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豊饒)와 화미(華美)
조선 초기의 안정에 힘입어 풍요로운 목릉성세(穆陵盛世)를 이룩한 선조인조년간(宣祖仁祖年間)은 시단에 있어서도 또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성시를 이룬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도 풍격(風格)과 기상이 가장 뛰어난 노수신(盧守愼)은 선조(宣祖) 초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노두(老杜)의 격력(格力)을 깊이 얻은 학두자(學杜者)로 알려져 있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 가장 후배인 황정욱(黃廷彧)은 많은 시를 쓰기보다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노수신(盧守愼)도 그의 시작(詩作)에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시험한 부분들이 보이지만, 특히 황정욱(黃廷彧)은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배워 그의 시세계는 호음(湖陰)과 가깝기도 하다. 한편 정렴(鄭磏)ㆍ정작(鄭碏) 형제와 박지화(朴枝華) 등 도선가(道仙家)의 시작(詩作)도 목릉(穆陵)의 풍요(豊饒)를 이룩하는 데 일조(一助)를 했다.
한편 조선의 시단이 본격적으로 당을 배우고 익혀 당풍(唐風)이 크게 일어난 것도 이때이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박순(朴淳)이며, 세칭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는 이달(李達)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등이 모두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을 배워 고경명(高敬命)ㆍ임제(林悌) 등과 더불어 호남시단을 함께 빛나게 하였다. 권필(權韠)과 최립(崔岦)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지만, 특히 권필(權韠)의 시와 최립(崔岦)의 문장을 쌍벽으로 일컫는 것은 최립(崔岦)의 문명(文名)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시업(詩業)으로 일가를 이룬 시인으로는 허봉(許篈)ㆍ이호민(李好閔)ㆍ차천로(車天輅)ㆍ유몽인(柳夢寅)ㆍ이안눌(李安訥)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이호민(李好閔)의 「용만(龍灣)」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빼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이안눌(李安訥)의 동악시단(東岳詩壇)은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유전되고 있다.
천류(賤類) 가운데서도 유희경(劉希慶)ㆍ백대붕(白大鵬) 등이 시로써 이름을 얻었으며 황진이(黃眞伊)ㆍ이매창(李梅窓)ㆍ이옥봉(李玉峰)ㆍ허난설헌(許蘭雪軒)은 여류시인으로 이름이 높다.
그리고 『육가잡영(六家雜詠)』에 시편(詩篇)을 싣고 있는 최기남(崔奇男)ㆍ김효일(金孝一)ㆍ최대립(崔大立) 등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위항시(委巷詩)의 선성(先聲)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 집단적으로 그들의 온축을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위항문학이 이에 이르러 그 기반이 구축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1. 관각(館閣)의 대수(大手)
문장(文章)은 흔히 그 향유(享有)하는 계층에 따라 대각(臺閣)의 문장(文章), 선도(禪道)의 문장(文章), 초야(草野)의 문장 등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서거정(徐居正)은 「계정집서(桂庭集序)」】. 이때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란 반교문(頒敎文)ㆍ교서(敎書)ㆍ윤음(綸音)ㆍ옥책문(玉冊文)ㆍ전문(箋文) 등 이른바 관각문자(館閣文字)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문형(文衡) 가운데서도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등은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 있으면서 특히 시에 능하여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따로 ‘관각삼걸(館閣三傑)’ 또는 관각(館閣)의 ‘호소지(湖蘇芝)’라 부르기도 한다.
노수신(盧守愼, 1515 중종10~1590 선조23, 자 寡悔, 호 蘇齋ㆍ伊齋ㆍ茹峰老人)
과 황정욱(黃廷彧, 1532 중종27~1607 선조40, 자 景文, 호 芝川)은 정사룡(鄭士龍)과 함께 ‘관각삼걸(館閣三傑)’로 불린 바 있는 관각(館閣)의 대수들이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102에서 두 사람의 특징을 비교하여 ‘소재의 웅장하고 특출나며 풍부한 것과 지천의 횡행하고 방일하며 기이하고 위대한 것이 참으로 서로 다툴만 했다[蘇之雄發富贍, 芝之橫逸奇偉, 眞可相角].’라 하였고,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56에서 그들의 소장처(所長處)로 소재(蘇齋)의 오율(五律)과 지천(芝川)의 칠율(七律)을 들고 모두 천년 이래의 절조(絶調)라 평하였다[盧蘇齋ㆍ黃芝川, 近代大家, 俱工近體. 未知其故也. 盧之五律, 黃之七律, 俱千年以來絶調. 然大篇不及此, 未知其故也].
노수신(盧守愼)은 송시학(宋詩學)이 풍미하던 시대에 두보(杜甫)를 배워 뜻을 이룬 시인 중의 하나이다[盧蘇齋五言律, 酷類杜法, 一字一語, 皆從杜出. 『霽湖詩話』 / 盧蘇齋得杜法. 『惺叟詩話』].
김창협(金昌協)은 이를 높이 평가하여 세칭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의 시풍(詩風)을 비교하면서 삼가(三家) 중에서도 그를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으면서 침울노건(沈鬱老健)하고 한 그의 풍격(風格)은 노두(老杜)의 격력(格力)을 깊이 얻은 것이어서 후대의 학두자(學杜者)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 하여 선조(宣祖) 초(初) 소단(騷壇)의 제일가(第一家)로 칭상을 아끼지 않았다[世稱湖蘇芝, 然三家詩實不同. 湖陰組織鍛鍊, 頗似西崑, 而風格不如蘇. 芝川矯健奇崛, 出自黃陳, 而宏放不及蘇, 蘇齋其最優. 『農巖雜識』 / 盧蘇齋詩, 在宣廟初最爲傑然, 其沈鬱老健, 悲,深得老杜格力,後來學杜者莫能及. 『農巖雜識』].
그의 소장처(所長處)가 오율(五律)에 있었으므로 득의작(得意作)의 대부분도 오율(五律) 속에 보인다. 19년 동안 해중(海中)에서 귀양살이를 했기 때문에 만년(晚年)의 작품 속에 특히 명편(名篇)이 많다.
40편이 넘는 명작 가운데서도 노수신(盧守愼)의 대표작(代表作)으로 알려진 「십육야환선정(十六夜喚仙亭)」은 다음과 같다.
二八初秋夜 三千弱水前 | 열엿새날 초가을 밤 삼천리 약수(弱水) 앞에 있네. |
昇平好樓閣 宇宙幾神仙 | 태평성세에 누각이 좋은데 우주에는 신선(神仙)이 얼마나 되는가? |
曲檻淸風度 長空素月懸 | 굽은 난간에 맑은 바람 지나가고 긴 하늘에는 흰 달이 걸려 있네. |
愀然發大嘯 孤鶴過蹁躚 | 서글피 길게 휘파람 부니 외로운 학 너울너울 날아가누나. |
미련(尾聯)의 시원하게 달리는 기상은 마치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를 다시 보는 듯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얼(餘孼)로 남황(南荒)으로 유배되던 해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몸은 배소(配所)에 있지만 태평성세(太平盛世)를 구가하고 있다.
누각(樓閣)이란 예로부터 승평(昇平)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이 승평(昇平)은 또한 이 시가 지어진 작자의 배소(配所) 순천(順天)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허균(許筠)은 특히 그의 필력(筆力)이 굳세고 커서 기상이 일세(一世)를 덮을 만하다. 하였거니와, 이처럼 그 구도(構圖)가 크고 넓은 것은 바로 그의 기우(氣宇)가 남달리 큼에 힘입은 것이라 하겠다. 황정욱(黃廷彧)의 공교(工巧)와 스스로 대비(對比)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또 다른 명작으로 꼽히는 「벽정대인(碧亭待人)」은 다음과 같다. 원제(原題)는 「十三日到碧亭待人)」이다.
曉月共將一影行 | 새벽달이 그림자 하나를 함께 데리고 가는데 |
黃花赤葉政含情 | 국화꽃 단풍잎이 잔뜩 정을 머금었네. |
雲沙目斷無人問 | 모래밭 저 끝까지에도 물어볼 사람 없어 |
依遍津樓八九楹 | 기둥에 기대어 빙글빙글 돌아보네. |
위의 대표작 두 편은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벽정대인(碧亭待人)」은 소재(蘇齋)에게 또다른 시세계가 엄존(嚴存)하고 있음을 사실로써 보여준 것이다.
노두(老杜)의 격력(格力) 못지않게 황진(黃陳)의 기굴(奇崛)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새벽녘에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효월공장일영행(曉月共將一影行)’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강정(江亭) 주변의 분위기를 ‘운사목단무인문(雲沙目斷無人問)’이라하여 강서파(江西派)의 기발(奇拔)을 스스로 시범(示範)하고 있다. 이는 곧 이 때의 우리나라 한시가 송대(宋代)의 강서파(江西派)를 시험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황정욱(黃廷彧)
은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 가장 후배이다. 그는 많은 시를 쓰기보다는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남긴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불우하여 만년(晩年)에야 문병(文柄)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불행이 이어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함경도에서 두 왕자와 함께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권유문을 쓴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는 강서파(江西派)인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배워 소재(蘇齋)보다는 호음(湖陰)과 시세계가 가깝다. 허균(許筠)은 「제황지천시권서(題黃芝川詩卷序)」에서 그의 시가 박상(朴祥)에게서 나와 호음(湖陰)과 소재(蘇齋) 사이를 출입(出入)하였지만 삼가(三家)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余友趙持世裒其近律百餘篇, 余始寓目, 則其矜持勁悍, 森邃泬寥, 寔千年以來絶響. 覈所變化, 蓋出於訥齋, 而出入乎盧ㆍ鄭之間, 殆同其派而尤傑然者].
