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한문(漢文) (262)
건빵이랑 놀자
2. 촌스럽고 경박하다며 살아남은 전통을 멸시하다 해마다 가는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 남쪽 吳 땅의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吳 땅 사람이 말하였다. “내 고향에 머리 깎는 가게가 있는데, 간판을 ‘성세락사盛世樂事’라고 했습디다.” 인하여 서로 보고 크게 웃다가는 조금 있더니 남몰래 눈물을 흘리려 하더라고 했다. 歲价之入燕也, 與吳人語吳人曰: “吾鄕有剃頭店, 榜之曰盛世樂事.” 因相視大噱, 己而潛然欲涕云.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사신 가서 남쪽 오吳 땅 사람과 만나 이야기 하다 보니, 제 고향에 새로 생긴 이발소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간판이 이름하여 ‘성세락사盛世樂事’라는 것이다. 예전 법도로야 부모께 받자온 신체발부身體髮膚에 손대는 일이 가당키나 했으랴. 구한말 개화기 때조차도 ‘차두此頭는 가..
1. 사라진 예법은 시골깡촌에 살아있다 초등학교 4학년 난 딸아이는 날마다 일기를 쓰는데, 담임 선생님이 날씨를 그저 ‘맑음’ ‘흐림’으로만 적지 말고 설명적인 기술로 적어오라고 한 모양이다. 몇 달이 넘게 일기를 써오고 있지만, 그 날씨의 묘사가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노랗고 어여쁜 개나리같이 생긴 해가 허연 수염 난 구름과 둥실 둥실 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사뿐사뿐 뛰어 다니고, 하늘이 울적해 보인다.” “어두운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각자 심술을 내면서 귀엽고 아주 조그만 빗방울들을 하나하나씩 새나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듯이 떨어뜨린다.” “탱탱볼처럼 동그랗고, 오렌지처럼 상큼한 햇님이 방글방글 벙글벙글 신나게 수영하듯 저리 빙글 요리 빙글 거리며 파아란 하늘에 동동 떠 있다.” “어..
6.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시인의 고약한 입냄새 시대마다에는 참으로 다른 그 시대의 정신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생각하는 방식이나 표현 방법, 좋은 문학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가? 비슷한 것은 가짜다. 눈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가 있다. 집 짓는 데는 미장이도 필요하고 기와장이도 필요하다. 이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한국 한시사는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같은 시대 이용휴李用休는 “시를 지으면 당시唐詩가 아님이 없는 것이 근래의 폐단이다. 당시의 체를 흉내 내고 당시의 말을 배워서 거의 한 가지 소리에 가깝다. 이것은 앵무새가 하루 종일 앵앵거려도 자기의 소리는 없는 것과 같으니 나는 이것을 몹시 혐오한다”고 했다. 飢食而渴飮 歡笑而憂顰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
5. 큰 학자가 되려면 품이 넉넉해야 而我病陰虛 四年疼跗踝 그러나 내 음허陰虛한 병을 앓아서 발등과 복사뼈가 아픈지 네 해. 逢君寂寞濱 靜若秋閨姹 적막히 지내다 그댈 만나니 얌전하기 마치도 아가씨 같네. 解頤匡鼎來 幾夜剪燈灺 시 얘기 잘하는 광정匡鼎이 와서 몇 밤을 등불 심지 잘라냈던고. 論文若執契 雙眸炯把斝 문장을 논함은 내 생각 같아 술잔 잡은 두 눈동자 반짝였었지. 一朝利膈壅 滿口嚼薑葰 꽉 막힌 가슴이 하루 아침 뚫리니 한 입 가득 생강을 씹고 있는듯. 平生數掬淚 裹向秋天灑 평생의 몇 웅큼 눈물 방울을 가을 하늘 향해서 흩뿌리노라. 69구에서 끝까지는 서유본과 만나 이야기한 기쁨과 그에게 주는 당부로 시를 맺었다. 적막히 혼자 병 앓고 있던 나를 그대가 찾아주니 참으로 기쁘고 반가웠네. 얌전한 아가..
4. 지금ㆍ여기를 말하라 卽事有眞趣 何必遠古抯 눈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 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 漢唐非今世 風謠異諸夏 한나라 당나라는 지금 세상 아니요 부르는 노래도 중국과는 다르다네. 班馬若再起 決不學班馬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 난대도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新字雖難刱 我臆宜盡寫 새 글자 만들긴 어렵다 해도 내 품은 생각은 써내야 하리. 奈何拘古法 劫劫類係把 어이해 옛법에 얽매이어서 두고두고 여기에만 매달린단 말인가. 莫謂今時近 應高千載下 지금이 천근淺近타 말하지 말라 천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 이어 53구에서 64구까지 연암의 도도한 논설이 이어진다. ‘진취眞趣’, 즉 참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멀고 아득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지금 세..
3. 전적이 있다면 뭐든 좋단 말인가 靑靑陵陂麥 口珠暗批撦 푸릇푸릇 언덕엔 보리 돋아도 입속 구슬 남몰래 쳐서 꺼낸다. 不思腸肚俗 强覓筆硯雅 뱃속이 속된 것은 생각지 않고 붓 벼루 좋은 것만 굳이 찾는다. 點竄六經字 譬如鼠依社 육경의 글자를 훔쳐 모으니 사당에 숨어 사는 쥐새끼 같네. 掇拾訓詁語 陋儒口盡啞 훈고의 말들을 주어 섬기매 촌스런 유자들 입다물 밖에. 太常列飣餖 臭餒雜鮑鮓 제관이 제사 음식 진열하면서 절인 고기 젓갈 섞어 고약한 냄새. 夏畦忘疎略 倉卒飾緌銙 여름철 농사꾼이 제 꼴을 잊고 얼떨결에 끈 달고 혁대 박아 꾸민듯. 41구에서 52구까지는 옛것을 추구한다는 자들의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장자』 「외물」에 보면 시례詩禮를 외우면서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두 명의 유자가 나온다..
