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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해탈과 열반 이 고통스러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그 ‘벗어남’이라는 말을 ‘해탈’이라는 말로 바꾸어보자! 해탈이라는 말은 인도사상(베다/우파니샤드)에 있어서는 분명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우주론적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지만, 초기불교경전들에서 이 ‘해탈’이라는 용어는 반드시 그러한 엄밀한 의미맥락에서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우리를 묶고 있는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의미며, 그것은 번뇌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심경, 즉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 해탈은 우주론적인 맥락에서 보다도 그러한 소박한 심리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맥락에서 흔히 쓰였음을 초기경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물론 해탈의 본래적 뜻은 이 윤회의 세계로 다시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
사문유관과 출가 자아! 이제 마라의 패배로 과연 싯달타는 붓다가 된 것일까? 여기 우리는 또 다시 싯달타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선정(禪定)을 했으며, 고행(苦行)을 했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 부모의 철저한 보호 속에 세상의 고뇌를 한번도 경험치 못하고 성장하였다가 소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하는 충격적 사건에 접하게 된다. 사문유관이란 그가 어느날 우연히 동문으로 나갔다가 백발에 등이 굽은 초라한 노인을 만났고, 또 어느날 남문 밖에서 두 사람에게 부축되어 가는 병자를 보았으며, 또 어느날 서문 밖에서 장례식을 목격했던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노(老)ㆍ병(病)ㆍ사(死)’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최초로 충격적으로 직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
욕망이여! 마라여! 물론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다. 인간세의 모든 죄악이 이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생겨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욕계(欲界)의 주인인 마라(Mara)와 우리는 끊임없는 투쟁 속에 있다. 따라서 욕망의 주체인 마라의 항복은 대단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마라의 항복만으로 인간에게 대각이 찾아오는 것일까? 핍팔라나무 밑의 싯달타에게 있어서 ‘선정’(禪定)이라든가 ‘항마’(降魔)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고행과 선정을 통하여 몸에 충분히 익숙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수행자로서는 최고도의 달통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그였다. 그가 우선 새로운 선정에 필요한 충분한 영양을 우루벨라 마을에서 보급 받고 떠났다고 하는 것은..
싯달타와 예수의 유혹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원작소설을 기초로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감독이 연출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작자 카잔차키스는 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중적 실체성, 인성과 초인성의 갈등, 인간이면서 신이 되고자 했던 그 갈망, 그러한 것들은 항상 나에겐 풀 수 없는 심오한 신비였다. 어릴 때부터 카톨릭신도였던 나에게 다가온 모든 기쁨과 슬픔의 근원과 원천적 고뇌는 영혼과 육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그리고 잔인한 싸움이었다. 나의 영혼은 이 두 개의 적진이 충돌하여 싸우는 각축장이었다. The dual substance of Christ ― the yearning, so human, so..
35세 청년이 붓다가 되다 자아! 내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하면 갑론을박은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此心卽佛]라는 선의 주장은 원시불교에는 해당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견성성불이니 차심즉불이니 하는 말은 곧 불성에 대한 논의들이 정립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싯달타가 부처가 되기 전의, 즉 불성이라는 개념조차 성립하기 이전의 사유를 소급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선종의 모든 주장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역사적 이유’(historical reasons)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승의 번쇄한 논의들이 또 다시 불교의 본의를 가을 정도로 난립한 상태에서 생겨난 명쾌한 면도날..
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의 붓다 셋째로 우리가 붓다라는 말을 쓸 때, 붓다는 이 모든 부처님들을 묶는 통일된 개념으로서의 추상적 속성, 즉 우리가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불성(佛性, Buddha Nature, Buddhahood)을 의미할 수 있다. 즉 모든 붓다들은 불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불성에 대한 논의는 특히 소승과 대승이 대립적으로 이해되면서 주로 대승계열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점점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어갔다. 그리고 이 불성에 대한 논의는 법신(法身, dharma-kāya)이라든가 여래장(如來藏, thatāgata-garbha)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증폭되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선종(禪宗)도 바로 이 불성에 대한 독특..
붓다인 싯달타 둘째, 붓다(Buddha)란 인도사상사에서 매우 넓은 함의를 지니는 일반명사로 쓰여진 말이었으며, 고타마 싯달타라는 역사적 개인이 독점한 칭호는 아니었다. 붓다란 표현은 예를 들면 쟈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Mahāvīra)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실 붓다의 사후 초기교단에 있어서는 싯달타를 부르는 칭호로서 ‘붓다’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제1차ㆍ제2차 결집 때까지만 해도 가장 넓게 쓰인 말은 ‘복스러운 성자’라는 의미의 바가바트(bhagavat, bhagavan)나 평범한 ‘선생님’이라는 의미의 샤스뜨리(śāstṛ)였다【Frank E. Reynolds and Charles Hallisey, ‘Buddha,’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New York :..
부록 2. 소승과 대승의 대반열반경 이상의 대화는 팔리어삼장 중 장부(長部, Dighanikāya)의 제16번째에 속하는 경전인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nta)의 내용 중에서 발췌하여 그 순서를 바꾸어 윤색한 것이다. 독자들이 받는 느낌의 강화를 위하여 원전의 의미맥락이 손상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드라마타이즈시킨 것이다. 이 팔리 니까야의 『대반열반경』에 해당되는 한역장경으로는 『장아함경(長阿含經)』 卷二~四에 수록되어 있는 『유행경(遊行經)』을 들 수 있다(『大正』1-11~30). 후주(後奏)의 불타야사(佛陀耶舍)와 측불염(竺佛念)이 함께 번역했다. 『열반경』은 소승계열과 대승계열의 전승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계열의 편집 의도는 매우 다르다. 남방 상좌부의 전승인 이 팔리..
색신과 법신 우리말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속담이 하나 있다.“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붓다는 죽기 전에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가 평생 설하고 가르친 법(法)과 율(律)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죽은 후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 그리고 또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서품」(序品)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스승 석가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세월은 극히 짧은 것이었다. 육체(肉體)는 비록 갔지만 그 법신(法身)은 살아 있다. 마땅히 그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하리…… 여래의 법신(法身)은 썩는 법이 없으니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 끊어지지 않으리.釋師出世壽極短, 肉體雖逝法身在, 當令法本不斷絕…… 如來法身不敗壞, 永存於世不斷絕. 『增壹阿..
붓다의 세가지 의미 우리가 보통 ‘소’(cow)라고 하면 그 소는 대강 대별하여 다음의 세 가지 뜻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는 첫째 갑돌이네 집에 있는 그 소, 즉 특정한 역사적 시공에 살아 움직이는 개체로서의 소를 특칭하여 일컫는 말일 것이다(a particular cow). 둘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소,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모든 소를 전칭하여 부르는 말일 것이다(all Cow). 그리고 셋째로는 모든 소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소됨, 그러니까 소의 모든 속성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cowness). a particular cow 특정한 역사적 시공에 살아 움직이는 개체로서의 소를 특칭하여 일컫는 말 all Cow 모든 소를 전칭하여 부르는 말 c..
길상과의 대화 자아! 이제 싯달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른편에서 풀을 베고 있던 아동은 싯달타에게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서있었다. 그가 들고 있었던 풀은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초록색에, 공작새의 꼬리와도 같이 부드럽고 연하여 그 사랑스럽기가 마치 카칠린다까(迦尸迦衣)새의 깃털로 만든 아름다운 비단결과도 같았다. 그 풍겨 나오는 그윽한 향기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감돌면서 자오록하였다. 그 미묘한 풀을 들고 있는 아동에게 싯달타는 다가갔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뇨?” “저의 이름은 길상(吉祥)이외다.” “그것 참 신묘롭구나! 나 자신 길상함을 얻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 길상함을 여기 그대로부터 얻는 것 같구나, 이름이 길상인 그대가 내 앞에 섰으니 이제 나는 틀림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
인도신화와 단군신화 이윽고 싯달타는 핍팔라나무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때 싯달타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과거의 보살들은 어떤 자리에 어떻게 앉아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하였을꼬? 이때 우연찮게 옆에서 어느 아동이 싯달타의 우편에서 풀을 베고 있었다. 신화적 기술에 의하면 이 아동은 바로 석제환인(釋帝桓因)이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석제환인의 원어는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Ṡakra-devānāṃ Indra, 釋迦提婆因陀羅)인데, 이때 샤크라(釋)는 ‘釋迦羅’라고도 음사하는데 ‘위용이 있다.’ ‘힘이 있다.’ ‘강하다’는 뜻으로 신에 대한 존칭의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여기 ‘뎨환’(帝桓)은 ‘deva’에서 온 것으로 하늘을 말하는 것이요.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인 (因)은 인드라(In..
