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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일체개고와 쇼펜하우어, 문명사적 맥락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은 ‘일체(一切)’가 다 ‘고(苦)’라는 뜻입니다. ‘고(苦)’ 즉 ‘두흐카(duḥkha)’라는 것은 아비달마 문헌에서는 ‘핍뇌(逼惱)’라고 번역했는데 ‘핍박하여 고뇌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하여튼 ‘괴롭다’는 뜻이지요. ‘일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은 ‘존재함’ 그 자체가 고라는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일체라고 한다면 우주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삼법인에 미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아~ 우주가 팽창하느라고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뿐만 아니지요. 우..
행(行)과 연기(緣起)의 의미 기실 일체개고와 제행무상은 한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제행이 무상하면 모든 것이 ‘고(苦)’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제행의 ‘행(行)’은 우리말로는 ‘간다’는 뜻이지만, 그 원어인 ‘삼스카라 (samskāra)’는 ‘드러난 것’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며 ‘제행(諸行)’은 나의 인식 세계에 드러나는 모든 현상(phenomena)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사물, 사건, 그 모든 것은 항상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찰나찰나 변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제일 먼저 깨달은 진리는 ‘연기’라는 것인데 ‘연(緣)’이라는 것은 원인의 뜻이고, ‘기(起)’라는 것은 연으로 해서 ‘일어나는’ 결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사물도 그것..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사법인) 우리는 지금 여기서 선(禪)을 얘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불교의 근본교리, 그 근원적 지향성을 우선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의 교리에 관한 천만 가지 법설이 난무하지만, 나는 여러분께 내가 불교학개론 첫 시간에 배운 누구나 쉽게 접하는 세 마디를 우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특징 지우는 세 개의 인장과도 같은 것, 바로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사실 이 삼법인이라는 것만 정확히 알아도 불교에 관한 모든 논의는 종료됩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해체계에 이 세 개의 도장만 확실히 찍히면 확고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신학에는 이런 식의 확고한 기준이 되는 법인(..
임제 법문의 궁극적 의미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성상태현(性相台賢, 성은 법성法性을 말하며 삼론종三論宗을 의미, 상은 법상法相을 말하며 유식종을 의미, 태는 천태종天台宗, 현은 현수종賢首宗, 즉 화엄종華嚴宗을 의미한다)의 불교경전을 골고루 섭렵하였으며, 그 이전에 이미 유교의 기본경전과 도가의 경전들을 통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책을 읽고 사색한다는 것 자체가 좌선의 용맹정진과 똑같은 삼매(三昧)입니다. 어떻게 지식을 배제하고 높은 선경(禪境)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이렇게 생각해보죠. 선종의 마지막 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은 이렇게 말했어요 야 이놈들아! 불법이란 본시 힘쓸 일이 없나니라 단지 평상심으로 무사히 지내면 되나니라 너희들이 옷 입고 밥처먹고 똥 싸고 오..
교와 선, 이와 사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불교를 선종이니 교종이니 운운하고, 이판(理判, 좌선수행을 주로 하는 선승)이니 사판(事判, 조직운영을 책임지는 살림꾼들)이니 하여, 분별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합니다. 불교사를 다루는 데 있어 방편적으로 쓰지 않을 수 없는 개념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敎)’와 ‘선(禪)’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교종ㆍ선종을 운운하기 전에 불교 그 자체를 고구(考究) 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는 학승은 선경이 높질 못하고, 좌선만 하다가 득도했다 하는 스님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고 스님들이 서로서로 비난하는 소리가 잘 들려와요. 선과 교를 분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이런 ..
법상종과 댜나의 음역 속에 겹친 속뜻 그리고 이 학파는 법의 본질(性, 성)을 다루지 않고 법이 드러나는 의식의 현상(相, 상)을 다루기 때문에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 말이 다시 너무 학술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만, 겉으로는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요가행파’ ‘유식종’ ‘법상종’은 거의 같은 말이라고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법상종(유식종)에 의하여 아주 복잡한 불교 인식론이 만들어졌고, 선의 궁극적 의미도 이러한 인식론적 바탕을 이해해야만 확연하게 풀린다는 것만을 얘기해놓고 넘어가겠습니다. 단순히 선사들의 공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선(댜나), 삼매, 요가 등등은 본시 인도사람들의 생활습관 속에 배어 있는 수행방식일 뿐, 그것이 그러한 생활습관과 분리되어 있는 어..
선불교와 선, 삼매, 요가의 뜻 선불교는 물론 인도불교에 없는 개념이고, 인도불교사에는 선종이라는 종파가 성립한 적이 없습니다. 기실 선불교라는 것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점점 중국적인 풍토와 언어와 심성, 그리고 사회적 여건에 적응하여 간 종국에, 다시 말해서 인도불교의 중국화과정 (Sinicization process)의 정점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불교의 모습일 뿐이죠. 불교의 변화상(變化相)일 뿐이죠. 산문적인 불교가 운문적인 불교로, 논리적인 불교가 초논리적 불교로, 논술적인 불교가 시적인 불교로, 다시 말해서 산스크리트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가 고전중국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로 변해가는 과정의 극단적 사례가 선불교의 제반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禪)’이라는 말은 본래 그 자체로 ..
한국의 불교는 선불교가 아니라 통불교이다 내가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에 관해서 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제 함구불언(緘口不言)하려 합니다. 내가 얘기하려 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문벌싸움, 일종의 불교종파주의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계에서 도를 닦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소개하고 싶었고,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이야말로 당ㆍ송의 불학을 뛰어넘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과 가치와 느낌의 결정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죠.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새로운 정신사적 활로라는 것을 이 조선땅의 미래세대들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 내가 택한 불교의 진리체계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서의 서론이 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론인 『반야심경(般..
성철 스님의 입장 성철은 불교정화운동의 한복판에서 계율적인 엄격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경허 - 만공계열의 선풍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막행막식이 새로 태어나는 순결한 비구종단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1947년 봉암사결사를 묘사한 글을 보면 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목표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성찰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매우 고귀한 측면이 분명 있고, 정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줄기 순결한 빛줄기로서 큰 효용이 있었습니다. 그러..
