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797)
건빵이랑 놀자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 오늘 들어간 교회는 중간 규모의 교회였다. 그 옆에 작은 교회도 있어서 그리로 가려 했는데,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를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더라. 시간도 거의 11시가 되었던 터라 눈앞에 보이는 큰 교회로 들어갔다. 건빵이 만난 사람⑭: 일심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예배가 끝나고 나를 챙겨주려는 분이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이라던데 내 또래처럼 보였다. 과외를 하신다던 분. 밥 먹을 때도 내 옆자리에 와서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더라. 아내분은 나랑 동갑이란다^^ 그리고 그 둘의 작품인 딸까지~ 부러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밥을 다 먹자, 커피까지 뽑아주시더라. 어색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인데도 그렇게 성심껏 챙겨주시니깐 참..
춘천 사람들이 이상해요 이 여관은 보일러를 안 틀어주더라. 내가 춥게 자는 것이야 상관없는데 빨래가 마르지 않을까봐 걱정이 됐다. 애써 여관에서 잠을 자는 이유는 푹 쉬기 위한 것보다 따뜻한 온돌에서 빨래를 말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빨래가 안 마르면 말짱 도루묵이다. 괜히 돈만 날린 꼴이 된다. 그런 불안감에 일어나자마자 빨래부터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는 말라 있더라. 세탁기로 탈수를 했기 때문일 텐데, 어쨌든 정말 다행이다. 한 치 앞도 모른다고 도전을 안 할 쏘냐 오늘부턴 지도를 볼 수가 없다. 목포 평화광장에서 경로를 정할 때만 해도 철원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그 외의 지도들은 모두 버렸다. 여행 중 불필요한 짐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하기에, 그땐 나름 결단을 내린 셈이다. 하지만 인생 자..
휴식②: 자벌레와 개구리에게서 배운 끈기로 다 씻고 나니 8시 50분이다. 아직도 이마트가 열 때까지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래서 짐을 다 챙기고 평상에 앉아 TV를 보았다. 찜질방의 옷장열쇠를 잃어버리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찜질방은 다른 찜질방과는 달리 신발장 열쇠와 옷장 열쇠가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 두 열쇠를 다 신경 써야 한다. 그걸 잃어버리면 만원을 내야 한다고 안내데스크에 써 있다. 신발장 열쇠야 배낭에다 넣어두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문제는 옷장 열쇠였다. 배낭 안의 짐들에 신경 쓰고 시간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옷장 열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주위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기에 옷장에 가봤다. 나보다 앞서 카운터를 보시던 분이 그곳을..
휴식②: 떠나보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에 대해 찜질방에 수면실이 없어서 조용한 곳을 찾아 옮겨 다녀야 했다.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푹 잘 수 없으니 환장하겠더라. 그래도 꽤 피곤했는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에 최대한 늦게 일어나려 했다. 이마트에 들려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산 다음에 여관을 찾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마트는 10시에 문을 여니 그때까지 찜질방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하늘에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번 비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많이 올 거란다. J의 문자가 전한 여파 씻으러 가려는데 문자가 왔다. 스터디 멤버 J가 보낸 문자다. 지금은 어디에 있냐고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이다. 토요일 아침 8시엔 스터디를 한다. 내가 이렇게 홀가분하게 여행을 ..
도착지가 있는 강원도에 입성하다 경기도에서 일주일 정도 있었기 때문에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경기도는 길이 워낙 잘 닦여 있던 탓에 차를 피하며 여행한 기억밖에 없다. 강원도에 입성하는 소감 때론 걷는 게 지루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가 차에 신경 쓰며 쭉 뻗은 대로를 걸을 때였다. 그만큼 온 신경이 곤두서고 힘이 배로 든다는 거다.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에 들어서면 차는 적어질 것이고 수려한 경치를 보며 걸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되었다. 과연 그 기대가 맞을지는 직접 걸어봐야만 안다. 언제나 현실은 기대 너머에 있으니 말이다. 강원도는 내가 군생활을 했던 철원이 있는 곳이다. 월정리 전망대, 노동당사, 율이리를 축으로 활동을 했었다. 그곳에서 2년을 넘게 살았으면 뭐하나? 여러 곳을 다녔지만 훈련 계획에..
한 걸음의 철학 교회에서 푹 잔 것 같은데 왜 이리 몸이 무겁지? 잠자리도 낯설고 더욱이 예배당에서 자는 만큼 새벽기도를 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맘 놓고 자지 못한 탓이겠지. 애초에 교회에서 자려 할 땐 이 모든 걸 각오하고서 한 것이기에 그저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을 허락해줬다는 사실에 고마울 뿐이다. 밥보다 잠이 고프던 날 새벽 기도를 끝내고 잘 자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아침을 가져오시더라. 또 어제 저녁처럼 직접 배달이다~ 내려와서 가져가라고 해도 될 텐데, 목사님도 괜한 방랑객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누군가, 더욱이 불청객(不請客)이 나의 공간에 들어온다는 건 이래저래 신경 쓸 게 이처럼 많다. 섭섭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우리네 접대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
순조롭던 오후의 가평여행 오후 2시쯤에야 가평에 들어서 백반으로 아ㆍ점을 먹었다. 한가득 나온 반찬을 다 먹으려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영향소를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하는 여행이기에 밥 먹을 때만큼은 나오는 반찬을 골고루 먹으려 한다. 이런 고른 영향소들이 나를 건강하게 도우며 국토종단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같은 음료가 왜 가게마다 가격이 다를까? 막 걷다 보니 갈증이 밀려온다. 음료수를 살 곳이 없을까 찾으니 저 멀리 휴게소가 보인다. 지금까진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 하나로 마트 등의 큰 슈퍼만 들어갔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이곳을 지나치면 슈퍼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들어갔다. 늘 사곤 하던 500ml 음료수를 사고 계산을 하려 하니, 글쎄 1500원이란다. 이게 웬..
북한강과 남한강은 같지만 다르다 두 강변의 공통점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는 거였다. 그래서 볼거리도 많다. 한강을 서울에서만 봤었기 때문에 한강의 상류인 남한강은 볼품없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오히려 한강보다 남한강이 훨씬 좋다. 물론 상류이기 때문에 물이 맑은 게 사실이다. 남한강과 북한강 하지만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개발이 덜 되어 자연 그대로 흐르는 물이기에 보면서도 흥이 절로 난다. 개발은 인간의 편의를 따라 자연을 재조합하는 것이다. 거기엔 오로지 ‘인간의 편의’란 잣대로 모든 생물의 보금자리였던 곳을 파헤친다. 그러니 자연이 원래 지니고 있던 자연스러움과 생명력은 사라진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 다른 모든 존재를 죽여야만 하는 건지? 이미 남한강도 나름대로 개발되..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달리 느껴진다 어제 오전에 포천으로 향하면서 포천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아’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자가 오지 않는 거다. 급기야 난 즐거운 여행을 하고자 경로를 변경하고야 말았다. 밤이 늦도록 친구에겐 감감무소식. 경로변경은 신의 한 수? 그렇지만 나는 ‘만약 기다리겠다는 답장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해야 했다. 이미 경로를 바꿨으니 ‘기다리겠다’는 문자가 온다고 해도 다시 돌이킬 순 없었다. 아쉽긴 해도 다음에 시간날 때 보자고 해야겠다. 여행 중에 만나면 더 뜻깊을 텐데 그러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아침에 막 떠나려 할 때 컬러 메일이 왔다. 포천에서 만나기로..
편의점보다 많아진 교회의 불편한 진실 오늘도 교회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시골에 있는 교회치고는 엄청 큰 교회다. 수요 예배도 드렸는데 목사님이 꽤 젊으시고 야망도 있어 보이시더라. 전도사님은 예배가 끝나자 나를 중국집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걸 시키라고 하셨다. 난 그냥 볶음밥을 시켰는데 더 맛있는 거 먹으라며 삼선볶음밥을 시켜주시더라. 그러면서 여행하는데 보태라며 여행경비까지 챙겨주셨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전도사님은 그걸 지켜보시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해주시더라. 건빵이 만난 사람⑬: 상업화된 신학교와 현실 전도사님은 늦깎이 신학도다. 목사님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것이다. 이 일, 저 일 하시다가 집안에 어려운 일이 겹쳐서 그걸 해결하던 중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셨단다. 여기까지는 늦깎이 신..
상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둥켜 안다 시간은 1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배가 서서히 고파오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침도 먹지 않고 부랴부랴 나왔었지. 간단히 점심을 때우려고 슈퍼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내 행색을 보고 궁금한 듯 물어보신다. “날도 뜨신데 산에 오르려고?” 그래서 나도 이것저것 이야기해 드렸더니 할머니는 대단한 일을 한다며 격려해 주시더라. 그래서 편의점이 아닌데도 할머니에게 물 좀 끓여달라고 부탁하고 컵라면에 물을 받아서 나왔다. 건빵이 만난 사람⑫: 경로를 바꾼 순간 찾아온 인연 평상에 앉아 라면을 먹으려 했는데 그곳엔 이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20대 초중반인 어떤 남자는 이것저것 사서 혼자 먹고 있더라. 그 옆엔 오토바이가 있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봐서는 그도 ..
용담대교를 걸어서 건너다 지금 남한강 위에 건설된 길을 건넌다. 이 길은 6번 국도가 4차선으로 변경되면서 지어졌을 것이다. 다리의 이름은 ‘용담대교’다. 절벽도로엔 남양주 방향으로 가는 차들이, 그리고 이 고가다리엔 양평으로 가는 차들이 가고 있다. 나는 오는 차들을 바라보며 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 다리를 올라오기 전에 ‘위협’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막상 건너보니 ‘죽을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고 싶은데, 실상 오늘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했다~ 용담대교를 도보로 건넌 소감 막상 다리에 올라서니 인도가 넓어져서 걷기에 부담이 없었고 경치도 좋지, 강바람도 상쾌하지, 이건 뭐 인공건축물이긴 하지만 국토종단의 최적지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만약 이 다리를 눈앞에 두고서 괜히 겁먹고 돌아섰다면 모..