싯달타와 수자타 이때, 허기의 극도에 달한 고독한 싯달타에게 우루벨라(Uruvelā, 優留毘羅)【‘Uruvila-grama’로 불리기도 하고, ‘優婁頻螺’로 한역되기도 한다. 다양한 표기법이 있다】 마을로부터의 한 아리따운 처녀가 등장한다. 그 처녀가 우연히 강가나 강 주변의 수풀로 오게 되었는지, 싯달타가 우루벨라마을로 들어가 공양을 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의 기술도 경에 따라 복잡다단한 전승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녀의 이름은 불교도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수자타(Sujata, 須闍多)! 싯달타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을 이룰 수 있는 최초의 에너지를 제공한 유미(乳糜, madhupayasa) 죽을 공양할 수 있는..
고행 단념한 뒤 싯달타의 행동 고행을 중단하고 그는 우선 체력을 회복하기로 결심하였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물을 좀 마시고 잠을 청하였다. 깊은 잠을 좀 자고 나니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약간의 힘이 생겼다. 그래서 싯달타는 생각하였다. ‘나의 육신은 너무도 피폐해 있다. 이 육신으로는 도저히 도를 성취할 수 없다. 비록 신통력으로 몸을 회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일체 중생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니 부처가 도를 구하는 법이 아니다. 이제 나는 육신의 힘을 얻기에 좋은 음식을 받아 체력을 회복하여 다시 무상의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리라!’ 이때 허공의 제신들이 싯달타가 마음 속으로 이와 같이 작정한 것을 알고 그에게 속삭였다. “존자이시여! 굳이 음식을 구하실 필요가 없습..
싯달타의 고독 그것은 고독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한 평범한 사나이의 서글픈 고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고독이 아니었다. 자신의 중도의 깨달음의 계기가 도저히 그 친구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소외된 느낌이 그 고독감의 출발이었겠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모든 고(苦)로부터의 해탈이 궁극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홀로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던져주는 황량한 고존(孤存)의 고독이었던 것이다. 후대의 전기작가들은 이 대목에서 다섯 친구들이 싯달타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몄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싯달타 자신이 중도의 깨달음을 득한 후에 주체적으로 그들을 멀리 했을 것이다. 최소한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을 이..
고행의 단념과 안아트만 그런데 내가 여기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든 미스티시즘의 갖가지 형태들이 표방하는 ‘합일’(合一)이라는 말의 무의미성, 신화성, 기만성에 관한 싯달타의 통찰이다. 도대체 ‘합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흔히 도를 통했다 하는 사람들이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비경 속에 주ㆍ객이 통합되는 합일의 경지를 체득했다’고 지껄이는 얘기들을 수없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합일이라는 말처럼 기만적인 말도 없다. 나는 우주와 합일되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주적 인간으로서, 신적 인간으로서, 전지전능한 인간으로서 경배해야할 것인가?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과 합일이 되었다. 그래 정말 합일이 되..
신비주의적 합일 최근, 프린스턴 수학자 죤 내쉬(John Nash)의 생애를 다룬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라는 영화가 말해주듯이, 수학적 환각과 노벨상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의 차이와도 같을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적법적 후계자이다. 플라톤 자신이 여기저기서 파르메니데스나 피타고라스에게 진 빚을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고백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희랍인들의 우주론적 구상을 추상적 사유의 길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추상적 사유(abstract thought)는 외부의 사실에 관계없이 작동하는 마음의 원리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감관적 세계를 무시하고 사유적 세계만을 리얼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 철학의 측면이 피타고라스의 수학에 의하여 더욱 체계화되었고, 플라톤의..
합일과 피타고라스 우리는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대한 철학이 이미 인도에 성숙되어 있었다면 도대체 싯달타라는 청년이 새롭게 얘기할 건덕지가 무엇이 있겠는가? 윤회와 해탈과 업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이미 완성되어 있지 아니 한가? 과연 싯달타가 말하는 중도란 무엇이며, 새로운 인간이란 무엇인가?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브라흐만(Brahman)과 아트만(ātman)이 하나라는 이 명제 자체로도 기독교와 같이 신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복속이나 복종, 그리고 일방적인 관계로만 설정된 의미맥락에서는 매우 이단적일 뿐 아니라, 이미 충분히 서구의 유일신관과는 다른 동방적 신비주의의 원융(圓融)한 냄새를 풍긴다. 삼위일체를 ..
브라흐만 브라흐만(Brahman)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현재 과학적 세계관에서 살고 있다. 신ㆍ불신을 막론하고, 즉 믿거나 말거나,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과학의 법칙 같은 것을 믿는다. 과학의 법칙이란 우주의 나타난 모습들의 배후에서 그것을 작동시키고 있는 어떤 규칙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들은 막연하지만 어떤 전체적 통일성 속에서 연관되어 작동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것을 믿는 동시에 우리는 예외 없이 과학이라는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사람들도 이 우주가 우리의 감관(感官)에 나타난 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관에 나타난 현상(phenomena, appearance)의 배후에 어떤 궁극적 실재(ultimale reality)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궁..
아트만 아트만(ātman)이란 뭐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나’라는 말이다. 그것을 한역하여 ‘아’(我)라고 했는데 범아일여론의 ‘아’가 곧 이 아트만이다. 아트만은 본시 ‘숨’(息)을 의미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숨쉰다는 뜻이다. 그 숨, 그 기의 주체를 아리안계 고대인도인들은 아트만이라 불렀던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자신의 서재에 있을 법한 아무런 『독한사전』을 하나 펼쳐서 ‘atmen’이라는 동사를 찾아보면, ‘숨쉬다, 호흡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 독일어의 ‘아트멘’과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은 완전히 동근이다.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같은 계열의 단어이다. 히틀러가 자기네 게르만족만이 아리안의 적통을 이어받은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신..
신비주의 여기에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죽음도 결국 우리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영원히 우리 삶 속에 있다.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싯달타가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위하여 그는 몸부림쳤던 것이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싯달타라는 한 인도청년이 깨달았던 것은 중도(madhyamá pratipad)였다. 안락의 방법으로도, 선정의 방법으로도, 고행의 방법으로도 접근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길! 그 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싯달타가 고행의 극한에서 고행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속했던 거대한 문명의 체계에 대한 일대 ..
고행이란 무엇인가? 그 다음에 고행이란 무엇인가? 여기 이 고행이라는 논의를 하기 전에,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지는 문화적 벨트의 대세를 놓고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의 황하를 중심으로 한 한자문명권의 사유 속에서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육체(body)와 영혼(soul)이라는 이원론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논의가 우선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그 신화적 세계로부터 심층구조를 논구해 들어간다면 물론 영과 육에 해당되는 어떤 분별이 있기는 하겠지만, 중국적 사유의 대세는 애초로부터 영육의 문제를 중심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고전한문 자체가 영육이라는 이원론을 중심으로 어휘형성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또 문법적으로도 영육이원론을 뒷받침할 어떤 구조를 제시하지 않는다. (주어 중심의..
선정지상주의 그러나 이 중도란 것은 매우 단순한 일상적 통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선정(禪定)에 빠져있는 불자들, 특히 좌선을 적통으로 삼는 선불교(Zen Buddhism) 전통 속에서는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보리수 밑에서 대각ㆍ성도를 했다는 싯달타의 모습을 생각할 때, 항상 가부좌 틀고 눈을 지긋이 감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요가수행자적인 선정의 성자의 모습만을 중도의 요체의 구현태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후기 대승 불교의 아이코노그라피(iconography, 圖像學)가 만들어놓은 매우 불행한 오류 중의 하나이다. 즉 대각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있으면서 한(寒)ㆍ서(暑)를 인종(忍從)하고 버티어 내기만 하면 어느 결엔가 후딱 찾아오는 어떤 황..
중도와 뉴 웨이 중도란 무엇인가? 가운데 길인가? 가운데 길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위한 고통은 결국 목샤(mokṣa, 解脫)라고 하는 자신의 출가의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어리석은 소치였다. 고행이 나를 벗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윤회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의 기쁨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이를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이뇨? 하나는 모든 애욕에 탐착하는 것을 일삼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인 범부의 짓이다.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을 일삼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니, 이..
