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철학(哲學) (627)
건빵이랑 놀자
9.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사회적 비교에 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정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은 대부분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 사회적 비교 기준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호작용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앨렌 랭어, 이모영 역, 『예술가가 되려면』, 학지사, 2008, 244~5쪽. 존 내쉬의 MIT 재직 시절, 칠판에는 이런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존..
8. 융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한편, 칼 융에게 있어 ‘아곤의 공동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니체와 융. 이 네 명의 천재들은 서로에게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아이디어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경쟁하며 독려하는 최고의 친구들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일부 교수들의 경고장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융이 발표한 논문이 동료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만은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융을 초대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후 1시에 만..
7. 내쉬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흔히 천재들은 외로운 거인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정 도시 특정 분야에서 무리지어 나타난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로마 철학자 발레이우스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스킬로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뉴턴과 로크,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 후대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창조적 천재들은 젊은이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받은 잠재적 천재들은 앞선 천재들의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완성하려 든다고 발레이우스는 추측했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170쪽.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쉬의 파란만장한 일생..
6.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
5.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이 있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
4. 융의 독백: 신경증 덕에 배웠다 우리가 만날 또 한 명의 천재 칼 구스타프 융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우리는 저마다 학창시절 학교에 가기 싫거나 숙제나 시험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각종 ‘꾀병’을 생각해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칼 융은 학교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 학교로 가야 할 때가 되면 난데없이 기절하거나 발작을 일으키곤 해서 학교를 반년 이상이나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이 소년 융에게는 행복한 고립의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만끽했던 어린 소년 융. 어떤 의사는 융이 간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융은 의사의 진단에 코웃음을 치며 달콤한 몽상에 빠져 지내..
3. 내쉬의 독백: 강력한 우상이 필요할 뿐 친밀한 스승은 필요치 않다 내쉬는 달랐다. 그가 어떤 예감을 갖기만 하면, 어떠한 인습적인 비판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는 배경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건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배경 지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정신력, 그런 맹목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달리 본 적이 없다. -존 내쉬의 지인, 모저의 회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한 갓 스무 살의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수업도 듣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왜 수업을 듣지 않느냐는 동료의 질문에 존 내쉬는 이렇게 대답한다. “강의는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학생들의 잠재적인 창의력을 파괴해.” 존 내쉬는 자..
2. 고독은 천재의 학교다? 지금 여기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때 아닌 접속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세계를 뒤흔든 ‘천재’이기 때문만도, 풍부한 심리학적 요소들로 인생을 채우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으로 존 내쉬의 삶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위함도 아니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를 누구보다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무의식의 카오스를 의식의 전면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했고 그 결과는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존 내쉬는 무의식이 의식을 습격하는 강도가 해일이나 행성충돌의 충격에 육박하자, 의식의 활동 자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정신분열증은 무의식에 습격당한 의식의 처절한 실패처럼 ..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1. 내부의 서사가 외부의 서사를 압도하는 인간들 위대한 사람은 (……) 여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의 생각에 겁내지 않는다. 그는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면 혼자 간다. (……) 그는 남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길든다는 것의 비속함을 안다. (……)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중에서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느라 ‘바깥..
15. 장애물의 지형도를 지닌 채 싸우다 『본 얼티메이텀』에서는 제이슨이 아직 ‘데이비드 웹’이었던 시절, 그가 비밀 요원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장면이 회상 신으로 등장한다. 애보트와 대화하던 중 이제야 제이슨 본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그때 그는 무려 72시간 동안 한숨도 못 잔 상태였으며 잔혹한 물고문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들은 고문인지 훈련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 혹독한 인성교정프로그램 속에서 제이슨이 내린 결정을 ‘바로 네가 내린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너의 선택이었다고. 그러니 우리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애보트: 데이비드 웹. 설명은 다 듣고 온 건가? 제이슨: 네 애보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자네 임무는 미국 국민을 구하는 거야. 제이슨: 압니다. 애보트: 넌 이..
14. 애국심의 함정 오후 7시 15분 푸코는 강의를 끝냈다. 학생들이 그의 책상으로 모여들었다.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녹음기를 끄기 위해서였다. 혼잡한 청강생들 틈에서 그는 혼자였다. (……) 나는 청중 앞에서 배우 또는 곡예사가 된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말할 수 없는 고독에 휩싸인다. -미셸 푸코, 박정자 역, 『비정상인들』, 동문선, 2001, 6~7쪽. 제이슨 본은 인간 훈육 프로그램의 최고의 성공작이자 그 처절한 실패를 대변하는 양가적 인물이다. 트레드스톤 프로그램이 탄생시킨 살아있는 휴머노이드 로봇 제 1호였던 제이슨 본.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요원으로 거듭났지만 최악의 문제점을 노출하는 장본이었다. 제이슨의 정신 건강을 체크했던 요원 니키는 ‘실험적 훈련 중’이던 요원들의..
13. 발설된 것은 철회될 수 없고, 시행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 현대인은 자유의지의 힘을 믿도록 교육된다.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이 세상의 기회는 균등하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그 패기만만한 자유의지의 환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인종, 국적, 가족, 유전자 등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 우리의 선택은 철저히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행동했다고 해서 모두 나의 욕망이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이 진정 나의 의지였는가, 그렇게 의심되는 상황들이 곳곳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정말 자율적이고 자발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과연 어디에,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쓰일지 진정 알고..
12. 나를 지워야 내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푸코의 저작은 전부 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연장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영원하다고 믿는 모든 개념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변전된’ 것이며, 그 기원들에는 숭고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풀 벤느, 이상길 역,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173쪽. 언제부터 사람들은 ‘신분증’이 없으면 중요한 일을 하나도 처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내가 바로 나다’라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해진 순간, 인간은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되기 시작했다. 때로는 우리들 자신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소소한 과거의 행적들이 어디선가 관리되고 어디선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싹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근..
11. 모두 너였어! 널 만든 건 너야! 우리는 진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결국 잃어버린 나를 깡그리 지우는 것이었다.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기억의 창고를 열기 위한 열쇠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유일한 길임을. 과거의 나를 모조리 삭제할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나를 만든 자들’의 게임 프로그램 속에서 그들의 통제를 받는 인간병기로 머물게 될 것이다. 콩클린의 말처럼, 제이슨은 미국 정부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통제 불능의 삼천만 달러짜리 무기, 빌어먹을 실패작이었으므로. 제이슨은 ..
