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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붓다와 예수의 최후의 말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諸法)이란, ‘법(法)’이라 해서 무슨 대단한 ‘달마’나 ‘진체(眞諦)’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나 유식(唯識)에서 칠십오법(七十五法), 백법(百法) 운운했듯이 그냥 ‘모든 존재(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법(法)은 존재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법을 크게 두 카테고리로 나눈다. 하나는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든 유위적 법(法, 존재)이요, 하나는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한 무위적 존재다. 전자를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후자를 무위법(無爲法)이라 하는데, 유위법 속에는 또다시 크게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유법(心所有法),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의 4카테고리가 있..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윤회의 공포 바로 여기까지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의 ‘이와 같이’의 내용을 부연설명한 것이다. 즉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한 것이다. 바로 이 3절의 내용이야말로 대승정신의 출발이며, 바로 『금강경』」이 『벼락경』이 될 수밖에 없는 전율의 출발인 것이다. 벼락같이 내려친 대승(大乘)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여기 붓다의 결론이 너무 쉽게, 너무 퉁명스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기에 앞서 별 느낌이 없는 무감각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과연 붓..

3-2.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 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 ‘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기심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약태생, 약습생약화생, 약유색약무색, 약유상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령입무여열반이멸도지. ‘소유(所有)’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있는 바’의 뜻인데, 백화문에서는 이 자체로 ‘일체’라는 뜻이 된다. 다음에 ‘일체(一切)’라는 것이 다시 나오..

3. 대승의 바른 종지 대승정중분(大乘正宗分) 3-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뭇 보살 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 佛告須菩堤: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명태자의 분의 이름은 적합치 못하다. 왜냐하면 『금강경』의 본경에 해당되는 부분(13분 2절까지)에서 이 ‘대승(大乘)’이라는 표현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최초의 혁명적 보살운동이 아직 ‘대승’이라는 규합개념(organizing concept)으로 ‘소승’과 대비되기 이전의 소박한 진리를 이 경(經)은 설(說)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의 대승은 오직 ‘보살’일 뿐이요, ‘선남선녀’일 뿐이요, ‘더 이상 없는 수레(agrayāna)..

2-5.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唯然世尊! 願樂欲聞.” “유연세존! 원락욕문.” 이 짧은 한마디 속에는 무수한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유연(唯然)’은 단순한 ‘예(唯)’라는 대답의 음사(音寫)에 ‘연(然)’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예’는 붓다의 선포(케리그마)에 대한 보살들의 긍정이다. ‘그러하옵니다!’ 즉 ‘이와 같이’란 내용이 설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열음’이다.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편해진다. 긴장이 사라진다. 갈등구조들이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진리는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유(Enjoyment)의 대상이다. 존재는 곧 향유, 즐김인 것이다. 즐길 수 있을 ..

2-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佛言: “善哉! 善哉! 須菩堤!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聽! 當爲如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얼마나 강력하고 단호한 붓다의 말씀인가? 좋다! 좋다! 나는 네 말대로 못 보살들을 잘 호념하고 잘 부촉한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여금체청(汝今諦聽)’에서 ‘여(汝)’는 ‘너’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

2-3.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세존! 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지혜는 마음의 문제다! 2-2절에서의 질문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의 라집역도 산스크리트 원문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맛보다 라집본의 맛이 더 명료하고 그 의취가 깊다.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란 불전에서 매우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특별히 선택된 승가의 멤버가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보통사람들’의 뜻이고, 여기서는 ‘보살’(구도자求道者)의 다른 표현..

2-2.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희유세존! 여래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산스크리트 원문을 무시하고 집본(什本)을 그대로 볼 때에 ‘희유(希有)’는 세존(世尊)을 수식하는 형용구로 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의 뜻이 될 것이다. 세존(世尊)은 이미 상설(詳說)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호칭으로 부를 때는 ‘세존(世尊)’이라는 말을 쓰고, 구체적인 문장의 주어로 쓰일 때는 ‘여래(如來)’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집(羅什)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숙달된 맛에서 생겨난 것으로 산스크리트 원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불(佛), 세존(世尊..

2.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선현계청분(善現啓請分) 2-1. 이 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時, 長老須菩堤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시, 장로수보제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이백불언: 소명태자의 분의 이름은 4자의 제약 때문에, 수보리(須菩提)라는 3글자 이름을 쓸 수 없으므로, 그것을 줄여 표현한 것이다. ‘선현(善現)’은 바로 ‘수보리(須菩提, Subbūti)를 의역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후에 현장(玄奘)은 바로 이 의역을 채택하였다. ‘세존(世尊)’과 같은 것은 ‘박가범(薄伽梵)’이라..

통석(痛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 나는 매우 엄격하고도 신실한 기독교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우리어머니는 기독교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민족의 구원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개화(開化)의 세기를 사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성경』 구절을 외워야 했다. 그리고 학교 가기 전에 안방윗목 문턱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면 한 구절당 10원을 탔다. 그리고 못 외우면 종아리를 맞았다.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을 몽땅 외우다시피 했다. 나의 고전에 대한 소양은 이렇게 해서 길러진 것이다. 동양고전에 대한 기초 소양도 우리 모친이 이렇게 해서 길러준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신나게 외운 것으로 ‘산상수훈(Sermo in monte)’이라는 것이 있다. 이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가장 완정한 형태..

앉아서 들어야 들린다 제일 마지막 표현인 ‘부좌이좌(敷座而坐)’는 라집(羅什)의 위대성을 잘 드러내주는 명번역 중의 명번역이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면, ‘이미 마련된 자리에 앉아, 양다리를 꼬고, 몸을 꼿꼿히 세우고, 정신을 앞으로 집중하였다.’로 되어 있다. 이미 설정된 자리에 쌍가부좌를 틀고 등을 세우고 입정(入定)하였다는 뜻인데, 현장(玄奘)은 이러한 원문에 충실하여 ‘어식후시(於食後時), 부여상좌(敷如常座), 결가부좌(結跏趺坐), 단신정원(端身正願), 주대면념(住對面念)’이라고 구구한 문자를 늘어놓았다. 집(什)【앞으로 꾸마라지바(鳩摩羅什)를 약(略)하여 집(什)으로 쓰기도 한다】의 위대성은 바로 문자의 간결함과 상황적 융통성이다. 특정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보다는 불특정의 장소에 방석이나 자..

1-4.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설법에 동참하려면 발을 씻어라 그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잔잔한 영화 속에 클로즈엎 되어 나타나는 컷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하나둘씩 스러져간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번뜩이는 금강의 지혜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루의 일과 속에서 설파(說破)되었다고 하는 사실의 파라독스다. 가장 일상적인데 가장 벼락 같은 진리가 숨어있다고 하는 긴장감을 이 붓다의 행동은 보여 준다. 의발을 거두어들이고,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는 이 모든 평범한 의례가 바로 금강의 지혜에 번뜩이는 자가 바로 금강의 지혜를 설(說)하려는 그 순간에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다..

1-3.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於其城中, 次第乞已, 環至本處, 飯食訖.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식글. 우리말은 세조언해본을 많이 따랐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문의(文義)를 해석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그 실제로 일어난 상황을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1분 3절은 바로 그러한 이미지가 명료하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새벽에 먼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깨어난 비구승들이 가사를 챙겨입고 바리를 들고 1km 떨어진 대성(大城) 안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성안에서 차례로 밥을 빌고, 다시 기원(祇園)의 숲으로 돌아오는 평화롭고 웅장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차제(..

