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철학(哲學) (393)
건빵이랑 놀자
3. 미지와의 조우: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느닷없이 추락하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낙하하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찾기 위해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신화적 서사 속에서는 이렇게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나락으로 추락하는, 돌아올 기약 없는 미지의 모험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치히로의 첫 번째 임무 또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쿠의 조언대로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마할아범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54쪽. 만약 인어공주가 바다를 떠나 왕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피터팬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포르도가 반지원정대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안락하게, 이미 주어진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의 유년을 풍요롭게 만들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자라지 않는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셉 캠벨 바야흐로 ‘소녀들의 전성시대’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한국형 신조어는 21세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압축하는 핵심적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보아-문근영-김연아-원더걸스-소녀시대 등 성인을 압도하는 초특급 스타들로 이루어진 국민 여동생의 계보. 그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키덜트(Kidult)적 감수성이 묻어 있다. 또한 인생의 복잡다단한 통과의례를 10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단기간 속성 코스로 끝내버리고자 하..
8. 바르트의 풍크툼: 어머니, 단 하나의 여자 나의 역사적 위치는…… 전위의 후위에 있는 것이다. 전위가 되려면 무엇이 죽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후위가 되려면 그것을 아직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역,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앨피, 2006, 62쪽. 『카메라 루시다』를 낳게 한 것은 바르트의 어머니였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남아 있는 사진들은 그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덧없는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다섯 살 어린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실제 목..
7. 색 & 계(Lust & Caution): 욕망과 금지의 끝없는 이중주 욕망과 징계는 언제나 커플처럼 붙어 다닌다. 『색 & 계』의 영어 제목은 “Lust and Caution”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Lust’라는 단어를 보며 채워지지 않는 은밀한 열망을 떠올리고 ‘Caution’이라는 단어를 보며 욕망에 천형처럼 따르는 가혹한 징계를 떠올린다. 영화 제목처럼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욕망과 경계, 열망과 경고, 정욕과 징벌의 반복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더없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에도 “이러다 들키겠어요”라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삽시간에 깨버리는가 하면, 오랫동안 서로를 목마르게 그리워했으면서도 막상 만나면 “앞으로 다신 이 방에 ..
6. 세 번째 풍크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그녀의 암살 대상이자 마지막 사랑, ‘이 선생’뿐이다. 그녀는 우 선생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이제 연극과 현실을 구별할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제 몸뚱이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매번 더더욱 깊숙이……. 매번 그는 제가 절정에 몸부림 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우 선생은 ‘첩보원답지 않은’ 그녀의 아마추어적 정직함에 놀라 그녀의 고백 자체를 거부한다. “됐다! 그만해라!”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소름이 끼치고, 너무 투명해서 듣는 것만으로..
5. 세 번째 풍크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 그것만큼 위험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이다. 파니 핑크는 “서른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확률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독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어버린 쓸쓸한 스물아홉 싱글이다. 그녀는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을 꿈꾸지만 ‘친밀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서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
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의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을 떠올린다. 결벽증과 강박증을 함께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자기예찬증(?)을 앓고 있는 멜빈은 ‘타인의 삶’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 외에는 철저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늘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오직 자신이 휴대하는 포크와 숟가락으로만 먹는다.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그를 윽박질러 잔인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만든 동굴 속 세상에서 군림하던 외톨이 황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휘청거린다. 옆집 남자의 애완견이 복도에서 오줌을 눴다며 그 연약한 강아지를 미련 없이 ..
3. 첫 번째 풍크툼(punctum): 낭만적 나르시시즘의 세계가 파열되다 이 선생의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두 사람의 밀회는 더없이 스릴 넘치는 두뇌 게임처럼 급박하게 진행된다. 막 부인이 이 선생을 옷가게로 유인하여 두 사람이 첫 번째 밀회를 갖게 되는 날. 그녀가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고친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살짝 밀며 이 선생 앞에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짧고 덧없는 한숨을 쉰다. “고치니까 너무 붙네요.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에 숨 막혀 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장 지아즈가 아닌 막부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관객의 시선은 정확히 이 선생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둡고 깊은 밀실로 그녀를 유인할 듯이 탐욕..
2. 탐색전: 무대 위의 연극 vs 무대 뒤편의 침묵 섹스 자체가 삶의 욕망과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것의 알레고리인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각의 제국』, 『그녀에게』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섹스는 단지 몸과 몸의 얽힘이 아니라 삶과 삶의 뒤얽힘이었고 인간의 근원적 소통불가능성의 뼈아픈 확인이었다. 그러나 『색 & 계』에서 그들의 섹스의 이미지가 유독 슬프고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장 지아즈, 즉 막 부인(탕웨이)의 캐릭터 탓인 것 같다. 그녀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처럼 발랄하고 앙큼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쾌활한 캐릭터가 아니다. 또한 『감각의 제국』의 여주인공 마츠다 에이코처럼 나른하게 몽환적이면서도 의외로 강인한 캐릭터도 아니다. 장 ..
색 & 계와 롤랑 바르트 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1.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완고하게 닫혀 있던 이 세계가,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휘청,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바닷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하지 않던 세상이,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헝클어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이라는 치명적인 가사로, 안 그래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멍든 가슴을 다시 한 번 살뜰하게 할퀴어 주었다.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
15.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시인은 지겹도록, 님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것이 이 시인(김소월)에게는 슬픔을 슬픔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며, 슬픔의 표현이 슬픔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써, 시는 자기 탐닉의 도구가 된다. -김준오, 『김소월 연구』, 새문사, 1989, 45쪽. 다리와 팔은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슬픔의 치료책은 달콤한 행복의 마취제를 이용한 일시적 대증요법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의 ‘적절한’ 표현으로만 치유된다. 슬픔은 슬픔인 채로 승화되어야 한다. 슬픔이라는 고체가 혼란이라는 액체를 거쳐 기쁨이라는 기체로 변화하는 점진적 마술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리 호흡이 힘들더라도, ..
14. 진정한 애도의 순간 상실된 대상의 그림자가 주체에게 드리워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리비도의 상당 부분을 탐구에 대한 충동으로 승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중에서 ‘애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어쩌면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가장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 혹은 나의 아픔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고 다만 그 끝나지 않는 슬픔의 통로를 함께 나란히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애도의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것은 이 슬픔의 늪을 건너가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루디는 비로소 그 ‘슬픔의 친구’를 찾아낸 것이다. 부토 소녀 유와 함께 루디는 아내를 찾아..