해인사 반살림 그런데 이 90일간의 싸움기간 동안의 한 중간이 되는 45일을 ‘반살림’ 또는 ‘반결제’ 라고도 부릅니다. 그때에는 시작이 반인데 이미 반을 잘 채웠으니 나머지 기간도 아무런 마장(魔障)이 없이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큰 행사를 합니다. 성찬을 준비하여 대중공양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방장스님께서 설법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대의 해인사 총림 방장스님은 성철(性徹, 1912~1993, 경허 스님 돌아가신 해에 태어남)이라는 분이었는데, 해방 후 정화운동과정을 통하여 한국불교, 특히 비구승단의 중심점이 되신 분으로 엄청난 권위를 축적해온 거목이었습니다. 학인들은 감히 궐내에서 고개 들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서슬퍼런 존재였습니다. 법문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웅전 앞마당 삼중석탑(三重石塔)이 있..
안거 ‘안거(安居)’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문자 그대로 ‘편안히 거한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낸다는 뜻입니다. 사실 초기 인도불교승단에서는 6월 초부터 9월까지 약 3ㆍ4개월 동안 몬순기(monsoon期, 남서 계절풍이 부는 인도의 우기)가 지속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바깥출입을 금하고 한 곳에 정주(定住)하여 수행에 전념토록 한 승단의 법규를 의미했습니다. 비가 내리면 저지대에 있는 개미, 파충류들이 모두 고지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유행(遊行)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거는 본래 우안거(雨安居)였고, 이 우안거는 여름 한 철의 하안거(夏安居)밖에는 없었습니다. 동안거(冬安居)가 ..
마조와 은봉 지앙시(江西)의 어느 절, 비탈길, 어느 젊은 스님이 손수레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 비좁은 비탈길 아래 켠에 거대한 체구의 노장 조실스님이 다리를 뻗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젊은 스님은 수레를 몰고가면서 황망히 외쳤습니다. “스님! 스님! 수레가 내려갑니다. 비키세요! 뻗은 다리를 오므리시라구요[청사수족請師收足]!” 조실스님이 눈을 번뜩 뜨면서 말했습니다. “야 이놈이! 한번 뻗은 다리는 안 오무려[이전불축已展不縮].” 그러자 젊은 스님이 외칩니다. “한번 구른 수레는 빠꾸가 없습니다[이진불퇴己進不退].” 아뿔싸!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조실스님의 발목을 깔아뭉개고 말았습니다. 딱 부러진 발목을 질질 끌고 법당에 들어간 조실스님, 거대한 황소 같은 체구에 호랑이 같은 눈을 부라리며 씩씩 대..
명진의 이야기 기실 나는 명진의 삶의 일대기에 관해 자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구요. 성인으로 만나 생각이 통하고, 인품의 질감을 통해 교제하는 것뿐이지요. 명진에게는 당대의 여타 스님과는 달리 강렬한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중이라 하면 쉽게 ‘도 닦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가치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아는데, 명진은 근원적으로 ‘도를 닦는다[修道]’하는 것을 공동체적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동의 사회적 선(Common Good)을 위하여 자기를 내던지는 일상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이지요. 명진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핏 경상도 액센트가 강한 것처럼 들리는데, 기실 그는 충청남도 당진(唐津) 신평면(新平面)..
정화운동(1954~62)의 한계 사실, 해방 후에 이승만정권이 종교를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저질스러운 짓들을 많이 하면서 오히려 기독교, 불교가 다 같이 망가져갔습니다. 청담이나 성철 스님으로 대변되는 불교정화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그 내면에 ‘봉암사결사’와 같은 훌륭한 정신도 있었지만 결국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불교계의 자생적 자정 노력이 펼쳐지지 못한 채, 공권력의 폭력에 의존케 됨으로써 결국 파행적인 해결책만 도모되었고, 불교정신 자체의 타락만 초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총무원장이라는 권좌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저열한 스님들의 행태에까지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 내가 ‘진짜 중’이라는 말 한마디의 의미를 풀려고 했다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이제 그 의미를 말해보도록 하죠...
경허의 선풍이 20세기 조선불교를 지켰다 경허라는 존재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조선왕조가 하나의 문명체로서 그 유기체적 수명을 다해가는 그 처참한 쇠락의 폐허에서 피어난 화엄(꽃)이라는 데 있습니다. 1910년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제령 7호(총독부령 83호)로서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반포하였습니다. 경허는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시적(示寂)하였습니다. 그 뒤로 한국불교는 30개의 본ㆍ말사체계로 개편되면서 조선총독부의 행정체계 하에 소속되었고 대처가 장려되었습니다. 한국불교를 근원적으로 왜색화시키려는 다양한 조처가 취해졌지만 크게 생각해보면 겉모양상의 변화와는 달리 그 내면의 불교정신은 일제강점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었..
만공과 동학사 야간법회 경허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설 속에서 시비ㆍ포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포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경허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죠.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경허라는 한 인간의 개별적 이야기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표하는 시대정신(Zeitgeist), 한국불교의 새로운 분위기, 그 심오한 선풍(禪風)의 클라이막스를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공이 동학사에서 진암 스님을 모시고 행자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이때 경하는 동학사를 떠나 천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허는 진암 노스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어린 만공은 9척 거구의..
묘령의 여인과 경허 이제 마지막으로 한 소식만 더 하고, 나도 이 버거운 깨달음의 이야기들을 벗어날까 합니다. 동학혁명의 열기도 가라앉고, 해월이 교수형을 당한 무술년(1898) 겨울 어느 날, 찬바람이 무섭게 불어제치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는 저녁 무렵 천장사를 찾아든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자기로 감싼 이 묘령의 여인은 두 눈만 보일 듯 말 듯 내놓은 채, 그 초라한 행색이 걸인에 다름없었습니다. 경내를 몇 번 살피다가 두리번거리더니 경허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 밖에 누가 왔느냐?” “여보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경허가 방문을 여니 여자는 온몸을 떨며 서있었습니다. “스님 제발 저를 방안으로 좀 들어가게 해주세요. 추워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아요. 스..
