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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유명론과 경험주의 지금까지 우리는 중세철학에서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살펴보았습니다. 근대철학, 특히 경험주의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토록 장황하게 중세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찌보면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명론과 경험주의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장황함은 용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명론은 중세 전체를 지배한 실재론에 대한 반대로서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데아와 유사한 보편자가 세계를 만들어내고 움직인다는 사고에 대한 반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데아와 같은 관념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는 주로 개별적인 사물이나 현실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예컨대 하늘에 떠다니는 이데아나 관념에다가 사물을 꿰어..
윌리엄 오컴 반대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라는 사람은 당시의 유명론자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편 개념은 기호다. 이 기호에 상응하는 실재는 없다. 사물에 앞서가는 보편자는 신의 정신 속에도 없다. 예를 들어서 추상적인 ‘언제’ ‘어디’ 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만이 실재한다고 합니다. 관련된 사물들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을 떠난 ‘관계’라는 추상적인 존재란 없으며, 1, 2, 3 같은 숫자들은 실재하지만 일반적인 ‘수’라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결국 보편 개념은 이름일 뿐이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컴은 이런 논리가 기독교 교리에까지 적용된다면, 신학적 교의 자체가 붕괴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 보편논쟁은 유명론자들을 억압함으로써 종식되었습니다. 실재론자가 승리한 것인데, 당시로선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억압되고 은폐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쟁이나 문제가 억압한다고 없어지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쟁은 뒤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중세 후기에 유명론과 관련해 새로운 주장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컴(William of Ockham)이 두 개의 대비되는 입장을 대표합니다. 유명론과 관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중용적 실재론’이라고도 불립니다. 반면 오컴은 유명론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대한 번역 및 주석의 대가였던 알베르투스 마..
보편 논쟁 ‘보편논쟁’이라 불리는 논쟁을 통해서 유명론은 비로소 자기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논쟁은 짐작하다시피, 실재론자와 유명론자들이 싸운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실재론자들에 해당되는데, 신(보편자)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며, 개별자들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죽으면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라틴어로 universalis ante res, 즉 “보편이 앞선다”(“보편이 먼저다”)라고 말합니다. 에우리게나, 안셀무스, 기욤 드 샹포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실재론자이지요. 안셀무스는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은 ‘완전한 존재’다. 존재라는 속성이 없다면 그건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존재는 존재를 속성으로 가져야 한다. 그러..
스콜라철학의 탄생 이렇듯 보편 개념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유명론이고,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실재론입니다. 그 이견의 뿌리는 고대철학까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실재론적 입장은 플라톤 이래 주된 흐름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하고, 인간의 지식이란 그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이며, 따라서 진리란 그 ‘기억’을 되살려 이데아의 세계에 다시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데아라는 보편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며, 모든 보편 개념은 이데아의 세계에 근거하고 있기에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지요.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강력한 실재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반면 유명론은 이름에 걸맞는 입장이 분명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
제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근대철학의 동요와 위기 1. 유명론과 경험주의 실재론과 유명론 근대철학의 다음 장은 경험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적 흐름입니다. 이는 주로 영국에서 발달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의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식주체의 경험이 지식의 연원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철학사에서 이런 경험주의의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은 아시다시피 베이컨과 로크, 버클리와 흠입니다. 그러나 경험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으로 경험주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베이컨은 흔히 알고 있는 이 사상가들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러셀조차도 “베이컨은 자신이 과학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으나 사실은 당시의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과..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지만, 데카르트가 열었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 뒷편에 자리잡고 있던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대해 스피노자는 명확하게 반대의 깃발을 내건 셈입니다. 또한 주체를 대상에서 분리해내며, 그 ‘주체’를 사고와 판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던 ‘주체철학적인’ 문제설정에서 애시당초 벗어난다는 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럼으로써 주체-객체(대상)의 일치라는 문제 자체가 스피노자에겐 제기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이 진리를 제공하리라는 근대철학적 신념과 달리 차라리 진리가 인식에 앞서, 판단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윤리학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됩니다.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으로서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그것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억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은 어쩌면 소용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이 점에 관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얘기를 하고 있지요. 한편 스피노자는 이 욕망이라는 것이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하나의 ‘양태’로서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한양태’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유한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
코나투스 다음으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보겠습니다. 윤리학은 스피노자에게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어떻게 작동해서 어떻게 대상을 파악하고, 어떻게 오류를 범하고, 어떻게 감정을 갖거나 감정에 매이게 되고, 어떻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겨나는지, 나아가서 그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하고,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심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인 거지요.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제목이 『에티카』( ‘윤리학’이란 뜻입니다)인 것을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문제설정에서는 근대철학의 꽃이었던 인..
진리와 공리 이는 사실 과학의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뉴턴 시대에 누가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 질량이 늘어난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거짓이요, 그 사람은 물리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속도가 빨라지면 질량이 늘어난다’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 겁니다. 상대성이론이 새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라면 사정은 정반대가 되겠지요. 요컨대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데카르트적인 문제, 즉 근대철학의 중심이 되는 문제를 애초부터 피해 갑니다. 그런 문제는 스피노자에게서는 제기조차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근대적인..
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예컨대 반지름 5인 원의 면적을 ‘25π다’. 혹은 ‘27π다’라고 상이하게 판단했을 때, 즉 하나의 속성에 대해 상이한 판단이 있을 때, 어떤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와 단련해 유명한 명제가 있는데, 그는 『에티카』의 2부에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정리를 제출합니다. 비유하자면 “빛이 빛과 어두움의 기준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빛이 ‘있다’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되지, 빛과 어두움 외부에 있는 제3자에 의해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있다’ / ‘없다’ 역시 존재가 ‘부재’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기준은 존..
스피노자의 진리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논의는 ‘실체’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면 독립적인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와 ‘연장’, 혹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을 실체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는 많은 속성을 가지는데, 그 중에 ‘연장’과 ‘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라는 겁니다. 잠시 여기서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고 하는 점에 주목합시다.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불렀던 실체는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
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상반됩니다.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라고 합니다. 모든 개체 각각이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며, 개체 각각이 실체라는 거죠.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 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개체란 실체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실체는 이 양태의 근저에서 이 모든 양태들을 모두 싸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임에 반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자기원인이라고, 즉 그 자체의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자연 안에 있는 “무언..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substantia)와 ‘양태’(modus)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실체란 개념에 대해선 앞서 말씀 드린 바 있지요. 물론 사상가마다 그 개념에 부여하는 내용에 차이는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둡시다. 실체와 양태에 대해 다시 한번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터미네이터 T-1000이란 친구를 전체 세계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실체는 ‘터미네이터’로서 수행할 임무가 그것인데, 이 친구가 숱하게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그러한 바꿈(변화)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그가 그처럼 수없이 모습을 바꾸는 것은 오직 ‘터미네이터’로서의 임무를..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하고 변종 같은 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대부분의 근대철학자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음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특징, 나아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갖는 중요한 특징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입니다..
근대철학의 딜레마 그런데 데카르트의 ‘주체’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겁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그렇다면 독립된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예전에는 신의 계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됩니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인식능력이 어디까지 인지를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치론’ 혹은 ‘윤리학’(‘도덕론’)입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지금까지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라고 했으며, 이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음 또한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만들어지자마자 곧 딜레마(벗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예컨대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조금 우회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가운..
이성은 완전성을 타고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여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입니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칠판에 원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완전한 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다섯 개, 열 개, 백 개, 이백 개 그려도 마찬가질 겁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모두 완전한 원에 대한 관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원이 사실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원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
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 앞서 우리는 주체를 독립시키자마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데카르트에게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런데, 우선 이 문제가 그의 철학에선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심각했고, 다음으론 그 문제의 해결이 그의 철학이 확고한 자리를 잡는 데 극히 중요했다는 점에서 심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연장’(延長)과 ‘사유’(思惟)가 그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실체’(substance)라는 말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못 보신 분은 별로 없겠지요? 거기 보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형될 수 있는 괴물 같은 놈이 나옵니다. 이름은 T-1000이라고 하던가요?..