2. 칭찬을 듣고도 기쁘지 않은 이유 我亦聞此譽 初聞面欲剮 나 또한 이런 기림 들은 적 있어 맨 처음 들었을젠 낯을 도려내는듯. 再聞還絶倒 數日酸腰髁 두 번 째 듣고는 외려 배를 잡고서 며칠동안 엉덩이 뼈 시큰했었지. 盛傳益無味 還似蠟札飷 떠들어 댈수록 점점더 흥미 없어 마치도 밀랍을 씹는 듯 했네. 因冒誠不可 久若病風傻 헛된 기림 받는 건 안될 일이라 나중엔 풍 맞은 바보 되었지. 21구에서 28구까지 연암은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나도 예전에 이런 칭찬을 들은 일이 있었다. “자네의 문장은 꼭 양한의 풍격이 있네 그려. 시는 꼭 성당의 시와 같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두 번 듣고는 배를 잡고 뒹굴며 웃다가 엉덩이 뼈가 쑤실 지경이었다. 자꾸 그런 소리를 ..
1. 흉내내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군의 시고詩稿는 몹시 적어서, 고체와 금체시 모두 50수 뿐이다.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韓愈를 배웠는데 기이하고 험벽하기는 그보다 더 해서, 정경情境은 핍근하고 필력이 막힘이 없다. 율시와 절구 등의 시는 항상 성률에 구속되어 마음 속에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그래서 왕왕 한 두 구절만 이룬 채 그만 둔 것이 많다. -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태학사, 1997), p.279 연암이 시 짓기를 즐기지 않았던 것은 그러니까 운자니 평측이니 하는 성률에 얽매여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것이 싫어서였다. 이번에 보려고 하는 연암의 시 「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은 몇 ..
5. 동심의 중요성을 외친 이지 그런데 문학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천진과 진정의 모델을 동심童心에서 찾고 있는 것은 연암이나 이덕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명나라 이지李贄(1527-1602)의 「동심설童心說」과 무관하지 않다. 이지李贄는 이탁오李卓吾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국의 이단적인 사상가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했다는 비난 끝에 탄압을 받아 옥중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그는 「동심설」을 바탕으로 위선적인 도학道學과 가식적인 문학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동심설」은 당대에 워낙 큰 파장을 일으켰던 글이기에 조금 길지만 자료 소개 삼아 여기에 전문을 옮겨 소개한다. 용동산농龍洞山農이 『서상西廂』을 쓰며 끝에다 말하기를, “아는 이가 내가 여태도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4. 동심으로 돌아가자, 처녀로 돌아가자 아아! 『시경』 3백편은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 아닌 것이 없고, 뒷골목 남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패邶 땅과 회檜 땅의 사이는 지역마다 풍속이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위로는 백성의 풍속이 제각금이다. 그런 까닭에 시를 채집하는 자가 여러 나라의 노래로 그 성정을 살펴보고 그 노래의 습속을 징험하였던 것이다. 다시 어찌 무관의 시가 옛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겠는가? 만약 성인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의 노래를 살피게 한다면, 『영처고』를 살펴보아 삼한의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요, 강원도 사내와 제주도 아낙의 성정을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니, 비록 이를 조선의 노래라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嗚呼..
3. 지금ㆍ여기의 이야기를 담아낸 무관이 지은 시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하지만 또한 천승千乘 제후의 나라이고, 신라와 고려가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민간에는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다. 그럴진대 그 방언을 글로 적고 그 민요를 노래한다면 절로 문장을 이루어 참된 마음이 발현될 것이다. 남의 것을 그대로 답습함을 일삼지 않고 서로 빌려와 꾸지 않고, 지금 현재에 편안해 하며 삼라만상에 나아감은 오직 무관의 시가 그러함이 된다. 左海雖僻, 國亦千乘, 羅麗雖儉, 民多美俗, 則字其方言, 韻其民謠, 自然成章, 眞機發現. 不事沿襲, 無相假貸, 從容現在, 卽事森羅. 惟此詩爲然. 이상 살펴본 연암의 이야기는 이렇다. 배울 것을 배워라. 옛 것이라고 무작정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옛 것은 도리어 지금 것에 치명적인..
2. 동심으로 돌아가자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나고 붉고 수염이 달린 의젓한 관운장關雲長의 소상塑像이 있다. 사녀士女가 학질을 앓게 되면 그 좌상座床 아래에 들여놓는데,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겨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꼬맹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위엄스러운 소상을 모독하는데, 눈동자를 후벼 파도 꿈벅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대도 재채기 하지 않으니,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빚은 소상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수박의 겉을 핥는 자나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맛을 이야기할 수가 없고,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 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함께 계절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형상을 꾸미고 의관을 입혀 놓더라도 ..
1. 무관의 시는 옛날의 시가 아닌 지금의 시 자패가 말하였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의 시를 지음은. 옛 사람을 배웠다면서 그 비슷한 구석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않으니, 어찌 소리인들 방불하겠는가?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時俗의 잗단 것을 즐거워하니 지금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子佩曰: 陋哉! 懋官之爲詩也. 學古人而不見其似也. 曾毫髮之不類, 詎髣髴乎音聲. 安野人之鄙鄙, 樂時俗之瑣瑣, 乃今之詩也, 非古之詩也. 『영처고』는 이덕무가 젊은 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嬰處’는 영아嬰兒와 처녀處女를 가리키는 말이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운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 처녀처럼 순진한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다. 자패子佩는 앞서..