법문과 곡차 그의 제자 만공이 전하는 얘기가 이런 맥락에서 참 재미있습니다. 천장사에 어떤 사람이든 스님을 찾아와서 간곡히 불법(佛法)의 도리를 물으면 종일 그대로 앉아 있고 일체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곡차를 가져와서 올리면 곡차를 자시고 난 후에는 종일이라도 법문을 하시었다고 합니다. 만공이 손님들이 간 후에 스님께 항의했습니다. “스님은 항상 만인평등을 가르치시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편벽하십니까?” 경허 스님의 대답은 천하의 명언이었습니다. 만공의 생애를 지배하는 일언이었지요. “아이 이 사람아! 법문이라는 것은 술김에나 할 짓이지, 맨 정신으로는 할 게 못 돼!” 만공은 이 말씀에서 불법의 깊이를 득파하였다고 합니다. 인용 목차 반야심경
49재: 윤회사상과 적선지가, 향아설위 경허의 말에 강 부자는 감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허의 말은 진정성이 배어있어 타인을 설득하고 굴복시키는 힘이 있었지요. 빈 제사 상에 울려퍼지는 독경소리는 더욱 그윽하고 성스러웠습니다. 49재를 기쁜 마음으로 올리고 난 강 부자는 경허에게 시주를 위해 돈보따리를 내어놓았습니다. “대사님 법문 덕분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극락왕생하시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그 보답으로 시주를 더 내놓고 가겠습니다.” “절간에 재물이 쌓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외다. 이 돈으로 인근 30리 굶주린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시는 것이, 훗날 강 선생님께서 극락왕생하시는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사님, 저도 이 천장사 부처님께 시주를 해서 복을 좀 지어야..
49재 고사 1883년 5월경이었습니다. 5월은 ‘보릿고개’라 하여 일년중 밥을 먹기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의 부인의 친할머니가 의주사람이었는데 당시 실제로 보릿고개를 초근목피를 삶아먹고 넘겼다고 했습니다. 그 정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초근목피 먹고 대변보는 것이 애기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는 소리를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당시 민중들은 산나물로 죽을 쑤어 연명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는 것이었습니다. 경허는 사미승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지요. “뭔 일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꼬여드는고?” “모르고 계셨습니까? 오늘 법당에서 큰 제사가 있습니다. 읍내에서 제일가는 갑부 강 부자댁 아버지 49재가 있는 날이지요.” “49재를 올리는데 사람들..
경허의 보임과 1880년대 조선민중의 처참한 생활 자아! 다음의 보다 사회적인 맥락이 있는 고사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경허가 천장사에 간 것은 일차적으로 보임(保任, 보림이라고도 말함)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임 혹은 보림이라는 것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인데, 대오를 한 후에 그 경지를 보호하고 지속시키기 위하여 당분간(보통 1년 동안) 특별한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하는 연암산 지장암이라는 토굴로 들어가 손수 솜을 놓아 두툼한 누더기옷 한 벌을 지어 입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꼬박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1년을 지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오줌, 똥, 밥 먹는 것, 자는 것, 세부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원칙이 있었을 것이지만 경허 스님이 신체를 컨트롤 하는 능력은 현..
방하착의 의미와 조주의 방하저 이 고사는 제가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때 중국철학사를 듣다가 ‘방하착(放下着)’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고승의 실례로서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나의 평생을 지배하게 된 위대한 일화였죠. 여기 이 설화의 핵심은 ‘내려놓았다’라는 한마디입니다. 경허는 여인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여인을 ‘내려놓았다[放下].’ 경허에게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미는 이 여인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계속 낑낑대면서 등에 업고 가는 것이죠. 선종에서 잘 쓰는 말로서 이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실상 ‘방하저’로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착(着)’은 본동사가 아니고 조사이며, 진행을 나타내거나 명령, 권고를 나타내는 조사(助詞..
천장사와 개울을 건넌 이야기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장사(天藏寺)라는 곳은 경허보다 먼저 출가한 친형 태하(여러 문헌에 ‘太虛’로도 ‘泰虛’로도 기술되고 있다) 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친어머니가 바로 그곳에서 공양주보살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하지만 이제 경허 스님 이야길랑 끊어야 할 것 같네요. 사실 경허의 삶의 모든 굽이굽이가 더할 나위없는 위대한 공안이며 우리에게는 『벽암록(碧巖錄)』보다 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나의 도반 명진이 ‘진짜 중’이라는 말 한 마디를 하고파서 얘기가 여기까지 만연케 되었는데, 경허의 삶의 이야기를 마감 짓기 전에 몇 가지 일화만 소개할까 합니다. 경허가 천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해 무덥던 여름, 하루는 어린 사미..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허의 오도송의 중략된 부분 속의 언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를 즐기지만, 나는 경허의 오도송의 핵심을 ‘춘산화소조가(春山花笑鳥歌), 추야월백풍청(秋夜月白風淸)’ 운운하는 데 있지 않고 처음과 끝의 탄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전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있을 때 그 깨달음의 경지가 스스로 이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의 깨달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공감의 전입이 가능한 그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만큼 경허의 깨달음은 지존한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이것은 진정 성우 경허의 대오의 경지를 나타내는 확철한 고독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경..
고삐와 고삐 없는 소 ‘무비공(無鼻孔)’이 아니라 ‘무천비공(無穿鼻孔)’이라는 말이죠(경허의 오도송에 ‘무비공’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무천비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콧구멍을 뚫는 ‘코뚜레’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죠. 소는 원래 힘이 세고, 거대한 동물이라서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소가 맹수라면 호랑이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소라는 거대한 동물이 그토록 유순하게 인간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동물이 된 것은 바로 고삐(코뚜레와 당기는 줄을 합한 개념)의 발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비공을 뚫는다’는 것은 두 콧구멍 사이의 ‘비중격(鼻中隔)’을 뚫는 것인데 그곳은 너무 깊어도 아니 되고 너무 얕아도 아니 됩니다. 비중격막은 얇아서 뚫기에 적합한 곳이지만..