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내(주체)가 있다면 먹히는 밥(대상, 객체)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왜냐하면 전자는 주체고, 후자는 대상이요 객체니까요) 존재가 됩니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주체 대상의 이런 근대적인 분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
데카르트의 문제설정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과학적 지식이 확실한 기초에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철학 자신이 확실하지 못한 기초에 서 있다면 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자명한 기초는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됩니다. 즉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의심,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
두 개의 코기토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을 열었으며, 따라서 ‘근대철학의 비조’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근대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데카르트에 대해 말하려면, 근대철학을 연 ‘제1원리’인 코기토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코기토(cogito)라는 말은 ‘생각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gitare의 1인칭 형태입니다. 즉 ‘나는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 cogitare는 영어에서 생각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들, 예컨대 cognition, recognize와 같은 단어들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철학에서 코기토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코기토 에르고..
중세 너머의 철학 이러한 은폐된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철학으로 무장하면서 신학을 위한 반론을 펴게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신학의 반대자들, 정통적인 신학에서 벗어나는 사상가들과의 각축전은 사실은 불가피하게 신학 안에서, 신학적인 껍데기를 입고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10세기 이후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로스켈리누스(Roscelinus)나 아벨라르(Abelard, 라틴어로는 아벨라르두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명론(nominalism)이라 불리는 견해를 제출합니다. 유명론은 ‘일반적인 개념은 단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견해인데, 신학적 사고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사상적으..
은폐된 공세 지오다르노 브루노(Giodarno Bruno, 1548~1600)는 일찌감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주란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로 가득찬, 그러나 끝도 중심도 없이 운동만을 지속하고 있는 영원한 전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신이란 일체의 만물을 지배하며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우주의 각 개체 속에 있는 것인 동시에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신과 자연(우주)을 하나로 보는 이런 입장을 범신론(汎神論)이라고 합니다. 이는 중세적인 신의 개념,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교회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견해였습니다. 이런 입장은 과학의 이름으로도 철학의 이름으로도 ‘용서받을 수 ..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이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주제로 들어가 봅시다. 근대철학에 대해 얘기하려면 가장 먼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근대 전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야 할 범위를 철학으로 제한해서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면, ‘철학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혹은 ‘철학적 근대란 무엇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저는 지금 근대에 대한 어떤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근대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중세와 구분선을 그음으로써 정의되는 그런 시기입니다..
경계읽기와 ‘문제설정’ 그렇다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경계선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 자신이 자기 사상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경우는 결코 없으며, 철학책 어디를 봐도 경계선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경계선 같은 건 애시당초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원뿔을 밑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것은 보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집니다. 데카르트를 로크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와 칸트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 혹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그으려 할 때, 경계선은 모두 다 달라질 것입니다. 또 철학사를 반복의 역사일 뿐이라고 볼 때와 ..
철학의 경계 저는 예전에 쓴 책에서 “철학은 의심하기에서 출발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란 이런 방법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 지배적인 철학과 투쟁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철학사는 전장(전쟁터)’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치고받는 이 투쟁을 통해 철학자들이 얻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철학 밑에서 사고되지 못했던 것, 또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고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지배적인 사상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고 사고되지 않게 된 것을 찾아내고 확보하는 투쟁이 바로 철학인 셈입니다. 사실 철학에선 다른 사상가들과 자신이 어떤 점에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새롭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
서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하나의 사상, 하나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이젠 너무도 분명한 듯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선언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시대의 조류에 매우 둔감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어디서나 거론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나아가 최근의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포스트모던하다’라는 형용사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사조들, 예를 들면 맑스주의 같은 것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옛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제2증보판에 부쳐 이번에 증보하면서는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장을 추가했고, 보론으로 「근대적 지식의 배치와 노마디즘」을 실었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장이 새로 들어가면서 관련된 내용을 결론에 추가했고, 본문 가운데 일부분을 약간 수정했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장은, 나로선 어쩌면 가장 가까운 철학적 친구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사람들이라 진작에 들어갔어야 할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지난번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도 여유가 없어서 원고를 써넣을 수 없었던 것인데, 이제야 비로소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장을 추가하면서 결론에 동일성과 차이,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약간의 글을 추가했다. ‘보론’으로 추가한 것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 내지 ‘인문학의 전망’에 대해 강연했던 것인데..
책머리에 데리다는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의 주름이다.’ 물론 여기서 ‘외부’란 단지 통상적 유물론에서 말하듯이 사회경제적 조건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실천적 유물론에서 말하듯이 실천적 맥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사유 안에 들어와 있는 비-사유고, 각각의 철학이 그 위로 펼쳐지며 나름의 사유의 선들을 그리는 그런 지반이다. 아니, 사유가 그것의 소재로 삼는 모든 것이다. 어느 날 사유에게 다가온 것, 그런 식으로 사유가 만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유하면서 사용한 모든 것(책이나 언어를 포함하여), 그것이 바로 사유의 ‘외부’다. 공장이나 병원도, 감옥이나 형법도, 과..
애노희락의 심리학 목차 사상체질 / 책을 읽기 전에 프롤로그: ‘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 1. 갈등의 원인 2. ‘다르다’와 ‘틀리다’다름은 동등하다“알았어”라고 말하는 네 가지 방식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3.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가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다른 사람, 다른 접근 방식 4. 출발점에 대한 이해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체질을 아는 것은 출발점을 아는 것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1장 사상체질에 관한 개요 1. 체질의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 2. 사상체질이란 무엇인가체질과 마음사상기운과 사상체질 3. 사상인의 마음 씀의 개요 제2장 사상인의 성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기본적인 기능들사상기운(四象氣運)융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기본 기..
마지막으로 마초, 위연, 마속, 강유, 영류왕(헌제), 동탁, 여포, 노숙, 장송, 맹획 등등 사상인의 특성과 박통(博通), 독행(獨行), 사심(邪心), 태행(怠行)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이 아주 많은데,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아쉬운 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더 깊게 공부할 분을 위해서 다른 책을 하나 더 추천하도록 하자. 등장인물의 성격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는 소설로 좋은 것이 있다. 태양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태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소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부딪히는 『대망(大望)』이라는 소설이 공부할 만하다. 그런데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 필자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최후의 승자 사마의(司馬懿, 179~251)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그가 사실상 삼국지 이야기의 최후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조조가 죽은 뒤 조씨 형제끼리의 왕권 다툼으로 위는 왕권의 권위가 떨어진다. 삼국지 후반부에 이르면 사마의가 왕권에 욕심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왕을 불신하면서 사마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자연히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황제인 조예가 사람을 보내 사마의를 떠보려 하자, 병을 가장하고 속여 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귀도 어두워지고 치매 기운도 시작된 듯한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내는데,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 아닌지? 유비가 천둥이 치자 상 밑으로 숨으며 조조를 속여 넘기던 모습과 완전히 똑같다. 아주 태음인다운 대처방식이다. 그렇게 조예를..
3. 방통과 사마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라는 적벽대전까지 이야기가 끝났으니 마무리를 해도 되지만, 태음인 이야기가 너무 적은 것이 유감이다. 유비가 어느 정도 언급되었지만, 태음인 중에도 우유부단함이 좀 지나친 편에 속해서 태음인의 전형으로 보기는 좀 그렇다. 방통과 사마의의 이야기를 조금 해서 균형을 잡도록 하자. 이 둘은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방통(龐統, 179~214)을 굳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태음인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가 방통에게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같은 은둔자라도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유비의 삼고초려 전에는 산속에 확실히 숨어 있었다. 세상에 나가면 확실히 나가고 아니면 아예 마는 것이다. 소음인다운 태도다. 그러나 방통은..
적벽대전 손권과 유비의 동맹이 확실해지자, 조조는 더 이상 적들이 크기 전에 확실하게 정벌하려고 한다. 대병을 이끌고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양자강이다. 위의 병사는 대부분 북쪽 출신이라 수전에 약하다. 일단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선단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된다. 동맹군이 위를 이기는 방법으로 제갈량(諸葛亮, 181~234)과 주유가 생각한 방법은 화공이다. 그런데 화공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배들이 뚝뚝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화공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더 큰 문제는 그 시기가 바람이 오의 진영 쪽으로 부는 계절이었다는 것이다.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방통(龐統, 179~214)이다. 제갈량과 더불어 복룡과 봉추라고 불리며 병법가로 쌍벽을 이루는 명성을 얻던 그 ..