1-2.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이시,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나의 국역은 세조본 언해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수양대군 세조께서는 마지막 ‘걸식(乞食)’을 1~3절의 첫머리에 붙도록 끊어 읽었다. ‘입사위대성(入舍衛大城),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 어떻게 끊어 읽든지 그 의미상에 대차는 없으나 나는 ‘입성(入城)’과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너무 뜻이 반복되므로,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뒤로 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선 주어의 표현이 달라졌다. 앞에서는 ‘불(佛)’이란 표현을 쓰고, 여기서는 ‘세존(世尊)’이란 표현을 썼다..

라집과 산스크리트원본 금세기 일본의 대불교학자라 할 수 있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동경대학 인도철학과 중심으로 활약】는 역으로 의정(義淨) 외의 타5본(他五本)에 보살ㆍ마하살이 없으므로 범본의 ‘보살ㆍ마하살’ 부분이 후대의 첨가라고 못박았다. 나카무라의 이와 같은 생각은 『금강경』 전체 텍스트와 그 전체 의미를 고려하지 못하고 부분만을 천착한 데서 생겨난 명백한 단견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기영은 이 단견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국불교연구원(韓國佛敎硏究院)에서 나온 이기영(李箕永) 번역(飜譯)ㆍ해설(解說)의 『반야심경』ㆍ『금강경』(1978 초판, 1997 개정판)은 일본 불교학계의 거장,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ㆍ키노 카즈요시(紀野一義) 역주(譯註)의 『반야심경(般若心經)』ㆍ『금..

1,250명에 대해 우선 큰 비구들 1,250명이라는 숫자부터 문제다. 왜 하필 1,250명인가?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해 역대주석가들의 신통한 논의가 별로 없다. 원시불교 교단의 구성멤버의 수로서 관념적으로 그 숫자를 구성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 비추어, 해인사나 송광사 같은 대찰의 규모에 비견해보아도, 큰 비구스님들 1,250명이라는 숫자는 좀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기원정사의 규모로 볼 때 도저히 1,250명의 스님들을 한자리에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초기승가의 규모가 큰 스님 1,250명 정도가 한자리에 모일 만큼의 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기원정사 본당이 7층짜리 건물이었고, 또 오늘 발굴된 기단의 주춧돌의 규..

방편설법과 대비구(大比丘)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에서 앞의 ‘여(與)’는 우리말의 ‘~과’에 해당되는 전치사이다.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은 그 전치사의 목적이며, 맨 끝의 ‘구(俱)’가 본동사이다. ‘구(俱)’는 ‘더불어 계시었다.’ ‘같이 생활하였다’는 의미이다. ‘중(衆)’은 여기서는 우리말의 ‘들’에 해당되는 복수격일 뿐이다. ‘대(大)’는 산스크리트 원전의 문맥으로 비추어볼 때,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갖춘’, ‘득도(得道)의 깊이가 있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훌륭한 비구들 1,250인)’이라는 말은 좀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금강경』의 설법의 내용은 불교적 진리의 최고봉의 간략한 통찰이..

기원정사(祇園精舍) 붓다 당대의 코살라왕국의 군주는 파사익왕(波斯匿王), 즉 쁘라세나지뜨(Prasenajit)였다. 설화적인 이야기겠지만, 파사익왕은 싯달타와 생년월일이 같다 하고, 또 싯달타가 성불한 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성불한 싯달타를 만나는 순간 그에게 감화를 입어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념적으로 보나, 정치적 관계로 보나 이 두 사람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정신적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붓다의 인격의 위대성과 함께, 그 위대함을 위대함으로 인지할 줄 아는 당대의 통치자들의 큰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사익왕은 초기승가의 절대적인 외호자(外護者)였다. 바로 파사익왕은 국도(國都)인 슈라바스띠(사위성)에서 살고 있었다. 파사익왕에게..

사위국(舍衛國)과 서라벌(徐羅伐)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佛在舍衛國孤樹給孤獨園)’이란 문장은 정확한 사실적 고증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상상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내가 생각키에는 여기서 말하는 ‘사위국(舍衛國)’은 곧이어 뒤에 나오는 ‘사위대성(舍衛大城)’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분명 국(國)과 성(城)은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城)은 국(國) 속에 있는 성곽도시의 개념이다. 사위국(舍衛國)은 여기서는 바로 코살라왕국을 가리킨다. 역사적 붓다가 소속해 있던 샤캬종족의 카필라바쯔는 작은 종족(tribe) 단위의 종족집단정치체제였고, 그것은 보다 거대한 집단인 부족(部族, clan)에 속해 있었다. 당대의 부족은 큰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전제군주체제인 왕국(王國)과 ‘상가’ 혹은 ‘가나’라고 ..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법회의 말미암음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여시아문(如是我聞)과 일시(一時) 제일 먼저 소명태자가 나눈 분(分)의 이름을 설(說)하겠다. 소명태자의 분명(分名)은 글자수를 모두 네 글자로 맞추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약간의 무리가 있는 상황도 있다...

금강경 강해 목차 김용옥(金容沃) 서문 / 경후설(經後說) / 감사의 말 서두 들어가는 말제1명제: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제3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금강경(金剛經)』에 대하여선종의 대표경전으로 착각된 이유6바라밀현장의 신역소명태자두 경전과의 최초의 만남명심포니군주들의 인간적 고뇌기존 주해서 ‘금강’의 의미?콘체가 다이아몬드로 번역한 이유나의 무화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소승과 무관한 소승개념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의 거부가 대승의 출발무아와 소승금강경은 선이 아니다 주해 제1분 법회의 말미암음 제2분 선현이 일어나..

4. 금강경은 선이 아니다 올 봄, 초파일의 신록이 우거질 즈음의 일이었다. 나는 우연히 내설악(內雪岳)의 백담(百潭)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의 회주(會主) 큰스님께서 날 알아보시고 만남을 자청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오실(奧室)로 안내되었다. 법명(法名)이 오현(五鉉)! 아무리 그것을 뜯어 보아도 법명의 냄새가 없었다. 나는 우선 그것부터 여쭈었다. “그건 어릴 적부터의 내 이름입니다. 중이라 할 것이 따로 없으니 그 속명이 바로 내 법명이 된 것이지요.” 낌새가 좀 심상치 않았다. “내가 도올선생을 뵙자고 한 뜻은, …… 아무리 여기 백담에 백칸짜리 가람을 짓는다 한들, 그곳에 인물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자연만 훼손하는 일이지 뭔 소용이 있겠소?” 오현 스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이와같은 제안을 ..

3. 무아와 소승 그렇다면,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부처의 삼법인(三法印) 중의 가장 궁극적 법인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규정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무아(無我)’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보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我相)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四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부정에 곧 그 보살의 원초적이고도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법당(法堂)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2.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의 거부가 대승의 출발 불교사적으로 ‘소승’이란 주로 ‘부파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이란 이 부파불교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어떤 혁신적 그룹의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ㆍ대승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서 규정된 원래의 의미만을 정확히 맥락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의미를 상황적으로, 유동적으로, 방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뿐인 것이다. 우선 우리의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압축시킨 도식을 하나 제시해보자! 소승(hīnayāna) 阿羅漢(아라한, Arhat) 八正道(팔정도) 대승(mahāyāna) 菩薩(보살, Bodhisattva) 六波羅蜜(육바라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식적 이해 자체가 불교의 근본교의의 이해..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1. 소승과 무관한 소승개념 자아! 너무 번쇄(煩瑣)한 학구적 논의를 떠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을 분석해보자! 도대체 소승(小乘, hīnayāna)이란 무엇이냐? 작은 수레다! 그럼 대승(大乘, mahāyāna)이란 무엇이냐? 큰 수레다! 그럼 소승이 좋은 거냐 대승이 좋은 거냐? 요즈음 아파트도 모두 작은 아파트보다 큰 아파트 못 얻어서 야단인데 아무렴 큰 게 좋지 작은 게 좋을까보냐? 큰 수레가 넉넉하고 좋을 게 아니냐? 작은 길 가는 데는 작은 수레가 좋지, 뭔 거추장스런 큰 수레냐?? 사실 ‘히나(hīna)’라는 의미에는 단순히 싸이즈가 작다는 물리적 사실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렬하고 옹졸하다’는 가치판단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마..

