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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8. 과잉 커뮤니케이션 VS 과소 커뮤니케이션 그레이스: 난 과학자라는 걸 잊지 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안 믿어. 제이크: 나비족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그레이스: 그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어? (……) 그녀를 봤어. 에이와는 정말 존재해. 제이크: 그런데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네이티리: 넌 강한 영혼을 가졌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지만 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레비스트로스는 현대사회를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문명과 문명 사이에 너무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서 서로의 문명을 끊임없이 모방하느라 점점 더 ‘차이’보다는 ‘획일성’이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A문명이 B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문명을 비교하고 정복하..
7. 나는 왜 ‘너’일 수 없는가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 하지만 그건 땅을 죽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일 뿐. 하지만 난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름이 있는 바위와 나무와 동물을 알아요. (……) 달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나요? 야생 고양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봤어요? 산의 목소리에 맞춰 합창할 수 있나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나요? (……) 한 번만이라도 얼마짜리인가 생각지 말고 그냥 주위의 풍요로움을 즐겨보세요. (……)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땅을 가진다 해도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없으면, 그건 가진 게 아니에요. -『포카혼타스』 ‘Colors of the wind’ 중에서 원주민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와 세련된 오리엔탈리즘, ..
6. 아바타의 신체가 거꾸로 인간의 영혼을 물들이다 에리봉: 돈키호테주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레비스트로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박해받는 자들의 옹호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돈키호테주의의 본질이 현재 너머에 있는 과거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끈덕진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훗날 레비스트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혹 존재한다면, 난 그에게 이 열쇠를 제공하고 싶군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50~151쪽. 문자 없는 부족들이 보기에 문명인의 가장 독특한 습관 중 하나는 ‘메모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종이 부족’이다. 혹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
5. 원시문명 그 속으로 들어가다 신화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온 것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 우리는 진화의 맨 꼭대기에서 살아가는 가장 우월하고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나무와 바위, 코요테, 독수리 물고기, 두꺼비들과 함께 각자의 목적을 완성하면서 삶이라는 성스런 고리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일 뿐이다. 그들 모두가 그 성스런 고리 안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으며,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2003, 495쪽. 레비스트로스가 원시문명 탐험을 떠났던 시기, ‘문자 없는 사람들’의 원시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말리노프스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 혹은 실용주의적인 관점. 이 관점에서는 ‘문자 없는’..
4. 내가 아닐 때, 가장 나답다? 저는 한 번도 제 개인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제 자신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든지 ‘나를’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종의 교차로입니다. -레비 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6쪽. 나비족의 여전사 네이티리는 평화로운 판도라를 침입한 외부자 제이크를 죽이려 하지만 불현듯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계시를 느끼고 차마 제이크에게 활을 겨누지 못한다. 나비족의 여신 ‘에이와’의 계시는 그녀를 비롯한 모든 부족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네이티리는 나비족 전체를 소집한 부족회의에서 제이크가 정말로 ‘에이와의 계시’에 적합한..
3. 복종과 해방 사이 언옵타늄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판도라는 단지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아직 판도라에 대한 정보를 ‘아바타 사용 매뉴얼’ 정도로만 습득한 제이크도 처음엔 그랬다. 그는 ‘건강한 다리’를 얻기 위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노동이 바로 아바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비참했다. 형의 비명횡사를 제대로 아파할 틈도 없이 형의 ‘대체재’로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전투)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가 형의 아바타, 아니 자신의 아바타가 될 생명체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연민과 비감이 교차한다. 너도 꼭 내 신세 같구나.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그저 주어진 삶의 매뉴얼에 복종해야 하는 구나. 그..
2. 언옵타늄을 찾아 판도라에 오다 신화는 한 집단의 인물들이 다른 집단의 인물들에게서 달아나고 도망치려고 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추격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 이것은 천상의 권력과 지상의 권력, 하늘과 땅, 또는 태양과 지하의 권력 등등 사이에 초래된 갈등일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01쪽. 하반신 마비로 고통 받는 전직 해병대 출신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투입되어 머나먼 행성 판도라로 향한다. 에너지 고갈 문제로 신음하던 인류가 마지막 희망으로 점찍은 행성이 바로 판도라다.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Na'vi)족이 사는 영토에는 ‘언옵타늄’이라는 신비로운 물질이 있다...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브리콜라주, 인류의 잃어버린 꿈의 조립법 1. 아마존의 눈물, 아바타의 비명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 적(敵)으로 만들어 빼앗아야만 하는가? -영화 『아바타』 중에서 신화적인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무의미하며, 불합리합니다. 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전 세계적으로 반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32쪽.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를 본 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온 세계가 무의미해졌다”, “판도라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네티즌의 반응도 흥미롭다. 키는 3미터를 훌쩍 뛰어 넘고 인간보..
20. 우리는 시간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마코토는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등장한, 호두처럼 생긴 타임 리프 기계를 과학실에서 찾아낸다. 미래로 다녀온 마코토에게 이 기계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녀는 타임 리프 장치를 잃어버려 노심초사하고 있을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시간을 되돌려 간신히 되찾은 치아키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마코토. 달리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치아키를 향해 달리는 마코토의 표정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도, 철없지도, 어리지도 않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의 문턱을 넘은 사람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마코토의 얼굴에서 배어나온다. 언제나 시간에 뒤처지던 그녀는 어느새 시간을 따라잡고, 시간이 더 이상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없도록, 시간의 중력에 휘둘리지 ..
19. ‘의미 없던’ 파편들이 의미를 안고 내 안에 깨어나다 한편, 치아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스케의 마음도 편치 않다. “난 그렇다 쳐도, 너한테도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널 좋아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치아키가 그렇게 말했어?” “딱 보면 알지. 몰랐냐? 하긴 넌 그런 데는 좀 둔하니까. 그래서 치아키가 더 말 못했는지도 몰라.” 치아키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마코토는 ‘이미 고백을 받았으나 그 고백의 시간을 말소해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마코토의 시간 속에서 이미 치아키는 고백을 했고, 그렇게 ‘들었으나 듣지 않은 고백’이 마코토를 뒤늦게 괴롭힌다. “나 정말 못된 애야. 치아키가 어렵사리 해준 얘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어. 난 왜 더 귀..
18. 지나간 시간은 사후적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유목민은 물론 움직이지만,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앉아 있다. (……) 유목민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그들은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있다. -들뢰즈· 가타리, 『천의 고원』2, 연구 공간 ‘너머’ 자료실, 2000, 165쪽.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61쪽. 왜 인간은 사건의 폭풍이 잦아들고 나서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일까. 지..
17.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다 그런데 그 순간. 고스케가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등 뒤에 태운 채 지나간다. 마코토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 했던, 아니 한 번 죽었던, 바로 그 기찻길 쪽으로. “마코토. 자전거 좀더 쓸게.” 마코토는 미친 듯이 달려가 고스케를 부르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고스케와 소녀는 그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마코토는 고스케를 향해 절규한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 순간. 타임 리프를 암시하는 화면이 지나간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고스케를 향한 그 피투성이 외침을 ‘무정한 시간’이 들은 걸까. 믿을 수 없는 마법처럼, 시간이 정말 멈춰버렸다. 길 위에 북적이던 사람들, 하늘을 나는..