선택에 대한 후회를 감내할 수 있나? 잠을 자면서 뒤척였다. 빨래를 방바닥에 널어놓고 온돌판넬을 뜨겁게 틀어놓은 게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새벽기도가 끝나고 온도를 낮추고 나서야 푹 잘 수 있었을까. 빨래가 다 마르기도 전에 내가 마를 뻔했다.^^;; 6시부터 깨다자다를 반복하다가 7시 30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몸이 어찌나 무겁던지. 더 자고 싶은 맘이 간절한데도 더 잘 수 없는 걸 알기에 벌떡 일어났다. 꼭 강시가 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별 수 없다. 아침잠이 별로 없는 편이긴 하지만, 그게 어느 순간 이렇게 나를 옥죄기도 하니까.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느낌 오늘의 계획은 남양주를 지나 포천 내촌면으로 가는 거다. 늘 그렇듯 어디까지 가..
목사님과 나눈 성경 대담 빨래를 다하고 목사님께 여행 지도를 빌리러 갔다. 갑자기 경로를 변경하는 바람에 6번 국도를 따라 포천으로 가는 지도는 없었기 때문에 빌리러 간 것인데, 다행히도 목사님은 여행용 지도가 있더라. 우호적이고 챙겨주려는 목사님의 분위기 그때 목사님이 물으셨다. “교회 다니세요?” 교회에서 묵을 때면 어느 목사님이건 가릴 것 없이 물어보시는 유일한 질문^^ 예전엔 믿었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회에서는 의심을 죄악시하며 제대로 알려주려 하기보다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금은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그런 교회의 풍조에 공감하며 잠시 운동하고 올 테니, 와서 얘기 좀 하자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피자를 사온다고 하셨다. 나야 뭐^^ 완전 좋..
아파오는 발목과 쉽게 구한 잠자리 여주에서 양평으로 향하는 37번 국도엔 군부대들이 정말 많다. 가는 길 곳곳에 군부대들이 즐비했다. 난 이곳을 ‘군의 소굴(巢窟)’이라고 이름 지어줬다. 신형 짚차가 수시로 지나다니고 장병들도 곳곳에 눈에 띈다. 모처럼 듣는 군가가 귀에 맴돌 정도다. 군의 소굴을 지나며 정신교육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여기서부터는 점점 군인을 보는 일도 많아질 것이다. 남부지방에선 어쩌다 보게 되는 게 군인이지만 중부지방에선 그 반대일 거니까. 주적(主敵) 개념이 사라졌다 해도 심정적으로 우리의 주적이 북한인 이상, 중부지방에 군대가 몰려 있는 건 당연하다. 여기가 바로 최전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전방 밀집 배치는 현대전에선 불리할 수도 있다. 이라크전을 통해서 보았다시피 미사일로 ..
적당히만 벌면 어딘가 여행도 다닐 수 있을 텐데 좀 더 자고 싶었지만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쪽문이 열리더니 전도사님이 꿀물 음료수를 주신다. 아무 이야기도 없이 대뜸 내밀기에 어찌나 놀랐던지. 그러고 나서 전도사님은 어디론가 가셨고 난 더이상 누워 있을 수 없어서 일어났다. 그때 시각은 7시 30분쯤 되었나 보다. 건빵이 만난 사람⑩: 적당히만 벌면 어딘가 여행도 다닐 수 있을 텐데..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배낭의 짐들을 비닐로 씌우고 우의를 입었다. ‘그냥 갈까? 아침 대용으로 김밥을 사갈까?’ 고민하는데 조금 가니 김밥집이 보이더라. 들어가 김밥 한 줄을 주문했다. 그때 아주머니께서 “등산하러 가시..
빈 공간을 간직하고 견뎌내기 교회 골방에서 잤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그곳. 안성 일죽면에서 잘 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그때도 이런 기분에 익숙해지자 말했지만 쉽지가 않다. 외로움이 사무치는 여행 3주차 여행은 외로움과 친해지는 여행이 될 거 같다. 하긴 내가 2주차 때 워낙 대우받으며 다녔으니 그렇지 않은 상황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밖에선 물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안엔 나만이 홀로 누워있다. 꼭 내가 큰 방이라는 관(?)에 누인 시체 같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린다. 아~ 늘 외롭다 외롭다 했으면서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외로움과 대면해보기는 처음이다. 예전엔 이렇게 혼자 모든 세상의 외로움을 다 끌어안은 양 쓸쓸해 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젠 이런 모..
모순으로 가득 찬 감정과 세상 어둑어둑해진 길을 계속 가니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대신면이란다. 6시가 넘자 비가 조금씩 세지기 시작한다. 마을로 들어서며 교회가 있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찾는데도 보이지 않더라. 그렇다고 해도 ‘면소재지인 이곳에 교회가 없을 리가 있겠어?’하는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지나온 면소재지엔 교회가 한 두 곳은 있었으니 마음을 놓고 찾아본다. 최초로 목사님이 아닌 신도님에게 허락을 받다 조금 더 걸으니, 역시나 교회 안내판이 보이더라.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안내판을 따라서 갔다. 교회도 큰 편이고 부속 건물들도 있다. 이런 곳이면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당당히 사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우의를 입어 좀 ‘추리’해 보이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모순으로 가득한 감정 밥이 들어가니 기운이 난다. 역시 밥은 보약이고 힘이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다. 이런 날이 걷기엔 딱이다. 남한강 바람으로 숙취를 해소하다 학교에선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 언제 어디서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면 참 싱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도시 아이들보다 시골아이들에게서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철 들면서 잃어버리는 건 그런 싱그러움과 해맑음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아이들을 따라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쾌활하게 걸었다. 남한강을 따라 걷는 길은 참 운치가 좋더라. 여주대교를 건널 땐 아찔한 기분도 들었다. 여주는 강을 중심으로 발전된 곳이다. 좋은 풍광을 볼 수 있도록 강 주변에는 ..
과한 음주가 이리도 여행을 힘들게 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밖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듣는 빗소리가 정겹다. 비가 내릴 때면 사람이 감정적이 되곤 한다. 마음 한구석이 아리는 것 같기도 하고 허한 것 같기도 하다. 왜 이러는지 내 마음인데도 모르겠다. 빗소리 속에 스쳐 가는 잔상들, 그 속을 헤매는 나. 난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어제 과음한 탓인지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과연 이런 몸 상태로 떠나야 하나? 고민이 된다. 술도 깨지 않아 갈지자를 그리며 걷게 될 거고, 비몽사몽(非夢似夢)이어서 걷는 기분도 제대로 못 느끼며 걷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몸도 좀 풀고 기분 전환도 좀 할 겸 찜질하러 갔다. 여차하면 이곳에서 하루 더 묵을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정신과 육체는 함께 간다 뜨거운..
낯선 여주가 친숙한 곳이 된 이유 오전에 많이 걸었다. 오늘부터 시원해진다고 했는데 구름만 꼈을 뿐 오히려 더 덥더라. 9시가 조금 넘었을 때, 갑자기 어떤 봉고차가 내 앞에 멈춰 선다. 그러고선 운전하시던 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알고 보니, 목사님이더라. 좋은 일 한다며 오늘은 일요일이니 꼭 교회에 가라고 신신당부하신다. 그러면서 여기서 조금만 가면 바로 교회가 있다는 정보도 알려줬다. 그런데 그땐 시간이 이른지라 무작정 걸었고 10시 10분경부터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이 알려주신 교회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때 지나는 곳은 공장지대였다. 그곳에서 교회를 찾고 있었으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느낌이랄까? 29년을 살아온 나에게 주는 선물 한참을 걷다..
맘이 여유로워지자 세상이 달리 보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씻고 잠자리를 정리하고 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오늘 안으로 여주에 도착할 수 있는지 지도책을 펴고 거리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제발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를 바라며 말이다. 실을 가지고 거리를 계산해 보니 30Km 쯤 되더라. 아! 정말 다행이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해도 부담되는 먼 거리도 아니다. 몸을 푼다는 생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야지. 여유로워지자 보이는 세상 친구에게 문자로 보냈다. “오늘 부리나케 걸어 도착할 거니까 저녁에 보자”고 말이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답문자가 왔다. 그러면서 잠은 어떻게 잘 거냐고 물어본다. 난 친구가 일하는 곳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봉사활동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
내 맘 같지 않기에 재밌는 여행 처음에 경로를 정할 때만 해도 여주로 갈 생각은 없었다. 그땐 목포에서 철원까지 직선으로 선을 그어 가까운 루트로 가려 했다. 친구가 알려준 국토종단의 의미 하지만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내가 국토종단 할 수 있도록 의미부여도 해주고 힘까지 팍팍 북돋워주던 친구다. 그런데 그때 “어느 경로로 어떻게 가냐? 혹시 여주로 오게 되면 연락해. 내가 맛있는 저녁 사줄게~”라고 말하는 거다. 그래서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머리에는 오만 생각이 들더라. 여주로 가려면 조금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가는 길인데 친구도 못 만나고 가는 것도 그랬다. 그날 저녁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더라. 그건 이 여행을 하는 목적만..