13. 나는 너야(I am you) 루디: (길을 걷다가 ‘Free Hug’ 팻말을 든 젊은이가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본다) 젊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프리 허그!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루디: 정말 공짜라고요? 젊은이: (웃으며) 네. 루디: (그래도 의심이 가지지 않은 듯 주춤주춤 서성거린다) 젊은이: (자신도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팔을 벌린다) 루디: (주춤주춤 다가가 젊은이에게 안긴다) 젊은이: (루디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루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습니다. 평생 집과 직장만을 오갔던 모범 사원 루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를 함께 관람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던 루디, 춤이나 노래 같은 유희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루디. 그가 변하고 있..
12.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 유: 난 죽은 사람과 춤을 춰요. 루디: 그게 누군데? 유: 우리 엄마요 루디: 언제 돌아가셨니? 유: 일 년 전 어제요. 엄만 늘 전화를 좋아했어요. 분홍색 전화기요. 엄마는 항상 통화중, 가족들과요. 루디: 우리 집사람도 엄청 전화를 했지. 애들 셋과, 항상 통화중. 유: 이제 전 엄마와 통화중이에요. 언제나요. 엄만 제 속에 있어요. 열일곱 살 소녀 ‘유’는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어 보이지만, 늘 밝고 명랑한 미소로 춤을 춘다.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기운은 아내가 죽은 이후로 늘 춥고 외로웠던 루디의 마음을 감싸준다. 분홍색 전화기로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소녀의 춤. 그 사랑스런 광경을 보며 루디는 전..
11. 그림자의 춤: 나를 벗어 너를 입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 오늘날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해야 할 개념도, 죽음의 순간이 지니고 있던 공적인 장엄한 성격도,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 당연히 가족들과 의사의 첫 번째 임무는, 죽음을 면할 길 없는 환자에게 용태의 위중함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더 이상 알아서는 안 되었다. 새로운 관습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요구했다. (……) “나는 적어도 그가 결코 죽음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라는 한..
10. ‘과격하고 당혹스러움’과 ‘아름답고 사랑스러움’ 사이 루디: (인사불성으로 취해 아버지에게 대드는 아들에게) 언제 이렇게까지 마셨니? 칼: 다들 항상 아빨 챙겨야 하고, 아빤 항상 주인공이셔야 하죠. 엄만 항상 말씀하셨죠. 네 아빨 생각해! 불쌍한 네 아빠! 아빨 좀 가만 두렴! 피곤하셔! 너무 열심히 일해서 사무실 뜨기도 힘드셔! 루디: 됐다. 그만해라. 칼: 아버진 평생 그렇게 일에 숨어 지내셨죠! 진짜 엄마를 알지도 못하고! 아빤 엄마를 몰랐어요! 바보 같은 아빠. 나가요! 쓰레기차에나 가요! 거기 소속이잖아요. 재활용도 잊지 말구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겪는 슬픔을 그려낸다. 부부 금슬도 더없이 좋았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남매도 더없..
9. 아내의 영혼과 교신할 수 있는 내면의 주파수를 찾아내다 죽음의 풍부한 겉치레는 오늘날 후퇴했고, 그래서 죽음은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죽을 수 있으며, 불행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생명보험을 신뢰한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들 자신의 심층부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86쪽. 죽음 자체만큼이나 죽음에 소비되는 비용을 걱정하는 각종 준비들에 현대인은 익숙해졌다. 크고 작은 모든 죽음의 징후에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건강보험, 죽음 이후의 각종 의례를 준비하는 상조 회사들,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불안까지 걱정하는 생명보험,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죽음을 아름..
8. 이승에 실현된 저승의 그림자 칼: (어머니가 평생 와보고 싶어 하시던 도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찾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며) 왜 두 분이서 한 번도 안 와보셨어요? 루디: 시간이 있을 줄 알았지……. 네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걸 내가 빼앗았어. 죽은 사람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죽은 자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각종 업무와 부채관계 정리, 유언의 집행, 장례 관련 업무들……. 그 수많은 죽음의 공식 절차가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는 가장 아픈 절차가 남아 있다. 바로 떠나간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애도의 절차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장례 절차보다 더..
7.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우울증 환자는 ‘명명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어떤 말로도 의미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이유다. 이 사람은 말을 해야 할 아무런 의미도 보지 않는다.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옮김,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4, 121쪽. 누군가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후에야 그 사람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새로운 애도의 표어는 ‘표현할 수 없는 애도’를 단 세 글자로 압축하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대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지못미’라는 세 글자만으로 남겨진 자의 슬픔은 축약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못..
6. 그렇게들 흘러간다 검은 신이여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박인환, 『검은 신이여』 중에서 어김없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잠 못 이루는 밤, 트루디는 뜬금없이 남편에게 춤을 춰보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녀가 늘 입는 오렌지 빛 기모노 잠옷을 입은 채로, 그녀는 마뜩찮아 하는 남편의 손을 잡아 부토를 춘다. 마치 그들의 저물어가는 사랑을 향한 진혼곡처럼, 발틱 해변으로 몰아치는 사나운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한밤중에 춤..
5.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다 그녀는 슬픔 때문에 화석이 되었다. -오비디우스 트루디는 남편과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마음속으로 혹독한 이별의 예식을 치러낸다. 그녀는 아름다운 발틱 해변에서 남편과 거닐며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눠왔지만 유일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트루디는 이 마지막 여행에서 그의 죽음 뒤에 펼쳐질 바닥없는 슬픔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임을 알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기나긴 어둠의 나날들을 이미 속속들이 관찰한 듯 철저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녀가 다녀올 수 없는 슬픔의 극한까지 홀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도 그녀 마음에 새겨진 어둠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별의 슬..
4. 애도도 우울도 어쩌면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 정신분석 안에 인간의 가슴(heart)은 어디에 있는가? (……) 정신분석적 사고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에서 피분석자나 환자들에게 말할 때 가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종종 생생한 반응과 함께, 무언가가 소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가슴의 필요들, 바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방어하고 있는 그것의 상처들을 불러일으킬 때, 거기에는 대체로 생생한 충격이 발생한다. 그것은 확실히 이드나 에고나 수퍼에고를 말하는 것보다, 심지어는 무슨 리비도적 자아니 또는 내적 파괴자로 인격화된 반-리비도적 자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정서적으로 더 잘 접촉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수..
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애도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7쪽. 남편의 임박한 죽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트루디.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대상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본다. 그녀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흔적들이 하나하나 남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애도’도 ‘우울’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애도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고, 우울은 사라진 대상과 혼자 남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아 있는 나날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도, 자신의 상실감에 완전..