2. 나의 무화 애초에 중국인들이 ‘바즈라’를 ‘금강(金剛)’으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신들이 휘두르는 무기의 이미지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다이아몬드’가 아닌, ‘가장 강한 쇠’(금중최강金中最剛)라는 의미로 쓴 것이며, 대강 철제(鐵製), 동제(銅製)의 방망이었다. 그것이 바로 ‘금강저(金剛杵)’였고, 이 금강저의 위력은 특히 밀교(密敎)에서 중시되었던 것이다. 현장(玄奘)이나 의정(義淨)은 ‘능단금강반야(能斷金剛般若)’라는 표현을 썼고, 급다(笈多)는 ‘금강능단반야(金剛能斷般若)’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무엇이든지 능히 자를 수 있는 금강과도 같은 지혜’라는 뜻이지만, 돈황(敦煌)의 동남(東南)의 천불동(千佛洞)사원에서 발견된 코오탄어표의 『금강경』은 ‘금강과도 같이 단단한 업(業)과 ..

‘금강’의 의미? 1. 콘체가 다이아몬드로 번역한 이유 20세기 구미(歐美) 반야경전학의 최고 권위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콘체(Edward Conze, 1904~1979, 영국에서 출생한 독일인. 맑시즘과 부디즘의 대가)는 『금강경』을 ‘The Diamond Sutra’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강(金剛)’과 ‘다이아몬드"를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오역(誤譯)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물론 콘체 선생이 이것이 오역인 것을 모르고 그렇게 번역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광물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보석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대강 19세기 중엽 이후, 즉 186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렌지강(江) 상류지역에서..

8. 기존 주해서 『금강경언해』는 소명태자가 분절한 라집한역본(羅什漢譯本)과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구결(口訣)』이 실려있고 이 양자의 국역이 다 실려 있어, 나는 그 판본과 국역을 다 참조하였다. 불행하게도 세조언해본 『금강경』 판본은 아주 후대에 성립한 열악한 판본이며 우리 해인사본과는 출입(出入)이 크다. 연세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에 있는 장경준군(張景俊君, 도올서원 제12림 재생)이 『금강경언해』를 내가 활용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타이프치고 고어(古語)를 현대말로 옮겨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공로에 감사한다. 내가 『금강경』을 번역함에 있어 우리 옛말의 아름다운 표현이 참조될 부분이 있을 때는 그것을 살리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참고로 한 판본은 홍문각(弘文閣) 영인본 『금강경언해(金剛..

7. 군주들의 인간적 고뇌 『금강경』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천하의 명주보다도 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이에 취해 그 유명한 분절(分節)을 창조했다면,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금강경』의 향기에 취했던 자로서, 두 얼굴의 사나이, 총명과 예지로 번뜩이는가 하면 탐욕과 음험한 살육의 화신인 사나이, 경세치용의 명군인가 하면 조선의 역사를 부도덕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나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를 서슴치 않고 들겠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초기의 사상적 형세는 실로 불교와 유교라는 양대(兩大) 의식형태의 충돌로 특징지워진다. 조선왕조가, 교과서에 나오듯이 1392년 7월 17일 무장(武將) 이성계(李成桂)가 왕(王)으로 추대되는 사건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

6. 명심포니 회고컨대, 푸릇푸릇한 청춘의 시기에, 지적인 갈구에 영혼의 불길이 세차게 작열하고 있었던 그 시기에 내가 『반야심경』을 포(褒)하고, 『금강경』을 폄(貶)한 것은 실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그 성립시기가 약 3세기 정도(정확한 시기를 추정키는 어렵지만)의 세월을 격한다. 비록 『반야심경』은 『금강경』에 비해 분량이 극소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금강경』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개념과 논리적 결구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뜨라의 형태, 즉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환희봉행(歡喜奉行)’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소박한 붓다설법의 기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반야심경』은 이미 이러..

5. 두 경전과의 최초 만남 나의 생애에서 이 지혜의 서를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내가 당시로서는 폐찰이 되다시피 쇠락하였던 고찰, 천안의 광덕면에 자리잡고 있는 광덕사(廣德寺)에서 승려생활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계통을 밟아 정식 출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 깎고 승복 입고 염불을 외우며 승려와 구분 없이 지냈으니 출가인(出家人)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구멍 숭숭 뚫린 판잣대기로 이어붙인 시원한 똥간에 앉아 있는데, 밑 닦으라고 꾸겨놓은 휴지쪽 한 장에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 현토를 달아 뜻이 통하도록 해석되어 있는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랫도리에 힘을 주는 일도 잊고 꾸부린 가랭이가 완전히 마비되도록 하염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랫도리에 힘을..

4. 소명태자 『금강경』의 경우, 한역본으로 우리는 보통 다음의 6종을 꼽는다. 이를 시대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402년 성립. 2. 북위(北魏) 보데류지(菩提流支, Bodhiruci)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09년 성립. 3. 진(陳) 진체(眞諦, Paramārtha)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62년 성립. 4. 수(隋) 급다(笈多, Dharmagupta) 역譯,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90년 성립. 5. 당(唐) 현장(玄奘) 역(譯),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

3. 현장의 신역 다음으로 내가 ‘논리적 이유’라 말한 뜻은 무엇인가? 논리적 이유라 함은, 비록 『금강경』의 성립과 선종(禪宗)의 성립 사이에 5ㆍ6세기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리고 선종의 불립문자적 정신으로 볼 때, 『금강경』은 부정되어야 할 문자로 이루어진 초기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선종이 ‘불립문자(不立文字)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등의 말을 통하여 표방하고자 하는 모든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 정확하게는 논리 이전의 가능성이, 이미 『금강경』이라는 대승불교의 초기경전 속에 모두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이라는 대승교학의 바이블은 비록 그것이 교학불교의 남상(濫觴)을 이루는 원천적인 권위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선(禪)이요, 가..

2. 6바라밀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이 ‘반야경’이라는 말을 어떤 단일한 책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반야경이란 단권의 책이 아니요, 반야사상을 표방하는 일군(一群)의 책들에 붙여지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반야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오는 책들은 한두 권이 아니다(한역漢譯된 것만도 42종). 그런데 반야사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반야(prajñā)라는 것을 공통으로 표방하는,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시작한 1세기, 같은 시기에, 초기 불교승단에서 불꽃같이 타오른 새로운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반야사상의 성립, 즉 반야경의 성립이 곧 대승불교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과 대승불교의 출발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언어문자권(희랍어-산스크리트어) 내에서, 아주 비슷한..

『금강경(金剛經)』에 대하여 1. 선종의 대표경전으로 착각된 역사적 이유 조선의 불교는 『금강경(金剛經)』을 적통으로 한다라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는 거대한 바구니 속에 삼장(三藏)의 호한(浩瀚)한 경전이 즐비하지만, 우리 민중이 실제로 불교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독송하고 암송하고 낭송하고 인용하는 소의경전을 꼽으라 하면 그 첫째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꼽히고, 그 둘째로 『금강경』이 꼽힌다. 우리나라 불교, 특히 우리에게서 가까운 조선왕조시대의 불교사,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이야기하면 임제(臨濟) 류의 선(禪)을 적통으로 하는 선종(禪宗)중심의 역사이고 보면, 선종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이 『금강경」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야말..