날 것 그대로의 여행을 받아들이다 이미 시간은 8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앞이 막막해지는 이 느낌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세상의 쓴맛이다. 하긴 그 말을 뒤집어보면 지금까진 운 좋게 일이 술술 풀렸다는 얘기이리라. 친구는 국토종단을 하면서 노숙을 해봤냐고 장난삼아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 말이 현실이 될 판이다. 이런 맙소사. 우여곡절 끝에 잠자리를 얻다 그때 개척교회 목사님께서 한 말씀 덧붙이셨다. “농협 근처에 싼 여관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에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목사님께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다. 두 번이나 찾아갈 땐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 외면한 게 야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남 탓! 이런 심보야말로 ‘못 돼먹은 ..
거부야말로 오히려 일상적인 반응인 걸 한참 걷다가 6시 30분이 되었을 때 일죽면에 도착했다. 시간상으론 한 시간 정도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면을 벗어나면 잘 곳을 찾는 게 어려워질 것 같아 여기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일상적인 반응엔 무덤덤하게, 특별한 반응엔 감사하게 늘 그랬듯이 교회로 찾았다. 처음 찾아간 교회는 작은 교회다. 들어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공감은 해주시는 데 신자분이 심야 기도를 하러 오신다며 안 된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초등학교 옆에 큰 교회가 있다고 알려주신다. 그 교회로 가봤더니 글쎄 아무도 없더라. 그래서 경찰서로 향했다. 진천군 초평면에서 경찰 아저씨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들어갔다.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일까? 꽤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경찰관이 앉아 있었..
신경쇠약과 맥주 진규에겐 황금주말일 텐데 여행을 떠나기에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나 때문에 신경을 써야 했다. 명지대 앞에서 밥을 먹고 11시 40분쯤 헤어졌다. 남부터미널에서 안성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1시 10분에 도착했다. 5월 4일에 이곳에서 떠났으니 5일 만에 다시 이곳에 온 셈이다. 국토종단을 하며 신경쇠약을 얻다 다시 시작하는 여행이다. 하지만 며칠 쉰 탓에 배낭이 엄청 무겁게 느껴진다. 필요 없는 물건을 뺐음에도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한껏 더워진 날씨도 꽤나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애초부터 편하자고 여행을 떠난 게 아니었다. 그런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건, 그 힘듦 속에 진정 알고 싶던 지금껏 모르고 있던 나 자신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난..
15도 틀어진 운명의 좌표를 따라 국토종단 후반기로 어버이날이다. 그런데도 오늘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와 형이 하루 더 있다가 떠나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했지만, 진규와의 약속도 있고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도 않아서 이날 떠나기로 한 거다. 후반기 여행 시작부터 빗나간 예측 진규네 회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다 보니 5시 버스를 타게 되었다. 지금껏 서울로 가면서 버스가 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긴 내가 서울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거의 평일에 갔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던 걸 테지만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빈자리도 여러 곳 있고 2시간 30분 정도 걸려 서울에 도착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좌석도 거의 꽉꽉 찼고(내 옆에도 한 남정네가 앉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 자리에 있던 배낭을 무..
반환점: 길에서 엇갈리고 길에서 마주치다 길을 나선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목포에서 시작해서 이틀 간 휴식한 것 말고는 줄곧 걸었다. 목포에서 무안으로, 무안에서 함평을 지나 영광으로, 영광에서 고창으로, 고창에서 정읍으로, 정읍에서 김제로, 김제에서 익산을 지나 함열로, 함열에서 논산으로, 논산에서 공주 경천리로, 경천리에서 연기군 양화리로, 양화리에서 청주로, 청주에서 진천군 초평리로, 진천군 초평리에서 진천군 이월리로, 이월리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끊임없이 걸었다. 이게 2주간의 내 여정이었다. 걷기만 하는 여행인가, 마주침을 위한 여행인가 우선 첫째 주엔 그닥 재밌지 않았다. 여관에서 자는 날이 많아서 직접 지역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엔 부족했다. 하지..
국토종단의 전반기를 마치며 302번 지방도를 따라 쭉 걸었다. 이 길은 산을 삥돌아 올라가 안성 근처의 금광 저수지를 따라 걷는 길이다. 산을 오를 땐 혹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모래재를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모래재에 비하면 규모가 작더라도 힘은 꽤 들었다. 그러나 호젓한 산길을 걷는 기분은 좋았다. 그저 찻길만 쭉 따라 걷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길이었다. 여행을 즐기는 데 방해되는 것 산에서 나는 향기가 코끝을 스칠 땐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어렸을 때 기억들이다. 어렸을 땐 산을 잘도 ‘헤매고’ 다녔었다. 봉분에서 눈썰매를 타기도 했고, 불장난을 하다가 산에 조금이나마 불을 낸 적도 있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은 기억들이 향기로 인해 내 머릿속에 꽉 찼다...
네 명의 아이들과 분주히 맞이한 주원교회의 아침 교회에서 자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새벽 기도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잠을 자자니 목사님이 안 주무실지도 모르는 거고 그냥 일어나서 갈 준비를 하자니 고요한 집 안의 분위기를 깨는 것이기에 난처하다. 지금까진 새벽 기도 후에 집안 식구들이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누워 있곤 했다. 그러니 깊은 잠을 잘 순 없다. 아~ 푹 자고프다. 깨우기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그곳 새벽 기도 후에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밖은 한껏 시끄러워졌다. 오늘은 공식적인 휴일이 아니기에 누군 학교에 가고 누군 쉬게 된 탓에 휴일 같은 여유로움과 평일 같은 분주함이 공존한다. 막둥이만 쉬는 날이라 잠을 자고 있..
국토종단 인연론 편하게 누워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다. 겪었던 일들을 글로 적는다는 것의 한계를 느낀다. 이 글에 실리는 내용은 여행 중에 느낀 내용의 50%도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적는 이유는 뭐냐고? 여행기를 남기는 이유 몇 년이 지난 후엔 우리의 기억 속에 여행에 대한 기억은 10%도 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50%라도 기록해두면 나에게 국토종단은 의미 있는 시간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심방을 마치고 목사님과 사모님이 오셨다. 사모님이 먹을 것을 좀 가져왔다며 나에게 주신다. 여행기를 빼곡히 적고 있는 나를 보고, “이거 한 번 봐도 되요?”라고 물어보신다. 쭉 한번 훑어보시더니 감탄하신다. 여행도 좋지만 그걸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신단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날 춤추게 한다 점심은 교회에서 먹었다. 이날은 특별식을 먹는 날이란다. 교회에선 월 중 행사처럼 ‘여성들이 주방에 들어가지 않는 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성들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그걸 같이 먹는 것이다. 누군가의 긍정적인 반응은 날 격양되게 한다 과연 어떤 특별식일까? 알고 보니 요리를 하는 건 아니고, 라면을 끓이는 거였다. 사모님은 하필 라면을 먹을 때 왔다며 미안한 듯 이야기하셨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좋았다. 라면을 최근에 거의 먹지 못했기에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다 먹으니 커피까지 주시더라. 그러면서 여행에 관해 물으셔서 “목포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걸어서만 왔어요”라고 말을 하니 다들 놀라워하신다. 이제 반쯤 왔다는 말로 말문을 여시더니 힘내라고 응..
나중을 기약하며 돈을 받지 않다 마을회관 보일러는 온도 조절이 안 되나보다. 분명히 18도로 맞춰놓고 잤는데 계속 뜨거워지더니 급기야 찜질방 수준까지 온도가 올라간 것이다. 몸이 고된 탓에 모르고 푹 자다가 11시쯤에 더운 열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온돌은 몸은 누일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고 밀폐된 방안은 후끈후끈 열기로 가득했다. 완전 불구덩이 속에 누워있는 느낌이었다. 창문을 잠시 열었다 닫았음에도 그 열기는 쉽게 빠지지 않더라. 몸은 피곤한데도 열기에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일당 이상의 경험과 행복을 듬뿍 받다 아침 6시 20분에 일어나 7시 30분까지 챙긴 후 이장님 댁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그새 이장님 댁 막둥이 민지와는 완전히 친해진 느낌이다. 딱 달라붙어 아는 체를 한다. 이장님은 돈을 주시..
농업을 무시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다 일을 마치고 친구분 집에 가서 남은 통닭과 닭도리탕을 먹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이 시골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행복한 광경이다. 일도 해보고 민가에 들어가 밥도 먹고 그분들이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야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있다. 우연에 타고 노닐며 그 행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농사 짓는 사람에게 퇴직금을 줘야 해 친구분은 이장님 댁 아들들을 보고 부모님 잘 모시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렇게 오순도순 모여 함께 일하러 오는 모습이 보기 좋으시단다. 그러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도 퇴직금을 줘야 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엔 뼈가 있었다. 갈수록 농사를 짓고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게 힘이 든단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고추심기의 고단함만큼 맘은 여유로워지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간다. 이 길은 어제 내가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이 길로 쭉 가면 초평면이 나오고 경찰서가 나온다. 차는 그 경찰서를 지나 10~15분 정도를 더 들어갔다. 규모가 다른 이장님 친구네 고추밭 이미 밭엔 많은 사람들이 고추를 심고 있었다. 그 규모만 대충 살펴보니, 이장님네 밭과는 쨉이 안 될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컸다. 오전은 고추심기 체험 정도라 할 수 있고, 이곳이야말로 실전과도 같다고나 할까. 두둑의 길이가 훨씬 길었고, 이랑의 수도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 이장님네에선 고추를 두둑에 박아 넣는 일을 했다면, 여기선 퍼올려진 흙을 이용해 줄기를 세우는 일을 했다. 오전엔 면적이 넓지 않고 처음 하는 일이라 신나게 즐기며 일할 수 있었는데,..