성우(惺牛)로 다시 태어나다 경허의 웃음은 이제 범부의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이 순간 경허는 자신의 새로운 법명을 ‘깨달은 소’ 즉 ‘성우(惺牛)’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맑디맑은 빈 거울’이라는 뜻으로 법호를 ‘경허(鏡虛)’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법명, 법호가 모두 스스로 새로 지은 것이죠. 이것은 실로 조선불교의 새출발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자~ 여기 명료하게 풀어야만 할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많은 사람들의 병폐가 한문을 명료하게 따져 읽고 해석치 못하고 두리뭉실 적당히 자기류의 해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보통 경허의 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콧구멍이 없는 소’ 운운해버리는데 ‘콧구멍이 없는 소’라는 것은 SF영화에나 가능한 가상일 뿐, 실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비공처(穿鼻孔處)가 없는 소 절깐에 돌아온 사미는 이 진사의 설화(說話)를 스님들께 여쭈어 보았 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주 화상께서 아무리 선공부에 열심, 망식(忘食)중이라 해도, 발분(發憤)하여 진리를 고구(考究)하고 계신 중이니 스님께 가서 직접 여쭈어보는 것이 가(可)하다.” 사미 원규는 경허가 폐침망찬(廢寢忘餐) 용맹정진 하고 있는 방 앞에 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용감하게 묻습니다(원규는 훗날 동은화상東隱和尙이라는 큰 스님이 된다). “천비공처(穿鼻孔處)가 없는 소가 된다, 도대체 이 말이 뭔 뜻이오니이까?” 이 말을 방안에서 듣고 있던 경허! 그 순간이 경허의 진정한 득도의 찰나였습니다. 가장 정통적인 경허행장을 쓴 한암은 이와 같이 이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부처들이 태어..
경허의 용맹정진과 이 진사의 문안 그리고 강원의 강백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전국 각지에서 스님에게 경전을 배우겠다고 몰려든 학인들에게 강원의 폐쇄를 선포합니다. 만화 스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강원을 폐쇄하고 학인들을 다 흩어지게 하였으니, 만화 스님으로서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더니 내가 왔는데도 나오지 않겠는가?” “죄송하옵니다. 스님.” “강원을 폐쇄하고 학인들을 다 흩어지라고 했다는데 사실인가?” “죄송한 일이오나 그렇게 했습니다. 스님.” “네 이놈! 감히 누구 맘대로 강을 폐하고 학인들을 내보낸단 말이냐?” “죽은 문자에만 매달리고 경구에만 눈이 멀어 더 이상 허튼소리를 지껄일 수 없습니다. 스님!” 확철하게 깨닫기 전에는 일체 세간에 나오지 ..
말로 설파한 생사일여, 정말 생사일여냐? 공포와 오한에 떨며 느티나무 등걸에 기대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찬란한 아침 햇살이 동욱의 적삼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동욱 은 갑자기 산다는 게 무엇이냐, 죽는다는 게 무엇이냐, 내가 『금강경』을 운운하며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자신있게 강론했건만 지금 죽음의 귀신이 그토록 무서워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니, 도대체 내가 20년 넘도록 쌓아온 지식의 공덕이 뭔 소용이냐, 온갖 상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강백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고 뜬구름처럼 보였습니다. 『법화경』의 오묘한 비유들을 그토록 재미있게 설파하고, 『화엄경』의 선재동자의 모험을 그토록 환상적으로 그려나갔건만 지금 이 내 꼬라지가 무엇이냐? 정말 내가 무주(無住, 집착..
동학 전도의 비결: 콜레라 여기에 핵심적인 ‘물이나 음식을 반드시 끓여 먹으라’라는 명제가 빠져있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미생물학의 성과가 전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태였습니다. 그러나 ‘연병윤감’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괴질은 전염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전염루트를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무서운 통찰력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음식물이나 물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놀라운 형안이 있었던 것이죠.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1864년 대구 남문밖 관덕당 뜰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죠. 그 당시 동학교도는 전체 3천 명 정도였고 교조의 죽음으로 뿔뿔이 흩어져 세력은 쇠미했습니다.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
해월과 경허, 그리고 윤질 콜레라 지금 동욱이가 자기 옛 스승을 찾아나선 이 시기는 바로 동학의 제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포접제도를 활용해가면서 가열차게 동학사상을 민중의 삶 속으로 침투시키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1880년에는 강원도 인제 갑둔리에서 우리민족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동경대전(東經大全)』 최초의 목판본이 간행됩니다. 탄압 속에서 간행된 이 경전이야말로 우리민족 근대정신의 정화라 할 수 있습니다. 해월(海月, 1827년생)과 경허(鏡虛, 1849년생)! 나이는 해월이 한 세대 위이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같은 민중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허는 철저히 개인적이며 내면적 수양을 통해 새로운 정신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고, 해월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사..
콜레라균의 19세기 역사와 소독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불행 기실 ‘호열자(虎列刺)’라는 이름을 썼다면, 그것은 이미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내가 경허의 대화내용에서 “호열자” 라는 말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실상 1879년 당시에는 조선에 호열자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의학계에는 ‘사기(邪氣)’라는 막연한 개념만 있었지 ‘미생물(microorganism)’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콜레라균은 현미경을 통해보면 그냥 육안으로 쳐다볼 수 있는 하나의 독립된 생물체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곽란(霍亂)을 일으킬 정도로 감염되려면 최소한 1억 개, 많으면 100억 개의 콜레라균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콜레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호열자? 죽음의 귀신?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쭈뼛, 동욱의 의식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가 엇갈렸지요. 이 동네를 내리 깔고 있는 죽음의 적막, 그 실체를 알고 나자 엄습하는 것은 공포였습니다. 그 순간, 살고 싶으면 멀리 도망치라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든 말든 맨살이 터져 피가 배어나는 것도 모르고, 오직 죽음의 영역을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먼 언덕바지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 기대어 한숨을 돌렸을 때, 공포와 피곤의 극에 달한 동욱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그냥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호열자(虎列刺)’라는 말은 본시 콜레라(Cholera)의 음역에서 생겨난 말이에요. 끝 글자가 원래는 ‘호열랄(虎列剌)’인데 ‘어그러질 랄[剌]’..