16. 뭐 아무렴 어때 사유는 (……) 나 이외의 타자가 되기 위해 행해지는 모든 작업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심문하는 방법이다. -푸코, 폴 라비노우와의 인터뷰 중에서 타임 리프를 하기 전까지, 마코토에게 시간은 단지 ‘지켜야 할 시간’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간’으로 나뉘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간(학교를 중심으로 구획되는 기계적 시간표)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그녀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시간). 그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란 뭔가 독특한 외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그녀의 시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마코토는 조금씩 깨닫는다. ‘나의 시간’이란 무중력 상태의 물체처럼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5. 무한한 지성으로 시간을 움켜쥐려하다 수줍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가 드디어 고스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치 고스케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도 되느냐는 허락(?)을 마코토에게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중학생 때였어요. 저희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에 쿠라노세 고등학교 자원봉사부가 왔었는데 할머니는 그 중 한 학생이 아주 맘에 드셔서 그 사람 얘기를 많이 해주셨죠. 참 착하고 멋진 남학생이라면서, 몇 번이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계속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듣다 보니…….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이 점점 좋아졌어요.” 마코토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새 이 이름 모를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감탄한다. “와, 정말 예쁜 이야기네.” 여학생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
14.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인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나무를 낳은 목각상처럼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스, 고봉만 · 유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2005 마코토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불현듯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 한 점을 ..
13. 비자발적 기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고통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체현하려고 태어났다. -조 부스케(Joe Bousquet)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기억하고 싶은 것’을 더 명료하게 인지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압하거나 삭제하면서 비공인 타임 리프를 하고 있다. 어떤 시간에 분명히 그곳에 있었는데 완전히 그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 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A와 B가 함께 있었는데, A는 그 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B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B는 일종의 타임 리프를 한 셈이다. A에게는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 B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12.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공격한다 저장하고 싶지 않았던 그 기억들은 애초의 내 의도와 달리 내 등 뒤에서 배회하며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고 있다. 타임 리프로 인해 나는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하여 내가 감독한 나만의 ‘UCC형 기억’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되돌리고 싶었던 바로 그 과거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버린 나의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내 삶을 응시하고 있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내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만 같다. 나는 (……)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
11. 기억을 지배하는 인간 vs 인간을 지배하는 기억 호글런드는 아내를 간병하다가 잠시 침대를 떠나 휴식을 취했다. 침대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서 오랫동안 어디에 가 있었느냐는 심한 불평을 들었다. 사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아주 짧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경과한 시간은 그보다 아내에게 더 길게, 그것도 실제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그러잖아도 생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호글런드는 ‘화학적 시계’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두뇌나 신체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모종의 화학적 과정을 가리킨다. 물리화학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화학적 과정은 열을 받을 경우 속도가 증가하게 마련이므로 호글런드는 아내의 시계가 높은 체온에 의해 열을 받아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감으로써..
10. 중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거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아이온의 시간 무한일 필요가 없는 이 시간, 단지 “무한히 분할될 수만” 있으면 되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그것은 바로 아이온이다. (……)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동일한 시간성의 세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가 완전하고 독자적인, 또 시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두 측면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한계 지어지는, 원인들로서의 물체들의 활동과 이들의 혼합 상태를 측정하는 현재(크로노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한계지어지지 않으며, 효과들로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을 표면에 모으는 과거와 미래(아이온)가 존재하는 것이다.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136쪽. 타임 리프가 마코토의 삶에 던져준 메시지는 ‘네 맘대로..
9. 크로노스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 신들은 시간을 구별하는 법을 처음 알아낸 사람을 저주한다. 또한 이곳에 해시계를 세운 사람도 저주한다. 나의 하루를 마구 깎고 쪼개어 작은 조각들로 만들었다고! 어렸을 때 나의 배는 나의 해시계였다. 어느 누구의 배보다 확실하고 올바르고 정확한 시계였다. 이 시계는 내게 밥 먹을 때를 말해줬다. 하지만 지금은 태양이 허락하지 않으면 왜,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시내에는 이런 저주스런 해시계들이 가득하다. -기원전 3세기 후반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역, 『시간의 발견』, 휴머니스트, 2002, 145~146쪽. 시간이 ‘의식’되는 순간,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내 몸이 느끼는 시간’의 고유..
8. 돌아가는 시간과 돌아가지 않는 마음 마코토: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잘 챙겨주겠지? 치아키: 그럴 녀석이지. 마코토: 그럼 같이 야구 못하잖아. 치아키: 캐치볼을 야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마코토: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각해서 고스케한테 잔소리 듣고, 공 못 잡는다고 치아키한테 놀림 받고……. 치아키: 마코토……. 마코토: 응? 치아키: 나랑……. 사귈래? 마코토는 생각지도 못한 치아키의 고백에 당황한다.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느낌, 고스케의 잔소리와 치아키의 핀잔 속에서 은근히 보호받는 듯한 그 행복한 느낌. 그것은 ‘커플’이라는 성숙한 관계,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와는 거리가 먼,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관계의 기..
7. ‘현재’라는 말뚝에 고정된 한계 내에서 진행되는 크로노스의 시간 시간은 스승이 없는 자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라비아 속담 고스케와 치아키와 마코토. 세 사람은 방과 후 매일 캐치볼을 하고 함께 집에 돌아가는, 그들만의 우정이 창조하는 시간의 리듬을 즐긴다. 마코토의 일과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의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의 시간표로 분절되는 기계적 반복의 시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자유로운 유희적 시간,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휴식과 몽상의 일상적 시간. 이 시간의 삼각형은 마코토의 삶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축이었다. ‘타임 리프’의 능력을 이용해 시간의 퍼즐 놀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지금, 마코토는 하루하루가 날아갈 듯 행복하다. 그런데 아무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를 구사한다 할..
6.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 다시 시작된 7월 13일. 마코토는 그토록 좋아라 하던 늦잠도 팽개치고 일찍 일어나 부리나케 학교에 나가며 가족과 친구들을 놀래게 만들고, 가정 시간에 했던 실수도 ‘다른 남학생’에게 떠넘기고, 쪽지 시험도 무진장 잘 보며, 평소처럼 야구를 하지 않고 노래방에 가서 절친 치아키와 고스케에게 10시간도 넘는 ‘노래방 런닝타임’을 선사해준다.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하거나 온몸을 던져 곳곳에 충돌하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타임 리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타임 리프 능력으로 그녀가 고안해낸 가장 ‘즐거운 일’들은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바꿔치기하는, 거창한 시 간여행이 아닌 자잘한 시간의 소꿉놀이다. 이모를 만나 타임 리프의 이점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마코토의 표..
5. ‘내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타임 리프 능력을 갖게 된 마코토처럼 시간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시간을 매일 반복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사랑의 블랙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국가대표 에고이스트인 TV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래이)다. 그는 매년 2월 2일에 개최되는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를 위해 펜실베니아의 펑추니아 마을을 방문한다. 성촉절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2월 2일에 마못(북미산 다람쥐)이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나 길어진단다. 함께 일하는 PD인 리타(앤디 맥도웰)의 눈에 비친 필은 출세와 성공에만 눈이 먼데다가 공격적인 시니컬함으로 무장하여 타인에게 상습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한..
