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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126. 백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26. 백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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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백가의체(百家衣體)

시체(詩體)의 하나로, 옛사람의 시구(詩句)를 모아서 시를 만드는 것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일. 여러 학파가 자신의 학파에 맞는 주장을 하는 일을 말한다.

 

백간(白簡)

관리(官吏)를 탄핵하는 상주서(上奏書)를 말한다. 어사(御史)가 사람을 탄핵할 때에는 백간(白簡)에 쓴다.

 

백강(伯强)

나쁜 기운. 역귀(疫鬼) 즉 병마(病魔)를 말한다.

 

백강주(白江州)

()백거이(白居易). 그가 일찍이 강주사마(江州司馬)로 폄직 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백개(伯喈)

동한(東漢) 시절의 문호 채옹(蔡邕)의 자()이다. 채옹이 당시 좌중랑장(左中郞將)으로서 재주와 학식이 대단하여 조정의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대문 앞에는 항상 수레와 말이 그득했었는데, 나이 어린 왕찬(王粲)을 한 번 보고서는, 자기는 따라갈 수 없는 재주라고 하면서 언제나 그만 찾아오면 미처 신발도 챙겨신지 못하고 뛰어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백거(伯擧)

신천익(愼天翊)의 자()이다.

 

백거(白渠)

중국 섬서성(陝西省) 경내에 있는 구거(溝渠) 이른다. ()의 백공(白公)이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결선생(百結先生)

그의 성명을 알 수 없는데, 그는 낭산(狼山) 아래에 살면서 집이 몹시 가난하여 여기저기 수없이 기워서(百結)마치 현순(懸鶉)과 같은 옷을 입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항상 거문고를 지니고 있으면서 무릇 기쁘거나 노엽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불평스러운 일이 있을 적에는 모두 이 거문고를 타서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한번은 세밑이 되어 이웃에서 곡식을 방아찧는 소리가 나자 그의 아내가 방아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사람마다 곡식이 있는데 나만 유독 없으니 어떻게 해를 마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대체로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서, 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고 가는 것은 따라잡을 수도 없는 것인데, 너는 무얼 그리 상심하느냐. 내 너를 위하여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어 너를 위로해주마.” 하고는 이에 거문고를 타서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었으므로, 세상에서 전하여 이를 대악(碓樂)이라 하였다.

 

백겹(白帢)

벼슬아치가 쓰는 관의 일종이다.

 

백경(伯敬)

()의 시인 종성(鍾惺)의 자. 경릉(竟陵) 사람으로 담 원춘(譚元春)과 함께 고시귀(古詩歸)ㆍ당시귀(唐詩歸)를 뽑고 논평하였는데 이것을 경릉체(竟陵體)라 하였다. 명사고(明史稿)卷二百六十九

 

백계(白鷄)

신유(辛酉)에 해당한다.

 

백계몽(白鷄夢)

자신이 죽을 것을 안다는 뜻으로 분수에 맞게 처신한다는 뜻이다. ()의 사안(謝安)이 병이 깊어지자, 친우에게 옛날 환온(桓溫)이 살았을 때 내가 항상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했더니, 꿈에 문득 온의 수레를 타고 16리쯤 가다가 한 마리 흰 닭을 보고 그쳤던 일이 기억난다. 온의 수레를 탄 것은 그 지위를 대신함이고, 16리는 금년이 16년째이고, 백계(白鷄)는 유()를 맡았는데 금년 태세(太歲)가 유에 있으니, 내 병이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 상소하여 위()에서 물러나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백계몽중최(白鷄夢中催)

() 나라 재상(宰相) 사안(謝安)이 꿈에 흰 닭을 보았더니, 그뒤 신유(辛酉)년에 죽었다. 신유(辛酉)는 흰 닭이었다.

 

백고(伯高)

후한(後漢) 때의 선비 용술(龍述)의 자이다.

 

백고근칙(伯高謹敕)

백고는 후한(後漢) 때의 선비 용술(龍述)의 자이고, 근칙(謹敕)은 삼가고 경계함을 이른다. 마원(馬援)이 일찍이 자기 형의 아들들을 경계시킨 글에서 용백고(龍伯高)는 돈독하고 후중하고 주밀하고 근신하여 입에 가릴 말이 없으며, …… 청렴하고 공변되고 위엄이 있어 내가 사랑하고 중히 여기는 바이니, 너희들이 그를 본받기 바란다. …… 용백고를 본받다가 그만큼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근칙한 선비는 될 것이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卷五十四

 

백골난망(白骨難忘)

백골이 되어서도 잊기가 어려움. 죽어서도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음. 남의 큰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말이다.

 

백골신교전(白骨新交戰)

두보(杜甫)의 시에 전쟁이 새로 터져 백골이 뒹구나니, 운대의 공신들이 개척했던 저 변방[白骨新交戰 雲臺舊拓邊].”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1 유감 오수(有感五首)

 

백공(伯恭)

() 나라 여조겸(呂祖謙)의 자()이다. 병석에서 논어(論語)를 읽다가, 위령공편(衛靈公篇)자신의 잘못은 혹독하게 꾸짖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해해 주도록 노력하라[躬自厚而薄責於人].”공자(孔子)의 말을 접하고는, 홀연히 깨달음이 생기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송원학안(宋元學案)51

 

백공(伯恭)

원위(元魏) 때 고윤(高允)의 자이다. 원위 태무제(元魏太武帝) 때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가 뇌물을 받은 일이 발각되자, 저작랑 고윤(高允)에게 의논하기를 주상께서 나에게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하자, 고윤이 사실대로 자백하면 혹 용서를 받을 수도 있겠거니와, 거듭 주상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적흑자는 끝내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가 처형되었다. 그런데 또 고윤은 국서(國書)를 수찬할 때 직필(直筆)한 일로 매우 위태롭게 되자, 태자(太子)가 자기 사부인 고윤을 살리려는 생각에서 그에게 주상께 약간의 거짓말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는 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사실대로 자백하여 오히려 주상으로부터 정직하다는 칭찬을 받고 죽음을 면하였는데, 그는 물러나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내가 태자의 지도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릴까 염려해서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백공(白公)

() 나라 원왕(元王)이 목생(穆生)ㆍ백생(白生)ㆍ신공(申公)을 대부로 삼았는데, 목생이 술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술자리가 있으면 으레 따로 단술[醴酒]을 마련하였었다. 그런데 그의 손자가 즉위하고는 단술을 따로 마련하는 일이 없어지자 목생이 말하기를 이렇게 차츰 대접이 박해지니 떠날 수밖에 없다.” 하고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신공과 백생은 억지로 나오게 하면서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백생은 곧 백공(白公)을 가리킨다. 한서(漢書)卷三十六 초원왕전(楚元王傳)

 

백공육첩(白孔六帖)

서명(書名), 이는 당()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육첩(六帖) 30권과 송() 나라 공전(孔傳)의 속육첨(續六帖) 30권을 합해서 이를 1백 권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데, 여기서는 곧 많은 분량의 서물(書物)을 의미한 것이다.

 

백구(白溝)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백구하(白溝河)를 말한다. 옛날 송() 나라와 거란(契丹)의 경계에 있는 강이며, 독항(督亢)도 그곳의 지명(地名)이다. 송 나라 진종(眞宗) 때에 거란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에서 백구 이북의 땅을 주고, 해마다 금과 비단을 많이 주기로 하여 강화(講和)를 맺었다.

 

백구(白駒)

흰 망아지가 저 빈 골짜기에 매여 있구나.” 했는데, 현명한 자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흰 망아지를 타고 산골에 들어가서 지낸다는 뜻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

현자(賢者)나 은사(隱士)가 타고 온 말로, ()하여 현자나 은사를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 “깨끗하고 깨끗한 저 흰 망아지, 우리 마당 싹을 다 먹었네[皎皎白駒 食我場苗].”하였다. 어떻게 하면 흰 망아지를 붙잡아 매어 숨어살려는 어진 사람을 벼슬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뜻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 인용: 汙吏(정추)

 

백구맹(白鷗盟)

백구(白鷗)의 맹세, 즉 전원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맹세를 말한다.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를 몹시 좋아하여 매일 아침 갈매기와 놀았는데, 날아와서 노는 갈매가가 백 마리도 넘었다. 그의 아버지가 내가 들으니 갈매기들이 모두 너와 함께 논다고 하는데, 너는 그 갈매기를 잡아오라. 나 역시 갈매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그 다음 날 바닷가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위에서 날면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이를 인해서 후대에는 마음을 툭 터놓고 상대를 대하거나,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열자(列子)』 「황제(黃帝)

 

백구소우(白鷗疏雨)

작자 불명의 옛 시조에, “묻노라 저 선사야, 관동 풍경 어떻더니, 명사십리(明沙十里)에 해당화는 붉어 있고, 원포(遠浦)에 양양백구(兩兩白鷗)는 비소우(飛疎雨)를 하더라.” 하였다.

 

백구시(白駒詩)

이 시는 현자(賢者)가 타고 온 흰 망아지가 농장의 농작물을 뜯어먹었다는 핑계로 말을 묶어 놓아 떠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인데, 곧 제왕(帝王)의 부름에 뜻이 없음을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

 

백구식곽(白駒食藿)

세상이 무도하면 어진 자가 머물러 있지 않음. 주 선왕(周宣王)이 무도하여 현자들이 다 벼슬을 버리고 떠났으므로 당시 시인이 백구(白駒)의 노래를 부르기를, “새하얀 망아지야 우리 밭에 콩잎을 먹을지어다……하여, 말 타고 떠나는 현자들을 붙들고 싶은 심정을 나타내었음.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

 

백구재상(白鳩宰相)

군사 경험이 없는 서생(書生) 출신의 장수로 얼굴이 창백한데다 성격이 옹졸함을 기롱한 말이다.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천지 사이에 사람이 사는 것이란, 마치 흰 망아지가 틈 사이로 훌쩍 지나가듯 그렇게 순식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있다.

 

백구파(白鷗波)

하얗게 이는 파도를 말한다.

 

백구편(白駒篇)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 어진 선비를 불러 써야 한다는 시.

 

백궁(百弓)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은 거리의 단위로 1궁은 6, 또는 8척의 거리라 한다. 의례(儀禮)鄕射禮疏, 탁지론(度地論)

 

백규(百揆)

요순 시대에 모든 관리를 통솔했던 벼슬로서 요 임금 때에 순이 이 벼슬에 등용되었다. 도시를 이룬다는 말은 순 임금이 사는 마을이 삼년 만에 사람이 모여들어 도시가 되었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요전(舜典)

 

백기(伯起)

동한(東漢) 양진(揚震)의 자()이다. 형주 자사(荊州刺史)로서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아 밤에 가져오는 뇌물을 물리쳤다.

 

백기(白起)

()나라의 명장이다. 그는 조()나라와 싸울 때 조나라 대장 조괄(趙括)이란 자를 속임전술로 크게 승리하고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무찔러 죽였다.

 

백기(伯奇)

주선왕(周宣王) 때 신하 윤길보(尹吉甫)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죽자 계모(繼母)가 그 아들 백봉(伯封)을 장자로 세우고자 백기를 무함하였다. 이에 윤길보가 노하여 백기를 들판으로 쫓아내니 백기는 연잎을 엮어 옷해입고 마름꽃을 따서 먹으며 죄 없이 쫓겨난 것을 슬퍼하여 리상조(履霜操)란 노래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이에 윤길보가 뒤늦게 깨달아 백기를 다시 불러오고 후처를 죽였다. 초학기(初學記)2 / 인용: 鍾北小選 自序(박지원)

 

백기신(百其身)

한번 죽게 되면 아무리 살리려 해도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시경(詩經)진풍(秦風) 황조(黃鳥)만일 생명을 바꾸어 올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백번이라도 대신 죽으리라[如可贖兮人百其身].”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진 목공(秦穆公)의 장사(葬事)에 어질고 훌륭한 신하 자거엄식(子車奄息)을 순장시키므로, 사람들이 그 훌륭한 신하가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하는 말이다.

 

백낙천(白樂天)

당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낙천(樂天)은 자()이다.

 

백난희(伯鸞噫)

벼슬하지 않은 채 은거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한숨을 말한다. 백난은 한 나라 양홍(梁鴻)의 자이다. 양홍은 집이 가난한데도 학문을 좋아하여 벼슬하기를 구하지 않은 채 그의 부인인 맹광(孟光)과 함께 패릉산(霸陵山)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백남(百男)

임금의 덕을 기리는 뜻이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사제(思齊)문왕(文王)의 덕을 기리면서 그 어머니인 태임(太妊)과 그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을 같이 말하였는데, 그 중에 태사가 아름다운 덕을 이으셨으니 아들이 백 사람이 되었다[太姒嗣徽音 則百斯男].” 하였다.

 

백낭(白狼)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한() 나라의 현() 이름이다.

 

백년가약(百年佳約)

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지낼 아름다운 언약.

