屈原列傳)

 

소자(蘇子)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자(邵子)

소옹(邵雍)을 높여 말한 것이다.

 

소자경(蘇子卿)

() 나라의 충신 소무(蘇武)를 이른다. 자경은 그의 자이다.

 

소자경뢰(蘇子瓊雷)

소자는 송()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키고, 경뢰는 경주(瓊州)와 뇌주(雷州), 지금의 해남도(海南島)와 뇌주반도를 가리킨다. 송 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안석의 뜻을 거슬러서 경주로 쫓겨났었는데, 소식의 기자유시(寄子由詩), “경뢰가 구름 바다에 막힌 것을 혐의 말라, 성상께선 오히려 멀리 서로 보는 것을 허락했다네[莫嫌瓊雷隔雲海 聖恩尙許遙相望].”하였다.

 

소자미(蘇子美)

자미는 송 나라 소순흠(蘇舜欽)의 자()이다. 당시에 유행하던 변려문에 항거하고 고문시가(古文詩歌)에 발분, 호방(豪放)한 시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자와(邵子窩)

소자는 송() 나라 때의 학자인 소옹(邵雍)을 이르는데, 그는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안락와라 이름하고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자호하였으며, 특히 청빈(淸貧)하였다.

 

소자인중선(蘇子人中仙)

소자는 송() 나라 소식(蘇軾)을 말하는데, 그는 황정견(黃庭堅)ㆍ주희(朱熹) 등에 의해 소선(蘇仙)으로도 일컬어졌다. 소식은 평소 도잠(陶潛)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을 가장 사모하여 그들의 기절을 본받고 화운(和韻)도 많이 하였었다.

 

소자재거항(蘇子再居杭)

() 나라 소식(蘇軾)이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여 소()로 통론(痛論)했다가, 안석을 거슬려 두 번이나 항주(杭州) 지주(知州)로 좌천되어 갔다.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이다.

 

소자춘행도(邵子春行圖)

() 나라 때 도학자인 소옹(邵雍)이 봄철에 조그마한 수레를 타고서 임의(任意)대로 출유하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소작(少作)

연소(年少)할 때에 지은 시문을 가리킨다.

 

소작정(笑作霆)

신이경(神異經)에 의하면, 신선의 영수(領袖)인 동왕공(東王公)이 옥녀와 투호(投壺)를 할 적에 그 화살이 혹 빗나가서 병()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에는 하늘이 웃었는데, 그 입을 벌리고 웃을 때에 흘러나온 빛이 바로 번개였다는 고사가 있다.

 

소잔자방(燒棧子房)

소잔은 잔도(棧道)를 끊어버린다는 뜻이고, 자방(子房)은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장량(張良)의 자이다. 장량이, 한왕(漢王)이 다시 관중(關中)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온 천하에 보여 항왕(項王)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한왕을 설득하여 잔도를 불태워 끊어버렸던 일을 말한다. 한서(漢書)卷四十 장량전(張良傳)

 

소장(蕭墻)

병풍이다.

 

소장공(蘇長公)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노소(老蘇)인 소순(蘇洵)의 장자인 동시에 문장 또한 백대의 종장(宗匠)이 된다는 뜻에서 당시에 그를 장공(長公)이라 부르고 그의 아우인 자유(子由) 소철(蘇轍)을 소공(少公)이라고 불렀다.

 

소장공(蘇長公)

소장공(蘇長公)은 송()소식(蘇軾)을 말하는데, 소식은 당()의 허혼(許渾), 송의 구양수(歐陽修) 등의 뒤를 이어 안휘성(安徽省) 부양현(阜陽縣) 서쪽에 위치한 서호(西湖)의 승경을 탐하여 자주 그곳에 가 놀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음.

 

소장공적벽(蘇長公赤壁)

소동파(蘇東坡)가 칠월(七月) 16일에 적벽강(赤壁江)에 놀면서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지었다.

 

소장지화(蕭墻之禍)

()는 숙()의 뜻이고, ()은 병풍이라 하였는데, 화가 밖에서가 아니요, 안에서 일어남을 소장의 화라 이른다.

 

소장후(蕭張後)

() 나라 고제(高帝)가 자기의 공신(功臣) 삼걸(三傑)한신(韓信)장량(張良), 소하(蕭何)에 뒤에 두어 셋째로 쳤다.