4.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일까 하루 종일 좌충우돌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집으로 가려는 마코토에게 또 한 번의 끔찍한 ‘머피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기찻길까지 내려오는 급경사 길에서 신나게 질주하던 중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이 순간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마코토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라 정지된다. 죽기 직전의 마코토는 생각한다. “오늘이 만약, 오늘이 만약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잊고 있었어. 오늘은 최악의 날이란 걸. 설마 했는데 죽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일어날걸. 늦잠을 안 잤으면 지각도 안 했을 테고 튀김도 더 잘 튀겼을 거고 어리바리한 남자애한테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데 눈을 ..
3.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쪽.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
2.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 타임 리퍼(time leaper)와 투명인간은 ‘주체의 책임’을 삭제함으로써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게 한다. 타임 리프나 투명인간 되기는 신의 권능을 훔치는 일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쾌감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난 모범생도 아닌,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소녀인 마코토는 이 눈부신 초능력을 다소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거나 동생이 푸딩을 꿀꺽 집어삼키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같은, ‘정말 시답잖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능력을 이토록 하찮은 일에 써먹는 소녀의 천진함이야말로 이 소녀에게 ‘타임 리프’라는 위대한 능력이 주어질 자격이 있음을 ..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1. 시간의 단위는 무엇일까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336쪽. 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슬쩍 낚아채어, ‘헤이, 그만 좀 달리고 웬만하면 쉬어 가지 그래?’라고 속삭일 것 같은 소녀. 등교시간의 압박과 알람시계의 난리법석만 없다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눈길을 끄는 모든 장소마다 기꺼이 멈춰 요리조리 두리번거릴 것만 같은,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오지랖을 펄럭이는 명랑 소녀 마코토. ‘차라리 지각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친구의..
15. 사랑은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결점이 눈에 띌수록, 더욱 완전해지는 신비다 동화들은 흔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슈렉2』와 『슈렉3』는 간신히 서로의 사랑으로 맺어진 슈렉과 피오나 커플이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아무리 위대한 커플이라도 ‘결혼’만 했다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는 수많은 추억의 퍼즐들이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행복’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단지 주어진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행복은 불행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
14.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 여성적 윤리는 죽지 않는 것, 사랑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우리는 ‘아브젝트’가 추방되고 사형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조스』에서 끔찍한 식인 상어들은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처치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시체에서 나온 잔해들로 만든 ‘괴물’은 인간의 지혜로 살해되었으며, 『괴물』에서는 힘없는 소시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기를 통해 ‘어쨌든’ 괴물을 소탕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반드시 퇴치되는, 주인공에게 가장 ‘적대적’인 조연급 배우였다. ‘괴물’이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등장하거나 누구나 분노할 만한 엄청난 죄를 지은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괴물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
13.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슬픔은, 그 사람이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생각되는 타인에 대한 숨겨진 공격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불완전하며 텅 빈 원초적 자아의 증거이다.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근본적인 결함, 선천적인 결여로 인해 고통 받는다고 생각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스스로를 향한 타인들』(1989) 중에서 슈렉은 슬픔을 방패로 삼아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마침내 거대한 슬픔의 커튼 뒤에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슈렉은 슬픔의 벽돌로 지은 마음의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슈렉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없이 오랫동안 자기만의 늪에 갇혀 지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절망은 처음에는 슬픔의 ‘원인’이었지..
12.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 편협함 동키: 슈렉, 난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슈렉: 이봐,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나는 너랑 같이 살지 않아. 난 혼자 살아! 내 늪! 나! 딴 사람은 아냐! 알겠어? 다른 사람은 싫어! 특히 쓸모없고 짜증나는 말하는 당나귀는 필요 없어! 마침내 파쿼드 영주는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의 ‘실물’을 보게 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즉석에서 청혼한다. 전리품을 챙기듯 피오나 공주를 차지하려는 파쿼드의 부담스런 프러포즈.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님, 완벽한 신랑의 완벽한 신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완벽한 신랑과 완벽한 신부의 조합. 파쿼드가 꿈꾸는 결혼은 신랑 신부의 계약을 통해 재산과 권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피오나 공주의 섹시함은 이 결혼으로 인해 쟁취할 경제적 ·정치적 가치..
11. 사랑은 불안과 슬픔과 혼돈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동키: 당신은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어요. 흠, 거짓말이었고요, 사실 못 생겼어요. 하지만 밤에만 그렇잖아요. 슈렉은 하루 종일, 24시간 못생겼어요. 피오나: 동키, 나는 공주야, 공주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 동화 속에 나오는 각종 도깨비, 다양한 괴담 속에 존재하는 ‘귀신’들이 매혹과 공포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야말로 크리스테바가 말한 ‘아브젝시옹’의 대표적 대상들이다. 그 더러움과 끔찍함이 ‘우리’의 정체성을 더럽힐까 봐 추방하고 배제했던 아브젝트들. 우리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를 밀어내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슈렉』..
10. 동화의 철책에 갇힌 주인공들 동키: 두 사람 서로 좋아하잖아. 이봐. 슈렉, 감정을 무시하면 안 돼. 그녀에게 네 감정을 말해 줘. 슈렉: 안 돼. 그녀는 공주야. 나는, 나는…… 동키: 괴물이라고? 오랫동안 성 안에 갇혀 있던 공주답지 않게 우울증의 기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명랑소녀 피오나. 특히 동화 속 캐릭터 중 하나인 로빈 후드가 나타나 그녀를 슈렉에게서 빼앗아 가려하는 대목에서 명랑소녀 피오나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전 당신의 구원자입니다! 당신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저 녹색 괴물로부터!” 잘난 척, 잘생긴 척, 멋진 척은 혼자 다 하는 로빈 후드에게 슈렉이 괴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피오나는 『미녀삼총사』의 유쾌한 패러디 액션으로 로빈 후드 일당을 일거에 퇴치해버린다. 슈렉의 엉덩..
9.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슈렉: 당신은 제가 상상했던 공주하고는 좀 다르네요. 피오나: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판단을 내리면 안 되겠죠. 나는 가끔 ‘사람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이유를 따지기도, 말하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려면 결국 우리 자신의 치부(恥部)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존재, 그 한계를 똑바로 노려보기엔 우리의 자의식이 너무 견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블랙리스트는 곧 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숨기고 싶은 마음의 카탈로그이기도 한 셈이..
8. 동화 속의 세계는 너무 안전하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소모되어버린, 추방되어 사실상 굶고 있는 나를 보라. -디즈니 에니메이션 『인어공주』 중에서, 마녀 어슐라의 대사 디즈니가 각색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막판에 주로 악당이 살해되거나 마녀가 추방된다. 소름끼치고 역겨운 것들을 반드시 배제해버려야만 세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긋, 디즈니형 애니메이션은 동화에서 선악의 경계, 미추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도 그럴까. 디즈니의 ‘우월한 유전자’를 향한 지독한 선망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주체성을 희생시켜서라도 ‘안전한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질병 아닐까. 슈렉은 피오나를 구하지만 피오나는 자신의 ‘이상형’에 슈렉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으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자..