 

백년대계(百年大計)

백년의 큰 계획. 먼 장래까지 내다보면서 세우는 큰 계획. 흔히 교육(敎育)을 일컬음

 

백년산통(百年酸痛)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면서 그의 가속(家屬) 또한 견축(譴逐)되어, 가는 길에 소녀(小女)가 죽자 층봉역(層峯驛) 근처 산 밑에 초빈해 두었다가, 사면을 받고 환조(還朝)할 때에 그 묘에 들러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두어 가닥 등넝쿨로 목피관을 꽁꽁 묶어서 황량한 산에 초빈하니 백골도 썰렁하리라 무고한 너를 죽게 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 백 년토록 참통하여 눈물이 줄줄 흐르는구나[數條藤束木皮棺 草殯荒山白骨寒 致汝無辜由我罪 百年慚痛淚闌干].”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卷十

 

백년지객(百年之客)

백년 만에 찾아 온 손님, 매우 반가운 손님. 아무리 스스럼이 없어져도 예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사위를 가리킨다.

 

백년하청(百年河淸)

백년을 기다린다 해도 누런 흙탕물인 황하의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이루어지기 어려움. 또는 아무리 세월이 가도 일을 해결할 희망이 없음즉,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백년해로(百年偕老)

부부가 오래도록 함께 늙음. 부부가 생사를 같이하고 화목하게 같이 늙어감.

 

백노번(白露繁)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의 가을날을 표현한 말이다. 이때 음기(陰氣)가 점점 성해지면서 이슬도 흰 색깔로 변한다고 한다.

 

백단심(栢丹心)

과부가 수절(守節)하는 것을 말한다.

 

백달보검(白獺補臉)

() 나라 손화(孫和)가 등 부인(鄧夫人)을 총애하는데, 어느날 술에 취해 유쾌히 춤을 추다가 등 부인의 뺨을 상했다. 의원이 백달(白獺)의 뼈를 구해서 옥()가루와 호박(琥珀)가루를 섞어서 바르면 상처가 없어진다고 하니, 손화는 당장에 백금(百金)을 내어 구해 발라서 나았다 한다. 유양잡조(酉陽雜俎)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의 호이다.

 

백대(柏臺)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이다. 원래는 중국의 어사대(御史臺)를 말하는데, 전용한 것이다. 사물이명록(事物異名錄) 궁실(宮室) 관해(官廨)() 나라 어사부(御史府)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그 위에 까마귀가 깃들어 있었으므로 어사부를 백대 또는 오대(烏臺)라고 했다.” 하였다. 또는 백부(柏府)라고도 한다.

 

백대붕(白大鵬)

조선 선조(宣祖) 때 사람인데 천인(賤人)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으나 시에 능하고 호기(豪氣)가 있었다.

 

백대지친(百代之親)

먼 조상 때부터 친하에 지내온 친분.

 

백도(伯道)

()나라 하동 태수(河東太守) 등유(鄧攸)의 자()이다. 양릉(襄陵) 사람이다. 그는 석늑(石勒)이 군사를 일으키자 가족을 이끌고 피난 갈 적에 그 아우가 어린 조카를 두고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그 조카를 보전하고 자기 아들을 버리고 갔다. 그 후 백도는 끝내 자식을 못 두고 죽으니, 당시 사람들이 슬퍼하여 하늘도 무심하여 등백도로 하여금 아들을 못 두게 하였다.’ 하였다. 진서(晉書)90 良吏傳 등유전(鄧攸傳)

 

백도무아(伯道無兒)

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백도(伯道)는 진() 나라 등유(鄧攸)의 자(), 난적(亂賊)을 만났을 때 자기 아들을 버리고 동생의 아들을 살렸는데, 뒤에 아들을 얻지 못해 제사가 끊겼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등유전(鄧攸傳)

 

백도미유자(伯道未有子)

백도는 진() 나라 사람 등유(鄧攸)의 자()이다. 그는 석늑(石勒)의 난리를 만나, 피난을 갈 적에 죽은 아우의 아들 등유(鄧綏)와 자기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갔었으나 도저히 두 명을 데리고 갈 수가 없게 되자, 아내와 상의하고는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는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니, 사람들은 천도(天道)가 무심하다.” 하였다. 진서(晉書)』 「등유전(鄧攸傳)

 

백도생애(伯道生涯)

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백도(伯道)는 진() 나라 등유(鄧攸)의 자(), 난리 통에 자기의 어린 아들을 버리고 조카의 목숨을 대신 살렸는데, 뒤에 후계자를 끝내 얻지 못했다. 진서(晉書)』 「등유전(鄧攸傳)

 

백도아(伯道兒)

백도(伯道)는 진() 나라 등유(鄧攸)의 자이다. 등유가 하동 태수(河東太守)로 있을 적에 석늑(石勒)의 난을 만나 자기 아들과 동생의 아들을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도중에 적을 만났다. 등유는 두 아이를 다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 자기의 아들은 버리고 동생의 아들만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의롭게 여기면서 슬퍼하여 천도가 아는 것이 없어서 백도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했다.” 하였다. 진서(晉書)90 양리열전(良吏列傳)등유(鄧攸)

 

백도아(伯道兒)

백도는 등유(鄧攸)의 자이다. () 나라 등유가 난적(亂賊)을 만났을 때, 일찍 죽은 아우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버리고 갔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진서(晉書)』 「등유전(鄧攸傳)한편 이와 비슷한 구절로 中郞有女能傳業 伯道無兒可保家라는 한유(韓愈)의 시가 전한다. 한창려집(韓昌藜集)10 遊西林寺 제소이형랑중구당(題蕭二兄郞中舊堂)

 

백동제(白銅鞮)

가곡(歌曲) 이름으로, 주로 송별(送別)을 노래한 것이다. 이백(李白)양양가(襄陽歌)저녁 해는 현산 서쪽으로 뉘엿뉘엿, 거꾸로 두건 쓰고 꽃 그늘 아래 비틀비틀. 양양의 어린애들 다 함께 손뼉치며, 길을 막고 다투어 백동제를 부르누나. 구경꾼이 무얼 보고 웃느냐고 물으면 곤드레만드레 취한 산옹 우스워 죽겠단다[落日欲沒峴山西 倒著接䍦花下迷 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 傍人借問笑何事 笑殺山翁醉似泥].”라는 내용이 있다.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6 / 인용: 襄陽曲

 

백동파(百東坡)

동파가 여럿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소동파(蘇東坡)의 범영시(泛潁詩)갑자기 물결이 비늘처럼 일어, 나의 수염과 눈썹을 산란케 하네. 동파가 여러 사람으로 분산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에 있구나[忽然生鱗甲 亂我鬚與眉 散爲百東坡 頃刻復在玆].” 한 말에서 기인된 것이다.

 

백두(白頭)

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상말에 머리가 세도록 오래 사귀어도 초면과 같기도 하고 잠깐 길거리에서 만난 사이라도 구면과 같다[白頭如新 傾盖如故].’ 하였다.” 하였다.

 

백두신(白頭新)

백발이 되도록 오랫동안 서로 사귀었으나 서로 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백두여신(白頭如新)

머리가 희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사귀어도 서로 마음이 안통하고 상대방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 사귄 벗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백두음(白頭吟)

악부 가사의 이른다. ()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武陵)의 여자를 첩()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자, 그의 아내인 탁문군(卓文君)부부는 늙도록 정의가 변치 않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 노래를 지어 이혼(離婚)할 뜻을 밝혔는데, 이 노래를 듣고 사마상여는 끝내 무릉의 여자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뒤에 이백(李白)이 이 고사로 백두음 2편을 지었다.

악부(樂府) 초조(楚調)의 곡 이름으로, 서경잡기(西京雜記)3권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茂陵) 사람의 딸을 첩으로 삼으려고 할 때, 탁문군(卓文君)이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절교를 하자, 사마상여가 이에 그만두었다.” 하였다.

 

백두음성종차결(白頭吟成從此決)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茂陵) 사람의 딸을 첩()으로 두려 하였는데, 이에 탁문군(卓文君)이 백두음을 지어 결별의 뜻을 밝히자 사마상여가 취소했던 고사가 전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3

 

백등(白登)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 고조(漢高祖)가 흉노 묵돌(冒頓)을 치다가 여기에서 7일간 포위되어 곤욕을 당하였다.

 

백등대(白登臺)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 동쪽의 백등산 위에 있는데 흉노족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백락(伯樂)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목공(秦穆公) 때 사람인데 말()의 상()을 잘 보던 사람이다. () 나라 한유(韓愈)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 “백락(伯樂)이 한 차례 기북(冀北)의 들판을 지나가자 준마가 드디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육덕명(陸德明)장자석문(莊子釋文)백락의 성은 손()이고 이름은 양()인데 말을 잘 다루었다.”고 하였다. 좋은 말이 백락을 만나 세상에 알려져 그 값이 10배로 올랐다는 고사와 일찍이 우판(虞坂)을 지나가는데, 기기(騏驥)가 소금수레 아래 엎드렸다가 백락을 보고서 길게 울어대니, 백락은 수레를 내려가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 등이 있다.

 

백락일고(伯樂一顧)

남이 자기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한다. 현명한 사람 또한 그 사람을 알아주는 자를 만나야 출세할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어느 사람이 백낙에게 내가 말을 팔려고 하는데, 3일을 저자에 갖다 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한 번 와서 봐 달라.’ 하였다. 백낙이 가서 한 번 쳐다보니, 그 말의 값이 10배로 뛰었다.” 하였다. / 인용: 爲人求薦書

 

백락자(伯樂子)

백락의 아들이라는 말로, ‘어리석은 자식이란 뜻의 고사성어다.

 

백락장(伯格長)

촌락(村落)의 장()을 이른다. ‘()’은 천맥(阡陌), ‘()’은 촌락(村落)을 가리킨다.

 

백란(伯鸞)

부부(夫婦)간에 서로 예를 갖추며 공경하며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양홍(梁鴻)의 자()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결코 벼슬길을 구하지 않고, 어진 아내 맹광(孟光)과 함께 패릉산(覇陵山) 속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길쌈하며 살았다. 동관한기(東觀漢記)梁鴻후한서(後漢書)』 「일민열전 양홍(逸民列傳 梁鴻)

 

백량대(柏梁臺)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세웠던 대(). 무제는 대가 완성된 뒤 잔치를 마련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칠언시(七言詩)를 지을 수 있는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게 하여, 백량체(柏梁體)라는 하나의 시체(詩體)를 남겼다.

 

백량대시(栢梁臺詩)

연구로 된 시체의 하나로서, 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栢梁臺)를 짓고 모든 신하들로 더불어 시를 한 짝씩 짓기로 하여, 모두 25명의 신하가 한 구절씩 25구절과 무제가 지은 구절을 합쳐 26구절로 되었으며, 그 격식은 대략 다음과 같음. “日月星辰和四時(武帝詩) 驂駕駟馬從梁來(梁王詩) 郡國士馬羽林才(司馬詩) 總領天下誠難治(丞相詩)

 

백량시연(栢梁詩筵)

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를 낙성(落成)할 때에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연구(聯句)를 짓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백량연(柏梁宴)

대궐 연회에 참석해서 멋진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백량대(柏梁臺)를 세우고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 적에, 칠언시(七言詩)로 화답하는 노래(賡歌)를 잘 짓는 신하만 누대 위에 올라가도록 허락한 고사가 전한다. 삼보황도(三輔黃圖)5 영사(臺榭)

 

백련(白蓮)

백련사(白蓮社)를 말한다. ()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는 혜영(慧永)ㆍ혜지(慧指) 등 여러 중과 도인(道人) 및 명유(名儒) 유정지(劉程之) 18명과 함께 여산(廬山)의 기슭에 결사(結社)하고는 백련사라 이름하였다. 노산기(廬山記)」 『여부잡기(廬阜雜記)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편지로 도연명(陶淵明)을 부르니, 연명이 나는 술을 좋아하니 술을 마시게 하면 갈 수 있다.’ 하자, 혜원이 허락했다.”는 고사가 있다.

 

백련(百鍊)

옛날 3대 보검의 하나로 꼽혔던 칼 이름이다.

의지(意志)가 견고함을 비유한 말이다. 백련은 수없이 단련(鍛鍊)한 강철(剛鐵)을 말한 것으로, () 나라 유곤(劉琨)이 단필제(段匹磾)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지은 시에 어찌 뜻했으랴 백번 달군 강철이, 손가락에 감을 만큼 유약해질 줄을[何意百鍊剛 化爲繞指柔].”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六十二

 

백련사(白蓮社)

() 나라 때 고승 혜원(慧遠)이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18인의 문인들과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자신의 명망을 듣고 찾아 온 여러 승도(僧徒) 및 명유(名儒)들과 함께 미륵불상(彌勒佛像) 앞에서 맹세하고 수도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하고 정토법(淨土法)을 함께 닦았는데, 동림사 안에 백련(白蓮)이 있으므로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 모임으로 인해 불교가 융성해졌다.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를 결성(結成)하고 서신(書信)으로써 도연명(陶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의 답서에 나의 천성(天性)이 술을 즐기는데 법사께서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한다면 곧 가겠다.” 하였다. 혜원이 이를 허락하자 연명이 마침내 찾아갔는데, 그가 입사(入社)할 것을 권유하니 연명은 눈썹을 찌푸리고 돌아갔다. 여부잡기(廬阜雜記)

 

백련요정절(白蓮邀靖節)

여부잡기(廬阜雜記)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성(結成)하고 편지를 보내어 연명(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이 나는 술을 즐기므로 법사가 이를 허락하여 준다면 가겠다.’하였는데, 법사가 허락하였으므로 갔다.” 하였다.