천안에서 만난 귀신 혼자 터덜터덜 발걸음을 재촉하여 천안 풍세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한문표기로는 ‘豊歲’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릴 적부터 ‘풍새’로 발음).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고 억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광풍을 피하기 위해 어느 집 대문 앞 추녀 밑에 서있다가 아무래도 그칠 비가 아니라서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그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가 한참 후에나 빼꼼 집 대문이 열렸어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문 좀 열어주오.” “아니, 도대체 누구간데 이 빗속에 대문을 두드리시오?” “예, 저 지나가는 객승이온데 ……”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쾅 닫고 빗장을 지르면서 빨리 가버리라고만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황당했지만 뭔가 속사정이..
경허 동학사에 오다, 구척 장신의 강백 경허가 천리길을 걸어 동학사에 당도한 것은 1862년 바람결이 쌀쌀한 늦가을이었습니다. 만화 스님은 몇 마디 건네보고 동욱이가 진실로 큰 그릇임을 알아차리지요. 만화 스님은 아낌없이 동욱에게 불교경전의 묘리를 다 가르칩니다. 동욱이는 『능엄경』, 『대승기신론』, 『금강경』, 『화엄경』, 『묘법연화경』,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이며 대승의 교리를 집대성한 『원각경」, 선문의 공안을 집대성한 『선문염송』 등을 다 깨우치고, 강원의 대교과(大敎科)에 이르는 4단계의 교육과정을 예리한 기억력과 한학의 소양에 힘입어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모두 마칩니다. 경 허가 동학사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지 9년째, 스물세 살의 경허는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되었고, 학승으로서, 그리고 경지..
계허와 만화 계허 스님은 동욱이가 박 처사 밑에서 글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가르칠 능력이 없으니 모르는 체한 것이죠. 계허 스님은 동욱의 향학열을 막고싶지는 않으셨을 거에요. 보통 스님들 같으면 “아~ 이놈! 속가의 알음알이를 익혀서 사람 버리겠다”하고 몽둥이를 들 것입니다. 그러나 동욱이의 한학 경지가 높아지는 것을 감지한 스님은 동욱이가 스님이 안되고 한학자가 될까봐 두려워, 자기의 도반으로(어릴 때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건봉사는 고성군에 위치)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던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있으며 서쪽 자락에 있는 갑사甲寺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한다)의 만화(萬化) 스님에게 동욱이를 보냅니다. 동욱이는 청계산에서 동학사까지 도대체..
경허의 죽음 이 점에서 보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를 산 경허의 삶은 돋보이는 것이 있지요. 바로 경허처럼 단단한 학식, 그것도 한학의 기초를 다진 스님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죠. 경허는 세칭 이단비도(異端非道)의 스님, 막행막식의 선승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경허처럼 무서운 학승이 없고, 그의 싯구에 담긴 한학의 소양은 그저 흉내만 내는 스님들의 화려함이 미칠 수 없지요. 경허가 64세(1912년) 함경도 삼수갑산 도하동 어느 글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죽어갔을 때, 그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만공이 이렇게 읊었어요. 遷化向甚麽處去 천화향심마처거 아~ 우리 선생님이 가셨다니 어디로 가셨을꼬 酒醉花面臥 주취화면와 아~ 술에 취해 꽃밭에 반드시 누워계시겠지 물론 경허는 술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러..
천자문 돈오와 불교와 한학, 그리고 해석학적 방법론 사실 경허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 순간이야말로 스님의 거창한 오도송(悟道頌)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성철당이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보다 더 돈(頓)한 개안의 순간이었죠. 어린 경허는 박 처사라는 사람 밑에서 체계적으로 문자수업을 받게 됩니다. 박 처사는 당대 조선유학의 정통을 잇는 대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경허라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이 유학자와의 만남이었을 겁니다. 경허는 이 박 처사 밑에서 사서삼경은 물론 『사기』ㆍ『한서』ㆍ『후한서』, 그리고 『노자』ㆍ『장자』 등의 도가경전까지 다 배우게 됩니다. 경허가 짧은 시간에 이것을 다 통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그가 청계사에 머문 것은 5년 가량이다) 어린 시절에 이..
독경하고 싶거들랑 천자문부터 밥 짓고 나무하고 청소하고, 행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절깐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동욱은 나는 언제나 중이 되려나, 언제나 큰 스님처럼 저렇게 염불을 근사하게 할 수 있으려나 하고, 틈이 나는 대로 대웅전 옆문에 귀를 바짝 대고 서서 스님 염불소리를 주의 깊게 귀담아듣곤 했습니다. 그 선망의 발돋움은 참으로 순결한 것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이 와서 말을 겁니다. “아니 동자 스님, 법당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뭘 하시는 거예요?” “아~ 우리 스님 독경하시는 걸 잘 들어두었다가 나도 하려구요.” “원 참 동자 스님두, 아 ~ 독경이야 글로 배우셔야지, 귀동냥 가지고 배워지나요?” “글로 배우다니요?” “거 왜 있잖아요. 하늘 천 따 지 하는 천자..