부록 1.5. 중도에 관한 인용부분 여기 ‘중도’(中道)에 관하여 인용된 부분은 붓다가 사르나트에 와서 다섯 비구를 만나 설법한 초전법륜 중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중도의 자각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팔리어삼장은 근세에 불교남전지역에 유럽인들의 제국주의적 손길이 뻗치면서 그들 유럽인학자들의 손에 의하여 새롭게 정리되고 그 유니크한 가치가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824년 클러프(B, Clough)에 의하여 최초의 팔리어문전이 출판되었고, 1826년 뷔르누프(E. Burnouf)와 랏센(Ch. Lassen)이 공동으로 『팔리어연구』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1855년 파우스뵐(V. Fausböll)이 학술적 가치가 있는 최초의 원전으로서 『법구경(法句經)』(Dhammapada)을 출판함으로써 세계 학술계에..
부록 1.4. 한역대장경과 티벹장경 팔리삼장, 한역대장경, 티벹장경은 제각기 특색이 있다. 팔리삼장의 오리지날 한 가치는 아무리 부언하여도 그 위대성을 다 드러내기에 부족하다. 이 팔리삼장의 간결성과 오리지날리티에 비한다면 중국의 한역대장경은 초기불교를 넘어서서 대승경, 대승률, 대승론 등 그 외로도 잡다한 형식을 다 포괄했을 뿐 아니라 인도인의 저작뿐이 아닌 중국인, 한국인의 저작까지 포함하여 매우 잡다하고 번쇄하고 방대하다. 전기, 목록, 여행기 등의 장르까지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세기로부터 1천여 년에 걸친 번역이 중복되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들어가 있으므로 그 역사적 전개를 파악하는 데는 매우 중요하다. 대장경의 편찬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삼장(三藏)의 체계를 ..
부록 1.3. 팔리어삼장에 대해 소승의 상좌부계열에서 성립한 결집장경으로 삼장(三藏)을 갖춘 유일한 경전이 소위 ‘팔리어삼장’인 것이다. 보통 우리가 대장경을 영어로 ‘트라이피타카’(Tripitaka)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 개의 바구니라는 팔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세 개의 바구니란 무엇인가? 그것은 율(律)과 경(經)과 논(論)을 말하는 것이다. 율이란 승가를 유지하면서 생겨나는 여러 규칙이나 계율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경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설파한 내용들을 담아놓은 것이다. 논이란 부파불교시대로 들어가면서 이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후대의 제자들이 논구한 주석이나 독립논설이다. 물론 논은 경이나 율에 비해 그 권위가 떨어질 것이지만, 팔리경전의 특징은 삼장의 체제를 정확하게 유지했다는..
부록 1.2. 초기불교의 흐름 붓다의 사후 100년경 바이샬리(Vaiśalī)에서 소위 2차결집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불교교단 내의 사소한 규칙의 해석의 문제, 예를 들면 구걸해온 소금을 좀 축적해두어도 되느냐? 밥 먹는 시간을 좀 느슨하게 해도 되지 않느냐? 또는 깨달은 자라 해도 무지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보수적인 정통성을 그대로 고집하려는 상좌부(上座部)【그 회의에서 위에 앉은 원로들이었을 것이다. 팔리어로 Theravādins, 산스크리트어로 Sthaviravādins라고 한다】와 보다 대중적인 입장에서 느슨하게 해석하려는 승가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인 대중부(人衆部, Mahāsāṃghikas)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가 생겨나, 교단이 분열하게 되는데, 이 분..
부록 1.1. 암송작업의 체계화 붓다의 생애에 붓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경전에서 추적하는 작업은 지극히 어렵다. 예수가 아람어(Aramaic language)라는 당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토속말을 한 사람이라면, 붓다 또한 지금의 비하르 지역(간지스강 중류지역)의 통속어인 마가다어(Magadha language)를 말했던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아람어 이야기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코이네(κοινὴ)라는, 고전 희랍어가 대중화되고 보편화되면서 생겨난 공공언어였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산스크리트어나 서북인도의 팔리어, 그리고 다양한 쁘라끄리뜨어(Prākrit languages, 통속어)로 전승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도는 양피지나 종이와 같은 필기도구가 발달하지 않았을 뿐..
업의 새로운 이해 싯달타라는 청년의 사유의 혁명은 바로 이러한 숙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까르마를 자유의지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까르마를 윤리적 주체로서의 나의 자각의 계기로서 심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업의 전환은 최소한 윤리적 측면에서는 싯달타 뿐만 아니라, 챠르바카(Cārvāka 斫婆迦, 順世派) 쾌락주의자나 쟈이나교의 마하비라와 같은, 싯달타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현세에 있어서의 나의 업이 나의 미래의 생존의 모습을 결정한다고 한다면, 나는 주체적으로 윤리적 행위, 즉 선업을 통하여 나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나의 생존이 과거의 업의 결과라 해도, 그것은 체념이 아닌 끊임없는 자각과 반성의 계기..
체념적인 전생의 업보 업의 사상이 얼마나 치열하고 무서운 개인의 윤리를 요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로써 새삼 새로운 각성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슈퍼마켓에 갔다가 선반에 있는 물건을 슬쩍 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그런데 운좋게도 폐쇄회로 텔레비젼에 걸리지도 않았고, 아무도 본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들키지 않았다. ‘물건을 슬쩍 했다’는 사태는 사실 하나의 무형의 이벤트이며, 들키지만 않는다면, 파도가 일었다가 잔잔해진 물처럼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히 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물건을 슬쩍 했다’는 사태는 분명한 나의 행위다. 즉 나의 까르마다. 그런데 이 까르마는 앞에서 말했지만 반드시 보(報)를 수반한다. 이미 저질러진 나의 까르마는 누가 보..
업에 대한 최대의 왜곡 그런데 『주역(周易)』이라는 중국경전의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선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훗날에 경사가 있고 악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훗날에 재앙이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이 『주역』 「문언」의 말은 불교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에서 성립한, 윤회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진 고대중국인의 역사의식을 나타내는 윤리적 명제이다. 그렇지만 이 유명한 『주역』의 말은 곧 불교의 업보론을 나타내는 중국적 명제로서 중국대승불교의 역사를 통하여 줄곧 인용되어 왔다. 선(善) → 必有 여경(餘慶) 불선(不善) → 必有 여앙(餘殃) 선-여경, 불선-여앙이 ‘반드시’(必)라는 부사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명제의 사실은 그것이 어떠한 시공에서 일어나..
윤회란 무엇인가? 그런데 윤회는 고대인의 우주관(cosmology)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논설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종교와 과학을, 철학과 종교를, 그리고 신앙과 이성을 적대적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하여 있다. 이것은 후대의 서구 계몽주의 정신에 의하여 파악된 왜곡된 희랍정신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전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이 한 조류를 제외하면, 모든 사상에 있어서 종교, 과학, 철학, 이런 것들은 대립을 일으키지 않는다. 결국 모든 과학적 성취도 그 궁극적 배면이나 그 최초의 동기에는 반드시 종교적 통찰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인도인들이 인간의 삶을 윤회하는 것으로 파악한 이유는 대체적으로 윤리적인 동기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단순하게 그들이 우주의 과학적 실상을 추구..
생명의 원리로서의 불과 기와 숨 윤회의 주체로서의 생명의 상징을 불[火]로 볼 수도 있다. 한의학적 인체관에서 다루는 화(火)의 개념도 이러한 우주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싸늘한 것은 죽음이다. 우리 몸이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체온 즉 불[火]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이 어떤 상태로 인체내에서 배분되어 있느냐에 따라 건강과 불건강이 결정된다. 모든 생명의 불은 결국 태양과 관련된다. 생명의 원리로서의 불은 태양으로부터 광선ㆍ맥관을 거쳐 인체내로 들어 갔다가, 사람이 죽게 되면 역의 경로를 거쳐 태양으로 환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 윤회사상도 인도인의 신체관이나 우주관에는 일찍 정착되었다. 이슬람 이전의 순수 페르시아 사상인 배화교(Zoroastrianism)의..