 

소재(蘇齋)

조선조 문신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자는 과회(寡悔). 그는 문장과 서예에 능하고 특히 양명학(陽明學)에 조예가 깊어 주자학파에게 공격을 받았다. 저서에는 시강록(侍講錄)소재집(蘇齋集)이 있다. 선조(宣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음. 명종(明宗) 때 대윤(大尹)으로 몰리어 19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소재(所在)

있는 곳.

 

소재(蘇齋)

조선 시대 문신이며 학자인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소재도량(消災道場)

국난이 있을 때 그 재난이 소멸되기를 축원하기 위하여 마련한 도량.

 

소저(燒猪)

돼지고기를 굽는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희답불인시(戲答佛印詩)佛印燒猪待子瞻이라 하였다.

 

소전문(小篆文)

유사(有史) 이전에 신()이 남겨 놓은 글인데, 현대 사람은 알지 못할 이상스러운 글자이므로 그것을 작은 전(小篆)이라고 부른다 한다.

 

소전유얼(小腆遺孽)

() 나라 주()의 아들 무경(武庚)을 이른 것이다.

 

소절관영(笑絶冠纓)

전국시대(戰國時代) 순우곤(淳于髡)이 제왕(齊王)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기가 막혀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자 갓끈이 뚝 끊어졌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二十六 골계열전(滑稽列傳)

 

소정(蘇鄭)

소세양(蘇世讓)과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을 가리킨다. 두 사람 모두 이행(李行)으로부터 대제학의 재목으로 인정을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別集 卷7 官職典故 大提學

 

소정(蘇頲)

자는 정석(廷碩). 당 현종(唐玄宗) 때 자미황문 평장사(紫微黃門平章事)를 지내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짐. 그는 문장에 능했다. 당서(唐書)낭야대취편(瑯琊代醉編)

 

소제상관후(昭帝上官后)

()나라 소제(昭帝)의 상관황후(上官皇后)는 그의 할아버지 상관걸(上官桀)과 아버지 안()이 국가에 죄를 짓고 죽었으나 황후는 곽광(霍光)의 외손녀이므로 그대로 황후로 있었다.

 

소조(蕭曹)

한 고조 때 상국(相國)을 지낸 소하(蕭何)와 혜제(惠帝) 때 소하의 뒤를 이어 역시 상국이 된 조참(曹參)을 말하는데, 모두 진 나라 말기에 패현(沛縣)의 관리로 있었다.

 

소조량평(蕭曹良平)

모두 한 고조의 공신들로서 소하(蕭何)ㆍ조참(曹參)장량(張良)ㆍ진평(陳平).

 

소종(蕭琮)

후량 명제(後梁明帝)의 아들로서 명제가 죽은 뒤에 그 자리를 이었다가, 뒤에 수 문제(隋文帝)의 부름을 받고 입조(入朝)하여 거국공(莒國公)에 봉해짐으로써 후량은 끝내 망하고 말았다.

 

소주(蘇州)

() 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호이다. 소주 자사(蘇州刺史)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고, 고결한 성품에 시가 또한 한담간원(閒澹簡遠)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도연명(陶淵明)과 병칭되어 도위(陶韋)라고 불렸는가 하면,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위소주집(韋蘇州集) 6 감탄(感嘆)을 보면 상서(傷逝)ㆍ왕부평상회(往富平傷懷)ㆍ출환(出還)ㆍ동야(冬夜) 등 무려 19개의 소제목 아래 먼저 떠나간 부인을 추억하며 자신의 절절한 심경을 기막힌 시로 토로해 내고 있다.

 

소준(蘇峻)

진 원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는데, 성제(成帝) 때에 반역하여 관군(官軍)을 차례로 물리치고 임금을 석두성(石頭城)에 내쫓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도간(陶侃) 등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 진서(晉書)卷一百

 

소중양(小重陽)

중양절(重陽節)99일의 다음날을 가리킨다.

 

소지(小至)

동지(冬至) 하루 전날을 말한다.

 

소지(素志)

순결하고 해맑은 마음.

