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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수많은 고원으로 이루어진 텍스트 『열하일기』는 수많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사실 시작도 끝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도에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 읽어도 무관하게 각각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또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연암협에서 다시 메모지를 들고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연암 자신의 윤색도 적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리하다가 만 경우도 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온 지 오래되어 당시를 회상하노라면 감감하기는 아침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아득하기는 마치 새벽 꿈결의 넋 빠진 상태 같다. 그래서 남북의 방위가 바뀌기도 하고 이름과 실물이 바뀌기도 하였다. 余旣自中國還, 每思過境, 愔愔如朝霞纈眼, 窅窅如曉夢斂魂. ..
5장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벅찬 텍스트 측근 관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바람은 마침내 그 진앙지로 『열하일기』를 찾아낸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과정록過庭錄』 2권).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
연암체의 실체 그럼 과연 연암체란 어떤 것일까.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암의 문장에 대해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없는 ‘리좀(rhizome)’ 같은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리좀은 덩이줄기라는 뜻으로, 수목(樹木)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이 수목이라면, 리좀은 뿌리라는 중심이 없을 뿐 아니라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는 특성을 지닌다. 연암의 문체적 특이성을 이 개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흔히 연암의 문장론에 대해 다음의 글을 주목한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 하늘과 땅..
4장 ‘연암체’ 소문의 회오리 물론 고문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국왕이 나서서 치른 공공연한 대결의 장이었다 치더라도, 미시적 차원에서의 충돌 또한 그 못지 않았다. 처남 이재성이 쓴 연암의 제문에는 그런 정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病世爲文 痴矜自古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麤疏是襲 漓餲不吐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自附純質 乃極冗腐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公所醫俗 反招嗔怒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如人病胃, 色難濃旨, 如目羞明, 惡..
작은 것들의 향연 이처럼 이덕무(李德懋)나 이옥(李鈺)의 문장들은 짧은 건 두세 줄, 길어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소품들이지만, 중세적 사유의 뇌관을 터뜨릴 만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투성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문의 틀에서 벗어나 눈부신 생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아이, 여성, 예인(藝人) 등 ‘소수적인’ 존재들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처럼 한편으론 기존의 중심적 가치를 전복해버리고, 다른 한편으론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즉 중세적 표상 외부에 있는 사물들을 문득 솟구치게 하는 것이 바로 소품의 위력이다. 그런 점에서 소품문은 ‘잃어버린 사건들’, ‘봉쇄되었던 목소리들’이 각축하는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품은 길이가 짧다는 것뿐 ..
이옥과 이덕무 작품으로 본 소품체의 특이성 그 가운데서도 대표주자라면, 단연 이옥(李鈺)과 이덕무(李德懋)가 ‘일순위’로 꼽힐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뒤쪽은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깔깔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째서 어두워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선귤당농소』 小孩兒窺鏡, 啞然而笑, 明知透底. 而然急看鏡背, 背黝矣. 又啞然而笑, 不問其何明何暗. 妙哉無礙, 堪爲師. 문인이나 시인이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시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구치고, 읊조리는 눈동자에 물결이 일어난다.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향기가 일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
3장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소품문의 정의와 특징 我見世人之 譽人文章者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文必擬兩漢 詩則盛唐也 문은 꼭 양한(兩漢)을 본떴다 하고 시(詩)는 꼭 성당(盛唐)을 본떴다 하네 曰似已非眞 漢唐豈有且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한당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중략) 我亦聞此譽 初聞面欲剮 내 또한 이와 같은 기림을 듣고 갓 들을 땐 낯가죽이 에이는 듯싶더니 再聞還絶倒 數日酸腰髁 두번째 듣고 나니 도리어 포복절도 여러 날 허리 무릎 시큰하였다네 盛傳益無味 還似蠟札飷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흥미 없어 밀 조각을 씹은 듯이 도리어 맛이 없더군 연암이 지은 「좌소산인에게 주다(증좌소산인, 贈左蘇山人)」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양한은 사마천(司馬遷)..
소품과 소설과 고증학 그런데 이 견고한 장치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말청초의 문집이 유입되면서 고문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소품문(小品文), 소설(小說), 고증학(考證學)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 일찍이 소품의 해는 사학(邪學)보다 심하다 했으나 사람들은 정말 그런지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 전의 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사학을 물리쳐야 하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소품이란 문묵(文墨) 필연(筆硯) 사이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소하고 식견이 천박하며 재예가 있는 자들은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므로 서로 다투어 모방하여 어느 틈엔가 음성(淫聲) 사색(邪色)이 사람의 심술을 고혹시키게 되는 것이..
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들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反正)’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 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와 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권력 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통치자였다. 184권 100책에 이르는 개인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단적인 증거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섭렵 및 주도면밀한 주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뿐더러, 왕실 아카데미인 규..
희생자 이옥과 문체반정의 결과 정조의 이런 공세적 조처에 대해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의 상소가 올려졌다. 소론 출신인 그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남인의 서학까지 문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즉, 그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과 이가환(李家煥)을 겨냥하면서, 남인들의 학문 또한 대부분 이단사설이고 문장 역시 패사소품을 숭상할 뿐이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뜻밖에도(혹시나 했더니 이번에도 역시!) 정조는 이가환이 ‘초아의 신세’로 불쌍하게 자라서 그런 거라고 감싸주면서 이동직의 상소를 기각했다. 서학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계속 패사소품에 묶어놓음으로써 노론 벌열층을 길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남인과 노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이..
문체 전향서 그러던 중 급기야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그 신앙의 강도가 한층 고조된 것이다. 두 장본인을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불사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 종결되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때문일까? 이번에도 명청문집을 걸고 넘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회적인 엄포로 넘어가지 않았다. 10월 19일 서곡이 울린 이후 문체를 둘러싼 소용돌이가 권력의 한복판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이 시기를 전후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반정의 총지휘자 정조는 서적 수입금지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한편,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과 대사성(大司成)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하는 정책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까지 모두 수입금지 조처가 내려진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패관잡기란 ‘시중에 떠도는 까끄라기 같은 글’이란 뜻으로, 소설, 소품, 기타 잡다한 에세이류가 거기에 해당된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하는 글들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패관잡기는 그렇다치고, 경전과 역사서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건 사대부들이 일생 연마해야 할 지식의 보고(寶庫) 아닌가? 그 명분이 참 희한하..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영조, 정조가 이끌었던 18세기는 조선사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새로운 기운이 만개했었다. 그것이 두 왕의 영도력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할 터이지만, 어쨌든 18세기는 천재들이 각축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장이었다. 19세기는 그와 달라서 모순과 갈등은 폭발하였지만 한없이 메마르고 노쇠한 징후가 두드러진다. 안동김씨 세력이 세도를 잡으면서 시파(時派)에 대한 벽파(僻派)의 공격이 시작되고,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이 벌어지면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18세기를 특이한 연대로 만드는 데 있어 연암은 독보적 위상을 점한다. 연암이 없는 18세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19세기가 되면서 연암..
높고 쓸쓸하게 연암은 쉰을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 감역,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낸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그럴 리가! 사실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더욱 쓸쓸하다. 체질에 맞지도 않는 직장생활(?)을 하고, 그 좋아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다고 그의 만년이 궁상맞은 건 결코 아니다. 가난이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비록 외부자로 떠돌았지만 마음가는 대로 살았으니 가슴속에 새삼 울울함이나 회한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쓸쓸하면서도 여유롭다. 그 시절의 주요장면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안의현감 시절 낮잠을 자다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과일, 포..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연암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지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최근에야 한 젊은 연암연구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듣고 보니 참 신기했다. 아니, 그 사실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나를 포함하여)이 더 이상했다. 이런 대가한테 묘지명이 없다니. 권력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용한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명망에 질려 감히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원인이 뭐든 ‘묘지명의 부재 혹은 실종(?)’은 연암의 일대기 속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미스터리 목록에 추가될 항목임에 틀림없다. 주지하듯이, 연암은 묘지명의 달인이다. 그가 쓴 묘지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명문장들이다. 어..
소문의 회오리 연암은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3년여에 걸쳐 『열하일기』를 퇴고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초고가 나돌아 문인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여기 『열하일기』를 말할 때면 언제나 따라다니는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뛰어난 문인이자 고위관료였던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에 실린 삽화. 내 일찍이 연암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에 모였을 적에, 이덕무와 박제가(朴齊家)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과 차수(次修) 박제가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이제부터 고문이 진흥되지 않..
웬 열하?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전의 중국 기행문은 모두 연기(燕記),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린다. 유독 박지원의 것만이 『열하일기』라는 좀 괴상한(?) 이름을 갖고 있다. 왜 연행록이 아니고 『열하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열하? 그러고 보면 이 이름은 또 얼마나 낯선지. 중국기행이 국내여행보다 흔해빠진 요즘에도 열하를 여행 코스로 삼는 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열하는 여전히 낯설고도 이질적인 공간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열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하계별궁의 소재지로,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하북성 동북부, 난하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이 무열하 연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마침내 중원으로! 「회우기(會友記)」를 보냅니다. 제가 평상시 중원을 대단히 흠모해왔지만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미친 사람이 되어 밥을 앞에 두고서는 수저 드는 것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서는 얼굴 씻는 것을 잊을 지경입니다. 아아! 정녕 이곳이 어느 땅이란 말입니까? 그 땅이 조선 땅일까요? 제가 보니 절강이고 서호입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활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里數)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浩浩蕩蕩)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며 수천 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중원의 존재를 알 수 있..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 연암은 타고난 ‘집시(vagabond)’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로, 서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과거를 포기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유람 말고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1765년 가을 금강산 유람 때의 일이다. 유언호와 신광온(申光蘊)이 나란히 말을 타고 와 금강산 유람을 제의하자, 연암은 부모님께서 계시니 마음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두 친구가 먼저 떠난 뒤, 연암의 조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게 좋다[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고 허락했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한 지인이 들렀다 나귀 살 돈..
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이탁오(李卓吾), 연암 ——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우정의 철학자’, 20대의 맑스가 박사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옮김)에서 재조명한 에피쿠로스는 ‘우정의 정원’으로 유명하고,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적 초월론을 전복한 스피노자 역시 우정과 연대를 윤리적 테제로 제시한 바 있다. 명말 양명좌파(左派)의 기수였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며 배움과 우정의 일치를 설파한 중세 철학의 이단자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연암에게 있어서도 ..
‘연암그룹’ 아버지(연암)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과정록(過庭錄)』 4권에 나오는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암의 일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
분열자 청년기의 우울증을 거쳐 30대, 젊음의 뒤안길을 통과하면서 연암은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을 보면, 연암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려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에 대한 염증이 그 원인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선뜻 납득되지는 않는다. 소인배 없는 시절이 어디 있었으며, 당파 싸움 또한 어제오늘 일이 아닌 바에야, 그 정도로 아예 ‘초연히 세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면 좀 지나친 결벽증 아닌가. 좀더 무게가 실리는 건 정국(政局)에 대한 심각한 회의다.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처숙(妻叔) 이양천이, 영의정에 소론계 인물이 임명된 조치에 항의하다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고, 또 벗 이희천(李羲天)이 왕실을..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미스터리(mistery) 從古文章恨橘鰣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 법 幾人看見燕岩詩 연암시를 본 이 몇이나 될까? 曇花一現龍圖笑 우담바라꽃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正是先生覔句時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 쓸 때라네 이 시는 ‘연암그룹’의 일원인 박제가(朴齊家)의 「연암이 율시를 지은 걸 축하하며(하연암작율시賀燕岩作律詩)」라는 시이다. 3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이름을 날리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包靑天), 본명은 포증(包拯), 송나라 때 유명한 판관이다. 한때 「포청천」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그런데 박제가는 연암의 시짓기를 우담바..