초평에서 하루 더 머물 수 있게 되다 아침에 “오늘 일을 같이 해도 되나요?”라고 묻고 이장님의 승낙을 받았을 때만 해도, 고추를 심는 일이 하루종일 걸릴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장님네 식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함께 와서 심다 보니 11시 정도에 끝나 버린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전개되니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후 늦게까지 해야 자연스럽게 하루 더 머무를 수 있지만,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나면 점심만 먹고 여행길에 올라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점심은 아침에 간단하게 먹었듯이 집에 있는 반찬으로 먹을 줄 알았는데, 숯불로 삼겹살을 구워서 먹더라. 당연하지만 국토종단 중에 이런 식으로 배불리 먹기도 처음이고, 집에서 먹듯이 편하게 먹어보기도 ..
생거진천에서 고추를 심다 이미 밭은 다 갈려 있었고 두둑엔 비닐이 씌워진 상태였다. 아마도 고추를 심기 위해선 그게 기초작업이었던 듯싶다. 체험 삶의 현장, 이장님네 고추 심기 고추심기는 ‘두둑에 적당 거리를 띄어서 구멍을 파고 물을 준다 → 모판에서 어린 고추싹을 떼어 물을 준 곳에 푹 박아 넣는다 → 흙을 퍼서 고추싹 근처에 뿌려준다 → 뿌린 흙으로 고추싹을 세워준다’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말뚝을 어떻게 쓰는 건지는 모르지만 각 고랑에 잘 옮겨 놓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니 막상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음에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더욱이 육체노동이니 겁부터 났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모판에서 고추를 떼어 홈 파인 곳에 박아 넣는 일이었다. 예전엔 일일이 고랑을 파고 물을 ..
함께 고추를 심겠다고 제안하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온다는 건,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겐 경악스런 일이다. 집이 비싸면 비싸질수록, 가전제품이 고급스러워지면 고급스러워질수록 그 공간은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보다 나만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즘엔 아파트의 브랜드명으로 계급을 나눠 “임대아파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마”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편 나누기를 하고, 나의 집에 약속되지 않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민폐를 끼치고 함께 엮이라 나 또한 그런 도시문화에 젖어 있었고, 여태껏 그렇게만 살아왔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들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호기롭게 ‘낯선 사람 집에서 잠도 자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며 국토종단을 떠난 것이긴 했지만, ..
한치 앞도 모르면서 이미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었다. 국토종단 중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 잘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될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랴 지도를 잘못 보고 판단한 탓에 이렇게 궁지에 몰린 것을 말이다. 최초로 경찰서에 들어가다 첫 교회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 교회가 두 군데나 있었기 때문이고, 가는 길엔 경찰서가 있는 것까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리면 누구든 생각지도 못한 용기가 생긴다. 이미 어둠에 짙게 내린 거리를 걸어 교회로 향한다. 언덕을 올라가니 바로 교회가 보이더라. 교회가 특이하게도 옆으로 쭉 늘어선 건물이었다. 사택이 어딘지를 찾아 한참 헤매다 드디어 사택을 발견하고 초인종을 조심히 눌렀다. 두근..
초평면에서 잠자리 구하기 저수지는 매우 넓었고 그 위에 집을 띄워 놓고 낚시질하는 강태공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국토종단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운행할 정도로 금세 어두워졌다. 밤 국토종단은 위험해서 되도록 자제해 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속력으로 걸었다. 익산 함열에 갈 때도 이와 같은 경우였기에 그 다음날 무진장 고생했던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나더라.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라도 서둘러 가지 않으면 도로 한복판에서 밤을 새야 한다. 거의 8시가 되었을 때 드디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십자가는 보이지 않더라. 그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최악..
철 들지 않기 오늘부터 연휴의 시작이다. ‘노동절-토요일-일요일-평일-어린이날’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연휴기간인 것이다. 직장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평일인 월요일에 쉴 수만 있다면 5일간 쭉 이어서 쉬게 되는 셈이다. 철들지 마란 말야 황금연휴를 코앞에 두어서인지 청주를 걸어서 지나는 길목의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외곽도로를 따라 처음 와본 도시인 청주를 걸어간다. ‘직지의 도시 청주’란 안내물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작년에 임용고시를 경기도에서 봤었는데 내 뒤에 앉았던 분들이 ‘청주대’ 출신들이었다. 원래 시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얘기도 하지 못하고, 아는 사람일지라도 쭈뼛쭈뼛 모른 체 하는 게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같은 경쟁자이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한 아름 안고 왔으니 그럴 수..
계획에 갇힌 삶 이렇듯 아무 기약 없이 다닌다. 아는 사람이 있어 언제나 눈치를 봐야 했던 곳이 아닌 완전히 낯선 사람만 있어 자유로운 곳으로, 미래를 위해 늘 희생하기 바삐 오늘을 살아내야 했던 곳이 아닌 언제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이렇게 다닌다. 여행을 하다 보면 늘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쓸리게 되는데, 그때 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던져진 존재’라는 자각이다. 그건 이미 내가 있기 전부터 어떤 상황들이 있었고, 어떤 흐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나는 거기에 갑자기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흐름을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국토종단은 던져진 존재가 던져졌다는..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일 뿐 몸이 피곤해서 살살 걸었다. 오늘은 걷는 흥이 안 난다. 날씨까지 뜨거우니 더욱 고통스럽다. 5시가 넘어 교회 팻말이 보여서 조금 들어가니 교회가 있다는 표시가 다시 보이더라. 그래서 한참 걸어 들어갔는데도 교회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을이 그렇게 큰 게 아니니 못 찾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금은 없어진 건가. 잠자리 얻기 실패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을회관이 보이기에 그곳으로 갔는데 마을회관은 잠겨있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아 있었다. 어떤 분이 오시기에 마을회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통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그래서 바로 통장님 댁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그런데 ‘역시나’ 통장님은 안 계시더라. 이거 완전히 ‘공주 경천’..
노무현 전대통령의 검찰 출두와 삼인성호 이날 아침을 먹을 때 티비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있었다. 봉하마을에서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촬영하기 시작하여 어느 고속도로를 타고 어느 휴게소를 거쳐 검찰청에 들어오는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혐의도 갖다 붙일 수 없다. 그런데 이미 언론의 보도 방향은 그를 범죄자로 다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방총과 위나라의 태자가 조나라 수도 한단으로 인질로 잡혀 가며 방총이 위나라 임금께 말씀드렸다. “이제 첫 번째 사람이 ‘..
양화감리교회 목사님과 아쉬운 사모님과의 작별 목사님은 아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준다며 나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사택에 자게 해준 것도 감사한데, 그렇게 챙겨주기까지 하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그 덕에 연기군 일대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독락정, 부안임씨가묘에 가다 이미 연기군 일대는 행복도시 건설 사업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한 군데만 원형이 보존되어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부안 임씨 가묘’다. 이곳은 부안 임씨들이 모여 살았던 집성촌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부안 임씨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의 가묘만이 덩그러니 금강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 있다. 사람이 떠난 곳에 남은 가묘는 무슨 의미일까? 이들은 행복도시개발로 흩어진 걸..
여행하는 사람이 되라 어제 잠을 자기 전에 목사님이 새벽 기도에는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없었다면 함열성결교회에서 머물 때 정한 철칙처럼 새벽기도에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누우니, 정말 맘껏 자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더라. 그만큼 여태껏 교회에서 잘 때마다 새벽기도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는 얘기일 거다. 새벽기도에 나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눈이 새벽 4시 45분에 떠진 것이다. 이럴 땐 한 번 잤다하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자는 사람이 부럽기만 하다. 나는 아무리 피곤할 때에도 8시 이후까지는 자본 적이 없으며, 맘껏 자야겠다고 맘 먹었을 때에도 10시간 이상을 잘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눈이 떠진 이상 ..
연기군 양화감리교회 목사님과의 대화 목사님은 저녁을 집에서 차리고 있으니 거기서 먹고 잠은 예배당에서 자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밥이 차려질 때까지 기다렸다. 근데 예배가 끝난 후에 이야기를 하며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예배당이 잘만한 곳은 아니라 생각해서인지 갑자기 사택의 아들 방에서 자라고 하신 거다. 아까 나름 ‘배신’을 했던 탓에 이런 극진한 대우까지 받으니 엄청 죄스럽게 느껴지더라. 건빵이 만난 사람⑦: 양화감리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곧바로 짐을 모두 들고 사택으로 건너갔다. 들어가선 아들에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으며, 사모님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깨끗이 씻고 밥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는 것을 많이 차려놓으셨던지 그걸 보고 먹는 것만으로도..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던 순간 연기군은 정부청사 공사로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다. 예전의 도시건설은 자연을 적게 훼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굽이치는 강이 있으면 강을 따라 굽도록, 언덕이 있으면 언덕을 따라 오르내리도록 길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구 전라선은 섬진강을 따라, 구 경춘선은 북한강을 따라 건설되어, 그만큼 이동시간은 길어지되 자연의 풍광을 만끽하며 갈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현대의 도시건설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여 진행된다. 도로는 직선화되고, 언덕이 있으면 터널을 뚫어 최단거리가 되도록 한다. 바로 이곳도 그런 현대의 건설방식이 그대로 적용되었기에 온 토지를 모두 깎아내어 온갖 생명체의 비명이 가득한 곳이 되고 말았다. 난 그저 잠잘 곳을 찾아 스쳐 지나가는 데도 여러 생각이 들더라. 처음 ..