10. 훈육의 프로그램도 미처 길들이지 못한 마음 그러니까 그렇게 멀고도 높은 곳에서 다른 이들의 담론을 기술하고자 하는 당신은 대체 어디에서 말하고 있다고 자처하십니까? -미셸 푸코 감옥 아닌 곳에서 인간을 감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은 ‘신이(혹은 카메라가) 언제나 너를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체의 무의식에 기입하는 것이다. 특히 카메라가 제이슨 본의 ‘등 뒤’를 비출 때, 관객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제이슨 본의 목숨을 노리는 그들의 시선은 마치 신처럼 전지전능하여 언제든 바로 그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총구를 들이댈 것만 같다. 제이슨의 기억을 상실하게 한 사건도 바로 그의 등 뒤를 쏜 두 발의 총성 때문이지 않았는가. 트레드스톤의 행동대장 격인 콩클린을 직접 독대함으로써 제이슨은 비로..
9. 조직권력이 나의 권력? 푸코는 주먹다짐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용기란 육체적인 것 말고는 없다”고 규정했다. 용기, 그것은 용기 있는 육체다. (……) 노동자 계급의 노동이 아니라, 육체가 착취당한다. 시민들은 군대식 규율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육체는 훈육되고 길들여지며 그 위에 권력이 행사된다. 감금 체계는 육체들을 가둔다. -풀 벤느, 이상길 역,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222쪽. 자신을 죽이러 온 요원을 살해한 후, 제이슨 본은 비로소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지금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내 곁의 그녀, 마리다. 그는 마리의 가족들을 대피시키면서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돈을 마리에게 주기로 작정한다...
8. 우린 같은 기계의 부속품이야 날마다 응접실에서 ‘상벌수여’가 이루어진다. 아무리 사소한 반항에도 징벌이 가해지는데, 중대한 위반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리 가벼운 과실이라도 매우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메트래에서는 심지어 쓸데없는 말 한마디까지도 처벌된다. 부과되는 처벌 가운데 주된 것은 독방 수감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446쪽 푸코는 근대적 감옥 시스템의 초기 모델을 메트래(Mettray) 소년감화원에서 찾는다. 수도원과 감옥과 학교와 군대의 훈육 프로그램이 황금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 곳. 수감된 아이들이 ‘매를 맞느니 차라리 독방 수감이 훨씬 좋다!’고 절규하던 곳. 메트래 소년감화원이 문을 연 1840년이야말로 푸코가 규정하는 ‘근대..
7. 직업은 무엇입니까? 범죄는 재판에 대한 감옥의 복수이다. 재판관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대단히 무시무시한 복수이다. 그때 범죄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390쪽 여동생의 애인을 처음 봤을 때 오빠나 아버지가 하고 싶은 질문 1위는 무엇일까. 애인이 무척 어리다면 ‘아버지는 뭐하시나?’일 것이고 애인이 충분히 성숙하다면 ‘자네 직업은 뭔가?’정도가 아닐까. 이 기준에 따르면 마리 크루츠가 사랑에 빠진 이 남자 제이슨 본은 결코 ‘바람직한’ 신랑감이 아니다. 직업이나 부모님의 자산 정도는 물론 가족이나 주소나 국적조차 확실하지 않은 이 남자. 결국 우리는 ‘본’ 시리즈 1편에서 주인공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고 영화관을 나오게 될..
6. 나는 위험인물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나의 정치적 자유는 곧 나의 반대파의 정치적 자유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는 내 의견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만큼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배웠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우리는 실제로 그 ‘원칙’이 지켜지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배운다. 순전히 ‘나와 다르다’,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목격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신상 정보와 활동 내역을 낱낱이 감시당할 위험에 처해야 한다. 미네르바 사건은 수십년 동안 사문화되었던 정보통신법을 이용해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한 사람의 인생..
5.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나이다. (……) 자기 명시는 동시에 자기 파괴이다. -미셸 푸코, 이희원 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77쪽 제이슨 본은 낯선 여자의 차를 힘겹게 얻어 타고 파리로 가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만 하면,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고. 그러나 과거 그가 거주했던 파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커져가는 두려움도 숨길 수 없다. 나를 찾기만 하면, 정말 이 모든 공포와 불안이 해소될 수 있을까. 나를 찾아내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파리에 간다고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파리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구가 ..
4. ‘잃어버린 기억’에 추격당하며 점점 고통스러워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장치적인 것, 곧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다. -미셸 푸코 기억의 주기가 딱 24시간이라 매일 아침 같은 남자와 처음처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첫 키스만 50번째』),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남자가 온몸에 단서를 문신해가며 아내의 살인범을 쫓는 이야기(『메멘토』), 가슴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회사를 찾아가 이제 싫증이 나버린 애인과의 아픈 사랑을 지워버리지만 기억을 지우고도 이상하게 ‘기억할 수 없는 그녀’를 더더욱 그리워하는 이야기(『이터널 선샤인』)……. ‘기억 상실’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 곁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바..
3. 내가 누구인지 알수록 나는 위험해진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67~268쪽.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이름 모를 사내. 그는 유일한 가시적 단서인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은행에 들어간 그는 비밀계좌에 들어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열어 보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찾아낸다. 미합중국의 여권 위에 기재된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이었다. 좀처럼 표정이 없던 이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도의 미소가 스쳐간다. “내 이름은 제이슨 본이구나. 파리에 살고 있군.”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자 ..
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도 말고, 또 내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지도 말라. 우리의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관료와 경찰들에게 맡겨두라. -미셸 푸코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우리는 이 사회 곳곳에서 ‘도대체 넌 누구냐’라고 묻는 곳이 저토록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선 ‘이름’이다. 사람들은 낯선 타인을 만났을 때 일단 타인의 ‘이름’을 먼저 알아두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실질적인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저 대충 임의로 지어서 불러도 그만인 ‘이름’을 알면 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 뿌듯함을 느낀다. 이름은 타인을 우리 두뇌 속의..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1.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들은, 정말 나다운 것인가 죄수의 첫 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미셸 푸코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제이슨 본(맷 데이먼), 『본 아이덴티티』 중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가족, 국적, 모국어, 학력, 직업, 재산……. 이런 것들 중에 나의 나다움을 진정으로 결정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이용하는’ 세력들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가 하면, 각종 스팸메일과 스팸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남의 번호를..