7. 코라(chora): 내가 버린 나의 가능성들의 총집합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이 괴물은 신비스럽잖아요? -영화 『미녀와 야수』 중에서, 야수를 죽이려는 주민들의 목소리 슈렉은 동키와 함께 피오나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 이 모험의 첫 번째 난관은 거대한 용암 위에 펼쳐진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도진 듯 벌벌 떠는 동키를 보며 슈렉은 우리가 함께이니 괜찮다고 말해준다. “동키, 내가 바로 옆에 있잖아, 걱정 마. 천천히 건너가면 되는 거야. 밑을 보지 말구.” 아래를 쳐다보지 말라는 슈렉의 경고를 어긴 동키는 두려움에 질려 더 이상 못가겠다고 버티고, 슈렉은 특유의 재치를 발휘해 동키가 오히려 다리를..
6. 미처 발현되지 못한 우리 안의 가능성 아브젝시옹은 ‘자기 자신’에게 ‘다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추방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주체성의 경계를 한정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111쪽. 아브젝시옹이 ‘나답지 않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추방하는 과정이라면, 아무것도 몰아내지 않고 품어내려는 열정, 자기를 가득 채우는 것에서 힘을 얻는 것이 ‘코라(chora)’다. 코라는 단지 생성하는 모든 것들의 저장소가 아니라 모든 생성의 유모 같은 존재다. 코라의 속성은 안정감이나 균형의 유지가 아니라 불안, 불균형, 불규칙, 동요 그 자체를 끌어안는 엄청난 에너지의 파동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 갈등하다가도 언젠가는 화해하고, 법률과 규칙..
5. ‘세균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버려지는 타자들 내가 그녀이고, 그녀가 나인데, 어떻게 그녀를 증오할 수 있을까? -줄리아 크리스테바 내 안의 더럽고 역겹고 불쾌한 모든 것들, 그건 내 것이 아니야. 그것들만 사라지면, 난 완벽해질 수 있어. 각종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마초형 남성 파쿼드 영주는 그가 통치하는 ‘완벽한 세상’을 망치는 주범으로 동화나라의 주인공들을 지목한다. 파쿼드는 과자인형을 잔인하게 고문하며 동화나라 캐릭터들의 행방을 묻는다. “너와 이상한 요정 생물들이 내 완벽한 세상을 망치고 있다. 다들 어디 갔지?” 의리로 똘똘 뭉친 과자인형은 동화나라 생물들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는다. 한편, 백설공주의 계모가 애용하던 ‘말하는 거울’을 공수해온 파쿼드는 자신의 ‘미모’가 아니라 ‘왕국’..
4. 인권과 주거권을 탈환하기 위한 모험에 나서다 그들은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평가해버려(They judge me before they even know me). -영화 『슈렉』 중에서.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배제하는 사람들. 슈렉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쳐버렸다. ‘판단’은 바로 차별과 배제의 전초전이다. 아기들은 악취에 코를 찌푸리지 않는다.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를 분별하는 기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어른들은 악취, 특히 부패로 인한 악취에 매우 민감하다. 부패한 생물에 풍기는 악취, 그것은 바로 ‘죽음’의 냄새를 연상시키기에. 사람들은 슈렉에게 가까이 와서 그를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괴물은 냄새나고, 더럽고, 혐오스런 존재’라는 편견의 울타리 밖으로 슈렉을 밀어낸다. ..
3. 동화 속 생물들이 모여든 곳 ‘바람직한 주체’로 사회화되기 위해 현대인은 자기 안의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고 ‘나다운 것’의 경계를 구축해야 한다. 보다 깨끗하고, 보다 적절한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야생적 본능을 버려야 한다. 부패한 우유, 똥, 구토물, 시체들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하듯이 우리는 ‘한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억압하거나 배설해버린 욕망들’을 자아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추방하고자 한다. 크레스테바는 이렇게 문명화한 현대인의 자아, 그 경계바깥에 추방된 존재들을 ‘아브젝트’라 불렀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개발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다채로운 욕망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억압된 것의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적어도 인간의 ‘부끄러운 욕망’은 무의식 ..
2. 괴담 주인공의 실체 ‘아브젝트(abject)’는 우리가 혐오하고, 거부하고, 거의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시큼한 배설물, 심지어는 어머니의 과격한 포옹도 여기에 속한다.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92쪽. “사람들은 날 보면 하다 못해. 으악! 못생기고 냄새나는 괴물이다!” 슈렉은 한 번도 ‘이름’을 제대로 불려보지 못한 존재다. 이름 불린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친밀성을 만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문턱이다. 이름 불리지 못하는 슈렉은 단지 ‘괴물’일 뿐이며 존재하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타자다. 괴물 주의! 괴물 수배 중! 현상금 있음! 그가 사는 주변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팻말이 흩어져 있다. 사람들은 현상금이 ..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행동은 오직 반항의 대가로만 존재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나면 종종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결말의 주인공의 되지 못한 존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들은 어른들의 말처럼 죽거나 사라지거나 개과천선(改過遷善)했을까. 내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준 마녀가 아직도 복수심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심술쟁이 언니들이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채 ‘결혼 시장’을 헤매고 있었으며,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된 ..
14.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
13. 무한미디어, 사회를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 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
12. 낭만적 환상에만 만족하는, 뉴랜드의 순수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11.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한, 뉴랜드의 순수 메이의 순수가 ‘결점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깝고, 엘렌의 순수가 ‘진심을 숨길 수 없는 정직함’에 가깝다면, 뉴랜드의 순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에 가깝다. 뉴랜드는 다른 귀족에 비해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세상물정에 둔감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엄청난 독서광이며 뛰어난 예술적 감식안을 지닌 뉴랜드는 책과 그림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의 내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이 책보다 흥미진진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현실은 그가 좋아하는 책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10.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과 ‘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
9.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순수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육화된 문화적 불평등이 평생 지배/피지배의 권력구도를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의 국가기관에 배치된 인력 분포를 보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중 90% 이상이 상층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입할 때 90% 이상 실업계로 진로를 결정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노동..
8. 메이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 1921년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던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흑인뿐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인종주의가 클라이맥스에 달했던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황인종의 이민이 홍수를 이루자 미국인들은 이것을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 선포한다. 1882년에는 중국인의 이민을 합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남부 유럽인들도 ‘반몽고인’이기 때문에 중국인과 똑같은 법을 적용해 이민을 금지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백인들은 황인종의 카테고리에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 피부색이 옅은 흑인, 유태인, 폴란드 인, 헝가리 인, 이탈리아 인, 아일랜드 인까지 포괄하여 ‘다인종사회의 위협’을 가시화..