생명의 원리로서의 물 그런데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앞의 정원에 나는 조그만 채마밭을 하나 가꾸고 있다. 봄이면 글을 쓰다 나가서 무우씨나 깻잎씨를 뿌리고 가꾸어 먹는다. 그런데 이것들은 왕성하게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라지만 가을이 되면 결실을 맺고 씨를 맺는다. 그래서 내년 봄이 되면 또 그 씨를 뿌리게 된다. 최소한 내가 올해 우리집 정원 채마밭에 뿌린 씨와 내년에 뿌리는 씨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이것을 같은 씨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씨를 보다 추상화시켜서 동일한 DNA구조의 지속이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이 씨는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즉 씨는 같은 씨이지만 매년 다른 모습으로, 다른 환경의 기후 조건에서 다른 체험을 향유하면서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
고행과 해탈 신체적 고행이란 반드시 위대한 수행승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성철스님과 같은 위대한 수행자보다도 더 치열한 용맹정진 속에 신체적 고행을 감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해 태능선수촌에서 신체적 극기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청년들, 세계 챔피온의 꿈을 꾸며 시골 마찻길을 매일 질주하고 있는 권투선수, 월드컵의 함성에 보답하기 위해 사선을 뚫고 있는 축구선수들, 최소한 신체적 고행(physical penance)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감내하고 있는 용맹정진의 도수나 긴장감은 고승들의 고행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퍼뜩 한 운동선수에게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
기나 긴 사색의 출발 니련선하에서 뽀이얀 먼지 속에 서산에 이글이글 지는 해가 대탑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대지를 엄습할 때, 내가 보드가야(Bodhgaya)에 도착한 것은 2002년 1월 8일의 일이었다. 우연히 나의 카메라에 잡힌 니련선하(尼連禪河)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너무도 많은 묵언의 멧세지를 전해줄 것이다. 광활한 대지,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소리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 휘몰아치는 먼지 바람, 깡마른 다리를 휘감어대는 도포자락을 떨치며 무심하게 걸어가는 사나이, 터번 속에 가린 얼굴은 중생의 고뇌를 다 씹어 먹은 듯, 니련선하의 풍진에 자신의 풍운을 다 떠맡기고 있었다. 고타마 싯달타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을까? 저 광막한 니련선하 건너로 희미하게 하늘을 가리운 산이 전정각..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국역 도올 김용옥 1. 법회의 말미암음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 나라 이름】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2. 이 때에, 세존【世尊,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란 뜻이며 부처님의 10가지 이름 중의 하나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목차 서론 1장 프롤로그 인연 철학을 전공하다 광덕사로 가는 길 최초의 해후: 『반야심경』 밑씻개 첫 만남의 충격적 인상: 이것은 반불교다! 별당 용맹정진 소쩍새 울음의 신비 새색시의 인가 엄마의 공안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진짜 중과 가짜 중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임진왜란: 멸사봉공의 자비 영규대사: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 비겁한 유생들의 작태 선조와 서산대사의 인연 선조의 애ㆍ증 콤플렉스 적서지별이 망국지본이 되다 말 탄 서산을 끌어내리는 유생들 이순신을 도운 승군의 활약상, 유정의 위대한 마무리 유정의 눈부신 활약상도 제대로 기록 안 됨 서산과 해남 대둔사 임진왜란과 승과 서산의 입적시 거시기와 예수, 거시기와 철학 서산과 삼가귀감 경허 송동욱 독경하고 싶..
참고문헌 내 서재에 꽂혀있는 책에 한하여, 그리고 내가 이 책 쓰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책에 한하여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내가 이 책을 쓰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는 미즈노 코오겐(水野弘元), 히라야마 아키라(平山彰), 카지야마 유우이찌(梶山雄一) 이 세 분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관해서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선생의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유학하던 시절에는 다 살아 계셨는데 나카무라 선생님 외로는 찾아뵙지 못했다. 그리고 훌륭한 사전을 만들어주신 운허 스님, 지관 스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나온, 고익진 선생의 제자 남호섭군의 꼼꼼한 지적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여기에 실린 모든 분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스바하. 사전류 1. 耘虛龍夏 著. 『佛..
5장 에필로그 20대 초반에 나를 사로잡은 경전, 더불어 살아온 지 어언 반세기, 그 50년의 통찰을 꼭 글로 써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지만, 그 통찰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솔직히 말해서 나에겐 처참한 투혼의 발로였다. 나의 발언의 형식으로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국민 모두에게 방영된 내용을 가지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날 고소했다는 것이다. 고소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웃어넘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같이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내 평생 사적이든 공적이든 일체 ‘장’ 자리에 앉은 적이 없다)는 그 번거로운 프로세스가 한없는 모멸감과 배신감, 그리고 울분의 심사를 끓게 만든다. 마음 편하게 해탈된 경지에서 써야만 할 글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
나에게 보내는 헌사 우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라는 주문은 단지 음역일 뿐이므로 한자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다양한 음역표기가 있으나, 나는 고려대장경의 현장(玄奘)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발음은 우리 절깐에서 흔히 독송하는 발음을 썼습니다. 사계의 권위자인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박사는 우리 고려장경의 텍스트를 그대로 썼습니다. 보통 일본에서는 ‘羯諦羯諦 波羅羯諦, 波羅僧羯諦, 菩提薩婆詞’라는 음역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절깐에서는 보통 마지막 구절을 ‘보리사바하(菩提娑婆訶)’로 표기하지요. ‘승사하(僧莎詞)’도 고대의 발음은 ‘스바하’의 발음이 났던 모양이에요. 그 원래 발음은 매우 명료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
제9강 설반야에서 보리 사바하까지 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겠습니다. 곧 그 주문은 다음과 같이 설하여집니다. 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詞.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인용 목차 반야심경
무등등주와 도일체고액과 능제일체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말합니다. ‘지(知)’는 전체에 걸리는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알지어다. 다음의 사실들을 …… ’하는 식의 구문이지요. 영어로 말하자면 ‘Therefore you should know that ……’과 같은 식이지요. 무엇을 알아야 하나요? 반야바라밀다야말로 위대하게 신령스러운 주문이며, 위대하게 밝은 주문이며, 그 이상이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것은 결코 반야바라밀다를 주문화하거나 주술적으로 만드는 밀교적 장치가 아닙니다. 주문(mantra)이라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시적인 암호로 표현하는 노래와 같은 것이며, 사실 리그베다와 같은 인도 고유의 경전 전체가 주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8강 고지반야바라밀다에서 진실불허고까지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음의 사실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야말로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더 이상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고를 제거할 수 있다. 진실한 것이요,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故.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고. 인용 목차 반야심경
구경열반과 무상정등각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전도된 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경열반(究竟涅槃)’케 되는 것입니다. 여기 ‘구(究)’는 ‘궁극적으로’라는 부사입니다. ‘경(竟)’은 ‘도달한다’는 동사입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도달케 된다는 것이지요. 열반이란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욕망의 불길, 전쟁의 불길이 다 꺼진 상태, 우리에게 통일이야말로 ‘열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의 불길, 앞서 말한 4가지 공포에서 유래되는 욕심의 불길이 만드는 것입니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무명(無明)의 인간들 때문에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히틀러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반공을 열렬히 외치고..
전도망상에서 멀리멀리 벗어나라 내가 요즈음 내복을 하도 오래 입다 보니 고무줄이 다 삭아버려서 오랜만에 동네 내복상점에 갔어요. 내복을 좀 사려고요. 그런데 20여년 안면이 있는 주인청년이 날 붙잡고 호소를 해요. “선생님! 이거 나라가 잘못되는 거 아닙니까?” “왜?” “문 대통령이 너무 정치를 못하는 거 같아요.” “왜?” “김정은을 자꾸 만나서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장사도 안돼요.” “팔아넘긴다니 누가 그런 말 하던가?” “태극기집회 나가는 사람들이 점포에 많이 오는데 다 그렇게 말해요.”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이고, 자네가 뭘 확인해본 것이 있나? 자네도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그 자식들이 분열과 전쟁에 시달리는 세월을 살기를 원하는가?” “물론 아니죠.” “우리가 전쟁의 공..