경허 송동욱 조선조 말기에 서산의 맥을 이은 자로서 참으로 존경스러운 한국불교의 거목이 한 분 태어납니다(편양언기鞭羊彦機 계열이다). 경허(鏡虛, 1849~1912)라는 문제인물로 인해 조선불교의 선풍이 크게 진작되게 되죠. 경허는 헌종 15년(1849년 기유己酉: 일지一指는 1846년 병오丙午설을 주장. 나는 방한암의 「선호경허화상행장先呼鏡虛和尙行狀을 따른다)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여산 송씨 두옥(斗玉)을 아버지로, 밀양 박씨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는데 분만 후 사흘 후에나 울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다음 해는 헌종이 죽고, 강화도에서 나무꾼 노릇을 하던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죠. 이 강화도령 철종의 시대야말로 우리민족이 근대를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이 방치되어..
서산과 삼가귀감 서산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는 서산이 원효나 보조 지눌에 비해 좀 지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생각이 바뀌었어요. 서산은 수행자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지만 매우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선(禪)ㆍ교(敎) 양면을 깊게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ㆍ『유가귀감(儒家龜鑑)』ㆍ『도가귀감(道家龜鑑)」이라는 책을 썼는데,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이 책들을 원문으로 다 통독을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 당시는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어요. 우선 책의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고 느꼈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여러 번 읽으면서 서산은 진정으로 유ㆍ불ㆍ도 삼가(三家)를 회통(會通)한 대사상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간결한 언어 속에는 무궁한..
거시기와 예수, 거시기와 철학 거시기를 ‘예수’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똑같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거시기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곧 예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내가 곧 십자가를 멘 예수가 될 때에만이 그리스도(구세, 救世)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서산이 말한 거시기를 ‘철학’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봐도 동일하죠. 제가 철학과를 들어갔을 때는 물론 ‘철학(philosophy)’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철학자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저 거시기 초상화가 걸려있듯이, 도상화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상체계, 그림화 될 수 있는 언어의 건물을 완..
서산의 입적시 서산은 하나의 승려로서, 하나의 사상가로서 매우 심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 쓴 시만 보아도 그 인격의 깊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선조 37년[1604]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는 엄청나게 많은 제자들이 시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글을 따로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했습니다. 그리고 설법을 마치자 자기의 영정(초상화)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걸개 뒷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입적의 순간에도 이러한 적멸송(寂滅頌)을 쓸 수 있는 정신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도 죽는 순간에 이런 시 한..
임진왜란과 승과 사실은 ‘진짜 중’ ‘가짜 중’ 얘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르고 말았는데, 하여튼 조선불교의 대맥(大脈)은 서산이 승통을 일으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사실 의승군에 기꺼이 목숨을 바친 스님들의 열렬한 소망은 단 하나였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국난을 계기로 해서라도 승과가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생들에게 교육과 출세의 길로서 주어지는 과거시험과도 같은 승려들의 과거시험(승과僧科, 고려시대에는 승려가 국사가 될 수 있는 존엄한 국가제도로서 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폐지되었다가 명종 6년에 부활됨.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다시 폐지된다)이 부활되기를 갈망했던 것이죠. 선조(宣祖)야말로 이 승과를 부활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
서산과 해남 대둔사 서산은 살아있을 때, 해남 대둔사(대흥사)를 여러 번 간 것 같습니다. 말년에도 노구를 이끌고 갔던 것 같습니다(세부적인 일정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 지역을 많이 다닌 것은 확실하다. 나는 대둔사도 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입적하는 그날 아침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 내 의발(衣鉢, 법통의 상징)과 주상이 내린 교지를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게 하고, 제사를 주관케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ㆍ정조 시기에 대둔사에 휴정, 유정, 처영 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건립됩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목숨을 바친 무명의 승려들, 이순신(李舜臣)이나 유생들은 후손이 있어 제사라도 모시지만 후손이 없는 이 무명의 승려들의 고혼(孤魂)은 지금까지도 흠향을 받지 못하고 ..
유정의 눈부신 활약상도 제대로 기록 안 됨 사명대사 유정의 이러한 엄청난 외교적 성과도 유신(儒臣)들의 시기 때문인지 『선조실록』에 언급조차도 없습니다. 참 치사한 놈들이지요. 『수정선조실록」에나 간단히 실렸을 뿐이지요. 하여튼 서산대사는 선조(宣祖)가 무사히 서울로 환궁한 후(선조 26년 10월), 곧바로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갑니다. 의승군(義僧軍)의 지속적인 관리는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에게 맡기고 세속에서 떠납니다. 건방지게 관복 입고 말 타고 다닌다고 씹어대는 벼슬아치놈들의 꼬락서니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겠지요. 떠나는 서산을 선조는 붙들지 않습니다. 떠나는 서산에게 선조는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
이순신을 도운 승군의 활약상, 유정의 위대한 마무리 이순신(李舜臣) 이 그 처절한 명량해전을 치를 수 있었던 것도 조직력과 희생을 불사하는 탁월한 정신력을 갖춘 승군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년 동안의 참혹한 전화 후에도 그것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능력이 국가에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전후에 복구대책이나 방비사업도 서산대사의 수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이 주도하였고, 일본에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까지 만나고 조선인 3천여 명을 귀환시키는 대사업을 마무리 지은 것도 유정이었습니다. 실제로 3,500명 정도의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킨다는 문제가 얼마나 방대한 국가 대 국가 규모의 사업인가, 그것은 일본측의 극진한 성의와 외교적 예우가 없이는 근원적으로 이루어..
말 탄 서산을 끌어내리는 유생들 지금 조선시대의 불교가 얼마나 고난의 길을 걸었는가, 그리고 그 고난 때문에 얼마나 순결한 선가(禪家)의 맥을 이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려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고 말았는데,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서울이 수복된 후, 서울의 치안을 돌보기 위하여 궁궐 밖에서 승군들과 함께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서산은 당연히 이미 74세의 노구에 병까지 얻은 상태였기 때문에 말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신(朝臣)들이 그 앞을 걸어가면서 비위가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말도 못 타고 걸어가면서 서산대사를 치켜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은 터무니 없는 악담을 늘어놓습니다. 휴정은 오직..