황정욱(黃廷彧)은 특히 칠율(七律)에 솜씨를 보여 대부분의 명편(名篇)이 칠율(七律)로 제작되고 있다. 대표작 「송심공직충겸부춘천(送沈公直忠謙赴春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淸平山色表關中 | 청평산(淸平山) 산색(山色)이 관동(關東)의 모습 드러내고 |
下有昭陽江漢通 | 아래는 소양강(昭陽江)이 한강(漢江)으로 통하네. |
馳出東門一匹馬 | 도성문을 나올 땐 한 필 말에 몸을 맡기고 |
泝洄春水半帆風 | 봄물 따라 올라갈 땐 강바람에 의지했네. |
送人作郡鬼爭笑 | 남을 군수(郡守)로 보내기만하여 귀신도 다투어 웃고 |
問舍求田囊久空 | 밭 사들여 농사 짓자니 주머니 빈 지 오래네. |
爲語當時勾漏令 | 당시의 구루령(勾漏令) 갈홍(葛弘)에게 말하노니 |
衰顔須借點砂紅 | 다 늙은 얼굴에 그 곳 단사(丹砂)로 화장하게 해주오. |
김만중(金萬重)이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우리나라 역대 칠언시(七言詩)의 대표작으로 꼽은 작품이다[間嘗閱本朝諸公詩, 僭爲五言絶, 當以李蓀谷“桐花夜烟落 「別李禮長」”, 爲第一. 七言絶, 鄭東溟“章華高出白雲間 「楚宮詞」”, 爲第一. 五言律, “世廟崇西竺 「宿奉恩寺」”, 第一. 七言律, 傑作頗多, 尤難取捨. 當於黃芝川 “淸平山色表關東”, 權石洲“江山嗚嗚聞角聲 「早渡碧瀾」”, 李東岳“崔顥題詩黃鶴樓 「次崔天使百祥樓韻」”, 數詩中求之].
미련(尾聯)의 하구(下句)는 그 기법이 공교(工巧)의 극치를 이루고 있어서 기굴(奇崛)한 그의 시세계가 이에서 다한 느낌이다. 경련(頸聯) 상구(上句)의 고사(故事)【매양 남이 군수로 나가는 것을 보내기만 하고 자신은 군수로 나가지 못하므로 귀신들의 놀림거리가 된 것】 원용은 영직(榮職)을 누린 작자의 처지로는 과장이 심한 것이지만,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이 모두 작자 자신을 말한 부분임을 알게 해준다.
다음으로 황정욱(黃廷彧)의 「차이백생순인영옥당소도(次李伯生純仁詠玉堂小桃)」을 보인다. 대부분의 시선집에 「차옥당소도운(次玉堂小桃韻)」으로 수재(收載)되고 있어 줄여진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無數宮花倚粉墻 | 궁중에 핀 꽃들이 담장 위에 기대니 |
遊蜂戱蝶趁餘香 | 벌 나비 향기 맡고 어지러이 날아 든다. |
老翁不及春風看 | 그러나 이 늙은이 봄이 온 줄도 모르고 |
空有葵心向太陽 | 공연히 해바라기 마음으로 태양을 향하네. |
옥당(玉堂)의 소도(小桃)를 두고 이순인(李純仁)의 「야직(夜直)」에 차운(次韻)한 작품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59에서 이 시를 함의(含意)가 심원(深遠)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다고 평하기도 하였거니와 당시의 세태(世態)를 심원(深遠)한 우의(寓意)로 그려낸 것이 이 작품이다[含意深遠 措辭奇悍 爲詩不當若是耶 綺麗風花 返傷其厚].
벼슬에 군침을 흘리는 벼슬아치들은 난만한 궁중의 꽃을 보고 벌 나비 떼처럼 덤벼들지만, 정작 이 늙은 시인은 봄이 오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하고 다만 충직(忠直)한 신하의 마음만 있어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돌듯이 임금님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조직(組織)의 솜씨도 더 바랄 것이 없을 듯 싶다.
2. 이학자(理學者)의 여기(餘技)
16세기에 들어와서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 성리학자들이 도학파(道學派)의 시세계를 열어준 이후 이들보다 한 세대 가량 뒤에 등장한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익필(宋翼弼)ㆍ정구(鄭逑) 등은 성리학 방면에서 보다 진전된 학문 성과를 보여준 이외에도 문학이론이나 실제 시의 창작 방면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이(李珥, 1536 중종31 ~1584 선조17, 자 叔獻, 호 栗谷ㆍ義菴ㆍ石潭ㆍ愚齋)
는 선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사상으로 리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창시한 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문책(文策)」에서 후세의 학자들이 실리(實理)를 구하지 아니하고 부조(浮藻)만 숭상하고 있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쳐 최경창(崔慶昌)ㆍ송익필(宋翼弼)ㆍ최립(崔岦)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의 호칭을 받기도 하였다[未弱冠, 與栗谷李先生, 龜峯宋翼弼, 東皐崔岦諸才子,脩禊唱洲于武夷洞, 世號八文章 -朴世采, 「孤竹詩集朽序)」].
그와 한때 이름을 나란히 한 최립(崔岦)은 율곡(栗谷)이 젊어서부터 글에 힘을 쏟지는 않았지만 천연(天然)에서 나와 평정명쾌(平正明快)하여 이른바 의식(衣食)과 같은 문장이라 평하였다[栗谷自少爲文不甚著力, 而文章出於天然, 平正明快, 眞所謂布帛菽粟之文也].
그가 남긴 시의 경향은 다양하여 도학의 성취를 보여주는 설리시(說理詩)도 있지만, 여반(館伴)으로 있을 때의 수창시(酬唱詩)와 개인의 정감을 노래한 서정시, 경물의 흥취를 읊은 서경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정언묘선서(精言妙選序)」에서 성정(性情)을 음영(吟詠)함으로써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 존성(存性)에 도움이 된다하여 시의 가치를 인정하였거니와[詩雖非學者能事, 亦所以吟詠性情, 宣暢淸和, 以滌胸中之滓穢, 則存性之一助], 직접 시선집(詩選集)을 편찬하고 시품(詩品)을 ‘충담소산(沖淡蕭散)’, ‘한미청적(閑美淸適)’, ‘청신쇄락(淸新灑落)’, ‘용의정심(用意精深)’, ‘격조청건(格調淸健)’, ‘정공묘려(精工妙麗)’ 등으로 나누어 놓기도 하였다.
대표작 「산중(山中)」을 보인다.
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 | 약을 캐다 갑자기 길을 잃었더니 왼 산 봉우리 가을잎 속에 있네. |
山僧汲水歸 林末茶烟起 | 산승(山僧)은 물을 길러 돌아가는데 숲가에는 차 끓이는 연기 피어오르네. |
사경(寫景)이 적실(的實)하여 원경(遠景)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송익필(宋翼弼, 1534 중종29~1599 선조32, 자 雲長, 호 龜峯ㆍ玄繩)
은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이(李珥)와 친교를 맺은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을 받은 학자이다. 학문과 문장을 겸비하여 팔문장(八文章)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시(詩)는 성당(盛唐)의 풍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宋龜峯以擊壤之理學, 兼盛唐之風韻, 誠不可當. -『호곡시화(壺谷詩話)』 13 / 宋儒理窟唐詩調, 屈指東方有此翁. -黃玹, 「讀國朝諸家詩」].
「남계모범(南溪暮泛)」을 보인다.
迷花歸棹晩 待月下灘遲 | 꽃에 미혹하여 돌아가는 배 저물고 달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가기 더디네. |
醉睡猶垂釣 舟移夢不移 | 취중에도 오히려 낚시 드리우니 배는 가는데도 꿈은 움직이지 않네. |
학자의 시작(詩作)에서는 정감(情感)의 유로(流露)가 최대한으로 억제되거나 여과(濾過)되어 표출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전편에 시인으로서의 서정과 취흥(醉興)이 넘치고 있다.
성혼(成渾, 1535 중종30~1598 선조31, 자 浩原, 호 牛溪ㆍ默庵)
은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반대하여 6년간 이 이와 함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이이(李珥)를 산하간기(山河間氣)의 인물로 추숭(推崇)하게 된다.
그의 시는 아정(雅正)하여 학자의 탈속(脫俗)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소회(所懷)를 잘 보여주는 「우음(偶吟)」을 보인다.
