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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 “우선 『예수의 신비』의 저자들은 4복음서가 모두 사도바울의 편지 이후에 성립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들의 새로운 창안이 아니고 매우 정통적인, 그러니까 초대교회사를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예수의 전기로서 우리는 우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세 복음서는 공통된 관점에서, 그러니까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세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공관복음서의 원형을 이루는 「마가복음」조차도 사도바울의 죽음 이후에 성립한 것이 확실하며, 연대..
예수 신화의 변용과 재생산 “바로 프레케와 간디는 그 역사적 이유를 소상하게 규명할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애초로부터 사실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지중해연안문명에 공통된 신화양식의 유대사회적 변용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의 시대는 싯달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시대보다는 몇 세기나 늦은 인류문명의 꽃이 만개한 시대이며, 불교사로 본다면 대승불교운동이 본격적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줄리어스 시이저 등, 플루타크(Plutarch, c. 46~119이후 죽음)의 『영웅전』(Bioi parallēloi, Parallel Lives)에 나오는 인물들이 활약하던 시기를 지나 제국문명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와 로마를 넘나들며 활약했던 플라비우스 요..
예수와 신화 "저는 최근에 『예수의 신비』(The Jesus Mysteries)라는 책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인류문명의 다양한 신비주의를 폭넓게 연구한 두 영국학자, 프레케(Timothy Freke)와 간디(Peter Gandy)의 역저인데, 예수라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건이 아니고 신화적으로 구성된 픽션에 불과한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가설을 설득력 있고 치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문헌학의 획기적인 대발견이라고 불리우는 나하그 함마하디 영지주의 문서(the Nag Hammadi Gnostic Library)의 연구성과와 그동안 우리에게 무시되어 왔던 지중해 주변의 토착문명의 신화적 세계관의 매우 복잡한 연계구조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성과를 반영한, 단순한 가설 이상의 치..
붓다는 존재한 인간인가? 나는 사실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미국서 큰 사람도 아니고 미국교육이래야 6년간 박사공부를 한 것 뿐이다. 나는 한국말을 가장 잘 한다. 그것은 우선 한국말이 자유자재롭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영어를 하는 데도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든지 영어로 전달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난 영어로 말하는 동안에 내가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냥 되는 대로 적당히 뇌까린다. 나의 거침없는 서두로 좀 장내가 숙연해진 듯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인도를 오게 된 것은 명백하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 목적은 ‘역사적 붓다’(Buddha as a historical p..
위대한 출발 인도인들은 간지스 강 가트 건너편의 땅을 ‘사악한 땅’이라 불렀다. 그러나 싯달타는 바로 그 땅을 정토로 만들었다. 수보리야! 간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간지스 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간지스 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하지 않겠느냐? 須菩堤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 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금강경』 제11분이 묘사하고 있는 그 현장, 바로 그 카시의 간지스 강 모래밭. 사악한 땅의 모래밭에서 정성스럽게 두손모아 기도하고 있는 저 여인을 보라! 나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 많은 승려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 중 나에게 인사를 한 사람은 라크도르(Lhakdor)라는 승려였다. 라크도르는 달라이라마의 지..
무비스님과의 일문일답 나는 원전의 의미도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매우 평이하고 편안하게 서술되어 있는 책으로서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라는 책을 만났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의 『금강경 강해』 속에서 무비스님의 책에 많은 도움을 입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 놓았다. 그러나 나는 구체적으로 무비스님의 신상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如幻)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해인사강원을 나왔고, 구한말 대유 최익현의 학맥을 이은 한학자였으며 대학승이었던 탄허스님(呑虛, 1913~1983)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분이라는 정도의 간단한 이력만 알고 있었다. 나는 무비스님이 만나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만날려면 많은 시간을 일부러 소요해야 하는데 여기 보드가야에서 한 호텔에 묵고 있는 터에 모르..
번역과 문명 2002년 1월 11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다행스럽게도 걱정스러웠던 감기 몸살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침, 호텔에 있는 신문들을 들추어보니 어제 수자타 아카데미 살인사건이 사방에 크게 보도되고 있었다. 어젯밤, 수자타호텔을 들어섰을 때 나는 갑자기 부산말을 하는 보살님들 수십 명에게 둘러 싸였다. 나는 우리나라 여자들 중에서 매우 특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이북에서는 평양여자, 이남에서는 부산여자를 꼽는다. 평양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잘 생겼고 거침이 없으며 말을 잘한다. 그리고 사람을 제압하는 힘이 있다. 부산여자들도 거침이 없이 말을 잘하며, 옆에 있는 사람들을 공연히 들뜨게 만든다. 부산여자들은 신바람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개방적이며 애교가 만점이다. 평양여..
생과 사의 찰나 황혼에 석양이 걸렸을 무렵, 우리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군과 남군이 미스터 타클라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알현시간을 확정했다. 내일 큰 행사가 있는데 그 전에 달라이라마께서 식사를 좀 일찍 끝내신 후 날 만나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궁 앞으로 1시까지 오면 된다고 하였다. 드디어 면담시간이 확정이 된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난 매우 기뻤다. 날뛸 듯이 기뻤다. 난 결코 달라이라마를 내 마음속에 우상처럼 모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한 위대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이 그지없이 기뻤다. 하나의 정치적 리더로서 생각을 해도 달라이라마는 20세기로부터 21세기에 걸친 세계의 최장기집권자이다. 1951년 집정하여 2002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났던 모든 정치적 지도..
여자 법사님의 푸대접 수자타 아카데미를 돌아볼 때에도 사실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자 법사님께 점심공양은 하셨습니까 하고 오히려 내 쪽에서 슬쩍 떠봤는데, 그 법사님은 다음과 같이 냉랭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11시 반이면 점심공양이 다 끝나요. 학생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기 때문에 인도식 수제비로 점심을 들지요. 그런데 선생이나 학생이나 모두 똑같이 먹습니다. 예외가 없지요. 지금은 공양시간이 지나 부엌에 사람이 없습니다.” 예외가 없다는 말의 여운이 좀 께름직 했다. 그러면서 마당에 널린 배추밭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아카데미에서는 배추를 길러 김치를 담궈 먹습니다. 요번에도 김치를 많이 담궜는데 내일 모레 개교기념행사를 치르려고 항아리를 봉해 놓았습니다. 그..
룸비니의 총각김치 “무조건 이 차를 돌려 대성석가사에 대라!” 죽으면 죽었지 우리 총각김치나 한번 먹고 가자! 오늘 국경을 못넘으면 내일 넘지! 호텔값이야 날리면 그뿐 아닌가? 서울 강남 서초구 끝자락에 우면산이라는 유서 깊은 산이 있다. 그 밑에 예술의 전당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전당 뒤쪽으로 돌아 산허리를 올라가면 대성사(大聖寺)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은 바로 백제에 불교가 초전된 터에 세워진 사찰인데 그 대성사에는 도문(道文)스님이라는 도력이 고매하고 행보의 스케일이 매우 크신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다. 그 도문스님 문하에서 아까 말한 법륜스님, 그리고 법성스님, 보광스님과 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룸비니의 대성석가사는 도문스님 문하에서 이루어..
네팔 카필라바스투 강행군 지난 1월 5일 나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를 가고 있었다. 현재 룸비니는 인도에 있질 않고 네팔에 있다. 그런데 인도에서 네팔국경을 건너는 문제도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항상 쓸데 없는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많이 따라 다니기 때문이다. 고락크뿌르(Gorakhpur)를 아침에 출발하여 네팔국경을 넘어 룸비니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였다. 우리는 그날로 다시 고락크뿌르로 내려와 쿠시나가르까지 가는 여정을 짜놓았다. 호텔이 모두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스케쥴 변경은 항상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네팔에 있는 카필라바스투를 꼭 둘러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봐야만 나는 원시불교의 많은 문제에 관한 나의 사색의 확고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
수자타 아카데미 수자타 아카데미(Sujata Academy)는 한국의 제이티에스(JTS, Join Together Society)라는 국제복지기관이 1994년 1월에 바로 부처님의 고행지였던 시타림ㆍ전정각산 주변 척박한 지역의 주민들을 위하여 개교한 학교다. 제이티에스는 한국의 불교단체인 정토회 산하기관이다. 그런데 정토회는 80년대 초반부터 법륜스님께서 구심점이 되어 이끌어오셨는데, 의식있는 젊은 불자들의 호응이 높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취약점이라 할 수 있는 사회의식의 빈곤을 매우 조직적으로 극복해나간 훌륭한 사회활동단체로서 평가받고 있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했을 때는 그런 사회의 진취적인 흐름과 보조를 같이 했을 뿐 아니라, 9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그러한 운동의 에너지를 인권ㆍ복지ㆍ환경의 ..
엘리자베쓰와의 인터뷰 “인도에 와봐야 비로소 인간의 고통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정말 카르마(Karma, 業)의 이론의 정당성이 리얼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러한 모든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는 열쇠가 내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티벹불교가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우리는 기독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데 종교적인 차원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콘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상태를 항상 개선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벹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콘트롤하..