6. 지금을 담아내자 말하던 유한준의 아들 다시 연암이 그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글을 한 통 더 읽어보자. 어제 아드님이 와서는 글 짓는 것에 대해 물어 보길래, “예禮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라”고 일러 주었지요. 그랬더니 자못 기뻐하지 않고 돌아가더군요. 모르겠습니다만 아침저녁 문안을 여쭐 적에 이 말을 하던가요? 昨日令胤來, 問爲文. 告之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動, 非禮勿言.’ 頗不悅而去. 不審, 定省之際, 言告否. 「답창애지사答蒼厓之四」이다. 아마도 유한준의 아들이 아버지 편지 심부름으로 연암을 찾아왔다가 문장의 방법을 물었던 모양이다. “선생님! 글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아버지와의 불편함을 눈치 챈 아들의..
5. 유한준의 문집에 혹평을 날리다 부쳐 보내신 글 묶음을 양치하고 손 씻고 무릎 꿇고서 장중히 읽고는 말하기를, “문장은 모두 기이하다. 그러나 이름과 물건을 많이 빌려와 인용하고 근거로 댄 것이 꼭 맞지가 않으니 이것이 흠결이 된다”고 하였지요. 청컨대 노형老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寄示文編, 漱口洗手, 莊讀以跪曰: “文章儘奇矣. 然名物多借, 引據未襯, 是爲圭瑕. 請爲老兄復之也. 「답창애지일答蒼厓之一」이다. 아마도 유한준이 자신의 문집 엮은 것을 연암에게 보내 평해줄 것을 요청했던 모양이다. 칭찬을 기대하고 있던 유한준에게 연암은 대뜸 좋기는 좋은데 이름을 자꾸 빌려오고, 여기저기서 인용을 끌어온 것이 맞지 않아 그게 흠이라고 지적하였다. 형사形似 추구의 지나침을 나무란 것이다. 문장에는 방..
4. 하늘이 저렇게 파란 데도 다시 여기서 본편의 주제(心似와 形似)와 관련된 연암의 짧은 글 세 편을 함께 읽기로 하자. 마을의 꼬맹이가 천자문을 배우는데, 그 읽기 싫어함을 꾸짖자,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라고 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이를 기죽일만 합니다. 里中孺子, 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我聰明, 餒煞蒼頡. 전문이래야 34자에 불과한 엽서로, 「답창애答蒼厓」 즉 창애蒼厓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이다.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꼬마 녀석 하나가 자꾸만 딴청을 한다. 화가 난 훈장이 이놈! 하고 야단을 치자 그 대답이 맹랑하다. “선생님! 저 하늘을 보면 저렇게 파랗기만 한데, 하늘 ..
3. 제 목소리를 담아 문집을 지은 낙서야 이씨의 아들 낙서洛瑞가 나이 열 여섯인데, 나를 좇아 배운 지 여러 해이다. 심령이 맑게 열려 지혜가 구슬 같다. 한 번은 자신의 『녹천고綠天稿』를 가지고 와 내게 물었다. “아! 제가 글 지은 것이 겨우 몇 해이지만 남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습니다. 한마디 말만 새롭고 한 글자만 이상해도 문득 ‘옛날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낯빛을 발끈하며 ‘어찌 감히 이 따위를 하는 게야?’ 합니다. 아아!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 하러 다시 합니까? 원컨대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두 손을 이마에 얹고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며 말하였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창힐蒼頡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2. 옛 것을 배우는 두 가지 방법 어떻게 하면 새로우면서 예로울 수가 있을까? 어찌하면 본받지 않으면서 본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새것이 옛것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당나라 유지기劉知幾는 『사통史通』 「모의模擬」에서 옛 것을 배우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모동심이貌同心異의 방법과 심동모이心同貌異의 방법이 그것이다. 대저 작자들이 위魏나라 이전에는 삼사三史를 많이들 본받았고, 진晉나라 이래로는 오경五經 배우기를 즐겼다. 대저 사서史書의 글은 얕고 모방하기가 쉽지만, 경전經典의 글은 뜻이 깊고 모의하기가 어렵다. 이미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고 보니 얻고 잃음 또한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대개 겉모습은 달라도 마음이 같은 것은 모의의 윗길 가는 것이고, 겉모습은 같지만 마음이 다른 것은 모의의..
1. 진짜 같아지려 하면 할수록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는 진짜와 가짜, 같고 다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은 글의 처음을 ‘방고倣古’, 즉 옛날을 모방하는 문제로 시작한다. 글을 짓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말과 뜻으로 하지 않고 옛것을 모방하여 짓는다. 옛것을 모방함은 옛 사람과 거의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꼭 같게 하면 되는가? 그 결과 읽는 이가 이것이 옛글인지 지금 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우리의 글쓰기는 성공한 것일까? 옛것을 본떠 글을 지음을 마치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 하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좌우가 서로 반대로 되니 어찌 비슷함을 얻으리요.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그려내듯 한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말이 거꾸로 보이니 어찌 비슷하다 하리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 할진대..