 

소진(蘇秦)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의 종횡가. ()나라의 도읍 낙양(洛陽)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와는 동문이 되는 셈. ()나라에서 살해됨. / 전국 시대 변사(辯士)로 합종(合從)을 주장하였는데, 본래 낙양(洛陽) 사람으로 귀곡(鬼谷)에 살고 있던 종횡가(縱橫家) 왕허(王詡)를 사사하였다. 집을 나가 유학한 지 몇 해 만에 크게 곤궁을 당하여 집에 돌아오니, 형제와 형수, 처첩들 모두 비웃었다. 이에 그는 다시 공부하여 육국(六國)을 연합하여 육국의 정승이 된 다음 집에 돌아오니, 집안 식구들이 모두 존경하여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진은 크게 탄식하며 이 한몸이 부귀하면 친척들도 두려워하고 빈천하면 천대하니 하물며 타인이겠는가. 만일 나에게 낙양의 좋은 농토 2()이 있었다면 나는 육국의 정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소진전(소진열전(蘇秦列傳))

 

소진왕(小秦王)

당 태종(唐太宗)을 말한다. 사패(詞牌)의 이름으로 곧 진왕의 소파진악(小破陣樂)이다. 송 나라 시인 진관(秦觀)이 말하기를 근세에 또 노래하여 소진왕에 넣어 다시 양관곡(陽關曲) 속쌍조(屬雙調)라 이름했다.” 하였다. 여기서는 양관곡을 취하여 이별의 뜻으로 쓴 것이다.

 

소진인폐구(蘇秦忍敝裘)

전국(戰國) 시대 유세객(遊說客) 소진(蘇秦)이 처음 연횡설(連橫說)을 가지고 10여 차례나 글을 올려 진 혜왕(秦惠王)을 설득하였으나 그 말이 행해지지 않음으로써, 일찍이 집에서 입고 나간 검은 갖옷이 다 해지고 황금 백 근의 노자도 다 떨어진 채 초췌한 몰골로 고향에 돌아가자, 부모와 형수와 아내가 모두 그를 냉대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소착(疏鑿)

()가 홍수(洪水)를 다스릴 적에 용문산(龍門山)을 파서 하수(河水)를 소통시켰다(疏鑿).

 

소찬(素饌)

고기나 생선이 들어가지 아니한 반찬. 남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의 겸양의 말이다.

 

소찬(素餐)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준말로, ‘하는 일 없이 국록(國祿)만 축내는 것을 말한다.

 

소처(小妻)

이 말은, “聽曲知寗戚 夷吾因小妻라고 한 데 보인다. 소사빈(蕭士贇)의 주에 열녀전(列女傳)을 인용했는데, 그에 의하면, “영척(寗戚)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등용되기를 바랐으나 길이 없게 되자, 남의 하인이 되어 제 나라 동문(東門)에서 소의 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했는데, 마침 제 환공이 듣고 이상히 여겨 관중(管仲)을 시켜 맞아 오게 하였다. 관중이 맞으러 가니, 영척이, ‘浩浩乎白水라 하니, 무슨 뜻인 줄을 몰라 5일을 조회하지 않고 근심을 했다. 그의 첩()인 천()이 그 말을 듣고, 일시(逸詩) 백수(白水) 편에, ‘浩浩白水 儵儵之魚 君來召我 我將安居 國亂未定 從我焉如라 한 것을 인용, ‘영척이 제 나라에 등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니, 관중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환공에게 말하니, 그를 등용했다.” 한다. 여기서는 이 백의 시에 관중의 첩()인 천()을 아내()라 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소처하기(蘇妻下機)

전국 때 소진(蘇秦)이 집 떠나 돌아다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오니, 그의 처가 베틀에서 내리지 않았다가 그 뒤에 다시 육국 정승(六國相)이 되어 돌아오니 온 집안이 환영하였다.

 

소천(蘇天)

후한(後漢) 때 소장(蘇章)이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어 청하 태수(淸河太守)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주효(酒肴)를 가득 차려 놓고 서로 회포를 담론하며 즐길 때, 태수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하늘이 하나밖에 없지만 나는 유독 두 하늘이 있다.” 한 데서 온 말로, 소장을 하늘처럼 추켜올린 말이다.

 

소천(所天)

유교적 관념으로 아내가 남편을 이르는 말이다. / 인용: 端川節婦詩(김만중)

 

소체(召遞)

벼슬아치가 왕명을 받아 삼사(三司)나 경원(京院)으로 전임됨으로써 체직(遞職)되는 일.