조조 삼국지 이야기를 한다면서 삼국지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라는 적벽대전을 빼놓기는 아쉽다. 또 인물 분석이 촉한 위주로 되어 조조, 주유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쉬우니, 적벽대전의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자. 먼저 조조를 조금 이야기하고 가도록 하자. 조조는 소양인으로 보인다. 은근히 태양 기운도 강해서 소양인인지 태양인인지 좀 헷갈리지만, 말년에 동작대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을 보면 소양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백성은 동작대 같은 것으로 위엄을 보여주어야 존경심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대중 심리의 파악에 뛰어난 모습을 여러 번 보인다. 특히 패전 후에 부하를 추스르는 방법들을 보면 감정을 움직이는 데 아주 능하다. 어쨌든 소양인이라도 태양 기운 또한 강하기에, 관우를 ..
2. 장판파 전투와 적벽대전 장비와 조자룡 관우의 죽음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면서 체질의 특성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유비, 관우,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각각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의 전형도 아니고, 또 앞의 이야기는 소양인 이야기가 별로 없으니, 이것으로 끝내기는 좀 아쉽다. 이왕 삼국지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시간 순서를 쫓아가면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도 좀더 하도록 하자. 장판교 전투에서 소음인 조자룡과 소양인 장비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있으니 그 장면을 한번 짚어보자. 먼저 장비와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간단히 알아보자. 장비(張飛, ?~221)는 언뜻 보기에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성격도 급한 면이 두드러지지만, 의외로 재간(才幹)이 뛰어나다. 원래 장비는 유비의 첫 부인이 된..
촉의 비운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유비나 장비가 제갈량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촉의 비극이었다. 유비나 장비가 냉정하고 침착했다면, 촉을 바탕으로 촉한이 삼국을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관우의 죽음이 오히려 촉의 병사들을 분발시킬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우의 죽음은 장비와 유비를 무너뜨린다. 소양인 장비는 바로 겉으로 드러나게 무너져버린다. 뒤에서 다시 설명되겠지만, 장비는 재간(才幹)도 뛰어나고 도량(度量)도 제법 보여주는 소양인이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가 죽자 한순간에 무너진다. 관우가 존경받던 무장이었으니, 촉의 전체 장병들이 어느 정도는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생각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급 장교나 일반 병사의 마음이 장비의 마음 같기야 했을까..
형주에 남겨진 사석(捨石) 결국 유비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조조와 손권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형주에 관우를 남겨놓고 촉을 정벌하러 떠난다. 처음에 제갈량은 형주에 남고 유비와 방통이 황충, 위연과 함께 촉으로 간다. 그러나 낙봉파에서 방통이 죽게 되자 장비, 조자룡 등을 다 끌고 제갈양이 촉으로 간다. 관우가 무장치고는 지략이 높기는 하지만, 주유, 사마의, 육손, 여몽 같은 전문적인 지략가의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관우 옆에 아무도 남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지역을 잘 아는 방통을 관우 옆에 남기고, 자신이 촉으로 유비를 따라갔다면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장수 역시 거의 남은 사람이 없다. 요화야 산도적 출신이고, 미방은 장사꾼 출신이다. 관우의 아들들을 제외하면 주창 ..
화용도(華容道) 마지막에 가장 첨예해진 것이 형주 처리 문제이고, 이것이 왕권 문제와도 연관되기에 그 이야기를 먼저 했지만, 관우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코드가 맞지 않는 부분은 처음부터 나타난다. 관우는 능력 있는 사람이 난세에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고초를 겪으면 당연히 나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비에 대한 존경 때문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따라가지만, 속이 썩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 탐구에만 매달려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을 굳이 찾아간다는 일이. 제갈량 쪽에서도 관우가 그리 편하지는 않다. 각각 자신이 맡은 일을 차질 없이 행해서 구조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선호하는 소음인의 관점에서 볼 때, 관우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
1. 관우는 왜 형주에서 죽어야만 했나 왕위계승의 문제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소음인이다.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가히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 병법을 쓰지만,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이 동요되거나 들뜨는 일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 타인의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이해한 것이기에, 자신의 감정은 늘 고요하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이용할 줄 안다. 또 남만정벌에서 보면, 새로운 환경에 당황하지 않고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바로 창안한다. 전술로 안 되면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이것은 식견(識見)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여기까지는 장점이다. 소음인이 갖는 한계도 조금 드러난다. 모든 것을 구조화해서 안정적으로 돌리려는 마음이 지나치..
부록 삼국지 이야기 책이 좀 어려워도 마지막이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사상인의 심리연구’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끝까지 잘 따라와 준 독자분들에 대한 보답으로 마지막에는 재미있는 삼국지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진짜 성격이 어땠는지는 알 방법이 없고, 또 안다고 해도 공부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소설을 통해 가공된 인물 쪽이 오히려 공부거리가 된다. 소설가들이 마구 인물을 만드는 것 같아도 인물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려다보면 사상인 중의 한 모습을 묘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존 인물보다는 소설 속에서 약간 가공되어 나오는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사상기운을 느끼기에 더 쉽다. 어쨌..
2. 한의사, 한의학도들에게 이 책은 한의사나 한의학도보다는 일반 독자들을 더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 그러나 한의사나 한의학도 중에 이 책을 읽을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되기에 그분들께 부탁의 말을 남기고자 한다. 이 책은, 마무리한다는 기분이 아니라 물꼬를 튼다는 기분으로 씌어졌다. 『동의수세보원』에는 사람마다 자기 체질을 알고 체질에 따라 노력할 바를 알아 마음을 상하지 말기를 바라는 동무(東武) 선생님의 간절한 바람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금 시중의 책은 동무(東武) 선생님의 바람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시중의 사상의학과 관련된 책은 대충 두 종류다. 하나는 한의사와 한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성정(性情)에 관한 부분은 간단히 다루고 임상에 관한 내용으로 ..
에필로그 노력하는 만큼 좋아진다 1. 일반 독자들에게 이로써 사상인의 마음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필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추 다 한 것 같다. 사상인의 기본적인 성정(性情), 그 기본적인 성정(性情)이 드러나는 모습,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과 잘못되어 빗나가는 모습, 마지막으로 가장 타락했을 때 나오는 모습까지 다 짚어보았으니, 꼭 해야할 이야기는 다 끝난 듯하다. 뒤에 부록으로 붙인 삼국지 이야기가 남았지만, 그것은 이론적인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정도에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자.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으로 남길 만한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대처하는 주된 기능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1.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우열을 매겨서는 안 된다. 2..
2. 의(義)와 지(智)의 충돌 인과 예가 부딪히듯이 의(義)와 지(智)도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의(義)란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감성적인 면이 있다. 또 결과 지향적인 면이 강하다. 지(智)란 타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고의 영역에 속하고 과정 중시의 측면이 강하다. 의만 따지면 방법을 무시하게 되고, 지만 따지면 남들의 느낌에 관심이 없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보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의(義)를 주로 ‘옳을 의’로 새긴다. 이 글에서 ‘옳다/그르다’라는 표현은 주로 논리적 판단의 내용에 써왔다. 그러나 의를 말할 때 쓰는 ‘옳다’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과 관련된 일에서는 여럿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까지가 포함된 개념이다. 즉 의란 근본적..
제11장 인의예지와 체질 앞에서 각 체질별로 가장 타락한 모습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변신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이 부분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 내용은 인의예지라는 유교의 기본 덕목과 관련된다. 동양적인 가치관에 중점을 두는 독자에게는 인의예지와의 관련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체질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인(仁)과 예(禮)의 충돌 유교에서는 인간의 덕목으로 인의예지를 꼽는다.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가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겠지만, 낮은 경지에서는 좀 다르다. 인(仁)과 예(禮)가, 의(義)와 지(智)가 서로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인(仁)은 직관적으로 작용한다. 또 인은 나와 가깝고 멀고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아이가..