6. 시란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고목이 버섯으로 변한 것 다시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 살며 죽원옹이라 호를 지은 사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이른바 저 문동文同이 말한 ‘흉중성죽胸中成竹’의 화론을 점화點化한 것이다. 의재필선意在筆先이랬거니, 대나무를 그리려면 반드시 가슴 속에 대나무를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판교板橋 정섭鄭燮은 자신이 그린 대나무 그림의 제발題跋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맑은 가을 강가 여관에서 새벽에 일어나 대나무를 보니, 안개 빛과 해 그림자와 이슬 기운이 모두 성근 가지와 빽빽한 잎새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가슴 속에서 뭉게뭉게 그림을 그리고픈 생각이 솟아났다. 기실 가슴 속의 대나무는 눈 앞의 대나무는 아니었다. 인하여 먹을 갈고 종이를 펼쳐 붓..
5. 모양이 아닌 정신을 그리다 한편으로 「불이당기」는 이렇게 읽고 말 글은 아니다. 앞서도 보았듯 심사와 형사에 얽힌 화론畵論의 핵심처를 정면에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재필선意在筆先’ 즉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의 정신이 붓에 앞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논의는 위부인衛夫人의 「필진도筆陣圖」에서 처음 언급한 이래로 역대 화론에서 늘상 거론되어 온 말이다. 그림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사생寫生이 아니라 사심寫心일 뿐이다. 그래서 송나라 진욱陳郁은 『장일화유藏一話腴』에서 “대개 형상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가 않고, 오직 마음을 그려내기가 어려울 뿐이다. 대저 굴원의 모습을 그려 꼭 같게 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그 못가를 거닐며 읊조리고 충성을 품어 불평한 뜻을 능히 그려내지 못한다면 또한 굴원은 아닌 것이다”..
4. 정신의 뼈대를 세우고 보면 눈 속 잣나무가 보인다 얼마 후 학사 이양천 공은 세상을 뜨고 말았네. 내가 그 시문을 편집하다가 적소謫所에 있을 때 형에게 보낸 편지를 얻었는데, 쓰여 있기를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보니, 날 위해 당로자當路者에게 석방을 구해보려 한다는데, 어찌 저를 이리도 박하게 대우하는지요. 비록 바다 가운데서 썩어 죽을망정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었네. 내가 그 글을 들고서 슬피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구나. 선비는 궁하게 된 뒤에 평소 품은 뜻이 드러나는 법이다. 환란과 재앙을 만나서도 그 절조를 고치지 아니하고, 높고도 외로이 우뚝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어찌 날씨가 추워진 때라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
3. 위급한 위리안치 중에도 임금을 걱정한 이양천의 절개 위리안치 되고 나서는 장독瘴毒을 머금은 안개가 어두침침하고, 독사와 지네가 베개와 자리에 얽혀 있어 해입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지. 어느 날 밤에는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마치 벽력이 이는 듯하므로 아랫것들은 모두 넋이 나가 구토하며 어지러워들 하였네. 내가 노래를 지어 말하기를, 「남쪽바다 산호야 꺾인들 어떠하리. 오늘밤 다만 근심 옥루玉樓의 추움일세.」라 하였다네. 旣在籬中, 瘴霧昏昏, 蝮蛇蜈蚣, 糾結枕茵, 爲害不測. 一夜大風振海, 如作霹靂, 從人皆奪魄嘔眩. 余作歌曰: 「南海珊瑚折奈何, 秪恐今宵玉樓寒.」 우여곡절 끝에 그는 흑산도에서 귀양생활을 시작했고,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안개는 장기瘴氣를 머금어 기혈을 삭히고, 거처에는 독사와 지네가 여기..
2. 잣나무는 그려달라는 부탁에 글만 적어 보낸 이유 그러자 학사는 이렇게 말했었네. ‘까닭이 있다네. 내가 예전에 이인상李麟祥과 노닐었는데, 일찍이 비단 한폭을 보내 제갈공명 사당의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었지. 이인상은 한참 있다가 전서로 「설부雪賦」를 써서는 돌려보냈더군. 내가 전서를 얻고는 또 기뻐서 더욱 그 그림을 재촉했더니, 이인상은 웃으면서 말했지. 「자네 아직 몰랐던가? 예전에 이미 보냈던걸?」내가 놀라서 말했네. 「지난 번 온 것은 전서로 쓴 「설부」였을 뿐일세. 자네가 어찌 그것을 잊었단 말인가?」 이인상은 웃으며 말했지. 「잣나무는 그 가운데 있다네. 대저 바람서리가 모질다 보니 능히 변치 않을 것이 있겠는가? 자네 잣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구해보게.」 내가 그제서야 웃으며 대답..
1. 대나무도 없는 집인데 죽원옹이란 호를 짓다 사함士涵 유한렴劉漢廉이 죽원옹竹園翁이라 자호하고 거처하는 집에 불이당不移堂이란 편액을 걸고는 내게 서문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집에 올라보고 그 동산을 거닐어 보았지만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의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이 아니겠는가? 이름이란 것은 실질의 손님이거늘, 나더러 장차 손님을 위하란 말인가?” 사함이 머쓱해져서 한동안 있더니만, “애오라지 스스로 뜻을 부쳐본 것일 뿐이라오.”라고 하였다. 士涵自號竹園翁, 而扁其所居之堂曰不移, 請余序之. 余嘗登其軒, 而涉其園, 則不見一挺之竹. 余顧而笑曰: “是所謂無何鄕烏有先生之家耶? 名者實之賓, 吾將爲賓乎?” 士涵憮然爲間曰: “聊自..
6. 아깝구나, 연암이 세초하여 없앤 책들 아들 박종채朴宗采는 아버지 연암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연암협에 계실 때 혹은 종일 마루를 내려오지 않고 혹은 어떤 사물을 주목하여 눈길을 돌리지 않고 침묵하여 말이 없는 채 두어 시간을 넘기곤 했다. 其在燕峽也, 終日不下堂, 或遇物注目, 瞪默不言者移時.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하셨다. 嘗言: “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 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 ..