 

백련요지(百鍊繞指)

요지(繞指)는 손가락에 감긴다는 뜻으로 곧 유약(柔弱)함의 비유인데, () 나라 유곤의 시()억센 강철이 요지처럼 유약해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何意百鍊鋼 化爲繞指柔].” 한 데서 온 말이다.

 

백련유칙(白蓮遺則)

동진(東晋)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만들어, 그의 제사와 높은 선비 유유민(劉遺民) 종병(宗炳) 등과 함께 염불(念佛)을 하였는데, 연못에 흰 연꽃을 심었으므로 백련사라 이름하였다.

 

백련정(百鍊精)

백 번 단련된 정금(精金)이라는 뜻이다.

 

백령(白翎)

화살 말미의 깃털이다.

 

백로(白露)

24절기의 하나인 백로(白露)를 말한다. 양력 98일경이 되면 음기(陰氣)가 점점 침중해져 이슬이 진한 백색을 띤다고 한다. 입추(立秋)가 되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뒤 5 일쯤 지나면 백로(白露)가 내리고, 다시 5일이 지나면 쓰르라미가 운다고 하였다. 예기(禮記)』 「월령(月令), 일주서(逸周書)』 「시훈해(時訓解)

 

백록(白鹿)

() 나라 4대 서원의 하나인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가리킨다.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동남쪽에 있는데, 주희(朱熹)가 일찍이 이곳에서 학규(學規)를 개정하고 강학(講學)을 한 적이 있다. 송사(宋史)』 「도학전(道學傳)三 朱熹

 

백록동(白鹿洞)

송 나라 때 세워진 서원(書院)의 이름으로,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다. 당 나라 이발(李潑)에 의해 세워졌으며, 송 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南康軍)의 수()가 되어서 직접 학규(學規)를 만들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송 나라 때 4대 서원 가운데 하나로,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다. 당 나라 이발(李潑)에 의해 세워졌으며, 송 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南康軍)의 수()가 되어서 직접 학규(學規)를 만들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백룡어복(白龍魚服)

옛날에 백룡(白龍)이 물고기의 형상으로 변하여 못에 나왔더니 고기잡는 예저(豫且)란 사람이 눈을 쏘아 마쳤다. 백룡이 하늘에 올라가서 천제(天帝)에게 호소하니 천제가 묻기를, “그 때에 어떤 형상을 하였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못에 내려가서 물고기 형상을 하였습니다.” 하므로 천제는, “그러면 물고기는 본시 사람을 쏘아 잡는 것인데, 예저(豫且)가 무슨 죄이냐.” 하였다. 임금의 미행(微行)의 비유로 쓰인 말이다. 설원(說苑). 張衡 동경부(東京賦)

 

백룡어복계(白龍魚服戒)

귀한 신분에 있는 자가 미복(微服)으로 출행(出行)하였다가 불측한 변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설원(說苑)』 「정간(正諫), “옛날에 백룡이 맑고 차가운 연못에 내려왔다가 물고기로 화하였는데, 어부인 예차(豫且)가 그 눈을 활로 쏘아 맞혔다.” 하였다. 명 선종이 미복으로 출행하기를 좋아하여 어느 날 밤에 미복으로 양사기(楊士奇)의 집에 도착하니, 양사기가 황급히 나와 맞이하면서 미행으로 나다녀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선종이 그 다음 날 내시를 보내어 양사기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는데 미행으로 나다닌다 해서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니, 양사기가 아뢰기를, “은택이 두루 흡족하지 아니하니 만약에 원망을 품은 자가 있어서 몰래 치면 어찌하시렵니까?”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숨어서 어가(御駕)가 출행하기를 엿보고 있는 자를 잡았다. 이에 선종이 다시는 미복으로 출행하지 않았다. 사략(史略)卷九 선종장황제(宣宗章皇帝)

 

백룡중단(白龍中斷)

() 나라에 의해 진() 나라가 멸망당하였다는 뜻이다. 고조(高祖)가 일찍이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길을 막고 있는 흰 뱀을 칼로 쳐서 죽였다. 그날 밤 어떤 노파가 길에서 울고 있다가 말하기를, “흰 뱀은 나의 아들로 백제(白帝)인데, 뱀으로 화해 있다가 적제(赤帝)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는데, 백제는 진 나라를 가리키고, 적제는 한 나라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한서(漢書)1고제기(高帝紀)

 

백룡퇴(白龍堆)

옛날 서역(西域)의 사구(沙丘) 이름으로, 유사(流沙)가 끝나는 곳이다.

중국 신강성(新疆省) 천산남로(天山南路)에 있는 지명.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유사(流沙)만이 쌓인 지대이다. 한서(漢書)』 「서리전(徐摛傳)

 

백륙(百六)

16년 만에 액운이 한 번씩 찾아온다는 고어(古語)로서 즉 액운을 말한다.

 

백륙경심기낭신(百六驚心記曩辰)

16년마다 돌아온다는 액운(厄運)의 시대로,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을 가리킨다.

 

백륜(伯倫)

() 나라 패국(沛國) 사람인 유령(劉伶)의 자. 완적(阮籍)ㆍ혜강(嵇康) 등과 사이좋게 지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예법을 무시하고 호방하게 술을 즐겨 마셔 현실을 도피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인용된다. 일찍이 주덕송(酒德頌)를 지었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유령전(劉伶傳)

 

백륜건(白綸巾)

흰 베로 만든 두건인데, 옛날 은자(隱者)나 풍류인들이 썼다고 한다. ()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백륜건을 쓰고 지냈다.

 

백륜송(伯倫頌)

() 나라 때의 명사(名士)인 유령(劉伶)이 지은 주덕송(酒德頌)를 말한다. 백륜은 유령의 자이다.

 

백리(百里)

백리혜(百里惠). 춘추시대(春秋時代) 진목공의 대부.

지방 장관의 별칭이다. 옛날 한 현()의 땅이 대략 백리였기에, 고을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유비(劉備)가 처음에 방통(龐統)을 뇌양(耒陽)의 현령으로 발령하였는데, () 나라의 노숙(魯肅)이 이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기를 그는 백리재(百里才)가 아니니 조정에 불러와서 천리마(千里馬)의 재질을 펼치도록 해야 한다.”고 한 고사가 있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방통전(龐統傳)/ 인용: 戊子秋哀丐者(송규빈) / 유의어: 백리재(百里才)

 

백리부미(百里負米)

가난하게 살면서 부모에게 효양(孝養)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일찍이 두 어버이를 섬길 적에 집이 가난하여 항상 여곽(藜藿)의 열매만 먹고살았으므로, 그가 어버이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지고 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

 

백리음서(百里音書)

가까운 지역에서 보내 온 소식을 말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백리의 음서가 어찌하여 이토록 늦게야 도착했노, 늦은 봄에 지은 시를 늦가을에야 받아 봤소.[百里音書何太遲 暮秋把得暮春詩].”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15 渭村酬李二十見寄

 

백리인성용철상(百里仁聲舂輟相)

백리해(百里奚)는 우() 나라의 현신이었는데, 우 나라 임금을 버리고 진() 나라로 가서 목공(穆公)을 섬김으로써 오고대부(五羖大夫)가 되었다. 조량(趙良)상앙(商鞅)에게 이르기를, “오고대부(五羖大夫)가 죽고 나자, () 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고 방아를 찧던 자들이 절구질을 하지 않았다[五羖大夫死, 秦國男女流涕, 童子不歌謠, 舂者不相杵].” 하였다. 사기(史記)卷六十八 상군열전(商君列傳)

 

백리잠우구(百里潛牛口)

()의 대부(大夫) 백리해(百里奚)가 초()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있을 때 진 목공(秦穆公)이 그의 어짐을 듣고 자기 나라 정사를 그에게 맡기기 위하여 염소 가죽 다섯 장으로 그의 죄값을 물고 데려와 국정을 맡겼는데, 그 말이 와전되어 백리해 자신이 진 목공을 만나기 위하여 염소 가죽 다섯 장에 몸을 팔아 남의 소 먹이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백리해를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도 한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백리후(百里侯)

백리는 공후(公侯)의 나라로서 곧 한 고을의 원을 가리킨다.

 

백마(白馬)

흉사(凶事), 사람이 죽은 것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고풍시(古風詩), “백마 탄 화산군을 평원리에서 만났네[白馬華山君 相逢平原里].” 하였다.

 

백마동도(白馬東到)

기자(箕子)주 무왕(周武王)의 봉함을 받고서 백마를 타고 동쪽인 조선으로 왔다 한다. 사기(史記)卷四十八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백마조(白馬潮)

하얀 물결이 세차게 일어나는 것을 흰 말에 비유한 말이다.

 

백마조두옹(白馬潮頭擁)

오자서(伍子胥)가 죽은 뒤에 전당강(錢塘江)의 도신(濤神)이 된 고사로, 파도가 거세게 치는 것을 형용한다. 태평광기(太平廣記)291권에, “오자서가 죽은 뒤 부차가 사람을 시켜서 오자서의 시신을 가죽 부대에 담아서 전당강에 버렸는데, 이때부터 전당강의 파도가 노하여서 높이 솟구쳤다. 전설에, 오자서의 영혼이 없어지지 않고 도신(濤神)이 되어서 전당강의 노한 파도를 타고 왔다갔다하는데, 사람들이 파도를 보면 오자서가 파도의 맨 꼭대기에 백마(白馬)를 타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이로 인해서 묘사(廟祠)를 세우고서 그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하였다.

 

백마청류(白馬淸流)

청류는 청렴결백한 사람을 말한다. () 나라 때 배추(裴樞)가 주전충(朱全忠)에게 미움을 받아 농주 사호참군(瀧州司戶參軍)으로 폄척되어 나갈 적에 주전충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여 시신을 백마하에 던져 버리게 한 데서 온 말인데, 이에 앞서 주전충의 비서인 이진(李振)이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스스로 청류라 자칭하는 자들이니, 저 백마하에 던져서 영원히 탁류(濁流)로 만들어야 한다.” 하니, 주전충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四十

 

백마총(白馬塚)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백마침(白馬沈)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마강에 이르렀을 때, 백제를 수호하는 용에 의해 비바람이 일고 파도가 거세어 건널 수 없자 백마를 미끼로 삼아 용을 낚아 처단하였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백마강이란 이름도 그 전설에 의해 생긴 것이다. / 인용: 백마강을 보며 울분에 찬 정사룡 시

 

백면뇌(百面雷)

많은 요고(腰鼓)를 말한다. 송 나라 소식(蘇軾)석화시(惜花詩), “요고 일백 개가 봄 우레 소리 같아, 양주 땅에 울리자 꽃 저절로 피누나[腰鼓百面如春雷 打徹涼州花自開].”하였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책상물림. 밖에 나가지 않고 글공부만 하여 얼굴이 흔 선비. ,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비유.

 

백모(白帽)

()을 치를 때 쓰는 모자이다.

 

백모순속(白茅純束)

흰 띠로 묶다. 백모돈속 유녀여옥(白茅純束有女如玉)에서 나온 말이다. 시경(詩經)소남(召南) 야유사균(野有死麕)

 

백모절(白旄節)

소무(蘇武)가 해상에서 양을 치면서도 한나라의 절()을 들고 다녀 절의 흰 털이 다 빠졌다 한다.

 

백목참존(白木鑱存)

흰 나무로 자루를 만든 쟁기가 있어 이것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우거동곡현작가(寓居同谷縣作歌)흰 나무로 자루를 한 긴 보습이여 긴 보습이여, 내가 너를 의탁하여 생명으로 삼노라[長鑱長鑱白木柄 我生託子以爲命].”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시비해(杜詩批解)卷八

 

백묘전(百畝田)

일종의 토지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던 주 나라 때 한 농가마다 백묘의 밭을 할당받아 농사를 지었다. 곧 평범한 농부를 말한다.

 

백문(白門)

남경(南京)에 있는 지명으로, 즉 금릉(金陵)을 달리 부른 말이다.

서남방의 별칭이다.

성문(城門)을 말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나음.

 

백문서(白文瑞)

문서(文瑞)이황(李滉)의 제자인 백현룡(白見龍)의 자이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같지 아니한다.