14. 너와 함께, 네 안에서, 너를 통해, 내가 된다 폴 리쾨르는 한 인간이 일생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죽음이라는 운명과 관련된) 인간의 유한성. 둘째, 신이나 신령한 존재로부터 소외당한 인간의 현실. 셋째, 생성과 초월의 과정,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 있는 존재인 개개의 인간에게 진리는 절대로 온전하게 완성된 것일 수 없다는 점. 넷째, 선택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사이의 모순성. 다섯째, 인간이란 타자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해(with, in, and through others)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여섯째,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그 역..
13. 예언과 믿음과 사랑이 합치되는 순간 초월이라는 신의 의지는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투쟁’에 혼신을 바치는 나의 참 자아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칼 야스퍼스 네오는 스미스의 숨겨진 두려움을 간파하고 사력을 다해 그를 공격하지만, 잠시 방심하는 사이 스미스 일당의 교활한 팀플레이로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탕, 탕, 탕……. 스미스의 총격으로 매트릭스 안의 네오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죽음은 곧 정신의 죽음. 정신이 죽으면 매트릭스 바깥의 육신도 죽는다. 스미스는 더 이상 뛰지 않는 네오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선다. 이제야 자신이 ‘그’라는 것을 알 것만 같은데, 바로 그 황홀한 깨달음의 순간 네오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야 만다. 모피어스와 탱크는 믿을 ..
12. 난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아 신화는 별들에게 열정의 옷을 입히고, 신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지닌 결함과 과오를 덧씌우기도 했다네. 신화 속에서 바람과 파도는 음악이었다네. 모든 호수와 사내, 샘물과 산, 숲과 향내 그윽한 골짜기는 온갖 요정들의 놀이터였다네 -로버스 G. 잉거솔 세속의 아수라 속에서도 신성의 숨결을 발견하는 열쇠. 그 열쇠는 바로 ‘몸’이었다. 네오를 비롯하여 매트릭스에 갇혀 있던 모든 인류는 자신의 진짜 몸을 AI에게 건전지로 헌납한 채 가상의 이미지로만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신의 눈, 코, 입, 손, 발을 단 한 번도 진짜 세계에서 써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네오가 매트릭스로 철저히 세뇌된 자신의 두뇌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을 매트릭스의 회..
11. 내 이름은 …… 네오다 대자연은 오류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이를 수정하며,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괴테 네오는 ‘과연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까’ 내심 걱정하지만 모피어스를 구해야 한다는 지상과제 앞에서 모든 두려움을 잊는다. 그는 ‘과연 이런 방법이 통할까’를 고민할 틈도 없이 몰려드는 적들의 주먹과 총알을 피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잡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친구를 살리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기에 ‘생각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와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바깥으로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네오는 끝까지 자신을 추격하는 스미스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무술 실력을 ..
10.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 우리는 모순으로 인해 비옥해진다. -괴테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 내가 바로 ‘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네오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가 반드시 ‘그’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잊고, 오직 소중한 친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오라클의 예언이나 네오의 엄청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네오가 자신의 삶을 잊고 오직 모피어스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오는 진정한 ‘그’가 된다. 이제 네오는 세상에서 제일 멀다는 그 거리,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를 극복했다. 이제 마음과 육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남았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9. “미안해, 넌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VS “아니, 너는 비범함이야.”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는 이미 피와 살로 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떠한 소리나 빛이나 광선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나니. 그대는 죽을 수 없다. -『티벳 사자의 서』 중에서 살아남은 요원들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 ‘시온’을 지키기 위해 모피어스를 포기하기로 한다. 시온은 모피어스나 트리니티나 ‘그’보다 중요하니까.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판단하며 탱크를 말리지 못하는 트리니티. 탱크는 모피어스를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코드를 뽑으려 한다. “당신은 리더 그 이상이었죠. 우리의 아버지였어요. 잊지 않을게요.” 자신의 목숨과 모피어스의 목숨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오라클의 예언. 그 때문에 미칠 듯이 혼란..
8. 오라클의 모호한 화법과 엄청난 미션 어둠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빛이다. -엘리아데 오라클은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거나 단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네오에게 결국 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이라고, 너의 신화를 만드는 것 또한 너의 힘이라고 암시한 것이 아닐까. 오라클이나 트리니티나 모피어스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네 스스로가 ‘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네오 스스로가 ‘그’에게 마치 사랑에 빠지듯 완전히 몰입할 때, 그는 운명의 문턱을 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다/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오라클의 모호한 화법에 네오는 엄청난 혼란을 느낀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과연 ‘그’인지 아닌지 헷갈려 미칠 지경인 네오에게 또 다른 엄청난 미션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7. 오라클의 시험: 미안하지만, 너는 ‘그’가 아니야 신과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수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신들 앞에서는 영원의 물결로 변하지만 우리는 그 파도에 떠밀려 올라가고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 침몰하고 만다네 -괴테 엘리아데는 도시인들 대부분의 삶이 오직 경제적 타깃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꼬집어 말한다. 마치 ‘진화된 인류’는 비과학적인 신화 따위엔 관심을 끊어야 한다는 듯 이성 지상주의적인 교육이 판을 쳐왔다. 그러나 신화의 힘을 믿는 종족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문명인의 교육이야말로 ‘우주적 시간’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둘러싼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우리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힘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매트릭스의 회로..
6. 매트릭스에 갇히길 희망하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신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 자신이 바로 그 신화의 그늘 속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가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탓에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막스 뮐러 네오가 뛰어넘어야 할 과제는 매트릭스 안에서 지금까지 가져온 시공간의 감각이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라는 편견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매트릭스의 가상 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믿고 살아왔기에 모피어스가 제공하는 훈련 공간을 ‘그저 가상일뿐이야’라고 느낀다. 모피어스 “때리려고만 하지 말고 진짜로 때려!”라고 말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살았던 매트릭스가 2199년의 인류에게 유일한 현실이었듯이, 지금 네오가 훈련하고 있는 가상공간이야말로 네오가..