연기군은 지금 공사판 지방도 691번을 지나 대전과 연기가 나눠지는 길엔 금강이 흐르고 있더라. 그 절경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답답함과 짜증이 일시에 걷힌 듯한 행복이 느껴지더라. 연기군 남면은 광기의 언덕 자연이 주는 아늑함은 그 어느 것에도 비할 게 없다. 더욱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더 큰 위로가 된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니 말이다. 그곳에서 금강을 보며 걸으니 시원하고 좋더라. 하지만 그런 기쁨은 아주 잠시였다. 연기군 남면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연기에 정부의 제2종합청사가 들어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주변부까지 공사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중심부만 공사하는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을 믿는 아이들과 사람을 경계하는 어른들 중장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아마도 ‘낯선 사람이지만 그래도 친근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 갑작스런 인연임에도 최선을 다해서 챙겨주려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서 본 희망의 메시지 그러고 보면 저번 황산교회에서 만났던 중학생 아이나, 이번 중장초에서 만난 중학생 아이들이나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경계심이 없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최대한 잘 해주려 하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삶의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사람에 대한 호의는 사라지고 경계심은 높아만 간다. 그래서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낯선 사람이 사..
충남교육감 선거에 만난 아이들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중장초등학교를 지날 때였다. ‘안내’라고 적힌 띠를 두른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봉지라면을 먹고 있더라. 쉴 시간도 되었고 그 아이들이 신기(?)하기도 해서 아이들 옆에 앉았다. 낯선 사람이 바로 옆에 떡하니 앉았는데도, 아이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라면을 허겁지겁 먹기만 한다. 건빵이 만난 사람⑥: 한국교육의 문제점, 헛지식 양산소 그래서 “점심시간이 바로 코앞인데 설마 그걸로 점심을 때우려는 건 아니지?”라고 말을 붙였다. 한 아이가 “1시까지 이렇게 서있어야 해서요. 간식으로 먹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계기로 서로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단다. 오늘은 충남교육감 선거일이라 공주지역 학교는 ..
없는 살림에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사모님이 밥을 챙겨주시더라. 꼭 집에서 아침을 먹고 떠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모님께선 한갓진 길이 있다며 친히 메모지에 적어줬고, 가면서 밥값을 하라며 돈까지 챙겨주셨다. 그뿐인가 갈증 날 때 마시라며 배즙까지 주셨으니, 집에서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줬다고 할 만하다. 이렇게까지 나눠줄 수 있는 그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 많아야만 나눌 수 있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고, 전혀 모르던 사람을 만나며 평소엔 미처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건 무언가를 받았고 어떤 환대를 받았기 때문에 드는 고마움이라기보다, 아직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다. 바로 여기엔 인생의 아이러니가 있다고..
낯선 이에게 들려준 우리네 삶의 이야기 사모님의 들려 준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분들은 순탄한 삶을 살아오신 게 아니라, 삶의 파도 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오신 거였다. 아마도 나의 이런 모험 자체를 긍정해주실 수 있었던 데엔, 맘처럼 되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내력이 작용하는 듯했다. 건빵이 만난 사람⑤: 아픔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 길로 가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한창 잘 나갈 땐 계룡산 밑에 소 100마리를 키우기도 했단다. 그런데 소값이 나날이 떨어져 똥값이 되자, 한순간에 쫄딱 망하셨다는 것이다. 삶은 그렇게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했다. 그건 정부와 농협이란 괴물의 공동작품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잡기란 ..
낯선 이를 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 낯선 사람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노인회 회장님이 오실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 마을회관에서 잘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해는 완전히 저물고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온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니, 절망이 싹터오기 시작했다. 온갖 비극과 비관을 한 몸에 안은 양,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사람인 양, 그렇게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었다. 과연 잠을 잘 수는 있는 것일까? 이러다가 아예 노숙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거절과 승낙 7시 30분쯤 되었을까? 4시에 이곳 경천리에 도착했으니 벌써 3시간 30분째 이러고 있었다. 한 분이 내 앞을 지나가신다. 바로 옆이 슈퍼이니 무언가를 사러 오시는 것이..
잠자리 얻기의 버거움 걸어서 오는 중에 두 통의 전화를 연거푸 받고 오니, 꼭 혼자 걷는 게 아닌 둘이 오순도순 대화를 하며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혼자서 느껴지는 오만가지 감정을 맘껏 느끼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가슴 속엔 순풍이 불어오더라. 역시 사람은 혼자 있을 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둘이 있을 땐 혼자 있고 싶어 하나 보다. 최초의 도전, 잠자리 얻기 적당히 걸어서 도착한 마을은 ‘경천 1리’였다. 그때 시간은 오후 4시였는데 이른 시간이긴 해도,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잠자리 얻기’를 해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의 마을이면 분명히 마을회관이 있을 것이니, 거기서 잘 수 있는지 물어보려 ..
두 통의 전화에 실린 에너지 오늘은 이상하게도 격려 전화가 두 통이나 걸려 왔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그런 전화를 받으니 생기가 샘솟더라. 아무리 혼자 다니는 게 좋다 해도 많이 외롭고 많이 쓸쓸했었나보다. 그 전화에 마음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고 누군가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울컥했으니 말이다. 뜻밖의 전화①: 궁금할 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 혼자 있어 보니 같이 있는 것의 의미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그건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내 옆에 그렇게 있다는 존재감이 아니었을까? 단지 같이 있다는 느낌.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말을 ‘쌈빡’하고 ‘유머’있게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것 말이다. 처음으로 온 전화는 동아리 후배에게 온 것이다. 함열에서 교회에서 잘 수 있도록 주선해준 후배가 ..
물집과 작지만 큰 행복 몸을 제대로 지졌다. 열탕과 사우나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찜질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걷기에 거북한 탓에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그런 상태로 계속 걸어야 하니 골반 쪽도 무리가 왔는지 결리더라. 그래서 몸을 최대한 뜨거운 열기에 노출하여 풀려고 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의 증표인 물집 몸이 어느 정도 풀리자 물집을 치료하기에 바빴다. 1주일간 걷다 보니 물집이 잡힌 곳에 다시 물집이 잡히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물집 속의 물집이라고나 할까. 물집이 처음에 잡힌 곳은 바늘에 실을 꿰어 통과시켜 물을 빼낸다. 그래야 이물감도 없어지고 발바닥이 바닥과 닿을 때 찌릿찌릿 아려오는 기운도 가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을 뺀 곳에 다시 물집이 잡히니, 바늘을 찌르기가 여간 힘든 게..
힘듦 속에 알게 된 도보여행의 참맛 가는 길에 후배를 만나서 어제 잘 지냈고 이제 다시 여행을 떠난다고, 자못 비장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출근 준비로 한참 바쁠 텐데도 오랜만에 선배답지 않은 선배가 찾아왔다고 인사를 받아주는 후배가 정말로 고맙더라. 더욱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식당에 올라가 커피까지 타서 내려오는 그 센스는 정말로 최고였다. 이제 짧은 만남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홀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두 번째로 길을 잘못 들다 어제 2주차 국토종단을 시작하면서 너무 무리했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도 만났고 오랜만에 사람의 정을 맘껏 느낄 수 있었지만, 그만큼 후유증도 큰 게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혀 욕심내지 않고 논산까지만 걸어서 갈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은 724 지방도를 ..
여행과 공부의 공통점 느긋한 마음으로 8시 30분에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응급치료가 제대로 안 된 탓인지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찌릿한 아픔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그러니 온 신경이 곤두서고 되도록 물집이 잡히지 않은 부분으로 땅을 디디려 하다 보니, 걸음걸이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조금만 걷는다면 어제 무리한 만큼 훗날에 부담이 된다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계속 그렇게 걸으려 하다 보니 온몸에 무리가 왔다. 발바닥이 아프게 되니 걸음걸이가 틀어지고, 걸음걸이가 틀어지니 골반과 허리까지 아파온다. 몸은 역시나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중요하지 않은 곳도 없는 완벽한 균형체라는 것을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걷는 게 아주 쉬운 일 같아도 거기..
교회에서 자는 날에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이유 여느 교회나 새벽 4시나 5시엔 새벽기도라는 걸 한다. 예전에 교회에 다닐 땐 부활절, 작심 새벽기도회와 같은 특별한 날에만 새벽기도를 나갔던 적이 있다. 아무래도 참가하려면 일찍 일어나야만 하고, 그러려면 생활리듬이 깨지기 때문이다. 새벽을 깨우리라 2003년에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거의 반년 동안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근무시간은 특이하게도 아침 6시~9시까지 근무 후 잠시 퇴근 후에, 다시 돌아와 오후 6~10시까지 마무리 짓고 퇴근하는 거였다. 그런 근무 형태다 보니 10시에 퇴근하고 나면 집에 와서 바로 잠을 자야만 했다. 새벽 5시에는 일어나 준비를 해야지만 겨우 시간 내에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전 근무를 마치고 9시..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 사람 걷다가 7시가 넘어서야 함열에 도착했다. 최대한 빨리 걸은 탓에 조금 일찍 함열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배는 “길을 오다 보면 오른쪽에 석매교회가 보일 거예요. 그러면 연락을 주세요”라고 말해줬기에, 걷는 내내 석매교회를 찾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그런데 함열에 다 도착했는데도, 석매교회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함열 가기 전에 교회가 있는 게 아니라 읍내에 있는 교회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읍내에 들어가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런 교회는 없었다. ‘의미요법’을 몸소 체험하다 후배에게 전화를 해보니, 이미 지나쳤다고 알려주더라. 세상에 내가 얼마나 온 신경을 집중하고 찾으면서 왔는데, 그걸 어찌 놓쳤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도로..
여행의 컨셉이 ‘민폐 끼치기’라고? 이미 말했듯이 오늘 목표는 익산을 지나서 시간이 될 때까지 걸은 만큼만 가는 거다. 지금껏 일주일동안 걸었지만 어떻게든 도시 중심지를 목표로 하루 걸을 양을 정해왔다. 도시를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아무래도 잘 곳을 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물론 여관이나 찜질방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생각이 여행의 의미를 반감시키고 있었다. 잘 곳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험도 못해봤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해보지도 못했는데, 그건 이처럼 안전한 여행만을 하려는 소심함 때문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떠났지만, 어느덧 그 의미는 사라지고 걷는 것에만 치중하는 극기(克己)를 위한 여행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여행의 형태를 계속 고수하는 건 아..