공포와 몽상 이 단락도 현장(玄奘)의 번역에 기준하여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주어가 ‘보리살타(bodhisattva, 깨달음을 지향하는 유정有情.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닌 보통사람, 즉 싯달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로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리살타의 약어가 곧 ‘보살’이며 그것은 대승운동의 주체입니다. 아라한을 뛰어넘는 새로운 불교의 주체입니다. 결국 반야경의 핵심인 심경」이 설파된 것은 보살에게 설파된 것이고, 그 설파된 내용의 최종적 수혜자는 비구가 아닌 보살입니다. 대승의 수혜자가 되려면 비구도 보살이 되어야만 합니다. 보살을 주어로 했을 때, 어떤 일이 최종적으로 벌어지는가? 보리살타, 즉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이해했고 그 원리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고로, 마음에 일..
제7강 보리살타에서 삼먁삼보리까지 보리살타 즉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는 고로, 공포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된 의식과 꿈같은 생각들을 멀리 벗어나 버리고, 끝내 열반에 도달한다.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무상의 정등각을 얻는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인용 목차 반야심경
법정 스님의 무소유 여기 ‘무소득(無所得)’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무소득’이라는 말은 이미 법정(法頂) 스님께서 ‘무소유’라는 말로 충분히 대중을 설득시키셨고 또 그것을 돌아가시기 전에 완전히 실천하셨기 때문에 우리 대중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본인의 저술조차도 족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 모든 판권을 회수하셨습니다. 아마도 스님의 출판된 글로서는 제 『금강경강해』의 서문으로 남은 글이 유일할지도 모르겠네요. 공수귀향(空手歸鄕)을 실천하신 참 드문 분이지요. 법정 스님은 제가 생전에 많이 만나뵈었지만 참 깊은 인격을 갖춘 분이지요. 글을 보면 매우 여성적이지만 만나뵈면 임제와도 같은 단호함과 강인함이 있는 분이었어요. 보조지눌의 맥을 잇기에 부끄..
우주론적 명제를 윤리적 명제로 이런 구절은 해석이 좀 어렵습니다. 물론 산스크리트 대응구가 있기는 하지만 현장(玄奘)의 번역이 매우 압축된 것이래서 주석가들은 자기 생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구절은 현장의 한역을 그대로 존중하여, 그 한자의 의미맥락대로 뜻을 새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는 여태까지 전개되어온,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래의 모든 기존 불교의 이론을 부정해버리는 ‘무(無)의 철학’을 완성하는 마지막 구문입니다. 그리고나서 “보리살타" 즉 보살이라는 대승의 주체가 주어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대승의 탄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이전의 어떠한 종교와도 획을 긋는 새로..
제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앎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 문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인용 목차 반야심경
12지연기와 4성제의 부정 뿐만이겠습니까? 이 우주가 다 사라졌는데, 인식의 뿌리도 대상도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의식의 필드도 다 사라졌는데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지금부터 말하려는 이 단의 내용이야말로 진실로 소승의 아라한이라면 너무도 공포스러운 보살가나의 혁명적 외침이지요. 싯달타는 싯달타가 아니다. 그는 부처도 아니었다. 그가 생전에 깨닫고 설했다 하는 법문이 다 헛거다. 다 공이다! 보리수 밑에서 12지연기를 깨우쳤다고? 그것도 다 공이다! 다 헛거다! 보살반야의 세계에는 무명(無明)도 없고, 대단한 깨달음을 통하여 무명이 사라진다는 개구라도 없다! 이렇게 해서 12지연기의 모든 항목(지支)이 없다. 그리고 그 항목이 환멸연기에 의하여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늙어 뒈진다는 것도 없고, 늙어 뒈진다..
제5강 무무명에서 무고집멸도까지 뿐만이냐!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의 부정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무무명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그러니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러한 12연기를 요약적으로 표현한 고ㆍ집ㆍ멸ㆍ도 또한 없는 것이다.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인용 목차 반야심경
18계의 이해 이제 공 속에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모두 다 없다라는 말은 쉽게 이해하시겠지요. 이제 ‘18계(十八界)’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18계이론은 싯달타 본인이 설한 법문으로서 아함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싯달타의 12연기 속에도 육입(六入)의 항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싯달타는 이러한 논의를 인식론적 체계로서 설법한 것 같지는 않아요. 부파불교시대 때부터 인식론적 다르마의 논의가 강화되면서 체계화되었고, 후대의 유식론에서 그것이 매우 심오하게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나식이나 아라야식과 같은 문제는 다루고 있질 않으므로 유식론과 정면으로 대결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불교 인식론의 기본개념으로서 18계이론을 제너럴하게 이해하시면 족할 것 같습니다. 우선 서양근대 인식..
제4강 시고공중무색에서 무의식계까지 그러므로 공의 모습 속에는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상도 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다. 따라서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없고,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도 없고, 또한 안식계에서 의식계에 이르는 모든 식도 없다.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인용 목차 반야심경
『심경』의 육불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 여기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모든 다르마(dharma)’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여기 법이라 하는 것은 무슨 거대한 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사건, 이벤트, 사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Event)이 공상(空相, 공의 모습)인 세계에서는 생멸(生滅)이 없으며, 구정(垢淨)이 없으며, 증감(增減)도 없다. 이 공상의 세계,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아 조견한 코스모스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여기에 세 종류의 아니 불(不) 대구가 나열되어 있는데, 상대되는 개념에 아니 불을 붙여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은 인도인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우파니샤..
제3강 사리자에서 부증불감까지 사리자여! 지금 내가 깨달은 세계, 반야의 완성을 통해 조련한 세계, 제법이 공한 이 모습의 세계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구부정 부증불감 인용 목차 반야심경
오온의 가합일 뿐인 나는 좆도 아니다 나(我, Ego)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다섯 가지 오온(五蘊, 다섯 가지 집적태)의 가합(假合, 일시적 조합)입니다. 그런데 가합의 요소인 색ㆍ수ㆍ상ㆍ행ㆍ식 하나하나가 또다시 공입니다. 리얼하지 않은 것이지요.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라미(RAMI)만년필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영속할 수 없는 가합입니다. 튜브에 들어있는 잉크만 말라도 만년필은 제 기능을 못합니다. 펜촉은 순간순간 닳아 없어지고 있어요. 이 글을 쓰고 있는 200자 원고용지도 몇 년이면 바스러집니다. 이 만년필을 쓰고 있는 내 손도 1ㆍ20년 후면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쓸 수 있게 만드는 나의 팔이 아닌 나의 식(識)도 곧 고혼(孤魂)이 되어 태허(..
관자재보살이 오온개공을 상설한다 심반야바라밀다를 행한 관자재보살은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는 우주적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고액(고액에 관하여서도 팔고八苦니, 사액四厄이니 썰說을 펴나 다 부질없는 구라일 뿐. ‘괴로움’ ‘무명 속의 유전’으로 족하다)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문 중에서도 ‘지혜제일’이라는 사리자(=사리불Śāriputra. ‘뿌뜨라’는 ‘아들’의 뜻, 엄마 이름이 샤리이고 그 아들이라는 뜻이다)를 골라, 사리자에게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이치를 설파합니다. 사리자를 특칭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현장에는 사리자 혼자 듣는 것이 아니지요. 그 뒤에는 장대한 사부대중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리자’를 선택하여 골라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인즉 바..
제2강 사리자에서 역부여시까지 사리자여!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색이 공에 다르지 않고, 공이 색에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나머지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같다는 뜻이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인용 목차 반야심경
조견, 도, 일체고액, 오온 다음 ‘조견(照見)’이라는 말도 ‘비추어 안다’ ‘총체적인 우주의 통찰, 즉 전관(全觀)에 도달한다’는 뜻이지요. 무엇을 조견하는가? 조견의 내용 역시 우주론적 통찰입니다.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통찰한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되면 일체의 고액(苦厄, 고와 액, 고통과 재액)을 극복하게 된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는 문구는 어느 산스크리트어 원본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장(玄奘)의 역문에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장이 한어의 문맥에 따라 첨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度)”’ 일체고액을 넘어간다, 그러니까 극복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거꾸로 현장이 본 산스크리트 원본에는 이 구절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현존하는 산스크리트본이 모두 ..
관자재, 관세음의 뜻과 기자 이상호 원래의 이름은 ‘Avalokiteśvara’인데 이것은 ‘보는 것, 관찰하는 것(avalokita)이 자유자재롭다(iśvara)’는 뜻이니까, 사실 ‘관자재보살’ 이라는 현장(玄奘)의 번역이 원의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라집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번역을 선호했습니다. 『묘법연화경』을번역할 때도 라집은 ‘관세음’과 더불어 ‘관음(觀音)’이라는 역어를 썼습니다.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은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우리 민중은 라집의 ‘관세음보살’이라는 표현을 사랑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소리를 본다’가 되어 좀 이상하지만 인도인에게 ‘본다’는 것은 ‘심안’의 감지, 통찰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주석가들에 의하면 ..