‘마이너리그’ 『방경각외전』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명의를 찾아 몸을 의탁하거나 약이나 침, 혹은 특별한 양생술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곳을 찾아 요양을 하거나.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택한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글로 옮기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그렇다 치고, 글의 소재들이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이라는 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현자의 지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다니. 이런 발상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내막을 좀더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가 「민옹전..
우울증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에서 박사유(朴師愈)와 함평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뒷날 집안 사람이 어느 북경의 점쟁이에게 그의 사주를 물었더니, “이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에 속한다.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此命磨蝎宮, 韓昌黎ㆍ蘇文忠以此故窮, 班ㆍ馬文章, 無事致謗](『과정록過庭錄』 1권).”고 했다나. 소급해서 적용해보자면, 이 사주풀이는 비교적 적중한 편이다. 한유와 소식, 반고와 사마천에 견줄 만한 불후의 문장가가 되었고, 명성에 비례하여(?) 갖은 구설수와 비난에 시달렸으니. 그의 집..
태양인 그와 관련해 『과정록過庭錄』 4권에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만년에 면천군수를 지내던 시절, 성 동문에 올라 “앞이 훤히 트여 가슴속의 찌꺼기를 씻어낼 만하구나[眼界稍豁, 可以盪胸]”하며, 밤늦도록 달구경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날 밤 귀신이 그 동리의 한 여자에게 들러붙었다. 귀신이 그 여자를 통해 말하기를, “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 오자 그 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군수가 동문에 와서 달을 구경하니 나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한테 붙어 살아야겠다[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고 했다. 발광하여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인을 남편이 붙들어다 관아 문밖에 데려다 놓았는데..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장 젊은 날의 초상 신체적 특징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 원제는 『과정록過庭錄』)에는 대략 이런 인상을 풍기는 한 선비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1부 전체의 내용은 이 책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힌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략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 그림 역시 ‘연암다운’(?) 분위기를 선명하게 포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연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본다면, 그저 절의가 곧고 기상이 드높은 유학자 정도로 기억할 터이다. 그러나 마음을 크게 먹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연암의 신체적 특징 몇 가지가 감지되기는 한다. ‘훤..
유목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인용되면서 널리 회자된 구절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
편력(遍歷) 나는 편력을 좋아한다. 20대 시절, 내 사주에는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있다고 어떤 얼치기 점쟁이가 말한 적이 있다. 그걸 들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이후의 내 삶의 여정을 보면 편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라?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의(偏倚) 이른바 ‘클리나멘(clinamen)’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의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
PROLOGUE 여행ㆍ편력ㆍ유목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맹’ 혹은 ‘공간치’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방향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웬만큼 멋진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기념비를 봐서는 도통 감동을 받지 않는 쿨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간지각력이 제로에 가까운 편인데, 거기다 남한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함백 탄광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여행이란 늘 기차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것이었을 뿐, 이국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 변화무쌍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아쉬워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개정신판을 내며 초판을 낸 지 꼭 10년이 흘렀다. 초판이 나오던 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는 바람에 몹시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4월 하순, 연구실 후배 몇 명과 연암이 갔던 길을 따라 요동벌판에서 북경을 거쳐 열하로 이어지는 코스를 다녀왔다. 요동에선 천지를 뒤흔드는 모래바람을 만났고, 북경에선 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든 ‘사스와의 전쟁’을 목격했다. 그 체험을 『문화일보』에 연재했는데, 그 여행기가 부록으로 첨가되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2012년 여름, 이번엔 OBS팀과 함께 ‘신열하일기’ 다큐 촬영을 위해 다시 한번 연암의 여정을 고스란히 되밟게 되었다. 사스도, 황사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배를 타고 단동에서 출발했다. 덕분에 전혀 다른 중국, 아주 낯선 열하를..
초판 머리말 하나 나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90퍼센트의 실패를 겪은 뒤에야 10퍼센트의 성취를 이루는 둔재의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지닌 원초적 ‘싸늘함’이 체질에 안 맞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이념보단 체질을 더 중시한다. 체질이 훨씬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은 천재다. 내 지적 범위 내에서는 그 견줄 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매혹시켰다. 다름아닌 그의 유머 때문이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슴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천재인데도 가슴이 따뜻한, 천지간에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천재 가운데 그처럼 유머를 잘 구사한 인물은 없으리..
열하일기(熱河日記) 목차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1. 도강록(渡江錄)6월 24일에서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지나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渡江錄序六月二十四日辛未二十五日壬申二十六日癸酉二十七日甲戌二十八日乙亥二十九日丙子七月初一日丁丑初二日戊寅初三日己卯初四日庚辰初五日辛巳初六日壬午初七日癸未初八日甲申初九日乙酉舊遼東記遼東白塔記關帝廟記廣祐寺記 2. 성경잡지(盛京雜識)7월 10일에서 14일까지,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 동안의 기록 秋七月初十日丙戌十一日丁亥粟齋筆談商樓筆談十二日戊子古董錄 十三日己丑十四日庚寅盛京伽藍記山川記略 3. 일신수필(馹汛隨筆)7월 15일에서 23일까지.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9일간의 기록 馹汛隨筆序秋七月十五日辛卯北鎭廟記車制戱臺市肆店舍橋梁十六日壬辰十..
27. 앙엽기(盎葉記) 盎葉記序 皇城外內閭閻廛舖之間 所有寺刹宮觀 不特天子勅建 皆諸王駙馬及滿漢大臣所捨第宅 且富商大賈 必刱一廟堂 以資冥佑 與天子競其奢麗 故天子不必更事土木 別置離宮 以奢天子之都也 自皇明正統天順間 發帑所造者二百餘區 而比年所刱 多在內 外人不得見 獨我使至 則有時引納 恣其縱觀 然余所遊歷 僅百分之一 或爲我譯所操切 或爭難門者 方入其中 則顧影怱怱 惟日不足 而建置掌故 非攷碑刻 無以知何代何寺 纔讀一碑 輒移數晷 貝闕琳宮 隙駟灘船 是以五官幷勞 四友俱瘁 恒如夢讀籙書 眼纈海蜃 顚倒依稀 名蹟多錯 歸拾小錄 或紙如蝶翅 字如蠅頭 皆百忙閱碑所潦草也 遂編爲盎葉小記 盎葉者 倣古人書柹葉 投盎中 集而爲錄 弘仁寺 弘仁寺最後一殿 有觀音變相 千手千目 手各有執像 後所懸大障畵 大海濤瀧 虛舟出沒 而海天雲氣騰騰 化爲卿霱瑞曇 中有金冠玉帶扶擁小兒者..
알성퇴술(謁聖退述) 順天府學 皇城東北隅柴市 對樹兩坊曰育賢 兩坊之中 爲順天府學 入欞星門 門內鑿池如半月 是爲泮水 爲三空橋 欄以白石 橋之北 有三門 中曰大成 左金聲 右玉振 聖殿外扁曰先師廟 內題曰萬世師表 康煕皇帝書也 位牌題至聖先師孔子之位 四配曰 復聖顔子 述聖子思之位 在東 宗聖曾子 亞聖孟子之位 在西 兩廡之間 多古栢樹 世傳許魯齋衡手植 或云耶律楚材所植 明倫堂在聖殿之東 啓聖祠在明倫堂之北 奎文閣在明倫堂之東北 文丞相祠在明倫堂之東南 中門之外 左爲名宦祠 右爲鄕賢祠 府學 故報恩寺也 元至正末 有遊僧募緣湘潭以造寺 未及安像 而明師下燕 戒士卒毋得入孔子廟 僧蒼黃借宣聖木主 置殿中 後不敢去 遂爲北平府學 遷都北京 則爲順天府學云 太學 皇城東北隅坊曰崇敎 西牌樓街曰成賢 牌樓內皆書國子監 永樂二年成左廟右學 宣德四年八月修大成殿前兩廡 先是 太學因元之陋 吏..
25. 황도기략(黃圖紀略) 皇城九門 皇城周四十里 若棊局然 九門正南曰正陽 東南曰崇文 西南曰宣武 正東曰朝陽 東北曰東直 正西曰阜成 西北曰西直 北西曰德勝 北東曰定安 皇城之內 爲紫禁城 周十七里 紅墻覆黃琉璃瓦 門西北曰地安 南曰天安 東曰東安 西曰西安 紫禁城之內爲宮城 正南曰太淸門 第二卽紫禁城之天安門 第三曰端門 第四曰午門 第五曰太和門 後門曰乾淸 乾淸之北曰神武 東曰東華 西曰西華 皇城九門樓 皆三檐 皆有瓮城 瓮城皆有二層敵樓鐵裹門關 與城門相直 而左右皆有便門 正南一面爲外城 有七門 制同九門 正南曰永定 南左曰左安 南右曰右安 東曰廣渠 西曰廣寧 廣渠之東隅曰東便 廣寧之西隅曰西便 地安門外爲鼓樓 鼓樓之北 爲鍾樓 角樓 六水關 三城壕 發源玉泉山 經高梁橋 河分兩支 一循城北轉東折而南 一循城西轉南折而東 入紫禁城 爲太液池 繞出九門 經九牐滙 至大通橋 而..
24. 구외이문(口外異聞) 盤羊 盤羊 鹿身細尾 兩角盤 背上有蹙文 夜則懸角木上以防患 狀若騾 群行 暑天塵露相團 角上生草 或曰麢羊 或曰羱羊 說文麢大羊而細角 陸佃埤雅 羱羊 似吳羊而大 今萬壽節 蒙古來獻 皇帝以供班禪 彩鷂蝴蝶 康煕四十年 帝避暑口外 喇里達番頭人 進彩鷂一架 靑翅蝴蝶一雙 鷂能擒虎 蝶能捕鳥 見王貽上香祖筆記 高麗珠 中國人寶東珠 以爲高麗珠 色淡白如硨磲 今帽前簷端嵌安一箇 以表南北 東珠八分已上爲寶 皇帝有東珠七錢重 爲鎭夢魘寶 皇后東珠六錢四分重 形如白茄子 乾隆三十年 皇后失東珠 回后讒 皇后搜得東珠鑾儀衛卒家 后遂廢幽之冷宮 貴州按察使奇豐額帽簷東珠 色殊不佳 奇言珠六七釐 價銀四十兩 余言珠非土產 或有食蛤得之牙頰間 謂之陸珠 瑣細不足珍 婦女簪珥所粧 皆倭珠 有紅光可寶 奇按察笑曰 否也 這是蠣房磨圓 非珠也 所寶東珠者 無貝氣 自有天然寶光..
23. 산장잡기(山莊雜記) 옛 전쟁터의 분위기가 지금도 감도는 고북구를 밤에 나오며 夜出古北口記 고북구의 지리적 특성 自燕京至熱河也, 道昌平則西北出居庸關, 道密雲則東北出古北口. 自古北口循長城, 東至山海關七百里, 西至居庸關二百八十里, 中居庸山海而爲長城險要之地, 莫如古北口. 蒙古之出入常爲其咽喉, 則設重關以制其阨塞焉. 기록에 나타난 고북구 羅壁「識遺」曰: “燕北百里外, 有居庸關, 關東二百里外, 有虎北口, 虎北口, 卽古北口也.” 自唐始名古北口, 中原人語長城外, 皆稱口外, 口外皆唐時奚王牙帳. 按『金史』, 國言稱留斡嶺, 乃古北口也, 葢環長城稱口者, 以百計. 緣山爲城而其絶壑深磵, 呿呀★穴+坎陷, 水所衝穿則不能城而設亭鄣. 皇明洪武時, 立守禦千戶所, 關五重 고북구를 지나는 감정을 적다 余循霧靈山, 舟渡廣硎河, 夜出古北口..