 

백미(白眉)

원뜻은 흰 눈썹을 지닌 사람으로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를 이르는 말이나 때로는 예술 작품 중에서 뛰어난 것을 지칭할 때에 쓰기도 한다. 촉한(蜀漢) 때 마량(馬良)5형제가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그의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씨 5형제 가운데 백미(白眉)가 가장 훌륭하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마량전(馬良傳)

 

백미랑(白眉郞)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삼국 시대 때 촉() 나라의 마량(馬良) 형제 다섯이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에서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마량의 눈썹이 희었으므로 사람들이 마씨의 아들 가운데 백미가 가장 뛰어나다.” 하였다. 삼국지(三國志)39 촉지(蜀志)」 「마량전(馬良傳)

 

백미량(白眉良)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남을 이른다. 촉한(蜀漢) 때 마량(馬良)5형제가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되, 그중에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그의 눈썹에 흰털이 섞여 있었으므로, 향인들이 마씨 5형제 중에 백미가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卷三十九

 

백반청추(白飯靑蒭)

두보(杜甫)의 시에, “종에게는 흰 밥을 주고 말에게는 푸른 꼴을 주네[與奴飯馬淸蒭].”라는 구절이 있다.

 

백발백중(百發百中)

백 개의 화살이 백번 다 명중한다는 뜻으로, 모든 계획이 예정대로 다 적중한다는 뜻이다.

 

백발부(白髮賦)

()의 좌사(左思)가 쓴 백발부(白髮賦). 좌사가 어느새 백살이 된 게 한스러워 백발부를 썼었음. 연감유함(淵鑑類函)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근심 때문에 흰 머리가 이렇게 길어졌다는 탄식의 말이다. 이백(李白)추보가(秋浦歌)중 한 구(). 늙은 몸의 서글픔을 노래할 때 자주 인용한다.

 

백배(百拜)

예기(禮記)악기(樂記)술 한 잔 권할 때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므로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술을 마실 적에도 예의를 지킴으로써 난잡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백번(白薠)

흰 떼. 풀 이름이다.

 

백벽(白璧)

흰구슬로서 진귀한 보물.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진귀한 보물인 초() 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 나라 소왕(昭王)이 열다섯 성과 맞바꾸자고 청하였다[趙惠文王時, 得楚和氏璧. 秦昭王聞之, 使人遺趙王書, 願以十五城請易璧].”는 기록이 있고,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제 위왕(齊威王)이 순우곤에게 황금(黃金) 천 일()과 백벽(白璧) 십 쌍()을 주었다[於是齊威王乃益齎黃金千溢, 白璧十雙].”는 기록이 있다.

 

백벽수어목(白璧羞魚目)

백벽은 현자(賢者)에 비유한 말이고, 고기 눈은 곧 사이비의 소인에 비유한 것이니, 즉 현자가 소인을 증오하는 뜻이다.

 

백벽쌍(白璧雙)

전국(戰國) 때에 우경(虞卿)이 조왕(趙王)을 보았더니 한 번 보자 조왕이 백벽(白璧) 한 쌍을 주었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백벽청승(白璧靑蠅)

쉬파리가 똥을 내갈겨 백옥(白玉)을 더럽힌다.

 

백벽환연성(白璧還連城)

구슬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큰 가치를 부여받게 됨을 의미한다. 백벽은 전국시대(戰國時代)조 혜문왕(趙惠文王)이 소장하고 있던 화씨벽(和氏璧)이고, 연성(連城)이란 곧 그 가치가 여러 성()에 해당함을 말한 것으로, 당시 진 소왕(秦昭王)이 이 구슬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겨 조 혜문왕에게 15()과 바꾸자고 요구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백병참(白柄鑱)

두보(杜甫)의 시에 장참장참백목참(長鑱長鑱白木鑱)”이란 구절이 있다.

 

백보천양(百步穿楊)

()나라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잘 쏘아 백 걸음 앞에서 버들잎을 겨누어서 뚫었다. 사기(史記)卷四 주본기(周本記),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

 

백봉(白鳳)

뛰어난 시상(詩想)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이 흰 봉황(白鳳)을 토()하는 꿈을 꾸고부터 사부(詞賦)가 더욱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백봉비(白捧羆)

왕비(王羆)는 북제(北齊)의 맹장이다. 남제(南齊)의 신무제(神武帝)가 한궤(韓軌) 등을 보내어 밤에 하()를 건너 왕비를 습격하니, 비가 모르고 있었는데 새벽에 궤의 군병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에 들어왔다. 비는 아직 누워 자고 있었는데 문밖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맨발로 흰 몽둥이(白棒)을 들고 내달으며 크게 외치기를, “늙은 곰이 여기 길목에 누웠으니 어느 담비가 지나갈 테냐.” 하니, ()이 보고 놀라 물러섰다.

 

백부(白傅)

만년에 태자 소부(太子少傅)를 지냈던 당()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별칭이다.

 

백부(帛符)

비단을 찢어 가지는 증명물.

 

백부(栢府)

어사대(御史臺) 즉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이다. () 나라 어사대 안에 잣나무()를 줄지어 심었는데 그 위에 항상 까마귀 수천 마리가 서식하였으므로 어사대를 백부(柏府), 백대(柏臺), 오대(烏臺)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서(漢書)83 주박전(朱博傳)

 

백부편(白傅篇)

()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편. 백부(白傅)란 백거이가 만년에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역임했음으로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백분(白粉)

어려서부터 한 가지 재주를 익히기 시작하여 머리가 다 희도록 해도 제대로 되지 않고 어지럽기만 한 것. 법언(法言)

 

백불(白拂)

짐승의 희고 긴 터럭을 묶어서 만든 먼지떨이인데 이는 흔히 중들이 소지하는 것이다.

 

백붕(百朋)

많은 재화(財貨)를 말하는데, 시경(詩經)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다[旣見君子 錫我百朋]”하였다.

 

백사(百舍)

()는 거리의 단위로 30, 백사(百舍)는 먼 거리를 표현한 말이다. 백 리마다 한 번씩 쉰다는 뜻으로, 고생고생을 하며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도(天道), “사성기(士成綺) 노자(老子)를 찾아뵙고는 말하기를, ‘백 리마다 한 번씩 쉬면서 발에 물집이 겹으로 생겼어도 쉬지 않고 왔습니다[百舍重趼而不敢息].’ 하였다.” 하였다. / 인용: 老客婦怨(허균)

 

백사(白社)

백련사(白蓮社)를 말한다. () 나라 때 고승 혜원(慧遠)이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18인의 문인들과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모임을 결성하고 정토법(淨土法)을 함께 닦았는데, 동림사 안에 백련(白蓮)이 있으므로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였다 한다. 곧 문인들의 청아한 모임을 가리킨다.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광해군 9(1617)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이를 극력 반대하다 관작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그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백사마(白司馬)

당 나라 문장가 백거이(白居易)를 가리킨다. 그가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비파인(琵琶引)좌석에서 제일 많이 운 사람이 누구인고, 강주 사마 푸른 적삼 눈물 젖어 축축하네[座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라는 구절이 있다.

당대(唐代) 후사지(侯思止)라는 혹리(酷吏)가 있었는데 무식하여 쌍스런 말을 쓰며 죄인을 다루었었다. 그는 죄인을 고문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죄인을 다스릴 때면 이 백사마(白司馬)를 잘 받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맹청(孟靑)을 받을 거다.” 하고 호통을 쳤다 한다. 백사마는 북망산(北邙山)의 사마판(司馬坂)의 별명으로 죽음을 뜻하며, 맹청은 낭야왕(琅邪王) ()을 쳐서 죽였던 장군 맹청봉(孟靑棒)에서 따온 것으로 매로 쳐죽임을 말한다. 당사(唐史)』 「혹리후사지전(酷吏侯思止傳)

 

백사위인일(白社違人日)

백사는 흰 띠(白茅)로 지붕을 덮은 집. 즉 옛날 은사(隱士)의 집을 말하고 인일(人日)은 정월 칠일을 말한다.

 

백사인(白舍人)

곧 당 헌종 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

 

백사자(白獅子)

수박(西瓜)이 원래 서역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인데, 백사자(白獅子)는 수박의 별칭(別稱)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백산(白傘)

불가의 말로 오불정(五佛頂)의 하나인 백산개불정(白傘蓋佛頂)을 가리킨다.

 

백상(白商)

가을의 별칭이다.

 

백상루(百祥樓)

평북 안주(安州) 북성(北城)의 안쪽 청천강(淸川江) 가에 자리 잡은 조망이 좋은 누대 이름이다. / 인용: 百祥樓

 

백석(白石)

황초평(皇初平)이 나이 15세 때 양()을 치고 있었는데, 어느 도사(道士)가 그의 착실한 태도를 보고 그를 데리고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 속으로 들어갔다. 초평은 그곳에서 40여 년을 보내면서 집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나선 그의 형이 몇 해를 두고도 못 찾다가 어느 날 시장에서 도사를 만나 그가 금화산 속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길로 도사를 따라가서 그를 만났다. 형이 초평에게,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산 동편에 있다고 하여, 가 보았으나 양은 없고 하얀 돌무더기뿐이었다. 그런데 초평이 와서 꾸짖자 그 돌들이 모두 일어나 수만 마리의 양떼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선전(神仙傳)

 

백석가(白石歌)

남산지가(南山之歌), 일명 우각지가(牛角之歌)라고도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사람 영척(甯戚)이 가난하여 제 환공(齊桓公)에게 벼슬을 얻으러 가서 소뿔을 두드리면서 불렀다 한다. 그 노래는 남산은 환하며 백석은 빛나네[南山粲粲 白石爛爛].”로 시작한다. 삼국약기(三齊略記)

 

백설(百舌)

새 이름이다. 백로(伯勞)의 일종으로 일명은 반설(反舌)인데 종달새를 말한다.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꾀꼬리는 잘 울고 또한 울음소리에 변화가 많아서 이렇게 말한다.

 

백설(白雪)

거문고 곡조의 이른다. 그 설이 동일하지 않다. 사희일(謝希逸)의 금론(琴論)에는 유연자(劉涓子)가 거문고를 잘 타서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을 지었다.” 하였고, 금집(琴集)에는, “사광(師曠)의 소작이라.” 하였으며, 박물지(博物志)에는, “태상(太常)이 소녀(素女)를 시켜 오십현(五十絃)의 비파를 타는 곡조 이름이라.” 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도읍 영도(郢都)의 고아(高雅) 한 가곡(歌曲) 이름으로, 문선(文選)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下里)와 파인(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陽阿)와 해로(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양춘(陽春)과 백설(白雪)을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其爲陽阿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不過數十人而已].” 하였다.

 

백설가(白雪歌)

하리(下里)ㆍ파인(巴人)에 대칭되는 매우 품격이 높은 노래로, 곡조가 고상하여 예로부터 부르기 어려운 곡으로 꼽혀 온 초() 나라의 가곡이다. 지기지우끼리 시를 주고받을 때 흔히 상대방의 시를 찬양하는 뜻으로 인용된다.

 

백설곡(白雪曲)

양춘곡(陽春曲)과 함께 꼽히는 초() 나라의 2대 명곡으로 내용이 너무도 고상하여 예로부터 창화(唱和)하기 어려운 곡으로 일컬어져 온다. 전하여 상대방의 시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백설부(白雪賦)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 이름이다.

 

백설양춘(白雪陽春)

남이 흉내내기 어려운 고상한 시가(詩歌)를 말한다. 백설과 양춘 모두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가곡 이름으로, 이를 제대로 창화(唱和)하는 이가 수십 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 인용: 贈李子範時楷(이안눌)

 

백설조(白雪調)

거문고 곡명. 비추부(悲秋賦)로 유명한 초()의 송옥(宋玉)이 쓴 송옥풍부(宋玉諷賦), “그 안에 거문고가 있기에 신()이 그를 안고 뜯다가 유란곡(幽蘭曲)ㆍ백설곡(白雪曲)을 만들었지요.”라 하였다.

 

백설조(白雪操)

고대의 유명한 금곡(琴曲) 이름인데, 곡이 너무 고상하여 창화(唱和)할 이가 극히 드물었으므로, 전하여 위인(偉人)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백설편(白雪篇)

옛날에 고상하기로 유명했던 초() 나라의 가곡인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에서 온 말로, 전하여 훌륭한 시문(詩文)에 비유한다.

 

백성(白城)

충청도 직산(稷山)의 고호이다.

 

백성가(百姓家)

불교나 도교를 믿지 않는 평범한 집.

 

백세지사(百世之師)

백세 후에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큼 훌륭한 사람을 말한다.