5. 태양인의 급진 성향 태양인은 기본 성향에 있어서는 확실히 급진적인 면이 있다.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네 체질 중에 가장 적게 느낀다. 따라서 기존의 체제를 바닥부터 흔드는 변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이를 주장한다. 또 태양인들은 공통된 기준을 지키는 일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 태양인들이 교우(交遇)에 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잘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보통은 공통된 기준을 많이 가질수록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우(交遇)에 능한 태양인은 그걸 잘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로가 공통된 기준이 많지 않은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려면 공통된 기준이 넓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
4. 소양인의 진보 성향 소양인의 기본 성향은 개혁적이다. 성정(性情) 문진표에 ‘부당하다고 느끼면 참지 못한다’는 문장을 넣어놓고 소양인을 판별하는 문항으로 사용하는 한의사들이 꽤 많다. 집안의 가구 배치가 좀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날로 바꿔놓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대부분 소양인이다. 대외적으로도 개혁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다른 체질보다 높게 나타난다. 동네 반상회, 학교 학부모회, 회사의 업무개선 회의 등등의 자리에 가보면 바로 눈에 띈다. 그러나 다른 체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성향들이 바로 사회적 문제의 진보 성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보편과 특수를 이야기할 때 강조했듯이, 소양인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다수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3. 태음인의 보수 성향 태음인의 기본 성향은 보수적이다. 감각을 중시하고 경험적 접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보수적이기 쉽다. 기존의 것이 익숙하고, 익숙한 것이 바뀌는 것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또 약간의 불편은 고치려 하기보다 그냥 감수하는 경우가 많다. 희성(喜性)이 발달되어서 웬만한 상황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음인이라고 기존의 가치관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소음인이 자신의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제도 교육의 왜곡을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태음인은 배운 것보다 경험한 것을 중시하는 천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음인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가는 경향이 있다면, 태음인은 반쯤만 받아들이거나 삼분의 일쯤만 받아들이거나 하는 식이다. 즉 ‘책은 ..
2. 소음인의 수구 성향 소음인은 기본 성향에서 수구적이다. 바꿔 말하자면,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해도 문제없다 싶을 정도로 확신이 들어야 그 부분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한번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테레사 수녀의 빈민 사랑도 마찬가지고, 이른바 수구적 태도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음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확신이 그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아주 급진적인 생각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 소음인은 그 급진적인 사고를 변치 않고 지켜간다. 급진적 사상을 수구적 태도로 지켜낸다는 것이다. 종교적 맹신자의 경우, 급진인지 수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바로 그런 경우다. 하지만 소음인의 그런 경향이 크게 문제되는 경..
제10장 보수성과 개혁성 보수성과 개혁성은 기본 성정(性情)과 사심(邪心), 태행(怠行), 박통(博通), 독행(獨行) 등이 모두 어울려서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태도다. 체질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한 번쯤 다뤄볼 만한 주제다. 개요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기본 성정(性情)은 개인적 성향의 보수성/개혁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사회적 성향의 보수성/개혁성은 굳이 체질에 따른 경향을 보이지는 않는다. 1. 개인적 성향과 사회적 성향의 차이 체질에 대해 설명한 시중의 책들을 보면, ‘태음인은 보수적이다’ ‘태양인은 급진적이다’라는 식의 표현들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보수’ ‘진보’라는 용어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른 용어들 중 하나라서 문제다. 말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듣는 사람이 받아..
5. 독행(獨行), 태행(怠行)에 관한 약간의 사족 독행(獨行)과 태행(怠行)의 문제에 있어 까다로운 점은, 다른 기운을 배우는 것은 맞는데 그것이 무엇에 능해지기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있어서는 이 문제가 간단하다. 예를 들어 태양인이 태음 기운을 배우려고 한다는 것과, 태음인의 사고방식을 배우려 한다는 것은 같은 문제가 된다.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천기(天機)도 인륜(人倫)이고, 태음인이 잘 느끼는 천기(天機)도 인륜(人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태양과 소양, 태음과 소음이 바뀌고 있어서 까다로워진다. 즉 태양인이 정(情)으로 인사(人事)를 하는 것에 있어 약점을 극복하려고 소음기운을 배우려 한다면, 소음 기운에 해당되는 인사인 거처(居處)의 문..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를 바로 키워서 사심(邪心)이나 태행(怠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요령도 마찬가지다. 소양인 아이에게 마무리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을 불러일으키면, 확실히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나심(懶心)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무리하는 버릇은 길러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은, 마무리를 못하는 것이 아이의 능력 부족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도덕성의 부족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절대 안 된다. 아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일 뿐이다. 부족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능력의 부족임을 지적하고, 능력을 키우기 위한 계획을 아이와 어른이 같이 짜나가고 실행할 때, 아이에게 부족한 부분..
강박관념에서의 탈피와 기분 전환 다른 체질의 독행(獨行)에 대해서는 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경지라고 하면서, 유독 소양인에 대해서만 주위에서 격려해주면 재간(才幹)이 발휘될 여지가 높다고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필자는 왜 소양인만 편애하느냐고 독자들의 야단을 맞을 것도 같고, 결국 재간(才幹)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근본은 소양인 자신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 노력을 발휘하는 방향은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쪽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발동되기 쉬운 순간, 즉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를 못하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주변 사람들 중에 “꼴좋다, 벌여놓고 마무리도 못하고…….”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더 많을까? 그렇지 않다. 나심(懶心)의 문제는 주로 가까운 사람과의 문제이기 ..
YS의 당무 거부와 IMF 대처 이런 식으로 나심(懶心)은 주로 작은 집단에서 발생하기에 독자들과 공유할 만한 사례가 좀 드문데, 마음 읽는 공부 하라고 다행이 사회적인 일에서 나심(懶心)을 보인 사례가 있다. YS가 당무(黨務)를 거부하고 고향에 내려가 칩거했던 일을 기억하는지? 3당 합당된 민자당에서 YS가 당대표가 되었는데도 박철언이 끊임없이 견제를 하자 벌어졌던 일이다. 그걸 벼랑 끝 전술이니, 노태우, 박철언이 결국은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확신한 정치 9단다운 고단수 술수니 하지만,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한 가지 동기나 계산만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법은 절대 없다. 젊은 시절에는 간혹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자세히 알고 보면 꼭 겉으로 드러난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자신..
소양인의 자기 비하 나심(懶心)의 극복을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 ‘자기 긍정감’이다. 소양인은 모든 감정이 기복이 좀 심한 편이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 역시 기복이 심하다. 일을 벌일 때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높은 상태에서 벌인다. 힘이 벅차면 그 평가가 갑자기 낮아진다. 그 상황이 되면 그냥 뒤로 나자빠져서 남들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버틴다. 그래서 나심(懶心)을 동무(東武)는 ‘자비(自卑)’라고 설명한다. 태음인의 치심(侈心)을 자존(自尊)이라고 설명한 것과 대를 이룬다. 자기 비하의 마음이 나심(懶心)이라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엄마가 파출부인 줄 아니?” 어떤 상황일까? 저녁 설거지 다 끝날 즈음에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놓을 때 하는 말이다. 이게 약한 나심(懶心)의 표현이면서 과..
가정에 일반론을 적용하는 문제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문제되는 것도 태양인의 절심(竊心)의 경우와 비슷하다. 태양인의 절심(竊心)을 설명할 때, 가정이나 소집단과 같이 노동력 투입의 불균형이 바로 드러날 수 있는 규모 이하가 될 때 문제가 된다고 했다. 소양인의 나심(懶心)이 문제되는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집안일에서, 친구 사이에서, 친한 동료 사이에서 … 나심(懶心)은 늘 이런 곳에서 발동하고, 이런 부분에서 발동되었을 때 주로 문제를 일으킨다. 소양인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준에 맞춰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집단에서는 일을 벌이는 소양인의 방식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집단 구성원이 소양인의 방식으로 설치다가 일시에 나가떨어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집단이 커질수록 ..