22. 환희기(幻戱記) 幻戲記序 朝日過光被四表牌樓 樓下萬人簇圍 市笑動地 驀然見鬪死橫道者 蔽扇促步而過 從者後 俄而追呼有怪事可觀 余遙問謂何 從者曰 有人偸桃天上 爲守者所擊 塌然落地 余叱爲怪駭 不顧而去 明日又行其地 葢天下奇伎淫巧雜劇 皆趁千秋節 待詔熱河 日就牌樓 演較百戱 始知昨日從者所見 乃幻術之一也 葢自上世有此能 役使小鬼 眩人之目 故謂之幻也 夏之時 劉累擾龍以豢孔甲 周穆王時 有偃師者墨翟君子也 能飛木鳶 後世如左慈費長房之徒 皆挾此術以游戱人間 而燕齊迂怪之士 談神仙以誑惑世主者 皆幻術 當時未之能覺 意者其術出自西域 故鳩羅摩什佛圖澄達摩 尤其善幻者歟 或曰 售此術以資生 自在於王法之外而不見誅絶何也 余曰 所以見中土之大也 能恢恢焉並育 故不爲治道之病 若天子挈挈然與此等較三尺 窮追深究 則乃反隱約於幽僻罕覩之地 時出而衒耀之 其爲天下患大矣 故日令..
21. 금료소초(金蓼小抄) 金蓼小抄序 吾東醫方未博 藥料不廣 率皆資之中國 常患非眞 以未博之醫命 非眞之藥 宜其病之不效也 余在漠北 問大理尹卿嘉銓曰 近世醫書中 新有經驗方 可以購去者乎 尹卿曰 近世和國所刻小兒經驗方 最佳 此出西南海中荷蘭院 又西洋收露方極精 然試之多不效 大約四方風氣各異 古今人禀質不同 循方診藥 又何異趙括之談兵乎 正績金陵瑣事 亦多錄入 近世經驗 又有蓼洲漫錄 又苕翡草木注 橘翁草史略 寒溪胎敎 靈樞外經 金石同異考 岐伯侯鯖醫學紺珠 百華精英 小兒診治方 俱近世扁倉所錄 京師書肆中 俱可有之 余旣還燕 求荷蘭小兒方及西洋收露方 俱不得 其他諸書 或有粤中刻本云 書肆中俱不識名目 偶閱香祖筆記 得其所錄 金陵瑣事及蓼洲漫錄 其元書 未必皆醫方 而貽上所錄 俱係經驗 余故拈其數十則錄之 餘外誌記及古方雜錄之載筆記中者 倂爲抄錄 目之曰金蓼小抄 余山中無醫..
20. 행재잡록(行在雜錄) 行在雜錄序 嗚呼 皇明 吾上國也 上國之於屬邦 其錫賚之物 雖微如絲毫 若隕自天 榮動一域 慶流萬世 而其奉溫諭 雖數行之札 高若雲漢 驚若雷霆 感若時雨 何也 上國也 何爲上國 曰中華也 吾先王列朝之所受命也 故其所都燕京曰京師 其巡幸之所曰行在 我效土物之儀曰職貢 其語當宁曰天子 其朝廷曰天朝 陪臣之在庭曰朝天 行人之出我疆塲曰天使 屬邦之婦人孺子語上國 莫不稱天而尊之者 四百年猶一日 葢吾明室之恩 不可忘也 昔倭人覆我疆域 我神宗皇帝提天下之師東援之 竭帑銀以供師旅 復我三都 還我八路 我祖宗無國而有國 我百姓得免雕題卉服之俗 恩在肌髓 萬世永賴 皆吾上國之恩也 今淸按明之舊 臣一四海 所以加惠我國者 亦累葉矣 金非土產則蠲之 綵馬衰小則免之 米苧紙席之幣 世減其數 而比年以來 凡可以出勅者 必令順付以除迎送之弊 今我使之入熱河也 特遣軍機近臣道迎之..
19. 옥갑야화(玉匣夜話) 1. 行還至玉匣 與諸裨連牀夜語 燕京舊時風俗淳厚 譯輩雖萬金能相假貸 今則彼以欺詐爲能事 而其曲未嘗不先自我人始也 三十年前 有一譯空手入燕 將還 對其主顧而泣 主顧怪而問之 對曰 渡江時潛挾他人銀 事發 倂已包沒于官 今空手還 無以爲生 不如無還 拔刀欲自殺 主顧驚急抱持 奪刀問曰 所沒銀幾何 曰 三千兩 主顧慰曰 大丈夫獨患無身 何患無銀 今死不還 將如妻子何 吾貸君萬金 五年貨殖 可復得萬金 以本銀償我 譯旣得萬金 遂大貿而還 當時未有識之者 莫不神其才 五年中遂致鉅富 乃自削籍譯院 不復入燕 久之 密囑其所親之入燕者曰 燕市若遇某主顧 當問安否 須道闔家遘癘死 所親以說謊頗難之 譯曰 第如此而還 當奉君百金 旣入燕 果遇某主顧 問譯安否 俱對如所受囑 主顧掩面大慟 泣如雨下曰 天乎天乎 何降禍善人之家 若是之慘耶 遂以百金托之曰 彼妻子俱亡無主者..
18. 동란섭필(銅蘭涉筆) 銅蘭涉筆序 余訪兪黃圃世琦 硯北置文石硯屛 屛前有蘭一本 諦視則銅鑄也 鳳眼迎風 紫穎汎露 眞奇造也 余爲借數日 丌之所寓東壁下 扁之曰銅蘭齋 1 乾隆四十一年丙申 琉球使臣呈文禮部求去 具呈琉球國正使耳目官向崇猷 都通事毛景昌 爲乞順夷情早賜遣歸事 崇猷等奉王命 恭逢乾隆三十九年 知貢典蒙福建撫昌給發兵牌 勘令沿路護送前來 近於上年十二月初一日 抵京 恩準隨班行禮 及朝賀元朝令節 則小邦末員 得近天顔 加以賞給廩餼 猷等感激無地 玆公務已竣 空閒守居 琉球地屬海外 往來全憑風貺 此時回閩回國 正値其候 但猷等來京時 逢隆冬 河凍結冰 不得不由王家營 一直起旱而來 現今返棹 時値仲春 風和地暖 正可起程 含情叩懇 大人仰體皇上撫綏至意 俯鑒遠人 體照前例恩準 由旱而至濟寧 登舟而歸 理應預先呈明大人臺下 迅賜奏請 勅書倂關兵部塡給 勘合恩賜 於二月初內 猷..
17. 양매시화(楊梅詩話) 楊梅詩話序 찾아 치기 兪黃圃 世琦 琉璃廠 丹砂印重鏡箋勻 隔歲朝鮮拜表頻 不信狼毫窮島筆 蠅頭慣搨衛夫人 楊梅詩話 中州人選入吾東詞章 類爲潤色删截 只摘其名句 譬如焚榛莾而嘉木自列 匿瑕掩類務趁佳境 而東累俗安摘人鉤章棘句 或弄題戱作之出於一時談謔之餘 未安其人之所記有而安爲傳播 叱名責姓瑕斥崢嶸 或有以此掩其平生 良可歡惜 余於王士禛所編感舊集中 其選淸陰詩多所改截 吾故詳錄之
16. 피서록(避暑錄) 避暑錄序 避暑錄者 余遊避暑山莊所錄也 熱河有三十六景 康煕逐景置殿閣 一曰烟波致爽 一曰芝逕雲隄 一曰无暑淸凉 一曰延薰山舘 一曰水芳巖秀 一曰萬壑松風 一曰松鶴淸越 一曰雲山勝地 一曰四面雲山 一曰北枕雙峯 一曰西嶺晨霞 一曰錘峯落照 一曰南山積雪 一曰梨花伴月 一曰曲水荷香 一曰風泉淸聽 一曰濠濮閒想 一曰天宇咸暢 一曰煖溜暄波 一曰泉源石壁 一曰靑楓綠嶼 一曰鶯囀喬木 一曰香遠益淸 一曰金蓮映日 一曰遠近泉聲 一曰雲帆月舫 一曰芳渚臨流 一曰雲容水熊 一曰澄泉遶石 一曰澄波疊翠 一曰石磯觀魚 一曰鏡水雲岑 一曰雙湖夾鏡 一曰長虹飮練 一曰甫田叢樾 一曰水流雲在 統名所居 曰避暑山莊 康煕自爲記曰 金山發脉 暖溜分泉 雲壑渟泓 石潭靑靄 境廣草肥 無傷田廬之害 風淸夏爽 宜人調養之方 朕數巡江干 深知南方之秀麗 兩幸秦隴 益明西土之殫陳 北過龍沙 東游長..
15. 황교문답(黃敎問答) 黃敎問答序 入他邦者 曰我善覘敵 曰我善觀風 吾必不信矣 入人之國 安有執塗之人 而遽有所詢訪哉 此一不可也 言語相殊 造次之間 無以達辭 二不可也 中外旣異 自有形迹之嫌 三不可也 語淺則無以得情 語深則恐觸忌諱 四不可也 問所不問 則跡涉窺偵 五不可也 不在其位 不謀其政 此居其國之道也 况他國乎 問其大禁 然後敢入 居他國之道也 况大國乎 此其不可者六也 况其將相賢否 風俗淑慝 滿漢用舍 皇明故實 尤不可問 非但此不可問 所不敢也 彼不宜答 亦所不敢也 至如錢糓甲兵山川形勝 似無甚關係 而非但此不宜言 彼必疑怪 何者 錢穀關虛實 甲兵係强弱 山川形勝 有關阨險要之勢 此所以不宜問答也 彼古人者 常得之言語問答之外 如橋梁更皷執玉高卑 有所占矣 如陳詩閱樂市價貴賤有所徵矣 旣無古人之識慧才智 而徒欲得之於毫墨立談之間者 其亦難矣 又况四海廣大 不見涯涘..
14. 반선시말(班禪始末) 1. 班禪額尒德尼 西番烏斯藏大寶法王 西番在四川雲南徼外 烏斯藏 葢在靑海之西 經唐吐蕃故地 去湟中五千餘里 或曰 班禪 乃藏理佛 所謂三藏 乃其地也 班禪額尒德尼 番語猶云光明神智法僧 自言其前身巴思八 其言多誕恠不經 然道術高明 時有徵驗云 葢巴思八者 土波女子曉出汲 見尺帕浮水 携取爲佩 久之漸化爲凝脂有異香 食而甘美 遂有人道之感 生巴思八 生卽神聖 元世祖在沙漠 聞其幼能誦楞伽諸經至萬卷 遣使迎之 慧旨圓朗 法身全香 步合天神 音中鍾呂 帝大悅如見如來 當時姚史諸賢 皆自以不及也 2. 能諧聲 造蒙古新字 頒示天下 賜號大寶法王 乃佛之尊號 非有土王爵 葢法王之號始此 及歿 賜號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大元帝師 後有請繖壓魔之戱 發卒數萬 皆紈袴繡袍 車騎幡寶葢 皆飾以金珠寶玉 錦繡綾綵 圍列皇城 游歷四門 復導以蕃漢細樂 迎繖入宮 謂..