헤어드레서 엘리자베쓰 나는 암도식당을 나왔다. 암도 수제비에 좀 실패를 했기 때문에 2차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 옆의 포장마차 문깐에서 한국글씨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호미 까페(Homy Cafe)라는 간판 밑에는 한국글씨로 ‘수제비, 빈대떡, 만두, 만두국, 볶음밥, 생선튀김, 감자 튀김, 닭고기와 샐러드’라고 쓰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사람들의 구미를 좀더 잘 이해하는 곳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도 식단의 가격은 대체로 10루삐 전후였다. 그런데 이곳은 서양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서양인들은 대체적으로 우리보다 검약하다. 나는 야채만두와 소고기 수제비를 또 시켰다. 그런데 내 옆을 힐끗 쳐다보니까 세명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데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남자는 동양계 청년..
뺨따귀를 쳐올리던 여학생 어저께 보드베가스에서 있던 일이다. 우리 식탁 옆에는 아주 명랑하고 맹랑하게 생긴 성신여대생 한 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티벹의 라사를 다녀서 인도로 넘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일화를 그 학생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티벹여행을 하는데 우연스럽게 일본의 멀쑥한 대학생 청년 두명과 함께 내내 동반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차간에서 갑자기 한 일본청년이 묻더라는 것이다. “저는 정말 이해 못하는 게 있는데요, 왜 만나는 한국사람마다 암암리에 일본사람들을 적대시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일본사람들을 싫어하죠?” 이때 이 여학생은 돌연하게 그 일본청년을 꿰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제가 이해시켜 드리죠.” 그 순간 이 여학생은 ..
중국의 티벹 동화정책의 명과 암 이군과 남군을 데리고 나는 암도라는 천막촌 식당에 들어섰다. 늦은 시간인데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모습에 좀 놀랐다. 나는 음식만은 깨끗하게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인도여행을 통해 최고급 레스토랑만을 고집했다. 대개 5성급 호텔에 속한 식당들이었다. 평균 한끼에 2천루삐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런데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암도식당내의 모든 메뉴가 10루삐 전후라는 사실이었다. 한끼가 10루삐로 해결될 수 있다니! 신라호텔 최고급식당과 서울 뒷골목 포장마차집의 가격의 차이가 심하다 해도 2000 : 10이라는 차이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고급레스토랑만 고집했던 나의 아집을 후회했다. 2000 : 1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도인들의 현..
접견 전날밤의 풍경 우리는 수자타 집터가 있었다는 동산에서 아주 영어를 썩 잘하는 귀여운 꼬마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눕 꾸마르(Anup Kumar)라는 이 소년의 별명을 ‘수자타동생’이라고 지었다. 나는 이 날 오후 늦게라도 법륜 스님이 계신 수자타 아카데미(Sujata Academy)를 들려올 생각이었다. 수자타동생이 마침 수자타 아카데미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운전사 고삐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밤이 늦어지면 이 지역에서 산길을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우리 차가 토요타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고 외국인이라는 것이 완연해서 곧 낙살리떼(naxalite, 산적)의 공격타게트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는 비하르(Bihar)다. 우리는 밴디트 퀸(Bandit Q..
수자타의 마을, 우루벨라의 정경 우리는 차를 타고 다시 나이란쟈나강을 건넜다. 원시경전에 우루벨라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는 수자타의 마을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수자타의 마을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무엇인가 포근한 고향의 품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태고적부터 같은 탯줄로 이어져 내려왔던 어떤 동포(同胞)의 숨결이라고나 할까? 사방에 어린 아이들이 내가 어릴 때 놀았던 것과 똑같은 ‘자치기’를 하고 있었고, 또 한구텡이에서는 제기를 차고 있었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탈곡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너무도 나의 고향같이만 느껴지는 유족한 농촌의 풍경이었다. 둥글둥글 거대하게 쌓아놓은 짚더미 사이로 우리나라 토종과 똑같이 생긴 황소들이 음메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들은 우리와 똑같은..
보드베가스의 세자매 보드베가스의 아침 겸 점심은 날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밥ㆍ국ㆍ김치였다. 너무도 단순한 식단이었지만, 너무도 행복한 식단이었다. 남군은 여행동안 보플거리는 남방의 알랑미를 아주 못견뎌 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기름기 없는 쌀의 묘미를 잘 안다. 그런데 남군은 계속 선 밥을 먹으니까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보드베가스의 딸들에게 쌀 물을 좀 많이 넣고 오래 푹 삶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알랑미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쌀밥처럼 푹 익은 쌀밥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남군은 좀 진 듯한 밥을 먹으면서 무척 행복해 했다. 나는 좀 게짐짐했지만 미역국을 실컷 들이키면서 목젖의 카랑한 기운을 쫓아내느라고 안깐힘을 썼다. 보드베가스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도여행 매..
찢겨진 돈뭉치 그런데 또 다시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인도에는 10루삐권이 있는가 하면, 20루삐권, 50루삐권, 100루삐권, 500루삐권이 있다. 인도인들은 ‘노’(No!)를 말하는 법이 없다. 무슨 부탁을 하든지 된다고만 하지 안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알아새겨야 한다. 안된 일에 대해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즉 그들이 말하는 ‘옛스’의 ‘노’적인 측면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놈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 인도사람들은 비율적으로 다리가 엄청 긴 편이다. 그래서인지 변기의 위치가 우리나라보다는 매우 높게 달려있다. 좋은 변소에서는 손을 씻고 나면 종이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럼 돈을 주어야 한다. 피곤할 땐 그 사람은 변소바닥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인도인..
환전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이군은 이 호텔을 델리에서 예약했어야 했고 이미 대금은 선불해놓은 상태였다. 칼라차크라 행사 때문에 숙박시설이 모두 만원이었던 것이다. 인도인의 수중에 어떤 돈이든 한번 들어가면, 그것이 다시 나오리라는 생각은 해서는 아니된다. 바라나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중에 인도돈이 없으니까 너무 불편해서 미화 한 1500불 정도를 바꿀 요량으로 인도의 국립은행(State Bank of India)엘 들어갔다. 국립은행이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수표를 카운터에 쓰고 있는데 갑자기 기관단총을 든 경찰들이 날 둘러싸고 어디로 가자는 것이다. 왜 그러냐니까 조사할 게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난 흉악한 도둑놈으로 몰린 느낌이었다. 영문을 알아보니 나의 여행자수표에 문제가 있었다..
사암 한기 속의 꿈 2002년 1월 8일이 드디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기나긴 사색의 하루였다. 주욱 사지를 뻗고 편안케 자려는데 예상했던 대로 한기가 엄습했다. 기분나쁜 사암의 한기가 살기(殺氣)로서 뼈 속까지 쑤시고 들어오는 것이다. 몸서리쳐지는 음산한 느낌이었다.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갑자기 엄마하고 마포에 새우젖을 사러갔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마포 어귀에 늘어선 새우젓 독… 뭔가 그런 몽롱한 느낌 속에 갑자기 달라이라마를 만났다. 달라이라마께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그의 발 밑에 두 번이나 엎드려 큰 절을 했다.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서 엎드린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다. 난 얼굴을 치켜 들면서 달라이라마님께 여쭈었다. “제 편지를 받아 ..
라면이 살린 목숨 “최영애 선생님께 중국어를 들었어요.” 어딜 가나 한국여행객들과 부딪치게 마련이다. 연대 인문학부 4학년의 여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도 남루한 여행객 복장을 하고 있는 나를 어둠 속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도올서원 10림입니다.” 남녀 커플로 온 젊은이들이 또 인사한다. 그 남학생이 도올서원에서 나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동안 도올서원에서 한 3천여 명의 제자들을 키워내었다. 요즈음 내 인생의 보람이란 이들에게 거는 기대밖에 없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젊은이들의 품성을 길러주고 지식을 전수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하보디 스투파(stūpa)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혹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불교순례객들..
혜초스님의 감회 탑 주변으로 높게 쌓아올린 탑돌이를 할 수 있는 4각형의 길이 있었다. 달라이라마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해서였는지 어느 린포체가 무제한 촛불공양을 했다고 했다. 밤에 오는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양초를 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초에 불을 붙여 사방에 켜놓는다. 영롱한 촛불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즉상입의 장엄한 인드라망의 화장세계(華藏世界)였다. 나는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을 방문했던 우리의 선조 혜초스님께서 남기신 5언 싯귀가 생각이 났다.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마하보리사를 내 이역만리가 멀다하지 않고 왔노라! 이제 저 카시에 있는 녹야원을 어찌 멀다 하리오?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단지 걸린 길들이 험한 것이 근심일 뿐, 가고자 하는 내 뜻은 바람에 휘날린 적이 없노..
아쇼카와 마하보디 스투파 싯달타가 앉아 있었던 그 보리수나무가 지금도 있는가? 아쇼카왕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분명 그 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아쇼카는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자기 아들 마힌다(Mahinda 혹은 Mahendra)와 사랑하는 딸 상가밋타(Saṅghamitta)를 팔리어삼장을 외우는 법사들과 함께 보낸다. 아쇼카는 이 보리수나무가 박해받을 운명을 직감하고 그 사랑하는 딸 상가밋타의 손에 이 보리수나무 묘목을 하나 쥐어주었다. 보리수나무에 담긴 지혜도 함께 전파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이곳 보드가야 보리수가 이교도들의 박해로 잘려나가자, 상가밋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심은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또 다시 이 곳으로 옮겨다가 심었다는 것이다. 오..