관세음보살이 지혜의 완성을 이야기하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첫머리는 ‘관자재보살’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반야심경(般若心經)』 전체의 주어가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설법의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죠.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후대에 등장한 보살의 말씀으로 지고의 경전이 성립했다? 이것이 바로 대승경전의 특징입니다. 더군다나 관세음보살이 법을 설한 대상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사리불이죠! 사리자가 누구입니까? 사리자는 바라문 계급의 출신으로서 왕사성 부근의 우파텃사(Upatiss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얘기는 유명하지요. 하여튼 그는 지혜가 뛰어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죠...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제1강 관자재보살에서 도일체고액까지 관자재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오온이 다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을 뛰어넘으셨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인용 목차 반야심경
결론: 벼락경과 아상 버리기 여기서 아예 결론을 내버리는 것이 좋겠군요. 여러분들께서 제 『금강경강해』를 읽으셨다는 전제하에서 아예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동일한 주제를 전달하는 대승경전인데, 『금강경』의 주제는 초장에 이미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있습니다.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열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계율과 지혜의 길항성 자아! 이제 앞에서 말한 ‘6바라밀’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에 다 바라밀이 붙지만(보시바라밀, 지계바 라밀…… 이런 식으로) 실제로 ‘완성’을 의미하는 ‘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5덕목에는 붙을 수가 없습니다. 앞의 5덕목은 오직 ‘지혜의 완성’을 통해서만 바라밀의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6바라밀’이라고 하지만 지혜바라밀은 여타 덕목과 차원이 다른 것이죠. 여기에 나는 여러분께 “계율과 지혜의 길항성” 이라는 인간 보편의 테마를 제시하려 합니다. 대승은 비구ㆍ비구니집단이 아닙니다. 오늘날 해인사ㆍ송광사 등의 절간에 출가하는 자들에게는 대승을 운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소승집단이 되어버린 것이죠. 소승이라고 꼭 나쁠 게 없어..
바라밀의 해석 다음, 우리는 제목이 되는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을 해설해야 하겠습니다.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의 출발이다’라는 말은 누누이 반복되었습니다. 반야사상은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정의된 사상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대승불교는, 우리가 소승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지만, 그냥 방편상 그렇게 부르고 있는 초기불교의 승가집단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조직과 이론으로부터 발생한 새로운 불교운동입니다. 여러분! 대형버스와 고급자가용세단과 뭐가 다를까요? 버스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해서 세단은 안면이 있거나 신분이 있거나 특수관계에 있는 소수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싼 버스표만 있으면 탈 수 있지요. 작은 수레(소승)와 큰 수레(대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
구마라집 『심경』, 번역본의 문제점 자아! 그렇다면 구마라집의 번역은 소품일까요, 대품일까요? 우리가 보통 소품이라 하면 현장(玄奘)의 『심경』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라집의 번역을 대품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라집의 번역은 현장의 것과 같은 소품계열입니다. 상기의 8개 중에서 소품계는 1ㆍ2ㆍ7뿐이고 나머지 5개는 다 대품계입니다. 그런데 제7의 『심경』」은 번역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본을 발음대로 한자로 써놓은 것이죠. 그러니까 한자발음기호지요. 얼마나 부정확한 발음표기이겠습니까마는 이러한 음역본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자의 음가를 재구(再構)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사실 불경 때문에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이 발전했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품계 한역은 라집 것과 ..
『심경』 8종, 그리고 대본과 소본 우선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하는 경전은 AD 649년에 현장(玄奘)이 역출(譯出)했다고 하는 텍스트를 기준으로 삼고 있고, 그 가장 정종이 되는 판본은 우리 고려제국의 대장경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현장이 인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후 4년 만에 이 『심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장 이전에, 일례를 들면 구마라집(350~c.409)이 번역한 『심경』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대정대장경에 수록된 『반야심경』만 해도 다음의 8종류가 있습니다. 학구적인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8종을 우선 써보겠습니다. 1.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1권,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 No.250 2. 『반야바라밀다..
종교의 대승화 의의 세부적인 면에서 얘기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대승불교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고, 『반야심경』 본문에 즉하여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보기로 하죠! 대승불교의 혁명적 성격을 우리는 너무도 진부한 상식적 언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예를 들자면, AD 1세기에 일으킨 예수운동(Jesus Movement) 그 자체는 오히려 매우 혁명적이고 구약(소승)에 대하여 대승적인(신약: 새로운 약속)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서화 되면서 정경화 되었고 권위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그 권위를 뒤엎는 새로운 대승의 개방의 과정을 겪지 못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도 ..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전혀 다른 성격 다섯 가지 자아!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간결하게 대승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불경스럽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자각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리리타(自利利他)’, ‘자각각타(自覺覺他, 스스로 깨우침으로써 타인을 깨우침)’의 염원을 제1의 목표로 삼습니다. 자기의 구제만에 전심하여 타인의 구제를 등한시하는 소승의 종교가 아닙니다. 철..
타부시되던 불상이 만들어지다 마우리야왕조는 아쇼카 이후 쇠퇴의 일로를 걷습니다. 그리고 AD 30년경에는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가 월지종족을 통일하고 박트리아의 문화를 계승한 쿠샨왕조를 세웁니다. 쿠샨왕조의 4대 왕인 카니슈카대왕(Kanishka I, AD 127~140 재위)이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앞서 논의한 바와 같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보살운동은 불상문화와 결합되면서 놀라운 힘과 체제와 하부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초기불교에는 계율이 심했고 타부가 많았습니다. 제일 큰 타부 중의 하나가 입멸한 석존은 절대 형상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형상의 윤회를 초월하여 무형의 세계로 들어간 불타를 또..
구라꾼과 보살과 보살가나의 등장 그런데 이 대중에게 한 가지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싯달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각자(覺者)인 붓다가 되었는가? 그의 인생스토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석가족의 성자)의 라이프 스토리는, 리얼 스토리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탑돌이하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양식화 되어간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윤회를 전제로 하는 인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무궁무진한 전생담(싯달타 전생의 이야기들. 본생담本生이라고도 한다)의 구라가 끝없이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탑돌이를 하는 귀부인들은 먼 길을 고생해서 왔는데 몇 시간 있다가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몇..
새로운 스투파문화와 개방된 성역의 형성 그러나 불교사적으로 아쇼카왕 시대에 일어난 가장 거대한 변화는 스투파신앙의 대중화라는 현상입니다. 스투파(stūpa)는 졸탑파(卒塔婆,) 솔탑파(率塔婆), 솔도파(率都婆)라고 음역되는데 약하여 탑파(塔婆), 그냥 탑(塔)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우리말의 ‘탑’이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스투파’의 음역이 변화하고 축약되어 만들어진 말입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탑은 기와집처마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린 석조조형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양식적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목조건물모양이 석조화 된 것이죠. 그러나 인도인들의 스투파는, 우리의 탑의 개념과는 다른, 진짜 무덤인데, 벽돌을 엄청 크게 산처럼 쌓아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
아쇼카 시대의 결집 다시 말해서 자리(自利, 자기를 이롭게 한다, 자기 개인의 구원을 추구한다. svārtha, ātma-hita)만을 추구했지 이타(利他,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parārtha, para-hita)의 결과를 초래하지 못했습니다. 불교의 원래적 의도는 자리(自利)를 통하여 이타(利他)가 도모되는, 다시 말해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합일이 되는 경지에 있을 것입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함)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하는 삶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권위화되어가고 소수집단화되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체적 방향성에 새로운 계기가 생겨납니다. 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불리우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
초기 수행자들의 엄격한 계율과 한계 나는 싯달타를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업(業, karman)이라든가, 윤회(輪廻, saṃsāra)라든가, 열반(涅槃, nirvaṇa, 니원泥洹이라고도 음사한다) 같은 것은 한국사람들에게 김치와도 같이 인도사람들의 생활 속에 배어있는 아주 기본적인 사유의 틀이고 감정의 원천이지요. 이러한 기본적인 틀에 대하여 싯달타는 조금 혁명적인 생각을 한 것뿐이죠. 그러나 싯달타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위대한 초기 경전들이 결집되었다는 것이고, 또 그 경전의 내용들이 계속 발전적으로 부정되고 확대되어 나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죠. 싯달타 대각자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초기승단의 사람들..