13. 찰십륜포(札什倫布) 1. 見班禪額爾德尼於札什倫布 札什倫布者 西番語猶言大僧居也 自避暑山莊 循宮城 右望盤捶山 益北行十餘里 渡熱河 依山爲苑 鑿岡斲麓 呈露山骨 自爲裂崖斷壁 磊砢錯落 狀十洲三山 獸呀禽翹 雲崩雷鬱 有五空橋 自橋道皆墄 其平皆刻龍鳳 緣道白石欄 曲折抵門 又有二角門 皆蒙古兵守之 入門鋪甎爲地階三道 白石欄刻皆雲龍 會一橋橋五空 臺高五丈 周以欄干 皆文石 雕海馬天祿角端鱗角鬐蹏 皆從石膚爲色 臺上置二殿 殿皆重檐 黃金瓦屋 上起行六龍 皆黃金軀 其圓亭曲榭 複樓重閣 危軒層寮 皆覆靑綠紫碧琉璃瓦 工費千億百萬萬 釆色叱咬蜃 雕鏤恥鬼神 虗靈逼雷霆 渺漭若昏晟 苑中新栽幼松 連絡山谷 皆矯直丈餘 繫紙爲標 計日前所植也 2 雜植奇花異草 皆初覩不識其名 時方竹桃盛開 喇嘛數千人 皆曳紅色禪衣 戴黃左髻冠 而袒臂跣足 騈闐匝沓 面皆戉削紫黑色 高鼻深目..
12. 곡정필담(鵠汀筆談) 鵠汀筆談序 昨日語尹公所 不覺竟日 尹公時時睡 以頭觸屛 余曰 尹大人倦矣 請退 鵠汀曰 睡者睡 語者語 不相干 尹公微聞其語 向鵠汀數轉云云 鵠汀首肯 卽收談草 揖余同出 葢尹公老人 因余早起 過午酬酢 其昏倦思睡 無足恠也 鵠汀約明日設朝饌 要余共飯 余曰 每談席 常苦日短 明當早赴 鵠汀唯唯 次日五更 使臣起趨班 余同起 因赴鵠汀 明燭而語 郝都司成相會 而尹公曉已赴朝也 且飯且語 易數三十紙 自寅至酉 凡八時 而郝公晩會先罷 故閱次談草 爲鵠汀筆談 1 余曰 尹大人昨日甚倦 客心不安 得無有視日早晩意乎 鵠汀曰 無是 尹公每値午刻 蹔爲龍虎交 不欲令人見他 熊鳥小數 並無倦客意 鵠汀問尹公何如 余曰 神仙中人 先生與他舊契否 鵠汀曰 蓬藋桃李 門逕懸殊 此來證交一旬之上 2 鵠汀曰 公子當精幾何之學 余曰 何以知之 鵠汀曰 頭炕奇按司盛言高麗朴公子..
11. 망양록(忘羊錄) 忘羊錄序 朝日 隨尹亨山嘉銓 王鵠汀民皡 入修業齋 閱視樂器 還過亨山所寓 尹公蒸全羊 爲余專設也 方論說樂律古今同異 陳設頗久 而未見勸餉 俄而尹公問羊烹未 侍者對曰 嚮設已冷 尹公謝耄荒憒憒 余曰 昔夫子聞韶 不知肉味 今鄙人得聞大雅之論 已忘全羊 尹公曰 所謂臧糓俱忘 相與大笑 遂次其筆語 爲忘羊錄 1 余曰 五音爲正名 六律爲虛位 聲出而度之其中者爲律 不中者非律 則宜無古今之異 雅俗之別 而代各殊樂 風雅變遷者何也 抑製器有古今之異 而聲律隨變歟 鵠汀曰 否也 敝素昧是學 而第不無一二管窺 常欲一正於大雅之君子矣 聲之出乎喉舌唇齒者 各殊其形 則音亦隨異 故强起號名 逐聲分配 惟其有定名 然後可以知所變 惟其知所變 然後吹萬不同者 可以按名取準 此五音之名所由立也 然自其變者而觀之 則音何必五 雖謂之百音可也 律者法律之律也 聲之出乎口者 旣有高低淸..
10. 심세편(審勢編) 燕巖氏曰 遊中國者有五妄 地閥相高 本是國俗之陋習 有識之居國也 且恥言兩班 况以外藩土姓 反陵中州之舊族乎 此一妄也 中州之紅帽蹄袖 非獨漢人恥之 滿人亦恥之 然其禮俗文物 四夷莫當 顧無寸長可與頡伉中土 而獨以一撮之髻 自賢於天下 此二妄也 昔月汀尹公根壽奉使皇明 道逢御史汪道昆 屛息路左 瞻望行塵 猶以爲榮 今凾夏雖變而爲胡 其天子之號未改也 則閣部大臣 乃天子之公卿也 未必加尊於昔而有貶於今也 奉使者自有見官之禮 而恥其公庭拜揖 輒圖寬免 遂成規例 時有接遇 率以亢簡爲致 恭謙爲辱 彼雖不與苛責 安知不侮我之無禮乎 此三妄也 自知文字以來 莫不借讀于中州談說歷代 無非夢中占夢 乃以功令之餘習 强作無致之詩文 忽謂中土不見文章 此四妄也 2 中州之人士 康煕以前 皆皇明之遺黎也 康煕以後 卽淸室之臣庶也 固將盡節本朝遵奉法制 若造次談論輸情外藩 是固當世..
9 경개록(傾蓋錄) 傾蓋錄序 余從使者 北出長城至熱河 地本王庭所居 民雜胡虜 無可與語 旣入太學爲寓館 則中原土大夫 亦多先寓太學者 爲參賀班來也 同寓一館 晝宵相從 彼此覊旅 互爲客主 凡六日而散 古語有之 白頭如新 傾葢如舊 自一語以上 收爲傾葢錄 1. 王民皡 江蘇人也 時年五十四 爲人淳質少文 去年刱承德府太學 一如皇京 今年春功告訖 皇帝親釋菜 王君以擧人 方藏修此中 今年四月 不赴會試 八月中皇帝以七旬大慶 特命重會 而亦不赴 余問緣何廢擧 曰 年老矣 白頭荊圍 士之恥也 王君長者 號鵠汀 別有鵠汀筆談 忘羊錄 身長七尺餘 頗有窮愁之態 坐間頻發歎息之聲 獨有一僕相守 一日請余共飯 郝成 ★翕+阜人也 字志亭 號長城 見任山東都司 雖武人乎 博學多聞 身長八尺 紫髯炯眸 骨相精緊 與余語 晝夜不倦 所著書皆詩話 2 尹嘉銓直隷 博野人也 古趙地 號亨山 通奉大夫大理寺卿..
8.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秋八月十五日辛酉 1. (起辛酉止丙寅凡六日) 晴 乍凉 使臣相議曰 今當還皇京 而禮部之不通我使 潛改呈文 非但大駭於目下之事 此而不卞 則大關方來之弊 事當更爲呈文於禮部 以詰其潛改 然後可以發程 遂使任譯 呈文於禮部 則提督大懼 盖已先通於德尙書矣 尙書等大爲恐脅曰 是將委罪於禮部耶 禮部獲罪 使臣亦安得但已 爾們所請轉奏呈文 辭旨糊塗 全沒叩謝之實 吾爲爾們備爲周全 據實暢陳 以伸榮感之意 而乃反如此 提督之罪尤重 初不坼視呈文而卻之 使臣邀見提督 備問禮部說話 則其所爲說 張皇不可曉 而久已褫魄矣 又禮部使人立促登程 使臣發行時辰 卽當具奏云 如是催發者 盖爲其不得復呈文也 本事詳見行在雜錄 2. 朝飯後 卽爲登程 已過午刻矣 桑下三宿 亦猶作戀 况吾瞻依吾夫子 已六宿者乎 况又所處堂宇 新鮮淨麗 尤自依依 吾廢科頗早 不成進士 雖欲藏修國學 ..
7.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秋八月初九日乙卯 1. (系前篇 乙卯止庚申凡六日) 巳時 入寓太學 已前記在道 午後記留舘也 是日極熱 卸鞍直入後堂 有一老人脫帽踞椅而坐 見余下椅迎勞曰辛苦 余答揖坐定 老人問余官居幾品 余對以秀才觀光上國 從三從兄大大人來 中國人稱正使曰大大人 副使曰二大人也 詢余姓名 書示之 又問令兄大人尊名官職階品 對以名某 一品駙馬內大臣 又曰 令兄大人翰林出身乎 對曰 否也 老人出一片紅紙刺示之曰 鄙人是也 右旁細書通奉大夫大理寺卿致仕尹嘉銓 余曰 公旣謝事 何以出塞遠來 尹公曰 奉旨 有一人曰 弟亦朝鮮人也 賤名奇豊額 中庚寅文魁 見任貴州按察使 2. 尹公曰 方今四海一家 出門便是同胞兄弟 高麗朴寅亮 計是門望 余曰 否也 朱竹坨採風錄所列朴某 是僕五世祖 奇公曰 果是文望上卿 尹公曰 王漁洋池北偶談 俱詳詩文 所謂燕鴻背飛 馬牛不及 今天緣巧湊 塞上..
5. 관내정사(關內程史) 秋七月二十四日庚子 (起庚子 止庚戌 凡十一日 自山海關內 至皇京 共六百四十里) 晴 自紅花舖 至范家庄二十里 中火 范家庄至楊河堤三里 大理營七里 王家嶺三里 鳳凰店二里 望海店八里 深河驛五里 高舖臺八里 王家舖二里 馬棚舖七里 楡關三里 共四十八里 是日通行六十八里 宿楡關 或稱渝關 今臨渝縣 關內風氣 絶異關東 山川明媚 曲曲堪畵 自紅花舖 始有墩臺 五里一墩 或十里一墩 制皆方正 高五丈 上置屋三間 傍竪三丈旗竿 臺下置屋五間 墻上列畵弓韔矢服熛鎗火砲 屋前列揷刀鎗劒戟 凡擧燧望烟事目 列書貼壁 二十五日辛丑 1. 晴 自楡關至榮家庄三里 上白石舖二里 下白石舖三里 吳家庄三里 撫寧縣九里 羊膓河二里 午哩舖三里 蘆家庄二里 時哩舖三里 蘆峰口五里 茶棚菴五里 飮馬河三里 背陰堡三里 共四十六里 中火 自背陰堡至雙望店八里 要站五里 㺚子營三里 ..
성경잡지(盛京雜識) 秋七月初十日丙戌 1. (起丙戌止庚寅 凡五日 自十里河至小黑山 共三百二十七里) 雨卽晴 自十里河 早行至板橋堡五里 長盛店五里 沙河堡十里 暴交蛙子五里 毡匠舖五里 火燒橋三里 白塔堡七里 共四十里 中火於白塔堡 又自白塔堡至一所臺五里 紅火舖五里 渾河一里 舟渡渾河 入瀋陽九里 共二十里 是日通行六十里 宿瀋陽 是日極熱 回望遼陽城外 林樹蒼茫 萬點曉鴉 飛散野中 一帶朝煙 橫抹天際 瑞旭初昇 祥霧霏靄 四顧漭蕩 無所罥礙 噫 此英雄百戰之地也 所謂‘虎步龍驤’ 高下在心 然天下安危 常係遼野 遼野安則海內風塵不動 遼野一擾則天下金鼓互鳴 何也 誠以平原曠野 一望千里 守之則難爲力 棄之則胡虜長驅 曾無門庭之限 此所以爲中國必爭之地 而雖殫天下之力 守之 然後天下可安也 今其天下所以百年無事者 豈爲德敎政術 遠過前代哉 瀋陽 乃其始興之地 則東接寧古塔 北控..