 

백소부(白少傅)

태자 소부(太子少傅)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

 

백수(白壽)

99. 100-1=99처럼 -==99

 

백수(白水)

중국의 남양(南陽) 백수현(白水縣)으로, 왕기(王氣)가 성대하게 일어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또한 백수진인(白水眞人)으로 일컬어졌는데, 망기(望氣)를 잘 하는 왕망(王莽)의 사자가 남양(南陽) 땅에 이르러 그가 거하는 지역인 용릉곽(舂陵郭)을 멀리 바라보고는 기운이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니,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명을 받을 곳임이 분명하다.”라고 감탄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

 

백수고(柏樹枯)

() 나라 왕부(王裒)는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죄 없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이르러 절하고 곡했으며 옆에 있는 잣나무를 부여잡고 슬피 울부짖으니, 이 때문에 잣나무가 말라죽었다. 진서(晉書)』 「왕부전(王裒傳)

 

백수고지(栢樹枯枝)

()나라 왕부(王裒)가 그 아버지 무덤에서 매일 슬피 울어서, 무덤 앞에 있는 잣나무가 눈물에 젖어서 잎과 가지가 말랐다.

 

백수달(白獸闥)

백호관(百虎觀)으로서 후한(後漢) 때 박사(博士)와 의랑(議郞) 등이 토론하던 곳이다.

 

백수북면(白首北面)

재주와 덕이 없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스승 앞에서 북향(北向)하고 앉아 가르침을 바란다는 뜻이다.

 

백수일절(白首一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지절(志節)이 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백수자(柏樹子)

선종(禪宗)의 화두(話頭). 어느 승려가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자, 조주가 답하기를 저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 했다고 한다. 회원(會元)』 「조주장 무문관삼칠칙(趙州章 無門關三七則)

 

백수정전(柏樹庭前)

어느 중이 조주(趙州)에게,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고 한다.

 

백수존(白獸尊)

뚜껑에 백호(白虎)를 그린 술잔이다. 옛날에 정월 초하룻날에 이 술잔을 대궐 뜰에 놓아두고 곧은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으니, 말하는 자에게 용기를 갖게 하고자 한 것이라 한다.

 

백수준(白獸樽)

원단(元旦)의 조회(朝會) 때 직간(直諫)하는 신하에게 내려 주던 술잔 이름이다. 원래는 백호준(白虎樽)인데, 당 태조(唐太祖)의 휘()를 피하여 호()를 수()로 바꾼 것이다.

육조(六朝)시대에 송나라 임금이 연회 때에 백수준(百獸樽)을 두루 두고 무공(武功)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그 술을 먹게 하였다.

 

백수진인(白水眞人)

돈을 가리킨다. 왕망(王莽)이 제위(帝位)를 찬탈하고 나서, 유씨(劉氏)를 매우 미워하고 시기하던 중에 전문(錢文)에 금도(金刀)가 있다고 하여 이를 화천(貨泉)으로 고쳐 새겼는데, 혹자가 천()을 파자(破字)하면 백수가 되고 화()를 파자하면 진인(眞人)이 된다[以錢文有金刀 故改爲貨泉 或以貨泉字文爲白水眞人].”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후한서(後漢書)1광무제기론(光武帝紀論)

 

백시(伯始)

후한(後漢) 호광(胡廣)의 자로서, 안제(安帝)ㆍ순제(順帝)ㆍ충제(沖帝)ㆍ질제(質帝)ㆍ환제(桓帝)ㆍ영제(靈帝) 등 여섯 조정을 30여년 동안 섬겼는데 사리에 밝고 조정의 법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여 서울에서 말이 떠돌기를 만사가 풀리지 않거든 백시에게 물어보소 천하의 중용은 호공에게 있다네.” 하였다 한다. 후한서(後漢書)卷四十四 호광전(胡廣傳)

 

백시중용(伯始中庸)

한 나라 호광(胡廣)의 자()가 백시(伯始)인데, 경학(經學)에 익숙하고 나라의 원로(元老)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모든 정무(政務)를 잘 처리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모든 일이 처리되지 않거든 백시에게 물어라. 천하의 중용(中庸)은 호공(胡公)에 있네.”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왕씨가 세력을 부려서 나라를 빼앗았는데도 그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몸만 보전하니, 후세에서는 이를, “호광의 중용이라고 기롱하였다.

 

백식(白食)

공짜 밥

공짜로 먹다 / 인용: 嶺南歎(윤현)

 

백신난속(百身難贖)

공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백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는 말이다. 시경(詩經)진풍(秦風) 황조(黃鳥)대신 죽어 살려낼 수만 있다면, 백 번 죽더라도 기꺼이 하리[如可贖兮 人百其身].”라는 말이 있다.

 

백아(伯牙)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으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일찍이 거문고를 타면서 높은 산에 뜻을 두자(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험준함(峩峩)이 마치 태산(泰山) 같구나.”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또 말하기를 좋다! 양양(洋洋)함이 마치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다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고 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孝行覽 본미(本味)

 

백아곡(白鴉谷)

검단산(黔丹山)북쪽에 있는데 작설차가 난다.

반포(反哺)할 줄 모른다는 까마귀이다.

 

백아금(白牙琴)

백아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초 나라 사람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鍾子期)가 잘 알아들었다. 백아의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높고 높은 산 같구려.” 하고, 백아의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일렁일렁 흐르는 물 같구려.” 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 하였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유의어: 백아현(伯牙絃)

 

백아유수(伯牙流水)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거문고의 명수 백아가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를 타면,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백아절현(伯牙絶絃)

전국시대(戰國時代)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이 났던 백아(伯牙)에게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인 종자기(鍾子期)가 있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더 이상 거문고를 다루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을 때의 슬픔을 이르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유의어: 지음(知音)

 

백악(白嶽)

서울의 백악산으로 곧 대궐을 말한다.

 

백안(白眼)

뜻이 맞는 정겨운 벗이 찾아오면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뜻에 맞지 않는 속()된 사람이 찾아오면 백안으로 대했다는 진()나라 완적(阮籍)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남의 환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 유의어: 백안시(白眼視)

 

백액장군(白額將軍)

하얀 이마의 장군이란 뜻으로 호랑이를 가리킨 말이다.

 

백야(白也)

두보(杜甫)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시에 백야의 시는 상대할 자가 없어라, 초연한 생각이 무리에 뛰어나네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羣.” 한 데서 온 말로, 이백(李白)의 대칭(代稱)으로 쓰인다.

 

백야연금속(白也緣金粟)

이백(李白)은 스스로 금속여래의 후신이라 칭하였다. 금속여래는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이라 하나 경문에 근거가 없다.

 

백양(白楊)

나무 이름인데, 옛날 무덤 가에 이 나무를 많이 심었었다.

 

백양(伯陽)

노자(老子) 이이(李耳)의 자. 어머니 뱃속에서 81년이나 있다가 태어나서 바로 말하였으며, 머리가 이미 세었다 한다. 열산전(列仙傳)/ 노자는 도덕(道德)을 닦았는데, 그 학은 숨어서 이름을 내지 않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노자는 주() 나라가 쇠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가다가 관문(關門)에 이르니 관령(關令) 윤희(尹喜)그대가 은거하려는 모양인데 나를 위하여 책 하나를 지어달라.” 하자,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상하편을 지어 주고 갔다 한다. 사기(史記)卷六十三

() 나라 선인(仙人) 위백양(魏伯陽)을 말한다.

 

백양공(白羊公)

해록쇄사(海錄碎事)』 「도석선(道釋仙)황로자(黃盧子)가 그에게 도법(道法)을 전수하였는데, 그는 늘 흰 양을 타고 다녔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한다.” 하였다.

 

백양숙(白良叔)

양숙(良叔)은 백동좌(白東佐)의 자()이다.

 

백어(伯魚)

공자(孔子) 아들 리()의 자()이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논어(論語)』 「계씨(季氏)공자가 일찍이 홀로 서 있는데 이()가 허리를 굽히고 바삐 걸어 뜰을 지나갔다[嘗獨立 鯉趨而過庭]” 하였다.

 

백업(白業)

불교(佛敎)에서 악업(惡業)을 흑업(黑業)이라 하고, 선업(善業)을 백업(白業)이라 한다.

 

백업증금침(白業證金針)

사람들에게 시를 짓는 비결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백업은 불가의 용어로 선업(善業)이란 뜻이고, 황금침은 금침도인(金針度人)의 준말이다.

 

백연차(白燕釵)

한 무제(漢武帝)가 신녀(神女)에게서 받은 옥비녀(玉釵)를 조 첩여(趙倢伃)에게 주었는데, 소제(昭帝) 때에 이르러 그 상자를 열어 보니, 흰 제비(白燕)가 나와서 하늘로 날아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미인을 가리킨 듯하다.

 

백열(柏悅)

잣나무의 기쁨이란 곧 친구의 행운을 기뻐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육기(陸機)탄서부(歎逝賦)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면 혜초가 탄식을 한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 한 데서 온 말이다.

 

백엽주(柏葉酒)

측백나무 잎을 넣어 빚은 술인데, 원단(元旦)에 수명을 빌고 사기(邪氣)를 쫓기 위하여 가족들이 함께 마시던 술 이름이다.

 

백영(伯英)

후한 장지(張芝)의 자()이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므로 사람들이 초성(草聖)으로 일컬었다. 후한서(後漢書)』 「장환전(張奐傳)

 

백예(伯翳)

()의 신하인 백익(伯益). 우를 도와 많은 치수의 공을 세웠음. 사기(史記)卷五 진본기(秦本紀)

 

백오(百五)

한식절(寒食節)의 별칭이다. 동지에서 한식까지는 15일이 걸리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백오가진(百五佳辰)

백오(百五)한식절(寒食節). 동지(冬至) 1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이다.

 

백오요(柏烏謠)

사헌부(司憲府)의 고사와 관련된 시라는 뜻이다. () 나라 때 어사부(御史府)에 잣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나무 위에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서식하였으므로, 어사대를 오대(烏臺)ㆍ오부(烏府)ㆍ백대(柏臺)라고 하였다 한다. 사물이명록(事物異名錄)宮室 官廨

 

백오정당한식천(百五正當寒食天)

동지(冬至)에서 한식날까지 꼭 105일이 되므로 한식을 백오절이라고도 함

 

백옥(白屋)

흰띠(白茅)로 지붕을 한 집인데 대개 천민(賤民)의 허술한 집을 말한다. 옛날 요() 임금이 이런 집에서 거처하였다고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皇王部 五帝堯陶唐氏

 

백옥(伯玉)

춘추(春秋) 시대 위() 나라의 현대부(賢大夫) 거원(蘧瑗)의 자()이다.

 

백옥경(白玉京)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천제(天帝)의 도성(都城)이다. 곧 황성(皇城)을 말한다.

천상(天上)의 중심에 천존(天尊)이 산다는 옥경산(玉京山)을 말하는데, 황금과 백옥(白玉)으로 꾸민 궁궐들이 있다 하여, 후에 경도(京都)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침중서(枕中書)

 

백옥뇌(白玉腦)()의 씨앗을 가리키는 말인데, 즉 백옥(白玉)처럼 희고 깨끗한 용뇌(龍腦)와 같다는 뜻이다. 용뇌는 인도(印度)에서 나는 용뇌수(龍腦樹)의 줄기에서 덩어리로 되어 나오는 투명(透明)한 결정체(結晶體)이다.

 

백옥당(白玉堂)

관리(官吏)가 있는 관서(官署)를 이른다.

문인(文人)이 죽은 뒤에 모여산다는 백옥루(白玉樓)를 말한다.

청화직(淸華職)의 관원이 머무르는 대궐 안의 관소로 홍문관을 가리킨다.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이다.

 

백옥루기(百玉樓記)

() 나라 때의 시인 이하(李賀)가 죽을 적에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천제(天帝)께서 백옥루를 지어놓고 그대를 불러다가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고 한 데서 온 말로, 문인(文人)의 죽음을 말한다.

 

백옥루기(白玉樓記)

천상(天上)에 있는 누각인 백옥루(白玉樓)의 기문(記文). 당 나라 이상은(李商殷)이 지은 이장길소전(李長吉小傳)에 의하면, 당 나라 때 천재 시인인 이하(李賀)가 몰락한 종실의 후예로서 뜻을 펴지 못했는데, 어느 날 낮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상제(上帝)께서 백옥루(白玉樓)를 지었는데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 한다.”라고 쓰여진 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죽었다 한다.

 

백옥루징기(白玉樓徵記)

상제(上帝)의 백옥루에 대한 기문(記文)을 쓰게 할 목적으로, () 나라 시인 이하(李賀)를 하늘로 데려갔다고 그의 죽음을 비유한 글이 당대(唐代) 이상은(李商隱)이하 소전(李賀小傳)에 나온다.

 

백옥봉(白玉峯)

옥봉은 조선 중종(中宗) 때 사람 백광훈(白光勳)의 호이다. 그는 당시에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얼굴이 아주 못생겨서 이름만 듣고 만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한다. 그가 한번은 부여의 백마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평소 그를 흠모하던 어떤 기생이 백광훈에게 어른을 뵈오니 꼭 조룡대(釣龍臺)와 같습니다. 조룡대라 하여 굉장한 줄 알고 와서 보면 초라하여 소룡대(小龍臺)라 하듯, 어른을 뵈니 실망이 큽니다.” 하여 듣는 사람들이 웃었다 한다.