닉 부이치치가 전한 이야기 목사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죄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하느님의 눈을 피해 숨어 있을 때, 오히려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찾아와서 위로해줬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절망 가운데 있을 때조차 하느님은 언제나 함께 계시니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줬다. 그런데 그 구절로 저 메시지를 전하는 건 약간의 어거지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좀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는 저번 여행기에 담겨 있으니 그걸 보면 된다. ‘희망을 가지며 살라’는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보여준 영상이야말로 어찌 보면 나에게 던져주는 화두처럼 느껴졌다. 닉 부이치치(Nicholas James Vujicic)의 강연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린 모두 같은 인..
국토종단 중에 교회를 가려는 이유 한참을 23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벽성대학교가 보이는 곳에서 이름도 없는 한적한 길로 빠졌다. 그곳은 국도와는 달리 2차선이어서 아무래도 차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경치를 맘껏 구경하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신자가 교회를 찾는 이유 더욱이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었기에 아무래도 큰 도로에서 교회를 찾는 것보다 이런 구도로에서 교회를 찾는 게 수월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기에 처음에 보이는 교회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작은 개척교회가 먼저 눈에 띄길 바랐다. 큰 교회에 비해 아무래도 가족 같은 분위기일 테니 자연스럽게 그분들이 사는 이야기, 마을 이야기도 자연스레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처음에 눈에 띈 교..
생각한 그대로 여행하길 다짐하다 국토종단을 계획하면서 예기치 않은 상황,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몸을 맡기려 했었다. 그래서 세세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대충 출발점과 도착점만을 정한 후에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이다. 2주차 여행엔 예기치 않은 일들이 가득하길 과연 어떤 식의 예기치 않은 상황을 바란 걸까? 잠잘 곳이 없어 남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며 겪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등을 생각했다. 그런 상황 속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며, 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진 계획대로만, 예상 가능한 대로만 하려고 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시간에 맞춰서 사는 플랜맨(plan man)이 될 수밖에 없더라. 물론 그렇게 사는 게 나쁜 ..
휴식①: 살아있는 나에게 주는 선물 지금까지 잔 곳은 장소만 다를 뿐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뭐니 뭐니 해도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잤다는 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방의 생김새나 청결 정도는 엄청나게 차이가 났지만, 적어도 혼자 뒤척이다 잠이 오면 잘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런데 어젠 형수 형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하니, 정말 힘들더라. 형과 그렇게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늦게까지 불을 끄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기에 “얼른 자요”라는 말조차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니 누워는 있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아 뒤척여야 했고, 새벽에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은 걷지 않고 일주일 동안 잘 여행한 나를 위해, 이곳 김제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는 점이다. 콩나물..
고생 끝에 낙이 오다 4일째 여행을 하며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김제 XXKm’라는 표지판에서 ‘XX는 어디서부터 잰 거리일까?’하는 것이었다. ‘김제 XXKm’라는 표지판의 기준점은 어디일까? 가설은 크게 두 가지로 세웠다. ‘김제라는 도시의 최외곽에서부터 잰 거리’라는 것. 즉 ‘김제 1Km’라고 써있다면, 1Km만 가면 정읍을 지나 김제라는 도시의 경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시내를 중점으로 잰 거리’라는 것. 즉, 1Km를 가면 드디어 시내권에 진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가설엔 문제가 있었다. 시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일 뿐 정식으로 구획 지어진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시내의 넓이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그런 가설들을 세운 후 길을 ..
배낭을 통해 배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의 진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그래서 우의를 입고 걷고 있는데, 솔직히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안 올 것 같기도 하더라.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엄청 덥게 느껴졌기에, 우의 상의만 벗고 걷게 됐다. 건빵이 만난 사람②: 경쟁이 아닌 동지의 마음을 확인하다 오후에 신태인 부근에서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을 만났다. 영광에서 고창으로 여행할 때 ‘함평나비축제’란 깃발을 달고 뛰며 여행하시는 할아버지를 만난 이후 두 번째다. 나는 김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 분은 정읍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분도 저렇게 혼자 여행하는 분이신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며, 서로 방긋 미소를 지어 보내줬던 것 같다. 그렇다고 원래..
김제평야와 KTX에 알알이 박힌 역사 비는 조금씩 오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바람도 별로 불지 않는다. 우의는 통풍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보온 효과까지 있으니 한결 더 덥게 눅눅하며 찝찝하게 느껴지더라. 월요일에 빗길 여행 때 느껴지는 상쾌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그런 기분이었다. 김제평야와 『아리랑』 아무래도 비가 내리기도 전부터 너무 빨리 대처를 했더니, 그게 나에겐 비수가 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우의를 벗기에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기에 망설여졌다. 그래도 머지않아 비가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덥더라도 그냥 입고 걸어가기로 했다. 정읍에서 김제로 가는 길은 지방도 701을 타고 가다가 국도 30번으로, 다시 29번을 타고 들어가는 루트를 택했다. 오늘 루트엔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가는..
여인숙에서 자며 여행의 관점이 바뀌다 지금까진 여관에서 이틀을 자고 그젠 집처럼 편안한 교육관에서 잤다. 교육관이야 3년 전에 한 달 정도 생활하던 곳이니 불편할 이유는 없었지만, 여관은 아무래도 낯선 곳이라는 느낌 때문에 푹 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여인숙에서 자보니, 여관은 그나마 천국이었다는 것을 알겠더라. 곰팡이 낀 벽지들, 창문도 없이 날림으로 지어진 건물, 나무로 대충 틀을 만들어 비치해놓은 침대와 그 위에 얹힌 언제 빨았을지 모를 이불과 전기장판, 켜지지 않는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 있는 티비까지 모든 게 잠을 자기엔 최악의 장소였던 거다. 그러니 나도 밖에서 노숙을 한다는 생각으로 우의까지 완벽하게 껴입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마음으로 누운 만큼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처음 여인숙에서 처음 자며, 최악의 경험을 하다 원랜 점심을 식당에 들어가 제대로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오전의 헤맴로 입맛마저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걷는 길에 찐빵집이 보이자, 그걸로 점심을 대신하기로 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온 터라 그 정도로도 진수성찬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자리 구하기를 실패하다 오후엔 걸음걸이에 그다지 감흥이 실리지 않더라. 마지못해 행군하는 군인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떼었다. 더욱이 4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더라. 생각조차 멈춰버린, 그래서 맹목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엔 나도 없었고 풍경도 없었다. 어제 교회에서 신세를 지고 나니까 여관에서 자는 게 이래저래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여행의 의미가 반..
생각지 못한 헤맴, 그 속에 담긴 일장일단 새벽기도에 참여해야 하기에 일찍 일어났음에도 몸은 활기찼고, 목사님과 함께 밥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니 맘은 가벼웠으며,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 배는 불렀다. 이 기분 그대로 오늘은 참 즐거운 여행이 될 것만 같다. 짧은 거리가 길어진 사연 아침에 가는 길은 익숙한 길이다. 교생실습 때 매번 다녔던 길로 중학교 아이들과 나름 친해져서 함께 재잘거리며 등하교를 했기 때문이다. 이 길이야말로 빠르게만 변해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 하나도 바뀐 게 없는 길이었다. 일반도로라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한적했고, 3년 전의 감흥이 그대로 느껴져 정말 좋았다. 더욱이 어제 국도를 거닐며 한껏 힘들어했던 탓인지 한적한 길을 걷는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던 것 같다. 신..
고창 신림교회에서 맞이한 아침 고창 신림교회에서 정읍까지는 20km 약간 넘는 거리다. 어제와 그제 30km가 넘는 거리를 무리하며 걸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좀 여유롭게 걸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정읍을 오늘의 목적지로 정하였다. 그런데 웃긴 점은 30km를 걸었다는 점이다. 길을 만드는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길을 늘릴 수 있었던 걸까? 국토종단 속 또 하나의 도전 정읍까진 고작 5~6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빨리 걸을 것이 아니라, 그저 천천히 걸으며 주위의 것들을 맘껏 보고 느껴볼 생각이었다. 어제 23번 국도를 타며 잘 정비된 국도는 국토종단자에겐 최악의 도보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오늘은 국도가 아닌 지방도나 일반도를..
제2의 고향, 고창신림교회에서 다시 묵다 아침도 굶었지, 끝도 없이 쫙 펼쳐진 도로는 지겹도록 계속 되지, 어쩌다 차들이 지나가면 그 굉음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지, 이와 같은 삼중고 속에서 걸으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중간에 쉬면서 여관에서 챙겨온 쿠키(체육대회에 온 선수들에게 주려고 쿠키를 카운터에 비치해놓고 있었는데, 그걸 두 주먹 집어 왔다^^)를 먹고 육포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아~ 언제 밥을 먹게 될까? 오후 3시에 첫 밥을 먹다 3시가 넘어서야 고창 시내 근교에 도착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음식점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의 흥분이란^^ 신기루를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먹을 것이 풍부하다던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뭐든 사먹을 수 있는 돈까지 있는데 식당이 보이지 않아 굶어 죽을 ..
한치 앞도 모를 사람의 일 오늘은 국토종단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이제 서서히 익숙해져 가고 지도 보는 법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조금 익숙해졌다고 방심한 탓일까. 그 자신감에 된통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은 이래저래 걸으면서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최악의 날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출발할 때부터 별로였다. 잠을 뒤척였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은 무겁고 의욕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출발하기 전에 아이들과 문자를 주고받으니 조금 생기가 돌았다고나 할까. 그런 생기로 힘차게 영광 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김밥을 사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내가 점차 멀어지고 있는데도 김밥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더라. 어쩌겠는가? 그저 점심을..