5. 내가 정말 ‘그’일까? 무의미는 삶의 충만함을 저해하기 때문에 질병과 같은 것이다.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것들을 ― 어쩌면 모든 것을 ― 견디게 한다. 과학은 결코 신화를 대신하지 못하며 그 어떤 과학으로도 신화는 만들어질 수 없다. -칼 구스타프 융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드라마틱한 부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 인생의 곳곳에서 자기만의 ‘사적 부활’을 꿈꾼다. 일 년의 끝과 새로운 일 년의 시작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를 그저 TV를 통해서만 들어도 왠지 마음이 한껏 정화되는 느낌. 비록 작심삼일(作心三日)에 그칠지라도 저마다 스스로와의 소중한 약속을 시작하는 시간. 왠지 술 담배도 끊고 아침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을 것 같은, 보통 사람들..
4.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간단히 비유를 해보자. 사방이 막힌 방에 내가 있다. 방안에 있는 한 대의 컴퓨터가 바깥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다른 사람과의 대화 수단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누군가 모뎀의 선을 자르고 조작된 신호를 보낸다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매트릭스다. -노성래, 『과학동아』 2002년 6월호, 52쪽. 모피어스는 지금까지 네오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세계가 ‘가상’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인류가 AI인공 지능 컴퓨터 제조 기술을 갖게 된 것에 스스로 경탄하면서 AI의 탄생을 자축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AI에 지나치면 의존하게 되면서 AI와 인류 사이에 권력의 균..
3. 현실은 꿈의 배설물일 뿐이야 신화란 본질적으로 무한하면서도 객관적 현상에 있어서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어중간한 존재로서의 모순적인 인간 상태를 비애를 담아 표현한 것이다. -폴 리쾨르 가끔 미치도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 평소엔 전혀 종교생활을 하지 않다가도 갑자기 아무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유모차를 타고 지나가며 까르륵 웃는 아이가 정말 살아 있는 천사처럼 보일 때, 엄마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나의 3대를 넘어 우리가 진화해온 지긋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질 때, 오늘 따라 매일 보는 친구나 연인의 얼굴이 불현듯 ‘여신 포스’를 풍기며 아름답게 빛나 보일 때. 우리는 그럴 때..
2. ‘토마스’와 ‘네오’ 인간은 망가진 채로 태어나 수리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의 은총이 바로 그 집착제이다. -유진 오닐 옛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각자 자기 문화에 어울리는 성소(聖所)를 찾아 기도를 드림으써 하루를 시작했다. 현대인은 ‘로그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략적인 ‘뇌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컴퓨터를 켜서 ‘즐겨찾기’ 리스트를 살펴보면 된다. 컴퓨터는 우리의 관심사와 우리의 욕망의 좌표를 알려주는, 너무도 노골적인 꿈의 ‘검색 히스토리’를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꿎은 컴퓨터를 탓할 필요는 없다.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1950~)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구조는 신석기 시대 이후로 근본적으로 변..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1.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본성은 한정되어 있으나, 욕망에 있어서는 무한대를 달리는 인간은 천국을 기억하는 타락한 신이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프랑스의 시인) 만약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건해야만 한다. -엘리아데 다가오는 시험이 걱정스럽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걱정스럽고, 가족들의 잔병치레가 걱정스러운 이 ‘일상적 고통의 차원’을 뛰어넘는 고통이 있다. 이런 걱정들은 각각 시험이 끝나면 해결되고 월급이 입금되면 잊히며 건강이 회복되면 사라진다. 그저 열심히 살아서는 해결될 수 없는 고통, ‘나 하나’의 개인적 안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세속적 일상을 ..
11.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 다음 날 아침, 처키는 여느 때처럼 어슬렁거리며 고물 자동차를 끌고 윌의 집으로 간다. 헤이, 윌, 어서 나와! 쿵쿵쿵!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늘 졸린 눈을 비비며 건들건들 처키를 향해 다가오던 윌이 보이지 않는다. 처키는 놀라움과 상실감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윌의 텅 빈 방을 바라본다. 이제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윌은 기별도 예고도 없이 떠났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윌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윌을 볼 수 없지만 행복하다. 처키는 만족스러운 듯, 슬픔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듯,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 탄다. 한편, 골치 아픈 제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려던 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선생님. ..
10.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이제 윌과 숀의 심리 상담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물한 살이 된 윌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인생을 밝혀줄 소중한 멘토를 얻었다. 숀으로 인해 윌은 자신의 빛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실체와 대면했다. 윌의 고통은 단지 과거의 상처들만이 아니었다. 윌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내가 고통의 근원이다’라는 죄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잇따라 일어나는 불행의 씨앗이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어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떠나도록 방치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 그것은 ‘모든 게 내 탓..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연민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와 ‘아직 멀쩡한 자신’을 가르는 분계선이다. 연민은 고통 받는 타자를 바라볼 때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매우 편안한 안전장치다. 연민은 정치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보수적인 자신의 현상태를 은폐하며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는 괴리감을 심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을 공고화한다. 나의 행복이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 거기서 연민이 탄생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
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응시」, 문학과지성사, 1994, 109쪽. 사랑하면, 굳이 청진기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고, 사랑하면, 굳이 녹음기를 틀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 스카일라의 귀도 윌의 마음 안에 있다. 늘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들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일삼는 윌의 표정 뒤에 숨은 두려움을, 그녀는 듣는다. 윌도 편하지 않다. 그녀의 귀가 내 마음에 자리했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에게 낱낱이 들키게 되어 있다. 그토록 감추고 또 감췄건만, 그녀는 내 두려움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께, 그 두려움..