7. 몸의 속삭임에 굴복한 마음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꿈쩍하지 않는 육체’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결코 돕지 않는 남편들. 아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가상하지만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육체의 무관심’이야말로 갈등의 씨앗이다. ‘작업’ 중인 여자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매너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여성 동료에게는 ‘커피나 타 와, 프림 둘 설탕 하나!’라고 외치는 남성들. 뮤지컬 『헤드윅』에 열광하면서도 막상 실제 트렌스젠더와 마주치면 쭈뼛쭈뼛 움츠러드는 사람들.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막상 아이비리그 출신을 보면 ‘역시 달라’라고 느끼며 몹시 우..
6. 너는 우리와 달라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 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5. 아비투스의 딜레마,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영화 『프리티 우먼』은 거리의 창녀가 3일 만에 초특급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경이로운 속성 엘리트 코스를 보여준다. 그녀가 부르주아들의 천국으로 입성하는 티켓은 바로 ‘신용카드’였다. 루이스(리처드 기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고용’한다. 처음에는 밤의 파트너로, 나중에는 사교모임에 대동할 파트너로.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저녁 약속에 어울릴 만한 ‘품위 있는’ 의상을 사 입고 오라며 현금을 두둑이 건네지만, 싸구려 탱크탑을 걸친 비비안의 ‘행색’을 본 명품매장 직원은 비비안을 냉대한다. “당신에게 맞는 옷은 여기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루이스는 비비안을 직접 데려가 최고급 명품 매장의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루이스..
4.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 메이의 금욕주의는 약혼자인 뉴랜드마저 답답하게 한다. 뉴랜드는 곧 결혼할 사이임에도 키스 한 번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사교계의 분위기에 숨막혀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접은 종이에서 오려낸 인형들처럼 서로 닮았소. 판박이 벽지 무늬처럼 똑같지.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새삼 놀랄 것이 있겠소?” 메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요?” 뉴랜드가 왜 좀더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항변하자 메이는 그녀 특유의 순백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주인공들처럼 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렌을 통해 자유의 은밀한 속살을 엿본 아처는 메이를 다그친다. “왜 안 되지?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메이는 약혼자의 평소와 달리 집요한 태..
3.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다 『순수의 시대』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 그들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의 유행을 원시사회의 토템만큼이나 숭배하고, 유럽의 파티 매너나 테이블 세팅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탈출했으면서도 ‘앙시앙 레짐’ 시기의 유럽보다 오히려 악랄한, 원본보다 더 징글징글한 복제품 귀족사회를 구축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뉴랜드 아처 또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취향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파리 귀족의 저택을 본뜬 건물 외관과 인테리어를 숭배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의 가구와 나폴레옹의 뛰를리 궁전의 유품에 둘러싸여 여왕처럼 군림하는 삶을 동경했다. 메이와 뉴랜드가 속한 귀족사회..
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 귀족문화의 퍼레이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재현한 1870년대 뉴욕 상류층은 지금의 뉴요커와 판이하게 다른 패션과 인테리어로 무장하고 있다. 1993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영화의 명성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빈틈없이 기획된 드레스와 분장, 소품과 인테리어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그들에게 옷은 단지 ‘날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은 걸릴 듯한 ‘그들만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저 옷을 입고 화장실엔 어떻게 갈까’라는 관객의 엉뚱한 상상을 부추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1. ‘구별짓기’의 디스토피아: 짝퉁에도 등급이 있다? 거리를 배회하던 창녀가 우아한 드레스를 떨쳐입고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릴 때(『프리티 우먼』), 감옥의 죄수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난생처음 예술의 감동을 만끽할 때(『쇼생크 탈출』), 우리는 왜 달콤한 해방감을 느낄까. 영국 국무총리가 미국 대통령의 야코를 납작하게 만든 후 총리 관사를 휘저으며 막춤을 추고(『러브 액츄얼리』),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평범한 서점 직원과 사랑에 빠져 눈물 흘릴 때(『노팅 힐』),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영화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될까.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런 파격적인 ‘계급 배반’의 환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실현되는 행..
18. 추억이 없는 곳, 그리하여 원한도 없는 곳으로 레드는 브룩스의 안타까운 죽음과 앤디의 믿을 수 없는 탈주 사이에서 고민한다. 마트에서 일하다가 “화장실 가도 될까요?”라고 묻는 레드에게 지배인은 말한다. “일일이 묻지 말고 가고 싶을 때 가시라고요.” 레드는 스스로에게 놀란다. “40년 동안은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허가 없인 한 방울도 쌀 수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밖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죠. 일부러 죄를 지어 쇼생크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었죠. (……) 내가 원하는 건 감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두렵지는 않으니까요. 제 발목을 잡은 한 가지는 앤디와의 약속이었습니다.” 감시의 눈길을 피해 주거지를 이탈하여 앤디가 말했던 벅스톤으..
17. 이 책에 구원이 있었소 다음날 쇼생크 감옥 초유의 실종 사건이 일어난다. 앤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가장 피가 마르는 것은 노튼 소장이다. 앤디와 가장 친했던 레드를 붙들고 늘어지는 소장. “늘 같이 있었잖나? 뭔가 말한 게 있을 텐데?” 레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기적이 일어났군. 귀신처럼 사라지다니! 흔적도 없이! 돌 몇 개와 여자 사진만 남겨놓고!” 소장은 길길이 날뛰다가 앤디의 방 여기저기로 돌을 집어던지고 그러다가 라켈 웰치의 멋진 포스터를 맞힌다. 그 순간 아름다운 리타 헤이워드 이후로 앤디의 방을 늘 지키고 있었던 여신의 육체가 숨겨준 비밀의 문이 드러난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드디어 앤디의 머릿속에 살고 있던 모차르트를..
16. 절망에 빠진 이의 넋두리? 우리 청각의 한계. ―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 -니체, 안성찬 · 홍사현 역, 『즐거운 학문』, 책세상, 2005, 231쪽. 노튼 소장은 전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앤디를 협박한다. 그는 앤디를 더욱 충실한 개로 만들기 위해 토미를 죽이고도 천연덕스럽게 뻔뻔한 거짓말을 읊어댄다. “토미 말이야. 출옥이 1년도 안 남은 놈이 탈옥하려고 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었어. 하들리도 쏘며 괴로워했지. 그 문제는 끝났네. 이제 우리 일을 해야지.” 1달 동안의 독방 생활로 걷잡을 수 없이 초췌해진 앤디는 소장의 제안을 거부한다. “난 안 하겠습니다. 모든 게 끝났어요.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노튼은 더욱 잔인한 미소로 앤디를 옥죈다. “끝난 건 없어. 끝나면 넌 살아..
15.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앤디는 비로소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깨닫고 노튼 소장의 마지막 양심에 호소한다. 토미의 증언이 있으면 자신이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이미 앤디를 자신의 ‘충직한 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던 노튼 소장은 앤디의 석방이 곧 자신의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살인자는 지금 어디 있다고 하던가? 그자가 무릎을 꿇으며 잘못했으니 벌을 대신 받겠다고 할 줄 아나?” 그는 앤디를 설득하려 하지만 앤디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토미의 증언이면 다시 재판 받을 수 있어요.” 노튼 역시 필사적이다. 앤디가 쇼생크를 떠나는 순간 자신의 호시절이 끝날 것이라는 예감에 몸을 떤다. 19년 무고한 감옥 생활 동안 한 번도 분노하지 않았던 앤디는 드디..