四十年來臥碧山 | 사십년 동안 푸른 산에 누웠으니 |
是非何事至人間 | 시비가 무슨 일로 인간세상에 이르리오? |
小堂無限春風地 | 작은 집 봄바람 부는 곳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
花笑柳眠閑又閑 | 웃는 꽃 조는 버들에 한가롭고 또 한가롭다. |
이 시와 정구(鄭逑, 1543 중종38~1620 광해군12, 자 道可, 호 寒岡)
의 「무제(無題)」는 이황(李滉)의 「의주(義州)」, 기대승(奇大升)의 「우제(偶題)」, 이이(李珥)의 「초당풍우(草堂風雨)」와 함께 홍만종(洪萬宗)에 의해 이학가(理學家) 시(詩)의 대표로서 작어(作語)가 천연(天然)하여 성정(性情)의 바름을 시에서 구현시킨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噫! 此等諸賢之詩, 作語天然, 各盡妙處, 其性情之正得於詩者, 於此可見矣. 『詩評補遺』 下篇].
정구(鄭逑)의 「무제(無題)」를 보인다.
月沉空谷初逢虎 | 달 진 빈 골짜기에서 처음 호랑이를 만나고 |
風亂滄溟始泛槎 | 바람 어지러운 푸른 바다에 비로소 뗏목 띄운다. |
萬事莫於平處說 | 모든 일이란 평정한 곳보다 더 좋은 것 없으니 |
人生到此竟如何 | 인생이 이에 이르면 마침내 어떠할까? |
『운강집(雲崗集)』은 대부분 문(文)으로 채워져 있어 역대의 시문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체제이다. 시작(詩作)은 만사(挽詞)까지 한데 묶어도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므로 시세계에 대한 논의는 따로 보탤 것이 없다.
3. 도선가(道仙家)의 명작(名作)
도교(道敎)는 그 시원(始原)에서부터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쉽게 습합(習合) 전승(傳承)되어 온 본래적 성격 때문에 문학사상으로서의 도교(道敎)는 따로 말하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이 일방적(一方的)으로 통행(通行)한 조선조의 분위기에서 도교는 불교보다도 더 깊숙히 숨은 채 겉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도통(道統)을 잇고 있는 인물들의 자세한 면모는 그리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은밀히 전해져 내려온 도가(道家) 관계의 서적들인 『행동전도록(海東傳道錄)』ㆍ『청학집(靑鶴集)』등과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을 통해서야 도가(道家)로 인정할 수 있는 인물들의 명호(名號)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조여적(曺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는 김선자(金蟬子)ㆍ채하자(彩霞子)ㆍ취굴자(翠窟子) 등 익명성이 강한 이름을 보이고 있으며,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단군(檀君)ㆍ혁거세(赫居世)ㆍ동명왕(東明王) 등 우리나라 역대 도가(道家)들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도맥(道脈)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도맥(道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사람은 최치원(崔致遠)과 김시습(金時習)이며 이 중 김시습(金時習)은 조선시대 도맥(道脈)의 전수자로 되어 있다. 김시습은 자신의 도(道)을 홍유손(洪裕孫)ㆍ정희량(鄭希良)ㆍ윤군평(尹君平)에게 전했고, 이 가운데 정희량(鄭希良)이 승(僧) 대주(大珠)에게 이를 전했고, 다시 악 대주(大珠)가 정렴(鄭磏)과 박지화(朴枝華)에게 전했다 한다[時習授天遁劍法鍊魔其訣於洪裕孫, 又以王涵記內丹之要授鄭希良, 參洞龍虎秘旨授尹君平 …… 鄭希良授僧大珠, 大珠授鄭磏朴枝華 …… 「道藏總說)」 『分類五洲衍文長箋散稿』 제18집].
김시습에서 정희량(鄭希良)을 거쳐 정렴(鄭磏)과 박지화(朴枝華)로 전해진 이 도맥(道脈)에서 흥미로운 것은 익명이나 다름없는 여타의 도가(道家)들과는 달리 이들 모두가 시인으로도 유명하여 각 시선집에 작품이 다수 뽑혀 있다는 사실이다. 사승관계(師僧關係)로 묶여 있는 김시습과 정희량(鄭希良), 정희량(鄭希良)과 정렴(鄭磏)ㆍ박지화(朴枝華)의 직접적인 관계는 이들의 문집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렴(鄭磏)과 박지화(朴枝華)가 밀접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그들의 문집에 산견되는 작품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정렴(鄭磏)의 동생이며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인 정작(鄭碏)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정렴(鄭磏, 1506 중종1 ~ 1549 명종4, 자 士潔, 호 北窓)과 정작(鄭碏, 1533 중종28~1603 선조36, 자 君敬, 호 古玉)
형제는 정순명(鄭順朋)의 장남(長男)과 오남(五男)이다.
아버지 정순붕은 처음에는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과 친분을 맺은 신진사류(新進士流)의 일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만을 면하여 17년간 폐출(廢黜)되었다가 다시 등용된 후 만년에 이르러는 윤원형(尹元衡)의 세도에 의부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는 데 큰 활약을 함으로써 임백령(林百齡)ㆍ정언각(鄭彦慤)과 함께 을사삼간(乙巳三奸)으로 폄척(貶斥) 당하게 되었다. 정렴(鄭磏)이 벼슬을 버리고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과 양주(楊州) 괘라리(掛羅里)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도가(道家) 쪽으로 더욱 경도하게 된 것은 아버지 정순붕과 아우 정작(鄭碏)과의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조경(趙絅), 「북창선생양광변(北窓先生佯狂辨)」에 정현이 그의 형 정렴을 죽이더라도 을사상화(乙巳上禍)를 빨리 진행해야 된다고 아버지 정순붕을 설득하는 장면이 보인다】.
정렴(鄭磏)에 대한 여러가지 기록에는 그가 어릴 때부터 특별한 사승 관계 없이 각종 잡기에 능통했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北窓生而靈異, 博通三敎. 其修攝似道, 解語類禪, 而倫常行誼一本吾儒, 以至方技衆藝各臻奧妙, 然皆非學而得也 -張維,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 北窓先生生而栗天地自然之氣, 於衆藝不學而通. -李景奭,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 北窓先生磏質稟自然, 生而神異. 道貫三敎, 其歸本於儒, 方技衆藝, 皆不學自解. -吳䎘,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과 『국조기사(國朝記事)』를 인용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그의 재주는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음악(音樂)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산수(算數)ㆍ중국어(中國語)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새나 짐승의 말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及長, 無所不通, 如天文地理音樂醫藥卜筮算華語, 皆不學而能. -李仲悅, 『乙巳傳聞錄』 / 及長, 無所不通, 如天文地理音樂醫藥卜筮筭數華語, 皆不學而能 …… 亦解鳥獸音. -李肯翊, 『燃藜室記述』].
중국에서 여러 나라의 사신과 각각 그 나라의 말로 대화를 나눈다든지 새나 짐승의 말을 이해하여 앉은 채 먼 곳의 일을 알아낸다는 등의 신비적 도가의 분위기를 보이는 일화 외에 수련 도가로서 정렴(鄭磏)의 모습을 가장 약여(躍如)하게 보이는 것은 의약(醫藥)에 대한 그의 조예이다【『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주로 신비적 도가로서의 정렴이 그의 중국 기행을 중심으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음률(音律)에 밝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천문(天文)에 밝아 관상감(觀象監) 교수(敎授)를, 의약에 밝아 혜민서(惠民署) 교수(敎授)를 겸임하였던 그는 인조(仁祖)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다른 의사들과 함께 임금을 진맥하기도 하였다[鄭北窓磏與內醫諸提調入診. -朴東亮, 『寄齋雜記』].
도가(道家)에서 중요시한 양생술(養生術)이 곧 의약(醫藥)의 연구로 이어지는 것으로 정렴(鄭磏)은 그의 양생술(養生術) 이론을 「용호비결(龍虎秘訣)」에 남기고 있다【「용호비결(龍虎秘訣)」은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 인용되어 있다】.
정렴(鄭磏) 자신은 43세로 비교적 단명했지만, 그에게서 도가적 연단술을 배운 아우 정작(鄭碏)은 상처(喪妻)한 후 36년간 혼자 살면서 여색을 가까이 않고 70세의 수를 누렸다[其弟碏, 號古玉, 亦異人也. 從兄得修煉之學, 獨居三十六年, 不近女色, 嗜酒能詩, 又深於醫方, 多神效. -洪萬宗, 『海東異蹟』 / 好淸淨, 入金剛山得修鍊之道. 中年妻死, 不更娶, 斷欲三十六年, 以壽終. -許穆, 「淸士列傳」, 「記言」]
박지화(朴枝華, 1513 중종8~1592 선조25, 자 君實, 호 守庵)
는 서얼(庶孼) 출신의 시인으로, 유불도(儒佛道) 삼교에 두루 통했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이다. 그도 유불도(儒佛道) 삼교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신선수련(神仙修煉)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嘗從徐花潭受業 …… 儒道釋三學, 著功俱深. -洪萬宗, 『海東異蹟)』 / 外史氏曰 世稱朴守庵, 學神仙修煉術者. -張志淵, 『逸士遺事』 卷二]
그는 북창(北窓)과 교유가 깊었고 북창(北窓)의 아우 정작(鄭碏)을 문인(門人)으로 받았다[與北窓交相善, 北窓之弟古玉丈人師塾之 -許穆, 「朴守庵事」, 「記言」].