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유일교에로의 해답)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에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죄업(罪業)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金剛經)』을 설(說)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로의 해답이다. ..

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고정불변의 실체)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좀 피상적이다. 아직 우리의 논의가 ‘제도’라고 하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유위적(有爲的) 세계의 총칭이다. 무위(無爲)란 스스로 그러한[자연(自然)] 것임에 반해 유위(有爲)란 인간이 만든다(man-made)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라는 것은 대개 약속(conven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 약속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도 약속이고, 가정도 약속이고, 집도 하나의 약속이다. 그리고 학교도 약속이고, 입시도 약속이고..

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제도 속 종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절깐에 다니면 부처를 믿는다 하고, 나처럼 일요일날 교회도 아니 가고 절에도 아니 가면 예수도 안 믿고, 부처도 안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나 절깐에 가는 것을 예수 믿고 부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장 가면서 영화 믿는다고 하고, 식당 가면서 음식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나의 삶의 구원이요, 영화를 보는 행위 그 자체가 나의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의 영화에 대한 특수한 믿음과 그의 극장 가는 행위가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대강 ‘제도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으로서 신(神)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일신’ 즉 하나밖에 없는 신을 고집한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는 신만이 우주 전체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 참 그것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나,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타 존재를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타 존재를 배제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보다 쉽게 말하면 우주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우주 전체 그..

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방편적 언어) 이 두 번째 명제는 실상 상식적인 경우, 제1명제 속에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 상식적으로 신(神, God)을 말하는 경우, 신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되어야만 하고, 초월적인 존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바로 믿음 즉 신앙(Faith)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자이고 그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신은 우리의 상식적 감관에는 포착되지 아니하며 그의 언어ㆍ행동방식이 우리의 상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

제1명제: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생각해 보자! 여기 어떤 사람이 눈사람이 땡볕 아래서 절대 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자! 그 믿음이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고 확고한 것이었다 한들, 눈사람을 땡볕에 놓고 보니 녹더라는 현상의 분석보다 구극적으로 더 강렬하고 보편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에게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는 믿음이 성립되었다 하더래도, 또 그와 같은 믿음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하더래도, 결국 눈사람이 땡볕 더위 속에서 녹는다는 사실은 매우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로서 보다 일상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들어가는 말 나는 과연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일까? 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이화학당을 다니면서 개화의 물결의 선두에 섰고 나의 아버지 역시 휘문고보 시절부터 기독교야말로 우리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개화된 의사집안 광제병원 일가의 막둥이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고 장성하여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은 증조부가 조선말기에 종2품 전라도병마절도사, 중추원(中樞院) 칙임의관(勅任議官)까지 지낸 사람이고, 할아버지도 무과에 급제하여 동복군수를 지내었다. 조부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덕수궁돌담 쌓는 작업을 총감독하고 정3품 당상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인데, 일제에 강점을 당하자 일..

서문 법정(法頂) 『금강경(金剛經)』은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초기에 결집(結集)된 경전이라, 그만큼 그 형식이 간결하고 소박하다. 다른 대승경전에서처럼 도식화된 현학적인 서술이 거의 없다. 공(空)의 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공(空)이란 용어마저 쓰지 않는다. 대장경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이 『금강경』은 패기에 가득 찬 가장 젊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 여기저기에 읽는 사람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참신한 사상의 맥박이 약동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뗏목의 비유(捨筏登岸)를 들면서 부처의 가르침에도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라고 부처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온갖 명칭과 겉모양에 팔리지 않는 사람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고 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목차 김용옥 서설: 고행과 해탈 1. 니련선하에서기나 긴 사색의 출발고행과 해탈생명의 원리로서의 물생명의 원리로서의 불과 기와 숨윤회란 무엇인가?암송작업의 체계화초기불교의 흐름팔리어삼장에 대해한역대장경과 티벹장경중도에 관한 인용부분업에 대한 최대의 왜곡체념적인 전생의 업보업의 새로운 이해중도와 뉴웨이선정지상주의고행이란 무엇인가? 2. 신비주의와 고행신비주의아트만브라흐만합일과 피타고라스신비주의적 합일고행의 단념과 안아트만싯달타의 고독고행 단념한 뒤 싯달타의 행동싯달타와 수자타인도신화와 단군신화길상과의 대화 3. 붓다와 깨달음붓다의 세 가지 의미색신과 법신소승과 대승의 대반열반경붓다인 싯달타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의 붓다35세 청년이 붓다가 되다싯달타와 예수의 유혹욕망이여! 마라여!..

불교는 심리학인가? “어제 말씀 중에서 기독교는 사건중심이고 불교는 법중심이라고 하셨는데, 그 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연기(緣起, 산스크리트어: pratītya-samutpāda, 팔리어: pa ṭicca-samuppāda)입니다.” 나는 이 한마디에 온 전신에 전율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그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고, 내가 원시불교에 관하여 깨달은 총체적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는 대스승이었다. “연기(緣起)란 무엇입니까?” “연기(Dependent Arising)란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여(paṭicca) 함께(sam) 일어난다 (uppāda)는 뜻입니다. 즉 이 우주의 어떠한 이벤트도 절대적인 독립성을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연..

엘레판타의 석굴 “저는 인도에서의 첫날밤을 뭄바이의 하버 베이(Harbour Bay)에서 지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문을 열어보니 아라비아해면으로 반사되는 찬란한 햇살 저편에 그 유명한 게이트웨이 어브 인디아(Gateway of India)가 보이더군요. 첫날 특별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게이트웨이 뒷켠을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섬 관광을 가는 배가 있다기에 별 생각 없이 올라탔습니다. 동북쪽으로 9km가량을 가니까 엘레판타라는 섬(Elephanta Island)에 도착하더군요. 저는 이곳 유적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었습니다. 엘레판타는 학구적으로 소개된 책자가 거의 없이 방치된 유적이었으니까요. 열대의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긴 계단을 올라가 섬의 중턱에 있는 석굴에 당도했을 때, 무방비..

기독교는 본래 아시아대륙의 종교 “그런데 지금 논의가 조금 빗나가 버렸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 종교적 진리의 다양성의 관용이 또 다시 종교간의 에반젤리즘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는 문제는 결코 성하께서 답변하신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앞으로 종교간의 충돌이라고 하는 우리 인류사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단순한 다양성의 관용 이상의 어떤 종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뉴잉글란드로 건너간 청교도들보다도 더 순결하고 엄격한 기독교신앙을 가지신 어머님 슬하에서 자라났고 한때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학에서 도가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또 한때 절깐에서 승려생활까지 했고 불교경전을 깊게 공부했습니다..

위대한 출발 인도인들은 간지스 강 가트 건너편의 땅을 ‘사악한 땅’이라 불렀다. 그러나 싯달타는 바로 그 땅을 정토로 만들었다. 수보리야! 간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간지스 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간지스 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하지 않겠느냐?須菩堤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 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금강경』 제11분이 묘사하고 있는 그 현장, 바로 그 카시의 간지스 강 모래밭. 사악한 땅의 모래밭에서 정성스럽게 두손모아 기도하고 있는 저 여인을 보라! 나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 많은 승려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 중 나에게 인사를 한 사람은 라크도르(Lhakdor)라는 승려였다. 라크도르는 달라이..

라면이 살린 목숨 “최영애 선생님께 중국어를 들었어요.” 어딜 가나 한국여행객들과 부딪치게 마련이다. 연대 인문학부 4학년의 여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도 남루한 여행객 복장을 하고 있는 나를 어둠 속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도올서원 10림입니다.” 남녀 커플로 온 젊은이들이 또 인사한다. 그 남학생이 도올서원에서 나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동안 도올서원에서 한 3천여 명의 제자들을 키워내었다. 요즈음 내 인생의 보람이란 이들에게 거는 기대밖에 없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젊은이들의 품성을 길러주고 지식을 전수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하보디 스투파(stūpa)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혹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불교순례객..