싯달타의 자기파멸과 자기 완성의 길 여러분은 정말 고타마 싯달타라는 청년이 정말 샤카족 카필라성의 왕자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4성문에서 충격 받는 일들을 목격하고 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런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살아있는 동안 무지막지하게 비상식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고 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예수의 생애와는 달리 아무런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싯달타의 실존성에 관해서는 예수만큼이나 구체성이 없습니다. 그에 관한 얘기들은 결국 알고 보면 양식화된 후대의 기술이니까요. 그의 생존연대도 BC 6세기부터 4세기까지 왔다갔다 하니깐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만 해도 최근에는, 사도 바울이라는 유대인 사상가가 신화적인 죽음과 부활의 테마를 통하여 에클레시아(교회조..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 보살의 의미 그 첫째가 성문승(聲聞乘), 그 둘째가 독각승(獨覺乘, 혹은 연각승緣覺乘), 그 셋째가 보살승(菩薩乘)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3승은 실제로 기나긴 초기불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聲]를 실제로 들은[聞] 사람들이니까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불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싯달타의 자가용에 자연스럽게 올라탈 수 있는 선택된 소수들이겠지요. 그 다음에 독각승이라는 것은 홀로[獨] 깨닫는[覺] 사람, 즉 선생이 없이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들, 12인연을 관하여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합니다. 분명 이 독각ㆍ연각이야말로 성문 다음 단계에 오는 수행..
대승이란 무엇이냐 자아!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텍스트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해설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반야심경』을 펼치면, 제일 첫머리에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를 해설하려면 ‘관자재’가 무엇인지, ‘보살’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대승불교’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뻐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야경이 대승불교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대승불교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부터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무엇이냐? 이 한 주제만 전문적으로 설하려고 하면 또다시 거대한 단행본을 ..
선불교의 뿌리와 우리 민중의 선택 우리는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라는 삼학(三學)을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성적등지(惺寂等持)의 논의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선종을 정(定)의 측면을 발전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선정이라는 것은 ‘정신수양’의 생활이요 방법론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定)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은 혜(慧)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혜(慧)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언어로 ‘지혜(Wisdom)’라고 생각하면 확연히 그 의미가 잡히지 않는 막연한 개념입니다. 부파불교시대까지만 해도 ‘혜’는 그냥 지혜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반야경과 대승불교와 선불교 『금강경』과 『심경』은 어느 쪽이 더 먼저 성립했을까요? 『금강경』은 구라의 질감이 매우 평이하고 비개념적이며 시적이며 반복의 묘미가 매우 리드믹한 느낌을 형성하고 있지요.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반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260개의 문자 속에는 이미 ‘공(空)’이라는 철학용어가 나오고, 오온(五蘊),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와 같은 기초이론이 깔려있는가 하면, 용수(龍樹, Nāgārjuna, c.150~c.250)의 중론(中論)의 논리도 이미 반영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
반야경과 도마복음서 『반야심경』의 ‘심(心)’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야를 성취하는 우리의 마음을 설하는 경처럼 오해하는데, 여기 ‘심’은 ‘흐리다야(hṛdaya, 음역은 흘리다야紇利陀耶)’의 뜻으로 그러한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물리적인(의학적인) 용어로서 신체의 중추를 형성하는 심장(Heart)을 의미합니다. 육단심(肉團心이라고도 번역하지요. 그리고 밀교에서 만다라(曼茶羅)를 그릴 때 그 전체구도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심인(心印, hṛdaya-mantra)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말의 ‘핵심(核心)’이라는 말이 그 원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般若心經)』이란 600권의 방대한 『대반야경』의 핵심을 요약한 경전이라는 뜻..
확대와 축약 자아! 간단히 생각해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반야경전은 대강 AD 2세기 지루가참의 『도행반야경』으로부터 AD 7세기 현장(玄奘)의 대전집 『대반야경』에 이르는 소품계, 대품계, 밀교계의 다양한 경전들이 열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핵심경전의 성립을 AD 1세기로 본다면 약 600년간의 끊임없는 확대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반야사상은 인기가 있었고 대중의 호응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헌은 ‘확대’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번잡하게 교설이 확대되어 나가는 중에 혹자는 이렇게 뇌까릴 수도 있습니다. “에이 씨발 뭐가 그렇게 복잡해! 번뇌를 버리고 잘 살면 되는 거 아냐? 한마디로 하자구! 한마디로!” 이러한 확대과정에 역행하여 극도의 축약화..
현장의 『대반야경』이라는 거질 현장(玄奘)이라는 정력적인 역경대가가 AD 663년 10월 20일에 『대반야경』이라는 책을 번역ㆍ완성합니다. 그리고 넉 달 후에 그만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664년 2월 5일 야밤중. 향년 63세). 요즈음으로 보면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요즈음 사람들이 공연히 오래 사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대반야경』이라는 책이 언제 번역과 편집을 시작한 것인지 아세요? AD 660년 원단(元旦)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과 3년 11개월 만에 그 대작을 완성한 것이죠. 그런데 미치고 똥 쌀 일이 하나 있어요. 이 『대반야경』의 분량이 얼마나 방대한 것인지 아세요? 8만대장경판 중에서 단일 종목으로는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인데,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편집된 대정대장경의..
쿠샨왕조의 성격: 포용적 문화, 불상의 탄생, 대승의 기반 쿠샨왕조는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개화된 상업인들의 마인드가 이 문화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쿠샨왕조는 금화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금화를 보면, 희랍, 로마, 이란, 힌두의 신들, 그리고 불상을 자유롭게 주조해 넣었는데, 희랍어문자로 친절한 설명까지 첨가해놓고 있습니다. 어느 한 종교에 아이덴티티를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로 이러한 종교적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동서문명의 가교역할을 했고, 불교를 동방에 전래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루가참이 중국에 왔을 때 그 ‘지(支)’는 쿠샨왕조였으며, 매우 개명한 고등문명의 사람으로서 그는 한자문명권에 발을 내딛었던 것입니다. 쿠샨왕조는 이란에서 ..
월지국에서 쿠샨제국으로 이런 얘기를 하기 전에, 딱 한 가지, 지루가참의 ‘지(支)’에 관한 얘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월지(월씨)는 본시 흉노족이 크게 세력을 떨치기 이전에 돈황과 기련산(祁連山) 사이의 영역, 그러니까 감숙성의 서쪽에 살던 상당히 강인하고 영리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영역을 ‘하서주랑(河西走廊, Hexi Corridor)’이라고 부르는데 중국 내지(內地)의 서역통로로서 가장 중요한 요도(要道)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고조선 제국의 일부 종족이 서진하여 정착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월지는 흉노족의 중흥조인 라오상츠안위(老上單于, Lao Shang, BC 174~161 재위)의 공격에 대패하고 그들의 왕이 살해당하자, 월지의 주간세력이 서진하여 소그디아나(Sogdiana)와 ..