5. 세상을 관찰함으로 읽는 책 여기서 다시 연암의 글 한편을 읽기로 하자. 제목은 「답경지지이答京之之二」이다. 독서를 정밀하고 부지런히 하기로는 포희씨만한 이가 없다. 그 정신과 의태意態는 천지만물을 포괄망라하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이것은 다만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되지 않은 글일 뿐이다. 후세에 독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하는 자들은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썩어 문드러진 종이 사이에 눈을 부비며 그 좀오줌과 쥐똥을 엮어 토론하니,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와 묽은 술을 먹고 취해 죽겠다는 꼴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麤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4. 통해야만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런 까닭에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께 고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의 사모함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소리를 논할 수가 없다. 글을 짓더라도 『시경』의 생각이 없으면 더불어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이별해보지 못하고, 그림에 먼 뜻이 없다면 더불어 문장의 정경情境을 논할 수가 없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모두 문심文心이 없는 것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故不識老臣之告幼主, 孤子寡婦之思慕者, 不可與論聲矣. 文而無詩思, 不可與知乎國風之色矣. 人無別離, 畵無遠意, 不可與論乎文章之情境矣. 不屑於蟲鬚花蘂者, 都無文心矣. 不味乎器用之象者, 雖謂之不識一字可也. 『주역周易』「..
3. 글로 드러나는 情과 境 무엇을 일러 정情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이요 산이 푸르른 것이다. 何如是情? 曰: 鳥啼花開, 水綠山靑. 또한 글에는 정情이 있다. 글의 정이란 무엇인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빛이요 산은 푸른빛이라고 했다. 나는 외롭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쁘다고 쓰지 않고,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로 들려준다. 나는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가을하늘을 나는 외기러기의 울음에 얹을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님이 그리워 가슴이 아플제면 나는 그 님과 헤어지던 그 버드나무 아래서 뭣 모르고 우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
2. 글로 드러나는 소리와 빛깔 그렇다면 글에 소리[聲]가 있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의 대신大臣 노릇 할 때와 주공周公이 숙부叔父 역할을 할 때 내가 그 말소리는 듣지 못하였어도 그 소리를 상상해 본다면 정성스러울 따름이었으리라. 고아孤兒인 백기伯奇와 기량杞梁의 과부寡婦를 내가 그 모습은 못 보았지만, 그 소리를 떠올려 보면 간절할 뿐이었으리라. 未聞其語也,然則文有聲乎? 曰: 伊尹之大臣, 周公之叔父, 吾 想其音則款款耳. 伯奇之孤子, 杞梁之寡妻, 吾未見其容也, 思其聲則懇懇耳. 먼저 ‘성聲’이다. 그렇다. 글에는 그 배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백기伯奇와 기량杞梁, 그 옛 사람의 음성을 나는 접한 적이 없는데도, 그 글을 읽으면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하고 안타까운 소리가..
1. 세상을 보며 글자를 만들었던 포희씨 연암은 40세 전후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편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머물러 살았다. 이 시기 전후 몇 년간의 글을 묶어 『종북소선鍾北小選』이라 이름 짓는다. 이글은 이 묶음의 첫머리에 얹은 것이다. 연암 문학론의 최상승最上乘 문자로 그 문학 정신의 울결鬱結이 이 한편에 녹아 있다. ▲ 전의감동에 살 때의 울분은 醉踏雲從橋記에 담겨 있다. (사진 출처 - [연암을 읽다]) 우주라는 기호를, 만물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연암은 이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그 방법을 성색정경聲色情境이란 네 항목에 담아 이야기한다. 다시 처음의 원문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아아! 포희씨庖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
6. 가련한 공기족들의 미련한 판단능력 이제 큰 소리로 스스로를 비유하여 사슴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다시금 형체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보는 바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려 한다면, 그대나 나나 모두 망녕될 뿐이리이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겠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과연 사슴보다야 작겠지만 만약 개미로 본다면 코끼리의 사슴에 있어서와 한 가지일 겝니다. 今乃大言自况曰麋, 何其愚也? 宜其見笑於大方之家也. 若復較其形之大小, 辨所見之遠近, 足下與僕, 皆妄也. 麋果大於蠅矣, 不有象乎? 蠅果小於麋矣, 若視諸蟻, 則象之於麋矣. 연암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제 내가 스스로 사슴이라 비유한데 대해, 그대가 크기로 따져서 자신을 파리에 비..
5. 자기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 우연히 거친 성질을 기리다가 스스로를 사슴에다 견준 것은 사람이 가까이 가면 놀라는 까닭에서였지 감히 스스로 크다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신 글월을 받자오매, 스스로를 말 꼬리에 붙은 파리에다 비유하셨으니 또 어찌 그다지도 작단 말입니까? 그대가 진실로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偶頌野性, 自况於麋, 所以近人則驚, 非敢自大也. 今承明敎, 自比於驥尾之蠅, 又何其小也? 苟足下求爲小也, 蠅猶大也. 不有蟻乎? 윗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역시 바라봄의 문제에 대해 논한 글을 한 편 더 읽어본다. 「답모答某」는 연암이 누군가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글이다. 아마 이보다 앞선 편지에서 연암이 스스로를 겁 많은 사슴에 견준..