스투파와 무덤 매장이나 화장이나, 후대에 기념될 만한 훌륭한 인물의 경우, 봉분을 가진 분묘를 만든다고 하는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대로다. 다시 말해서 스투파란 단순히 화장의 결과로서 생기는 묘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시 묘는 지상의 봉분이 없었다. 봉분이 있는 묘는 산동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를 그 효시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파도 지상에 높고 큰 봉분을 만든다. 그런데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흙으로 만든 봉분은 그 형태를 유지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납작한 벽돌로 쌓아올린다. 그러나 그 외형적 형태는 우리나라 봉분의 묘와 대차 없다. 봉분(覆鉢, aṇḍa)을 기단(基壇, medhī) 위에 올려놓고, 봉분의 꼭대기에는 옛날에 귀인들에게 우산..

싯달타부터 통일왕국 마가다까지 전술한 바와 같이 붓다의 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이 격변을 결정지운 가장 결정적 사건은 역시 철기의 보급이다. 웃따르 쁘라데쉬-비하르 주 지역은 강우량이 풍부한 대 평원이다. 이 지역은 본시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었으며 철제로 만들어진 연장이 없이는 개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리안족의 동진(東進)과 더불어 철기가 보급되면서 울창한 밀림은 비옥한 농토로 개간되기 시작한다. 간지스강 유역으로 거대한 농경지가 무제한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경문화의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상공업ㆍ무역의 발달,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발달은 도시상인을 주류로 하는 바이샤(vaiya) 계급의 급성장을 야기시켰고, 잦은 전쟁을 통한 강력한 왕권의 출현..

비하르의 묵상 인간의 역사는 삶의 흐름이다.우리 삶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예술,어느 한 가지 디시플린의 소산이 아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분과과학의 시각이합쳐질 때만이 우리의 삶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희론(戱論)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의 유희가 아니다.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그 화살을 어떻게 뽑냐는 것에 관한 이론을 나열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우선 화살을 뽑고 생명의 부식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왜 싯달타가 연기(緣起)를 말했고 무아(無我)를 말했어야 했는지 항상 그 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기의 실상은 무아론으로 귀착된다. 무아론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바로 무아행(無我行)에 있는 것이다. 무아행이란 자비(慈悲)의 실천이다. 무아의 연기적 실상 그것이 바로 공(空..

싯달타가 깨달은 것 나는 일찌기 말했다. 붓다는 엉터리로 안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안 사람이다. 무얼 어떻게 알았나? 붓다의 깨달음, 붓다의 얇은 삼법인(三法印)으로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붓다의 얇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던가? 나는 이 어려운 질문에 또 다시 매우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연기였다. 나는 근본불교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으로 실존한 X가 있었고, 그 X가 싯달타였으며, 그가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명상 끝에 득도하였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즉 역사적 붓다(the historical Buddha)의 실존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역사적 붓다의 사유과정을 추론하는 데 있어서 이 ‘연기’라는 한마디처럼 유용한 실마..

붓다의 세가지 의미 우리가 보통 ‘소’(cow)라고 하면 그 소는 대강 대별하여 다음의 세 가지 뜻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는 첫째 갑돌이네 집에 있는 그 소, 즉 특정한 역사적 시공에 살아 움직이는 개체로서의 소를 특칭하여 일컫는 말일 것이다(a particular cow). 둘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소,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모든 소를 전칭하여 부르는 말일 것이다(all Cow). 그리고 셋째로는 모든 소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소됨, 그러니까 소의 모든 속성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cowness). a particular cow특정한 역사적 시공에 살아 움직이는 개체로서의 소를 특칭하여 일컫는 말all Cow모든 소를 전칭하여 부르는 말cown..

신비주의 여기에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죽음도 결국 우리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영원히 우리 삶 속에 있다.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싯달타가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위하여 그는 몸부림쳤던 것이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싯달타라는 한 인도청년이 깨달았던 것은 중도(madhyamá pratipad)였다. 안락의 방법으로도, 선정의 방법으로도, 고행의 방법으로도 접근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길! 그 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싯달타가 고행의 극한에서 고행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속했던 거대한 문명의 체계에 대한 일대..

기나 긴 사색의 출발니련선하에서 뽀이얀 먼지 속에 서산에 이글이글 지는 해가 대탑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대지를 엄습할 때, 내가 보드가야(Bodhgaya)에 도착한 것은 2002년 1월 8일의 일이었다. 우연히 나의 카메라에 잡힌 니련선하(尼連禪河)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너무도 많은 묵언의 멧세지를 전해줄 것이다. 광활한 대지,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소리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 휘몰아치는 먼지 바람, 깡마른 다리를 휘감어대는 도포자락을 떨치며 무심하게 걸어가는 사나이, 터번 속에 가린 얼굴은 중생의 고뇌를 다 씹어 먹은 듯, 니련선하의 풍진에 자신의 풍운을 다 떠맡기고 있었다. 고타마 싯달타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을까? 저 광막한 니련선하 건너로 희미하게 하늘을 가리운 산이 전정각..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국역 도올 김용옥 1. 법회의 말미암음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 나라 이름】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2. 이 때에, 세존【世尊,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란 뜻이며 부처님의 10가지 이름 중의 하나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목차 김용옥 서론 1장 프롤로그인연철학을 전공하다광덕사로 가는 길최초의 해후: 『반야심경』 밑씻개첫 만남의 충격적 인상: 이것은 반불교다!별당 용맹정진소쩍새 울음의 신비새색시의 인가엄마의 공안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진짜 중과 가짜 중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임진왜란: 멸사봉공의 자비영규대사: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비겁한 유생들의 작태선조와 서산대사의 인연선조의 애ㆍ증 콤플렉스적서지별이 망국지본이 되다말 탄 서산을 끌어내리는 유생들이순신을 도운 승군의 활약상, 유정의 위대한 마무리유정의 눈부신 활약상도 제대로 기록 안 됨서산과 해남 대둔사임진왜란과 승과서산의 입적시거시기와 예수, 거시기와 철학서산과 삼가귀감경허 송동욱독경하고 싶거들랑 천자문부터천자문 돈오와 불교와 ..

참고문헌 내 서재에 꽂혀있는 책에 한하여, 그리고 내가 이 책 쓰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책에 한하여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내가 이 책을 쓰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는 미즈노 코오겐(水野弘元), 히라야마 아키라(平山彰), 카지야마 유우이찌(梶山雄一) 이 세 분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관해서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선생의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유학하던 시절에는 다 살아 계셨는데 나카무라 선생님 외로는 찾아뵙지 못했다. 그리고 훌륭한 사전을 만들어주신 운허 스님, 지관 스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나온, 고익진 선생의 제자 남호섭군의 꼼꼼한 지적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여기에 실린 모든 분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스바하. 사전류 1. 耘虛龍夏 著. 『佛..