싯달타의 체취를 간직한 아쇼카 나를 감동시킨 것은 4대성지 그 자체가 아니라 우뚝 우뚝 서 있는 아쇼카석주였다. 그것은 너무도 리얼했다. 그것은 너무도 생동하는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런데 또 경악할 만한 사실은 이 생동하는 역사의 증인조차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우리가 붓다의 생애의 연대를 고증할 때 현재 쓰고 있는 자료가 모두 아쇼카를 기준으로 해서 역산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디파왕사』(Dīpavaṃsa)와 마하왕사』 (Mahāvaṃsa)에 의하면, 붓다는 아쇼카왕의 대관식해보다 298년 먼저 태어났고 218년 먼저 서거했다는 것이다. 아쇼카왕의 대관식해는 326 BC로 되어 있으므로 붓다의 생몰은 624~544 BC가 된다. 그런데 희랍측의 자료에 의하면 아쇼카왕의..
아쇼카의 석주 인도는 역사를 쓰기가 매우 어렵다. 소위 연대, 크로놀로지(chronology)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가치관은 세속에 있질 않았다. 항상 이 세간을 벗어나는 해탈(解脫, mokṣa)에 있었으며 그것은 시간의 초월이었다. 따라서 세속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자기의 생애를 무한한 억겁년의 윤회의 한 고리로 파악하기 때문에 지금 현 생애의 정확한 시점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연대나 저자(author)의 개념이 박약했다. 진리는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특정적으로 독점하여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거지들이 계속 따라붙으면 “다음에 보자!” “다음에 주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
스투파와 차이띠야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33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다. 부처님 뼈가 들어있으면 그것을 스투파라 부르고, 부처님 뼈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차이띠야라고 부른다.有舍利者名塔, 無舍利者名枝提. 『大正』22-498. 이러한 『마하상기카 비나야』(Mahāsāṃghika Vinaya, 摩訶僧祗律)의 언급이 정확한 구분기준으로 지켜졌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부처님의 뼉다귀를 얻지 못한 많은 탑들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방증해 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탑의 성격이 부처님의 무덤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의미로부터 점점 추상화되고 형식화되고 상징화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시 스투파(stūpa)는 승가와 특별한 관련이 없이,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독자적으로 유지된 오픈 스..
아이콘과 비아이콘 2002년 1월 8일밤, 나는 마하보디사원의 스투파(stūpa)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기나긴 논의의 결론은 이러하다. 소승ㆍ대승을 막론하고 원시불교의 모든 종교운동은 스투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투파란 무엇인가? 스투파는 탑이다. 탑이란 무엇인가? 탑이란 부처님의 무덤이다. 부처님의 무덤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향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스투파는 원시불교에 있어서 비아이콘적인 형상(aniconic imagery)으로서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물론 스투파 외로도 부처님 발자국(footprint)이라든가, 보리수나무(the Bodhi Tree)라든가, 부처님이 앉아 계셨던 금강보좌(the Adamantine Seat, ..
탑중심구조와 불상중심구조 감은사지의 가람배치는 향후의 모든 가람의 심층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탑의 순수조형성으로서의 전환은 동아시아문명에 상륙한 스투파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우선 스투파를 스투파이게 하는 그 핵심적 의미체인 싯달타 육신의 뼉다귀 원품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과, 이미 대승불교 초기로부터 반야사상의 흥기는 스투파공양에만 집착하는 미신적 성향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켰다는 것, 그리고 중국인의 현실주의적 감각은 스투파라는 추상체보다는 인간중심적인 불상의 형상을 선호했다는 것,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권에 있어서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권과 결합이 불가피했다는 것, 등등의 이유로 스투파는 『대반열반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러한 원래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를 통해 쌍탑의 구..
한국 탑문화의 발전과정 이러한 석탑의 성격과 의미의 변화는 가람배치 전체에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초기부터는 이미 쌍탑식 가람배치가 모든 사찰의 디프 스트럭쳐로 자리잡게 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망덕사(望德寺)의 쌍목탑체제를 거쳐 감은사(感恩寺)의 쌍석탑체제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쌍탑의 존재와 더불어 3금당체제 또한 1금당체제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1탑1금당의 구도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탑이 두개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 1탑의 구조에 비하여 그 탑중심 배치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금당이라는 사실은 곧 1탑의 중심구조자리에 금당이 환치되면서 쌍탑은 그 금당을 보좌하는 순수한 조형적 건조물로서 개념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목탑을 본뜬 석탑의 출현이 만든 변화 미륵사지, 뒤의 삼각산이 곧 미륵하강의 용화산 금당이란 후대의 권위주의적인 대웅전과는 대비되는 소박한 불당의 개념인데, 당시에는 금동부처를 금인(金人)이라 불렀고, 그 금인이 앉아있는 집이라 해서 금당(金堂)이라 이름한 것이다. 금당의 존재는 이미 불상중심의 대승불교 건축개념이 도입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가람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탑이며,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금당은 탑의 부속건물적 성격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원시불교의 탑중심의 체제가 아직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멸망해가는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지었다 하는 미륵사는,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목탑중심체제에다가 양옆에 목탑의 복제양식인 석탑을 세움으로써 스투파 개념의..
탑중심의 가람배치 속리산 법주사에 가서 팔상전 5층목탑을 보면서 누가 산치대탑 스투파를 연상할 것인가? 팔상전 5층누각 꼭대기를 잘 살펴보면 그 정수리에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복발(覆鉢)이 있으며 그 위에 보륜(寶輪)의 장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꼭대기의 눈꼽만한 장식품들이 산치대탑같은 스투파가 퇴화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 왼쪽 사진이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인데 이것이 곧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이다. 이 팔상전을 미루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알 수 있고, 황룡사 9층탑을 미루어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의 원형인 9층 목탑의 구조를 알 수 있다. 황룡사(皇龍寺)의 가람배치를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9층목탑이 중심이고 그 위로 동(東)ㆍ서(西)ㆍ중(中)의 세 금당(金堂)이 자리잡고..
전탑, 목탑, 석탑 우리에게 친근한 예로써 이 스투파의 원형에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이 바로 경주 분황사(芬皇寺)탑이다. 우선 분황사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의 일반형태와는 달리 모전석(模塼石)이긴 하지만 작은 벽돌들을 쌓아올렸다는 것과, 그 형태가 중국에서 발전된 누각의 형태가 아닌 돌무덤 스투파의 원형에 가깝게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황사의 발굴터를 보면 그 전체 가람의 배치가 1탑중심이라는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되어야할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하는 것은 석탑이지만, 그것은 실상 순수한 석탑이 아니고 목탑의 형태를 돌로 옮겨놓은 것이다. 목탑이 석탑화되는 가장 초기의 장중한 실례가 바로 익산의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이며, 이 석탑의 발전적 형태로서의 단..
부록 8.2. 미륵하생의 신앙이 박힌 익산 미륵사지 이러한 종교적 사상의 근원을 떠나 순수하게 건축학적으로 미륵사를 고찰하면, 황룡사의 일목탑삼금당(一木塔三金堂)의 체계를 일목탑이석탑삼금당(一木塔二石塔三金堂)의 체계로 변조시키면서 생기는 파격성을 회랑을 둘러침으로써 완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원(一院)의 구조는 탑일금당(塔一金堂)의 가장 보편적인 백제가람전통을 계승한 것이 된다(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정림사지가 모두 일탑일금당의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일목탑이석탑(一木塔二石塔)의 삼탑(三塔)체제는 매우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목탑이 석탑화되는 최초의 계기를 형성함으로써 향후의 탑의 새로운 운명을 결정지었다. 목탑의 의제(擬製)로서의 석탑의..
부록 8.1. 미륵사에 세 개의 탑이 조성된 이유 익산의 미륵사는 멸망해가는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r, 600~641) 때 창건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결과가 일치되므로 조성연대는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유물이 미륵사 두 개의 석탑 중의 서탑이다. 그리고 최근 1992년에는 현존하는 서탑에 준하여 남아있는 부재들을 활용하면서 9층의 동탑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최근의 발굴결과, 서탑과 동탑 사이에 거대한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중앙 1목탑 양쪽 2석탑의 뒤쪽에는 각기 3개의 금당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금당 사이로 회랑이 있어 1탑1금당이 하나의 독립된 사원을 이루고 있는 느낌을 준다..