14. 억울한 누명의 진실이 밝혀지다 예언자적 인간이 고뇌에 가득 찬 인간이라는 것을 그대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저 그들에게 훌륭한 “재능”이 주어졌으며, 그대들도 이 재능을 가졌으면 하고 생각할 뿐이다. ― 그래서 나는 비유를 통해 내 생각을 표현하고자 한다. 동물들이 대기와 구름의 전기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겠는가! 동물 중의 몇몇 종들은 날씨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례로 원숭이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을 예언자로 만든다는 것은 ― 생각하지 않는다! 강력한 양전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구름의 영향으로 인해 음전기로 변하여 날씨의 변화를 일으키려 할 때, 이 동물은 마치 적이 다가오고 있..
13. 꿈의 마그마가 뜨겁게 꿈틀대다 앤디는 정말 일주일에 두 번씩 주 의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쇼생크 도서관을 최고의 감옥 도서관으로 만들기 위한 앤디의 ‘허황된’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앤디가 쇼생크에 입성한 지 13년째 되던 1959년, 드디어 주 의회는 200달러만으로는 앤디의 끈질긴 편지 공세를 무마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주 의회는 매년 500달러씩 쇼생크 도서관에 보조한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앤디는 주 의회의 생색내기용 일회적 지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인 문화적 지원을 바랐다. 아마 그가 떠나도 쇼생크에 계속 ‘우리 안의 모차짜르트’를 들려줄 DJ가 필요하다고, ‘우리 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불러내 줄 수많은 책이 필요하다고, 그는 상상한 것이 아닐까. 앤디는 여기서 그치..
12. 내 머릿속에는 모차르트가 살고 있다 질투 없는 눈. 그래, 그의 눈에는 질투가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그를 존경하는가? 그는 너희들의 존경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는 독수리의 눈을 지니고 있다. 그는 너희들을 보지 않는다―그는 별들을, 별들만을 바라본다. -니체, 안성찬 · 홍사현 역, 『즐거운 학문』, 책세상, 2005, 51쪽. 일일 DJ로 활동한 앤디는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듯 편안하게 『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한다. 소장과 간수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문 열어! 열라니까! 경고한다! 꺼라! 넌 이제 죽었어!” 노튼 소장은 믿었던(?) 앤디의 도발에 분노하고, 앤디는 2주간 독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 독방은 사람은 물론 빛도 소리도 책도 없는 ..
11. 노랫소리에서 비릿한 자유의 향기를 맡다 한편 앤디는 6년 동안 주 의회에 도서 기금을 요청했던 편지의 답신을 드디어 받아낸다. “당신의 거듭된 요구에 도서기금을 동봉합니다. 도서기금 200달러와 더불어 지방도서관에서 헌책과 잡동사니를 보냅니다. 이제 만족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문제가 해결됐으니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마십시오.” 앤디의 편지를 모른 척하고 싶었던 당국은 6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편지를 보내는 앤디의 열정에 항복하고 만다. 간수가 앤디의 성과를 축하하며 6년씩이나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치하하자, 앤디는 말한다. “겨우 6년밖에 안 걸렸어요. 이제는 일주일에 두 통씩 써야겠어요.” 간수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앤디는 주 의회가 보낸 잡동사니 중에서 모차르트의 음반을 발견한다. 그는 ..
10. 벽을 증오하다가, 벽에 길들여지다가, 마침내 벽에 의지하게 되다 형벌. ―기이한 것이다. 우리의 형벌이라는 것은! 그것은 범죄자를 정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속죄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범죄 그 자체보다도 범죄자를 더럽힌다.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251쪽. 감옥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어져 마치 감옥의 벽돌처럼 감옥의 일부가 된 사람들. 그 중에 브룩스가 있었다. 브룩스는 50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기에 감옥을 빼놓고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죄수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독서를 권하는 일은 브룩스를 감옥에 갇힌 ‘죄수’라기보다 더없이 충실한 ‘사서’처럼 보이게 한다. 브룩스의 표정은 언제나 편안하고 만족스러워서 그를 바라보..
9. 성경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 쇼생크의 죄수들은 앤디의 폭발적인 인기를 실감하며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한다. “간수가 죄수한테 별 아양을 다 떨더군.” “앤디가 간수들을 아주 가지고 놀았구먼?” 앤디는 털끝만큼도 우쭐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한다. “난 안 그랬어. 그저 재정 자문을 해 주는 죄수일 뿐이야. 귀여운 강아지지.” 죄수들은 세탁소의 고된 잡무에서 벗어난 앤디를 부러워하며 말한다. “귀여운 강아지니까 세탁소에서도 빼준 건가?” 앤디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한다. “그 이상이지, 도서실을 확장할 거야.” 그는 언제나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자신의 사용법’을 찾아낸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앤디의 두 눈에는 언제부턴가 은밀한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주..
8.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고통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혹은 작은 고통에도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빨리 없애고자 한다. 고통을 제거해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을, 니체는 거부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그는 이미 충분히 존재하는 고통을 더 높은 강도로, 더 힘겨운 것으로 부풀린다. 주어진 위험을 오히려 극대화하는 자, 이미 넘쳐나는 고통을 천 배로 부풀리는 자, 그리하여 불행을 기꺼이 짊어진 채 불행을 샅샅이 해부하고 마침내 불행을 영혼의 창조에 이용하는 용기를 지닌 자, 그가 바로 초인이다. 불행을 피하는 데 급급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안락함, 그것은 니체가 보기에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종말’이다. 현재의 불행은 단지 미래의 ..
7. 감옥에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하다 대부분의 죄수는 감옥 생활에 다만 ‘적응’하려 한다. 이미 적응된 사람은 적응을 뛰어넘어 감옥 생활에 애착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런데 앤디는 뭐가 그리 바쁜지 머릿속으로 늘 딴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도 그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 그는 주어진 노동만 간신히 해내기도 바쁜 다른 죄수들과 달리, 틈만 나면 없는 일도 굳이 만들어낸다. 간수 하들리의 골치 아픈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준 이후로 그는 감옥 안에서 인간 ― 은행이자 인간 ― 세무서가 된다. 하들리의 입소문 마케팅 덕분에 그는 주변 간수들의 모든 세금 환급을 담당해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뿐만 아니라 신참 죄수 토미를 가르쳐 검정고시에 합격하게 ..
6. 모든 곳이 감옥이다,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한 그대처럼 정처 없는 자들은 결국 감옥조차도 행복한 곳으로 여기게 된다. 그대는 일찍이 갇혀 있는 범죄자들이 잠자는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그들은 조용히 잠을 잔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안전을 즐기는 것이다.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442쪽. 원룸에서는 숨바꼭질을 할 수 없다. ‘원룸’이라는 현대적 공간의 치명적인 단점은,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침대와 책상(휴식과 노동)을 한 공간에 몰아넣고,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한곳에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밀폐된 동심원적 공간에서는 방 안의 어느 지점에 앉아도 침대와 책상이 동시에 보일 수..