2. ‘바람직한’ 이별은 가능할까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똑같은 종류의 상실감이 애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4쪽.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그건 구경도 아닐 테니까. 그이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남편 루디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 아내 트루디의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의사는 이미..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1. 알고는 싶지만 배울 순 없는 이별학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내 몸 안에 있지만, 내가 더 이상 없으면 그 사람은 어디 있게 되지? 내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내게 허락된 모든 정규교육을 마친 후 나는 자주 이런 몽상에 빠지곤 했다. 만약 나에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새로운 과목을 개설할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과목을 만들어낼까. 학교에서..
19.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다 물론 그 고요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많은 동료 수학자들의 우정과 아내의 사랑, 그리고 빛나는 지적 성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쉬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이례적으로 수학자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돌아갔을 때, ‘정신병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편견을 관철한 반대파도 존재했으며, 설사 그에게 노벨상을 준다 할지라도 ‘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과연 내쉬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도 있었다. 내쉬의 평전인 『뷰티풀 마인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로 각색될 때 명장면으로 꼽힌 ‘만년필 세러모니’. 이 장면은 내쉬를 둘러싼 동료들의 우정을 형상화한 멋진 알레고리다. 존경하는 학자에게 자신이 늘 쓰는 만년필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세러모니. 그것은 실제 존..
18. ‘아름다운 망상’과 ‘참담한 삶’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중세 서양의 파우스트 전설과 이 전설을 소재로 한 괴테의 희곡에 나오는 악마)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
17. ‘새로운 아이의 놀이’로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536쪽.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
16.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고독의 창조성 게다가 존 내쉬가 초기에 입원했던 미국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정상적인 자아’를 되찾게 하는 모범적인 진료방식을 추구했으므로 무의식에서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내려는 탐험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말하자면 융은 좀 더 고상한 무의식, 좀 더 천박한 무의식, 좀 더 추악한 무의식, 좀 더 아리따운 무의식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천연색 별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성좌’를 해독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융은 그리하여 카오스로 가득한, 때로는 부끄럽고 경박하며 대면하기도 싫은 무의식마저 자신의 존재를 응원해주는 ‘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내쉬에..
15.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돌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3쪽. 비밀로 인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 더 일찍 ‘의..
14.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참담한 실패로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오랫동안 숨겨오던 내연 관계가 가족들에게 들통나고 그의 연인 엘리너가 낳은 아들 존 데이빗 스티어의 존재가 부모님에게 발각된다. 스캔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존 내쉬의 아버지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명령했고 내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겐 이미 또 다른 연인 앨리샤가 생겼고 은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 브리커도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를 오가던 내쉬는, 아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엘리너는 양육비만이라도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내쉬는 결혼은 못하겠으니 자기 아들을 ‘입양하자’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여 엘리..
13.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로 무너진 무한한 자유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어쩌면 해답은 존 내쉬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것들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안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구겨 넣을 순 없겠지만, 이 ‘생략’에는 어떤 의도적 배제와 은폐의 냄새가 ..
12. 정신분열을 대하는 내쉬와 융의 차이 융의 자서전을 휘감는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자아로 분열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 아마 융과 내쉬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부근에서 발원할 것이다. 내쉬의 분열이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로 인해 심화된 것이라면 융의 분열은 자신의 분열을 ‘정상성’의 일부로 인정했다. 융은 무의식의 잠재성을 최대한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며, 의식의 시선으로 무의식의 활동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려 하는 태도가 정신의학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융의 경우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분열을 즐겼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규정한 까닭도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을..
11. 내과의사가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리다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내과 교수에게 그 결정을 알렸을 때 그의 얼굴에서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옛날의 상처,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소외되는 느낌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한층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
10. 수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한한 자유 존 내쉬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논문은 그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작성한 27페이지짜리 짧은 박사논문이었다. 처음에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의 아이디어는 너무 단순해서 학자들의 눈에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너무 협소한 테마라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 이론의 가치는 너무 명백해서 내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내쉬 균형의 엄청난 영향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전략적 게임과 관련된 내쉬 균형 개념은 사회과학뿐 아니라 생물학에서조차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뉴 팔그레이브』는 내쉬 이론의 가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내쉬 ..
9.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사회적 비교에 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정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은 대부분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 사회적 비교 기준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호작용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앨렌 랭어, 이모영 역, 『예술가가 되려면』, 학지사, 2008, 244~5쪽. 존 내쉬의 MIT 재직 시절, 칠판에는 이런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존..
8. 융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한편, 칼 융에게 있어 ‘아곤의 공동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니체와 융. 이 네 명의 천재들은 서로에게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아이디어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경쟁하며 독려하는 최고의 친구들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일부 교수들의 경고장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융이 발표한 논문이 동료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만은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융을 초대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후 1시에 만..
7. 내쉬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흔히 천재들은 외로운 거인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정 도시 특정 분야에서 무리지어 나타난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로마 철학자 발레이우스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스킬로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뉴턴과 로크,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 후대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창조적 천재들은 젊은이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받은 잠재적 천재들은 앞선 천재들의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완성하려 든다고 발레이우스는 추측했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170쪽.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쉬의 파란만장한 일생..
6.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
5.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이 있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
4. 융의 독백: 신경증 덕에 배웠다 우리가 만날 또 한 명의 천재 칼 구스타프 융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우리는 저마다 학창시절 학교에 가기 싫거나 숙제나 시험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각종 ‘꾀병’을 생각해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칼 융은 학교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 학교로 가야 할 때가 되면 난데없이 기절하거나 발작을 일으키곤 해서 학교를 반년 이상이나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이 소년 융에게는 행복한 고립의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만끽했던 어린 소년 융. 어떤 의사는 융이 간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융은 의사의 진단에 코웃음을 치며 달콤한 몽상에 빠져 지내..
3. 내쉬의 독백: 강력한 우상이 필요할 뿐 친밀한 스승은 필요치 않다 내쉬는 달랐다. 그가 어떤 예감을 갖기만 하면, 어떠한 인습적인 비판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는 배경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건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배경 지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정신력, 그런 맹목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달리 본 적이 없다. -존 내쉬의 지인, 모저의 회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한 갓 스무 살의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수업도 듣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왜 수업을 듣지 않느냐는 동료의 질문에 존 내쉬는 이렇게 대답한다. “강의는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학생들의 잠재적인 창의력을 파괴해.” 존 내쉬는 자..