도강록(渡江錄) 渡江錄序 (起辛未 止乙酉 自鴨綠江 至遼陽十五日) 曷爲後三庚子 記行程陰晴 將年以係月日也 曷稱後 崇禎紀元後也 曷三庚子 崇禎紀元後三周庚子也 曷不稱崇禎 將渡江故諱之也 曷諱之 江以外淸人也 天下皆奉淸正朔 故不敢稱崇禎也 曷私稱崇禎 皇明中華也 吾初受命之上國也 崇禎十七年 毅宗烈皇帝殉社稷 明室亡 于今百三十餘年 曷至今稱之 淸人入主中國 而先王之制度變而爲胡 環東土數千里 畫江而爲國 獨守先王之制度 是明明室猶存於鴨水以東也 雖力不足以攘除戎狄肅淸中原 以光復先王之舊 然皆能尊崇禎 以存中國也 崇禎百五十六年癸卯 洌上外史題 後三庚子我聖上四年 淸乾隆四十五年 六月二十四日辛未 1. (朝小雨 終日乍灑乍止)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初留龍灣 義州舘 十日 方物盡到 行期甚促 而一雨成霖 兩江通漲 中間快晴 亦已四日 而水勢益盛 ..
인간의 더러움과 비굴함에 대한 호랑이의 꾸짖음 호질(虎叱) 박지원(朴趾源) 창작 계기: 호질을 짓게 된 계기 壁上懸一篇奇文, 鷺紙細書. 爲格子塗之橫, 竟一壁. 筆又精工, 就壁一讀, 可謂‘絶世奇文’. 余因還座, 問“壁上所揭誰人所作?” 主人曰: “不知誰人所作也” 鄭君問“此似是近世文, 無乃主人先生所題耶?” 沈由朋曰: “主人不解文字, 旣無作者姓名, ‘不知有漢, 何論魏ㆍ晉?’” 余曰: “然則何從得此?” 沈曰: “曩於薊州市日收買.” 余曰: “可許謄去否?” 沈首肯曰: “不妨” 約持紙更來. 飯後與鄭君更往, 堂中已點兩燭矣. 余就壁欲解下格子, 沈招侍者, 捧下. 余復問“此先生所作否?” 沈掉頭曰: “有如明燭, 俺長齋奉佛, 懺誡譫妄.” 余囑鄭君, 自中間起筆, 余從頭寫下. 沈問“先生謄此何爲?” 余曰: “歸令國人一讀, 當捧腹軒渠,..
줄거리와 인용 창작 계기: 호질을 짓게 된 계기 1화: 범의 특징과 범이 무서워하는 것들 2화: 범이 사람을 잡아먹으면 생기는 귀신들 이름기생처하는 일1명굴각겨드랑이호랑이를 남의 집 부엌으로 데려가 솥을 핥게 함. 그러면 사람이 허기를 느껴 밤에도 밥을 짓게 함. 2명이올볼골짜기에 설치된 함정들을 치움. 3명육혼턱평소 알던 친구의 이름을 불러댐. 3화: 귀신들과 저녁 식사 토론호랑이는 비위ㆍ죽우ㆍ자백ㆍ표현의 짐승을 무서워함 4화: 의원은 의(疑)이고, 무당은 무(誣)다귀신들을 불러 먹을거리를 묻자 골각이 사람을 먹어야 한다고 말함 ⇒ 이올은 의원과 무당을 추천하며 고르라고 함 ⇒ 호랑이는 의원은 疑이기에 의심스런 처방으로 여러 사람을 죽인다며 거부함 ⇒ 무당은 誣로 귀신을 속이고 사람에겐 거짓말만 한다며..
후기: 호질에 대한 연암의 총평 박지원(朴趾源) 燕岩氏曰: “篇雖無作者姓名, 而盖近世華人悲憤之作也. 世運入於長夜, 而夷狄之禍甚於猛獸, 士之無恥者, 綴拾章句, 以狐媚當世, 豈非發塚之儒, 而豺狼之所不食者乎? 今讀其文, 言多悖理, 與「胠篋」「盜跖」同旨. 然天下有志之士, 豈可一日而忘中國哉? 今淸之御宇纔四世, 而莫不文武壽考, 昇平百年, 四海寧謐, 此漢唐之所無也, 觀其全安扶植之意, 殆亦上天所置之命吏也. 昔人甞疑於諄諄之天, 而有質於聖人者. 聖人丁寧體天之意曰: ‘天不言, 以行與事示之.’ 小子甞讀之, 至此其惑滋甚, 敢問: ‘以行與事示之, 則用夷變夏, 天下之大辱也, 百姓之寃酷如何? 馨香腥膻, 各類其德, 百神之所饗何臭? 故自人所處而視之, 則華夏夷狄, 誠有分焉; 自天所命而視之, 則殷冔周冕, 各從時制, 何必獨疑於淸人之紅帽哉?’..
15화: 곧 죽어도 체면 박지원(朴趾源) 北郭先生離席俯伏, 逡巡再拜, 頓首頓首曰: “傳有之, 雖有惡人, 齋戒沐浴, 則可以事上帝, 下土賤臣, 敢在下風.”屛息潛聽, 久無所命, 誠惶誠恐, 拜手稽首, 仰而視之, 東方明矣, 虎則已去. 農夫有朝菑者, 問“先生何早敬於野?” 北郭先生曰: “吾聞之, 謂天蓋高, 不敢不局; 謂地蓋厚, 不敢不蹐.” 해석北郭先生離席俯伏, 逡巡再拜, 頓首頓首曰: 북곽선생은 자리를 옮겨 부복(俯伏)해서 머리를 새삼 조아리고 아뢰었다. “傳有之, 雖有惡人, 齋戒沐浴, 則可以事上帝, “맹자(孟子)가 말했다. ‘비록 악인(惡人)이라도 목욕 재계(齋戒)하면 상제(上帝)를 섬길 수 있다.’ 下土賤臣, 敢在下風.”하토의 천신은 감히 아랫바람에 서옵니다.” 屛息潛聽, 久無所命, 북곽선생이 숨을 죽이고 명령을 ..
14화: 인간들의 여러 그물과 최강병기 붓 박지원(朴趾源) 不仁哉! 汝之爲食也. 機穽之不足而爲罿也罞也罛也罾也罦也罭也. 始結網罟者, 裒然首禍於天下矣. 有鈹者戣者殳者斨者叴者矟者鍜者鈼者□者有礮發焉, 聲隤華嶽, 火洩陰陽, 暴於震霆. 是猶不足以逞其虐焉, 則乃吮柔毫, 合膠爲鋒, 體如棗心, 長不盈寸, 淬以烏賊之沫, 縱橫擊刺, 曲者如矛, 銛者如刀, 銳者如釖, 歧者如戟, 直者如矢, 彀者如弓. 此兵一動, 百鬼夜哭. 其相食之酷, 孰甚於汝乎?” 해석不仁哉! 汝之爲食也.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다, 너희들의 먹이를 얻는 것이여! 機穽之不足, 덫이나 함정을 놓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而爲罿也罞也罛也罾也罦也罭也. 새 그물·노루 網·큰 그물·고기 그물·수레 그물·삼태 그물 따위의 온갖 그물을 만들어 냈으니. 始結網罟者, 裒然首..
13화: 범이 사람보다 나은 이유 박지원(朴趾源) 而虎之家水旱不識, 故無怨乎天; 讐德兩忘, 故無忤於物, 知命而處順, 故不惑於巫醫之姦; 踐形而盡性, 故不疚乎世俗之利, 此虎之所以睿聖也. 窺其一班, 足以示文於天下也. 不藉尺寸之兵, 而獨任爪牙之利, 所以耀武於天下也. 彛卣蜼尊, 所以廣孝於天下也. 一日一擧而烏鳶螻螘, 共分其餕, 仁不可勝用也. 讒人不食, 廢疾者不食, 衰服者不食, 義不可勝用也. 해석而虎之家水旱不識, 故無怨乎天; 범의 세계는 큰 물과 가뭄의 걱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讐德兩忘, 故無忤於物, 원수도 공덕도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며, 知命而處順, 故不惑於巫醫之姦; 운명을 알아서 따르기 때문에 무(巫)와 의(醫)의 간사에 속지 않고, 踐形而盡性, 타고난 그대로 천성을 다하..
12화: 인간이 서로를 잡아먹다 박지원(朴趾源) 虎未甞食豹者, 誠爲不忍於其類也. 然而計虎之食麕鹿, 不若人之食麕鹿之多也; 計虎之食馬牛, 不若人之食馬牛之多也; 計虎之食人, 不若人之相食之多也. 去年關中大旱, 民之相食者數萬; 往歲山東大水, 民之相食者數萬. 雖然, 其相食之多, 又何如春秋之世也? 春秋之世, 樹德之兵十七; 報仇之兵三十, 流血千里; 伏屍百萬. 해석虎未甞食豹者, 誠爲不忍於其類也. 범이 일찍이 표범을 안 잡아먹는 것은 동류를 차마 그럴 수 없어서이다. 然而計虎之食麕鹿, 그런데 범이 노루와 사슴을 잡아먹은 것이 不若人之食麕鹿之多也;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잡아먹은 것만큼 많지 않으며, 計虎之食馬牛, 범이 소와 말을 잡아먹은 것이 不若人之食馬牛之多也; 사람이 소와 말을 잡아먹은 것만큼 많지 않으며, 計虎之食人,..
11화: 인간은 세상에서의 해악 박지원(朴趾源) 夫非其有而取之, 謂之‘盜’ 殘生而害物者, 謂之‘賊’ 汝之所以日夜遑遑, 揚臂努目, 挐攫而不恥. 甚者, 呼錢爲兄, 求將殺妻, 則不可復論於倫常之道矣. 乃復攘食於蝗, 奪衣於蚕, 禦蜂而剽甘. 甚者, 醢蟻之子, 以羞其祖考, 其殘忍薄行, 孰甚於汝乎? 汝談理論性, 動輒稱天, 自天所命而視之, 則虎與人, 乃物之一也. 自天地生物之仁而論之, 則虎與蝗蚕蜂蟻與人並畜, 而不可相悖也. 自其善惡而辨之, 則公行剽刦於蠭蟻之室者, 獨不爲天地之巨盜乎? 肆然攘竊於蝗蚕之資者, 獨不爲仁義之大賊乎? 해석夫非其有而取之, 謂之‘盜’ 대체 제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殘生而害物者, 謂之‘賊’ 생(生)을 빼앗고 물(物)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하나니, 汝之所以日夜遑遑, 揚臂努目, 너희가..
10화: 인간의 자연의 섭리를 고려하지 않는 폭식에 대해 박지원(朴趾源) 虎不食草木, 不食虫魚, 不嗜麴蘖悖亂之物, 不忍字伏細瑣之物.入山獵麕鹿, 在野畋馬牛, 未甞爲口腹之累飮食之訟. 虎之道, 豈不光明正大矣乎? 虎之食麕鹿而汝不疾虎, 虎之食馬牛而人謂之讐焉, 豈非麕鹿之無恩於人, 而馬牛之有功於汝乎! 然而不有其乘服之勞, 戀效之誠, 日充庖廚, 角鬣不遺. 而乃復侵我之麕鹿, 使我乏食於山, 缺餉於野. 使天而平其政, 汝在所食乎所捨乎? 해석虎不食草木, 不食虫魚, 범은 초목을 먹지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고, 不嗜麴蘖悖亂之物, 술 같은 좋지 못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不忍字伏細瑣之物.순종 굴복하는 하찮은 것들을 차마 잡아먹지 않는다. 入山獵麕鹿, 在野畋馬牛,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 따위를 사냥하고, 들로 나가면 말..