스투파와 사당 스투파에 대한 의역(意譯)은 없었는가? 물론 있다. 그 뜻을 풀어 뭐라 했는가? 스투파를 의역한 예로써 ‘방분’(方墳), ‘대취’(大聚), ‘취상’(聚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무덤의 형태와 관련된 것이다. ‘대취’(大衆)라는 것은 벽돌을 크게 쌓아올렸다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에 관한 의역 외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스투파의 의역이 바로 『법경경』(法鏡經)에 나오는 ‘묘’(廟)라는 표현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는 아예 ‘부처님의 종묘[佛之宗廟]’라고 표현하고 있다【이러한 문제에 관한 매우 상세하고도 중요한 논의로서 우리가 꼭 봐야 할 논문은 사계의 대석학인 히라카와 아키라의 하기서를 들 수 있다. 여기 그 자세한 내용을 다 소개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스투파와 탑 원래 ‘탑’(塔)이라는 글자는 중국에 없었다. 선진(先秦)문헌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진(晉)나라 시대에 오직 ‘스투파’라는 말을 음사(音寫)하기 위하여 조자(造字)된 것이며, 남북조 시대의 제(齊)ㆍ양(梁) 간에 유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20세기 들어와서 ‘커피’라는 말 때문에 ‘가배’(咖啡, 카훼이)라는 요상한 글자가 쌩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포박자』(抱朴子)를 쓴 갈홍(葛洪, 283~343)의 『자원』(字苑)에 그 첫 용례가 보인다. 『설문신부』(說文新附)에 ‘탑이란 서역의 부도(浮屠, 무덤)를 말하는 것이다[塔, 西域浮屠也].’라고 명료히 규정되어 있다. 중국문헌에 스투파는 솔탑파(率塔婆) 등, 다양한 음사가 있다【卒塔婆, 率都婆, 率都波, 窣覩波..
스투파와 무덤 매장이나 화장이나, 후대에 기념될 만한 훌륭한 인물의 경우, 봉분을 가진 분묘를 만든다고 하는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대로다. 다시 말해서 스투파란 단순히 화장의 결과로서 생기는 묘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시 묘는 지상의 봉분이 없었다. 봉분이 있는 묘는 산동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를 그 효시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파도 지상에 높고 큰 봉분을 만든다. 그런데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흙으로 만든 봉분은 그 형태를 유지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납작한 벽돌로 쌓아올린다. 그러나 그 외형적 형태는 우리나라 봉분의 묘와 대차 없다. 봉분(覆鉢, aṇḍa)을 기단(基壇, medhī) 위에 올려놓고, 봉분의 꼭대기에는 옛날에 귀인들에게 우산을..
사리 8분 종족 인간 싯달타의 화장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거행되었을까? 『대반열반경』에 묘사되고 있는 싯달타의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南傳』7-157~8. 강기희 역 『대반열반경』, p.167.】 마하카사파 존자와 5백명의 비구들이 모두 세존의 유해에 예배하니, 세존의 유해를 안치한 화장나무는 저절로 불이 피어나 타올랐다. 이렇게 해서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는데, 불가사의한 일은 유해의 겉살ㆍ속살근육ㆍ힘줄ㆍ관절즙이 모두 재나 그을음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하게 타버리고 단지 유골만 남았던 것이다. 마치 버터나 참기름이 타고 난 다음 재나 그을음이 남지 않는 것처럼,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을 때도 겉살ㆍ속살ㆍ근육ㆍ힘줄ㆍ관절즙 등이 재나 그을음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타버리고 오로지 유골만 남..
사리의 환상 우리나라 불자들간에 성행하는 묘한 습속이 하나 있는데, 다비식에서 사리를 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리가 많이 나올수록 그 스님의 도력이 컸다는 증표라는 것이다. 사리가 많을수록 죽어서도 고승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정말 부끄러운 요습(妖習)이다. 다비의 본래적 의미는 시체를 완벽하게 무화(無化)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사리’에 대한 개념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사리라는 것은 뻑다귀까지 완벽하게 소진시키고 난 다음에 남은 어떤 미네랄의 결정체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의 몸이란 이러한 결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고승의 증표가 아니라, 살아서 병약했거나 울결이 심했거나 비평형의 치우친 상태가 심했다는 ..
인류 보편의 장례예식인 화장 고대로부터 이 화장이라고 하는 풍습은 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원전 1천여 년경부터 희랍인들은 정교한 화장의 예식을 개발시켰다. 『일리아드』에 보면 아킬레스에게 죽은 아들 헥터의 시신을 성대하게 화장하기 위해, 황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몰고 와서 아킬레스에게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이야기 등, 화장과 관련된 갖가지 이야기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이 지상의 최대의 영웅 헤라클레스도, 켄타우로스의 속임수에 남편을 곤경에 빠트린 부인 데이아네이라가 자결하자, 헤라의 간계에 12가지 고난을 견디어냈어야만 했던 험준한 생애를 화장의 장작더미 위에서 스스로 마감해 버린다. ▲ 대반열반사 주변의 휴지를 줍고 있을 때였다. 한 스리랑카의 스님이 나에게 말없이..
빈과 장, 화장과 매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적 습관에 화장(cremation)이라는 것이 없고, 매장(interment)만 있다고 생각하며, 화장은 불교를 통해서 들어온 매우 독특한 인도의 풍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념 속에 화장은 시신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타버려 한줌의 재가 되는 것이요, 또 봉분이라든가 무덤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화장과 매장의 가장 큰 차이는 무덤의 유ㆍ무로써 판가름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화장습관(modern cremations)에서 온 인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장례습속(funeral rites)으로서 화장과 매장은 일견 구분되는 것이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
4성지의 탄생 상기의 『대반열반경』의 붓다와 아난다 사이의 대화는 바로 이러한 원시불교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주는 경전의 근거인 것이다. 붓다는 자기의 신체적 죽음을 감지하며 이와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다. 변해가는 것을 어찌 머물도록 하겠는가?”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진리에만 의존하여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살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이때 진리란 법(法)이며 앞서 말한 담마(팔리어, dhamma)라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이 말하는 따오(Tao), 즉 도(道)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담마라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물증이 없다. 담마의 구현체로서 붓다라는 실존인물이 항상 곁에 있을 때는 좋았다. 그런데 이런 구현체가 갑자기 사라지면 ..
히란냐바티강의 사라나무 붓다의 육신과 진리 남전 『대반열반경』 제5송품(第五誦品)에 보면, 붓다는 히란냐바티강(凞連禪河) 맞은편 언덕 쿠시나가르 외곽의 사라나무숲으로 가서 침상을 준비하고 죽음의 채비를 차린다. 이때 한쌍의 사라(沙羅)나무가 아직 꽃필 때가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온통 꽃을 피워 여래의 전신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 호곡하는 아난다. 쿠시나가르 열반상 하단 조각. 이때 아난다가 슬픈 눈빛으로 숨을 거두려하는 붓다를 쳐다본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애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아쇼카와 진시황 아쇼카가 지배한 인도는 현실적으로 당대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강성한 군주국가였다. 그리고 인도역사에 있어서 최초이자 최후의 완벽한 통일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의 정치는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마의 이상을 통해 다양한 인도대륙의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새로운 정신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진보적 생각은 브라흐만(Brahman) 사제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인도대륙의 지배자일 뿐 아니라, 전 인류를 포용하는 정신적 담마제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아쇼카에 대하여 엇갈리는 기술도 적지 않지만 그가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헌신한 성군임에는 틀..
불교의 세계 종교화 오늘날 인도에서 소가 숭배되고 식용으로 도살되지 않는 이유는 당대 인도의 비옥한 농도의 개발을 위하여 소가 무한정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소의 번식은 당대의 당위였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이러한 평화로운 가치관에 부합되는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했을 뿐이며, 불교는 이러한 계기를 통해 크게 세력을 신장했을 뿐이다. 아쇼카 자신이 불법의 수호자라는 것을 공언하긴 했지만,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는 반드시 불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에 대한 특칭적인 언급이 그의 칙령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담마는 불교와는 달리 가족주의적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다. 부모에 대한 복종, 형제 간의 우애, 노예와 하인에 대한 자비로운 대우, 그리고 가축과 새들에 이..
담마의 정치 불교사에서는 아쇼카를 싯달타의 수호자로서, 싯달타의 종교적 이상을 세속적으로 구현시킨 성왕으로서 그린다. 그러니까 붓다가 먼저고 최상이며, 붓다의 충실한 추종자, 불법의 구현자로서의 종속적인 이미지로서만 아쇼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이해방식이다. 내가 생각키에 싯달타나 아쇼카나 모두 인도역사에 등장한 각자(覺者)들이다. 깨달음의 방식과 위대함의 영역이 다를 뿐, 그들은 동등한 깨달음에 도달한 인도의 청년들이었다. 싯달타라는 청년은 보리수 밑에서의 정좌 속에서 냉철한 사유로써 깨달음을 얻었고, 아쇼카라는 청년은 피비린내 나는 인간욕망의 극한적 상황에서 몸서리치는 떨림의 체험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양자는 모두 자신의 깨달음의 실천에 충실했다. 그러니까 결코 아쇼카는..
아쇼카의 대각 인도최초의 전륜성왕인 아쇼카는 본시 잔인한 인물이었다. 웃자인(Ujjain)과 탁실라(Taxila, 옛 지명 Takṣaśila)지역에서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는 부왕 빈두사라의 신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 파탈리푸트라로 달려왔는데, 잔인하게도 99명의 형제들의 목아지를 피묻은 칼날에 휘날려야 했다. 그리고 늠름하게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치를 거부하며 그 권위를 경멸하고 비양거리는 칼링가왕국의 무자비한 침략에 착수하였다. BC 261년의 일이었다(혹은 BC 258이라고도 한다). 칼링가왕국은 인도의 동쪽 벵갈만(Bay of Bengal)의 해안을 따라 있는 현재의 오리싸(Orissa) 주의 크지 않은 나라였는데 지금 가봐도 느끼..