2. 고독은 천재의 학교다? 지금 여기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때 아닌 접속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세계를 뒤흔든 ‘천재’이기 때문만도, 풍부한 심리학적 요소들로 인생을 채우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으로 존 내쉬의 삶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위함도 아니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를 누구보다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무의식의 카오스를 의식의 전면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했고 그 결과는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존 내쉬는 무의식이 의식을 습격하는 강도가 해일이나 행성충돌의 충격에 육박하자, 의식의 활동 자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정신분열증은 무의식에 습격당한 의식의 처절한 실패처럼 ..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1. 내부의 서사가 외부의 서사를 압도하는 인간들 위대한 사람은 (……) 여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의 생각에 겁내지 않는다. 그는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면 혼자 간다. (……) 그는 남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길든다는 것의 비속함을 안다. (……)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중에서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느라 ‘바깥..
15. 장애물의 지형도를 지닌 채 싸우다 『본 얼티메이텀』에서는 제이슨이 아직 ‘데이비드 웹’이었던 시절, 그가 비밀 요원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장면이 회상 신으로 등장한다. 애보트와 대화하던 중 이제야 제이슨 본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그때 그는 무려 72시간 동안 한숨도 못 잔 상태였으며 잔혹한 물고문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들은 고문인지 훈련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 혹독한 인성교정프로그램 속에서 제이슨이 내린 결정을 ‘바로 네가 내린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너의 선택이었다고. 그러니 우리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애보트: 데이비드 웹. 설명은 다 듣고 온 건가? 제이슨: 네 애보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자네 임무는 미국 국민을 구하는 거야. 제이슨: 압니다. 애보트: 넌 이..
14. 애국심의 함정 오후 7시 15분 푸코는 강의를 끝냈다. 학생들이 그의 책상으로 모여들었다.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녹음기를 끄기 위해서였다. 혼잡한 청강생들 틈에서 그는 혼자였다. (……) 나는 청중 앞에서 배우 또는 곡예사가 된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말할 수 없는 고독에 휩싸인다. -미셸 푸코, 박정자 역, 『비정상인들』, 동문선, 2001, 6~7쪽. 제이슨 본은 인간 훈육 프로그램의 최고의 성공작이자 그 처절한 실패를 대변하는 양가적 인물이다. 트레드스톤 프로그램이 탄생시킨 살아있는 휴머노이드 로봇 제 1호였던 제이슨 본.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요원으로 거듭났지만 최악의 문제점을 노출하는 장본이었다. 제이슨의 정신 건강을 체크했던 요원 니키는 ‘실험적 훈련 중’이던 요원들의..
13. 발설된 것은 철회될 수 없고, 시행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 현대인은 자유의지의 힘을 믿도록 교육된다.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이 세상의 기회는 균등하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그 패기만만한 자유의지의 환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인종, 국적, 가족, 유전자 등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 우리의 선택은 철저히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행동했다고 해서 모두 나의 욕망이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이 진정 나의 의지였는가, 그렇게 의심되는 상황들이 곳곳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정말 자율적이고 자발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과연 어디에,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쓰일지 진정 알고..
12. 나를 지워야 내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푸코의 저작은 전부 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연장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영원하다고 믿는 모든 개념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변전된’ 것이며, 그 기원들에는 숭고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풀 벤느, 이상길 역,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173쪽. 언제부터 사람들은 ‘신분증’이 없으면 중요한 일을 하나도 처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내가 바로 나다’라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해진 순간, 인간은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되기 시작했다. 때로는 우리들 자신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소소한 과거의 행적들이 어디선가 관리되고 어디선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싹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근..
11. 모두 너였어! 널 만든 건 너야! 우리는 진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결국 잃어버린 나를 깡그리 지우는 것이었다.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기억의 창고를 열기 위한 열쇠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유일한 길임을. 과거의 나를 모조리 삭제할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나를 만든 자들’의 게임 프로그램 속에서 그들의 통제를 받는 인간병기로 머물게 될 것이다. 콩클린의 말처럼, 제이슨은 미국 정부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통제 불능의 삼천만 달러짜리 무기, 빌어먹을 실패작이었으므로. 제이슨은 ..
10. 훈육의 프로그램도 미처 길들이지 못한 마음 그러니까 그렇게 멀고도 높은 곳에서 다른 이들의 담론을 기술하고자 하는 당신은 대체 어디에서 말하고 있다고 자처하십니까? -미셸 푸코 감옥 아닌 곳에서 인간을 감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은 ‘신이(혹은 카메라가) 언제나 너를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체의 무의식에 기입하는 것이다. 특히 카메라가 제이슨 본의 ‘등 뒤’를 비출 때, 관객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제이슨 본의 목숨을 노리는 그들의 시선은 마치 신처럼 전지전능하여 언제든 바로 그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총구를 들이댈 것만 같다. 제이슨의 기억을 상실하게 한 사건도 바로 그의 등 뒤를 쏜 두 발의 총성 때문이지 않았는가. 트레드스톤의 행동대장 격인 콩클린을 직접 독대함으로써 제이슨은 비로..
9. 조직권력이 나의 권력? 푸코는 주먹다짐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용기란 육체적인 것 말고는 없다”고 규정했다. 용기, 그것은 용기 있는 육체다. (……) 노동자 계급의 노동이 아니라, 육체가 착취당한다. 시민들은 군대식 규율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육체는 훈육되고 길들여지며 그 위에 권력이 행사된다. 감금 체계는 육체들을 가둔다. -풀 벤느, 이상길 역,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222쪽. 자신을 죽이러 온 요원을 살해한 후, 제이슨 본은 비로소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지금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내 곁의 그녀, 마리다. 그는 마리의 가족들을 대피시키면서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돈을 마리에게 주기로 작정한다...
8. 우린 같은 기계의 부속품이야 날마다 응접실에서 ‘상벌수여’가 이루어진다. 아무리 사소한 반항에도 징벌이 가해지는데, 중대한 위반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리 가벼운 과실이라도 매우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메트래에서는 심지어 쓸데없는 말 한마디까지도 처벌된다. 부과되는 처벌 가운데 주된 것은 독방 수감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446쪽 푸코는 근대적 감옥 시스템의 초기 모델을 메트래(Mettray) 소년감화원에서 찾는다. 수도원과 감옥과 학교와 군대의 훈육 프로그램이 황금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 곳. 수감된 아이들이 ‘매를 맞느니 차라리 독방 수감이 훨씬 좋다!’고 절규하던 곳. 메트래 소년감화원이 문을 연 1840년이야말로 푸코가 규정하는 ‘근대..