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낯선 괴짜 할머니의 유모차에 탄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난다. 행인의 눈에 띄지 않는 밤,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는 할머니가 끄는 낡은 유모차를 타고, 도둑질하듯 은밀하게 세상을 구경한다. 이 소녀에게 뚝딱뚝딱 엉터리 휠체어를 만들어주는 츠네오. 조제는 츠네오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아름다운 대낮의 풍경을 보게 된다. 평범한 하늘에 뜬 범상한 구름을 보며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조제, 다락방에서 헌책들을 벽돌처럼 쌓아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조제. 두 다리로 걷지는 못하지만 상상 속에서 세상 모든 곳을 바지런히 걸..
6. ‘가위손’을 닮은 천재 소년, 사랑에 빠지다 영화 『가위손』에서는 흥미로운 퀴즈가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워드(조니 뎁)의 기이한 외모와 천재적 재능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킴(위노나 라이더)과 가족들. 킴의 아버지는 에드워드의 ‘정상성’을 시험하기 위해 퀴즈를 낸다. “네가 길에서 돈가방을 봤다고 하자. 주위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어떻게 하겠니? A. 돈을 갖는다. B. 친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산다. C.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D. 경찰에 신고한다.” 킴의 동생들은 “나라면 그냥 갖겠다”고, 에드워드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시시덕거린다. 에드워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킴의 눈빛도 덩달아 흔들린다. 에드워드는 창백한 얼굴에 투명하게 묻어나는 진..
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눈앞에서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을 때 ‘세상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영화 속에서 그야말로 ‘리얼한’ 화면을 발견했을 때 ‘정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데!’라고 감탄하는, 스펙터클의 사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 영화 『라이온 일병 구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관객들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치’라며 전투 장면의 현장감을 극찬했다. 그러나 『라이온 일병 구하기』의 숨 막히는 전투 신이 과연 ‘사실적’이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일까. 사실감이란 본래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후 판단되는 감각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총알이 눈앞에서 난사되고 사람이 피와 내장을 흘리며 죽어가는 실제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
4. 당신의 불행이 당신의 질병을 부른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아프답니다. 폐 속의 질병은 내 정신적 질병이 넘쳐흐른 것에 불과하지요.” 이런 식으로 ‘정신적 요인’을 질병의 원인으로 치환시키는 사고법은 ‘당신의 성격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암을 유발하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암 환자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며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사람이다’라는 식의 당혹스런 논리를 대중적으로 유포시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믿음은 16세기 후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부터 유포된 낭만적 환상이었다. 감정이 질병을 유발시킨다는 논리, 질병의 원인 자체가 개인의 불행 혹은 악행에 기반한다는 상상은 수전 ..
3. ‘천재’라는 꼬리표가 담을 수 없는 것들 질병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환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가 범인의 소유물인 것처럼(?), 질병도 환자의 소유물이라는 환상이 아닐까. 아픈 사람 스스로가 병을 만든다든지, 환자 자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식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범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듯 질병 또한 환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에이즈 인권 운동 포스터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다. “단지 내가 HIV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내가 죽음의 전문가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내 모든 에너지를 오직 ‘삶’을 향해 쏟아 붓고 있다.” “나는 HIV 보균자 그 이상의 존재다I’m more than HIV-Positive.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신나게 춤추러 가고 싶고,..
2.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죄수’로 호명되다 영화의 첫 장면. MIT 대학 교실은 대학원생들로 가득하다.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수학 수훈상 수상자답게 호기롭고 당당하다. 그는 수업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낸다. “본관 복도 칠판에 푸리에 이론(Fourier Theory)을 적어뒀으니, 누구든 학기 말까지 풀어주기 바란다. 그걸 푼 사람은 내 수제자로서 명예와 부를 얻게 될 것이며 그 성과가 기록되고 영예로운 MIT 테크지에 이름이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큰둥하다. 아무리 부와 명예가 좋다지만 워낙 어려운 문제라 자신이 풀어낼 리가 없다는 얼굴들이다. 수업이 끝난 후. 청소부 윌(맷 데이먼)은 칠판에 적힌 문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윌은 언제나..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버린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현대인에게는 눈물의 에티켓이 있다. 이토록 쿨한 세계에서는 아무 데서나 주책없이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 사방이 꽉 막힌 스크린 앞에서, 혹은 아무도 우는 내 모습을 보지 않는 텅 빈 방 안의 TV를 보면서. 화면 안에서는 저토록 넘쳐나는 눈물이 현실 속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의 ..
3.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과 철학이 입맞추는 순간 현대인은 ‘달콤한 심리 치유 에세이’나 ‘스파르타식 자기계발서’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철학은 심리 치유 에세이처럼 친절하게 위로해주지도 않고, 자기계발서처럼 손쉽게 성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철학은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 저마다의 ‘사정’을 절대 봐주지 않는다. 나는 철학의 그 가차 없음, 인정사정없음이 마음에 든다. 철학의 무대 앞에 서는 순간, 우리들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조건’들은 잠시 사라지고, 우리는 무장해제 상태로 평등해진다.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모두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비밀의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의 귀가 얼마나 열려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이냐에 따라, 철학의 메시지는 ..
2. 행복한 오독의 막춤 삶이 잠시만 ‘얼음 땡’ 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놀이할 때 ‘타임!’이라고 외치면 잠시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게임의 법칙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쉽게도 인생에는 그런 ‘얼음 땡’이나 ‘타임’이 없어서 탈이었다. 잠시만 삶의 속도를 ‘제로’로 만들고 싶을 때, 그럴 땐 어떤 따스한 위로도 어떤 그럴듯한 자기합리화도 먹히지 않는다. 그럴 땐 나는 주로 기약 없는 ‘겨울잠’을 청하지만, 그것조차 효과가 없을 땐 할 수 없이 책을 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랫동안 좋은 책인 건 알았지만 절대 펼쳐보지 않았던 책들을 꺼내 읽는다. 먼지 쌓인 이 책들 대부분은 ‘어렵다, 머리 아프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왔던 철학서들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처방전..
철학의 멘토, 영화의 테라피 1. 철학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문학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한때는 그 ‘쓸모없음’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한때는 애써 뭔가 가시적인 ‘쓸모’를 찾느라 남몰래 혈안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질문을 받아도 굳이 흥분하지 않는다. 영혼의 추위에 떨던 내 인생 하나를 구제해준 것만으로도 인문학의 쓸모는 충분히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나 스스로가 질문한다. 인문학이 정말 쓸모없을까? 인문학은 정말 ‘필요 없는’이라는 단죄를 받아도 싼 것일까. 요즘 내 생각은 바뀌었다. 인문학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의 범위가 잘못 규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인문학은 마케팅 전략이나 주식투자비법을 찾을 때는 도움이 안 될지..