5장 에필로그 20대 초반에 나를 사로잡은 경전, 더불어 살아온 지 어언 반세기, 그 50년의 통찰을 꼭 글로 써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지만, 그 통찰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솔직히 말해서 나에겐 처참한 투혼의 발로였다. 나의 발언의 형식으로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국민 모두에게 방영된 내용을 가지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날 고소했다는 것이다. 고소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웃어넘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같이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내 평생 사적이든 공적이든 일체 ‘장’ 자리에 앉은 적이 없다)는 그 번거로운 프로세스가 한없는 모멸감과 배신감, 그리고 울분의 심사를 끓게 만든다. 마음 편하게 해탈된 경지에서 써야만 할 글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

나에게 보내는 헌사 우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라는 주문은 단지 음역일 뿐이므로 한자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다양한 음역표기가 있으나, 나는 고려대장경의 현장(玄奘)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발음은 우리 절깐에서 흔히 독송하는 발음을 썼습니다. 사계의 권위자인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박사는 우리 고려장경의 텍스트를 그대로 썼습니다. 보통 일본에서는 ‘羯諦羯諦 波羅羯諦, 波羅僧羯諦, 菩提薩婆詞’라는 음역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절깐에서는 보통 마지막 구절을 ‘보리사바하(菩提娑婆訶)’로 표기하지요. ‘승사하(僧莎詞)’도 고대의 발음은 ‘스바하’의 발음이 났던 모양이에요. 그 원래 발음은 매우 명료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

제9강 설반야에서 보리 사바하까지 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겠습니다. 곧 그 주문은 다음과 같이 설하여집니다. 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詞.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인용 목차 반야심경

무등등주와 도일체고액과 능제일체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말합니다. ‘지(知)’는 전체에 걸리는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알지어다. 다음의 사실들을 …… ’하는 식의 구문이지요. 영어로 말하자면 ‘Therefore you should know that ……’과 같은 식이지요. 무엇을 알아야 하나요? 반야바라밀다야말로 위대하게 신령스러운 주문이며, 위대하게 밝은 주문이며, 그 이상이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것은 결코 반야바라밀다를 주문화하거나 주술적으로 만드는 밀교적 장치가 아닙니다. 주문(mantra)이라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시적인 암호로 표현하는 노래와 같은 것이며, 사실 리그베다와 같은 인도 고유의 경전 전체가 주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8강 고지반야바라밀다에서 진실불허고까지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음의 사실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야말로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더 이상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고를 제거할 수 있다. 진실한 것이요,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故.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고. 인용 목차 반야심경

구경열반과 무상정등각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전도된 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경열반(究竟涅槃)’케 되는 것입니다. 여기 ‘구(究)’는 ‘궁극적으로’라는 부사입니다. ‘경(竟)’은 ‘도달한다’는 동사입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도달케 된다는 것이지요. 열반이란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욕망의 불길, 전쟁의 불길이 다 꺼진 상태, 우리에게 통일이야말로 ‘열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의 불길, 앞서 말한 4가지 공포에서 유래되는 욕심의 불길이 만드는 것입니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무명(無明)의 인간들 때문에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히틀러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반공을 열렬히 외치고..

전도망상에서 멀리멀리 벗어나라 내가 요즈음 내복을 하도 오래 입다 보니 고무줄이 다 삭아버려서 오랜만에 동네 내복상점에 갔어요. 내복을 좀 사려고요. 그런데 20여년 안면이 있는 주인청년이 날 붙잡고 호소를 해요. “선생님! 이거 나라가 잘못되는 거 아닙니까?” “왜?” “문 대통령이 너무 정치를 못하는 거 같아요.” “왜?” “김정은을 자꾸 만나서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장사도 안돼요.” “팔아넘긴다니 누가 그런 말 하던가?” “태극기집회 나가는 사람들이 점포에 많이 오는데 다 그렇게 말해요.”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이고, 자네가 뭘 확인해본 것이 있나? 자네도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그 자식들이 분열과 전쟁에 시달리는 세월을 살기를 원하는가?” “물론 아니죠.” “우리가 전쟁의 공..

공포와 몽상 이 단락도 현장(玄奘)의 번역에 기준하여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주어가 ‘보리살타(bodhisattva, 깨달음을 지향하는 유정有情.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닌 보통사람, 즉 싯달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로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리살타의 약어가 곧 ‘보살’이며 그것은 대승운동의 주체입니다. 아라한을 뛰어넘는 새로운 불교의 주체입니다. 결국 반야경의 핵심인 심경」이 설파된 것은 보살에게 설파된 것이고, 그 설파된 내용의 최종적 수혜자는 비구가 아닌 보살입니다. 대승의 수혜자가 되려면 비구도 보살이 되어야만 합니다. 보살을 주어로 했을 때, 어떤 일이 최종적으로 벌어지는가? 보리살타, 즉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이해했고 그 원리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고로, 마음에 일..

제7강 보리살타에서 삼먁삼보리까지 보리살타 즉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는 고로, 공포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된 의식과 꿈같은 생각들을 멀리 벗어나 버리고, 끝내 열반에 도달한다.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무상의 정등각을 얻는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인용 목차 반야심경

법정 스님의 무소유 여기 ‘무소득(無所得)’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무소득’이라는 말은 이미 법정(法頂) 스님께서 ‘무소유’라는 말로 충분히 대중을 설득시키셨고 또 그것을 돌아가시기 전에 완전히 실천하셨기 때문에 우리 대중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본인의 저술조차도 족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 모든 판권을 회수하셨습니다. 아마도 스님의 출판된 글로서는 제 『금강경강해』의 서문으로 남은 글이 유일할지도 모르겠네요. 공수귀향(空手歸鄕)을 실천하신 참 드문 분이지요. 법정 스님은 제가 생전에 많이 만나뵈었지만 참 깊은 인격을 갖춘 분이지요. 글을 보면 매우 여성적이지만 만나뵈면 임제와도 같은 단호함과 강인함이 있는 분이었어요. 보조지눌의 맥을 잇기에 부끄..

우주론적 명제를 윤리적 명제로 이런 구절은 해석이 좀 어렵습니다. 물론 산스크리트 대응구가 있기는 하지만 현장(玄奘)의 번역이 매우 압축된 것이래서 주석가들은 자기 생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구절은 현장의 한역을 그대로 존중하여, 그 한자의 의미맥락대로 뜻을 새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는 여태까지 전개되어온,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래의 모든 기존 불교의 이론을 부정해버리는 ‘무(無)의 철학’을 완성하는 마지막 구문입니다. 그리고나서 “보리살타" 즉 보살이라는 대승의 주체가 주어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대승의 탄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이전의 어떠한 종교와도 획을 긋는 새로..

제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앎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 문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인용 목차 반야심경

12지연기와 4성제의 부정 뿐만이겠습니까? 이 우주가 다 사라졌는데, 인식의 뿌리도 대상도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의식의 필드도 다 사라졌는데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지금부터 말하려는 이 단의 내용이야말로 진실로 소승의 아라한이라면 너무도 공포스러운 보살가나의 혁명적 외침이지요. 싯달타는 싯달타가 아니다. 그는 부처도 아니었다. 그가 생전에 깨닫고 설했다 하는 법문이 다 헛거다. 다 공이다! 보리수 밑에서 12지연기를 깨우쳤다고? 그것도 다 공이다! 다 헛거다! 보살반야의 세계에는 무명(無明)도 없고, 대단한 깨달음을 통하여 무명이 사라진다는 개구라도 없다! 이렇게 해서 12지연기의 모든 항목(지支)이 없다. 그리고 그 항목이 환멸연기에 의하여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늙어 뒈진다는 것도 없고, 늙어 뒈진다..

제5강 무무명에서 무고집멸도까지 뿐만이냐!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의 부정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무무명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그러니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러한 12연기를 요약적으로 표현한 고ㆍ집ㆍ멸ㆍ도 또한 없는 것이다.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인용 목차 반야심경

18계의 이해 이제 공 속에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모두 다 없다라는 말은 쉽게 이해하시겠지요. 이제 ‘18계(十八界)’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18계이론은 싯달타 본인이 설한 법문으로서 아함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싯달타의 12연기 속에도 육입(六入)의 항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싯달타는 이러한 논의를 인식론적 체계로서 설법한 것 같지는 않아요. 부파불교시대 때부터 인식론적 다르마의 논의가 강화되면서 체계화되었고, 후대의 유식론에서 그것이 매우 심오하게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나식이나 아라야식과 같은 문제는 다루고 있질 않으므로 유식론과 정면으로 대결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불교 인식론의 기본개념으로서 18계이론을 제너럴하게 이해하시면 족할 것 같습니다. 우선 서양근대 인식..