7. 직업은 무엇입니까? 범죄는 재판에 대한 감옥의 복수이다. 재판관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대단히 무시무시한 복수이다. 그때 범죄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390쪽 여동생의 애인을 처음 봤을 때 오빠나 아버지가 하고 싶은 질문 1위는 무엇일까. 애인이 무척 어리다면 ‘아버지는 뭐하시나?’일 것이고 애인이 충분히 성숙하다면 ‘자네 직업은 뭔가?’정도가 아닐까. 이 기준에 따르면 마리 크루츠가 사랑에 빠진 이 남자 제이슨 본은 결코 ‘바람직한’ 신랑감이 아니다. 직업이나 부모님의 자산 정도는 물론 가족이나 주소나 국적조차 확실하지 않은 이 남자. 결국 우리는 ‘본’ 시리즈 1편에서 주인공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고 영화관을 나오게 될..
6. 나는 위험인물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나의 정치적 자유는 곧 나의 반대파의 정치적 자유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는 내 의견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만큼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배웠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우리는 실제로 그 ‘원칙’이 지켜지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배운다. 순전히 ‘나와 다르다’,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목격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신상 정보와 활동 내역을 낱낱이 감시당할 위험에 처해야 한다. 미네르바 사건은 수십년 동안 사문화되었던 정보통신법을 이용해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한 사람의 인생..
5.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나이다. (……) 자기 명시는 동시에 자기 파괴이다. -미셸 푸코, 이희원 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77쪽 제이슨 본은 낯선 여자의 차를 힘겹게 얻어 타고 파리로 가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만 하면,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고. 그러나 과거 그가 거주했던 파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커져가는 두려움도 숨길 수 없다. 나를 찾기만 하면, 정말 이 모든 공포와 불안이 해소될 수 있을까. 나를 찾아내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파리에 간다고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파리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구가 ..
4. ‘잃어버린 기억’에 추격당하며 점점 고통스러워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장치적인 것, 곧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다. -미셸 푸코 기억의 주기가 딱 24시간이라 매일 아침 같은 남자와 처음처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첫 키스만 50번째』),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남자가 온몸에 단서를 문신해가며 아내의 살인범을 쫓는 이야기(『메멘토』), 가슴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회사를 찾아가 이제 싫증이 나버린 애인과의 아픈 사랑을 지워버리지만 기억을 지우고도 이상하게 ‘기억할 수 없는 그녀’를 더더욱 그리워하는 이야기(『이터널 선샤인』)……. ‘기억 상실’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 곁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바..
3. 내가 누구인지 알수록 나는 위험해진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67~268쪽.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이름 모를 사내. 그는 유일한 가시적 단서인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은행에 들어간 그는 비밀계좌에 들어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열어 보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찾아낸다. 미합중국의 여권 위에 기재된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이었다. 좀처럼 표정이 없던 이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도의 미소가 스쳐간다. “내 이름은 제이슨 본이구나. 파리에 살고 있군.”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자 ..
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도 말고, 또 내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지도 말라. 우리의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관료와 경찰들에게 맡겨두라. -미셸 푸코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우리는 이 사회 곳곳에서 ‘도대체 넌 누구냐’라고 묻는 곳이 저토록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선 ‘이름’이다. 사람들은 낯선 타인을 만났을 때 일단 타인의 ‘이름’을 먼저 알아두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실질적인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저 대충 임의로 지어서 불러도 그만인 ‘이름’을 알면 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 뿌듯함을 느낀다. 이름은 타인을 우리 두뇌 속의..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1.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들은, 정말 나다운 것인가 죄수의 첫 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미셸 푸코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제이슨 본(맷 데이먼), 『본 아이덴티티』 중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가족, 국적, 모국어, 학력, 직업, 재산……. 이런 것들 중에 나의 나다움을 진정으로 결정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이용하는’ 세력들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가 하면, 각종 스팸메일과 스팸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남의 번호를..
14.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내가 된다 폴 리쾨르는 한 인간이 일생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죽음이라는 운명과 관련된) 인간의 유한성. 둘째, 신이나 신령한 존재로부터 소외당한 인간의 현실. 셋째, 생성과 초월의 과정,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 있는 존재인 개개의 인간에게 진리는 절대로 온전하게 완성된 것일 수 없다는 점. 넷째, 선택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사이의 모순성. 다섯째, 인간이란 타자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여섯째,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그 역..
13. 예언과 믿음과 사랑이 합치되는 순간 초월이라는 신의 의지는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투쟁’에 혼신을 바치는 나의 참 자아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칼 야스퍼스 네오는 스미스의 숨겨진 두려움을 간파하고 사력을 다해 그를 공격하지만, 잠시 방심하는 사이 스미스 일당의 교활한 팀플레이로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탕, 탕, 탕……. 스미스의 총격으로 매트릭스 안의 네오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죽음은 곧 정신의 죽음. 정신이 죽으면 매트릭스 바깥의 육신도 죽는다. 스미스는 더 이상 뛰지 않는 네오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선다. 이제야 자신이 ‘그’라는 것을 알 것만 같은데, 바로 그 황홀한 깨달음의 순간 네오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야 만다. 모피어스와 탱크는 믿을 ..
12. 난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아 신화는 별들에게 열정의 옷을 입히고, 신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지닌 결함과 과오를 덧씌우기도 했다네. 신화 속에서 바람과 파도는 음악이었다네. 모든 호수와 사내, 샘물과 산, 숲과 향내 그윽한 골짜기는 온갖 요정들의 놀이터였다네 -로버스 G. 잉거솔 세속의 아수라 속에서도 신성의 숨결을 발견하는 열쇠. 그 열쇠는 바로 ‘몸’이었다. 네오를 비롯하여 매트릭스에 갇혀 있던 모든 인류는 자신의 진짜 몸을 AI에게 건전지로 헌납한 채 가상의 이미지로만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신의 눈, 코, 입, 손, 발을 단 한 번도 진짜 세계에서 써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네오가 매트릭스로 철저히 세뇌된 자신의 두뇌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을 매트릭스의 회..
11. 내 이름은 …… 네오다 대자연은 오류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이를 수정하며,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괴테 네오는 ‘과연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까’ 내심 걱정하지만 모피어스를 구해야 한다는 지상과제 앞에서 모든 두려움을 잊는다. 그는 ‘과연 이런 방법이 통할까’를 고민할 틈도 없이 몰려드는 적들의 주먹과 총알을 피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잡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친구를 살리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기에 ‘생각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와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바깥으로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네오는 끝까지 자신을 추격하는 스미스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무술 실력을 ..