적서지별이 망국지본이 되다 혹자는 선조(宣祖)의 옹졸한 마음이, 조선왕조 왕위계승역사에 있어서 그가 최초의 서자(전대의 왕인 명종은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그 전 왕 중종의 서손庶孫인 하성군河城君이 왕위에 올랐다. 하성군이 바로 선조이다)라는 특이성, 그 불안감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하죠. 동학운동의 리더인 해월 선생은 적서지별(嫡庶之別,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망가지본(亡家之本)이요, 반상지별(班常之別, 양반과 상놈의 구별)은 망국지본(亡國之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적서의 차별은 왕가 내의 분위기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나봐요. 하여튼 선조는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고, 학식도 뛰어났고, 또 글씨도 잘 썼어요. 서산대사의 품격을 알아보고 그를 선대(善待)한 것이 국난을 당해 큰 도움을 얻게 된 것이..
선조의 애ㆍ증 콤플렉스 정여립(鄭汝立)이 과연 국가를 전복시킬 만한 혁명의 모의를 했을까? 그 진정한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하여튼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그 왕조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1천여 명의 쟁쟁한 인물들이 도륙 당했습니다. 진실로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비극이 없었습니다. 동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날벼락이었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시인 정철(鄭澈)이 이 기축옥사를 주도했는데 너무도 가혹하게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난리통에 어느 스님이 서산대사 또한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가담했다고 하면서 대사가 쓴 구절 하나를 증거로 제출하..
선조와 서산대사의 인연 영규 스님이 거느린 승병 800여 명이 금산전투에서 거의 전원 용감하게 전사함으로써 끝내 금산을 탈환하고야 만 처절한 상황을 보고받은 선조는 승군이야말로 국가수호의 효율적인 방편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선조(宣祖)는 평양성까지 내버리고 북쪽 국경지대인 의주로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국 스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묘향산의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묘향산의 별명이 서산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에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휴정이 그의 법명이다.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완산 최씨)를 의주로 부릅니다. 휴정은 이미 그때 나이가 73세였습니다. 선조와 서산대사는 그 전에 안면이 있었습니다. 서산대사는 3년 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혀있..
비겁한 유생들의 작태 이토록 찬란한 전과를 기록한 승군과 영규대사의 활약상을 보고하면서도 유생들은 이들에게 상이나 주고 빨리 환속(還俗)시키라고 권고합니다. 다시 말해서 승군의 조직력이 두려운 것이죠. 그러한 조직을 격려하고 합심하여 국난을 국복해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기에 승군이 어떤 정치세력을 형성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죠. 청주성의 회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체 전세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결정적 호운의 기세였습니다. 왜군들은 청주에서 서남으로 곧바로 내려가 호남곡창지대를 장악할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승군이 청주를 탈환하여 그 계획을 무산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순신(李舜臣)의 해군도 호남의 지지기반을 상실함으로써 무기력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후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
영규대사: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 최초의 승군은 무술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충남 공주사람 영규(靈圭) 대사였습니다.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했고, 휴정(休靜, 서산대사) 문하에서 법을 깨우친 큰 인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3일을 통곡하고 승병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승병장이 됩니다. 승군 800여 명을 이끌고 청주로 진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1592. 음8.1)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을 기록합니다. 조선에서 가장 강한 장군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 대장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끝까지 사력을 다해 분투하다가 자살하고만(1592. 음4.28)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 민중들에게, 영규대사의 청주탈환이야기는 환호작약할 수밖에 없는 희..
임진왜란: 멸사봉공의 자비 스님들은 출가자이기 때문에 우선 가족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산사에서 살면서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무술과 날랜 체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좌선과 무술은 같은 정신수양방법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조직력이 있었고, 상하명령계통이 매우 질서있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禪)의 수행은 영활(靈闊)한 정신력을 길러줍니다. 스님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이겠으나, 기실 대규모 살생을 목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왜군을 죽이는 것은 살생이라는 개념에 해당될 수가 없습니다. 선종의 교리로 본다면 죽이는 자나 죽임을 당하는 자나 모두 공(空)일 뿐, 오직 더 큰 살..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물론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상은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눈부신 기적적 대첩으로 기록될 만한 위대한 것입니다. 비슷한 시대의 엘리자베스여왕 때 영국의 제독들이 스페인의 막강한 무적함대를 무너뜨린 것보다도 더 극적이고 통쾌한 전승이었습니다(‘무적함대Grande y Felicisima Armada’라 해봤자 130개의 배로 구성된 것이었고, 스페인측의 총 전사자는 2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 의 활약상은 어디까지나 바다 위에서 펼쳐진 것이죠. 물론 이순신의 제해권(制海權)은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의 보급을 차단시키는 효과가 컸기 때문에 해전의 승리는 육지의 싸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실 이순신 장군과 똑같은 무게를 지니는 명장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진짜 중과 가짜 중 요즈음 가깝게 지내는 도반(道伴, 길을 같이 가는 사람)으로서 명진(明盡)이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진짜 중’ 이지요. 스님에 대해 진짜다. 가짜다 이런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고, 또 그런 분별심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좀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진짜다’ ‘가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식적 기준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세상에 하도 가짜 중, 가짜 목사, 가짜 무당, 가짜 교주들이 많기 때문에 내가 어렵게 얘기를 하지 않아도 ‘가짜’가 무엇인지는 일반대중이 더 먼저 정확히 알아요. 나는 결코 스님의 정신적 경지의 고하(高下)를 가지고 가짜다 진짜다라는 말을 쓰지는 않아요. 그것은 스님의 ..