5. 내가 떠나온 세계,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사람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 (……)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
4. 강자는 끊임없이 각자 흩어지려 하고 약자는 집요하게 서로 무리 지으려 한다 보그스는 샤워장에서 앤디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며 추파를 던진다. “이봐, 너 아직 싱싱하지? 아직 아무도 안 건드렸지? 우린 모두 친구가 필요해. 네 친구가 돼줄게. 짜식, 좋으면서 내숭 떨기는!” 앤디는 뱀처럼 감겨오는 보그스의 시선을 무심하게 떨쳐낸다. 그러나 사건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세탁장에서 노역을 하던 앤디는 가루비누가 떨어졌다는 동료의 말에 묵묵히 창고로 발걸음을 향한다. 창고에는 이미 계획하고 있던 듯 보그스 일당들이 앤디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떼 지어 덤벼들어 한 사람을 겁탈하려 한다. 앤디는 가루비누를 움켜쥔 채 “이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어.”라고 위협해보지만 사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여러 명의 건장..
3.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그 다름은 무엇일까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평균적인, 공동의 체험’을 강요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길들여온 가장 심각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 속담을 듣는다면 아마도 니체는 치를 떨지 않을까. 모난 것이 과연 ‘나쁜 것’인가, 그 ‘정’은 도대체 누가 내려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 현실이 ‘옳다’는 것인가……. 니체는 아마도 수없는 질문을 퍼부으며 모난 돌을 ‘다른 돌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비겁한 권력의 맨 얼굴을 파헤치지 않을까. 니체가 혐오한 약자의 근성은 바로 ‘무리 지어’ 다니며 ‘우리가 표준이야, 우리가 대세야’라 외치는 패거리의 행태였다. 강한 자는 무리 지어 다닐 필요가 없다..
2.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다? 니체는 도덕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인류의 ‘상식’을 의심한다. 니체는 도덕이 인간의 선천적 본성도 아니며 보편적 기질도 아님을 밝혀낸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도덕의 역사적 가변성을 입증하고, 한 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패륜이 될 수도 있음을, 도덕의 가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해왔음을 보여준다. 야스퍼스는 『니체와 기독교』에서 왜 인간이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변모했는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계몽의 과정을 통해 ‘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 없이는 살 수 없도록 길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신의 그림자’에 철저히 길들..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지상에서 영원으로, 초인의 오디세이 1. 형벌은 인간을 길들일 수 있는가 영화 『몬테 크리스토』(2002)에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악명 높은 독방이 등장한다. 오랜 감방생활에 지친 주인공 에드먼드 단테(제임스 카비젤)는 이렇게 항변한다. “제 방에는 72519개의 돌이 있어요. 전 그걸 세 번이나 세어봤다고요!” 10년이 넘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젊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늙은 죄수 아베 파리아(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돌들에 각각의 이름은 지어줘 봤나?”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감방에서 죄수들은 ‘자기 계몽’이 아니라 하염없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어떻게 하면 이 저..
14. 하찮은 흔적에서 빛나는 상징을 읽어내는 자, 그는 승리할지니…… “치히로! 뭐 하는 거니? 어서 와.” 엄마, 아빠의 부름으로 센(신화적 자아)은 어느새 치히로(일상적 자아)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아빠는 철없고 나약하기만 하던 센이 자신들을 구원해준 ‘여신 포스’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서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다. 하쿠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걷던 치히로는 터널을 다 통과하고 나서야 터널 저편의 세계, 자신을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저 어두운 심연의 세계를 바라본다. 어떤 언어로도 정리할 수 없는 치히로의 마음을 아름다운 주제가가 대신해주는 듯하다. 슬픔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너머에서 분명히 당신과 만날 수 있어. (……) 살아 있는 신비함. 죽어가는..
13.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다 하쿠와 센은 부푼 가슴을 안고 유바바 온천으로 돌아온다. 유바바는 도끼눈을 뜨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기는 데려왔겠지?” 유바바는 늘 아기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하던 수퍼베이비가 어느새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혼자 서다니? 언제부터?” 하쿠는 아기를 무사히 데려왔으니 센을 인간 세계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간단하게는 안돼. 세상엔 룰이 있는 법!” 유바바는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수퍼베이비가 엄마를 제지한다. “엄마! 치사한 짓 그만해! 난 무지무지 재미있었어!” 유바바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아들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혹스럽다. “규칙은 규칙인데……. 안 그러면 저주가 안 풀려!” 수퍼베이비는 단호한 표정으로 엄마를 협박한다. ..
12. 너를 찾지 못했다면 나의 존재도 잃었을 걸 캠벨: 우리의 진정한 입문의례는,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이어스: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
11. ‘너’를 찾으러 떠난 길 끝에서, ‘나’를 만나다 한편, 센은 수퍼베이비와 가오나시를 대동하고 제니바가 살고 있는 낡은 오두막집에 무사히 도착한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던 수퍼베이비는 어느새 센의 도움도 거부하고 뒤뚱뒤뚱 혼자 걸으며 제니바의 집을 향해 행진한다. 다행히도 제니바는 센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뚱보 생쥐가 된 수퍼 베이비는 처음으로 구경하는 바깥세상이 재미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니바의 물레질을 도우며 혼자 신났다. 근심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센은 제니바에게 용서를 빈다. “하쿠가 훔친 걸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하쿠를 대신해서 사과 할게요.” 제니바는 저주가 걸린 도장을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은 센이 신기하다. “이거 갖고도 아무렇지 않았어? 엥? 주문이 사라졌잖아!” “도장..
10.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때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99~100쪽.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의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
9. one-way ticket: 돌아올 길이 없음이 겁나지 않는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7쪽 센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려운 길을 택한다. 그 길을 가면 엄청난 영광이나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친구 하나를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보장할 수 없는 이익이 전혀 없는데도, 다치거나 죽거나 돌아오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는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 전 ..
8. one-way ticket: 당신은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떠나겠는가?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단테, 『지옥편』 중에서 원웨이 티켓(편도승차권)이라는 말에는 ‘피할 길을 주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이 있다. ‘원웨이 티켓’의 지배적인 뉘앙스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떠나야 하는 절박함’이다. 이 단어가 전해주는 피할 수 없는 절박한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영웅의 비장미이기도 하다. 영웅의 영웅다움이 완성되는 순간, 그 순간은 그의 능력이 출중해서도 아니고 그의 명예가 하늘을 찔러서도 아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만 그의 여정이 완성될 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결연함,..
7. 센의 딜레마 vs 유바바의 딜레마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 비판을 미루어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 소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386쪽. 센은 하쿠를 구하러 가고 싶지만 수퍼베이비 ‘보’는..
6. 세 친구: 나보다 더 아픈 나와의 만남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273쪽. 난 역시 안 돼, 난 결코 꿈을 이룰 수 없을 거야,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난 도저히 저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어…. 조셉 캠벨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용’이라고 불렀다. ‘늪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양의 용이 때가..