철학 삶을 만나다 목차 강신주 책을 시작하며 / 프롤로그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장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교환 가능한 것과 교환 불가능한 것 사건과 무의미 더 읽을 책들 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 이성의 의미와 한계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더 읽을 책들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더 읽을 책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에필로그 1. 철학이 의미 있어지는 순간 “여러분의 집에는 혹시 가훈이 있습니까?” 강의 시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은 자기 집의 가훈이 “정직과 인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도 자기 집의 가훈을 소개해주더군요. “하면 된다!”라고요. 저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에서는 칸트식의 금욕주의가 느껴졌고, 후자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주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인내’는 좋은 가훈이지만, 무엇인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가족 성원 하나하나보다 가족이란 조직 자체를 위한 규율 같으니까요. 그러나 가훈은 가족 성원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도대체 누구에 대한 정직이고, 무엇을 위한 ..
더 읽을 책들 윤수종 엮음, 『다르게 사는 사람들』(서울: 이학사, 2002) 우리 사회의 타자들은 소외받는 소수자들입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타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일방적인 구분이 지니는 의미와 문제점,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엠마뉘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 2000) 윤리를 생각하려면 타자를 사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철저하게 타자를 숙고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종영, 『가학증·타..
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들, 즉 타자, 사랑, 고독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뇌물은 우리를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몰아넣습니다. 따라서 뇌물에는 받은 것 이상으로는 돌려주지 않고, 또한 준 것 이상으로는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뇌물의 논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어야 상대가 좋아하고 또 얼마만큼 주어야 그 뇌물의 효력이 발생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물의 관계에서는 블랙홀과 같은 타자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타자란 나의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는 존재가 아닙니까? 나와 삶의 규칙을 달리하는 존재가 바로 타자이니..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 「섬」이란 시를 지은 노창선 시인은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발견했습니다. 이 심연은 검은 바다와 같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의 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도 섬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섬이 된 것 역시 타자에 대한 그리움, 그리로 건너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지요. 타자를 만나서 섬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에게로 비약하려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검은 밤바다를 건너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라도 보내어 ‘가슴속 까만 가뭄’을 전하려고 하니까요.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타자는 나의 미래!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집에서 학교나 회사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이 그 한 사람에게 몰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강렬한 첫 만남을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
타자란 무엇인가? 노나라 임금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이끌어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의 규칙이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차이’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노나라 임금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규칙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 그가 행했던 애정 표현은,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항상 어떤 고독을 동반한다는 것도 경험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흔히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멀리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 사람이 내가 아닌 ..
더 읽을 책들 김상봉, 『호모에티쿠스』 (서울: 한길사, 1999) 서양철학사를 윤리학적 시선에서 깔끔하고 분명하게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학에 기초해서 서양의 윤리학적 전통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나 니체의 즐거움의 윤리학을 다루는 데서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랄프 루드비히, 『정언명령』(이충진 옮김, 서울: 이학사, 1999) 칸트의 의무의 윤리학을 잘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유와 의무 사이의 기묘한 반전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전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마치 칸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김주경 옮김, 서울: 동문선, 2000)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불행, 우울, 슬픔으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물로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칸트는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자율적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의 명령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요. 만약 프로이트나 니체의 지적이 옳다면, 장씨 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주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말하기엔 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일을 하느라 몹시 피곤할 때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는 집에 들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이 더럽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즉시 휴식을 취해야만 합니다..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칸트에 따르면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도덕법칙을 구성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 즉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 주체야말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을 스스로 따르는 것은, 분명 타인이 만든 도덕법칙을 타율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이 초자아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겁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 혹은 ‘자발적 복종’이란 기이한 논리가 출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씨 부인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자아의 명령은 나의 내면에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작동합니다. 따라서 초자아의 명령을 듣는 것은 나의 자율적인 명령을 듣는 것처럼 보입..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 여성이 주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성이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 제기를 했던 적이 있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유아기 때의 역사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요령을 배웁니다. 만약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무척 불편해질 테니까요. 가령 어린아이가 김치 먹는 법을 배운다고 해봅시다. 밍밍한 모유나 분유만 먹던 아이에게 마늘과 고추로 버무려진 김치는 얼마나 불쾌하고 자극적인..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 ‘주체’는 기본적으로 주인과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주체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은 아마도 노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여기서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사례를 통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가장 지속적이었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녀 차별, 특히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지배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남성 우월주의를 흔히 가부장제라고 부릅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가 하나의 낡은 관습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성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여성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가 가진 함의를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통..
더 읽을 책들 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김윤성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저자는 자신의 관심사가 ‘세상을 움직이는 믿음과 감정의 힘을 지닌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를 흥미진진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를 포함한 여러 다양한 종교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함의는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서울: 민음사, 2002) 동양에서는 불교가 마음의 고통을 다루었다면, 서양에서는 정신분석학이 그 임무를 자임했습니다. 이 책은 풍부한 임상적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인지를 매우 ..
집착 없이 살아가기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여러분에게 화두 하나를 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때 저는 여러분께 약속했습니다. 이 화두만 풀 수 있다면 여러분은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화두를 푼 분도 있겠지만,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란 책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이야기는 깨달음, 즉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님 같지도 않던 스님 한 분이 단하(丹霞)라는 스님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이 저물자 단하 스님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혜림사라는 절에 찾아갔다. 그러나 이 절을 홀로 지키고 있던 스님은 단..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나 의식이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이 의도했던 것은 사실 ‘없음이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베르그손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물이 시원하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썩은 물이라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죠. 이런 두 가지 느낌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 목이 마를 때 우리는 이전에 마셨던 시원한 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즉 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덤 속의 물을 찾아서 마셨을 때 원효 스님은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토할 것 같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님은 어젯밤 시원하게 마신 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원효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만약 우리가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우리의 마음이 오지 않은 친구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와 있어야만 하는 친구가 지금 내 생각 바깥에서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마음의 고통은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 마음 바깥에 없을 때, 전자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경우 발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카페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냅니까? 차라리 그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을 지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생각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만약 마음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지울 수만 있다면, 여러분에..