이들은 모두 도가(道家)를 지향하면서도 그 근본을 유가(儒家)에 두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렴(鄭磏)ㆍ정작(鄭碏) 형제는 아버지와 형제가 바람직한 유가(儒家)의 도에서 일탈했기 때문에, 박지화(朴枝華)는 서얼 출신의 한계 때문에 도가(道家) 쪽으로 경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렴(鄭磏)이 후손에게 남긴 유훈(遺訓)에서 유가(儒家)의 덕목(德目)을 강조하고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거하여 제사(祭祀)를 행하며 초학자의 길잡이로 『근사록(近思錄)』과 『소학(小學)』을 읽으라는 내용을 남긴 것과 박지화(朴枝華)가 수련법(修練法)을 묻는 제자들의 청을 거절한 일화에서 확인된다[事父母以孝悌爲本, 待妻子以和順爲先, 居家以節儉爲要, 處世以謙退爲務. …… 凡祭祀一依朱文公家禮 …… 近思錄小學書初學之逕蹊꽃, 而世俗不之看. -鄭磏, 「遺訓」 / 好修鍊之術, 入金剛七年而返, 弟子請問其術, 先生曰 遺世獨行之士或爲之, 非學者之先務也. -許穆, 「朴守庵事」, 「記言」]
1547년(명종2)에 정렴(鄭磏)ㆍ정작(鄭碏)ㆍ박지화(朴枝華)가 함께 봉은사(奉恩寺)를 놀러가면서 배안에서 지은 시에는 이들의 긴밀한 친분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정렴의 「휴박군실지화사제군경 향봉은사 주중작(携朴君實枝華舍弟君敬, 向奉恩寺, 舟中作)」부터 본다.
孤烟橫古渡 落日下遙山 | 외로운 연기 옛 나루에 빗기고 지는 해는 먼 산에 떨어지네. |
一掉歸來晚 招提杳靄間 | 외로운 배 느지막히 돌아오는데 절은 아득한 노을 사이에 있네. |
이 시는 『국조시산(國朝詩刪)』ㆍ『기아(箕雅)』ㆍ『대동시선(大東詩選)』에 모두 선록(選錄)되어 있는데 허균(許筠)은 이에 대해 ‘그 시람은 기이한데 시 또한 맑고도 고원하다[其人異也, 詩亦淸遠]’라 했다. 정렴(鄭磏)이 노을이 질 때 배 안에서 멀리 보이는 봉은사(奉恩寺)의 모습을 탈속(脫俗)의 분위기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음에 비해 박지화(朴枝華)는 자연물과 동화하려는 정신적 지향을 보이고 있다.
孤雲晚出岫 幽鳥早歸山 | 구름은 저녁에 산동굴에서 나오고 새는 일찍 산으로 돌아가네. |
余亦同舟去 忘形會此間 | 나도 함께 배를 타고 떠나가니 이 사이에서 때마침 이 몸 있는 줄도 잊었네.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보이는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을 점화(點化)하여 서경(敍景)으로 기(起)ㆍ승구(承句)를 구성하고 전(轉)ㆍ결구(結句)에서 자연과 함께 동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日暮暝煙合 蒼茫山外山 | 해 저물어 어둠과 이내 잘 어울리고 아득히 산 밖에 또 산이 있네. |
招提問何處 鐘定翠微間 | 묻노니 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종소리 산중턱에서 그친다. |
정작(鄭碏)은 이때 나이가 열다섯으로 ‘산외산(山外山)’을 찾고자 하는 지향과 아울러 장형(長兄)과 사부에게 자신이 아직 모르는 것을 묻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평보유(詩評補遺)』에서는 이 세편의 시를 비교하면서 북창(北窓)의 시가 다른 둘에 비해 당시(唐詩)의 수준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鄭磏(北窓, 溫陽人, 縣監. 嘗携其弟古玉碏朴守菴枝華)向奉恩寺, 舟中作詩曰: ‘孤烟橫古渡, 落日下遙山. 一掉歸來晚, 招提杳靄間.’ 守菴次之曰: ‘孤雲晚出岫, 幽鳥早歸山. 余亦同舟去, 忘形會此間’ 古玉次之曰: ‘日暮暝煙合, 蒼茫山外山. 招提問何處, 鐘定翠微間.’ (北窓最逼唐) -『詩評補遺』 上篇]
한편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에 도가적(道家的) 지향을 보여준 또 한 명의 시인으로 양사언(楊士彦, 1517 중종12~1584 선조17, 자 應聘, 호 蓬萊ㆍ海容ㆍ完邱ㆍ滄海ㆍ海客)
이 있다. 앞에서 본 세 사람과의 교유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호를 봉래(蓬萊)라 한 것과 「단사부(丹砂賦)」 등 문집에 산견되는 작품들을 통해 그의 도가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선취(仙趣)를 잘 보여주는 「국도(國島)」를 보인다.
金玉樓臺拂紫煙 | 금옥루대에 자주빛 연기 스쳐가니 |
鳳獜洲渚下羣仙 | 용이 노는 구름 길에 뭇 신선(神仙) 내려오네. |
靑山亦厭人間世 | 푸른 산도 인간세상 싫어했던지 |
飛入滄溟萬里天 | 푸른 바다 만리 속으로 날아 들어갔네.. |
전편의 배경 설정이 전혀 비인간(非人間)의 별세계로 조성되고 있어 시인의 도선가적(道仙家的) 시세계를 끌어내어 보이기에 충분하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봉래(蓬萊)가 풍악(楓岳)에서 읊은 삼오칠언시(三五七言詩)인 「제발연반석상(題鉢淵磐石上)」를 두고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다[深有仙風道骨]’고 하였거니와, 홍만종(洪萬宗) 또한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국도(國島)」를 가리켜 ‘속태를 벗어났다[脫去塵臼]’고 평하고 있다.
4. 당파(唐派)의 광망(光芒)
고려조(高麗朝) 시학(詩學)이 융성해지면서 우리 소단(騷壇)은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송시학(宋詩學)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그 발전을 이룩해왔다.
선초(鮮初)에 두시(杜詩)를 언해(諺解)한 이래 간헐적으로 이어진 학당(學唐)의 흐름은 조선중기 목릉성세(穆陵盛世)에 들어 비로소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12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시인이 송나라와 원나라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않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주와 유호인과 신종호와 신광한은 당풍에 가깝다 일컬어지지만 깊이 나아가는 공력이 없는 듯하다. 박순과 최경창과 백광훈과 이순인과 이달은 모두 당풍을 배웠으니 지은 시가 칭송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다만 절구가 오언율시에 그쳐 칠언율시 이상의 장편시는 좋을 수 없고 또한 성당에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재주와 학문의 연원이 본래 미천해서 그런 것인데 잘 모르는 이들은 당풍을 배운 잘못이라 여기니 가소롭기만 하다.
本朝詩人, 不脫宋元習者無幾. 如李冑ㆍ兪好仁ㆍ申從濩ㆍ申光漢號近唐, 而似無深造之功. 朴淳ㆍ崔慶昌ㆍ白光勳ㆍ李純仁ㆍ李達, 皆學唐, 其所爲詩有可稱誦者. 但止於絶句或五言律, 而七言律以上則不能佳, 又不能進於盛唐. 是其才學淵源本小而然, 不知者以爲學唐之咎可笑.
조선의 시인들이 대부분 송(宋)과 원(元)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이주(李胄)ㆍ유호인(兪好仁)ㆍ신종호(申從濩)ㆍ신광한(申光漢) 등이 겨우 당시(唐詩)와 비슷한 시를 제작했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하고, 당시(唐詩)를 제대로 배운 시인으로 박순(朴淳)ㆍ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순인(李純仁)ㆍ이달(李達) 등을 들었다. 이수광(李睟光)의 이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학송(學宋) 일변도의 소단(騷壇) 분위기를 학당(學唐)으로 바꾸어놓은 선구자로는 박순(朴淳)이 첫손에 꼽힌다.
박순(朴淳, 1523 중종18~1589 선조22, 자 和叔, 호 思庵)
은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14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당시(唐詩)를 모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시인이다.
박순(朴淳)이 삼당시인(三唐詩人)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이달(李達)에게 학당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장면이 허균(許筠)의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 그려져 있다. 박정승은 이달(李達)에게 ‘시의 길은 마땅히 당(唐)을 정도(正道)로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지만 이미 이류로 떨어졌다[詩道當以爲唐爲正, 子瞻雖豪放, 已落第二義也]’고 말하고 시렁 위에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와 가음(歌吟),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를 꺼내어 주었더니 이달(李達)은 깜짝 놀라며 바른 법도가 이에 있음을 알아 마침내 옛날 배웠던 것을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학시(學詩)에 대한 견해가 그러할 뿐 아니라 그의 시 또한 당시(唐詩)에 근접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후대의 신흠(申欽)은 『청창연담(晴窓軟談)』 권하 45에서 그가 당시(唐詩)를 익혀 시풍이 ‘청소(淸邵)’하다고 고평을 보냈다[至於得正覺者, 猶不多, 思庵朴公淳, 近來稍涉唐派爲詩, 甚淸邵].