 

소초(小草)

원지(遠志)의 이명. () 나라 때 사안(謝安)이 처음엔 동산(東山)에 끝까지 은거할 뜻이 있었다가, 뒤에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되었을 때, 환온에게 원지를 바쳐온 자가 있자, 환온이 사안에게 이 약초의 또 다른 이름은 소초(小草)인데 어째서 한 약초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사안이 즉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마침 곁에 있던 학융(郝隆)이 즉시 대답하기를 이것은 알기가 매우 쉽습니다. 이 약초가 깊은 산에 있을 때는 원지이고, 밖으로 나오면 소초가 됩니다.” 하니, 사안이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배조(排調)

일관소초(一官小草)의 준로, 택당(澤堂) 자신을 지칭한 겸사(謙辭)이다.

 

소초(巢鷦)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뱁새가 집을 짓는 것은 겨우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 하였으니, 분수에 맞게 처신함을 말한다.

 

소축시(小畜詩)

소축집(小畜集) 속에 있는 시를 말한다. 이는 송 나라 왕우칭(王禹偁)이 지은 것인데, 우칭이 직접 점을 쳐 주역(周易)소축괘(小畜卦)를 얻고서 소축집(小畜集)이라 했다 한다. 사고제요(四庫提要)集 別集類

 

소춘(小春)

겨울철 첫달은 그래도 봄처럼 온화한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옛날에 음력 10월을 소춘 혹은 소양춘(小陽春)이라고 불렀다.

 

소치지화(小癡指畫)

소치는 허유(許維)의 호이다. 순조 때 사람으로 산수화를 잘 그렸음. 완당의 제자이다. 지화는 지두화(指頭畫)를 이른다.

 

소타(嘯咤)

꾸짖는다는 말이다.

 

소탁(宵柝)

군중(軍中)에서 밤에 경계하기 위해 두드리는 조두(刁斗)를 이른다.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음을 말한다. , ‘작은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도리어 큰 것을 잃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인용: 정신승리란 무엇인가?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 한문 임용고시 공부의 단상 돈 앞에서도 배려심을 발휘한 단재학교의 대중지성들

 

소태부(蕭太傅)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였던 소망지(蕭望之)를 말하는데, 그는 선제가 위독했을 때 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총괄하였고, 원제(元帝)가 즉위한 뒤에도 국사를 광정(匡正)한 것이 많았으나, 뒤에 환관인 홍공(弘恭)ㆍ석현(石顯) 등의 모함으로 인하여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한서(漢書)卷七十八

 

소통국(蘇通國)

한 무제 때 절신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갔다가 억류되어 사는 동안에 호녀(胡女)와 살면서 낳은 아들인데, 소무가 풀려나 중국으로 돌아온 후 그 역시 중국에 들어와 선제(宣帝)로부터 낭중(郞中)을 제수받았다. 한서(漢書)卷五十四

 

소파(小坡)

소동파(蘇東坡)의 막내 아들 과()의 별칭이다.

 

소파오가(笑破吳家)

서시(西施)는 춘추(春秋) 때 월() 나라 미녀의 이른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한 뒤에, 그의 모신(謀臣) 범여(范蠡)가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자, 마침내 오 나라의 정사가 어지럽게 되어서 멸망하기까지에 이른 사실(史實)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소평(少平)

후한 때의 직신 동선(董宣)의 자인데, 광무제(光武帝) 때에 호양공주(湖陽公主)의 종()이 사람을 죽였으므로, 당시 낙양령(洛陽令)으로 있던 동선이 그를 잡아다 죽이었다. 그러자 공주가 이 일을 임금께 하소연한 결과, 마침내 임금이 동선을 잡아다 놓고 공주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니, 동선이 두 팔로 땅을 힘껏 버티어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강항령(强項令)을 내보내라고 명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七

 

소평(邵平)

() 나라 동릉후(東陵侯), 진 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살면서 장안(長安) 성 동쪽에 오이 밭을 일구며 유유자적하게 은사(隱士)의 생활을 즐겼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소평과(召平瓜)

소평과는 진()의 유민인 소평(召平)이 장안성(長安城) 동편에 오이()를 심어서 그것이 유명하였으므로 과() 자를 붙여 소평과라 한 것인데 소하(蕭何)가 승상(丞相)이 되어 5천 호()의 봉작(封爵)을 받자 소평이 소하에게 임금에게 의심을 받기가 쉬우니 봉작을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화를 입었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소평과포(邵平瓜圃)

은거(隱居)하고 있다는 뜻 소()는 소()로도 쓴다. 사기(史記)54평은 진()이 망하자 시골에 은거하여,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외를 심었는데 외맛이 좋았으므로 세속에서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한다.