고창이 제2의 고향이 된 사연 밤새 뒤척였다. 어제 무리하며 걸은 탓에 몸도 쑤시고 발바닥도 욱신거렸다. 몸이 고되니 누우면 바로 잠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더 멀쩡해져서 억지로 자려고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좋은 경험이다. 이제부턴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족욕도 하고 스트레칭도 충분히 한 후에 자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다. 맛난 잠을 자기 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고향 전주에 안주하다 오늘은 고창까지 걸어간다. 전주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오고 대학까지도 다녔던 나에게 고창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다가 2006년에 교생실습을 하면서 한층 가까워진 곳이 됐다. 교생실습을 나갈 학교는 대학교에서 정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정해야 한다. 직..
백 가지도 넘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던 그대에게 한참을 걸어 4시가 되었는데 아직도 ‘영광 9km’라지 않은가. 아직도 2시간 반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는 말씀되시겠다. 이미 몸은 지쳤는데 갈 길이 멀다. 내일 신림에 가기 위해 오늘은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는 도중에 마을이 보이면 마을 회관 같은 곳에서 하루 묵고 갈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 못 간만큼 내일은 고창까지 36km, 거기에 신림까진 4km를 더 가야 한다. 내일 도착지를 이미 마음속으로 정했으니, 오늘 편한 만큼 내일은 그만큼 더 고생하게 될 게 뻔했다. 이거 은근히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라는 식의 일반적인 성공담 같은 뉘앙스의 말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는 뉘앙..
그림 같던 함평을 거닐다 드디어 이튿날 여행을 시작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직 덜 마른 배낭이 걱정이 되고, 눅눅한 신발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게 어딘가. 내가 그림 속에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조금 걷다 보니 날씨는 서서히 개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찌푸려 있었지만 간혹 구름 사이로 햇살이 ‘삐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햇살은 선명한 빛줄기를 대지에 흩뿌리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의 『루앙 대성당』이란 작품을 봤을 때의 경이로움과 비슷한 감정을 자아냈다. 모네의 작품을 보다 보면 형태가 있어서 어떤 상황이든 그 형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닌, 빛에 따라, 산포(散布)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색채와 변..
낯선 천장 그리고 낯선 세계 어제 비를 맞으며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토종단 첫날의 고단함 때문인지 밖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오자마자 거의 실신하듯이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푹 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몸은 피곤한데, 그래서 정신은 흐리멍덩한데도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여관이란 낯선 곳에서 잠을 잔다는 게 무의식 속에선 꽤나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가 보다. 『에반게리온』에 나온 ‘낯선 천장’의 속뜻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문뜩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니 전혀 낯선 천장이 보였고 순간적으로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에반게리온』이란 애니메이션에서 신지는 낯선 곳에서 눈을 뜰 때면 “낯선 천장”이라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 그런 대사를 들을 때면 ..
두려우니 그저 걷는다 무안에 3시 정도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르지만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첫날 여행치고 비바람과 싸우며 온 터라 몸이 쑤셨다. 최대한 걷다가 변두리에 보이는 모텔에 들어갔더니 4만원을 부른다(헐~ 나의 하루 최대 지출액이 4만원이라고 ㅡㅡ;;). 좀 더 깎을 각오였지만 완고했다. 그러면서 팁을 주길 여인숙에선 더 깎아주기도 한다는 거다. 방값 흥정을 통해 활기를 찾다 그때부터 여인숙을 찾으려 다시 왔던 길을 뒤돌아 무안 읍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여’자도 보이지 않더라. 이 동네엔 죄다 ‘모텔’만 있다. 경찰서에 들어가 다짜고짜 “여인숙 위치 좀 알려주세요?”라고 물어봤지만, 그 분들도 자세한 것은 모르던지 ‘어먼 소리’만 탱탱하셨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비효율적인 도보여행을 하는 이유 점심은 11시 30분쯤 먹었다. 길 맞은편에 ‘사랑 기사식당’이 보였다. 기사식당은 기사님들만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곳인 줄만 알았기에, 원래 같으면 다른 곳을 찾았을 거다. 하지만 ‘어느 기사식당이나 반찬은 푸짐하고 맛있다’라고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라는 책에 쓰여 있어서, 익히 알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경험해보기로 했다. 여러분 기사식당에 식사하세요, 그것도 두 번 드세요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아늑했다. 길을 건너느라 신호를 기다리는 수고를 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오천 원이란 가격도 괜찮았고 뷔페라는 사실도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일반 뷔페집처럼 반찬의 가지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먹을 만한 것들만 있었기..
빗속 국토종단의 낭만 배낭에는 방수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입었다. 그래도 불안하니깐 우산까지 들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우산이 필요없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우산을 펴고 있을 수도 없었고 그래봐야 비가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을 접어 배낭에 넣고 우의에 모자만 쓰고 걸었다. 비 속 여행의 즐거움 한비야씨가 위ㆍ아래 각각 한 벌로 된 우의를 입으면 즐거운 빗속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코트 같은 우의를 입었다면 이렇게 많은 비가 올 땐 홀딱 젖어서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옷과 같이 상하의로 나누어진 우의를 입으니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런 날씨를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뚝뚝 떨어지는 비를 온몸..
지금 순간을 누리기의 어려움 오늘과 내일, 많은 비가 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국토종단을 시작하는 날에 많은 비가 온다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었다. 배낭과 신발도 아직 몸에 맞지 않았고 국토종단도 익숙하지 않은데다 비까지 맞으며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겁부터 났다. 보통 때였으면 하루 이틀 연기해서 날씨가 쾌청해진 후에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의 국토종단을 준비하는 자세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아니더라도 한 달 동안 여행을 하는 이상 언젠가 비 내리는 날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기예보를 보며 날짜를 미룰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극한의 상황에서 여행을 해보면 국토종단의 참 맛도 알게 될 거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아무렇지 않게 헤쳐나갈 수 있게 단련될 ..
4월19일, 혁명일에 여행을 시작하다 버스는 목포 시내를 달려 유달산 근처에 도착했다. 불현듯 2005년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목포에 왔던 때가 스치더라. 그때 목포로 오던 길에 두 개의 터널을 지났었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엔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빠져나오고 나니 눈이 새하얗게 내리고 있지 뭔가. 순식간에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 장면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었나 본데 오늘 다시 그 터널을 지나니 4년 전의 기분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더라. 이렇게 다시 경험하니 예전의 추억들이 가슴 아프게 한다. 지금의 새 기억으로 옛 기억들이 덧씌워지길 바랄 뿐이다. 아마 내가 유달산을 가고자 했던 이유도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달산의 천지신명님께 빌다 버스를 타고 목포역에서 내려 한참을 헤매다..
초보 여행자의 어색한 출발 8시 50분에 전주에서 목포로 가는 차가 있는 줄 알고 그 시간에 맞춰 나갔는데 아뿔사~ 9시 26분 차였다.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한 게 아니라 개인 블로그 같은 곳에서 확인한 게 낭패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기다리는 시간조차 즐겁기만 하더라. 이제야 나의 꿈에 한 발 다가가는 거니 말이다. 초보 여행자의 자잘한 실수 기다리다가 차가 왔고 차에 타려고 배낭을 들 때였다. 배낭에 간식부터 지도, 그리고 여벌옷까지 넣다보니 꽉 차서 엄청 무거웠다. 그런 배낭을 조심해서 든 게 아니라 앞에 달린 끈을 쭉 잡아 당겨 들려 했으니,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 줄은 미싱 기계로 단단히 꿰매져 있어 튼튼해 보..
출발 날짜를 하루 미루다 ‘가혹한 운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왠지 로미오 & 쥴리엣이 생각난다. 몸과 맘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만 정작 그러지 못할 때 ‘가혹한 운명’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 운명이 딱 그런 형상이다. 리모델링이 자꾸 발목을 잡다 좋아하는 연인이라도 있는데 가까이 할 수 없어서 그러나 하겠지만, 그런 건 아니다. 하긴 이미 이 글이 여행기 카테고리에 쓰여지고 있으니, 그렇게 착각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짓이겠지만 말이다. 왜 ‘가혹한 운명’이란 말을 쓰냐면 날짜가 또 다시 미뤄져서 그렇다. 원랜 18일, 그러니깐 이번 주 토요일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난 열심히 준비하고 갈 채비를 다 해놨는데 미루어지게 된 거다. 집이 이사가는 일만 아니라면 그냥 떠나..
문제를 종단하다 13일에 떠나기로 결정했고 어머니의 승낙도 받아 놓았다. 하지만 이사 갈 집의 리모델링이 늦춰지면서 상황도 급변했다. 결정할 당시엔 13일에 이사를 갔거나, 적어도 리모델링이 다 마무리되었을 것이라 예측했다. 리모델링할 땐 집에 누군가가 꼭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와 형은 일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내가 있어야만 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다. 지금 현재는 샷시만 설치되었다. 앞으로 페인트도 칠해야 하고, 도배ㆍ장판, 싱크대 설치 등의 여러 가지 일들이 남아있다. 내가 함부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란 이야기다. 단호한 대답은 결국 갈등하는 내 자신을 잡기 위한 것 어머니는 저녁을 먹다가 힘들게 말을 꺼내셨다. “13일에 정말 갈 거냐?” 그 말 속엔 작은..