5. 영원에 발을 딛고 시간의 장(場) 위에서 춤추다 모이어스: 소년 시절에 『원탁의 기사』를 읽었는데요. 문득 저도 영웅이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정말 집을 떠나 용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싶었습니다. 신화가 오클라호마주의 농투성이 아들을 꼬드겨 영웅이 되고 싶게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신화는 우리에게 그만큼 더..
4.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 번째 관문 마라톤 선수의 모습을 보라. 난생 처음으로 경주에 참가한 사람과는 달리, 전문적인 마라톤 선수는 자신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이기느냐 또는 지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경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기느냐 또는 순위 안에 드느냐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구속 없는 참여인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86쪽. 이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온천을 지배한다는 마녀 유바바의 방. 치히로는 유바바가 풍기는 으스스한 첫인상에도 아랑..
3. 미지와의 조우: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느닷없이 추락하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낙하하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찾기 위해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신화적 서사 속에서는 이렇게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나락으로 추락하는, 돌아올 기약 없는 미지의 모험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치히로의 첫 번째 임무 또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쿠의 조언대로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마할아범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54쪽. 만약 인어공주가 바다를 떠나 왕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피터팬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포르도가 반지원정대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안락하게, 이미 주어진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의 유년을 풍요롭게 만들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자라지 않는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셉 캠벨 바야흐로 ‘소녀들의 전성시대’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한국형 신조어는 21세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압축하는 핵심적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보아-문근영-김연아-원더걸스-소녀시대 등 성인을 압도하는 초특급 스타들로 이루어진 국민 여동생의 계보. 그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키덜트(Kidult)적 감수성이 묻어 있다. 또한 인생의 복잡다단한 통과의례를 10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단기간 속성 코스로 끝내버리고자 하..
8. 바르트의 풍크툼: 어머니, 단 하나의 여자 나의 역사적 위치는…… 전위의 후위에 있는 것이다. 전위가 되려면 무엇이 죽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후위가 되려면 그것을 아직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역,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앨피, 2006, 62쪽. 『카메라 루시다』를 낳게 한 것은 바르트의 어머니였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남아 있는 사진들은 그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덧없는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다섯 살 어린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실제 목..
7. 색 & 계(Lust & Caution): 욕망과 금지의 끝없는 이중주 욕망과 징계는 언제나 커플처럼 붙어 다닌다. 『색 & 계』의 영어 제목은 “Lust and Caution”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Lust’라는 단어를 보며 채워지지 않는 은밀한 열망을 떠올리고 ‘Caution’이라는 단어를 보며 욕망에 천형처럼 따르는 가혹한 징계를 떠올린다. 영화 제목처럼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욕망과 경계, 열망과 경고, 정욕과 징벌의 반복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더없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에도 “이러다 들키겠어요”라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삽시간에 깨버리는가 하면, 오랫동안 서로를 목마르게 그리워했으면서도 막상 만나면 “앞으로 다신 이 방에 ..
6. 세 번째 풍크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그녀의 암살 대상이자 마지막 사랑, ‘이 선생’뿐이다. 그녀는 우 선생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이제 연극과 현실을 구별할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제 몸뚱이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매번 더더욱 깊숙이……. 매번 그는 제가 절정에 몸부림 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우 선생은 ‘첩보원답지 않은’ 그녀의 아마추어적 정직함에 놀라 그녀의 고백 자체를 거부한다. “됐다! 그만해라!”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소름이 끼치고, 너무 투명해서 듣는 것만으로..
5. 세 번째 풍크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 그것만큼 위험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이다. 파니 핑크는 “서른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확률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독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어버린 쓸쓸한 스물아홉 싱글이다. 그녀는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을 꿈꾸지만 ‘친밀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서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
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의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을 떠올린다. 결벽증과 강박증을 함께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자기예찬증(?)을 앓고 있는 멜빈은 ‘타인의 삶’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 외에는 철저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늘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오직 자신이 휴대하는 포크와 숟가락으로만 먹는다.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그를 윽박질러 잔인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만든 동굴 속 세상에서 군림하던 외톨이 황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휘청거린다. 옆집 남자의 애완견이 복도에서 오줌을 눴다며 그 연약한 강아지를 미련 없이 ..
3. 첫 번째 풍크툼(punctum): 낭만적 나르시시즘의 세계가 파열되다 이 선생의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두 사람의 밀회는 더없이 스릴 넘치는 두뇌 게임처럼 급박하게 진행된다. 막 부인이 이 선생을 옷가게로 유인하여 두 사람이 첫 번째 밀회를 갖게 되는 날. 그녀가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고친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살짝 밀며 이 선생 앞에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짧고 덧없는 한숨을 쉰다. “고치니까 너무 붙네요.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에 숨 막혀 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장 지아즈가 아닌 막부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관객의 시선은 정확히 이 선생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둡고 깊은 밀실로 그녀를 유인할 듯이 탐욕..
2. 탐색전: 무대 위의 연극 vs 무대 뒤편의 침묵 섹스 자체가 삶의 욕망과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것의 알레고리인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각의 제국』, 『그녀에게』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섹스는 단지 몸과 몸의 얽힘이 아니라 삶과 삶의 뒤얽힘이었고 인간의 근원적 소통불가능성의 뼈아픈 확인이었다. 그러나 『색 & 계』에서 그들의 섹스의 이미지가 유독 슬프고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장 지아즈, 즉 막 부인(탕웨이)의 캐릭터 탓인 것 같다. 그녀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처럼 발랄하고 앙큼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쾌활한 캐릭터가 아니다. 또한 『감각의 제국』의 여주인공 마츠다 에이코처럼 나른하게 몽환적이면서도 의외로 강인한 캐릭터도 아니다. 장 ..
색 & 계와 롤랑 바르트 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1.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완고하게 닫혀 있던 이 세계가,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휘청,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바닷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하지 않던 세상이,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헝클어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이라는 치명적인 가사로, 안 그래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멍든 가슴을 다시 한 번 살뜰하게 할퀴어 주었다.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
15.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시인은 지겹도록, 님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것이 이 시인(김소월)에게는 슬픔을 슬픔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며, 슬픔의 표현이 슬픔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써, 시는 자기 탐닉의 도구가 된다. -김준오, 『김소월 연구』, 새문사, 1989, 45쪽. 다리와 팔은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슬픔의 치료책은 달콤한 행복의 마취제를 이용한 일시적 대증요법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의 ‘적절한’ 표현으로만 치유된다. 슬픔은 슬픔인 채로 승화되어야 한다. 슬픔이라는 고체가 혼란이라는 액체를 거쳐 기쁨이라는 기체로 변화하는 점진적 마술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리 호흡이 힘들더라도, ..
14. 진정한 애도의 순간 상실된 대상의 그림자가 주체에게 드리워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리비도의 상당 부분을 탐구에 대한 충동으로 승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중에서 ‘애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어쩌면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가장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 혹은 나의 아픔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고 다만 그 끝나지 않는 슬픔의 통로를 함께 나란히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애도의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것은 이 슬픔의 늪을 건너가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루디는 비로소 그 ‘슬픔의 친구’를 찾아낸 것이다. 부토 소녀 유와 함께 루디는 아내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