통일왕국 마가다부터 아쇼카까지 간지스강 유역에 산재한 도시국가들로부터 통일왕국인 마가다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전국의 칠웅(七雄)으로부터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의 진제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아테네ㆍ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가 쇠퇴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제가 대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가 하면, 또 로마가 도시 공화국(Republican Rome)의 형태를 벗어나 대제국(Imperial Rome)의 형태로 이행하는 과정은 모두 동시대에 이루어지는 인류사의 한 축이다. 인류문명들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상황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따라 자체적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대세를 감지하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가는 사회의 내재적 보편성을 확인할 수..
싯달타부터 통일왕국 마가다까지 전술한 바와 같이 붓다의 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이 격변을 결정지운 가장 결정적 사건은 역시 철기의 보급이다. 웃따르 쁘라데쉬-비하르 주 지역은 강우량이 풍부한 대 평원이다. 이 지역은 본시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었으며 철제로 만들어진 연장이 없이는 개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리안족의 동진(東進)과 더불어 철기가 보급되면서 울창한 밀림은 비옥한 농토로 개간되기 시작한다. 간지스강 유역으로 거대한 농경지가 무제한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경문화의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상공업ㆍ무역의 발달,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발달은 도시상인을 주류로 하는 바이샤(vaiya) 계급의 급성장을 야기시켰고, 잦은 전쟁을 통한 강력한 왕권의 출현은..
내가 처음 본 인도 아라비아 바다 그 후로 약 한달 동안 서울과 동경 사이에 전화가 오갔는데, 정말 성하의 시간을 뽑아내기가 어렵다는 전갈만 다람살라의 각료들에게서 오고있다는 것이었다. 자툴 린포체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는 내 편지를 가지고 직접 성하를 알현키 위하여 다람살라로 갔다. 그리고 내가 인도로 떠나기 직전에 인도로부터 실낱 같은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도저히 약속시간을 미리 정할 수는 없으나 성하께서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 내가 1월 8일까지 보드가야에 도착해있으면 9일부터 15일 사이 어느 시간에 적당한 알현의 기회를 나에게 통보하겠다는 것이었다. ▲ 내가 처음 본 아라비아해, 인도대륙의 서쪽, 아프리카대륙과 연하여 있다. 뭄바이(Mumbai)는 인도의 경제중심이며 영화산업의 심장부..
대담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다 나는 인도를 떠나기 전날 뭄바이의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삐라를 보았다. 때마침 주 르옹지(朱鎔基) 총리가 인도를 방문하고 있었다. 문제는 독립이다! 백만여명이 학살되었다! 육천여개의 사원이 파괴되었다! 수천명이 감옥에! 수백명이 아직도 실종중! The Issue is Independence! More than a million killed! More than 6,000 monasteries destroyed! Thousands in Prison! Hundreds still missing! 자툴 대사는 티벹민중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나의 양심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나에게 달라이라마에게 보내는 친서를 직접 써달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으로 장문의 편..
티벹의 비극 나는 평생을, 중국문명의 전도사라고 한다면 정말 자격있는 전도사로서 살아왔다. 나는 중국문명이 자체로 함장(함장)하고 있는 문화적 가치의 보편성, 그리고 그 위대함에 대하여 항상 경외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중국문명의 정신적 가치는 참으로 인류에게 고귀한 삶의 지혜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이상의 발현은 국가주의를 초월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논어』를, 『노자』를, 그리고 수없는 중국의 고전을 오늘 우리 삶의 가치로서 해석하고 발양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적 가치의 진실된 모습과는 상반되게, 중국문명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명료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지성인들의 광정(匡正)의 요구는 반드시 관철되어..
티벹과 중국 나는 달라이라마방한준비위원회의 사람들을 접촉했다.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동아시아 스케쥴을 담당하는 망명정부의 대사가 토오쿄오에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자툴 린포체(Zatul Rinpoche)라는 인물이었다. 린포체라는 명명은 티벹의 고승이나 고위관직자들의 이름에서 자주 발견이 되는데, 그것은 영적 스승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며, ‘고귀한 분’이라는 뜻이다【Dalai Lama, Freedom in Exile (New York : Harper Collins, 1991), pp.8 passim.】. 그리고 린포체가 가끔 순방길에 한국에도 들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서울의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나를 알아볼 뿐 아니라 오래 ..
인도에 망명정부를 연 달라이라마 나는 귀국하는 대로 달라이라마를 만날 길을 모색했다. 한국에서는 최근 달라이라마 방한을 추진하는 운동이 있었으나 중국정부의 입김이 너무 거센 탓인지 우리 정부는 많은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방한의 기회를 허락치 않았다. 현재의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 )는 제14대 계승자이며【‘달라이’(Dalai)는 ‘큰바다’(Ocean)라는 뜻을 가진 몽고어이고, ‘라마’(Lama)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진 인도어 ‘구루’(guru)에 해당되는 티벹어이다. 그래서 달라이와 라마를 합하여 ‘지혜의 바다’(Ocean of Wisdom)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달라이라마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이해방식은 역사적 정황을 정확히 모르는 데서 비롯..
쫑카파와 겔룩파 나는 뉴욕에서 3개월을 머무는 동안, 뉴욕의 지성가에 새롭게 번지고 있는 많은 새로운 사조의 물결에 접했다. 그 중에서 나의 주목을 끈 것 중의 하나가 티벹불교였다. 소승과 대승과 밀교의 모든 것이 구비된 듯이 보이는 티벹불교는 매우 정교한 이론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단계적인 수행론을 나에게 제시했다. 그리고 나는 티벹장경과 팔리어장경에 새롭게 눈을 떴다. 서양사람들이 원시경전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모습과 내가 한역불전만에 의존하여 이해해온 불교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새롭게 조화되지 않으면 안 될 괴리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괴리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탐색과정에서 인도문명의 전체를 다시 한번 조망하는 위대한 기회를 가졌다. 나는 짧은 시..
부록 7.2. 쫑카파 연구에 참고한 문헌들 쫑카파에 관하여 손쉽게 그 개략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책으로 우선 하기서를 꼽을 수 있다. 御牧克己ㆍ森山淸徹ㆍ苦米地等流 共譯, 『大乘佛典 第十五卷, ツォンカパ」, 東京 :中央公論社, 1996. 쫑카파의 대표작은 그가 46세(1402) 때 집필했다는 『菩提道次第大論』(람림첸모, Lam rim chen mo; 『菩提道次第廣論』으로도 한역된다)이다. 이 작품은 크게 하사(下士)ㆍ중사(中士)ㆍ상사(上士)의 도차제(道次第)로 나뉘어 있는데, 상사(上士)의 도차제(道次第)가 보살(菩薩)=대승(大乘)의 도차제(道次第)이다. 이 대승(大乘)의 학습(學習)은 다시 총론(總論)과 각론(各論)으로 나뉘어 있다. 총론(總論)에는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사섭사(四攝事)가 다루어..
부록 7.1. 중관학을 토착화하여 탄생한 쫑카파 쫑카파(Tsong-kha-pa, 1357~1419)는 티벹 4대종파의 하나인 겔룩파의 개종자이다. 그가 개종한 겔룩파 계보에서 달라이라마제도가 확립되었다. 달라이라마가 티벹의 정치적ㆍ종교적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치가 확립됨에 따라 쫑카파는 티벹 최대의 사상가로서 추앙되었고 그 부동의 권위가 확보되었다. 그는 중국역사로 이야기하면 원나라가 쇠망하고 명나라가 새왕조의 터전을 닦아가고 있던 전환기의 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포은 정몽주나 삼봉 정도전과 대략 동시대의 사람이다. 보조 지눌에 비하면 2세기 후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티벹불교의 역사는 연대적으로 같은 시기에 발전한 우리나라 조선조의 유교역사와 비교되면 그 문화사적 이해가 용이하다. 쫑카파 이후 ..
인도라는 판타지 아유타에서 온 허왕후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인도는 결코 우리의 심층의식 속에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보드가야’라는 지명은 붓다의 보리수나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 지역을 우리는 그냥 ‘가야’(Gaya)라고 부른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드(bodhi)를 떼어내면 가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야라는 지명이 우리나라의 ‘가야’(伽耶)국의 이름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설도 단순한 발음의 일치를 넘어서는 어떤 역사적 교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관 가야국의 개조(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부인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남쪽바다로부터 배타고 오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후로 맞이했다는 전설은 단순한 전설이상의 구체적인 역사적 정..
꿈만 같던 인도에 가다 나에게 있어서 인도는 하나의 판타지였다. 우리가 자라날 때만 해도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 내손으로 자동차 한번 몰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티』의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창공을 날으는 것과도 같은 그런 보름달의 판타지였다. 그랬던 내가 인도를 간다는 것은 기억도 없는 머나먼 옛날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더듬는 인디아나 죤스의 탐험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도 변했다. 변해도 변해도 너무도 변했다. 인도가 이제는 바로 지척지간에 있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인도였지만 나에겐 아직도 너무도 멀기만 한 인도였다. 인도하면 왠지 피리소리에 춤을 추는 코브라의 모습이나 공중에 붕 떠있는 요기들의 황홀경, 깡마른 나족의 ..