집착의 메커니즘 어떤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옆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갓 돌이 지난 귀여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천사입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하며 아이의 몸을 만져 보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녀의 천사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이를 화장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장에 갔다가 돌아와 문을 열고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왕자님, 많이 기다렸지. 엄마 왔네.” 그러나 거실 한쪽의 조그만 상 위에 있는 아이의 영정과 국화..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여러분은 마음이 쓰리도록 아플 때 어떻게 하나요?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경우, 우리는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나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약간의 상담을 거친 후 우리에게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의 고통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은 곧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먹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할 겁니다...
더 읽을 책들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김호균 옮김, 서울: 청사, 1998) 자본주의의 모든 비밀은 기본적으로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양자는 등가인 것처럼 교환되지만, 화폐가 상품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유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서울: 이산, 1999) 화폐와 상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통찰을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맑스의 사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언어학에 대한 이해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제국을 분..
우리와 세계화 우리의 현실은 단순한 산업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업자본이 국가를 탈출해서 세계로 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저 현실로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엄마들도 이제는 아이가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계어인 영어를 아이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조기 영어 교육, 조기 영어 캠프, 영어 마을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지요. 심한 경우 어떤 지식인은 당당하게 아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몇몇 대학에서도 이제는 수업의 반 이상을 영어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화에 발맞추어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
세계화의 논리는 새로운 것인가? 상인자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자본은 가치의 증식, 즉 잉여가치를 부단히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산업자본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으로 어떻게 하면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줄어들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잉여가치는 M-C와 C-M′의 두 가지 과정 사이의 차이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잉여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M-C의 과정에서 산업자본가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화폐를 더 많이 지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료의 가격이 상승하거나, 공장 유지비가 올라가거나, 혹은 인건비가 올라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인자본의 논리와 산업자본의 논리 보통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도래한 경제구조라고 이해됩니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를 전자본주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자본주의(pre-capitalism) 시대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 이전의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전자본주의 시대에도 이미 자본주의 자체는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것은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라 상인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의 형태였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의 뿌리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얕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컨대 전자본주의 시대가 상인자본주..
자본의 충동과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 화폐를 가진 자는 그 화폐의 가치만큼 교환 가능한 모든 상품을 잠재적으로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나의 특수한 상품을 소유한 자는 이제 다른 상품을 소유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제한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보다 화폐를 가졌을 때 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200만 원의 현금과 노트북 중 전자를 선택했던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화폐를 편집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굶어 죽어도 화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화폐를 소유하려고만 하는 구두쇠, 즉 맑스가 이야기한 ‘화폐퇴..
3장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와 우리 여기 왼쪽에 200만 원의 현금이 있고, 오른쪽에 200만 원 상당의 노트북이 있다고 해봅시다. 자!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별로 주저하지 않고 현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현금을 선택할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왜 우리는 상품이 아닌 화폐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상품이 가지는 가능성은 유한한 것인 데 반해, 화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금 상품이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상품이 그것이 충족시켜주는 목적에만 국한된 사용가..
더 읽을 책들 전인권, 『박정희 평전』 (서울: 이학사, 2006)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적 이념은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훈육되었으며, 국가주의가 개인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신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서울: 태학사, 2004) 노자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한 철학자라는 통념을 깨고 있는 책입니다. 노자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통치자를 대상으로 전개된 것이며 아울러 그의 정치철학은 거대한 통일 제국을 위한 형이상학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 (이용재 옮김, 서울: 아카넷, 2003) 프루동은 부르주..
국가가 아닌 사회를 꿈꾸며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인 셈이지요. 국가의 폭력을 두려워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국가의 폭력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이 통탄했던 것이지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세계화와 국가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는 피약탈자 위에 군림하면서 영속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시혜적인 정책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국가의 시혜가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을 수 있는 계층에 대해 국가의 정책적 시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 여러분은 이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온갖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알았을 겁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마치 선물인 것처럼 온갖 정책을 시행한다고 자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축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기르고 있는 한 축산업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그들의 잠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가끔 그는 소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자장가처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어떤 소가 병이라도 나면 ..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 사실 국가주의는 박정희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온 것은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선전하지 않은 문명은 없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국가주의는 인류의 문명 만큼이나 오래된 사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인간을 편들기보다는 국가를 편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증거는,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
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
더 읽을 책들 이숙인,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서울: 여이연, 2001) 서양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여성과 가족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직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전통적인 여성관과 가족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성과 가족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꿈꿀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 『에밀』 (김중현 옮김, 서울: 한길사, 2003) 가족과 사랑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입니다. 책 중간 중간에서 번뜩이는 루소의 날카로운 통찰력 을 엿보는 것은 우리에게 독서의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기존..
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헤겔은 사랑이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가족’ 속에서 ‘사랑’이란 결국 유기체로서의 가족 자신의 생존 논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점에서 카프카는 바디우에 앞서 이미 ‘하나’라는 통일의 원리를 문제 삼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 이르러 헤겔의 ‘하나’라는 이념은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바디우는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으로서 ‘둘’이란 공리를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사랑의 주체로 머물기 위해서 ‘둘’이란 공리를 끈덕지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말은, 결국 우리에게 ‘둘’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촉구하는 말..
사랑을 ‘둘’로 생각하는 바디우 카프카의 통찰은 헤겔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남녀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가족’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전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사랑-가족-사랑-가족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연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카프카의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생산하는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숙고해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실마리로 우리는 왜 헤겔이 그렇게도 사랑에..