 

백옥삼견(白玉三見)

()의 변화(卞和)가 박옥(璞玉)을 주워가지고 초왕(楚王)에게 바쳤다가, 옥이 아닌 돌로 왕을 속였다 하여 양쪽 발꿈치를 다 잘리는 형을 당했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백옥증매채(白玉曾埋彩)

남편의 죽음을 가리킨다.

 

백옥지비(伯玉知非)

50세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거백옥(蘧伯玉)은 쉰 살에 지난 마흔아홉 살까지의 잘못을 알았다.蘧伯玉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한 데 근거하였다. 50살이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것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금시재(今是齋)라는 집 이름이 覺今是而昨非라는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구절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여, 거백옥(蘧伯玉)知非고사를 끌어다 쓴 것이다. 장자(莊子)』 「칙양(則陽), 논어(論語)』 「헌문(憲問)위령공(衛靈公)/ 인용: 寄尹李二故人(노수신)

 

백온(伯溫)

송 나라 소옹의 아들 소백온(邵伯溫)을 가리키는데, 그는 또 황극계술(皇極系述)ㆍ관물내외편해(觀物內外篇解) 등을 저술하였다.

 

백요궁(白瑤宮)

달 속에 있다는 선궁(仙宮)의 이름이다.

 

백우(伯牛)

공문 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인 염경(冉耕)의 자이다. 백우가 악질에 걸리자 공자(孔子)가 찾아가 위문하고 이런 사람이 이런 악질에 걸렸느냐고 애석해하였다[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논어(論語)』 「옹야(雍也)

 

백우(伯禹)

() 임금. ()의 아들.

 

백우선(白羽扇)

흰 새털로 만든 부채로서 흔히 신선이 갖는 소지품으로 묘사된다.

 

백운(白雲)

어버이를 말한다. ()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의 법조 참군(法曹參軍)으로 있을 적에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자기 고향 쪽에 흰 구름이 외로이 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우리 어버이가 저 구름 밑에 계신다[吾親所居 在此白雲下].”하고는 한동안 슬피 바라보다가 구름이 딴 곳으로 간 다음에야 길을 떠났다. 신당서(新唐書)』 「적인걸전(狄仁傑傳)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호이다.

형조의 관원을 가리킨다. 황제(黃帝) 때 백관을 구름으로 이름하였는데, 추관(秋官) 즉 형조는 백운(白雲)이라고 불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

 

백운각(白雲閣)

어버이에 대한 추억이 묻어나는 누각이라는 말이다. ()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가다가 흰 구름이 홀로 머문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 구름 아래에 우리 어버이가 계신다[吾親所居 在此雲下].”고 말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89 적인걸전(狄仁傑傳)

 

백운간점원(白雲看漸遠)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에 있을 때에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돌아보니, 흰 구름이 외로이 날아가는지라, “내 어버이 집이 저 아래 있는 것을,”이라 했으니 흰 구름 밑에 고향이 있다는 뜻이다.

 

백운봉(白雲封)

남조(南朝) () 나라 고제(高帝)가 산중에 은거하는 도홍경(陶弘景)에게 산중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묻자, 시를 지어 대답하기를 산중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면 산등성이 그 위에 흰구름 많아 스스로 마음속에 기뻐할 따름 임금에게 부쳐줄 수는 없다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하였는데, 나중에 소연(蕭衍)이 양() 나라를 세울 때 그를 도와 공을 세웠으므로 당시에 산중 재상이라 불렸다 한다.

 

백운불귀(白雲不歸)

주목왕(周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이르러 선녀인 서왕모(西王母)와 요지(瑤池) 가에서 잔치할 적에 서왕모가 주 목왕을 위하여 백운은 하늘에 있고 ……[白雲在天……]”라는 노래를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 말한 백운은 곧 서왕모를 가리킨다.

 

백운사(白雲司)

추관(秋官), 즉 형조나 사헌부 등의 관아를 말한다. 백낙천(白樂天)의 시에 淸光莫獨占 亦對白雲司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9 和劉郞中望終南山秋雪

 

백운사아경(白雲司亞卿)

형조 참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구름에 비유하여 관직을 명명하면서, 추관(秋官)을 백운(白雲)이라고 칭했다는데, 추관은 곧 형관(刑官)을 가리킨다.

 

백운요(白雲謠)

주목왕(周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가서 선녀인 서왕모(西王母)와 요지(瑤池)에서 주연을 베풀고 헤어질 때 서왕모가 지어 주었다는 이별시로, “백운은 하늘에 있는데, 산릉만 절로 생기네. 길은 멀고 산천이 가로막히었나니, 원컨대 그대는 죽지 말아서 다시 오기를 바라노라[白雲在天 山陵自出 道里悠遠 山川間之 將子無死 尙能復來].”라고 한 것인데, 주 목왕은 이에 답하여 노래하기를 내가 동토에 돌아가 중국을 잘 다스려서, 만민이 고루 태평해지거든 내가 다시 와서 너를 보리라[予歸東土 和治諸夏 萬民平均 吾顧見汝].” 하였다 한다. 그 첫 구절이 백운재천(白雲在天)”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백운요(白雲謠) 혹은 백운편(白雲篇)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목천자전(穆天子傳)3

 

백운일재망(白雲日在望)

()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객지에서 백운을 바라보고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했던 고사가 있다.

 

백운진감의마최(百韻眞堪倚馬催)

재질이 민첩하여 순식간에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 나라 원호(袁虎)가 환선무(桓宣武)로부터 포고문을 빨리 지으라는 독촉을 받고는 말에 기댄 채 종이 일곱 장의 글을 금새 지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

 

백운편(白雲篇)

두보(杜甫)의 증헌납사기거전사인징시(贈獻納使起居田舍人澄詩)개인 창 아래서 백운편을 점검하도다[晴窓點檢白雲篇],” 한 데서 온 말로, 좋은 시를 뜻한 듯하나, 제가(諸家)의 해석이 구구하여 자세하지 않다. 두시(杜詩)卷三

 

백운편(白雲篇)

은거해 사는 사람이 지은 시를 말한다.

② 「주목왕(周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갔을 때,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잔치를 베풀고 주 목왕에게 축수를 올리면서 불렀던 백운요(白雲謠)를 가리킨다.

 

백운하(白雲下)

고향의 부모 생각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법조 참군(法曹參軍)으로 있으면서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외로이 나는 흰 구름을 보고는 좌우에게 말하기를 우리 어버이가 저 구름 아래에 계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백운향(白雲鄕)

신선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저 백운(白雲)을 타고 제향(帝鄕)에서 놀리라[乘彼白雲 遊乎帝鄕].”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신선들이 사는 곳을 뜻하게 되었다.

 

백원(白猿)

옛날 검술(劍術)로 유명했다는 백원공(白猿公)을 지칭한 것.

 

백원옹(白猿翁)

흰 빛의 원숭이란 뜻으로, 유신(庾信)우문성지명(宇文盛志銘)백원(白猿)에게 검술(劍術)을 배워 풍운(風雲)의 뜻을 이루었다.” 했다.

 

백월(百越)

지명 또는 종족(種族)의 이름으로 교지(交阯)에서부터 회계(會稽)에 이르기까지 7~8천 리에 걸쳐 있는 종족.

 

백월(百粵)

옛날 중국의 절강(浙江)ㆍ민월(閩越) 지방을 가리킨다. 옛날 교지(交趾)에서 회계(會稽)까지 칠팔천 리 주위에 군소 월족(越族)들이 모여 각기 작은 나라들을 매우 많이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른다. 문헌통고(文獻通考)輿地考 古越南

 

백월비(白月碑)

신라 시대의 국사(國師)인 낭공대사(郞空大師)의 탑명(塔銘)을 새긴 비. 경북 봉화군(奉化郡) 태자사(太子寺)에 세운 것을 영주군(榮州郡)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안의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백유(白楡)

별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의 농서행(隴西行), “하늘 위엔 무엇이 있는가, 가지런히 백유가 심어져 있네[天上何所有 歷歷種白楡].”하였다.

 

백육재(百六災)

액운(厄運)을 말한다. 45백 년인 1() 중에 다섯 번의 양액(陽厄)과 네 번의 음액(陰厄)이 찾아오는데, 양액이 16년마다 있게 되므로 백육회(百六會)라 한다. 漢書』「律歷志/ 유의어: 백육(百六)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백육회(百六會)

106년마다 맞게 되는 액운(厄運)의 시대를 말한다. 한서(漢書)』 「곡영전(谷永傳)

 

백은탄(白銀灘)

평양 대동강(大同江) 능라도(綾羅島) 바로 아래 있는 여울. 중국의 사절들이 돌아갈 때 흔히 대동강에 선유(船遊)했다.

 

백의(白衣)

구름이 일어나는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가탄(可歎), “하늘에 뜬 구름은 흰옷 같더니만, 어느새 변해 푸른 개 같아라[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하였다.

동복(僮僕)을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천한 심부름을 맡은 자는 백의를 입었으므로 이르게 된 것이다. ()도잠(陶潛)99일 술이 없어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백의 입은 사람이 오고 있었다. 이른 다음 보니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도잠은 즉시 따라 마시고 취하였다. 속진양추(續晉陽秋)

 

백의(白蟻)

주목왕(周穆王)8준마(駿馬)의 하나.

 

백의객(白衣客)

이필(李泌)을 가리킨다. 이필은 소년 시절부터 재민(才敏)으로 이름나니 현종은 태자인 숙종과 함께 포의교(布衣交)를 맺게 하였으므로 태자는 언제나 선생이라 불렀다. 뒤에 영양(穎陽)에 살고 있었는데, 마외(馬嵬)에서 숙종이 부르므로 영무(靈武)로 가 뵙자,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밖에 나갈 때에는 말을 함께 타고 잘 때에는 탑()을 마주하여 태자로 있을 때처럼 대우하고 그의 말이면 모두 따랐다. 신당서(新唐書)』 「이필전(李泌傳)

 

백의공백타(白衣供白墮)

백타(白墮)는 진()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유백타(劉白墮)를 이른 말로, 전하여 좋은 술을 가리키는데, 도잠(陶潛)이 음력 99일에 술이 없어 실망하고 있던 차에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백의 사자(白衣使者)를 시켜 술을 보내왔던 데서 온 말이다.

 

백의대사(白衣大士)

33관음(觀音) 가운데 하나인 백의관음을 말하는데, 항상 흰 옷을 입고 흰 연꽃에 앉은 관음보살이다.

 

백의래(白衣來)

도잠(陶潛)99일에 술이 없어 울타리 가에 나가 바라보니 국화를 손에 따들고 흰 옷 입은 사람이 오는데,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내온 것이었다.

 

백의사자(白衣使者)

술을 가져온 하인을 가리킨 말이다. () 나라 때 도잠(陶潛)99일에 술이 떨어져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차,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흰 옷 입은 사환(使喚)을 시켜 술을 보내준 데서 온 말이다.

 

백의유령(白衣踰嶺)

벼슬하려고 새재 넘는다는 말이다. 새재(鳥嶺)는 경상북도 문경군과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위치하여 서울과 지방을 통하는 길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서울 나들이하던 영남 선비들은 으레 이 재를 넘었었다.

 

백의인(白衣人)

도연명(陶淵明)99중양절(重陽節)에 마실 술이 없자 울타리의 국화를 따면서 앉아 있노라니 흰 옷 입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바로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병을 들려서 보낸 사람이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속진양추(續晉陽秋)恭帝

 

백의재상(白衣宰相)

유생으로 있던 사람이 단번에 재상의 벼슬에 오른 사람.

 

백의종군(白衣從軍)

흰옷(白衣)을 입고 군대()를 따라() 전장에 나감,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에 나간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백의창구(白衣蒼狗)

끝없이 뒤바뀌는 인간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두보(杜甫)하늘에 뜬구름 백의 같더니, 어느새 푸른 개로 모습 바꿨네[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21 가탄(可歎)

 

백의천사(白衣天使)

흰옷을 입은 간호사를 일컫는 말이다.

 

백의탄(白衣嘆)

세상 일의 빠른 변천을 한탄한 말이다. 두보(杜甫)가탄(可歎)시에 하늘에 뜬구름이 금방 백의와 같더니 어느새 변하여 푸른 개가 되었구나[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成蒼狗].” 한 데서 온 말이다.

 

백이(百爾)

모든 지위를 말하거나 또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猶言諸位. 亦指在位者]. / 인용: 詰楊吏(허격)

 

백이(百二)

1백분의 2.