10.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 우리는 모순으로 인해 비옥해진다. -괴테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 내가 바로 ‘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네오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가 반드시 ‘그’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잊고, 오직 소중한 친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오라클의 예언이나 네오의 엄청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네오가 자신의 삶을 잊고 오직 모피어스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오는 진정한 ‘그’가 된다. 이제 네오는 세상에서 제일 멀다는 그 거리,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를 극복했다. 이제 마음과 육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남았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9. “미안해, 넌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VS “아니, 너는 비범함이야.”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는 이미 피와 살로 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떠한 소리나 빛이나 광선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나니. 그대는 죽을 수 없다. -『티벳 사자의 서』 중에서 살아남은 요원들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 ‘시온’을 지키기 위해 모피어스를 포기하기로 한다. 시온은 모피어스나 트리니티나 ‘그’보다 중요하니까.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판단하며 탱크를 말리지 못하는 트리니티. 탱크는 모피어스를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코드를 뽑으려 한다. “당신은 리더 그 이상이었죠. 우리의 아버지였어요. 잊지 않을게요.” 자신의 목숨과 모피어스의 목숨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오라클의 예언. 그 때문에 미칠 듯이 혼란..
8. 오라클의 모호한 화법과 엄청난 미션 어둠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빛이다. -엘리아데 오라클은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거나 단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네오에게 결국 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이라고, 너의 신화를 만드는 것 또한 너의 힘이라고 암시한 것이 아닐까. 오라클이나 트리니티나 모피어스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네 스스로가 ‘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네오 스스로가 ‘그’에게 마치 사랑에 빠지듯 완전히 몰입할 때, 그는 운명의 문턱을 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다/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오라클의 모호한 화법에 네오는 엄청난 혼란을 느낀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과연 ‘그’인지 아닌지 헷갈려 미칠 지경인 네오에게 또 다른 엄청난 미션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7. 오라클의 시험: 미안하지만, 너는 ‘그’가 아니야 신과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수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신들 앞에서는 영원의 물결로 변하지만 우리는 그 파도에 떠밀려 올라가고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 침몰하고 만다네 -괴테 엘리아데는 도시인들 대부분의 삶이 오직 경제적 타깃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꼬집어 말한다. 마치 ‘진화된 인류’는 비과학적인 신화 따위엔 관심을 끊어야 한다는 듯 이성 지상주의적인 교육이 판을 쳐왔다. 그러나 신화의 힘을 믿는 종족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문명인의 교육이야말로 ‘우주적 시간’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둘러싼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우리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힘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매트릭스의 회로..
6. 매트릭스에 갇히길 희망하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신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 자신이 바로 그 신화의 그늘 속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가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탓에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막스 뮐러 네오가 뛰어넘어야 할 과제는 매트릭스 안에서 지금까지 가져온 시공간의 감각이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라는 편견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매트릭스의 가상 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믿고 살아왔기에 모피어스가 제공하는 훈련 공간을 ‘그저 가상일뿐이야’라고 느낀다. 모피어스 “때리려고만 하지 말고 진짜로 때려!”라고 말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살았던 매트릭스가 2199년의 인류에게 유일한 현실이었듯이, 지금 네오가 훈련하고 있는 가상공간이야말로 네오가..
5. 내가 정말 ‘그’일까? 무의미는 삶의 충만함을 저해하기 때문에 질병과 같은 것이다.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것들을 ― 어쩌면 모든 것을 ― 견디게 한다. 과학은 결코 신화를 대신하지 못하며 그 어떤 과학으로도 신화는 만들어질 수 없다. -칼 구스타프 융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드라마틱한 부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 인생의 곳곳에서 자기만의 ‘사적 부활’을 꿈꾼다. 일 년의 끝과 새로운 일 년의 시작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를 그저 TV를 통해서만 들어도 왠지 마음이 한껏 정화되는 느낌. 비록 작심삼일(作心三日)에 그칠지라도 저마다 스스로와의 소중한 약속을 시작하는 시간. 왠지 술 담배도 끊고 아침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을 것 같은, 보통 사람들..
4.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간단히 비유를 해보자. 사방이 막힌 방에 내가 있다. 방안에 있는 한 대의 컴퓨터가 바깥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다른 사람과의 대화 수단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누군가 모뎀의 선을 자르고 조작된 신호를 보낸다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매트릭스다. -노성래, 『과학동아』 2002년 6월호, 52쪽. 모피어스는 지금까지 네오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세계가 ‘가상’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인류가 AI인공 지능 컴퓨터 제조 기술을 갖게 된 것에 스스로 경탄하면서 AI의 탄생을 자축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AI에 지나치면 의존하게 되면서 AI와 인류 사이에 권력의 균..
3. 현실은 꿈의 배설물일 뿐이야 신화란 본질적으로 무한하면서도 객관적 현상에 있어서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어중간한 존재로서의 모순적인 인간 상태를 비애를 담아 표현한 것이다. -폴 리쾨르 가끔 미치도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 평소엔 전혀 종교생활을 하지 않다가도 갑자기 아무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유모차를 타고 지나가며 까르륵 웃는 아이가 정말 살아 있는 천사처럼 보일 때, 엄마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나의 3대를 넘어 우리가 진화해온 지긋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질 때, 오늘 따라 매일 보는 친구나 연인의 얼굴이 불현듯 ‘여신 포스’를 풍기며 아름답게 빛나 보일 때. 우리는 그럴 때..
2. ‘토마스’와 ‘네오’ 인간은 망가진 채로 태어나 수리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의 은총이 바로 그 집착제이다. -유진 오닐 옛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각자 자기 문화에 어울리는 성소(聖所)를 찾아 기도를 드림으써 하루를 시작했다. 현대인은 ‘로그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략적인 ‘뇌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컴퓨터를 켜서 ‘즐겨찾기’ 리스트를 살펴보면 된다. 컴퓨터는 우리의 관심사와 우리의 욕망의 좌표를 알려주는, 너무도 노골적인 꿈의 ‘검색 히스토리’를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꿎은 컴퓨터를 탓할 필요는 없다.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1950~)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구조는 신석기 시대 이후로 근본적으로 변..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1.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본성은 한정되어 있으나, 욕망에 있어서는 무한대를 달리는 인간은 천국을 기억하는 타락한 신이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프랑스의 시인) 만약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건해야만 한다. -엘리아데 다가오는 시험이 걱정스럽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걱정스럽고, 가족들의 잔병치레가 걱정스러운 이 ‘일상적 고통의 차원’을 뛰어넘는 고통이 있다. 이런 걱정들은 각각 시험이 끝나면 해결되고 월급이 입금되면 잊히며 건강이 회복되면 사라진다. 그저 열심히 살아서는 해결될 수 없는 고통, ‘나 하나’의 개인적 안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세속적 일상을 ..