‘하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카프카 헤겔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형식일 것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는 헤겔의 사랑은 ‘남자-여자-자식’으로 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객관적인 ‘하나’로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의 이런 생각이 사랑과 가족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황홀경적인 일체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2세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가족이란 통일체, 이런 일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사랑은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낭만주의적인 가족 이미지 밑에 일종의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
‘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일상적 이해 방식은 사랑의 완성을 가족을 구성하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결혼이란 형식을 통해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만약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에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일종의 미완성, 혹은 비극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런 일상적 이해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헤겔【헤겔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던 철학에 역사성, 혹은 시간성을 도입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이나 사회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즉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처럼 변증법은 부정의 논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은 단순한 방법이..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생각하기 힘든 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테마 종교, 국가, 심지어 주체마저도 철학이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힘이 있습니다. 철학은 자명하다고 전제되어온 모든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고별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소롭다는 듯이 피하고 있는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테마입니다. 물론 철학이 사랑 자체를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이 사랑을 우리로부터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낯설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철학은 사랑이란 테마를 더욱 자명한 것으로, 마치 건드려서..
더 읽을 책들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하여』(서관모 · 백승욱 옮김, 서울: 동문선, 1997) 저자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도전적인 논문을 쓴 다음 이 논문에 대해 나바로(F, Navarro)라는 멕시코 철학자와 진지한 토론을 하는데, 이 책은 이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우발성의 유물론이 어떤 철학적 의의를 가지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동욱, 『차이와 타자』(서울: 문학과지성사, 2000) 현대철학의 쟁점이 차이와 타자라는 두 범주에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들뢰즈의 철학이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에서 어떤 고유성을 지니는지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들뢰즈가 강조했던 철학의 두 가지 이미지에 대한 매우 친절하고 문학적인 설명이 돋보입니다. 다니엘 벤사이드..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사실 동양철학에서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 갈라서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동중서와 왕충의 대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자(老子, 생몰연대 미상)【노자는 고대 중국의 가장 심오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의 근본에는 ‘도’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도를 인식하면, 인간이 세계 속에서 갈등과 대립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도의 인식이 모든 인간에게 제안된 것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군주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사상은 81편의 철학시로 쓰인 『도덕경』에 압축적인 형식으로 실려 있다】와 장자(莊子, BC 369?~286?)【장자는 인간의 삶이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찰했던 ..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 앞서 보았듯이 알튀세르는 서양철학사에 면면히 흐르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유 경향을 발견합니다. 그 하나가 필연성의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발성의 철학이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구분은 단지 서양철학의 흐름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요? 분명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자의 사유에서 엿볼 수 있었듯이, 동양철학에서도 방금 언급했던 두 가지 사유 흐름이 서로 대립하며 전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가 내리는 것 사이의 관계가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유학 사상가였던 동중서(董仲舒, BC 176~104)【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유명한 한나라 때의 유학자이다. 천인감응설은 글자 그대로 하늘..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인당수에 심청을 희생물로 바쳤던 뱃사람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아 절실하게 기우제를 지냈던 고대 중국인들! 이들은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철학’이라고 부른 사유 전통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주친 사건의 우발성을 두려워 합니다. 인당수의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두려워하고 끝나지 않을 듯한 가뭄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은 무의미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점점 몰입합니다. ‘신이 존재하고 계실 거야. 그리고 그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 만약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신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이 세계에는 어떤 마주침도, 사건이란 것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순자가 죽고 2000여 년이 지난 뒤, 프랑스에서는 알튀세르【알튀세르는 사유나 문체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목표는 맑스의 사유에 ‘철학’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그가 스피노자, 루소, 마키아벨리 등을 철학적으로 다시 읽어내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궁극적으로 그가 맑스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철학’은 헤겔과는 다른 반목적론적인 변증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 『맑스를 위하여』, 『철학에 대하여』 등이 있다】라는 탁월한 철학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맑스(K. Marx, 1818~1883)의 정치경제학에 철학을 부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위대한 정치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정신병 발작으로 자신의 아내를 ..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마침내 인당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바람마저 강하게 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를 뒤섞어버리는 폭풍우가 배를 덮치려고 할 것입니다. 심청을 태운 배는 15일에 출항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서 뱃사람들은 이미 희생물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심청이 바로 그 희생물이지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삼백 석의 공양미가 필요했던 그녀는 자진해서 희생물로 배를 탔던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그녀가 배에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더 난폭해진 폭풍우가 그녀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청은 비를 맞으며 뱃전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는다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의 희..
더 읽을 책들 버트런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지금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철학 개론서입니다. 러셀 특유의 간명하고 분명한 문체가 장점인 이 책은 좁게는 현대 영미 철학 개론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넓게는 철학하기가 무엇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투겐트하트·우슬라 볼프, 『논리-의미론적 예비학』(하병학 옮김, 서울: 철학과현실사, 1999) 논리학은 단순히 형식적인 추론 규칙을 탐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 지평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나아가 이 책은 ‘논리 의미론’이란 지평에서 서양철학의 논리학적 전통을 요령 있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 서울: 민음사, 19..
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철학은 ‘지금-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은 없는 세계를 꿈꾸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여기’를 문제 삼기보다 여러모로 정당화하기에만 급급한 제도권의 철학, 혹은 ‘지금-여기’를 전혀 숙고하지 않고 ‘아직은 없는’ 세계만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철학, 이 모두가 거짓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같은 매우 날카로운 능선을 걸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오른쪽에는 ‘시간’이라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고, 왼쪽에는 ‘영원’이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능선을 걷다보면, 여러분은 자신만의 철학, 그 정상부에 오를 수 있게 될 겁니다. 마치 우리가 험준한 길을 걸어..
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이란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의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자신의 주장이나 근거를 제시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레셔라면 그 ‘누구’를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 즉 ‘우리’라는 이름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보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 철학이란, 공동체의 삶의 규칙, 즉 일반성의 원리를 수용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 될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어진 삶의 규칙에 입각해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고 설득하는 논쟁의 기술 정도를 철학이라고 부르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성을 ‘공동체가 인정할 만한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는 능..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 특정 공동체에 속한 어떤 사람과 논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규칙에 따라 주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방을 전혀 설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나 근거를 제시한다면, 일체의 대화나 논쟁이란 것이 모두 무의미해질 겁니다. 따라서 모든 논쟁에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은 ‘우리’라는 맥락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레셔의 주장을 음미해볼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홀로 사유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라는 것, 즉 특정한 공동체를 매번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진정 그렇다면, 공동체가 수용하기 힘든 새로운 주장, 즉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란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