『8천송반야경』의 유일한 조형과 대승불교의 출발 『도행반야경』은 현존하는 『8천송반야경』의 유일한 조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도행반야경』을 번역한 지참(支讖, 지루가참의 약칭)은 월씨국에 『8천송반야경』의 산스크리트 원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8천송반야경』의 원형의 모습을 우리는 『도행반야경』에 의해 추론할 수 있을 뿐입니다. 현존하는 한역본 『도행반야경』을 거꾸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면 『8천송반야경』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겠다는 것이죠. 그러나 과연 지루가참이 산스크리트 원본을 문자 그대로 직역했을 것인가? 사계의 대학자인 카지야마 유우이찌(梶山雄一, 1925~2004)【경도대학 철학과 출신의 불교학자. 경도대학 문학부 교수로서 경도학파를..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과 월지국 루가참의 기적 같은 번역 그럼 진짜 『8천송반야경』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현존하는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속에 반야라는 말이 들어간 아주 희한한 경전이 하나 있습니다.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라는 문헌이지요. 인도사람들은 진리의식만 강하고, 역사의식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누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서 기술하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인도역사기술방식에서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 힘든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죠. 그런데 「도행반야경」이라는 문헌은 지루가참度이라는 번역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고, 그 번역자가 중국에 와서 이 경을 한역(漢譯)한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인도측 역사에서는 얻기 어려운 것이기에 진실로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8천송반야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 ‘8천송(八千頌)’이라는 것은 분량을 말하는 것인데 대부분 옛날 인도경전이 노래로서 암송되었기 때문에 ‘송(gāthā, 偈陀, 伽陀)이라 하는 것이고, 이 노래는 여러 형식이 있지만 불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슐로카(śloka)라는 것입니다. 슐로카는 1구가 8음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이 2구 연결된 것이 또다시 2행을 이루어 하나의 그룹(스탄자stanza 같은 것)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8음절 4구 32음절(8×4=32)의 산스크리트 시형(詩形)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32음절의 슐로카가 8천 개가 모인 반야를 설하는 노래가 바로 『8천송반야경』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8천송반야경』은 25만 6천 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우..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경의 이해 이제 우리는 3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혜(慧)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혜는 의역이고(선진경전에서 ‘慧’는 특별한 의미가 없던 글자였다), 그 음역이 바로 ‘반야(般若)’라는 것이죠. 반야란 무엇인가 바로 이 주제가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자아!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반야경’이라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반야사상을 표방한 경전들을 총칭하여 일반적으로 ‘반야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계의 권위자인 히카타 류우쇼오(干潟龍祥, 1892~1991, 동경제대 철학과 졸업. 구주제대九州帝大교수. 일본의 인도철학자)는 의미 있는 중요한 반야경으로서 27경을 꼽고, 독일계 영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반야경연구 전문가, 에드워드 콘체(Ed..
삼학과 삼장, 성묵과 법담 계ㆍ정ㆍ혜는 싯달타의 삶의 과정을 요약한 것일 수도 있지요. 달타가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 앉기까지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계(戒)였습니다. 그리고 보리수(핍팔라나무) 밑에서 선정에 들어갔지요. 그것이 바로 정입니다. 그리고 정을 통하여 아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합니다. 그러니까 싯달타의 계를 담은 것이 율장이고, 싯달타의 정(定)을 담은 것이 경장이고, 싯달타의 혜를 담아놓은 것이 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약간의 디테일한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인 의미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에는 율장과 경장만이 있었다. 논장은 후대에 성립한 것이다). 삼학 三學 계(戒) 율장(律藏) 대장경 大藏經 tri-piṭaka 정(定) 경장(經藏) 혜(慧) 논장(論藏) 싯달타는 어려서..
득도와 화두 생각해보세요! 여기 스님이 한 분 있다고 합시다. 왜 이 사람을 스님이라고 우리가 존경을 할까요? 우선 스님이 됐다고 하는 것은 ‘수계(受戒)’를 의미합니다. 즉 계를 받아야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섹스를 좋아하고 올가즘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을 양보할 수 없는 인생의 도락으로 엔죠이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참기 어려운 쾌락의 향유를 근원적으로 포기한다, 왜 그럴까요? 득도를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여튼 보통 사람이 실천하기 어려운 매우 근원적인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 그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님이나 신부를, 비구니나 수녀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죠. 스님이 색이나 밝히고 돌아다닌다고 한다면 우리가 왜 그들을 존경해야 할까요? 계..
지눌의 정혜쌍수 보조(普照) 지눌(知訥, 1158~1210)도 무신정권이 발흥하여 대고려제국의 정치체제와 결탁된, 축적된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선불교의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격외성(格外性, 교외별전敎外別傳)이 고려불교 그 자체를 뒤흔들고 있던 시대에, 선(禪)과 교(敎)는 본질적으로 대립되어야 할 양대세력이나 이론체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융합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통불교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해나갔던 탁월한 사상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도통을 전수받을 만한 스승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선이라는 것이 깊게 이해된 상태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독자적인 문학(問學)의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결사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사운동의 핵이 ‘정혜결사(定慧結社)’라고 하는 것인데 바로 계ㆍ정ㆍ혜 삼학의 본래정..
팔정도와 삼학 그런데 4번째의 도제는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엄청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수행자들의 생활규칙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라는 뜻일 텐데, 이 팔정도야말로 원시불교의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죠(우리나라에서는 ‘원시’가 ‘원시인’처럼 ‘primitive’하다는 뉘앙스가 있어 싫어한다. 그리고 초기 불교라고 한다. 나는 불타가 살아있을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 부르고, 적멸 후 한 150년간, 부파불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를 원초적이라는 의미에서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양자를 합쳐서 ‘초기불교’라 불러도 무방하다).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 바른 소견),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
삼학, 유전연기와 환멸연기 자아! 이제 ‘삼법인’과 함께 ‘삼학(三學)’이라는 것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삼학이라는 것은 근본불교시대(역사적 싯달타가 활약하던 가장 근원적인 시기)에 싯달타를 따르는 자들이 선생님이 제시하는 이상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정진하는 데 필연적으로 지켜야만 했던 세 측면의 수행덕목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그 깨달음을 쉽게 일반대중에게 전하기 위해서 설파했다고 하는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성제는 4가지 성스러운 진리(catur-ārya-satya)라는 뜻이죠. 싯달..
심리학과 무신론, 그리고 무아의 종교 여기 이 4명제에 관해 정리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어요. 내가 하바드대학에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미국학생이 나에게 묻더군요? “그럼 불교는 일종의 심리학입니까?” 나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어요. “아~ 그렇죠. 그렇구말구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이 불교를 제대로 못 배우는 것만이 제 한이죠.” 제가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였어요. 목사후보생인 대학원 학생이 묻더군요. “그럼 불교는 무신론입니까? 4법인에 신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없군요.” 나는 학생의 질문에 감동했습니다. 제 강의의 핵심포인트를 너무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추측컨대 ‘무신론(atheism)’이라는 말을 매우 ..
열반적정과 삶의 종교 다음의 제4명제를 분석해보죠. 열반적정(涅槃寂靜, śāntaṃ nirvāṇam) 열반적정이라는 명제는 제법무아(제법에는 기실 아我가 없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또다시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한 측면과도 같은 것이죠. 제행무상과 일체개고가 한 쌍이라면, 제법무아와 열반적정은 또다시 한 쌍이 되지요. 제법이 무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에 들게 되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 이 말이지요. ‘열반(涅槃)’이라는 말은 ‘니르바나(nirvāṇam)’라는 말의 음역입니다. 아~ 참, 제가 가사를 쓰고 제 친구 박범훈이 곡을 만들고 박애리가 노래 부른 ‘니르바나’라는 작품이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데 그것을 보셨나요?(2018년 6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초연, BTN 제작, 29분 ..
제법무아의 아트만과 실체 자아! 이제 제3의 명제를 분석해봅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sarvadharma anātmānaḥ 여기 ‘제법’이라는 말 속에, ‘모든’의 뜻을 가지는 ‘제’ 이외로 ‘법(法)’이라는 말이 주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 ‘다르마(dharma)’라는 말처럼 불교세계에서 넓게 쓰이는 말도 없습니다. 다르마는 법칙, 정의, 규범의 뜻도 있고, 불타의 가르침을 총칭해서 쓸 때도 있고, 덕, 속성, 원인의 뜻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번역가들이 중국고전 중에서 법가에서 쓰이는 ‘법’이라는 개념을 선택했지만 기실 다르마는 법(法)보다는 도(道)라고 했어야 옳을 것 같아요. 그런데 4법인 제3명제에서 쓰인 ‘법’은 매우 단순한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냥 사물, 물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매..
중동 사막문명의 테마: 죄 중동으로 가면 상황이 아주 달라져요. 고조선-고구려문명의 테마가 ‘생(生, Creative Advance)’이고, 인도문명의 테마가 ‘고(苦)’라고 한다면 중동문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테마는 역시 ‘죄(罪, Sin)’입니다. 사막에서의 삶은 공동체의 영역이 매우 좁으며, 대자연의 순환이라는 생생지도(生生之道)에서 단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지를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땅에 대한 애착과 신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수직적 관계 속에서 초월적 ‘존재’로서만 인식되고, 우주의 순환이라는 시공범주를 벗어나 버리죠. 그런데 사막의 사람들이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자에 대하여 갖는 의식은 ‘죄’라고 하는 한계 상황을 통해 매개됩니다. 여러분들께서 구약의 레위기 18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