4. 나심(懶心)과 재간(才幹)/ 소양인의 태음 기운 나심(懶心) 이제 소양인의 태행(怠行), 독행(獨行)만 설명하면 이론적인 부분은 마무리가 된다. 각 체질별로 사상의 기운을 고루 갖추는 방법과 그 과정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되는 셈이다. 자, 시작하자. 소양인의 태행(怠行)을 나심(懶心)이라고 한다. 나(懶)란 게으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태행(怠行)이라고 할 때의 태(怠)도 게으르다는 뜻이다. 나(懶)와 합치면 ‘나태(懶怠)’가 되어 ‘게으르다’에 딱 대응되는 한자어가 된다. 각 체질의 사람들이 다른 체질의 인사(人事)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흉내 내는 것을 태행(怠行)이라 부른다. 즉 어설피 알고 대충 흉내 내는 것 자체가 좀 쉽게 해보려는 게으른 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치심(侈心)과 위의(威義)의 예 치심(侈心)에 대해서도 유명인의 예를 좀 들면 이해가 쉬울 텐데, 뭐 너무 흔해서 굳이 예로 들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군사 문화에서 갓 벗어난 상황이나 천민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는 태음인의 치심이 발동하기 아주 좋은 상황이다. 태음인인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의 90% 이상이 치심(侈心)을 강하게 내보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교수, 의사 같은 직업에도 치심(侈心)이 강한 사람이 어느 정도 절제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고 느껴진다. 심지어는 종교인 중에도 치심(侈心)이 강하게 읽히는 사람이 많으니까. 기술자 집단이 비교적 치심(侈心)이 덜 드러나는 집단인 듯하다. 치심(侈心)은 굳이 특정인을 예로 들지 않겠다. 주변에 찾아보면 무지하게 흔하니까. 위의..
자신감 모든 것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두 가지 관점이 동시에 제시되어서 위의(威義)라는 것이 무엇인지 오히려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결과를 중심으로 보면 남을 배려하는 방식을 익혔을 때 나타나는 세심함이 위의(威義)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근본적으로 위의(威義)란 소양인의 모습을 태음적인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니까. 소양인의 남에 대한 배려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들쭉날쭉한 것에 비해, 태음인의 위의(威義)는 일관성이 있고 지속성이 있다. 게다가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박함이 없다. 그러니 대인의 위의(威義)라 부를 만하다. 또 소양인의 배려는 사회 통념에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것에 비해, 태음인의 위의(威義)는 상대가 처한 특수성을 고려..
지나친 수비 성향 위의(威義)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고 치심(侈心)에 빠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태음인의 지나친 수비 성향이다. 아이들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하는 것을 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확실히 태음인은 수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스타크래프트를 잘 아는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게임 하나를 할 때도 체질의 영향이 많이 드러난다. 특히 하수 시절일수록 그렇고, 고수가 되면 그 특성이 점차 엷어진다】. 원래 태음인은 매사에 수비적이다. 함부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수비에 자신이 없어지면, 즉 겁을 먹게 되면 과잉 수비가 나타난다. 남이 나를 건드릴까 두려워 필요 이상으로 어깨에 힘을 주면서 ‘나 건들지 말란 말야’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게 된다. 이게 치심..
지하철에서 너무 개념적인 이야기만 이어지고 있으니, 시선을 지하철로 옮겨보자.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노인 한 분이 탔다. 경로석은 다 차 있고, 아무래도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를 양보는 하는데, 양보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어떻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다. 노인분이 두리번거리며 빈 자리를 찾다가 나와 눈이 마주칠 때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쪽으로 다가오시기 시작하면 내리는 척하고 문 앞으로 간다. 혹시 옆에서 젊은 사람이 잽싸게 달려들면, 그때는 “노인 분 앉으시라고 양보한 건데요”라고 조용히 말하고, 그런 불상사가 안 생기면 그냥 문 앞으로 가서 서면 된다. 만일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
적응에 대한 강박관념 결국 태음인이 치심(侈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빠른 적응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 나는 원래 느려’라고 인정하고, 차분히 천천히 적응해나가라는 것이다. 치심(侈心)이 극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독행(獨行)을 위의(威義)라 부른다. 보통 쓰는 말로는 위엄(威嚴)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뜻이다. 태음인의 위의의 모습을 검토하고 나서, 치심(侈心)을 극복하고 위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검토해보자. 거지왕 김춘삼이라는 사람이 있다. 거지에서 출발해서 나중에는 재산도 꽤 모으고, 사회적 영향력도 큰 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거지로 동냥 다닐 때 들고 다니던 깡통을 꼭 승용차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거지였을 때의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가? 사회적 명사가 타고 다..
멋 부리기 돈을 쓰는 문제로만 따지자면 아무래도 소양인이 가장 사치스럽다. 일단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충동구매 같은 것도 잘하고, 예쁜 것, 고급스러운 것에 대한 집착도 강하기가 쉽다. 멀쩡하게 아직 쓸 수 있는 물건을 유행이 지났다며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소양인은 사치스럽다는 느낌보다 ‘고상하다’ ‘안목이 있다’라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소양인은 멋을 알고, 제대로 멋을 부린다는 것이다. 멋이라는 것도 결국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맞추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소양인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최대치까지 멋을 부리고, 최대치에 맞춰서 소비한다. 그걸로 만족하지 못할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수입을 늘리려고 애쓴다. 하지만 수입의 한도를 넘어서는 사치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들이는 돈에..
3. 치심(侈心)과 위의 태음인의 소양 기운 어깨에 힘주기 다음은 태음인이 소양 기운을 얻는 이야기다. 역시 태행(怠行)으로 가는 길과 독행(獨行)으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중 태행(怠行)으로 가는 길을 동무(東武)는 치심(侈心)이라고 했다. 사치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가자면, 쓸데없이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이 치심(侈心)이다. 남에게 무언가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이다. 소양인의 당당함은 대중의 정서에 대한 빠른 파악에서 나온다. 그런 말이 있다. 똥개도 자기 바닥에 가면 50점은 접어준다고, 자기 바닥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돌아가는 켯속을 잘 알고 있는 곳이 자기 바닥이다. 소양인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에 대한 파악이 빠르다. 자존심이상해서 억지를 필 때를 제외하면, 대부..
공간적 구분, 시간적 구분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먼저 극복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자. 태양인의 독행(獨行)을 방략(方略)이라고 부른다. 태양인이 절심(竊心)을 극복하면 대인의 방략(方略)이 나온다고 되어 있다. 방략(方略)에 쓰인 방이라는 글자는 역시 나누어진 작은 부분이라는 뜻이다. 즉 나누어진 작은 부분에 적용할 책략이라는 것이다. 소음인의 독행(獨行)인 식견(識見)을 이야기하면서 소음인은 굳이 따지자면 견(見)을 세우는 쪽이 아니라 식(識)을 얻는 쪽에 약점이 있다고 했다. 같은 방식으로 태양인의 방략(方略)을 따지자면 문제는 략(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方)에 있다. 나눌 것을 나누고, 관계없는 것을 배제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좁혀진 영역에 집중하는 등의 과정에 태양인의 약점..
절심(竊心)이 두드러지는 경우 사심(邪心)과 태행(怠行)을 설명하면서, 사심(邪心)이 강해지거나 태행(怠行)을 하게 되면 주변에 피해를 줄 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그런데 태양인의 절심(竊心)이 다른 사람의 성과물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만을 낳는다면 이건 좀 불공평하다. 행하는 태양인에게 이득만 주게 되니까. 그런데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절심(竊心)을 발동시킨 태양인이 자신의 태행(怠行)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좀 드물다. 뭐 쓸데없이 골목대장 노릇을 하려 한다는 오해는 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문제 없이 이해되기도 한다. 결과가 나빠서 피해를 보는 것은 절심(竊心) 때문은 아니니까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남이 대..