국토종단의 마음가짐 & 경로를 정하다 어머니와는 잘 이야기가 되었다. 집은 좀 늦게 이사를 가게 되더라도 13일에 국토종단을 가도 좋다고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졌다. 물론 가기 전까지 이사하는데 나의 시간을 모두 쏟기로 했지만. 막상 그렇게 가는 날짜가 정해지고 나니 맘은 바빠졌다. 우선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부터 경로를 정하는 것까지. 드디어 내가 떠나긴 하는가 보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간다고 하니깐 걱정이 앞서긴 한다. 경비가 넉넉지 않을뿐더러, 이런 여행 자체가 처음이니 말이다. 뭐든 새로운 일을 하려 할 땐 걱정 반, 기대 반이듯 딱 그 모양새다. 나를 위한 국토종단, 뭇 생명을 위한 삼보일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신문을 보고 있다가 놀라운 사진을 발견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음이 한없이 ..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의 본질에 관해 우리가 이사 가려던 집이 27일에 빈집이 되었다. 새집이라면 그냥 바로 이사 가면 그만이겠지만 20년이나 된 집이기에 그냥 갈 순 없고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 샷시 설치, 싱크대 설치 등이 일주일 만에 다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정했던 대로 4월 4일에 이사 갈 수 있고 9일엔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리모델링 공사 일정이 늦춰지다 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그리 녹록치 않았다. 공사는 제법 길어질 태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도 언제 갈 지 기약도 없어졌다. 허~걱!! 대략 난감이다. 실컷 큰 맘 먹고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추진해보기도 전에 묻힐 운명에 직면했으니 말이다. Oh! My Head!! 운명이 왜 이리도 기구하단 말인가? 솔직히 떠..
철저히 혼자되기 뜬금없이 현아에게 문자가 왔다. ‘사람이 제일 외로울 때는 좋은 곳에서 좋은 경치를 보면서 혼자 있을 때래. 여행하며 느껴봐^^.’ 이런 문자를 흔히 염장질이라 한다. 갑자기 이 문자를 보낸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뜬금없이 느껴보라는 말은 또 뭔가? 아무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꼬이고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홀로 여행 떠나기 나 홀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왜 하필이면 혼자일까? 직접적으로 말하면 같이 떠나자고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떠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혼자 떠나는 것에 의미부여는 되어 있다. 유정 선배 말마따나 ‘철저히 혼자가 되어 보기’ 위해서다. 선배는 “그렇게만 된다면 우선순위도 정해진단다.”라고 덧붙였다. 지금껏 홀로 지내왔다. 분명히 그랬다. 그..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아마도 발악이었을 듯하다. 이렇게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더 이상 이렇게 살긴 싫다는 발악 말이다. 현실이 답답했던 것일까? 당연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었기에 답답하지 않을 리 없었다. 떠남은 발악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런 외부적인 여건보다 내 자신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답답했던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있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관성에 끌려 마지못해 살아가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거기에 앞뒤가 꽉꽉 막혀 안절부절하는 내 자신이었으니 용케도 이제까지 버텨온 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와 같은 답답함 속에 안주(내팽개쳐 두고)하며 살아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소멸되어 가고 ..
국토종단을 위한 준비물을 갖추다 집이 빠르면 4월 5~6일에 이사를 갈 수도 있단다. 그렇게만 된다면 난 9일에 떠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어머니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종단을 반대하시기 때문에 강하게 말고 나가야만 했다. 삶의 쉼표를 찍을 때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반응 종단을 계획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종단을 하겠다고 꺼냈다. 그런데 이 계획에 대한 반응들도 가지각색이다. 헛생각이라 치부하며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생각 같아선 같이 떠나고 싶은데 혼자서 떠난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드디어 하늘나라에 가실려구 그러냐?”라고 그 특유의 반어적인 표현으로 비꼬았다. 평소 보수적인 생각으로 접점을 찾기 힘들었던 탓인지라 그런 반응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또 다른 친구..
모든 해답은 네 안에 있어 진정한 야인이 되었다. 국토종단을 위해 학원을 그만두었다. 고로 이건 올해의 내 꿈이며 최고의 화두인 셈이다. 어제 유정 선배가 『태백산맥』이란 책을 선물로 주면서 ‘모든 해답은 네 안에 있어’라는 글귀를 써줬다. 어떤 삶의 환경을 맞이했건 간에 그 안에서 긍정적인 것을 뽑아내는 것도 자신이며 부정적인 것을 뽑아내는 것도 자신이다. 다음의 인용된 글을 보면 훨씬 명확해진다. 랍비 아키바(Rabbi Akiva, AD 50~135)가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당나귀와 개와 작은 램프를 갖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 시작하자 아키바는 한 허름한 헛간을 찾아내어 그곳에서 잠자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잠자기에는 이른 시각이어서, 그 램프에 불을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람..
프롤로그② 나만의 색채로, 나만의 계획으로 여행은 세상과 나를 알아가는 공부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신다. 하지만 이미 효 이데올로기나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의 의견을 피력하여 이해시킬 것이다. 김유정 한문학원 원장님이나 구미란 피아노 학원 원장님, 윤양준 교수님은 환영의 뜻을 전해오셨다. 세 분 다 진취적인 삶을 사셔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혼자가 되어 보는 기회를 환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윤교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일장 훈계를 하실까, 아니면 선선히 받아들이실까? 교수님은 그냥 묵묵히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들이셨다. 타인이기에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나의 생..
프롤로그①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국토종단을 맘먹다 도전! 난 여태껏 도전적인 사람이었나? 뭐 예전엔 그런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다지 도전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저 어떻게든 짜인 틀 안에서 만족하며 살기를 바라는 보수주의자의 모습이었다. 그땐 그랬다. 특별히 무얼 해봐야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지금 이 안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인지만 생각했다. 겁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고 특별히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그런 것 같다. 내가 의식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이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고로 변화나 도전은 어떤 다른 삶에 대한 고민 끝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것. 과연 나에게 이런 ‘도전’ 의식을 일깨워 준 계기는..
도보여행 준비법 이하는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에서 발췌함. 기본 장비 신발 ● 하루, 이틀 정도의 짧은 도보여행에는 이미 가지고 있는 신발 중 편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겠지만, 일주일 이상의 장기 도보여행일 때는 걷기에 알맞은 신발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 옷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입듯이 신발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 등산화는 너무 딱딱하고 테니스화나 조깅화는 바닥이 얇아서 아스팔트길을 오래 걸으면 발이 금방 피곤해진다. 도보여행에는 우선 무겁지 않고(신발 무게 1킬로그램이 배낭 무게 5킬로그램에 해당한다). 목이 올라와서 발목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하며, 부드러운 재질로 되어 있어 발의 움직임이 편해야 한다. 또 발뒤꿈치에 쿠션이 있고 바닥이 두꺼워야 충격 흡수가 잘 된다. 시중에 ..
여행이 끝난 그 순간, 다시 시작된다 어제 시험 결과가 나왔다. 예상대로 당연히 떨어졌더라. 이번엔 합격선 주위에도 가보지 못했으니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눈앞이 아찔했다.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그래서 짐을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금요일 저녁에 떠나고 싶은 곳(순천만, 옥정호, 경주)을 알아보긴 했지만, 딱히 마음이 기울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터미널에서 제일 먼저 출발하는 차를 타고 가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왔다. 격포에서의 추억 12시가 좀 안 되어 터미널에 도착했고 시간표를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격포’가 눈에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바다가 보고 싶어 어떻게든 바다로 나갈 궁리만 했었다. 바로 바다로 가는 차가 있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
목차 1. 우연 따라 1년 만에 초평으로 남부시장에서 보는 우리네 일상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내가 가는 까닭 2.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추억에 머문다는 것의 의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이분법에 대해 3. 전주에서 초평까지 가기의 어려움 청주터미널에서 초평저수지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도움의 손길들이 이르러 온다 4. 드래그 레이싱과 열정 누구에게나 각자의 세계가 있다 불광불급의 삶의 자세 5. 이제 나도 좀 변해볼까? 이제 나도 좀 심어볼까 이제 나도 변해볼까의 함의 6. 도시와는 다른 흥미로운 시골문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노동 후엔 모든 음식이 천상의 음식이 된다 7. 초평저수지에 담긴 우리네 이야기 막내가 마을 구경을 시켜주다 초평저수..
8. 초평에서 개인 추억 하나 좌대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다른 좌대를 청소하러 가셨고 나와 민지만 남았다. 좌대는 저수지 위에 떠있는 단독주택이라 보면 되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제부턴 좌대의 구조를 살펴볼까? ▲ 초평저수지는 굽이굽이에 있어 제대로 보기 위해선 하늘에서 봐야 하고, 둘러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초평저수지에 추억 하나 새기고 오다 처음엔 그저 물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네 개의 쇠파이프로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수의 흐름에 따라 결국 흐르고 흘러 모든 좌대들이 한 군데에 모인다고 알려주신다. 좌대에 올라서면 지붕으로 막혀진 방 한 채, 그리고 그 앞엔 쇼파 두 개가 놓여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미닫..
7. 초평저수지에 담긴 우리네 이야기 이장님네엔 4명의 자녀들이 있다. 첫째부터 셋째까진 20대의 나이대로 고만고만하지만, 막둥이인 민지는 10살 정도의 터울이 있다. 늦둥이이자, 이 집안의 보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작년에 국토종단 중에 이곳에서 2박 3일을 머물며 민지와 나름 꽤나 친해졌었다. 막내가 마을 구경을 시켜주다 그래서 일 년 만에 다시 보지만 이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되려 “누구세요?”라고 말하더라. 그 반응이 무안하고도 당황스러웠다. 어찌 보면 작년에 한 번만 봤던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라고나 해야 하려나. 그런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장난을 걸었다. 과자를 먹고 있었기에 과자를 달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과자가 먹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