돌과 인도문명 단순하고 건장한, 질박하고 강인한 느낌이 드는 그의 침실 속에서 나는 그의 문ㆍ무를 겸비한 질소한 인품을 흠끽했지만, 난 정말 돌구뎅이 속에서 자기는 싫었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이러한 환경에 완벽하게 무감각한 듯했다. 내가 인도에서 본 모든 것이 돌이었다. 인도의 문명이란 곧 돌의 가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본 모든 건축물이 돌이었고, 모든 조각품ㆍ공예품이 돌이었고, 대부분의 생활도구가 돌이었다. 아잔타(Ajanta)에서 본 모든 비하라(vihara, 僧房), 그리고 차이띠야(caitya, 法堂)가 그냥 돌절벽을 쌩으로 파고 들어간 돌구멍들일 뿐이었다. 엘로라(Ellora)의 거대한 카일라사 사원(Kailasa Temple),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 건물면적의 두배나 되고 높이도 그보다..
돌방 속 돌침대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은 정확하게 이 유언을 지켰다. 샤 자한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예술적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그 자신이 당대 최상의 건축가였다. 샤 자한은 2년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화려한 의상이나 음악, 모든 방종을 자제했다. 그리고 오직 죽은 자기부인만을 생각하면서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며 복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생애를 따즈 마할의 건축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실정을 거듭하였고, 당현종처럼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태상황으로 유폐되어 8년의 고적한 세월을 보내다 죽었다. 1666년 1월 22일 야무나강 건너 그가 지은 따즈 마할 무덤이 보이는 아그라성(Agra Fort)의 8각형 옥탑에서 그는 『꾸란의 구절을 들으며 평화롭게 눈..
샤 자한과 뭄따즈 오랫만에 다시 정박한 곳은 수자타라는 이름의 호텔이었다. 보드가야에서는 가장 최신의 가장 좋은 호텔로 꼽히는 곳이었지만 나에겐 좀 낯선 곳이었다. 아니, 좀 지겨웁게 느껴지도록 끔찍한 곳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219호실, 방금 칠한 페인트냄새가 풀풀 나는 아주 깨끗한 방이었지만 나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돌의 한기였다. 인도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구별이 없는 듯했다. 인도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아그라(Agra)의 따즈 마할(Taj Mahal)도 단순한 한 여자의 무덤이다. 무굴제국의 다섯번째 왕인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자기를 위해 14번째 아기를 낳다가 객사한 부인, 뭄따즈 마할(Mumtaj Ma..
예수와 싯달타의 모습 미켈란제로는 이태리의 어느 거지를 모델로 삼아 예수를 그렸다고 한다. 그가 프로렌스의 자기동네 거지를 모델로 삼아 예수의 모습을 그린 것이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초로 싯달타를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쿠샨왕조(Kushān Dynasty) 간다라(Gandhāra)의 예술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이미 조각화되어버린 희랍의 신상을 불타의 모습에 덮어 씌웠다. 붓다의 최초의 모습은 아름답게 생긴 청년 아폴로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실상은 희랍의 직접적 영향이 아니다. 간다라에 전달된 당대의 미술양식은 전적으로 로마의 것이라 해야 옳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동단에서 발생한 로마미술의 지역적..
비하르의 묵상 인간의 역사는 삶의 흐름이다. 우리 삶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예술, 어느 한 가지 디시플린의 소산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분과과학의 시각이 합쳐질 때만이 우리의 삶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희론(戱論)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의 유희가 아니다.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그 화살을 어떻게 뽑냐는 것에 관한 이론을 나열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우선 화살을 뽑고 생명의 부식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왜 싯달타가 연기(緣起)를 말했고 무아(無我)를 말했어야 했는지 항상 그 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기의 실상은 무아론으로 귀착된다. 무아론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바로 무아행(無我行)에 있는 것이다. 무아행이란 자비(慈悲)의 실천이다. 무아의 연기적 실상 그것이 바로 공..
무기와 안티노미 싯달타는 기존의 형이상학(metaphysics)적 명제들을 요약하여 십무기(十無記)라고 불렀다. 십무기는 열 가지의 무기(無記)라는 뜻이다. 무기(avyākata)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술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형이상학적 실체라고 상정하는 것들은 시공간의 현상계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거나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것에 관하여 옳다 그르다 라는 시비의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을 열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水野弘元, 『原始佛敎』, pp.85~102를 참고하였다.】. A) 자아 및 세계는 시간적으로 1. 무한하다. 2. 유한하다. 3. 무한하면서 또 유한하다. 4. 무한하지도 유한하지도 않다. B) 세계는 공간적으로 ..
무아와 연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은 큰 창문을 마주보고 있고, 그 창문 밖에는 4각의 담으로 둘러싸인, 장독대가 한구석에 있는 자그맣고 어여쁜 잔디밭이 있다. 우리는 이 잔디밭을 항상 ‘잔디밭’이라고 부른다. ‘나의 책상 앞에는 잔디밭이 있다’라는 명제는 항상 불변적으로 우리집을 기술하는 말로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잔디밭은 그 실상을 들어가 보면, 그것은 흙과 여러 가지 풀의 종류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체들의 군집으로 형성되어 있다. 개미ㆍ지렁이ㆍ지네ㆍ모기ㆍ파리ㆍ나비ㆍ진드기ㆍ딱정벌레ㆍ풀강아지ㆍ바퀴벌레ㆍ송장벌레ㆍ톡토기ㆍ짚신벌레ㆍ개미살이ㆍ노래기ㆍ솔진드기ㆍ풍뎅이ㆍ애벌레ㆍ매미 애벌레…… 이러한 식물과 동물의 군집형태를 우리가 막연히 ‘잔디밭’이라 부르는 이..
연기를 부정하는 다섯가지 생각 싯달타의 연기에 대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매우 리얼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반드시 합리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고통에 대한 약물의 처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산출하고 있는 원인 그 자체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 궁극적 원인은 인간의 무명(無明)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무지에서 해방시켜야만 하는 고독한 혁명이다. 약물의 처방은 대체적으로 의원성질병(醫原性疾病, iatrogenic disease)을 산출시킨다. 우리나라의 질병의 절반 이상이 병원이나 치료, 의사와의 만남 그 자체에서 생기는 것이다. 의사나 병원으로부터 생기는 병을 우리는 의원성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인간문제는 복잡한 연기 속에 있다 우선 환자의 고통 그 자체의 기술이 명료하게 이루어질 수 없을 때가 많다. 환자 자신이 그냥 지끈지끈 아프다든가, 아리아리 하다든가, 우리우리 하다든가 하는 말로써 표현할 때는 그것이 과연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를 기술하기가 난감한 것이다. 기술이 불가능하면 추적도 불가능해진다. 엑스레이를 찍고, 씨티를 찍고, 엠알아이를 찍어도 아무런 물리적 증거를 포착할 수가 없을 때가 많다. 그리고 언제부터 어떻게 아프셨습니까? 왜 그런 증상이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벌받아서 그래요’라든가,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래요’라든가, ‘그것은 운명이었어요’라든가 하는 식으로 황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환자 자신이 참으로 자신의..
진단과 치료 나 도올은 매일 클리닉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현직 의사다. 환자란 몸에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강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구체적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의사인 나 도올을 찾아오는 목적은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나를 찾아온 환자들에게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고통을 그들로 하여금 기술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에 따라 나 의사인 도올은 진단이라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환자들은 대뜸, 정확한 증상을 말하지 않고 병명을 말하거나, 또 나에게 병명을 알으켜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기실 병명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병명은 X래도 좋고 Y..
인과성을 철저히 긍정하다 이 때에 등장한 것이 소피스트(sophist)다. 우리가 보통 소피스트를 궤변론자라고 부르지만, 그러한 인상은 대체로 이들이 기존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세계인식의 극단적 상대성을 조장하고,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적 논리가 모두 궁극적으로 실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종교적 독단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판단 유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성향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피스트들은 모두가 박학다식한 사람들이었으며 대부분이 심오한 경지의 석학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에나 의문을 품었으며 종교나 정치상의 모든 핫잇슈들을 거침없이 이성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폴리스의 유지기반이었던 노예제도를 거부했다. 우리는 보통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
사문과 소피스트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당시에는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난립하였다. 팔리장경 장부니까야(Dīgha-Nikāya)에 속하는 『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sutta)에는 소위 6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불리우는 당시의 자유로운 사상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교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의 사상을 아는 데 충분한 자료라 할 수는 없다. 여기 사문(沙門, śrāmaṇa, samaṇa)이라 하는 것은 종래의 전통적 바라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일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이나 도시를 전전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지도자, 출가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부록 6. 붓다가 사랑한 도시 바이샬리 싯달타의 시대는 종족사회와 국가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 종족사회의 이념을 살려 공화제 국가를 성립시킨 최초의 종족이 릿챠비종족(Licchavi)이며, 그 수도가 바이샬리(Vaiśāli or Vesāli)이다. 바이샬리는 붓다 시대에 가장 화려했고 부유했던 미도였으며 교통ㆍ문화ㆍ경제의 중심지였다. 6세기 공화정을 성립시켰으며 마가다. 굽타 제국시대에까지 천여년간 그 아이덴티티를 지속시켰다. 고대 로마와 상통한다. 싯달타가 속한 샤캬족도 릿챠비족의 지배영역에 속해 있었다. 인도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공화국이었다. 지금도 인도 공화국 중앙 정부의 국회가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카르(Kharauna Pokhar) 연못의 물을 성수로 사용하여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
싯달타가 살았던 시대 싯달타가 살았던 시대는 격변과 격동의 시기였다. 간지스강 중류 지역의, 혈연유대관계를 중심으로 지극히 사적이고 토착적인 에토스를 유지해오던 소규모의 종족사회(=씨족공동체)가 아리안계 종족들의 침공을 받으면서 점점 붕괴되어 갔다. 씨족공동체는 노예제를 전제로 하지 않은 목가적인 평등사회였으나 본시 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안계 종족들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영토 국가를 건설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아리안계와 비아리안계의 이름 대립으로 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종족시회와 국가가 대립적 개념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싯달타는 태어났던 것이다. 붓다의 시대에는 이미 간지스강 중류지역의 크고 작은 많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성립하여 있었다..