9화: 구밀복검(口蜜腹劍)하기에 인간은 범보다 못하다 박지원(朴趾源) 虎叱曰: “毋近前! 曩也吾聞之, 儒者諛也, 果然. 汝平居集天下之惡名, 妄加諸我, 今也急而面諛, 將誰信之耶? 夫天下之理一也. 虎誠惡也, 人性亦惡也, 人性善則虎之性亦善也. 汝千語萬言, 不離五常, 戒之勸之, 恒在四綱. 然都邑之間, 無鼻無趾, 文面而行者, 皆不遜五品之人也. 然而徽墨斧鉅, 日不暇給, 莫能止其惡焉. 而虎之家自無是刑, 由是觀之, 虎之性不亦賢於人乎? 해석虎叱曰: “毋近前! 범은 북곽선생을 여지없이 꾸짖었다. “내 앞에 가까이 오지 말아라. 曩也吾聞之, 儒者諛也, 果然. 내 듣건대 유(儒)는 유(諛)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汝平居集天下之惡名, 妄加諸我, 네가 평소에 천하의 악명을 죄다 나에게 덮어씌우더니, 今也急而面諛, 將誰信之耶? ..
8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박지원(朴趾源) 恐人之識己也, 以股加頸, 鬼舞鬼笑, 出門而跑. 乃陷野窖. 穢滿其中. 攀援出首而望, 有虎當徑. 虎顰蹙嘔哇, 掩鼻左首而噫曰: “儒, 臭矣.” 北郭先生頓首匍匐而前, 三拜以跪, 仰首而言曰: “虎之德其至矣乎! 大人效其變, 帝王學其步, 人子法其孝, 將帥取其威, 名並神龍. 一風一雲, 下土賤臣, 敢在下風.” 해석恐人之識己也, 以股加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 겁이 나서 모가지를 두 다리 사이로 들이박고 鬼舞鬼笑, 出門而跑. 乃陷野窖. 귀신처럼 춤추고 낄낄거리며 문을 나가서 내닫다가 그만 들판의 구덩이 속에 빠져 버렸다. 穢滿其中. 그 구덩이에는 똥이 가득 차 있었다. 攀援出首而望, 有虎當徑. 간신히 기어올라 머리를 들고 바라보니 뜻밖에 범이 길목에 앉아 있는 것이 ..
7화: 과부 곁에 청렴한 선비가 박지원(朴趾源) 五子相謂曰: “水北鷄鳴, 水南明星, 室中有聲, 何其甚似北郭先生也?” 兄弟五人, 迭窺戶隙, 東里子請於北郭先生曰: “久慕先生之德, 今夜願聞先生讀書之聲.” 北郭先生, 整襟危坐而爲詩曰: “䲶鴦在屛, 耿耿流螢, 維鬵維錡, 云誰之型? 興也” 五子相謂曰: “禮不入寡婦之門, 北郭先生賢者也.” “吾聞鄭之城門壞而狐穴焉” “吾聞狐老千年, 能幻而像人, 是其像北郭先生乎.” 相與謀曰: “吾聞得狐之冠者, 家致千金之富; 得狐之履者, 能匿影於白日; 得狐之尾者, 善媚而人悅之, 何不殺是狐而分之?” 於是五子共圍而擊之, 北郭先生大驚遁逃. 해석五子相謂曰: 어느 날 밤, 다섯 놈의 아들들이 서로 말했다. “水北鷄鳴, 水南明星, “강 건너 마을에서 닭이 울고 강 저편 하늘에 샛별이 반짝이는데, 室中..
6화: 북곽선생과 동리자에 대해 박지원(朴趾源) 鄭之邑, 有不屑宦之士曰: ‘北郭先生’ 行年四十, 手自校書者萬卷, 敷衍九經之義, 更著書一萬五千卷. 天子嘉其義, 諸侯慕其名. 邑之東, 有美而早寡者, 曰:‘東里子’ 天子嘉其節, 諸侯慕其賢, 環其邑數里而封之曰:‘東里寡婦之閭’ 東里子善守寡, 然有子五人, 各有其姓. 해석鄭之邑, 有不屑宦之士曰: 정(鄭) 나라 어느 고을에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학자가 살았으니 ‘北郭先生’ ‘북곽선생(北郭先生)’이었다. 行年四十, 手自校書者萬卷, 그는 나이 마흔에 손수 교정(校訂)해 낸 책이 만 권이었고, 敷衍九經之義, 更著書一萬五千卷. 또 육경(六經)의 뜻을 부연해서 다시 저술한 책이 일만 오천 권이었다. 天子嘉其義, 諸侯慕其名. 천자(天子)가 그의 행의(行義)를 가상히 여기고 ..
5화: 유자(儒者)를 알려주자 범이 평가하다 박지원(朴趾源) 鬻渾曰: “有肉在林. 仁肝義膽, 抱忠懷潔, 戴樂履禮, 口誦百家之言; 心通萬物之理, 名曰:‘碩德之儒’. 背盎軆胖, 五味俱存.” 虎軒眉垂涎, 仰天而笑曰: “朕聞如何?” 倀交薦虎曰: “一陰一陽之謂‘道’, 儒貫之. 五行相生, 六氣相宣, 儒導之, 食之美者無大於此.” 虎愀然變色易容而不悅曰: “陰陽者, 一氣之消息也而兩之, 其肉雜也. 五行定位, 未始相生, 乃今强爲子母, 分配醎酸, 其味未純也. 六氣自行, 不待宣導, 乃今妄稱財相, 私顯己功, 其爲食也, 無其硬强滯逆而不順化乎.” 해석鬻渾曰: “有肉在林. 仁肝義膽, 육혼이 말했다. “어떤 고기가 저 숲속【林 : 儒林의 林과 통함.】에 있사온데 그는 인자한 염통과 의기로운 쓸개며 抱忠懷潔, 戴樂履禮, 충성스런 마음을 ..
4화: 의원은 의(疑)이고, 무당은 무(誣)다 박지원(朴趾源) 彛兀曰: “東門有食, 其名曰:‘醫’. 口含百草, 肌肉馨香. 西門有食, 其名曰:‘巫’. 求媚百神, 日沐齊潔. 請爲擇肉於此二者” 虎奮髯作色曰: “醫者疑也. 以其所疑而試諸人, 歲所殺常數萬. 巫者誣也. 誣神以惑民, 歲所殺常數萬. 衆怒入骨, 化爲金蚕, 毒不可食.” 해석彛兀曰: “東門有食, 이올이 말했다. “동문에 먹을 것이 하나 있는데, 其名曰:‘醫’. 그 놈의 이름은 의원(醫員)이라고 합니다. 口含百草, 肌肉馨香. 의원(醫員)은 약초를 다루고 먹으니 그 고기도 별미(別味)인 줄로 아옵니다. 西門有食, 其名曰:‘巫’. 그리고 서문에도 먹음직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당 계집입니다. 求媚百神, 日沐齊潔. 그 계집은 천지신명께 온갖 미태(媚態)를 부리고..
3화: 귀신들과 저녁 식사 토론 박지원(朴趾源) 虎詔倀曰: “日之將夕, 于何取食?” 屈閣曰: “我昔占之, 匪角匪羽, 黔首之物, 雪中有跡, 彳亍踈武, 瞻尾在腦, 莫掩其尻.” 해석虎詔倀曰: 어느 날 범이 이 세 귀신을 불러 놓고 하는 말했다. “日之將夕, 于何取食?”“오늘도 곧 날이 저무는데 어디 가서 먹을 것을 구한단 말이냐.” 屈閣曰: “我昔占之, 匪角匪羽, 굴각이 대답했다. “제가 전에 점쳐 보았더니 뿔을 가진 짐승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黔首之物, 雪中有跡, 彳亍踈武, 검은 머리를 가진 것이 눈 위에 발자국이 비틀비틀 성긴 걸음, 瞻尾在腦, 莫掩其尻.” 뒤통수에 꼬리가 붙어 꽁무니를 감추지 못하는 그런 놈입니다.” 인용작가 이력 및 작품목차전문짓게 된 계기: 호질을 짓게 된 계기1화: 범의 특징과 범..
2화: 범이 사람을 잡아먹으면 생기는 귀신들 박지원(朴趾源) 虎食狗則醉; 食人則神. 虎一食人, 其倀爲屈閣, 在虎之腋, 導虎入廚, 舐其鼎耳, 主人思饑, 命妻夜炊. 虎再食人. 其倀爲彛兀, 在虎之輔. 升高視虞, 若谷穽弩, 先行釋機. 虎三食人, 其倀爲鬻渾, 在虎之頤. 多贊其所識朋友之名. 해석虎食狗則醉; 食人則神. 범이 개를 잡아먹으면 술을 마신 것처럼 취하고 虎一食人, 其倀爲屈閣, 在虎之腋, 범이 사람을 한번 잡아먹으면 그 창귀가 굴각이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살면서 導虎入廚, 舐其鼎耳, 범을 남의 집 부엌에 인도하여서 솥전을 핥으면 主人思饑, 그 집 주인이 갑자기 시장기를 느껴 命妻夜炊. 虎再食人. 한밤중이라도 아내더러 밥을 지으라 하게 되면 두 번째로 그 사람을 잡아먹는다. 其倀爲彛兀, 在虎之輔, 그러면 ..
1화: 범의 특징과 범이 무서워하는 것들 박지원(朴趾源) 虎, 睿聖文武, 慈孝智仁, 雄勇壯猛, 天下無敵. 然狒胃食虎, 竹牛食虎, 駮食虎, 五色獅子食虎於巨木之岫, 玆白食虎, 䶂犬飛食虎豹, 黃要取虎豹心而食之, 猾(無骨), 爲虎豹所呑, 內食虎豹之肝, 酋耳遇虎, 則裂而啖之. 虎遇猛㺎, 則閉目而不敢視. 人不畏猛㺎而畏虎, 虎之威其嚴乎. 해석虎, 睿聖文武, 범은 모든 일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착하고 성스러우며, 문채롭고 무인다우며, 慈孝智仁, 雄勇壯猛, 인자롭고 효성이 지극하며, 슬기롭고 어질며, 기운차고 날래며, 용맹스럽고 사나워 天下無敵.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다. 然狒胃食虎, 竹牛食虎, 駮食虎, 그러나 비위(狒胃)는 호랑이를, 죽우(竹牛)는 호랑이를, 박(駁)은 호랑이를, 五色獅子食虎於巨木之岫, 玆白食..
창작 계기: 호질을 짓게 된 계기 박지원(朴趾源) 壁上懸一篇奇文, 鷺紙細書. 爲格子塗之橫, 竟一壁. 筆又精工, 就壁一讀, 可謂‘絶世奇文’. 余因還座, 問“壁上所揭誰人所作?” 主人曰: “不知誰人所作也” 鄭君問“此似是近世文, 無乃主人先生所題耶?” 沈由朋曰: “主人不解文字, 旣無作者姓名, ‘不知有漢, 何論魏ㆍ晉?’” 余曰: “然則何從得此?” 沈曰: “曩於薊州市日收買.” 余曰: “可許謄去否?” 沈首肯曰: “不妨” 約持紙更來. 飯後與鄭君更往, 堂中已點兩燭矣. 余就壁欲解下格子, 沈招侍者, 捧下. 余復問“此先生所作否?” 沈掉頭曰: “有如明燭, 俺長齋奉佛, 懺誡譫妄.” 余囑鄭君, 自中間起筆, 余從頭寫下. 沈問“先生謄此何爲?” 余曰: “歸令國人一讀, 當捧腹軒渠, 嗢噱絶倒,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 及還寓, 點燈閱視, ..