엄마의 공안 나는 그 길로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스님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나는 승복을 입고 옛 스님들이 쓰던 큰 삿갓을 눌러 쓰고 광덕사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풍세천을 걸어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에게 다 공손하게 절을 하는 거예요. 꼬부랑 할머니들까지! 이때 나는 우리나라에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선문명의 여파를 절실하게 느껴보았습니다. 풍세에서 천안까지 시외뻐스를 탔고, 천안에서 서울까지 그때 갓 개통이 된 한진고속뻐스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신촌, 어머니가 계신 집까지 승복을 입은 채 달려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을 기독교에 헌신한,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아니 심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
새색시의 인가 그 다음날 아침, 나는 바지는 중옷을 입고, 윗도리는 흰 난닝구 하나 걸친 채로 별당과의 반대편으로 나있는 계곡(안산으로 올라가는 계곡)을 올라갔습니다. 그 계곡에는 당시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계곡 아래쪽에 서너 채가 있었고 꼭대기에 또 서너 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한 채의 매우 정감이 서린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올라가려면 반드시 들를 수밖에 없는 집이었죠. 남서향에 툇마루가 반듯하고 불 때는 부엌이 옆으로 있는 전형적인 초가집이었어요. 저는 그곳 툇마루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부엌에서 아주 인상이 밝고 젊은 새색시 같은 여인이 나오는 거였어요. 아마도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집 며느리 같았어요. 그런데 저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
소쩍새 울음의 신비 이렇게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나는 잊지 못할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밤, 별당에 촛불을 켜놓고 앉아(당시 물론 전기가 그곳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좌선을 했습니다. 한밤중에 홀로 거대한 세 부처님 좌상 앞에서 좌선을 하는 영광이랄까 유아독존이랄까요? 일종의 포만감, 고독감, 정결한 느낌, 뭐 그런 것들이 어린 나를 휘감았습니다. 정말 열락(悅樂)이 따로 없었어요.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제가 쌍가부좌를 틀고 오지게 정진을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쌍가부좌를 튼 몸이 쌍가부좌를 튼 채로 부응 뜨는 것이었습니다. 서서히 공중으로 부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올라가더니 가운데 부처님 얼굴 앞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살아 움직이더라구요. 그리고 부처님과 대화를..
별당 용맹정진 대웅전 뒤로 산허리에 높게 자리잡은, 웅장한 세 부처님을 모셔놓은 별당이 있었는데(그 전각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실상 당시에 별당은 대웅전보다도 더 고취가 풍기고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별당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별당이야말로 나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죠. 매일 청소를 하고, 하루종일 시간이 나는 대로 앉아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쌍가부좌를 틀다가, 반가부좌를 번갈아 틀다가, 일어나서 걷다가 하면서 하루종일 좌선을 했지요. 스님들에게 좌선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좌선의 당면한 목적은 일단 사유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콧구멍에 장미꽃잎을 대어도 그것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셔라! 그리고 숨..
첫 만남의 충격적 인상: 이것은 반불교다! 여러분들께 나의 모호한 감성에서 부각되는 전혀 새로운 논리를 이 프롤로그에서 전달한다는 것에 관해 뭔가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 드는군요.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라는 젊은이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주제의식이 강렬하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쉽게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많은 내용을 전달하지 말고 간결하게 나의 견해를 밝히자! 이런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반야심경』 260자를 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간결한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사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선 제가 『반야심경』을 만나게 된 최초의..
최초의 해후: 『반야심경』 밑씻개 어느 날 똥을 누느라고 변소깐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였죠. 그때는 변소깐도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것이고 퇴비 만든다고 아래가 다 터져 있었죠. 변을 보느라고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이상한 문자들이 내 눈에 띄었어요. 밑씻개로 신문쪽지나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반야심경』이 쓰여진 종이쪽지였습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반야심경』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것을 스님들이 염불로서 암송한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것이 진언(眞言, Mantra)이나 주구(呪句)와 같은 기호의 나열이지 그 자체로 의미를 전달하는 평범한 문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자아~ 이게 웬일일까요? 한 글자 두 글자, 센텐스 바이 센텐스, 주어..
광덕사로 가는 길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주지 스님도 안 계셨고 거의 폐찰에 가까울 정도로 쇠락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광덕사 주변이야말로 천안호도과자가 유명하게 된 그 호도의 원산지입니다. 호두나무가 꽉 들어차있는데, 호두나무잎에서는 매우 싱그러운 향내가 납니다. 그 냄새는 정말 좋아요.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냄새를 모기가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두나무숲에는 모기가 없는 편입니다. 정말로 광덕사에는 모기가 적었습니다. 풍세면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부터는 풍세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천변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 풍요로운 농촌의 광경이 있고 그 사이로 풍성한 수량의 풍세냇갈이 흐르고 있습니다. 천안 부근에는 물이 박합니다. 오직 광..
철학을 전공하다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다시 편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이미 삶의 깊은 고뇌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적으로 선택한 철학의 길이었기 때문에,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 철학과 학생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나의 주체적 삶의 체험 속에서 철학적 진리를 용해(鎔解)시키려고 맹렬하게 노력했습니다. 신학에서 철학으로 제가 문학(問學, 묻고 배우다)의 길을 바꾼 이유는 실로 매우 단순했습니다. 신학은 전제가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무전제의 학문이었습니다. 철학과 3학년 때의 일이었죠. 불교학개론은 이미 저학년 때 들었고, 3학년 때 노장철학과 대승불학을 들었습니다. 점점 불교학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져감에 따라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실제로 스님이 되어 체험해..
1장 프롤로그 인연 나는 충남 천안시 대흥동 23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상경하여 보성중ㆍ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병이 깊어져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을 했습니다. 낙향한 후로도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그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천안의 고교생들을 상대로 영어성경을 강의했습니다. 나는 그때 신약성경(RSV영어성경판) 전체를 류형기 주석서와 함께 다 읽었고, 예수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목회자로 이끌고 계시다, 그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길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자신의 신앙과 판단에 따라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蜜多 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께서 피안(彼岸)에 도달할 때에 다섯 가지가 모두 공(空)한 것임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과 액란을 제도하였나니라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 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사리자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이와 같으니라.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사리자여! 이 모든 오온(五蘊)에서 구분하여 둔 색. 수. 상. 행. 식의 그 낱낱과 같은 모든 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