우리 삶 속의 삼학(三學) 결국 이 계(戒, sīla)ㆍ정(定, samādhi)ㆍ혜(慧, pañña)라는 삼학(三學)은 저 시타림에서 나이란쟈나강을 건너 저 핍팔라나무 밑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싯달타의 삶의 과정을 요약해놓은 언사인 것이다. 싯달타가 고행(苦行)을 했다는 것도 일종의 계요, 그가 고행을 중단하고 수자타에게 유미죽을 얻어먹고 32호상을 회복했다고 하는 것도 계(戒, sīla)다. 진정한 선정(禪定)이란 건강한 신체(정신을 포괄)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무지 몸이 불건강한 상태에서는 집중력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싯달타가 유미죽을 먹으면서 정갈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32상을 회복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좌도밀교의 수행을 한답시고 우루벨라 마을에 쑤셔 박혀 수자타..
혜와 반야에 대해 혜(慧, pañña)란 무엇인가? 혜는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은 앎이다. 이 세계와 이 우주,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것에 관한 바른 통찰이다. 이미 지식과 지혜가 이분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내 이미 설진(說盡)하였다. 나는 참으로 아는 자치고 지혜롭지 못한 자를 보지 못했다. 알면서 지혜롭지 못한 자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을 통하지 않는 지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체험도 앎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앎이 아니요, 혀로 아는 것도 앎이요, 귀로 아는 것도 앎이요, 코로 아는 것도 앎이요, 피부의 느낌으로 아는 것도 앎이요,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앎이다. 그런데 어찌 앎을 통하지 않고서 지혜롭다함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아는..
계와 정과 삼매에 대해 계(戒, sīla)란 무엇인가? 계는 계율을 말하는 것이다. 계율이란 무엇인가? 계율이란 번쇄한 타부가 아니요, 우리 몸의 디시플린(discipline)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계가 없이는 건강할 수가 없다. 부처님처럼 정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모두 불건강과 타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정(定, samādhi)이라 하면 우리는 선정(禪定)이나, 좌선, 혹은 요가수행이나, 갖가지 명상법 등을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러한 말들이 정과 결코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은 정의 방편이지 정 그 자체가 아니다. 선(禪)이란 본시 다나(dhyāna, 禪那)의 음사로 생겨난 말인데, 그것은 정려(靜慮)라고 의역되는 것이다. 즉..
사성제와 팔정도 붓다는 처음에 이 십이지연기를 무식한 일반대중에게 설하는 데 무서운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의 내면적 사유과정을 타인이 깊게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안해 낸 것이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성제는 연기설을 일반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변모시킨 것이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유전연기(流轉緣起)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환멸연기를 말한 것이다. 집(集)이 인(因)이라면 고(苦)는 과(果)다. 도(道)가 인(因)이라면 멸(滅)은 과(果)다. 유전연기(流轉緣起) 환멸연기(還滅緣起) 고제(苦諦) 과(果) 멸제(滅諦) 과(果) 집제(集諦) 인(因) 도제(道諦) 인(因) 연기설..
생한 것은 멸한다 a『마하박가』의 초전법륜 장면, 그러니까 부처의 최초의 설법의 장면에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법안(法眼, dhamma-cakkhu)을 얻은 자들의 깨달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말로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정형구로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콘단냐(Koṇḍañña) 장로가 깨달았을 때, 밥파(Vappa)장로와 밧디야(Bhaddiya)장로가 깨달았을 때, 마하나마(Mahānāma)장로와 앗사지(Assaji)장로가 깨달았을 때, 그리고 야사(Yasa)라는 젊은이가 법안을 얻었을 때를 마하박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ṁ ‘생하는..
부록 5.3. 연기는 시간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 그러나 아누로마의 원래 의미는 그러한 사고의 방향성을 말한다기보다는 12지연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로서 해석되는 것이다. 즉 아누로마는 생하는 것을 따르는 순서라는 의미일 뿐이며, 파티로마는 그러한 아누로마의 생성의 순서에 대하여 역으로 소멸하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역이라는 의미는 사고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순서에 대한 소멸의 순서라는 역전(逆轉)의 논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즉 A가 B를 생성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A가 소멸되면 B도 또한 소멸될 수 있다고 하는 소멸의 역전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역(逆)은 역설의 역이다. 아누로마의 아누는 오직 팟차야(paccayā, 연하여, 기대어)의 맥락에서, 파티..
부록 5.2. 순관과 아누로마, 역관과 파티로마 그러나 원시불교의 연구가들, 특히 팔리어장경의 원전에 입각하여 사고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순(順)ㆍ역관(逆觀)의 문제를 싯달타의 사고의 방향성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지를 않다. 사실 인간의 사유추리과정에 있어서의 방향성이란 그렇게 근원적인 문제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순(順)ㆍ역(逆)의 문제는 그러한 부차적인 사고의 방향성의 의미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어떤 사고의 내용성과 관계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12지연기설의 가장 프로토타입으로 꼽는 『마하박가』 초송품(初誦品) 첫머리에서 순(順)ㆍ역(逆)의 문제는 ‘연기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라는 구절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 인용된 최봉수의 ..
부록 5.1. 순관과 역관의 왜곡 여기 논의되고 있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에 관하여서는 불교학계의 상이한 이해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정확하게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이라고 독립술어로서 규정되고 있는 개념은 한역(漢譯)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원시불교경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불교경전에는 순(順)ㆍ역(逆)이라는 말이 형용사나 부사적 용법으로서 맥락적으로 주어지고는 있을지언정,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이라고 하는 술어가 명사적 독립개념으로서 잇슈화 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선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의 문제를 싯달타가 12지연기를 추론해 들어간 사고의 방향성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논의들이 있다. 『대승의장(大乘義章)』 제사(第四..
역관 그런데 이러한 순관은 순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역관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역관(逆觀)이란 ‘A에 연하여 B가 생한다’는 순관의 명제에 대하여, 동시에 ‘A가 멸하면 B가 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관이란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싯달타의 인과성의 통찰이 근대자연과학의 인과성 통찰과 다른 어떤 차원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인과적 통찰은 하나의 사태에 대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또 한 원인이 있으면 미래에 어떠한 사태가 결과되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에 있어서나 싯달타에게 있어서나 인과는 동시..
순관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무명이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연기의 실상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무명조차도 끊임없는 연기의 고리 속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인과 밖에 있는 어떤 실재는 아닌 것이다. 다시 한번 『마하박가』에서 싯달타의 최초의 깨달음의 순간을 전달하는 문구를 되씹어보자! 그러던 중 밤이 시작될 무렵에 연기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 여기 ‘발생하는 대로’라는 것은 흔히 순관(順觀)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A에 연하여 B가 생한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싯달타의 사유의 출발은 늙음[老]ㆍ죽음[死]ㆍ슬픔[愁]ㆍ눈물[悲]ㆍ괴로움[苦]ㆍ근심[憂]ㆍ갈등[惱]이었다..
부록 4.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대결 힌두이즘(Hinduisin)을 일본학자들은 인도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도인의 종교를 총칭하는 것으로 특정한 제도종교라고 부르기 어려운 인도인의 생활관습에 대한 일반명사인 것이다. 힌두이즘이 하나의 종교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브라흐마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성립하자 그 불교의 승가집단에 대하여 힌두이즘이라는 새로운 반동이 생겨났던 것이다. 불교가 쇠퇴한 후 인도의 역사는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대결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도에 있어서 이슬람의 역사는 정복왕조의 역사와 일치한다. 이슬람 정복왕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서북쪽의 터키ㆍ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이야기 해야 한다. 가즈니의 마흐무드..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무명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싯달타가 연기를 추적한 방식으로 꼭 연기를 추적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싯달타라는 한 개인의 추리방식이요, 사물의 연결고리의 이해방식이다. 나는 왜 늙고 죽어 가는가? 그것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정자와 나의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의 정자와 나의 어머니의 난자는 왜 결합하게 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의 성기와 나의 어머니의 성기가 교합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의 성기와 나의 어머니의 성기는 왜 교합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서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싯달타의 합리적인 사유과정 그런데 싯달타의 사유체계에 있어서는 전혀 이와 같은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있을 수가 없다. 싯달타의 명상은 바로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세계관, 그 합리적 법칙체계를 앞지른 선구적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그냥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은 인류역사를 통해 싯달타와 같은 수없는 붓다들, 이 우주와 인간에 대하여 남다른 통찰을 한, 수 없는 각자들이 발견한 연기적 법칙들의 축적에 의하여 형성되어온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를 붓다라 아니 부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의 붓다(각자)였다. 아인슈타인이라는 독일의 한 청년이 골방에 쑤셔박혀 명상한 연기법칙의 내용으로 인류를 수억겁년 동안 지배해온 공간과 시간의 개념 그 자체가 혁명적 변화를 ..