11.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 다음 날 아침, 처키는 여느 때처럼 어슬렁거리며 고물 자동차를 끌고 윌의 집으로 간다. 헤이, 윌, 어서 나와! 쿵쿵쿵!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늘 졸린 눈을 비비며 건들건들 처키를 향해 다가오던 윌이 보이지 않는다. 처키는 놀라움과 상실감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윌의 텅 빈 방을 바라본다. 이제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윌은 기별도 예고도 없이 떠났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윌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윌을 볼 수 없지만 행복하다. 처키는 만족스러운 듯, 슬픔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듯,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 탄다. 한편, 골치 아픈 제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려던 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선생님. ..
10.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이제 윌과 숀의 심리 상담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물한 살이 된 윌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인생을 밝혀줄 소중한 멘토를 얻었다. 숀으로 인해 윌은 자신의 빛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실체와 대면했다. 윌의 고통은 단지 과거의 상처들만이 아니었다. 윌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내가 고통의 근원이다’라는 죄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잇따라 일어나는 불행의 씨앗이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어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떠나도록 방치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 그것은 ‘모든 게 내 탓..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연민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와 ‘아직 멀쩡한 자신’을 가르는 분계선이다. 연민은 고통 받는 타자를 바라볼 때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매우 편안한 안전장치다. 연민은 정치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보수적인 자신의 현상태를 은폐하며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는 괴리감을 심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을 공고화한다. 나의 행복이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 거기서 연민이 탄생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
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응시」, 문학과지성사, 1994, 109쪽. 사랑하면, 굳이 청진기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고, 사랑하면, 굳이 녹음기를 틀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 스카일라의 귀도 윌의 마음 안에 있다. 늘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들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일삼는 윌의 표정 뒤에 숨은 두려움을, 그녀는 듣는다. 윌도 편하지 않다. 그녀의 귀가 내 마음에 자리했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에게 낱낱이 들키게 되어 있다. 그토록 감추고 또 감췄건만, 그녀는 내 두려움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께, 그 두려움..
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낯선 괴짜 할머니의 유모차에 탄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난다. 행인의 눈에 띄지 않는 밤,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는 할머니가 끄는 낡은 유모차를 타고, 도둑질하듯 은밀하게 세상을 구경한다. 이 소녀에게 뚝딱뚝딱 엉터리 휠체어를 만들어주는 츠네오. 조제는 츠네오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아름다운 대낮의 풍경을 보게 된다. 평범한 하늘에 뜬 범상한 구름을 보며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조제, 다락방에서 헌책들을 벽돌처럼 쌓아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조제. 두 다리로 걷지는 못하지만 상상 속에서 세상 모든 곳을 바지런히 걸..
6. ‘가위손’을 닮은 천재 소년, 사랑에 빠지다 영화 『가위손』에서는 흥미로운 퀴즈가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워드(조니 뎁)의 기이한 외모와 천재적 재능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킴(위노나 라이더)과 가족들. 킴의 아버지는 에드워드의 ‘정상성’을 시험하기 위해 퀴즈를 낸다. “네가 길에서 돈가방을 봤다고 하자. 주위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어떻게 하겠니? A. 돈을 갖는다. B. 친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산다. C.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D. 경찰에 신고한다.” 킴의 동생들은 “나라면 그냥 갖겠다”고, 에드워드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시시덕거린다. 에드워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킴의 눈빛도 덩달아 흔들린다. 에드워드는 창백한 얼굴에 투명하게 묻어나는 진..
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눈앞에서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을 때 ‘세상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영화 속에서 그야말로 ‘리얼한’ 화면을 발견했을 때 ‘정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데!’라고 감탄하는, 스펙터클의 사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 영화 『라이온 일병 구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관객들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치’라며 전투 장면의 현장감을 극찬했다. 그러나 『라이온 일병 구하기』의 숨 막히는 전투 신이 과연 ‘사실적’이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일까. 사실감이란 본래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후 판단되는 감각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총알이 눈앞에서 난사되고 사람이 피와 내장을 흘리며 죽어가는 실제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
4. 당신의 불행이 당신의 질병을 부른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아프답니다. 폐 속의 질병은 내 정신적 질병이 넘쳐흐른 것에 불과하지요.” 이런 식으로 ‘정신적 요인’을 질병의 원인으로 치환시키는 사고법은 ‘당신의 성격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암을 유발하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암 환자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며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사람이다’라는 식의 당혹스런 논리를 대중적으로 유포시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믿음은 16세기 후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부터 유포된 낭만적 환상이었다. 감정이 질병을 유발시킨다는 논리, 질병의 원인 자체가 개인의 불행 혹은 악행에 기반한다는 상상은 수전 ..
3. ‘천재’라는 꼬리표가 담을 수 없는 것들 질병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환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가 범인의 소유물인 것처럼(?), 질병도 환자의 소유물이라는 환상이 아닐까. 아픈 사람 스스로가 병을 만든다든지, 환자 자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식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범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듯 질병 또한 환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에이즈 인권 운동 포스터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다. “단지 내가 HIV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내가 죽음의 전문가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내 모든 에너지를 오직 ‘삶’을 향해 쏟아 붓고 있다.” “나는 HIV 보균자 그 이상의 존재다I’m more than HIV-Positive.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신나게 춤추러 가고 싶고,..
2.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죄수’로 호명되다 영화의 첫 장면. MIT 대학 교실은 대학원생들로 가득하다.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수학 수훈상 수상자답게 호기롭고 당당하다. 그는 수업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낸다. “본관 복도 칠판에 푸리에 이론(Fourier Theory)을 적어뒀으니, 누구든 학기 말까지 풀어주기 바란다. 그걸 푼 사람은 내 수제자로서 명예와 부를 얻게 될 것이며 그 성과가 기록되고 영예로운 MIT 테크지에 이름이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큰둥하다. 아무리 부와 명예가 좋다지만 워낙 어려운 문제라 자신이 풀어낼 리가 없다는 얼굴들이다. 수업이 끝난 후. 청소부 윌(맷 데이먼)은 칠판에 적힌 문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윌은 언제나..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버린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현대인에게는 눈물의 에티켓이 있다. 이토록 쿨한 세계에서는 아무 데서나 주책없이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 사방이 꽉 막힌 스크린 앞에서, 혹은 아무도 우는 내 모습을 보지 않는 텅 빈 방 안의 TV를 보면서. 화면 안에서는 저토록 넘쳐나는 눈물이 현실 속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의 ..