그의 시(詩)로는 「방조처사산거(訪曹處士山居)」(七絶), 「사은후귀영평(謝恩後歸永平)」(七絶), 「여산군별행사상인(礪山郡別行思上人)」(七絶), 「제양총병묘(題楊總兵廟)」(七絶)」,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七絶)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박순(朴淳)의 시명(詩名)을 가장 떨치게 한 작품으로는 「방조처사산거(訪曹處士山居)」를 꼽을 수 있다.
醉睡仙家覺後疑 | 선경에서 잠들었나 깨고나서 의심했는데, |
白雲平壑月沈時 | 구름 덮인 산골짜기에 달이 질 때로다. |
翛然獨出脩林外 | 재빨리 호올로 긴 숲 밖으로 나가니, |
石逕筇音宿鳥知 |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아는구나. |
원제는 「방조운백(訪曺雲伯)」으로 백운동(白雲洞)에 은거하고 있는 조준용(曺俊龍, 字 雲伯)을 찾아가 쓴 작품이다. 신선의 집과 같은 친구의 은거지에서 새벽에 잠이 깨어 홀로 지팡이를 짚고 나서니 자던 새가 그 소리에 놀라 깨는 정경을 한 폭의 수채화같이 맑은 필치로 그리고 있다.
결구(結句)의 ‘숙조지(宿鳥知)’가 하도 유명해 박순(朴淳)의 별명이 ‘숙조지선생(宿鳥知先生)’으로 되었으며, 후대의 시화집(詩話集)에 자주 화제가 될 정도로 이름난 작품이다【『호곡시화(壺谷詩話)』 3과 『지봉유설(芝峰類說)』 동시126 참조】.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20에서 박순(朴淳)의 시세계에 속기(俗氣)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박순(朴淳)의 뒤를 이어 우리 시단에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널리 보급하는데 큰 공을 보인 작가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세 사람이다.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통칭한 첫 기록은 임상원(林相元)의 「손곡집서(蓀谷集序)이다. ‘선조 연간에 이르러 『상당집(三唐集)』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는데,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ㆍ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이른다. 이 세 사람은 힘써 당을 모의하여 간혹 아주 비슷한 것이 있다[當穆陵朝, 有稱三唐集者, 崔孤竹慶昌ㆍ白玉峯光勳ㆍ李蓀谷達也. 是三子者, 刻意摹唐, 間有他相肖者]’라 한 것이다.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합칭(合稱)하여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파악하는 흐름은 허균(許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융경(隆慶, 1567~1572),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연간(713~741, 곧 盛唐 시기)의 시를 배우고 정화를 이루기에 힘써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뼈대가 완전하지 않고 수식이 너무 지나쳐 허혼(許渾)과 이교(李嶠)의 사이에 두더라도 곧 촌뜨기의 꼴임을 깨닫게 되니 어찌 이백(李白)과 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을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이로부터 학자들이 당풍(唐風)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 둘 수는 없다[隆慶萬曆間, 崔嘉運白彰卿李益之輩, 始政開元之學, 黽勉精華, 欲逮古人. 然骨格不完, 綺靡太甚, 置諸許李間, 便覺傖夫面目, 乃欲使之奪李白摩話位耶? 雖然, 由是學者知有唐風, 則三人之功, 亦不可掩矣].’고 한 것이 허균(許筠)의 말이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年長)이면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는 최경창(崔慶昌)이다.
최경창(崔慶昌, 1539 중종34~1583 선조16, 자 嘉運, 호 孤竹)
은 최충(崔沖)의 18세 손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좌장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내다 대관(臺官)의 탄핵으로 직급이 깎인 채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종성(鏡城) 객관에서 죽었다.
그는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이후백(李後白)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그는 당시(唐詩)를 배울 것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시 또한 당풍(唐風)을 잘 구현해 낸 것으로 이름이 높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10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최경창(崔慶昌)의 시를 극찬했다.
나는 일찍이 선배들에게서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 오직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만이 시종 당시(唐詩)를 배워 송시(宋詩)의 격조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높은 것은 무덕(武德, 618~626, 곧 初唐 시기)ㆍ개원(開元, 713~741, 곧 盛唐 시기)의 수준에 들고, 낮은 것도 장경(長慶, 821 ~824, 곧 中唐시기)의 시어(詩語)를 말하지 않았다. ‘봄 물은 옛 성을 두르고, 들불은 높은 산을 오르네[春流繞古郭, 野火上高山].’와 같은 것은 중당(中唐)의 시와 비슷하고, ‘사람과 연기는 강에서 떨어짐이 적고, 바람과 눈은 관문에 가까움이 많네[人烟隔河少, 風雪近關多]’와 같은 것은 성당(盛唐)의 시와 비슷하고, ‘산에는 태고의 눈이요, 늙은 나무에는 태평스런 아지랑이라[山餘太古雪, 樹老太平烟]’와 같은 것은 초당(初唐)의 시와 비슷하다. 오늘의 세상에 다시 이와 같은 격조와 음향이 나타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
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其高者出入武德·開元, 下亦不道長慶以下語, 如‘春流繞古郭, 野火上高山.’ 則中唐似之, ‘人烟隔河少, 風雪近關多.’ 則似盛唐, ‘山餘太古雪, 樹老太平烟.’ 則似初唐. 不知今世復有此等調響耶.
그의 시는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선 ‘청경(淸勁)’으로,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선 ‘한경(悍勁)’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청숙(淸淑)’이라는 평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많다. 그의 이러한 시풍(詩風) 때문에 그는 절구(絶句)에서 특장을 보였는지 모른다. 「제고봉군산정(題高峰郡山亭)」(五色), 「영월루(暎月樓)」(七絶), 「천단(天壇)」(七絶), 「채련곡차정지상운(采蓮曲次鄭知常韻)」(七絶), 「대은암남지정고택(大隱巖南止亭故宅)」(七絶), 「기양주성사군의국(寄楊州成使君義國)」(七絶), 「기성진상인(寄性眞上人)」(七絶), 「제승축(題僧軸)」(七絶), 「인이달북귀기관찰민헌(因李達北歸寄觀察民獻)」(五律), 「조천(朝天)」(七律) 등이 널리 알려져 있는 명편(名篇)들이다.
최경창(崔慶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은암(大隱巖)」을 보인다.
門前車馬散如烟 | 찾아오는 높은 손님 연기처럼 사라지고 |
相國繁華未百年 | 재상의 영화도 백 년을 못 가는 것을. |
深巷寥寥過寒食 | 고요한 마을 거리엔 한식(寒食)이 지나가는데, |
茱萸花發古墻邊 | 담장 가에 수유꽃만 활짝 피었네. |
이 시의 원제는 「대은암남지정고택(大隱巖南止亭故宅)」으로 남곤(南袞)의 옛 집을 지나며 쓴 것이다. 남곤은 중종(中宗) 연간에 심정(沈貞)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조작하여 많은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하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그가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그의 집 앞에는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의 사후 관작(官爵)마저 삭탈당한 그의 집 앞에 이제는 우연히 지나게 된 이 시인 외에 찾아오는 손님은 없다.
허균(許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 시를 가리켜 “풍자가 뼈에 사무친다[諷刺入髓]”고 하였으며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 시화22에서 이 시가 이장곤(李長坤)의 옛 집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당시(唐詩)의 맛을 낸 대표작이라고 하였다[近來學唐詩者 皆稱崔慶昌李達 姑取其善鳴者而錄之 崔慶昌過李長坤故宰相家 有詩曰 門前車馬散如烟 相國繁華未百年 村巷寥寥過寒食 茱萸花發古墻邊].
개자추(介子推)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시어(詩語) ‘한식(寒食)’을 선택함으로써 풍자의 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최경창(崔慶昌)의 「기박관찰(寄朴觀察)」은 다음과 같다.
草草河邊酒 悠悠別後期 | 조촐하게 강가에서 술 마시고 훗날 다시 만날 기약은 아득하네. |
聊因北歸客 始寄去年詩 | 애오라지 북으로 가는 손님으로 인해, 지난해에 지은 시 비로소 붙여 보내네. |
塞外早霜落 關中芳草衰 | 변방에는 일찍이 서리가 내리어 관중에는 고운 풀 시들어졌네. |
相思月頻滿 秋鴈到來遲 | 서로들 생각한 지 몇달이 지났는데도, 가을 기러기 오는 것이 이렇게 더디네.. |
원제는 「인이달북귀기관찰민헌(因李達北歸寄觀察民獻)」이다. 전별 당시의 아쉬움을 아직 지니고 있는 작자가 마침 함경도로 가는 이달(李達)의 편에 함경도 관찰사로 있는 박민헌(朴民獻)에게 보낸 시이다.