4.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서재 내가 또 말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일세. 그럴진대 본시 바싹 가로막고 보아 한 방 가운데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가 문장을 봄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폈다’고 한 것이야. 공자께서 그 문장을 봄을 크게 여겨 이를 이어 말씀하시기를, ‘편안히 거처할 때는 그 말을 익힌다[玩]’고 하셨지. 대저 익힌다 함이 어찌 눈으로만 보아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음미하여 그 맛을 얻고, 귀로 들어 그 소리를 얻으며, 마음으로 마주하여 그 정채로움을 얻는 것일세. 이제 자네가 창에 구멍을 뚫고서 눈으로 이를 전일하게하고, 유리알로 받아 마음으로 이를 깨닫는다고 하세. 비록 그러나 방과 창이 텅비지 않고는..
3. 넓게 읽되 요약해야 하고 번뜩 깨우쳐야 한다 낙서가 놀라 말하였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지요?” 내가 말했다. “그대는 저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가? 앞을 보자면 뒤를 잃게 되고, 왼편을 돌아보면 오른편을 놓치고 말지. 왜 그럴까?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게 되고, 눈과 허공이 서로 맞닿기 때문일 뿐이야. 차라리 몸을 방밖에 두어 창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아 한 눈의 전일함으로 온 방안의 물건을 다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約’, 즉 요약함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로군요.” 洛瑞驚曰: “然則將奈何?” 余曰: “子未見夫索物者乎? 瞻前則失後, 顧左則遺右, 何則? 坐在室中, 身與物相掩, 眼與空相逼故爾. 莫若..
2. 의미 없는 독서에 대해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대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눈이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는 바의 것이 모두 물이고 보니 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인게지. 이제 자네의 책은 용마루에 가득차고 시렁을 꽉 채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비록 동중서董仲舒의 전일專一함을 본받고, 장화張華의 기억력에 도움 받으며, 동방삭東方朔의 암기력을 빌려온다 해도 장차 스스로 얻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完山李洛瑞, 扁其貯書之室, 曰素玩. 而請記於余, 余詰之曰: “夫魚游水中, 目不見水者, 何也? 所見..
1. 나비 놓친 사마천의 심정으로 읽어라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筑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 보면 아무도 없고, 게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
7. 시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도로 눈을 감아라 이날 홍려시소경 조광련이 의자를 나란히 하고서 요술을 구경하였다. 내가 조경에게 말하였다. “눈이 능히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할진대 비록 눈이 없다고 해도 괜찮으리이다. 그러나 항상 요술하는 자에게 속게 되는 것은 이 눈이 일찍이 망녕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려.” 조경이 말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이가 있다 해도 소경은 속이기가 어려울 터이니, 눈이란 과연 항상된 것일까요?”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이가 있었지요.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에 사십년이올시다. 전일에 ..
6. 장님의 눈이야말로 평등안 다시 책문밖에 이르러 책문 안을 바라다보니 일반 집들도 모두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았고, 띠로 이엉을 이어 위를 덮었는데, 등마루는 우뚝하고 대문은 가지런하였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가로 마치 먹줄을 친 듯하였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가 길 가운데로 이리저리 오가고, 벌려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자기들이다. 이미 그 제도를 보고 나니 시골구석의 촌티라고는 아예 없었다. 예전에 내 친구 홍덕보가 일찍이 규모는 큰데도 심법心法은 세밀하다고 말하더니,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끝 모퉁이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매, 앞길의 유람이 갑자기 생각이 탁 막히면서 곧장 이 길로 되돌아가고만 싶어, 나도 몰래 배가 부글거리고 등이 타는 듯하였..
5. 연못가에 서서도 전혀 위태롭지 않은 장님 내가 오늘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천하에 지극히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발굽을 믿고, 발굽은 땅을 믿어 말고삐를 잡지 않은 보람을 거둠이 이와 같도다. 수역首譯이 주주부周主簿에게 말한다. “옛날에 「위어危語」를 지은 자가 있어 말하기를,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에 섰도다’라고 했더니, 참으로 우리들의 오늘밤 일입니다 그려.” 내가 말했다. “그것이 위태롭기는 해도 위태로움을 잘 안 것은 아니라고 보네.” 두 사람이 말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장님을 보고 있는 자는 눈이 있는 사람인지라, 장님을 보고는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지, 정작 장님은 위태로운 줄을 알지 못하는 법이거든. 장님은 위태로운 ..
4. 눈과 귀에 휘둘리지 말라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져 지극히 위태로왔다. 그러나 살고 죽는 판가름이 먼저 마음에 분명하고 보니 용이고 도마뱀이고 그 앞에서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릴 것이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사물인데 바깥 사물이 항상 눈과 귀에 탈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보고 듣는 바름을 잃게 만듦이 이와 같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황하보다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통이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장차 내 산 중에 돌아가 다시 앞 시내의 물소리를 듣고 이를 징험하여, 장차 몸놀림에 교묘하여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는 자를 경계하리라. 昔禹渡河, 黃龍負舟, 至危也. 然而死生之辨, 先明於心, 則龍與蝘蜓不足大小於前也. 聲與色外物也,..
3. 보이지 않는 물소리가 두렵게 하네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요동 평야는 평평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성내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황하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낮에는 능히 물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온통 위험한데로만 쏠려서 바야흐로 부들부들 떨려 도리어 그 눈이 있음을 근심해야 할 판인데 어찌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한밤중에 강물을 건너매, 눈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자 위태로움이 온통 듣는 데로만 쏠려서 귀가 바야흐로 덜덜 떨려 그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其危如此而不聞河聲. 皆曰遼野平廣故水不怒鳴, 此非知河也. 遼河未嘗不鳴, 特未夜渡爾. 晝..