과학적 연기와 종교적 사실 연기ㆍ인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매우 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인과)라는 말이 우리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의 케리그마로 들리지 않고 진부한 속언처럼 시시하게 들리는 데는 크나큰 원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연기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 말하는 ‘우리’는 역사적 우리다. 그 우리는 항상 시간성 속에 있는 우리다. 그것은 연기된 우리인 것이다. 이 역사적 우리를 특징지우는 것은 근대적 시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암암리 교육을 통해서 받은 공통된 세계관이 있다. 그 세계관이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방법에 관한 것이..
설법하지 않기로 작심하다 싯달타가 보리수 아래서 증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내용은 내가 확언하는 바대로 ‘연기’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며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홀로 증득한 것이다. 그래서 싯달타는 ‘스스로 깨달았으니 그 누구를 따르리오?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외쳤던 것이다. 스승이 없다고 외치는 인간이라면, 사실 그 정직한 논리에 따라 자신 또한 제자를 두면 안 된다. 홀로 증득한 것은 홀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자각의 내용은 특별히 말할 것이 없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며 남에게 특별히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싯달타는 대각 후에 설법하지 않기로 ..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緣起)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반드시 연(緣)하여 기(起)한다는 것이다. ‘연(緣)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한다’는 뜻이요, ‘기(起)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란, ‘A로 연하여 B가 기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A를 원인으로 하여 B라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뜻이다. 요새 말로 하며는 ‘연기’란 원인과 결과를 뜻하는 것이며 그것을 축약하여 인과(因果, causation) 또는 인과관계(causational relation)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연(緣)은 원인이요, 기(起)는 결과라 말해도 대차가 없다. 보통 인연(因緣)이라 말할때, 그것은 인(因)과 연(緣)의 합성어인데, 보통 인(hetu)은 직접적 원인을 지칭하고 연(pratyaya)은..
연기론이 아닌 연기적 사유로 감히 일갈하건대 12연기설은 개똥이다. 아니 소똥이다. 아니 개똥도 소똥도 아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장자(莊子)의 말대로 싯달타의 생각 그 자체가 아니요, 싯달타의 생각의 족적이요 조백(糟魄)일 뿐이다. 그것은 고인의 똥찌꺼기 불과한 것이다(『莊子』「天道」)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만나봐야 밥먹고 똥싸는 천지간의 미물일 뿐이요 범인의 자태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볼품없는 혈혈단신이다. 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나를 만날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 붓다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또 다시 싯달타라는 어느 역사적 인물의 실체를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실체로서 가..
12연기설이 만든 혼란 그렇다면 과연 이 연기(緣起, pațiccasamuppāda)란 무엇인가?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연기하면 곧 12지연기론(十二支緣起論)이니, 12지연기설이니, 12인연이니 하여 12개의 고리를 좌악 늘어놓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① 노사(老死, jarā-maraṇa) → ② 생(生, jāti) → ③ 유(有, bhava) → ④ 취(取, upādāna) → ⑤ 애(愛, taṇhā)→ ⑥ 수(受, vedharā) ⑦ 촉(觸, phassa) → ⑧ 육처(六處, saḷāyatana) → ⑨명색(名色, nāma-rūpa) → ⑩ 식(識, viññāṇa) → ⑪ 행(行, saṅkhāra) → ⑫ 무명(無明, avijjā) 운운…. 그리고 삼세양중(三世兩重..
싯달타가 깨달은 것 나는 일찌기 말했다. 붓다는 엉터리로 안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안 사람이다. 무얼 어떻게 알았나? 붓다의 깨달음, 붓다의 얇은 삼법인(三法印)으로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붓다의 얇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던가? 나는 이 어려운 질문에 또 다시 매우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연기였다. 나는 근본불교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으로 실존한 X가 있었고, 그 X가 싯달타였으며, 그가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명상 끝에 득도하였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즉 역사적 붓다(the historical Buddha)의 실존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역사적 붓다의 사유과정을 추론하는 데 있어서 이 ‘연기’라는 한마디처럼 유용한 실마리..
무아와 비아 기실 이 삼법인(三法印)의 언어 중에서 우리가 근본불교의 정신을 나타내는 단 한마디의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아’(無我. anātman), 이 한 마디 밖에는 없다. 그런데 무아(無我)는 궁극적으로 비아(非我)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고 있는 싯달타의 사유의 세계, 그가 깨달은 세계, 그의 앎의 세계를 접근해 들어가려고 할 때, 내가 계속해서 ‘해탈’(解脫, mokṣa)이니, ‘열반’(涅槃, nirvāṇa)이니 하는 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뜻은, 바로 이런 방식의 사유체계가 반드시 무아론이 아닌 비아론과 연결되기 때문인 것이다. 무아론(無我論)에서는 아 즉 아트만(ātman)의 존재근거가 상실되고 해소된다.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실체적으로..
부록 3. 비아에 대한 보충설명 나의 ‘무아와 비아’라는 말은 인도철학계의 원시불교에 관한 논쟁인 ‘비아설’(非我說)과 관련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나카무라(中村元)박사가 『원시불교의 사상(原始佛敎の思想)』에서 초기불교에는 ‘비아설(非我說)’만 있었을 뿐, ‘무아설(無我說)’은 설파되지 않았다고 했을 때의 ‘비아(非我)’는 아(我)와 대립되는 비아(非我)로서의 실체개념이 아니라, 오온(五蘊)의 가합태와 같은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소박한 윤리적 맥락을 드러내는 비아(非我)인 것이다. 즉 ‘아(我)가 아니다’라고 하는 술부적 부정태의 의미맥락이 일차적인 설법의 내용이었으며, 후대의 부파불교에서 이론화한 존재론적ㆍ우주론적 무아(無我)의 논설(論說)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무아(無我)가 ..
삼법인의 허구 여기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원시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과히 기분좋은 말은 아니다. ‘법인’(法印, dharmoddāna)이란 문자 그대로 ‘불법(佛法)이 되는 인증(印證)’이라는 뜻이다. 즉 불법과 타법이 혼동될 경우 어떠한 일자가 불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 그것을 곧 ‘법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법인이라는 말 자체가, 불타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불타의 말씀을 변호하기 위한 호교론(apologetics)적 색채를 강하지 띠면서 후대에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 설법이 아닌 아폴로지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법인으로서의 이 삼 개 조항, 그러니까 불교헌법 3대 총강령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조항의 내용은 직접ㆍ간접으로 성도 후의 세존이 설한 ..
번뇌가 끊어지니 마음이 시원해지다 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를 증득하고 카시 사르나트에 있는 다섯 비구들을 향해 떠나면서 싯달타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이것은 참으로 내가 접한 한 인간의 지적 자신감의 표현으로서는 극상의 포효다【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Ⅰ, pp.55–6. 『南傳大藏經』 3-15. T. W. Rhys Davids and Hermann Oldenberg, The Mahāvagga, in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edited by F. Max Müller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4), Vol. XIII, p.91. 상기의 세 번역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이 세존의 ..
대각은 앎이다 그런데 원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라는 것은 ‘더 없는 최상의 바른 앎’이라는 뜻이다. 붓다의 어원인 ‘buddhi’는 ‘지능’(intellectual capacity)이며, ‘지성’(intelligence)이며 ‘이성’(reason)이며, ‘식별’(discermment)이며, ‘이해’(understanding), ‘합리적 견해’(rational opinion)를 의미한다. 보리와 관련된 ‘bodha’도 ‘이해한다,’ ‘안다’는 뜻이다.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의 원초적 의미는 ‘앎’일 뿐이다. 우주와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그릇된 앎이 아니라, 바른 앎이다. 그것이 곧 지혜요, 깨달음이다. 싯달타가 6년 동안의 선..
깨달음에 대해 그렇다면 우리가 소박한 의미맥락에서 해탈과 열반이다는 주제를 중심으로 핍팔라나무 밑에서 정진하고 있는 싯달타의 정신세계를 접근해 들어간다면, 싯달타에게 있어서 마라(魔王)의 퇴치는 곧 해탈과 열반을 달성하는 첩경을 확보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처럼, 그가 일생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의 가능성을 압축적으로 받았고, 그 욕망의 불길을 껐다고 한다면 그는 곧 열반을 달성했을 것이고, 열반을 통하여 그는 자유로움을 획득하고 해탈(mokṣa, 解脫)을 얻었을 것이다. 이것이 보통 싯달타의 보리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 싯달타의 득도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 그 자체의 이해방식을 극도로 폄하시키는 편벽한 소치라고 생각한다. 욕망의 제어라는 것은 동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