대우(對偶)가 공교하여 허균(許筠)은 ‘시구(詩句)를 조탁한 것이 이러이러하다[琢句如是如是]’고 평하였거니와 수련(首聯)과 미련(尾聯)의 상응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 한잔 술을 나누고 다시 만나기로 기약했지만 달이 가고 또 가도 소식을 전하는 기러기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로 끝맺음을 한 솜씨가 그러한 것이다.
백광훈(白光勳, 1537 중종32~1582 선조15, 자 彰卿, 호 玉峯)
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시문으로 자적하며 평생을 보낸 시인이다. 당대에는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최백(崔白)으로 불리웠고, 후일 이달(李達)을 포함하여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웠다.
후세의 평가(評家)에 따르면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은 모두 당시(唐詩)를 배워 정도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둘 가운데서는 최경창(崔慶昌)이 좀더 나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양자(兩者)의 시풍(詩風)은 각각 특징이 달라서 최경창(崔慶昌)의 시풍(詩風)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선 ‘청경(淸勁)’으로,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선 ‘한경(悍勁)’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청숙(淸淑)’으로 평하여 『호곡시화(壺谷詩話)』 16에서 ‘밝게 남국에서 홀로 비추는 빛[炯然南國之孤照]’과 같다고 한 데 비해, 백광훈(白光勳)의 시풍(詩風)은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선 ‘고담(枯淡)’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수랑(瘦朗)’으로 평하여 『호곡시화(壺谷詩話)』 16에서 ‘흰 머리가 될 때까지 가을 풀벌레소리나 내는 것[吟作秋蟲到白頭]’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경사(弘慶寺)」(五絶), 「낙중별우(洛中別友)」(五絶), 「송고종(宋高宗)」(七絶), 「삼차송월(三叉松月)」(七絶), 「서군수제(徐君受第)」(七絶), 「억고죽(億孤竹)」(五律), 「송심공직부춘천(送沈公直赴春川)」(五律), 「봉은사차이백생견기지운(奉恩寺次李伯生見寄之韻)」(七律)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백광훈(白光勳)의 특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 「홍경사(弘慶寺)」이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 전조의 절에는 가을 풀 우거지고, 다 쓰러진 비석에는 학사의 글만 남았네. |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 천년을 두고 흐르는 물, 석양에 돌아가는 구름 보겠네. |
홍경사(弘慶寺)는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있는 절이다. 교통의 요지임에도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고 갈대가 무성하여 도적떼가 들끓자 고려 때 현종(顯宗)이 절을 세울 것을 명하여 병부상서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세웠다.
절이 완성된 후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고 이름을 내렸다. 또 절 서쪽에 객관을 세워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한림학사 최충(崔沖)에게 명하여 비문(碑文)을 짓도록 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에 나온다. 백광훈(白光勳)의 시대에는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었다.
이곳을 지나던 시인이 전 왕조의 잔해만 남아 있는 절을 보고 느낀 감회를 담아 내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노수신(盧守愼)의 「신륵사차각장로축운(神勒寺次覺長老軸韻)」에 쓰인 ‘신륵전조사 고승보제거(神勒前朝寺, 高僧普濟居).’를 가져온 것이다. 노수신의 시에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신륵사의 웅장한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전조사(前朝寺)’라는 표현이 이곳에서는 무한한 감개를 불러 일으키는 시어(詩語)로 쓰이고 있다. 이는 원래 당(唐) 사공도(司空圖)가 「경폐보경사(經廢寶慶寺)」에서 ‘황엽전조사 무승한전개(黃葉前朝寺, 無僧寒殿開)’로 사용했던 것이기도 한데, 노수신은 이 표현의 뜻을 뒤집어 사용했고, 백광훈(白光勳)은 이를 다시 원래의 의미로 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은 ‘절창(絶唱)’이라 했고, 홍만종(洪萬宗)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108에서 ‘매우 우아하여 고조(古調)에 가깝다[雅絶逼古]’고 평하였다.
이달(李達, ?~?, 자 益之, 호 蓀谷)
은 시재(詩才)가 삼당시인(三唐詩人) 가운데 가장 뛰어날 뿐 아니라 조선중기 제일의 비평대가로 손꼽히는 허균(許筠)에게 시를 가르쳐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이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재주를 다 펴기 어려웠던 데 비해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지날 때까지 살아 있었으며, 특히 만년에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스스로 일가의 격을 이루었고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장경(劉長卿)에 비견될 만큼 높이 평가했다.
최경창ㆍ백광훈ㆍ이달(삼당시인)의 시는 모두 바른 소리를 본받았다. 최경창은 맑고도 굳세며, 백광훈은 마르고 담백하니 모두 귀중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기력이 미치지 못해 조금 일의 두터움에서 잃었다. 이달은 풍부하고 요염하니 두 작가에 비교하면 자주 매우 뛰어났으니 모두 중당시인인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울타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달은 만년에 문장이 크게 진일보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화려함과 고움을 수렴하여 평탄하고 내실 있는 데로 귀의했다. 둘째 형님께선 자주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유장경【수주(隨州): 당 나라 중당(中唐)의 시인 유장경(劉長卿)이 수주자사(隨州刺史)를 지냈으므로 부르는 이름임. 자는 문방(文方), 개원(開元) 21년에 진사(進士)가 됨. 『유수주집(劉隨州集)』11권이 있다】과 어깨를 견줄 만하니 또한 많이 사양할 게 없다.”
崔白李三人詩, 皆法正音. 崔之淸勁, 白之枯淡, 皆可貴重. 然氣力不逮, 稍失事厚. 李則富豔, 比二氏家數頗大, 皆不出郊ㆍ島之藩籬. 崔白早世, 李晩年文章大進, 自成一家, 斂其綺麗, 歸於平實. 仲氏亟稱曰: “可與隨州比肩, 亦不多讓.”
이달(李達)을 특히 높이 평가한 것은 허균(許筠)과 허봉(許篈) 형제였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서 그의 재주가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을 아우른다고 하였고, 『성수시화(惺叟詩話)』 53에서 허봉(許篈)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를 배운 이로는 신라 이래로 그를 넘어설 자가 없다고까지 극찬했다고 전했다.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고절(孤絶)’로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의 시작(詩作) 중에는 「산사(山寺)」(五絶), 「강릉별이예장((江陵別李禮長)」(五絶), 「육언(六言)」(六絶), 「양양곡(襄陽曲)」(七絶), 「채련곡차정대간운(采蓮曲次鄭大諫韻)」(七絶), 「장신사시궁사(長信四時宮詞)」(七絶), 「사시사청평조(四時詞淸平調)」(七絶), 「파산망고죽장(坡山望孤竹庄)」(七絶), 「양양도중(襄陽道中)」(五律), 「상강릉양명부(上江陵楊明府)」(五律), 「귀성증임명부식(龜城贈林明府植)」(七律), 「조령문두견(鳥嶺聞杜鵑)」(七律), 「만랑무가(漫浪舞歌)」(七古)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고정절조(孤情絶照)’라는 평가를 받은 이달(李達)의 「강릉별이예장지경(江陵別李禮長之京)」을 보인다.
桐花夜煙落 海樹春雲空 | 오동꽃은 밤안개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에 성글다. |
芳草一杯別 相逢京洛中 | 훗날 한잔 술로, 서울에서 다시 만나세. |
이달(李達)의 경박한 사람됨을 염려하여 손님으로 맞지 말 것을 권유한 허엽(許曄)에게 양사언(楊士彦)이 ‘동화야인락 해수춘운공(桐花夜姻落, 海樹春雲空)’의 이달(李達)이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蓬萊宰江陵, 賓遇益之, 益之爲人不檢, 邑人訾之. 先子貽書勗之. 公復曰: “‘桐花夜煙落, 梅樹春雲空’之李達, 設若踈待, 則何異於陳王初喪應劉之日乎?” 『鶴山樵談』].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126에선 최경창(崔慶昌)이나 이달(李達)의 시에 고인(古人)의 시구(詩句)를 모의한 것이 많다고 비난했거니와, 이 시 또한 그러한 혐의를 엿볼 수 있다. 즉 왕유(王維) 「조명간(鳥鳴澗)」의 ‘인한계화락 야정춘산공(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과 허혼(許渾) 「송객남귀유회(送客南歸有懷)」의 ‘장안일배주 좌상유귀인(長安一杯酒, 座上有歸人)’ 등의 구법과 매우 비슷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악부제(樂府題) 「양양곡(襄陽曲)」을 가져와 칠언절구로 제작해 낸 이달(李達) 「양양곡(襄陽曲)」이다.
平湖日落大堤西 | 잔잔한 호수에 해가 큰 뚝 서쪽으로 떨어지니, |
花下遊人醉欲迷 | 꽃 아래 노는 남정들 술에 취해 헤매이네. |
更出敎坊南畔路 | 다시 교방의 남쪽 길을 나서니, |
家家門巷白銅鞮 | 골목길 집집마다 백동제(白銅鞮) 노래로다. |
「양양곡(襄陽曲)」은 청상곡사(淸商曲辭) 서곡가(西曲歌)의 이름으로 남조(南朝) 송(宋)의 수왕탄(隨王誕)이 처음 지은 것이다. 이백(李白)이 지은 악부에 「양양가(襄陽歌)」가 있는데, 이달(李達)의 이 작품은 이백의 그것을 전반부만 차운(次韻)한 것이기도 하다.