2. 눈에 현혹되지 말라 이제 나는 한밤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 번 건넜다. 황하는 장성 밖에서 나와 장성을 뚫고서 유하와 조하, 황화와 진천 등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를 지나면서는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의 하류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 불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물이 앞에 나오는데, 붉은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며 그 끝간 데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천리밖에 폭우가 내린 때문이었다. 今吾夜中一河九渡. 河出塞外, 穿長城, 會楡河潮河黃花鎭川諸水, 經密雲城下爲白河. 余昨舟渡白河, 乃此下流. 余未入遼時, 方盛夏行烈陽中, 而忽有大河當前, 赤濤山立, 不見涯涘, 蓋千里外暴雨也. 소리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
1. 같은 소리도 마음 따라 달리 들린다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 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대고 소리 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꺾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하니 저만치 떨어져 서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하여 마치도 물 밑에 있던 물귀신들이 앞 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고, 양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 채려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
7. 이 작품집에 나는 모르고 그대들만 아는 코골이는 알려주시라 이로 볼진대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지만 기리고 헐뜯음은 남에게 있다. 비유하자면 이명耳鳴이나 코골기와 같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 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 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 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以是觀之, 得失在我, 毁譽在人. 譬如耳鳴而鼻鼾. 小兒嬉庭, 其耳忽鳴, 啞然而喜, 潛謂隣兒曰: “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隣兒傾耳相..
6. 글의 생명은 진정성의 여부에 달렸다 이러한 가치 판단의 문제(자! 그렇다면 우리가 처해야 할 그 ‘중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에 대해서 다른 시각에서 다룬 글이 바로 「공작관문고자서孔雀舘文稿自序」이다. 이글에서 연암은 다시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를 들고 나온다. 먼저 원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글이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저 제목에 임해 붓을 잡기만 하면 문득 옛 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경전의 뜻을 찾아 생각을 꾸며 근엄하게 하며 글자마다 무게를 잡는 자는, 비유하자면 화공畵工을 불러 진영眞影을 그리는데 용모를 고쳐서 나가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멀뚱멀뚱 구르지 않고, 옷의 무늬는 닦은 듯 말끔하여 평상의 태도를 잃고 보면 비록 훌륭한 화공이라 해도 그 참 모습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
5. 중간에 처하겠다 애초에 우리의 관심사는 장님의 비단옷과 밤길의 비단옷 사이에 우열을 갈라 따지는 일이었으니, 그 대답은 정령위와 양웅 중 어느 편이 더 나은가를 헤아려 보면 해결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그것을 청허선생은 “난 몰라! 난 몰라!”했고, 연암은 다시 청허선생에게나 가서 물어보라고 했으니,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까? 다음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보이는 삽화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법 싶다. 장자가 산 가운데로 가다가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 베는 사람이 그 곁에 멈추고도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쓸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그 타고난 ..
4. 자네의 작품집은 여의주인가 말똥인가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도 또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를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내 시집의 이름을 삼을 만하다”하며 마침내 그 시집을 이름지어 『낭환집蜋丸集』이라하고는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蜣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珠. 驪龍亦不以其珠, 笑彼蜋丸. 子珮聞而喜之曰: “是可以名吾詩.” 遂名其集曰蜋丸, 屬余序之. 말똥구리는 더러운 말똥을 사랑스런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스레 굴린다. 말똥구리에게 있어 말똥은 여룡이 물고 있는 여의주보다 더 소중하다. 여룡이 여의주와 바꾸자 한들 거들떠 볼 까닭이 없다.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룡..
3. 짝짝이 신발 임백호林白湖가 막 말을 타려는데 하인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 취하셨습니다요.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짝씩 신으셨네요.” 하자, 백호가 꾸짖으며 말하였다. “길 오른편에 있는 자는 날더러 가죽신을 신었다 할 터이고, 길 왼편에 있는 자는 날더러 나막신을 신었다 할 터이니,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林白湖將乘馬, 僕夫進曰: “夫子醉矣. 隻履鞾鞋.” 白湖叱曰: “由道而右者, 謂我履鞾, 由道而左者, 謂我履鞋, 我何病哉!”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조선 중기의 쾌남아이다. 그가 평양 부임길에 길가에 황진이 무덤 곁을 지나게 되었다. 왕명을 받들고 가는 터였음에도 호기에 겨워 기생의 무덤에 술잔을 부어 주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紅顔은 어데 두고 백골白骨만 누었나니. 잔..
2. 이가 사는 곳 예전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파하고 돌아오니, 그 딸이 맞으며 말하였다. “아버님, 이[蝨]를 아시는지요? 이는 어디서 생기나요? 옷에서 생기나요?” “그렇지.” 딸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겼다!” 하자 며느리가 청하여 말하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지요?” “네 말이 맞다.” 며느리가 웃으며 말하기를, “아버님은 내가 맞다시는 걸요.” 하였다.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누가 대감더러 지혜롭다 하겠수. 다투고 있는데 둘 다 옳다니요?”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둘 다 이리 오너라. 대저 이는 살이 아니면 알을 까지 못하고, 옷이 아니고는 붙어있질 못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이야. 비록 그렇긴 해도 옷이 장롱 속에 있어도 또한 이는 있고, 설사 네가 ..
1. 바른 견식은 어디서 나오나? 진정지견眞正之見, 즉 참되고 바른 견식見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 살펴보려는 「낭환집서蜋丸集序」와 「공작관문고자서孔雀舘文稿自序」는 바로 이 진정眞正한 견식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의 글이 늘 그렇듯 이들 글 또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러 겹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글쓴이의 진의를 온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나가 놀다가 장님이 비단옷 입은 것을 보았다. 자혜가 휴우 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아! 제게 있는데도 보지를 못하는구나.” 자무가 말하였다. “대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비교하면 어떨까?” 마침내 서로 더불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이를 물어보았더니, 선생은 손을 내저으며 “나는 모르겠네. 나는 모르겠어.”..