제4강 시고공중무색에서 무의식계까지 그러므로 공의 모습 속에는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상도 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다. 따라서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없고,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도 없고, 또한 안식계에서 의식계에 이르는 모든 식도 없다.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인용 목차 반야심경

『심경』의 육불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 여기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모든 다르마(dharma)’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여기 법이라 하는 것은 무슨 거대한 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사건, 이벤트, 사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Event)이 공상(空相, 공의 모습)인 세계에서는 생멸(生滅)이 없으며, 구정(垢淨)이 없으며, 증감(增減)도 없다. 이 공상의 세계,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아 조견한 코스모스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여기에 세 종류의 아니 불(不) 대구가 나열되어 있는데, 상대되는 개념에 아니 불을 붙여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은 인도인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우파니샤..

제3강 사리자에서 부증불감까지 사리자여! 지금 내가 깨달은 세계, 반야의 완성을 통해 조련한 세계, 제법이 공한 이 모습의 세계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구부정 부증불감 인용 목차 반야심경

오온의 가합일 뿐인 나는 좆도 아니다 나(我, Ego)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다섯 가지 오온(五蘊, 다섯 가지 집적태)의 가합(假合, 일시적 조합)입니다. 그런데 가합의 요소인 색ㆍ수ㆍ상ㆍ행ㆍ식 하나하나가 또다시 공입니다. 리얼하지 않은 것이지요.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라미(RAMI)만년필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영속할 수 없는 가합입니다. 튜브에 들어있는 잉크만 말라도 만년필은 제 기능을 못합니다. 펜촉은 순간순간 닳아 없어지고 있어요. 이 글을 쓰고 있는 200자 원고용지도 몇 년이면 바스러집니다. 이 만년필을 쓰고 있는 내 손도 1ㆍ20년 후면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쓸 수 있게 만드는 나의 팔이 아닌 나의 식(識)도 곧 고혼(孤魂)이 되어 태허(..

관자재보살이 오온개공을 상설한다 심반야바라밀다를 행한 관자재보살은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는 우주적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고액(고액에 관하여서도 팔고八苦니, 사액四厄이니 썰說을 펴나 다 부질없는 구라일 뿐. ‘괴로움’ ‘무명 속의 유전’으로 족하다)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문 중에서도 ‘지혜제일’이라는 사리자(=사리불Śāriputra. ‘뿌뜨라’는 ‘아들’의 뜻, 엄마 이름이 샤리이고 그 아들이라는 뜻이다)를 골라, 사리자에게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이치를 설파합니다. 사리자를 특칭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현장에는 사리자 혼자 듣는 것이 아니지요. 그 뒤에는 장대한 사부대중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리자’를 선택하여 골라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인즉 바..

제2강 사리자에서 역부여시까지 사리자여!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색이 공에 다르지 않고, 공이 색에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나머지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같다는 뜻이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인용 목차 반야심경

조견, 도, 일체고액, 오온 다음 ‘조견(照見)’이라는 말도 ‘비추어 안다’ ‘총체적인 우주의 통찰, 즉 전관(全觀)에 도달한다’는 뜻이지요. 무엇을 조견하는가? 조견의 내용 역시 우주론적 통찰입니다.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통찰한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되면 일체의 고액(苦厄, 고와 액, 고통과 재액)을 극복하게 된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는 문구는 어느 산스크리트어 원본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장(玄奘)의 역문에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장이 한어의 문맥에 따라 첨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度)”’ 일체고액을 넘어간다, 그러니까 극복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거꾸로 현장이 본 산스크리트 원본에는 이 구절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현존하는 산스크리트본이 모두 ..

관자재, 관세음의 뜻과 기자 이상호 원래의 이름은 ‘Avalokiteśvara’인데 이것은 ‘보는 것, 관찰하는 것(avalokita)이 자유자재롭다(iśvara)’는 뜻이니까, 사실 ‘관자재보살’ 이라는 현장(玄奘)의 번역이 원의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라집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번역을 선호했습니다. 『묘법연화경』을번역할 때도 라집은 ‘관세음’과 더불어 ‘관음(觀音)’이라는 역어를 썼습니다.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은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우리 민중은 라집의 ‘관세음보살’이라는 표현을 사랑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소리를 본다’가 되어 좀 이상하지만 인도인에게 ‘본다’는 것은 ‘심안’의 감지, 통찰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주석가들에 의하면 ..

관세음보살이 지혜의 완성을 이야기하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첫머리는 ‘관자재보살’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반야심경(般若心經)』 전체의 주어가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설법의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죠.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후대에 등장한 보살의 말씀으로 지고의 경전이 성립했다? 이것이 바로 대승경전의 특징입니다. 더군다나 관세음보살이 법을 설한 대상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사리불이죠! 사리자가 누구입니까? 사리자는 바라문 계급의 출신으로서 왕사성 부근의 우파텃사(Upatiss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얘기는 유명하지요. 하여튼 그는 지혜가 뛰어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죠...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제1강 관자재보살에서 도일체고액까지 관자재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오온이 다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을 뛰어넘으셨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인용 목차 반야심경

결론: 벼락경과 아상 버리기 여기서 아예 결론을 내버리는 것이 좋겠군요. 여러분들께서 제 『금강경강해』를 읽으셨다는 전제하에서 아예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동일한 주제를 전달하는 대승경전인데, 『금강경』의 주제는 초장에 이미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있습니다.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열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계율과 지혜의 길항성 자아! 이제 앞에서 말한 ‘6바라밀’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에 다 바라밀이 붙지만(보시바라밀, 지계바 라밀…… 이런 식으로) 실제로 ‘완성’을 의미하는 ‘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5덕목에는 붙을 수가 없습니다. 앞의 5덕목은 오직 ‘지혜의 완성’을 통해서만 바라밀의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6바라밀’이라고 하지만 지혜바라밀은 여타 덕목과 차원이 다른 것이죠. 여기에 나는 여러분께 “계율과 지혜의 길항성” 이라는 인간 보편의 테마를 제시하려 합니다. 대승은 비구ㆍ비구니집단이 아닙니다. 오늘날 해인사ㆍ송광사 등의 절간에 출가하는 자들에게는 대승을 운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소승집단이 되어버린 것이죠. 소승이라고 꼭 나쁠 게 없어..

바라밀의 해석 다음, 우리는 제목이 되는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을 해설해야 하겠습니다.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의 출발이다’라는 말은 누누이 반복되었습니다. 반야사상은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정의된 사상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대승불교는, 우리가 소승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지만, 그냥 방편상 그렇게 부르고 있는 초기불교의 승가집단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조직과 이론으로부터 발생한 새로운 불교운동입니다. 여러분! 대형버스와 고급자가용세단과 뭐가 다를까요? 버스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해서 세단은 안면이 있거나 신분이 있거나 특수관계에 있는 소수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싼 버스표만 있으면 탈 수 있지요. 작은 수레(소승)와 큰 수레(대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

구마라집 『심경』, 번역본의 문제점 자아! 그렇다면 구마라집의 번역은 소품일까요, 대품일까요? 우리가 보통 소품이라 하면 현장(玄奘)의 『심경』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라집의 번역을 대품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라집의 번역은 현장의 것과 같은 소품계열입니다. 상기의 8개 중에서 소품계는 1ㆍ2ㆍ7뿐이고 나머지 5개는 다 대품계입니다. 그런데 제7의 『심경』」은 번역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본을 발음대로 한자로 써놓은 것이죠. 그러니까 한자발음기호지요. 얼마나 부정확한 발음표기이겠습니까마는 이러한 음역본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자의 음가를 재구(再構)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사실 불경 때문에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이 발전했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품계 한역은 라집 것과 ..