이백의 “落日欲沒峴山西, 倒着接䍦花下迷. 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 旁人借問笑何事, 笑殺山公醉似泥”에 보이는 ‘백동제(白銅鞮)’는 양(梁) 무제(武帝) 때 아이들이 “襄陽白銅蹄, 反縛揚州兒”라 불렀다는 동요의 이름으로 여기에서 「양양곡(襄陽曲)」이라는 제목이 나온 것이다.
허균(許筠)은 이 작품에 대해 ‘풍류 문체가 천고를 비춘다[風流文采, 照映千古]’고 했다.
정지승(鄭之升, ?~?, 자 子愼, 호 叢桂堂)
은 도선가(道仙家) 시인으로 유명한 정렴(鄭磏)과 정작(鄭碏)의 조카이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원흉으로 지목된 정순명(鄭順朋)의 손자이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채 불우한 삶을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에 못지 않을 정도로 당풍(唐風)을 보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상춘(傷春)」(五絶), 「유별(留別)」(七絶), 「정숙부(呈叔父)」(七律), 「송성칙우유풍악(送成則優遊楓嶽)」(七古) 등이 유명하다. 「상춘(傷春)」을 보인다.
草入王孫恨 花添杜宇愁 | 풀 끝에 왕손의 한이 맺히어 꽃은 두견새 시름 더 슬프게 하네. |
汀洲人不見 風動木蘭舟 | 강 가운데 모래 밭에 사람 보이지 않는데, 바람 불어 목란주(木蘭舟) 움직이고 있네. |
『총계당유고(叢桂堂遺稿)』에는 「정주즉사(汀洲卽事)」로, 기타의 시선집에는 「상춘(傷春)」으로 되어 있는 정지승의 대표작이다. 『초사(楚辭)』 「초은(招隱)」 상(上)의 ‘왕손유혜불귀 춘초생혜처처(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를 가져와 기구(起句)를 구성하고, 승구(承句)에서는 꽃이 피고 두견새 우는 것을 시름겹다고 하여 남들과 달리 봄을 즐기지 못하는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제호시화(霽湖詩話)』에서 양경우(梁慶遇)에 의해 ‘최근의 뛰어난 작품이다[近代絶唱]’으로 고평을 받은 바 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지봉유설(芝峰類說)』 동시 141에선 당시집(唐詩集) 속에 섞어 놓았더니 최경창(崔慶昌) 같은 이도 가려내지 못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混書唐詩集中, 以示崔慶昌諸人, 皆不能辨云, 而細味之, 有不似唐者矣].
고경명(高敬命, 1533 중종28~1592 선조25, 자 而順, 호 霽峰)
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의병장이 된 문신으로 문명을 떨쳤다. 고경명(高敬命)은 정쟁(政爭)에 휘말려 파직되자 광주(光州)로 돌아가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호남시단의 풍류를 한층 진작시켰다. 그는 낙향한 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은 『제봉집(霽峯集)』의 서문(序文)에서 고경명(高敬命)은 의기로써 뿐만 아니라 시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칭송하였으며 유근(柳根)도 발문(跋文)에서 ‘문자(文字)는 소절(小節)이요 정기(正氣)가 더 중요하나 이 두 가지를 겸비하였다.’라고 하여 고경명(高敬命)의 시문과 의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의 시는 자연경물을 보고 느낀 감회를 노래한 것과 자신의 회포를 읊은 것이 많은데,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농부(穠富)’로,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97에선 ‘청신고매(淸新高邁)’로 평했다. 「식귤(食橘)」(七絶), 「어주도(漁舟圖)」(七絶), 「정고봉기대승(呈高峰奇大升)」(五律), 「백상루(百祥樓)」(七律), 「식금인어유감(食錦鱗魚有感」(七律), 「사림정자복송서(謝林正字復送酒)」(七律) 등이 알려진 작품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식귤(食橘)」은 강남 땅에서 농익은 귤을 보고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는 심사를 읊은 것으로 특히 허균(許筠)이 ‘슬프게도 풍수(風樹)의 탄식이 있으니, 천고(千古)의 절창(絶唱)[愴然風樹之懷, 千古絶唱]’이라 칭송한 작품이다.
고경명(高敬命)의 「어주도(漁舟圖)」는 자연과의 합일을 읊은 제화시(題畵詩)로 경물의 묘사가 생동감을 주는 수작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蘆洲風颭雪漫空 | 갈대섬에 바람 일어 눈발이 허공에 가득한데, |
沽酒歸來繫短篷 | 술을 사 돌아와서 작은 배를 매었네. |
橫笛數聲江月白 | 비껴부는 피리 소리에 강월(江月)이 흰데, |
宿禽飛起渚烟中 | 자던 새 안개낀 물가에서 날아오르네. |
시와 그림은 보통 한 가지 규율을 가진 예술이라고 일컬어진다. 흔히 그림 속에 시가 있다거나 시 속에 그림이 있다고들 한다. 고경명(高敬命)의 이 시는 이를 명증(明證)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눈발, 그리고 흔들리는 배와 하얀 안개를 뚫고 날아오르는 새들의 동적(動的) 심상(心象)이 생동감있게 묘사되고 그러한 물경(物景) 속에서 흰 달빛을 받으며 젓대를 불고 있는, 자연과 합일된 시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정철(鄭澈, 1536 중종31~1593 선조26, 자 季涵, 호 松江)
은 선조 연간의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만중에 의해 동방의 이소(離騷)로 칭송을 받은 그의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및 시조 「훈민가(訓民歌)」,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은 모두 국문시가문학의 권능(權能)을 아낌없이 보여준 수작(秀作)이다. 또 그의 국문시가는 권필(權韠)과 이안눌(李安訥)의 한시 소재가 되는 등 우리 문학의 폭을 확장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철(鄭澈)의 한시는 국문시가에 비하여 높은 성가(聲價)를 얻지 못했다.
정철(鄭澈)의 한시는 충절시(忠節詩), 영물시(詠物詩), 취락시(醉樂詩) 등 다양한 면모를 지닌다. 이정구(李廷龜)는 「송강집서(松江集序)」에서 정철(鄭澈)의 시를 평하여 ‘말마다 날아 움직이는 듯하고 구마다 맑고 빼어나니 진실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희귀한 소리[言言飛動 句句淸絶 眞可謂驚代希聲也]’라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시어가 갖는 생동감과 청절(淸絶)함을 특장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의 시로는 「우야(雨夜)」(五), 「통군정(統軍亭)」(五絶), 「함흥시월간(咸興十月看)」(七), 「서회(書懷)」(七絶), 「금사사유감(金沙寺有感)」(五律), 「차사암운(次思庵韻)」(七律) 등이 유명하다.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9에서 송강이 여러 시체(詩體) 중에서도 절구(絶句)에 가장 장기를 지녔다고 평가하고 그의 「통군정(統軍亭)」과 「함흥객관대국(咸興客館對菊)」, 「서회(書懷)」를 그 예로 들었다. 「통군정(統軍亭)」은 그가 젊을 때에 원접사(遠接使)로 가서 지은 것이고, 「서회(書懷)」는 우국지정(憂國之情)을 읊조린 것이다.
정철(鄭澈)의 「함흥객관대국(咸興客館對菊)」은 어사(御使)로 함흥 지방에 가서 시월의 국화를 보고 지은 것인데 시는 다음과 같다.
秋盡關河候雁哀 | 가을이 다 지나간 관하에는 기러기 소리 슬픈데 |
思歸且上望鄕臺 | 고향 생각에 다시금 망향대에 오른다. |
慇勤十月咸山菊 | 은근히 시월에 핀 함산의 국화는 |
不爲重陽爲客開 | 중양절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손 위해 피었구나. |
이 시는 『국조시산(國朝詩刪)』에 「함흥시월간(咸興十月看)」의 시제로 되어 있는데, ‘격조가 초매(超邁)하고 사의(思意)가 깊다[格超思淵]’고 하였다. 어사의 임무를 띠고 민정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을씨년스러운 초겨울의 슬픈 기러기 울음소리는 시인으로 하여금 고독과 향수의 감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변방지방에서 철 늦게 핀 국화는 시인에게 새로운 정감에 젖어들게 한다. 이러한 탁월한 정경의 교융(交融)은 그의 높은 시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철(鄭澈)이 임무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오자 당시의 재상인 박충원(朴忠元)은 그를 맞이하며 이 시를 읊조려 그의 시재(詩才)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정철(鄭澈)은 임진전쟁 기간 중에 많은 우국시(憂國時) 및 충절시(忠節詩)를 창작하였다. 그는 유배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남행(南行)하는 도중에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금사사(金沙寺)」를 지었다. 이 시에는 그의 기개와 포부가 호방한 필치로 형상화되어 있다. 「마천령(磨天嶺)」 같은 충절시도 그의 굳센 시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금사사유감(金沙寺有感)」 한 수를 보인다.