 

소평포(邵平圃)

소평(邵平)이 진()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소풍군(小馮君)

풍 부총이 명 나라의 이름난 집안의 자제로서, 그의 형과 함께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대완(大宛)과 서강(西羌)을 정벌하여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진 풍봉세(馮奉世)의 아들 야왕(野王)과 입()에 대해, 백성들이 태수로 있을 때의 그들의 치적(治積)을 우러르며 형인 야왕을 대풍군(大馮君)이라 하고 동생인 입을 소풍군(小馮君)이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79 풍립전(馮立傳)

 

소하(蘇嘏)

동래 고적에 소하정(蘇嘏亭)이 있었다. 소가가 늘 흰 사슴을 타고 금귀 선인(金龜仙人)과 거기서 놀았다는데, 새들이 깃들이지 않는다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소하(韶夏)

소는 순() 임금의 악명(樂名)이고 하는 () 임금의 악명이다.

 

소하(蘇賀)

인명(人名)으로, 한 고조(漢高祖)와 일한 명상(名相)이다.

 

소하원(遡河源)

무제(武帝)장건(張騫)을 대하(大夏)에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소하한중(蕭何漢中)

소하는 한 고조(漢高祖)의 명상(名相)으로, 그는 만년에 전택(田宅)을 반드시 궁벽한 곳에 마련하고 집에 담장도 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후손이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勢家)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사기(史記)卷五十三

 

소한(宵旰)

임금이 정치에 부지런하여 밤중에 일어나 옷을 입고 때가 늦어서야 조반을 먹는다는[宵衣旰食] 말이다. ‘임금이 정사에 최선을 다함을 말한다.

 

소한린호묘(蕭閒早已隣湖泖)

소한은 원() 나라 때의 문인화가인 예찬(倪瓚)의 관명(館名)이고, 호묘(湖泖)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삼묘호(三泖湖)를 가리킨 말로, 즉 예찬이 이 삼묘호 가에 은거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것을 이른 말이다.

 

소한유난쇠(所恨幽蘭衰)

자기가 가진 좋은 경륜(經綸)이 임금에게 쓰이기를 애원하는 말이다. 굴원(屈原)의 이소경에 그윽한 난초를 두르고서 기다리며 서성댄다[結幽蘭而延佇].” 한 데서 온 말이다.

 

소한화(消恨花)

유사(遺事)처음에 금원(禁苑) 안에 천엽도(千葉桃)가 있어 꽃이 만발하자 명황이 귀비와 함께 날마다 그 밑에 앉아 잔치했다. 임금이 원추리꽃(萱花)만 근심을 잊게 할 뿐 아니라 이 꽃도 한을 해소시켜 준다.’ 했다.” 하였다.

 

소해(少海)

태자(太子)를 가리킨다. 천자(天子)를 대해(大海)에다 비유하므로 태자를 소해라고 칭하는 것이다. 해록쇄사(海錄碎事)천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는 소해에 비한다.” 하였다.

 

소해가(少海歌)

() 나라 때 오()의 회계(會稽)에 살았던 은사(隱士) 하통(夏統)이 평소 굳은 지조로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한번은 병든 모친의 약을 구하기 위해 낙양(洛陽)을 갔던 바, 이때 그의 범상치 않은 행동을 본 태위(太尉) 가충(賈充)이 그를 괴이하게 여겨 오()의 지방에 관한 풍속 등 여러 가지를 묻고, 이어서 그 지방에 관한 가곡(歌曲)을 지어 부를 수 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을 간()하였으나 말은 쓰여지지 않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여 시체가 바다에 던져졌기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가슴아프게 여기므로, 내가 소해창(少海唱)을 지었으니, 지금 노래를 하겠다.” 하고는 발을 구르며 힘차게 노래를 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소해창을 들으니 오자서ㆍ굴원(屈原)이 바로 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였고, 가충은 말하기를 이 오아(吳兒)는 바로 목인 석심(木人石心)이다.”며 감탄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晋書)卷九十四 목인 석심은 곧 굳은 절조를 비유한 말이다.

 

소해성홍(少海星虹)

태자의 탄생을 가리킨다. 천자를 대해(大海)에 비유하여 태자를 소해(少海)라 일컫는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공동산엔 살기가 까맣게 뒤덮였고, 태자의 깃발이 이젠 천자의 황색[崆峒殺氣黑 少海旌旗黃].”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6 長遊

 

소해응신극(少海膺宸極)

현종이 사천으로 피난간 뒤에 황태자가 삭방(朔方)으로 피난 갔다가 거기서 여러 사람의 권고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니, 천자를 큰 바다라 하고 황태자를 적은 바다라고 한다.