태양인이 일하는 방식 태양인의 절심(竊心)은 소음인을 잘못 흉내 내서 생기는 것이니, 소음인이 일하는 방식을 간단히 검토해보자. 소음인은 본래 혼자 기준을 세우고 혼자 일하는 것에 익숙하다. 팀 작업이라 할지라도 할 일이 정확히 나눠지고 기준이 확실할 때는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며 효율적으로 일한다. 이런 소음인의 모습을 태양인이 흉내 내려 한다. 깔끔하고 확실하게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모습을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소음인처럼 몰두한다. 그럼 잘 될까? 잘 될 리가 없다. 소음인이 몰두하기 전에 하는 사전 정지 작업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음인은 영역을 나누는 일에 능하다. 지방(地方)을 맛보는 일에 강하다고 할 때의 방(方)이 나누는 기운이라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2. 절심(竊心)과 방략(方略) / 태양인의 소음 기운 태양인의 도둑질 이제까지 해오던 순서대로 한다면 소양 기운을 이야기할 차례다. 그러니까 태음인의 소양 기운을 이야기할 차례인데, 순서를 조금 바꿔보자. 소음인 이야기를 하면서 태양인의 경우와 계속 비교했으니, 이해가 쉽도록 태양인이 소음 기운이 필요한 영역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태양인의 태행(怠行)은 욕심(慾心), 혹은 절심(竊心)이라 부른다. 동무(東武)는 이를 절물(竊物)이라고 설명한다. 소음인의 탈심(奪心), 천심(擅心)을 탈리(奪利)라고 표현한 것과 아주 대조된다. 탈(奪)은 드러나게 빼앗는 것이고, 절(竊)은 몰래 훔치는 것이다. 리(利)를 빼앗는다는 것이 명성을 쫓는 것이라면 물(物)을 훔치는 것은 구체적 성과를 훔친다는 것이..
이름 붙이기 소음인이 탈심(奪心)이 앞서서 창조에 집착하면, 함부로 이름 붙이기를 한다. 일상용어 하나를 불쑥 끌고 와서는, 그것이 상당한 뜻을 품고 있는 철학적 단어라고 주장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했던 내용에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환기시켜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야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고, 철학의 가장 기본이며,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바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똥 철학, 밥 철학, 숟가락 철학, 젓가락 철학, 몸 철학, 손가락 철학, 발가락 철학 등등, 하나하나가 으리으리하고 대단한 것들인데,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과장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막상 그 내용을 들어보면 굳이 새 이름이..
소음인의 창조(創造) 소음인의 탈심(奪心)과 식견(識見)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잘 아는 소음인에게 보였더니, “그렇다면 소음인은 창조력이 없다는 건가? 수학이나 과학같이 논리를 따지는 분야에서는 소음인이 최초로 밝힌 부분도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라는 반론을 받았다. 그럴 것이다. 아주 새로운 영역을 소음인이 개척한 경우도 찾아보면 꽤 있을 것이다. 또 굳이 논리가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소음인이 새롭게 연 분야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느 조각가가 한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나무 속에 형상이 숨어 있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 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 형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
제멋대로 기준 정하기 이것이 외부로 드러나기는 천(擅), 즉 제멋대로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출발은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명성, 당파의 이익과 같은 것은 소음인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 명백히 판단의 기준에 넣지 않았을 부분이다. 이를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그렇게 잘못 들어간 부분들은 논리적 모순을 낳고, 그 모순 때문에 공격당하게 된다. 이제는 당연히 고려해야 할 내용을 고려 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방어한다. 정보 왜곡에서 말했던 정리 과정에서의 왜곡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며, 무엇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가의 기준을 그때그때 바꾼다. 태양인이 주장하는 모습을 언뜻 보면 그런 면이 보인다..
명성에의 집착 식견(識見)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비교가 되어서 식견(識見)이 뭔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소음인이 식견(識見)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태행(怠行)을 탈심(奪心)이라고 했다. 무언가 빼앗으려는 마음이라는 건데, 이게 연결이 쉽지 않다. 빼앗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왜 식견(識見)이 생기지 못할까? 이 부분을 동무(東武)가 다른 용어로도 설명하는데, 소음인의 태행(怠行)을 천심(擅心)이라는 용어로 쓴 곳도 있다. 천(擅)이란 보통 ‘제멋대로 할 천’으로 새긴다. 그리고 이걸 다시 설명하면서 천심이란 탈리(奪利)라고 설명한다. 여기까지 해놓고 생각해보도록 하자. 요점은, 소음인이 태양인의 행동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흉내 내는 모습이 천(擅)이요, 탈(奪)이라는 것이다..
1. 탈심(奪心)과 식견(識見) / 소음인의 태양 기운 어떻게 식(識)을 얻을 것인가 소음인은 자신의 락성(樂性)으로 소음 기운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또 희정(喜情)으로 태음 기운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수양을 잘해서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하면 소양 기운이 필요한 일을 잘 처리할 것이고, 사심(邪心)에 빠져 긍심(矜心)이 강해지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마지막 남은 것이 태양 기운이 필요한 일이다. 이 부분, 즉 소음인의 독행(獨行)에 해당되는 부분을 동무(東武)는 식견(識見)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식견(識見)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태행(怠行)으로는 탈심(奪心)을 든다. 그러니까 ‘소음인의 머리에 탈심(奪心)이 없으면 대인(大人)의 식견(識見)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 식견(..
제9장 태행(怠行)과 독행(獨行) 태행(怠行)이란, 글자 그대로 게으른 행동이다. 독행(獨行)이란, 지조를 지키며 꿋꿋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자신이 약한 영역에 요구되는 능력을 얻고자 할 때 남을 흉내 내어 잘못 가는 경우와, 제대로 도달하여 뛰어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키는 말이다. 사심(邪心)은 다른 체질의 마음 씀을 배우려 할 때 어설피 흉내 냄으로써 마음 씀이 잘못되는 것이고, 박통(博通)은 어설피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꾸준히 늘려감으로써 자신이 약하던 영역에서 바르게 마음을 쓰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이 마음의 문제라면, 태행(怠行)과 독행(獨行)은 행동의 문제다. 타인의 행동을 잘못 흉내 내는 것이..
4. 평가 단계에서 태양인이 범하는 오류 태양인의 강한 직관은 정보 평가에서 강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직관이 공정한 평가를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태양인은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의 의도를 빨리 읽어낸다. 그런데 그 의도가 틀렸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다르다고 생각할 때는, 그 정보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전달자의 의도에 대한 평가와 정보에 대한 평가를 뒤섞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 과시를 목적으로 떠드는 사람에 대해서 태양인은 필요 이상으로 냉담하다.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든다. 사소한 부분에 걸려서 전체적인 평가를 그르치는 것은 어느 체질이나 범하는 오류다. 소음인의 경우 부분적으로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으..
3. 전달 단계에서 소양인이 범하는 오류 소양인은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소양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잘하고, 남에게 전하는 것도 잘한다. 남에게 받아들이는 것을 잘한다는 것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고, 전달하는 것을 잘한다는 것은 상대가 알아듣기 쉽게 전달한다는 의미다. 감성에 예민하다는 것이 이렇게 작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양인은 정보를 받아들일 때 그 정보에 대한 상대의 느낌을 받아들이고, 정보를 전달할 때 그 정보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느낌의 전달이라는 것이 부정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효율적인 전달 방법인 경우도 많다. 느낌이 실린 정보 전달은 그 정보에 대한 평가, 그 정보의 중요성, 정보 전체에서 중요시할 부분 등, 2차적 정보..
2. 정리 단계에서 소음인이 범하는 오류 소음인은 정보 정리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태음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장 강한 영역에서 왜곡을 범할 가능성도 가장 커지는 것이다. 수집된 정보 중에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고, 드러난 사실의 전후관계 및 인과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정리하는 능력, 이것이 소음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소음인의 왜곡이 발생하기 쉬운 지점이다. 즉 객관적 처리가 정보 정리에 필요한 핵심이지만 바로 이 객관에 대한 맹신이 왜곡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대부분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데 한두 가지 정보만 연결이 잘 안 되면, 연결이 안 되는 정보를 배제하려 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소음인에게 유독 이런 경향이 강..