백이산하(百二山河), 백이관산(百二關山)의 준말로,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말한 것이다. “()나라는 땅이 험고하여 2만 명만 있으면 족히 제후(諸侯)의 백만 군사를 당할 수 있다.” 하였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백이(伯夷)

중국 은() 나라의 처사로서 주 무왕(周武王)이 은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자 주 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아우인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인()을 이루었다고 칭찬하였고, 맹자(孟子), “성인으로서 청렴한 자이다.(聖之淸者)”라고 하였다. 사기(史記)卷六十一 백이열전(伯夷列傳), 맹자(孟子)』 「만장(萬章)/ 유의어: 백이숙제(伯夷叔齊)

 

백이산하(百二山河)

산천의 형세가 아주 험고하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 나라는 지형이 아주 험고한 나라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똑같이 1백만의 군사가 있으면 2백만의 군사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백이양기(伯夷讓夔)

()이 사악(四岳)에게 물어 삼례(三禮)를 맡을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을 때 모두 백이(伯夷)라는 신하를 적격자로 추천했는데 이때 백이는 그것을 기()와 용()에게 양보하였다. 서경(書經)』 「요전(舜典)

 

백이채미사(伯夷採薇死)

백이(伯夷)는 상() 나라 때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데, 무왕(武王)이 상 나라를 치자 이를 간()하였고, 무왕이 천하를 차지함에 이르러서는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의리상 주 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가 굶어죽었던 고사이다.

 

백이청절(伯夷淸節)

맹자(孟子)』 「만장(萬章),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가운데 청()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가운데 자임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가운데 화()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인 자이다.” 하였다. / 백이지청(伯夷之淸)

 

백이추정(伯鯉趍庭)

공자(孔子)가 일찍이 혼자 서 있는데, ()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뜰 앞을 지나가니 공자가 불러서, “()와 예()를 배우라.” 하였다. 논어(論語)』 「계씨(季氏)

 

백이협착(伯夷狹窄)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백이(伯夷)는 협착하고 유하혜(柳下惠)는 불공(不恭)하니, 협착함과 불공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백익(伯益)

옛날 요순(堯舜)의 신하인데 백예(柏翳)라고도 한다. 그는 순() 임금을 도와 새와 짐승들을 길들였다. 공로가 있어 영씨(嬴氏) 성을 받았는데, 이가 바로 진() 나라의 시조(始祖)이다. 사기(史記)卷五 진본기(秦本紀)

 

백인(百忍)

() 나라 때 9()를 동거(同居)하며 화목하게 사는 장공예(張公藝)의 집을 덕종(德宗)이 친히 찾아가 그 비결을 물으니, 그가 지필(紙筆)을 청한 뒤 참을 인() 자를 일백여 번 썼다는 백인성금(百忍成金)’의 고사가 전한다. 구당서(舊唐書)』 「효우전(孝友傳)張公藝 / 소학(小學)』 「선행(善行)

 

백일가성사십년(白日佳城四十年)

40년 만에 다시 무덤을 열고 개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가성(佳城)은 묘지의 별칭이다. 옛날 등공(滕公)이 땅속에서 답답했던 가성이 3천 년 만에 태양을 본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석곽(石槨)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경잡기(西京雜記)4

 

백일계견경류안(白日雞犬輕劉安)

신선이 되는 것도 하찮게 여김을 말한다. ()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이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 할 적에 먹다 남은 선약(仙藥) 그릇을 정중(庭中)에 두었는데, 그의 개와 닭이 이 선약을 핥아먹고 쪼아 먹은 후 개와 닭도 모두 승천을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신선전(神仙傳)

 

백일몽(白日夢)

대낮에 꿈을 꾸는 꿈으로 헛된 공상.

 

백일산정곡임수(白日山精哭林藪)

산도깨비(山精)는 사람 모양의 괴수(怪獸),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나온다고 하는데, 산속의 보물이 없어졌으므로 대낮에도 원통해서 통곡한다는 뜻이다.

 

백일승천(白日昇天)

도를 극진(極盡)히 닦아 육신(肉身)을 가진 채 대낮에 하늘에 오른다는 뜻으로, 선인(仙人)이 되어 하늘로 오름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한미한 신분에서 갑자기 높은 벼슬에 오름을 뜻하기도 한다. 오대(五代) 왕정보(王定保)당척언(唐摭言)』 「호방고한(好放孤寒)원화 11년 병신에 양국공(涼國公) 이소(李愬) 이하 33명을 모두 한미한 집안에서 발탁하니, 당시의 시에 원화 천자 병신년에, 삼십삼인이 같이 신선이 됐어라. 도포는 찬란한 은빛 같고 무늬는 비단 같은데, 서로 함께 백일에 청천에 오르도다[元和天子丙申年 三十三人同得仙 袍似爛銀文似錦 相將白日上靑天]’ 하였다.” 하였다./ 인용: 病解(조귀명)

 

백일시(百一詩)

()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백일장(白日場)

글 짓는 시험의 옛 제도.

 

백일황계(白日黃鷄)

세월이 빠름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취가(醉歌)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축시에 울고, 백일은 해를 재촉하여 유시에 넘어가누나[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한 데서 온 말이다.

 

백자선(柏子禪)() 나라 승려 조주(趙州)를 이른다. 중이 조주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고 묻자, 그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백장(白藏)

가을의 별칭이다.

 

백장(百丈)

배를 끄는 동아줄을 말한다.

 

백저(白苧)

가곡(歌曲)의 이름으로 백저(白紵)라고도 하며, () 나라의 무곡(舞曲) 이름으로, 고사(古詞)의 뜻은, 무자(舞者)의 아름다움을 성대히 칭찬하고, 또 좋은 시절에 즐겨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한 것이다. / 인용: 백저사(白紵詞), 백저가(白紵歌)

 

백적(百適)

() 나라 때 백 번 견책을 받으면 면직되는 고사가 있었다. 공부(公府)의 연리(掾吏) 진준(陳遵)이 날마다 밖에 나가 술에 취해 업무를 폐한 나머지 백 번 견책을 받은 끝에 면직될 운명에 처했는데, 대사도(大司徒) 마궁(馬宮)이 분은 대도(大度)의 인사인데, 어떻게 자잘한 법규로 문책할 수 있는가.” 하고 우대했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유협준(游俠傳)진준(陳遵)

 

백전(白戰)

무기가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으로,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백전(柏殿)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세운 백량대(柏梁臺), 이곳에서 군신(君臣)이 연회를 베풀고 시를 읊으면서 칠언시(七言詩)를 잘하는 사람만 대() 위로 올라가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삼보황도(三輔黃圖)5 영사(臺榭)

 

백전노장(百戰老將)

여러 차례 큰 싸움을 치루었던 늙은 장군이란 뜻으로 세상일에 경험이 많아 당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

 

백전백승(百戰百勝)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김.

 

백전시(白戰詩)

상투적인 단어를 빼고서 독특한 표현으로 짓는 시를 말한다. () 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영주 태수(潁州太守)로 있을 때 눈 내리는 날 빈객들과 술을 마시면서 옥(), (), (), (), (), (), () 등등의 글자를 빼고서 시를 짓도록 한 고사가 소식(蘇軾)취성당설시병인(聚星堂雪詩並引)에 소개되어 있다.

 

백전장(百錢杖)

() 나라 완수(阮修)가 막대기 끝에다 백 전(百錢)의 돈을 꿰어 매고 걸어가다가 주막이 보이면 문득 들어가 혼자서 질탕하게 마시며 즐겼던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백전차중강육경(百戰車中講六經)

광무제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전쟁하는 여가에 군중(軍中)에서도 육경(六經)을 강론하였다.

 

백전하인병촌철(白戰何人屛寸鐵)

옛날 특정한 어휘의 구사를 금하고 시를 짓게 했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읊어 본다는 뜻이다. 백전(白戰)은 송() 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서, 예컨대 눈()에 대한 시를 지을 경우 눈과 관련이 있는 학()ㆍ호()ㆍ소()ㆍ은()ㆍ이()ㆍ매()ㆍ로()ㆍ염()ㆍ동곽(東郭) 등 어휘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소식(蘇軾)이 빈객들과 함께 이를 회상하며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시 가운데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 준수하라. 손으로만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안 될지니[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4 취성당설(聚星堂雪)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음. 아무리 꺾으려고 해도 굽히지 않음.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이겨낸다는 뜻이다. / 유의어: 백절불요(百折不撓)

 

백접리(白接䍦)

두건(頭巾)의 이름이다. () 나라 때 풍류로 이름이 높던 산간(山簡)이 술을 좋아하여 매양 원지(園池) 가에 나가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돌아오므로, 당시 아동(兒童)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는고, 고양지로 가는구나. 날 저물면 있는 술 다 마시고 돌아와 곤드레가 되어 아무 것도 모른다오. 때로는 말을 타고 오면서 백접리를 거꾸로 쓰기도 하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時時能騎馬 倒著白接罹].” 하였다 한다. 진서(晉書)卷四十二

 

백정(白挺)

옛날 백성들이 반기(叛旗)를 들 때 무기로 사용했던 몽둥이를 뜻하는데, 뒤에는 무장한 반란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나라 때 사람으로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시()ㆍ서()에도 모두 뛰어났다.

 

백정왜(屠子倭)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던 왜병을 일컫던 말이다. 당시 구미 지역에 주둔했던 왜병은 조총이 없이 칼과 활만으로 무장을 했는데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생을 하였으므로 백정왜라 불렀다.

 

백제(白帝)

옛날의 신화 속에 나오는 다섯 천제(天帝) 가운데 하나로, 서방(西方)을 맡은 신이다.

 

백제성(白帝城)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백제산(白帝山)에 있다.

 

백제소언(白隄蘇堰)

송 나라 문장가 백거이(白居易)가 쌓은 제방과 소식(蘇軾)이 쌓은 제방을 가리킨다. 소식은 광동(廣東) 혜주(惠州)로 좌천되었을 때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고 그것을 사들여 방생지(放生地)로 삼았다 한다.

 

백제재(白帝栽)

흰 매화가 일찍 핀 것은 봄을 맡는 신을 억지로 먼저 끌어 온 것이나, 빛깔이 흰 것은 백제가 심었기에 그렇게 흰 것이라 하였다. 원래 백제는 가을을 맡은 신이지만 그 백제의 백()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백족(白足)

세속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수도승(修道僧)을 말한다. () 나라의 승려 담시(曇始)는 발이 얼굴보다도 깨끗했는데 흙탕물을 걸어가도 발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으므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렸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낭야대취편(琅琊代醉篇)白足

 

백족사(白足師)

() 나라 때의 고승 담시(曇始)를 이른다. 그는 발이 워낙 희어서 진흙탕을 건너도 발에 더러운 물이 묻지 않았으므로, 그를 백족선사(白足禪師)라 부른 데서 온 말이다.

 

백족화상(白足和尙)

도력(道力)이 높은 승려라는 뜻이다. 후진(後秦)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인 담시(曇始)의 발이 얼굴보다 희었는데 진흙탕을 밟고 다녀도 더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족화상이라고 불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고승전(高僧傳)神異 下 曇始

 

백종처(伯宗妻)

백종(伯宗)의 아내가 아침마다 백종을 경계하기를,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들이 임금을 원망하는 세상인데, 그대가 바른말을 좋아하다가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것이요.” 하였으나 백종은 그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난을 당하였다. 좌전(左傳)成公 十五年

 

백좌칭관포(伯佐稱管鮑)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가 환공을 보좌하여 패업(霸業)을 성취하였다.

 

백주(柏舟)

시경(詩經)용풍(鄘風)의 편명(篇名)이다. () 나라 태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처() 공강(共姜)이 재가(再嫁)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므로 친정 어머니가 개가(改嫁)시키려 하니, 공강이 백주(柏舟)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절조를 지켰다 한다.

 

백주(柏酒)

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하여 설날에 마시는, 측백나무 잎을 넣어 빚은 술 이른다.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호이다.

 

백주갱봉반승일(栢酒更逢頒勝日)

인일(人日)을 가리킨다. 새해가 되면 백엽주(栢葉酒)로 서로 하례를 하고, 인일엔 또 화승(華勝)을 만들어 서로 보내주고 높은 언덕에 올라 시를 읊는 풍습이 있었다.

 

백주시(柏舟詩)

시경(詩經)용풍(鄘風) 백주(柏舟)시이다. 이 시는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남편이 죽은 뒤에 재가(再嫁)에 불응하고 지은 시로, 미망인(未亡人)이 죽은 남편에 대해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읊은 내용이다.

 

백주지조(栢舟之操)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백주(栢舟)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절개를 지킨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가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시경(詩經)용풍(鄘風) 백주(柏舟)

 

백주편(栢舟篇)

시경(詩經)용풍(鄘風)의 편명이다. () 나라 세자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남편이 죽은 뒤에 친정 부모가 개가(改嫁)시키려 하자, 이 시를 지어 절개를 지킬 뜻을 다짐하였다는 데서 남편이 죽은 뒤에 개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백주풍(柏舟風)

남편을 여의고 굳게 수절(守節)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백주는 시경(詩經)용풍(鄘風)의 편명인데, 이 시는 위() 나라 세자(世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아내 공강(共姜)이 수절을 하고 사는데 그의 친정 모친이 억지로 그를 재가(再嫁)시키려 하므로, 그녀가 죽어도 재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백중(伯仲)

형제를 가리킨다.