4. 달사는 적고 속인만 많다 내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에 능하다. 한 가지 법도에만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된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가 되고 또 송명宋明의 시가 된다. 겨우 송명인가 싶어 보면 다시금 성당으로 돌아가 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김이 또한 너무 심하도다. 그러나 계지의 동산에는 까마귀가 자줏빛도 되었다가 비췻빛도 된다. 세상 사람들은 미인을 재계한 듯 빚어놓은 듯 만들고 싶어 하지만 손뼉 치며 추는 춤과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는 날로 경쾌해지고 더 아름다워 질 터이고, 틀어 올린 머리와 아픈 이빨은 모두 나름대로의 태가 있는 법이다. 그 성내고 노함이 날로 심해질 것은 ..
3. 겉모습에만 현혹되는 사람들 미인을 보면 시를 알 수가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임은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괸 것은 한스러움을 나타낸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근심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라는 바가 있을 때는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약 그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한 것 같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빚어놓은 것 같지 않다고 나무란다면, 이것은 양귀비가 이빨이 아파 찌푸림을 나무라는 격이요, 번희樊姬가 쪽진 머리를 감싸 쥠을 못하게 하는 격이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의 아름다움을 야단하고, 손뼉 치며 추는 춤의 경쾌하고 빠름을 꾸짖는 격이라 하겠다.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
2. 하나의 꼴 속에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까마귀의 날갯빛은 정말 검을까..
2. 까마귀의 날갯빛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1. 달사와 속인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恠萬奇, 還寄於物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恠己, 廼生嗔一事不同, 都誣萬物. ⇒ 해설 보기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噫! 錮烏於黑足矣, 廼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並黑而不知也. 何則? 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 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 해설 보기 觀乎美人, 可以知..
6. 만물은 제각기 살아 숨 쉴 뿐, 절대적 법칙은 없다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림이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 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是情量所及, 惟在乎馬牛鷄犬, 而不及於龍鳳龜麟也. 象遇虎, 則鼻擊而斃之, 其鼻也, 天下無敵也. 遇鼠, 則置鼻無地, 仰天而立. 將謂鼠嚴於虎, 則非向所謂理也.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눈으로 보아 아는 세계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진리를 꿰뚫으려 하는 노력은 코끼리 앞에 서면 ..
5. 하늘은 왜 코끼리에게 장난을 쳤는가?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치 사물을 만듦에 모자란 것이라도 있는 듯이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감히 묻는다. “이빨을 준 것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장차 말하리라. “하늘이 주었다.” 다시 묻는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은 장차 이것으로 무엇을 하게 하려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하늘이 하여금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이로 하여금 왜 물건을 씹게 하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대저 이치이다. 새나 짐승은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부리나 주둥이로 숙여서 땅에 닿게 하여 먹을 것을 구한다. 때문에 학의 다리가 높고 보니 목이 길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4. 하늘이 만든 건 아무 것도 없다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천天’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건乾’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신神’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써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품을 가지고 조물造物로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噫!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嘗一一命之哉. 以形軆謂之天, 以性情謂之乾,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
3. 코끼리를 눈으로 보고도 코를 찾는 사람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其爲物也, 牛身驢尾, 駝膝虎蹄. 淺毛灰色, 仁形悲聲. 耳若垂雲, 眼如初月. 兩牙之大二圍, 其長丈餘. 鼻長於牙, 屈伸如蠖, 卷曲如蠐. 其端如蠶尾, 挾物如鑷, 卷而納之口. 그 다음 단락은 코끼리의..
1.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상기(象記) 1. 에코와 연암 몇 해 전 일이다. 강의 시간에 연암의 글을 강독하고서 평설을 써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과제 끝에 쓴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零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끌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대목이었다. 에코의 이 책에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 되는 제 1원인으로부터 추론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 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보자. 왜 짐승에..
연암의 글을 읽고 붓 가는 대로 쓴 서문 독연암필서(讀燕放筆序) “연암의 글은 한군데 못질 한 흔적이 없는데도 꽉 짜여져 빈틈이 없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다. 방심하고 돌진한 장수는 도처에서 복병과 만나고 미로와 만나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책갈피에 써둔 메모다. 92년 7월 27일이란 날짜가 쓰여 있다. 또 97년 6월 20일의 메모에는 “서늘함은 사마천을 닮았고 넉살 좋음은 장자에게서 배운 솜씨다. 소동파의 능청스러움, 한유의 깐깐함도 있다. 불가에 빠진 사람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노장으로 압도하고, 다시금 유자의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고 적혀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란 이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두 메모 사이에 놓인 몇 해의..
2. 이전에 코끼리를 두 번 봤던 기억 장차 괴상하고 진기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보려거든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살피면 될 것이다. 내가 황성皇城에서 코끼리 16마리를 보았으나, 모두 쇠로 만든 족쇄로 발을 묶어 두어 그 움직이는 것은 보지 못하였었다. 이제 열하熱河 행궁行宮의 서편에서 코끼리 두 마리를 보매, 온몸을 꿈틀대며 움직이는데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하였다. 將爲怪特譎詭恢奇鉅偉之觀, 先之宣武門內, 觀于象房可也. 余於皇城, 見象十六, 而皆鐵鎖繫足, 未見其行動. 今見兩象於熱河行宮西, 一身蠕動, 行如風雨. 이제 연암의 글을 따라가며 읽어 보기로 한다. 소나 말, 닭이나 개만 보며 평생을 살아온 시골 사람이 코끼리를 난생 처음 보았다면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사진으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