1. 수집 단계에서 태음인이 범하는 오류 정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개별적인 사실들은 정보라고 부르지 않고 첩보라고 부른다. 첩보들이 모여서 하나의 방향을 나타낼 때 비로소 정보라고 부른다. 판단을 서두르는 사람은 적은 양의 첩보를 바로 정보로 가공하며, 바로 정보화되지 않는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첩보를 충분한 양이 될 때까지 모으지 않는다. 내용이 복잡한 경우에는 첩보들을 무시하지 않고 일단 모아두는 버릇이 있어야 정보로의 가공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결국 선 접수 후 판단의 버릇이 있는 태음인들이 정보 생산에 강해진다. 정보 생산이라는 용어는 좀 전문적인 이야기이고, 그냥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으로는 이 단계까지를 정보 수집이라고 표현하니까, 거기에 맞추자...
제8장 정보의 왜곡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 이 과정이 왜곡되면 세상에 대한 인식 역시 왜곡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는 언론의 문제와 관련된다. 또한 정보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정보 왜곡은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번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앞에서 천시(天時)와 사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철새 정치인들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철새 행각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진짜로 믿고 있는 경우가 꽤 많다는 내용이었다. 정보 왜곡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어차피 누구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적당히 왜곡하며 사는 것 아니냐’는 뻔뻔스런 논리를 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백한 왜곡에..
사심(邪心)으로서의 공주병과 도사병 사심(邪心), 박통(博通)이 정리된 기념으로 가벼운 이야기를 하나 하도록 하자.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심(邪心)의 형태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보이기도 하면서 상당히 강한 사심(邪心)에 해당되는 것이라, 이해하기도 쉬운 예가 될 것이다. 긍심(矜心), 과심(誇心)은 강한데 사회성이 부족하면 보통 공주병의 형태로 나타난다【여기서 공주병은 공주병/왕자병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성을 비하해서 공주병을 대표로 잡은 것이 아니라, 공주병이라는 말이 왕자병이란 말보다 먼저 나왔기에 대표 용어로 삼았다】. 그런데 그게 또 긍심(矜心)형과 과심(誇心)형의 차이가 있다. 소음인의 긍심(矜心)에 토대를 둔 공주병은 ‘나 잘났어’ 형의 공주병이다. 남들에게 돋..
사심(邪心)과 태행(怠行)의 비교 사심(邪心)에 대해 이해해둘 것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하자.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이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된 문제다. 즉 성(性)과 관련해서 천기(天機)에 있어 자신이 약한 영역을 이해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심(邪心)에 빠졌다거나, 박통(博通)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고방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설명할 때는 아무래도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방식만을 설명해도 자기 체질에 대한 설명은 잘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즉 교심(驕心)이니, 주책(籌策)이니 하는 내용을 세상에 대한 인식 방식에 관한 ..
5.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관한 몇 가지 태음인, 태양인의 관점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관한 이야기는 대충 정리가 되었는데, 소음인의 ‘옳다/그르다’, 소양인의 ‘좋다/싫다’라는 관점을 이야기한 김에 다른 체질 이야기도 같이 다뤄보자. 태음인의 관점은 일차적으로는 ‘성(成)/패(政)’에 많이 치우쳐져 있다. ‘된다/안 된다’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성/패’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사람도 꽤 된다. 너무 ‘된다/안 된다’ 만을 따지면 좀 속물같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차적으로 ‘맞다/틀리다’를 내세우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상당히 강조했기 때문에 ‘맞다/틀리다’와 ‘옳다/그르다’가 같은 이야기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맞다/틀리..
소양인 아이의 교육 계속해오던 대로 교육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자. 소양인 아이가 과심(誇心)이 자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다.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면서 아이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가르쳐서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아빠는 그거 싫어” “엄마는 그런 행동 불쾌해” “네가 그런 행동 하는 것을 보니 엄마, 아빠가 몹시 슬프구나”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빠나 엄마에게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거 틀렸어, 그거 나빠”라는 말보다 아이가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 감성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걸 옳지 못하다고 하면 아이는 자기 주장을 지키려고 무리하게 논리를 끌어댄다. 과심(誇..
‘좋다/싫다’와 ‘옳다/그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위에서 말했던 정오(正誤)와 호오(好惡)의 관점을 조금 더 생각해보자. 소음인은 ‘옳다/그르다’에 민감하다. 즉 무엇이 옳은지를 알았다면, 설령 자신의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힘겨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자체를 모르면 굉장히 답답해한다. 반면에 ‘좋다/싫다’라는 관점에는 비교적 둔감하다. 소음인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 주변의 일이 딱딱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야 마음에 안정감을 갖는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이 안 되면 불안해한다. 그런데 각자가 ‘좋다/싫다’라는 관점을 쫓아간다면, 이건 아귀가 맞기도 곤란하고, 예측도 어려워진다. ‘옳다/그르다’라는 관점이 사람들이 공유하고 따르..
새 판 펼치기 과심(誇心)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으니, 다음은 과심(誇心)이 극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도량(度量)을 보기로 하자. 이 역시 ‘절세의 도량(度量)’이라고 부를 만한 대단한 배포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사람들 간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아, 왜들 그래”하면서 어깨 한 번 툭 쳐줄 수 있는 모습, “자, 자, 우리 술이나 한잔 하러 갑시다”라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모습, 그런 게 바로 도량(度量)이다. 사실 이 정도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꽤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정도를 ‘절세의 도량(度量)’이라고 부르는가? 보통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기 힘든 살벌한 상황,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도, 도량(度量)의 경지에 도달한 소양인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절세의 도..
과심(誇心)이 떴을 때의 말하기 논문 쓰기에서 나타나는 과심(誇心) 이야기는 연구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이고, 과심(誇心)이라고는 해도 절제된 형태로 나타나는 가벼운 과심(誇心)일 뿐이다. 일반생활에서 자주 나타나는 과심(誇心)의 형태를 찾아보자. 보통 생활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과심(誇心)은 역시 강한 단어 사용하기다. 좀더 부드러운 단어로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가장 강한 단어를 골라 쓰는 것이다. 특히 소양인이 “절대 안 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와 같이 ‘절대’라는 단어를 쓰는 빈도가 높아지면, ‘이거 내가 과심(誇心)이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절대’라는 단어는 더 이상의 논리 전개를 차단하는 단어다. 자신의 논리가 의심받는다고 느낄 때 반사적..
과심(誇心)이 강해지는 상황 태양인의 경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양인의 과심(誇心) 역시 가정이나 작은 집단에서 더 드러나기 쉽다. 특히 위아래가 있는 집단에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소양인은 윗사람의 의견이 옳을 경우가 더 많다는 일반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기가 쉽다는 것이다. 공적인 일은 결국 윗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이 최종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 고민도 윗사람이 더 하고, 자료도 윗 사람이 더 챙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적인 문제는 다르다. 공적 논리를 사적 영역에 들이대는 것이 양인(陽人)의 사심(邪心)이 드러나는 일반적인 경우다. 소양인은 아이의 불만이나 아랫사람의 항변을 반항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무시당하고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경..
과심(誇心)이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모습 ‘별 생각 없이 그냥 일반화되어 있다고 여겨버린 근거’라는 말이 어려운가? 실제 나타나는 모습은 간단하다. 정도 이상으로 숫자를 들이대는 일, 권위자의 말이라고 우기는 일,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주장이라고 머릿수로 밀어붙이려 하는 일 등등, 이런 것이 다 과심(誇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남대문시장에서 선물을 사가지고 미도파 포장 센터에서 미도파 포장지로 포장해서 선물하는 것. 비교적 경증에 속하는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도 엄밀히 따지면 다 과심(誇心)이다. ‘미도파는 남대문보다 좋다’ ‘비싼 선물은 싼 선물보다 성의가 들어간 것이다’라는 식의 일반론을 지나치게 따르는 것이 과심(誇心)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숫자 선호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심(誇..