3.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과 철학이 입맞추는 순간 현대인은 ‘달콤한 심리 치유 에세이’나 ‘스파르타식 자기계발서’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철학은 심리 치유 에세이처럼 친절하게 위로해주지도 않고, 자기계발서처럼 손쉽게 성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철학은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 저마다의 ‘사정’을 절대 봐주지 않는다. 나는 철학의 그 가차 없음, 인정사정없음이 마음에 든다. 철학의 무대 앞에 서는 순간, 우리들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조건’들은 잠시 사라지고, 우리는 무장해제 상태로 평등해진다.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모두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비밀의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의 귀가 얼마나 열려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이냐에 따라, 철학의 메시지는 ..
2. 행복한 오독의 막춤 삶이 잠시만 ‘얼음 땡’ 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놀이할 때 ‘타임!’이라고 외치면 잠시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게임의 법칙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쉽게도 인생에는 그런 ‘얼음 땡’이나 ‘타임’이 없어서 탈이었다. 잠시만 삶의 속도를 ‘제로’로 만들고 싶을 때, 그럴 땐 어떤 따스한 위로도 어떤 그럴듯한 자기합리화도 먹히지 않는다. 그럴 땐 나는 주로 기약 없는 ‘겨울잠’을 청하지만, 그것조차 효과가 없을 땐 할 수 없이 책을 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랫동안 좋은 책인 건 알았지만 절대 펼쳐보지 않았던 책들을 꺼내 읽는다. 먼지 쌓인 이 책들 대부분은 ‘어렵다, 머리 아프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왔던 철학서들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처방전..
철학의 멘토, 영화의 테라피 1. 철학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문학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한때는 그 ‘쓸모없음’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한때는 애써 뭔가 가시적인 ‘쓸모’를 찾느라 남몰래 혈안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질문을 받아도 굳이 흥분하지 않는다. 영혼의 추위에 떨던 내 인생 하나를 구제해준 것만으로도 인문학의 쓸모는 충분히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나 스스로가 질문한다. 인문학이 정말 쓸모없을까? 인문학은 정말 ‘필요 없는’이라는 단죄를 받아도 싼 것일까. 요즘 내 생각은 바뀌었다. 인문학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의 범위가 잘못 규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인문학은 마케팅 전략이나 주식투자비법을 찾을 때는 도움이 안 될지..
철학, 삶을 만나다 목차 강신주 책을 시작하며 / 프롤로그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장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교환 가능한 것과 교환 불가능한 것사건과 무의미더 읽을 책들 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이성의 의미와 한계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철학이란 무엇인가철학과 인문학적 경험더 읽을 책들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더 읽을 책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생각하기 힘..
에필로그 1. 철학이 의미 있어지는 순간 “여러분의 집에는 혹시 가훈이 있습니까?” 강의 시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은 자기 집의 가훈이 “정직과 인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도 자기 집의 가훈을 소개해주더군요. “하면 된다!”라고요. 저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에서는 칸트식의 금욕주의가 느껴졌고, 후자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주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인내’는 좋은 가훈이지만, 무엇인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가족 성원 하나하나보다 가족이란 조직 자체를 위한 규율 같으니까요. 그러나 가훈은 가족 성원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도대체 누구에 대한 정직이고, 무엇을 위..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항상 어떤 고독을 동반한다는 것도 경험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흔히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멀리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 사람이 내가 아..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 ‘주체’는 기본적으로 주인과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주체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은 아마도 노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여기서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사례를 통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가장 지속적이었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녀 차별, 특히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지배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남성 우월주의를 흔히 가부장제라고 부릅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가 하나의 낡은 관습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성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여성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가 가진 함의를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여러분은 마음이 쓰리도록 아플 때 어떻게 하나요?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경우, 우리는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나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약간의 상담을 거친 후 우리에게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의 고통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은 곧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먹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할 겁..
3장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와 우리 여기 왼쪽에 200만 원의 현금이 있고, 오른쪽에 200만 원 상당의 노트북이 있다고 해봅시다. 자!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별로 주저하지 않고 현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현금을 선택할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왜 우리는 상품이 아닌 화폐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상품이 가지는 가능성은 유한한 것인 데 반해, 화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금 상품이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상품이 그것이 충족시켜주는 목적에만 국한된 사..
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생각하기 힘든 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테마 종교, 국가, 심지어 주체마저도 철학이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힘이 있습니다. 철학은 자명하다고 전제되어온 모든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고별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소롭다는 듯이 피하고 있는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테마입니다. 물론 철학이 사랑 자체를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이 사랑을 우리로부터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낯설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철학은 사랑이란 테마를 더욱 자명한 것으로, 마치 건..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마침내 인당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바람마저 강하게 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를 뒤섞어버리는 폭풍우가 배를 덮치려고 할 것입니다. 심청을 태운 배는 15일에 출항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서 뱃사람들은 이미 희생물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심청이 바로 그 희생물이지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삼백 석의 공양미가 필요했던 그녀는 자진해서 희생물로 배를 탔던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그녀가 배에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더 난폭해진 폭풍우가 그녀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청은 비를 맞으며 뱃전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는다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의..
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 여러분은 철학이란 학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학문, 무엇인가 심오하기는 한 것 같지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학문, 삶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현학적인 학문, 배우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배울 필요는 없는 고급 교양……. 철학에 대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마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은 과거에 철학을 공부해보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혹은 앞으로 어떤 계기로 인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철학을 좀 제대로 배워보려고 시도하자마자, 여러분은 논리학(logic)이라는 학문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흔히들 철학..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 이래로 서양에서는 인간을 보통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생각하는 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관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공룡능선을 타고 대청봉에 오를까, 아니면 서북주릉을 타고 대청봉에 오를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일까?’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왜 그 사람은 오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등등.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인간이 분명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책을 시작하며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농담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전혀 웃지 않더군요. 웃기는커녕 오히려 제 농담을 노트에 적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또 어느 때는 전혀 반대되는 일도 있었지요. 저는 진지하게 어떤 철학적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에 저는 심각하게 논의를 진행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당혹스런 경험들로부터 저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