 

소허(巢許)

소부(巢父)허유(許由). 모두 중국 고대(古代)의 고사(高士). ()가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니, 유가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시냇물에 가서 귀를 씻었는데, 그 물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던 소부가 이 말을 듣고 또 딴 곳으로 가서 물을 먹였다는 고사가 있다.

 

소현서원(紹賢書院)

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해서 주자(朱子),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등을 모신 소현서원(紹賢書院)이 해주에 있다.

 

소혜선기도(蘇蕙璿璣圖)

진서(晉書)열녀전(烈女傳)에 의하면, “소혜(蘇蕙)의 자()는 약란(若蘭)이요 두도(竇滔)의 아내이다. 두도가 일찍이 죄를 입어 유사(流沙)로 귀양가자, 소혜는 남편을 생각하다 못해 비단을 짜서 회문선도(回文旋圖)를 만들어 시()를 써서 주었는데, 그 시가 몹시 처량하였다.” 한다.

 

소호(少昊)

상고 시대의 임금. 소호(小皥)라고도 한다. 태호(太昊)의 법을 수행했기 때문에 소호라고 했다.

 

소호(韶濩)

소호(韶頀)와 동의어. ()는 순() 임금의 음악이고, ()는 은() 나라 탕왕(湯王)의 음악이다. 혹은 소()는 우순(虞舜)의 음악이고 호()는 탕왕의 음악이라고도 한다. 대호(大濩)라고도 한다.

 

소호(召虎)

주 선왕(周宣王)의 명을 받고 회이(淮夷)를 평정한 소목공(召穆公)으로, 그를 기린 내용이 시경(詩經)대아(大雅) 강한(江漢)에 나온다.

 

소호(小戶)

주량(酒量)이 작은 사람을 가리킨다.

 

소호사(少昊司)

형조(刑曹)를 말한다. 상고 시대 소호씨(少昊氏)가 금덕(金德)으로 왕() 노릇을 하였으므로 후세에 그를 가을을 맡은 신()이라 칭하였는데, 가을은 형()을 주관하므로 이른 말이다.

 

소호주어롱(韶濩奏於聾)

()는 순() 임금의 악()이고 호()() 임금의 악.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성인의 음악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소호흘제유기미(小狐汔濟濡其尾)

주역(周易)미제(未濟) 괘에, “여우가 물을 건너다가 채 못 건너서 꼬리를 적셨으니, 이로울 것이 없다[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에 인용된 것.

 

소홍사(小紅詞)

소홍(小紅)은 송() 나라 때의 시인(詩人) 범성대(范成大)의 비()의 이름이다. 소홍은 재색(才色)과 문예(文藝)가 뛰어난 여인인데, 범성대가 뒤에 그를 강기(姜夔)에게 보냈었다. 강기의 과수홍시(過垂虹詩)스스로 지은 새 시는 운치가 가장 아름다운데, 소홍은 조용히 노래하고 나는 퉁소를 부노라[白作新詞韻最嬌 小紅低唱我吹簫].” 하였다.

 

소화(小華)

이광문(李光文)의 호이다. 자는 경박(景博)이고 우봉인(牛峯人)으로 벼슬은 이조 판서이다.

 

소화(韶華)

아름다운 계절의 경치, 보통 춘광(春光)을 가리키는 시어(詩語)이다. / 인용: 祖江行(신유한)

 

소황(蘇黃)

소는 소동파(蘇東坡), 황은 황산곡(黃山谷)이니 모두 송대(宋代)의 대문장가였다.

 

소황(蘇黃)

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병칭한 말이다.

 

소황이두(蘇黃李杜)

소황은 송 나라의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병칭(幷稱)이고, 이두는 당 나라의 시인인 이백(李白)두보(杜甫)의 병칭이다.

 

소후(昭后)

()나라 소왕(昭王)을 말한다.

 

소흥(昭興)

송 철종의 연호(1094~1097)이다.

 

소흥패(疏興粺)

당 나라 때 한료(韓遼)가 건의해서 소흥의 3백 리 제방을 준설하여 조운(漕運)으로 곡식을 운반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크게 혜택을 주었다 한다. 신당서(新唐書)卷五十三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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