4. 과심(誇心)과 도량(度量) / 소양인의 소음 기운 근거의 문제 소양인의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소양인의 사심(邪心)은 과심(誇心)이라고 한다. 자랑하고 과장하는 마음이다. 이 과심(誇心)을 극복했을 때 나오는 박통(博通)은 도량(度量)이라고 한다. 이른바 ‘도량이 넓다’라고 할 때의 그 도량(度量)이다. 과심(誇心)은 소양인이 소음인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다. 일단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먼저 보자. 과심(誇心)이 뜬 소양인은 자기 말의 근거를 대는 일에 아주 민감해진다. 원래 소양인의 본성은 근거에 크게 관심이 없다. 어떤 주장이나 사실을 들었을 때,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준에 안 맞으면 바로 배척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
퇴로 차단의 문제 박정희 전대통령 이야기가 나오고 정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주로 스케일이 큰 부분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사실 벌심(伐心)이 문제가 되는 것이나 행검(行檢)이 돋보이는 것은 당여(黨與)나 거처(居處)와 같이 작은 모임이나 가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교심(驕心)/주책(籌策), 긍심(矜心)/경륜(經綸)의 경우와는 반대다. 자신이 약한 영역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니까, 태양인의 경우 당연히 당여(黨與)와 거처(居處)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된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의 문제는 천기(天機) 이해의 문제다. 따라서 인륜(人倫)이나 지방(地方)의 문제와 관련이 가장 깊다. 다만 현실로 드러나는 모습을 위주로 설명해야 이해가 쉬우니까, 당여(黨與) 및 거처(居處)와 관..
태양인의 파벌 만들기 태양인의 벌심(伐心)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하나 더 있다. 원래 태양인은 파벌 만드는 일을 잘 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교우(交遇)에는 강하고 당여(黨與)나 거처(居處)에는 약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우(交遇)에 능하다는 것은 낯선 사람끼리 만나도 의견을 나누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굳이 파벌을 만들 필요가 없다. 하지만 태양인이라도 때로는 혼자서 하기 힘든 큰일을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길을 찾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 성과물을 내는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람을 모으는 데는 태음인의 희성(喜性)이나 소음인의 희정(喜情)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동의가 된 일을 추진..
박정희 전대통령의 예 박정희 전대통령이 했던 일들 중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포항제철의 건설은 비교적 행검(行檢)이 작동한 결과라 부를 만하다. 물론 그 두 가지 일에도 부분적으로는 벌심(伐心)이 작용하여 무리를 낳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았다 하겠다. 하지만 새마을사업이나 재벌 위주의 경제 운용 같은 경우에는 벌심(伐心)에 의한 무리가 훨씬 더 많았다. 유신 선포,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벌심(伐心)이다. 그 중 벌심(伐心)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장발단속, 치마 길이 단속 같은 것들이다. 물론 사안 자체나 국민들에게 피해를 준 정도로는 위에서 언급된 것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일이지만, 개인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관여했다는 면..
인(仁)과 행검(行檢) 태양인이 태양인의 본성을 지키면서 구체적인 일에 접근하는 방식은 어떠한가를 검토해보고서 다시 비교해보도록 하자. 태양인이 자신의 장점을 확대해서 태음적인 영역에 이르는 것, 즉 태양인의 박통(博通)을 행검(行檢)이라고 한다. 행동을 단속한다는 뜻이다. 그 검의 뿌리는 어진 마음, 바로잡아주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앞에서 태양인을 설명할 때, 환경운동에 관한 예를 든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사람에게 유리해지는 환경운동을 생각할 때 동물의 관점에 서고, 다른 사람들이 동물의 관점까지 받아들일 때, 식물이나 미생물의 관점까지 생각하는 것이 태양인의 애성(哀性)이라고 했다. 이것은 약점이며 동시에 강점이다. 태양인이 당여(黨與)나 거처(居處)에 능하지 못한 것은, 좁은 부분에 집중해야..
새마을운동 예를 들어보자. 60년대의 우리나라에는 유교문화가 나라의 발전을 막는 요소로 작용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유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유교 중에서도 주자학, 성리학 일변도의 흐름이 수백 년을 쌓이며 곪았던 것이다. 또 주자학 자체에도 긍정적인 요소가 많지만, 주장의 본질은 외면하고 형식만 중시하는 식이 되어버려서 더 문제였다. 결국 공맹의 뜻은 사라지고 이상한 형식주의만 남은 그런 풍토가 우리나라 농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마을운동은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를 안고 시작된다. 유교적 전통만을 중시하면서 과거의 방식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풍토를 바꿔보자는 의식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이상하게 가버린다. 의식개혁을 유도하는 옳은 방식은 대충 이렇다. 새로운 공동체 구..
3. 벌심(伐心)과 행검(行檢) / 태양인의 태음 기운 벌(伐)이 사심(邪心)이 되는 과정 이제 태양인의 사심(邪心)과 박통(博通)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태양인의 사심(邪心)은 벌심(伐心)이라고 한다. 벌(伐)이라는 글자는 ‘벌목(伐木)’ 처럼 부드럽게 사용되기도 하고, ‘토벌(討伐)’과 같이 좀 살벌(殺伐)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쳐내고, 잘라내고, 배척하고, 그런 것이다. 앞의 경우와 같이, 벌심(伐心)이란 태양인이 태음인을 잘못 이해하고 어설프게 흥내 내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걸 왜 벌이라 부르느냐가 요점이다. 벌은 사실 전쟁을 칭하는 용어 중의 하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이라크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용어다. 전쟁이란 명분도 비슷하고 세력도 비슷한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을 일컫는..
안성기 씨에게서 느끼는 편안함 긍심(矜心)과 경륜(經綸)의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마지막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소음인이 대화하는 자세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예를 하나 들고 마무리하자. 예로 들고 싶은 사람은 영화배우 안성기 씨다. 특히 토크쇼에 나온 안성기 씨의 모습을 잘 보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소음인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안성기 씨의 특징이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긴장이 지나치면 말수가 줄어든다. 오히려 그럴 때 긍심(矜心)이 강해지는 수가 많다. 그러다가 입을 열면 이상한 고집을 피우면서 한 발도 안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안성기 씨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다. 안성기 씨의 말은 달변이 아닌데도 듣기에 정말 편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 자신이 느낀 것, 때로는 자신이 실수..
조금만 방심하면 고개를 드는 긍심(矜心) 긍심(矜心)도 교심(驕心)과 마찬가지로, 잘 극복된 사람도 조금만 방심하면 고개를 든다. 특히 긍심(矜心)은 원치 않는 과도한 경쟁 상황에 몰렸을 때 나타나기 쉽다. 때론 경쟁 상황에서, 혹은 경쟁의 후유증으로 나타난다. 정치인 중에서 소음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김근태(金槿泰, 1947~2011) 의원이다. 김근태 의원 이야기를 좀 해보자. 원래 재야라는 곳이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을 모아놓았을 때 가장 힘든 것이 화합이다. 그래서인지 재야의 거물 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에 ‘누구만 끼면 판 깨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좀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모인 상황에서도 김근태 의원이 끼면 ‘김근태가 끼었으니 판은 안 깨지고 굴러가..
소음인과 경쟁 그럼 소음인이 긍심(矜心)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태음인 아이에게 속도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듯이, 소음인 아이에게는 경쟁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경쟁이란 보편적 기준을 놓고 달성하는 정도를 다투는 것이다. 일반화된 것을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는 경쟁을 즐기며, 경쟁에서 불안감을 별로 안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소음인들에게 대중 교육에서의 경쟁은 아무래도 힘겹다. 소음인에게 경쟁을 강요하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숫기가 부족하고 위축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긍심(矜心)을 띠는 형태이다. 유명인들 중에 긍심(矜心)을 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천재 소리 듣는 형제들과 계속 비..
경륜(經綸)과 긍심(矜心)이 갈라지는 지점 이야기가 약간 두서없이 된 듯하니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 소음인의 장점은 함부로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논리에 엄밀할 뿐만 아니라, 그 논리가 적용되는 한계를 쉽게 넘지도 않는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조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는 다른 영역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영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듣기만 하든지, “난 잘 몰라”라고 해버린다. 소음인이 새로운 영역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본래 관심을 두었던 영역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어진 뒤의 일이다. 따라서 그 이해의 정도가 주변의 다른 영역에도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태음인은 폭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서로 연계성을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