 

백중구혹차(百中彀或差)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명사수인 예(羿)의 사정거리 안에서 노니는 자 가운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는 적중되기에 꼭 알맞다고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살을 맞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 然而不中者命也].”라는 말이 있다.

 

백중숙계(伯仲叔季)

()은 맏이, ()은 둘째, ()은 셋째, ()는 막내라는 뜻으로 네 형제의 차례를 일컫는 말이다.

 

백중지간(伯仲之間)

백중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로 형제는 비슷하고 닮았기에 비교 평가하여 우열을 각리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비슷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사이를 가리킨다. / 유의어: 난형난제(難兄難弟), 백중지세(伯仲之勢)

 

백중지세(伯仲之勢)

형제인 장남과 차남의 차이처럼 큰 차이가 없는 형세. 우열(優劣)의 차이가 없이 엇비슷함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에 형제의 순서를 백()ㆍ중()ㆍ숙()ㆍ계()로 일컬었었다.

 

백즉외탄지(伯則畏憚之)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대체로 일반 사람들은 돈이 많음이 10배이면 그를 비하하게 되고 100배이면 그를 경외하게 되며 1.000배이면 그에게 부림을 당하고 10.000배 그의 종이 되니 이것이 만물의 이치이다[凡編戶之民, 富相什則卑下之, 伯則畏憚之, 千則役, 萬則僕, 物之理也].”라는 말이 있다.

 

백지애매(白地曖昧)

까닭 없이 죄를 받아 재앙을 입음.

 

백착가(白著歌)

백착은 일정한 조세(租稅) 이외에 불법으로 더 징수하는 것을 이른다. 옛날 고운(高雲)의 백착가에 상원의 관리는 백성 벗기기만을 힘써서 강회의 백성들에겐 백착이 많다오[上元官吏務剝削 江淮之人多白著].” 한 데서 온 말이다.

 

백창(伯昌)

주나라의 문왕(文王).

 

백창경(白彰卿)

창경은 백광훈(白光勳)의 자()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

백 척 길이의 대가지 위에 서 있는 상태.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 이름을 말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더욱 분발함을 뜻이다.

 

백척난간(百尺欄干)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

 

백척루(百尺樓)

높은 누각으로, 전하여 높은 좌석에 비유한 것이다. 삼국(三國) 시대에 유표(劉表)가 유비(劉備)와 함께 천하의 인물을 논평할 적에 허범(許氾)이 말하기를 일찍이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 원룡(元龍)을 만나 보니, 그는 호해의 기백이 있는 선비라, 주객(主客)의 예의가 전혀 없어, 한참동안을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은 큰 와상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은 아래 와상에 눕게 하였다.”고 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가 만약에 당신을 소인으로 간주했다면 자기는 백척루 위에 높이 눕고 당신은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니, 어찌 위와 아래 침대의 차이뿐이었겠는가[如小人 欲臥百尺樓上 臥君於地 何但上下牀之間耶].”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卷七 진등전(陳登傳)

 

백첩(白疊)

무명(木棉)을 가리킨다.

 

백첩(白帖)

서명(書名)인 백공육첩(白孔六帖)의 준말로, 이는 당()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육첩(六帖) 30권과 송() 나라 공전(孔傳)의 속육첨(續六帖) 30권을 합해서 이를 1백 권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데, 곧 많은 분량의 서물(書物)을 의미한다.

 

백첩(白帖)

인이 없는 첩을 말한다. 상급관사에서 백첩으로 해당 관할 각사에다 영을 내리면 아전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간사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금하게 되었다.

 

백첩건(白疊巾)

무명으로 만든 두건

 

백초(白草)

변새(邊塞)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가리킨다. 백초는 서역(西域)의 목초(牧草)로서 다 자라면 희게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참고로 당() 나라 장적(張籍)의 시 양주사(涼州詞)봉림관 물 하염없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백초와 황유는 예순 해를 넘겼도다[鳳林關裏水東流 白草黃楡六十秋].”라는 구절이 있다.

 

백치(白雉)

흰 꿩으로 상서로운 새[祥鳥]라 한다. 소왕이 백치를 구하러 남으로 갔다는 고사가 있다.

성 위의 조그마한 담[女墻]을 치()라 한다. 문선(文選)』 「포조무성부(鮑照蕪城賦)

 

백치금성(百雉金城)

길이 1 백 장(), () 5 백 보() 규모의 견고한 성곽을 이름이니, 1치는 높이 1(), 길이 3장이다. 일설에는 길이가 5장이라고도 한다. 예기(禮記)』 「방기(坊記)

 

백치성(百雉城)

큰 성을 말한다. 1()는 높이가 1(), 길이가 3장이라 한다.

 

백타(白墮)

()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유백타(劉白墮)를 이른 말이다.

 

백타전(白打錢)

제기 놀이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는 돈을 말한 것인데, 제기 놀이를 백타라 한다.

 

백탁타(白橐駝)

() 나라 때의 재상 가서한(哥舒翰)이 일찍이 청해(靑海)를 진무할 적에 서울과 거리가 워낙 멀었으므로, 항상 사자(使者)에게 흰 낙타를 주어 일을 주달(奏達)하게 한 데서 온 말인데, 흰 낙타는 하루에 5백 리씩을 달렸다고 한다.

 

백탑(白塔)

요양(遼陽)의 구요동성(舊遼東城) 광우사(廣祐寺)에 있는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는 탑인데, () 나라 태종(太宗)이 요동을 경략할 때 울지경덕(尉遲敬德)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신들이 경유하던 곳이다.

 

백태부(白太傅)

벼슬 칭호이다. 그가 소나무를 사랑하여 벗으로 불렀다.

 

백토공(白兎公)

팽조(彭祖)의 제자라고 전해지는 선인(仙人)의 이름이다.

 

백판(白板)

하얀 판자로 만든 쟁반을 말한다.

 

백팔(百八)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게를 말한다. 청이록(淸異錄)黃大

 

백팔반(百八盤)

본디는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험난함을 형용하는 말인데, 흔히 고달픈 인생길을 비유한다.

 

백팔번뇌(百八煩惱)

108가지의 번뇌. , , , , , 뜻의 육근(六根)에 각각 고(), (),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거기에 탐(), 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것을 다시 현재, 과거, 미래에 풀면 108가지가 됨.

 

백팔음중지일심(百八音中只一心)

불가(佛家)에서는 인간 세상의 뭇 번뇌를 모두 108가지로 정리하고서, 이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108번씩 염주를 돌리고 종을 치는 의례가 있다.

 

백패(白牌)

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인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는 흰 종이의 증서.

일을 알리기 위하여 미리 보내는 공문.

 

백편지서(百篇之序)

() 나라 때 공안국(公安國)의 고문상서(古文尙書) ()상고의 글을 상서라 하는데, 백 편의 뜻을 세상에서 들을 수가 없다[以其上古之書 謂之上書 百篇之義 世莫得聞].” 한 데서 온 말이다.

 

백포(白袍)

거인(擧人)을 말한다. () 나라 때 선비들이 과거(科擧)를 볼 적에 모두 흰 도포를 입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백하(白下)

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서북에 있는 성() 이른다. 이곳은 백석(白石)이 많고 지대가 험고(險固)하여 외적(外賊)을 방어하기에 매우 좋은 요새라 한다.

 

백하(柏下)

묘지(墓地)를 가리킨다. 옛날 묘소에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백하골(柏下骨)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이른 말로, 두보(杜甫)의 촉상(蜀相) 시에 승상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꼬, 금관성 밖에 잣나무가 늘어선 곳이로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栢森森].” 한 데서 온 말인 듯하다.

 

백학(白鶴)

후한서(後漢書)』 「왕교전(王喬傳)()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과 숭산(崇山)에서 놀기도 하였다. 죽은 지 10년 뒤에 다시 그 산 위에 와서 환량(桓良)에게 우리집 사람들에게 77일 구씨산(緱氏山)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하라.’ 하였는데, 과연 그날 백학을 타고 왔다.” 하였다.

 

백학귀(白鶴歸)

단구(丹丘)는 우인(羽人)이 죽지 않고 산다는 선경으로, 사람이 득도(得道)를 하면 몸에 모우(毛羽)가 돋아난다는 전설이,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遠游)의 주()에 소개되어 있다.

 

백향산(白香山)

향산(香山)백거이(白居易)의 별호이다. () 나라 사람. ()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섭유옹(囁嚅翁), 시호는 문(). 한림(翰林)에 들어가 학사(學士)가 되고, 좌습유(左拾遺)로 옮겼다가 뒤에 죄를 받아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다. 만년에 뜻을 시주(詩酒)에 붙여 취음선생이라 칭하고, 또 향산(香山)의 중 여만(如滿)과 향화사(香火社)를 맺어,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문장과 시가 정교하였고, 특히 시는 평이한 것이 특색이었음.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호로, 이경석은 인조 24(1646)에 사은 겸 진주 정사로 청나라에 갔으며, 이때 김육은 부사로 갔다.

 

벽혈(碧血)

충신 열사 등 정대한 이들이 흘린 피를 말한다. () 나라 장홍(萇弘)이 진() 나라 범중행(范中行)의 난에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보관해 두니 나중에 푸른 색으로 변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인용: 哀魚將軍(이희풍)

 

백호(白琥)

호형(虎形)으로 된 백옥(白玉)으로 제사(祭祀)에 쓰는 옥이다.

 

백호(白毫)

불가(佛家) 용어로서 부처의 32()의 하나. 부처의 미간(眉間)에 있어 빛을 발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비춘다는 흰 털을 말한다. 부처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백호관(白虎館)

궁전 이른다. 후한 장제(後漢章帝) 때에 박사(博士)ㆍ의랑(議郞)ㆍ제생(諸生) 등을 여기에 모아 놓고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논의하여 바로잡게 했었다.

 

백호광(白毫光)

석가 삼십이상(三十二相) 중의 하나인 호상(毫相)인데 발산하면 밝은 빛이 나온다 한다.

 

백호담경긍수정(白虎談經肯數丁)

한 나라 때에 백호전에서 불경을 강론하는데, 정봉(丁封)이라는 사람도 참례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백호부(白虎符)

옛날 임금이 외방의 장수에게 주던 호랑이 모양의 병부(兵符), 반쪽은 조정에 보관해 두었다.

 

백호수(白虎宿)

28(宿) 중 서쪽 일곱 별인 즉, ()ㆍ누()ㆍ위()ㆍ묘()ㆍ필()ㆍ자()ㆍ삼()의 총칭, 백호는 범()으로 나타내며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한다.

 

백호준(白虎樽)

백호의 형상을 새긴 술그릇을 말하는데, 이는 곧 언관(言官)이 거리낌없이 백호처럼 용맹하게 직언을 하도록 상징한 것이라 한다. 송서(宋書), “신정(新正) 원회(元會)에 백호준(白虎樽)을 전정(殿庭)에 설치하는데 뚜껑 위에다 백호를 만들었다. 만약 곧은 말을 아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에 든 술을 먼저 마시게 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맹렬하기 범과 같아서 겁냄이 없으란 뜻이다.” 하였다.

 

백호통(白虎通)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찬한 책으로 모든 고증의 근본이 된다.

 

백혼무(伯昏瞀)

춘추 때 사람으로 백혼 무인(伯昏無人)이라고도 하는데 초() 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정() 나라 자산(子産)의 스승이었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열어구(列禦寇)」 「전자방(田子方)

 

백홍관일(白虹貫日)

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는 옛날에 형가(荊軻)가 연() 나라 태자 단()의 의리를 사모하여 길을 떠났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白虹貫日) 일이 성사되지 않을 줄 알고 태자가 두려워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백화(白花)

끓여낸 차에 뜬 거품을 말한다. 노동(盧仝)다가(茶歌)碧雲引風吹不斷 白花浮光凝碗面이라 하였다.

 

백화(白華)

시경(詩經)의 편명. 효자의 결백을 노래한 것인데, 현전하는 책에는 일실(逸失)되어 있다.

 

백화난만(百花爛漫)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게 흐드러짐.

 

백화제방(百花齊放)

많은 꽃이 일제히 핀다는 뜻으로 갖가지의 예술이나 학문이 함께 활발하는 것을 비유한다.

 

백화향(百和香)

여러 가지 향()을 합해서 제조한 향을 말한다.

 

백후(伯厚)

김육(金堉)의 자()이다.

 

백휴(伯休)

후한(後漢) 한강(韓康)의 자()이다. 장안(長安)의 저잣거리에 몸을 숨기고 30년 동안 똑같은 값으로 약을 팔아 생활하였는데, 아녀자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것을 알고는 패릉(霸陵)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113

 

백희(百戱)

갖가지 곡예, 잡기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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