十日金沙寺 三秋故國心 | 구월 십일 금사사에 있노라니 늦가을이라 고국 그리는 마음. |
夜湖噴爽氣 歸雁有哀音 | 밤 조수는 삽상한 기운 풍겨오고 돌아가는 기러기의 슬픈 울음. |
虜在頻看鏡 人亡欲斷琴 | 오랑캐 남아 있어 자주 칼을 바라보고 백성들 죽어 거문고 줄 끊으려네. |
平生出師表 臨難更長吟 | 평생토록 품어온 출사표를 전란에 임하여 다시 길게 읊조리네. |
늦가을의 쓸쓸하고 황폐한 물경과 기러기의 슬픈 울음소리는 전란에 휩싸여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근심하는 시인에게 한층 상념을 일깨운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상념은 일전(一轉)하여, 제갈공명(諸葛公明)이 촉한(蜀漢)을 흥기시키기 위하여 출사(出師)에 임했던 상황을 연상하고 시인 자신도 조국의 부흥을 위하여 제갈공명처럼 신명을 다할 것을 결심하는 굳센 기개를 유감없이 토로하고 있다.
임제(林悌, 1549 명종4~1587 선조20, 자 子順, 호 白湖)
는 무변 집안의 자손으로 세상 일에 얽매이거나 남들과 무리짓기를 꺼려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뛰어난 시재(詩才)와 독특한 제재로써 이룩한 그의 시세계는 분명히 범상(凡常)을 뛰어넘고 있다.
특히 그의 시작(詩作)에는 변새시(邊塞詩)와 염정시(艷情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니와 호방(豪放)한 기상과 섬농(纖穠)한 기교를 공유하고 있는 그의 시세계는 남다른 풍격을 형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세계의 특질은 그의 무인적 기질과 출사(出仕)의 불우함, 만당시인(晩唐詩人) 두목(杜牧)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임제(林悌)는 출사(出仕)가 불우하여 주로 변방지방의 관리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변새의 풍물과 지방의 형승을 호방한 필치로 시화하고 있다. 특히 그의 스승이자 지기(知己)인 성혼(成運)ㆍ박계현(朴啓賢) 등의 죽음은 그에게 벼슬길에 염증을 느끼게 하고 유랑을 강요하여 그로 하여금 많은 변새시와 기행시를 짓게 한 것으로 보인다.
임제시(林悌詩)에 끼친 두목(杜牧)의 영향 관계는 이항복(李恒福)ㆍ이달(李達)ㆍ신흠(申欽)ㆍ양경우(梁慶遇) 등이 “임제는 시어(詩語)가 매우 염려하니 대개 두목(杜牧)을 배운 사람[語甚艷麗, 盖學樊川者也. 『청창연담(晴窓軟談)』 26 / 林正郞白湖悌爲詩學樊川, 多重一世 『霽湖詩話』]”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임제(林悌) 스스로 종제(從弟)인 임서(林㥠)에게 “당의 시인 중에서 맹호연과 두목이 제일류가 된다[唐之詩人, 孟浩杜牧爲第一流]”라 하여 스스로 두목시(杜牧詩)를 좋아한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규원(閨怨)」(五絶), 「무제이수(無題二首)」(七絶), 「패강가(浿江歌)」(七絶), 「고산역(高山驛)」(七絶), 「송경성황판관찬(送鏡城黃判官璨)」(七絶), 「중화도상(中和道上)」(五律), 「송북평사이형(送北評事李瑩)」(五排) 등이 알려진 작품들이며, 이 중에서도 「고산역(高山驛)」과 「송경성황판관찬(送鏡城黃判官璨)」, 「원수대(元帥臺)」 등은 그의 호기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고산역(高山驛)」을 먼저 보인다.
胡虜曾窺二十州 | 오랑캐 일찍이 스무 고을 엿보자 |
將軍躍馬取封侯 | 장군이 말을 달려 제후에 봉해졌네. |
如今絶塞無征戰 | 금일처럼 먼 변방에 싸움이 없다면 |
壯士閑眠古驛樓 | 장사들이 옛역루에서 한가로이 잠자리라. |
말을 한 번 내달려 변방을 엿보는 오랑캐들을 무찌른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호방한 기세를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임제(林悌)의 명편(名篇) 가운데서도 여러 편의 「무제(無題)」 시(詩)와 「패강가(浿江歌)」 십수(十首), 「무어별(無語別)」 등은 섬농(纖穠)한 그의 시세계를 알게 해주는 대표작이 되고 있다. 그 가운데 「무어별(無語別)」을 보면 다음과 같다.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남볼까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헤어지네. |
歸來掩重門 泣向梨花月 | 돌아와 겹겹이 문을 걸어 잠그고 달빛 어린 배꽃 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네. |
이 시는 회화적인 기법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의 비밀을 담담히 드러내고 있다. 후대인들이 「규원(閨怨)」이란 제목을 「무어별(無語別)」로 바꾸어놓을 만큼 ‘수인무어별(羞人無語別)’의 섬교한 기교는 일품(逸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편을 한 줄에 꿰맨 듯한 구성의 묘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 원리를 뛰어넘어 규방 아가씨의 서툴고도 서러운 사랑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기에 적절한 수법이다. 행여나 남이 볼까 부끄러워 말도 못한 채 돌아서는 아가씨의 서러운 사랑은 ‘겹겹이 문을 걸어 잠그고’ ‘달빛 어린 배꽃’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열다섯 살 아가씨의 형상화를 통하여 전통시대 규방의 원망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당시(全唐詩)』에 실려있는 당대(唐代) 무명씨(無名氏)의 것이라는 설도 있어 그 진위는 가려져야 할 것이다.
허봉(許篈, 1551 명종6~1588 선조21, 자 美叔, 호 荷谷)
은 허엽(許曄)의 아들로 형 성(筬), 아우 균(筠), 누이 난설헌(蘭雪軒)과 함께 형제간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10에서 허균(許筠)보다 허봉(許篈)이, 허봉(許篈)보다 난설헌(蘭雪軒)의 시격(詩格)이 더 낫다고 말한 바 있다[許荷谷 …… 然詩則絕佳 且知古法 格高於筠 蘭雪軒之詩 或云 筠自作 假稱以欺世 而調格又高於荷谷 筠所不及].
그는 처음에는 시세(時勢)의 흐름대로 동파(東坡)를 익혔는데,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면서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숙독하여 그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하게 되었고, 만년에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서 이백(李白)의 시를 열심히 읽어 장편(長篇)과 절구(絶句)에서 기세가 강해졌다고 한다[仲氏詩, 初學東坡, 故典實穩熟, 及選湖堂, 熟讀唐詩品, 詩始淸健, 晩年謫甲山, 持李白詩一部, 以自隨, 故謫還之, 詩深得天仙之語, 長篇短韻, 驅駕氣勢 『鶴山樵談』].
그는 특히 아우 균(筠)에게 시를 배우는 길을 열어주어 허균(許筠)은 그에게 들었던대로 먼저 『당음(唐音)』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李白)의 시를 읽으면 될 뿐, 소식(蘇軾)과 두보(杜甫)의 시는 그 재주만 익히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詩則先讀唐音, 次讀李白, 蘇社則取才而已. 『鶴山樵談』].
그래서 이백의 시를 시학습의 모범으로 제시한 그의 시는 특히 가행체(歌行體)에 뛰어났다【『성수시화(惺叟詩話)』】.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8에서 장유(張維)와 양경우(梁慶遇)의 말을 빌려 허봉(許篈)의 시재(詩才)가 높은 수준의 것임을 극찬하기도 하였다[谿谷稱東國詩人中荷谷爲最, 霽湖亦言絶代詩才].
허봉(許篈)의 시작(詩作) 중에는 「경폐사(經廢寺)」(七絶), 「새하곡(塞下曲)」(七絶), 「압호정(壓湖亭)」(五律), 「간성영월루(杆城詠月樓)」(七律), 「청평산영송신곡증은상인(淸平山迎送神曲贈誾上人)」(七古), 「산자고사(山鷓鴣詞」(七古) 등이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권필(權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의 뒤에 붙인 「허문세고(許門世藁)」에 「청평산영송신곡증은상인(淸平山迎送神曲贈誾上人)」을 싣고, 이달(李達)의 말을 빌려 이 시가 성당(盛唐)의 가행(歌行)을 잘 배운 것으로 허봉(許篈)의 가행(歌行) 중 가장 잘 된 것이라 하였다[蓀谷云, 此篇曲折婉轉, 深得盛唐歌行法, 荷谷歌行中, 最是第一].
여기서는 「경폐사(經廢寺)」를 보인다.
古寺經年感廢興 | 세월 지난 낡은 절에서 흥망(興亡)을 느끼는데 |
重來不復見殘僧 | 다시 와도 이제는 남은 중을 못 보겠네. |
香盤寂寂凝塵滿 | 향로가 쓸쓸하여 엉긴 먼지 가득한데, |
時有村巫點佛燈 | 때때로 마을 무당이 불등(佛燈)에 불을 켜는구나. |
낡을 대로 낡아 이제는 가끔씩 시골 무당의 굿당으로나 쓰이는 절을 지나면서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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