조선의 무능을 여지없이 폭로한 허생 이야기 허생전(許生傳) 박지원(朴趾源) 1화: 공부쟁이 허생, 7년 만에 세상에 나가다 許生居墨積洞. 直抵南山下. 井上有古杏樹. 柴扉向樹而開. 草屋數間. 不蔽風雨. 然許生好讀書. 妻爲人縫刺以糊口. 一日妻甚饑. 泣曰: “子平生不赴擧. 讀書何爲?” 許生笑曰: “吾讀書未熟.” 妻曰: “不有工乎?” 生曰: “工未素學奈何?” 妻曰: “不有商乎?” 生曰: “商無本錢奈何?” 其妻恚且罵曰: “晝夜讀書, 只學‘奈何’. 不工不商. 何不盜賊?” 許生掩卷起曰“ 惜乎! 吾讀書本期十年. 今七年矣.” 出門而去. 無相識者. 直之雲從街. 問市中人曰: “漢陽中誰最富?” 有道卞氏者. 遂訪其家. 2화: 화끈하게 만냥을 빌려준 변부자 許生長揖曰: “吾家貧. 欲有所小試. 願從君借萬金.” 卞氏曰: “諾.” 立..
줄거리와 인용 박지원(朴趾源) 1화: 공부쟁이 허생, 7년 만에 세상에 나가다아내의 삯바느질로 먹고 살며 7년 동안 공부만 하자 아내는 볼멘소리를 함 ⇒ 화가 난 허생은 7년 만에 공부를 때려치고 거리를 나섦 ⇒ 허생은 최고 부자를 물어 그를 찾아감 2화: 화끈하게 만냥을 빌려준 변부자허생은 나가 변부자에게 만 냥을 빌림 3화: 허생의 장사수완, 매점매석안성에 내려가 과일을 사재기하여 창고에 넣어둠 ⇒ 과일을 구할 수 없게 되자 10배의 이문을 남기고 되팔음 ⇒ 칼, 호미, 무명, 명주, 솜 등을 사서 제주도로 건너감 ⇒ 그 물건을 모두 팔고 망건을 만드는 재료인 말총을 사재기하였고 열배의 이문을 남기고 팔음 4화: 빈 섬을 찾아 큰 그림을 그리다허생은 뱃사공에게 수소문하여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가게 ..
17화: 허생의 일갈과 떠남 박지원(朴趾源) 許生大叱曰: “所謂士大夫, 是何等也? 產於彛貊之地, 自稱曰士大夫, 豈非騃乎? 衣袴純素, 是有喪之服, 會撮如錐, 是南蠻之椎結也, 何謂禮法? 樊於期, 欲報私怨而不惜其頭, 武靈王, 欲强其國而不恥胡服. 乃今欲爲大明復讎, 而猶惜其一髮, 乃今將馳馬擊釖刺鎗弓飛石, 而不變其廣袖, 自以爲禮法乎? 吾始三言, 汝無一可得而能者, 自謂信臣? 信臣固如是乎? 是可斬也.” 左右顧索釖欲刺之. 公大驚而起, 躍出後牖疾走歸. 明日復往, 已空室而去矣. 『熱河日記』明日復往, 已空室而去矣. 『熱河日記』 해석許生大叱曰: “所謂士大夫, 是何等也?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產於彛貊之地, 自稱曰士大夫,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豈非騃乎? 이런..
16화: 허생이 제시한 세 번째 계책 박지원(朴趾源) 許生曰: “此亦難彼亦難, 何事可能? 有最易者, 汝能之乎.” 李公曰: “願聞之.” 許生曰: “夫欲聲大義於天下而不先交結天下之豪傑者, 未之有也, 欲伐人之國而不先用諜, 未有能成者也. 今滿洲遽而主天下, 自以不親於中國, 而朝鮮率先他國而服, 彼所信也. 誠能請遣子弟入學遊宦, 如唐ㆍ元故事, 商賈出入不禁, 彼必喜其見親而許之. 妙選國中之子弟, 薙髮胡服, 其君子往赴賓擧, 其小人遠商江南, 覘其虛實, 結其豪傑, 天下可圖而國恥可雪. 若求朱氏而不得率天下諸侯, 薦人於天, 進可爲大國師, 退不失伯舅之國矣.” 李公憮然曰: “士大夫皆謹守禮法, 誰肯薙髮胡服乎?” 해석許生曰: “此亦難彼亦難, 何事可能? 허생이 말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有最易者..
15화: 허생이 제시한 두 번째 계책 박지원(朴趾源) 許生曰: “明將士以朝鮮有舊恩, 其子孫多脫身東來, 流離惸鰥, 汝能請于朝, 出宗室女遍嫁之, 奪勳戚權貴家, 以處之乎?” 公低頭良久曰: “難矣.” 해석許生曰: “明將士以朝鮮有舊恩, 허생이 말했다. “명(明) 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 있다고 하여, 其子孫多脫身東來, 流離惸鰥,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汝能請于朝, 出宗室女遍嫁之,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보내고, 奪勳戚權貴家, 以處之乎?” 훈척(勳戚)과 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公低頭良久曰: “難矣.”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인..
14화: 허생이 제시한 첫 번째 계책 박지원(朴趾源) 卞氏閔公久露立數言之, 許生不應, 旣夜深, 許生曰: “可召客.” 李公入, 許生安坐不起. 李公無所措躬, 乃叙述國家所以求賢之意, 許生揮手曰: “夜短語長, 聽之太遲. 汝今何官?” 曰: “大將.” 許生曰: “然則汝乃國之信臣, 我當薦臥龍先生, 汝能請于朝三顧草廬乎?” 公低頭良久曰: “難矣. 願得其次.” 許生曰: “我未學第二義.” 固問之. 해석卞氏閔公久露立數言之,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기에 자주 말하였으나, 許生不應, 旣夜深,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이미 밤이 깊어져서 許生曰: “可召客.” 허생이 말했다. “손님을 부르십시오.” 李公入, 許生安坐不起.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李公無所措躬, 이 대장은 몸 둘 곳을 ..
13화: 변씨, 이완과 함께 허생을 찾아가다 박지원(朴趾源) 卞氏本與李政丞浣善. 李公時爲御營大將, 嘗與言委巷閭閻之中, 亦有奇才可與共大事者乎. 卞氏爲言許生, 李公大驚曰: “奇哉! 眞有是否. 其名云何?” 卞氏曰: “小人與居三年, 竟不識其名.” 李公曰: “此異人. 與君俱往.” 夜公屛騶徒, 獨與卞氏俱步至許生. 卞氏止公立門外, 獨先入, 見許生具道李公所以來者. 許生若不聞者曰: “輒解君所佩壺.” 相與歡飮. 해석卞氏本與李政丞浣善. 변씨는 본래 이완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李公時爲御營大將, 嘗與言委巷閭閻之中, 이완이 당시 어영대장이 되어서 일찍이 변씨에게 위항이나 여염에 亦有奇才可與共大事者乎.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卞氏爲言許生, 李公大驚曰: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12화: 인재를 몰라보는 조선을 까발리다 박지원(朴趾源) 卞氏曰: “方今士大夫欲雪南漢之恥, 此志士扼脆奮智之秋也, 以子之才, 何自苦沉冥以沒世耶?” 許生曰: “古來沉冥者何限? 趙聖期拙修齋可使敵國, 而老死布褐, 柳馨遠磻溪居士, 足繼軍食, 而逍遙海曲? 今之謀國政者, 可知已. 吾善賈者也, 其銀足以市九王之頭, 然投之海中而來者, 無所可用故耳.” 卞氏喟然太息而去. 해석卞氏曰: “方今士大夫欲雪南漢之恥, 변씨가 말했다. “방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고자 하니, 此志士扼脆奮智之秋也, 지금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입니다. 以子之才, 何自苦沉冥以沒世耶?”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許生曰: “古來沉冥者何限? 허생이 말했다. “어허, 자고로 묻혀 지..
11화: 허생의 성공철학 박지원(朴趾源) 卞氏曰: “初子何以知吾出萬金而來吾求也.” 許生曰: “不必君與我也, 能有萬金者, 莫不與也. 吾自料吾才足以致百萬, 然命則在天, 吾何能知之? 故能用我者, 有福者也, 必富益富, 天所命也, 安得不與? 旣得萬金, 憑其福而行, 故動輒有成, 若吾私自與, 則成敗亦未可知也.” 해석卞氏曰: “初子何以知吾出萬金而來吾求也.” 변씨가 말했다. “처음에 내가 선뜻 만 냥을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許生曰: “不必君與我也,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能有萬金者, 莫不與也. 만 냥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吾自料吾才足以致百萬, 내 스스로 나의 재주를 헤아려 백 만냥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然命則在..
10화: 조선 경제의 한계를 간파한 허생 박지원(朴趾源) 旣數歲, 情好日篤. 嘗從容言五歲中, 何以致百萬. 許生曰: “此易知耳, 朝鮮舟不通外國, 車不行域中, 故百物生于其中, 消于其中. 夫千金小財也, 未足以盡物, 然析而十之百金, 十亦足以致十物. 物輕則易轉, 故一貨雖絀, 九貨伸之, 此常利之道, 小人之賈也. 夫萬金足以盡物, 故在車專車, 在船專船, 在邑專邑, 如綱之有罟, 括物而數之. 陸之產萬, 潛停其一; 水之族萬, 潛停其一; 醫之材萬, 潛停其一, 一貨潛藏, 百賈涸, 此賊民之道也. 後世有司者, 如有用我道, 必病其國.” 해석旣數歲, 情好日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의 우호가 날로 두터워 갔다. 嘗從容言五歲中, 何以致百萬. 일찍이 조용히 5년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물었다. 許..
9화: 욕심이 없는 허생에 반해 물심양면으로 돕다 박지원(朴趾源) 明日悉持其銀往遺之, 許生辭曰: “我欲富也, 棄百萬而取十萬乎? 吾從今得君而活矣. 君數視我計口送糧, 度身授布, 一生如此足矣, 孰肯以財勞神.” 卞氏說許生百端, 竟不可奈何. 卞氏自是度許生匱乏, 輒身自往遺之, 許生欣然受之. 或有加則不悅曰: “君奈何遺我災也.” 以酒往則益大喜, 相與酌至醉. 해석明日悉持其銀往遺之,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주려 했지만 許生辭曰: 허생은 사양하며 말했다. “我欲富也, 棄百萬而取十萬乎?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받겠소? 吾從今得君而活矣.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君數視我計口送糧, 度身授布,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
8화: 변부자, 허생에게 감동받다 박지원(朴趾源) 於是遍行國中, 賑施與貧無告者. 銀尙餘十萬曰: “此可以報卞氏.” 往見卞氏曰: “君記我乎?” 卞氏驚曰: “子之容色, 不少瘳, 得無敗萬金乎?” 許生笑曰: “以財粹面, 君輩事耳, 萬金何肥於道哉?” 於是以銀十萬. 付卞氏曰: “吾不耐一朝之饑, 未竟讀書, 慙君萬金.” 卞氏大驚, 起拜辭謝, 願受什一之利. 許生大怒曰: “君何以賈竪視我?” 拂衣而去. 卞氏潛踵之, 望見, 客向南山下, 入小屋. 有老嫗, 井上澣, 卞氏問曰: “彼小屋誰家?” 嫗曰: “許生員宅. 貧而好讀書, 一朝出門不返者已五年, 獨有妻在, 祭其去日.” 卞氏始知客乃姓許, 歎息而歸. 해석於是遍行國中, 賑施與貧無告者.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銀尙餘十萬曰: “此可以報..
7화: 섬에 지상낙원을 만들고 미련 없이 떠나다 박지원(朴趾源) 於是伐樹爲屋, 編竹爲籬. 地氣旣全, 百種碩茂, 不菑不畬, 一莖九穗. 留三年之儲, 餘悉舟載往糶長崎島. 長崎者, 日本屬州, 戶三十一萬. 方大饑, 遂賑之, 獲銀百萬. 許生歎曰: “今吾已小試矣.” 於是悉召男女二千人, 令之曰: “吾始與汝等入此島, 先富之, 然後別造文字, 刱製衣冠. 地小德薄, 吾今去矣. 兒生執匙, 敎以右手, 一日之長, 讓之先食.” 悉焚他船曰: “莫往則莫來.” 投銀五十萬於海中曰: “海枯有得者, 百萬無所容於國中, 况小島乎.” 有知書者載與俱出曰: “爲絶禍於此島.” 해석於是伐樹爲屋, 編竹爲籬. 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를 엮어 울을 만들었다. 地氣旣全, 百種碩茂, 땅기운이 온전하기 때문에 백곡이 잘 자라서, 不菑不畬, 一莖九穗. 거름..