『심경』 8종, 그리고 대본과 소본 우선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하는 경전은 AD 649년에 현장(玄奘)이 역출(譯出)했다고 하는 텍스트를 기준으로 삼고 있고, 그 가장 정종이 되는 판본은 우리 고려제국의 대장경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현장이 인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후 4년 만에 이 『심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장 이전에, 일례를 들면 구마라집(350~c.409)이 번역한 『심경』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대정대장경에 수록된 『반야심경』만 해도 다음의 8종류가 있습니다. 학구적인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8종을 우선 써보겠습니다. 1.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1권,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 No.250 2. 『반야바라밀다..

종교의 대승화 의의 세부적인 면에서 얘기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대승불교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고, 『반야심경』 본문에 즉하여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보기로 하죠! 대승불교의 혁명적 성격을 우리는 너무도 진부한 상식적 언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예를 들자면, AD 1세기에 일으킨 예수운동(Jesus Movement) 그 자체는 오히려 매우 혁명적이고 구약(소승)에 대하여 대승적인(신약: 새로운 약속)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서화 되면서 정경화 되었고 권위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그 권위를 뒤엎는 새로운 대승의 개방의 과정을 겪지 못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도 ..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전혀 다른 성격 다섯 가지 자아!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간결하게 대승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불경스럽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자각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리리타(自利利他)’, ‘자각각타(自覺覺他, 스스로 깨우침으로써 타인을 깨우침)’의 염원을 제1의 목표로 삼습니다. 자기의 구제만에 전심하여 타인의 구제를 등한시하는 소승의 종교가 아닙니다. 철..

타부시되던 불상이 만들어지다 마우리야왕조는 아쇼카 이후 쇠퇴의 일로를 걷습니다. 그리고 AD 30년경에는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가 월지종족을 통일하고 박트리아의 문화를 계승한 쿠샨왕조를 세웁니다. 쿠샨왕조의 4대 왕인 카니슈카대왕(Kanishka I, AD 127~140 재위)이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앞서 논의한 바와 같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보살운동은 불상문화와 결합되면서 놀라운 힘과 체제와 하부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초기불교에는 계율이 심했고 타부가 많았습니다. 제일 큰 타부 중의 하나가 입멸한 석존은 절대 형상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형상의 윤회를 초월하여 무형의 세계로 들어간 불타를 또..

구라꾼과 보살과 보살가나의 등장 그런데 이 대중에게 한 가지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싯달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각자(覺者)인 붓다가 되었는가? 그의 인생스토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석가족의 성자)의 라이프 스토리는, 리얼 스토리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탑돌이하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양식화 되어간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윤회를 전제로 하는 인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무궁무진한 전생담(싯달타 전생의 이야기들. 본생담本生이라고도 한다)의 구라가 끝없이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탑돌이를 하는 귀부인들은 먼 길을 고생해서 왔는데 몇 시간 있다가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몇..

새로운 스투파문화와 개방된 성역의 형성 그러나 불교사적으로 아쇼카왕 시대에 일어난 가장 거대한 변화는 스투파신앙의 대중화라는 현상입니다. 스투파(stūpa)는 졸탑파(卒塔婆,) 솔탑파(率塔婆), 솔도파(率都婆)라고 음역되는데 약하여 탑파(塔婆), 그냥 탑(塔)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우리말의 ‘탑’이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스투파’의 음역이 변화하고 축약되어 만들어진 말입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탑은 기와집처마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린 석조조형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양식적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목조건물모양이 석조화 된 것이죠. 그러나 인도인들의 스투파는, 우리의 탑의 개념과는 다른, 진짜 무덤인데, 벽돌을 엄청 크게 산처럼 쌓아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

아쇼카 시대의 결집 다시 말해서 자리(自利, 자기를 이롭게 한다, 자기 개인의 구원을 추구한다. svārtha, ātma-hita)만을 추구했지 이타(利他,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parārtha, para-hita)의 결과를 초래하지 못했습니다. 불교의 원래적 의도는 자리(自利)를 통하여 이타(利他)가 도모되는, 다시 말해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합일이 되는 경지에 있을 것입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함)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하는 삶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권위화되어가고 소수집단화되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체적 방향성에 새로운 계기가 생겨납니다. 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불리우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

초기 수행자들의 엄격한 계율과 한계 나는 싯달타를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업(業, karman)이라든가, 윤회(輪廻, saṃsāra)라든가, 열반(涅槃, nirvaṇa, 니원泥洹이라고도 음사한다) 같은 것은 한국사람들에게 김치와도 같이 인도사람들의 생활 속에 배어있는 아주 기본적인 사유의 틀이고 감정의 원천이지요. 이러한 기본적인 틀에 대하여 싯달타는 조금 혁명적인 생각을 한 것뿐이죠. 그러나 싯달타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위대한 초기 경전들이 결집되었다는 것이고, 또 그 경전의 내용들이 계속 발전적으로 부정되고 확대되어 나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죠. 싯달타 대각자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초기승단의 사람들..

싯달타의 자기파멸과 자기 완성의 길 여러분은 정말 고타마 싯달타라는 청년이 정말 샤카족 카필라성의 왕자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4성문에서 충격 받는 일들을 목격하고 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런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살아있는 동안 무지막지하게 비상식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고 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예수의 생애와는 달리 아무런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싯달타의 실존성에 관해서는 예수만큼이나 구체성이 없습니다. 그에 관한 얘기들은 결국 알고 보면 양식화된 후대의 기술이니까요. 그의 생존연대도 BC 6세기부터 4세기까지 왔다갔다 하니깐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만 해도 최근에는, 사도 바울이라는 유대인 사상가가 신화적인 죽음과 부활의 테마를 통하여 에클레시아(교회조..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 보살의 의미 그 첫째가 성문승(聲聞乘), 그 둘째가 독각승(獨覺乘, 혹은 연각승緣覺乘), 그 셋째가 보살승(菩薩乘)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3승은 실제로 기나긴 초기불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聲]를 실제로 들은[聞] 사람들이니까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불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싯달타의 자가용에 자연스럽게 올라탈 수 있는 선택된 소수들이겠지요. 그 다음에 독각승이라는 것은 홀로[獨] 깨닫는[覺] 사람, 즉 선생이 없이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들, 12인연을 관하여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합니다. 분명 이 독각ㆍ연각이야말로 성문 다음 단계에 오는 수행..

대승이란 무엇이냐 자아!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텍스트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해설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반야심경』을 펼치면, 제일 첫머리에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를 해설하려면 ‘관자재’가 무엇인지, ‘보살’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대승불교’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뻐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야경이 대승불교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대승불교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부터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무엇이냐? 이 한 주제만 전문적으로 설하려고 하면 또다시 거대한 단행본을 ..

선불교의 뿌리와 우리 민중의 선택 우리는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라는 삼학(三學)을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성적등지(惺寂等持)의 논의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선종을 정(定)의 측면을 발전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선정이라는 것은 ‘정신수양’의 생활이요 방법론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定)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은 혜(慧)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혜(慧)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언어로 ‘지혜(Wisdom)’라고 생각하면 확연히 그 의미가 잡히지 않는 막연한 개념입니다. 부파불교시대까지만 해도 ‘혜’는 그냥 지혜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선정(禪定)’이라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