6화: 도둑들에게 희망을 주다 박지원(朴趾源) 及明日, 至海上, 許生載錢三十萬. 皆大驚羅拜曰: “唯將軍令” 許生曰: “惟力負去.” 於是群盜, 爭負錢, 人不過百金. 許生曰: “爾等力不足以擧百金, 何能爲盜? 今爾等雖欲爲平民, 名在賊簿, 無可往矣. 吾在此俟汝, 各持百金而去, 人一婦一牛來.” 群盜曰: “諾.” 皆散去. 許生自具二千人一歲之食以待之. 及群盜至, 無後者. 遂俱載入其空島. 許生榷盜而國中無警矣. 해석及明日, 至海上, 이튿날, 군도들이 바닷가에 나가 보았더니, 許生載錢三十萬. 허생이 삼십만 냥의 돈을 싣고 온 것이었다. 皆大驚羅拜曰: “唯將軍令” 모두들 크게 놀라 절하며 말했다. “오직 장군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許生曰: “惟力負去.” 허생이 말했다. “너희들,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於是群盜, 爭負..
5화: 군도들의 산채에서 군도들에게 엄청난 말을 하다 박지원(朴趾源) 是時邊山群盜數千. 州郡發卒逐捕, 不能得, 然群盜亦不敢出剽掠, 方饑困. 許生入賊中說其魁帥曰: “千人掠千金, 所分幾何?” 曰: “人一兩耳.” 許生曰: “爾有妻乎?” 群盜曰: “無.” 曰: “爾有田乎?” 群盜笑曰: “有田有妻, 何苦爲盜” 許生曰: “審若是也, 何不娶妻樹屋, 買牛耕田? 生無盜賊之名, 而居有妻室之樂. 行無逐捕之患, 而長享衣食之饒乎.” 群盜曰: “豈不願如此? 但無錢耳.” 許生笑曰: “爾爲盜何患無錢, 吾能爲汝辦之. 明日, 視海上風旗紅者, 皆錢船也, 恣汝取去.” 許生約群盜, 旣去, 群盜皆笑其狂. 해석是時邊山群盜數千. 이 때, 변산(邊山)에 수천의 군도(群島)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州郡發卒逐捕, 不能得, 각 지방에서 병졸을 징발하여 ..
4화: 빈 섬을 찾아 큰 그림을 그리다 박지원(朴趾源) 許生問老篙師曰: “海外豈有空島可以居者乎?” 篙師曰: “有之. 常漂風直西行三日夜, 泊一空島, 計在沙門ㆍ長崎之間. 花木自開, 菓蓏自熟, 麋鹿成群, 游魚不驚.” 許生大喜曰: “爾能導我, 富貴共之.” 篙師從之. 遂御風東南, 入其島, 許生登高而望. 悵然曰: “地不滿千里, 惡能有爲, 土肥泉甘, 只可作富家翁.” 篙師曰: “島空無人, 尙誰與居?” 許生曰: “德者人所歸也 尙恐不德, 何患無人?” 해석許生問老篙師曰: 허생은 늙은 사공을 만나 물었다. “海外豈有空島可以居者乎?” “바다 밖에 혹시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없던가?” 篙師曰: “有之. 사공이 말했다. “있습지요. 常漂風直西行三日夜, 언젠가 풍파를 만나 서쪽으로 줄곧 사흘 동안을 흘러가서 泊一空島, 計在沙門ㆍ..
3화: 허생의 장사수완, 매점매석 박지원(朴趾源) 於是許生旣得萬金, 不復還家, 以爲安城畿湖之交, 三南之綰口, 遂止居焉. 棗栗柹梨柑榴橘柚之屬, 皆以倍直居之, 許生榷菓, 而國中無以讌祀. 居頃之, 諸賈之獲倍直於許生者, 反輸十倍. 許生喟然嘆曰: “以萬金傾之, 知國淺深矣.” 以刀鏄布帛綿入濟州, 悉收馬鬉鬣曰: “居數年, 國人不裹頭矣.” 居頃之, 網巾價至十倍. 해석於是許生旣得萬金, 不復還家, 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았다. 以爲安城畿湖之交, 三南之綰口, 안성으로 갔는데,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에 遂止居焉. 마침내 근거지로 삼았다. 棗栗柹梨柑榴橘柚之屬,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皆以倍直居之, 許生榷菓, ..
2화: 화끈하게 만냥을 빌려준 변부자 박지원(朴趾源) 許生長揖曰: “吾家貧. 欲有所小試. 願從君借萬金.” 卞氏曰: “諾.” 立與萬金. 客竟不謝而去. 子弟賓客, 視許生丐者也. 絲絛穗拔, 革屨跟顚, 笠挫袍煤, 鼻流淸涕. 客旣去. 皆大驚曰: “大人知客乎?” 曰: “不知也.” “今一朝. 浪空擲萬金於生平所不知何人, 而不問其姓名何也.” 卞氏曰: “此非爾所知. 凡有求於人者, 必廣張志意, 先耀信義, 然顔色媿屈, 言辭重複. 彼客衣屨雖弊, 辭簡而視傲, 容無怍色, 不待物而自足者也. 彼其所試術不小, 吾亦有所試於客. 不與則已, 旣與之萬金, 問姓名何爲?” 해석許生長揖曰: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吾家貧. 欲有所小試. “내가 집이 가난해서 조금 시험해보려는 게 있으니, 願從君借萬金.” 만 냥을 꿔주시기 바랍니다..
1화: 공부쟁이 허생, 7년 만에 세상에 나가다 박지원(朴趾源) 許生居墨積洞. 直抵南山下. 井上有古杏樹. 柴扉向樹而開. 草屋數間. 不蔽風雨. 然許生好讀書. 妻爲人縫刺以糊口. 一日妻甚饑. 泣曰: “子平生不赴擧. 讀書何爲?” 許生笑曰: “吾讀書未熟.” 妻曰: “不有工乎?” 生曰: “工未素學奈何?” 妻曰: “不有商乎?” 生曰: “商無本錢奈何?” 其妻恚且罵曰: “晝夜讀書, 只學‘奈何’. 不工不商. 何不盜賊?” 許生掩卷起曰“ 惜乎! 吾讀書本期十年. 今七年矣.” 出門而去. 無相識者. 直之雲從街. 問市中人曰: “漢陽中誰最富?” 有道卞氏者. 遂訪其家. 해석許生居墨積洞. 허생은 묵적골(墨積滑)에 살았다. 直抵南山下. 井上有古杏樹.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柴扉向樹而開. ..
6.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漠北行程錄序 1. (起辛亥止乙卯 凡五日 自皇城至熱河) 熱河 皇帝行在所 雍正時 置承德州 今乾隆 昇州爲府 在皇城東北四百二十里 出長城二百餘里 按志 漢時要陽白檀二縣 屬漁陽郡 元魏時 爲密雲安樂二郡邊界 唐時爲奚地 遼時爲興化軍 屬中京 金改寧朔軍 屬北京 元改屬上都路 皇明時爲朶顔衛地 此其古今沿革也 今淸一統 則始名熱河 爲長城外要害之地 自康煕皇帝時 常於夏月 駐蹕于此 爲淸暑之所 所居宮殿 不爲釆斲 謂之避暑山莊 帝居此 書籍自娛 逍遙林泉 遺外天下 常有布素之意 而其實地據險要 扼蒙古之咽喉 爲塞北奧區 名雖避暑 而實天子身自防胡 如元世草靑出迤都 草枯南還 大抵天子近北居住 數出巡獵 則諸胡虜 不敢南下放牧 故天子往還 常以艸之靑枯爲期 所以名避暑者此也 今年春皇帝 自南巡直北還熱河 熱河城池宮殿 歲增月加 侈麗鞏壯 勝於暢春 西山..
일신수필(馹汛隨筆) 馹汛隨筆序 (起辛卯 至己亥 凡九日 自新廣至山海關內 共五百六十二里 ) 徒憑口耳者 不足與語學問也 况平生情量之所未到乎 言聖人登泰山而小天下 則心不然而口應之 言佛視十方世界 則斥爲幻妄 言泰西人乘巨舶 遶出地球之外 叱爲恠誕 吾誰與語天地之大觀哉 噫 聖人筆削二百四十年之間 而名之曰春秋 是二百四十年之頃 玉帛兵車之事 直一花開木落耳 嗚呼 吾今疾書至此 而一墨之頃 不過瞬息 一瞬一息之頃 奄成小古小今 則一古一今 亦可謂大瞬大息矣 乃欲立名立事於其間 豈不哀哉 余嘗登妙香山 宿上元庵 盡夜月明如晝 拓窓東望 庵前白霧漫漫 上承月光 如水銀海 海底殷殷有聲如鼾鼻 寺僧相語曰 下界方大雷雨矣 旣數日出山 至安州 前夜果暴雨震電 平地水行一丈 漂民廬舍 余攬轡慨然曰 曩夜吾在雲雨之外 抱明月而宿矣 妙香之於泰山 纔㟝嶁耳 其高下異界如此 而况聖人之觀天下哉 彼..
배따라기 민요, 가장 구슬픈 노래 故我東大樂府, 有所謂排打羅其曲, 方言如曰船離也. 其曲悽愴欲絶. 置畵船於筵上, 選童妓一雙, 扮小校, 衣紅衣, 朱笠貝纓, 揷虎鬚白羽箭, 左執弓弭, 右握鞭鞘. 前作軍禮, 唱初吹, 則庭中動鼓角, 船左右群妓, 皆羅裳繡裙, 齊唱「漁父辭」, 樂隨而作, 又唱二吹三吹, 如初禮, 又有童妓扮小校立船上, 唱發船砲. 因收碇擧航, 群妓齊歌且祝. 其歌曰: “碇擧兮船離, 此時去兮何時來, 萬頃滄波去似回.” 此吾東第一墮淚時也 今張福親非父子, 義非主臣, 情非男婦, 交非朋友, 而其生離之苦如此, 則亦非獨江海河梁爲之地也. 異國異鄕無非別地. 해석 故我東大樂府, 有所謂排打羅其曲, 우리나라 大樂府 중에 이른바 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이 있는데 方言如曰: ‘船離也.’ 우리 시골말로는 배가 떠난다는 것이다. 其曲悽愴欲絶..
6. 중국의 촌구석도 잘 정비된 걸 보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다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 然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甞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羡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羡.”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해석 復至柵外, 望見柵內, 다시 책문 밖에 ..
1. 도로 너의 눈을 감아라 是日鴻臚寺少卿趙光連, 聯椅觀幻. 余謂趙卿曰: “目不能辨是非察眞僞, 則雖謂之無目可也. 然常爲幻者所眩, 則是目未甞非妄而視之明, 反爲之祟也.” 趙卿曰: “雖有善幻難眩瞽者, 目果常乎哉?” 余曰: “弊邦有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行則寄視於足, 執則寄視於手, 聽聲音而辨誰某則寄視於耳, 嗅臭香而察何物則寄視於鼻, 人有兩目而吾手足鼻耳, 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无所障礙, 未曾疑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瞙自開, 天地寥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胷, 手足鼻耳, 顚倒錯謬,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 ‘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曰: ‘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