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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47. 사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47. 사

건방진방랑자 2020. 4. 19.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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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

()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고 한 점이 다르다.

 

()

형식이 내용을 앞서는 것으로[文勝質則史], 즉 내용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사가(謝家)

남조(南朝) ()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백락천시후집(白樂天詩後集)20 首夏猶淸和聯句

사씨(謝氏)는 진대(晉代)의 명문으로 사조(謝眺) 등 시인이 배출되었다.

 

사가(仕加)

벼슬의 자급을 올리는데 있어 달수가 차야만 올라가는 것을 사가(仕加)라 한다.

 

사가군종재(謝家群從在)

() 나라 사안(謝安)이 많은 자질(子姪)들 중에서도 특히 조카인 사현(謝玄)을 애지중지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진서(晉書)79 사현전(謝玄傳)

 

사가녀(謝家女)

()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의 질녀 사도온(謝道韞). 사안이 자질(子姪)을 데리고 시문을 논하다가 마침 눈이 쏟아지자 한번 형용해 보라고 하였는데, 조카인 사랑(謝朗)공중에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하자, 사도온이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안이 즐거워하며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사가랑(謝家廊)

오대(五代) 때 장필(張泌)의 시 기인(奇人)에 이별한 뒤의 그리움을 노래하여, “이별 후 꿈속에 예전처럼 사가(謝家)에 도착하니, 작은 회랑 굽었다 합쳤다 비스듬히 비끼었네.” 하였다.

 

사가망처(徙家忘妻)

이사할 때 자기의 처()를 깜빡 잊고 데려가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잘 잊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사가청초(謝家靑草)

() 나라 사혜련(謝惠連)10세에 능히 글을 지으니, 그 족형(族兄) 영운(靈運)은 매양 글을 지을 적에, “혜련을 만나기만 하면 문득 좋은 글귀를 얻게 된다. 일찍이 영가(永嘉)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이루지 못했는데, 갑자기 꿈에 혜련을 보고서 곧 지당에 봄풀이 돋아난다[池塘生春草].’라는 글귀를 얻었다.” 하였다. 남사(南史)』 「사혜련전(謝惠連傳)

 

사각승선(四角承宣)

고려 의종(毅宗) 때 사람 이공승(李公升)의 별명이다. 의종이 유행(遊行)을 좋아하는데도 신하들은 직간(直諫)하는 자는 없고, 오히려 별의별 물건을 바치면서 상서(祥瑞)라고 아뢰었다. 이때 금()나라에서 양 2천마리를 보내왔는데 그중 한 마리가 뿔이 네 개였다. 추밀사 이공승이 그것을 상서로운 짐승이라고 바치니, 사람들이 그를 사각승선이라고 조롱했다.

 

사간원(司諫院)

조선시대의 간쟁(諫諍)ㆍ논박(論駁)을 관장하던 관서.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 간절한 마음으로 윗사람에게 그의 옳지 못한 일을 말하여 잘못을 고치게 하는 것), 즉 왕이 행하는 정사에 대한 비평을 중심으로 신하들에 대한 탄핵, 그밖에 정치 문제에 관해 논하는 언론 기관의 역할 을 담당하였으며,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추구한 조선 정치철학의 특성상 중요한 기관.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 간원(諫院) 또는 미원(薇院)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은 간관(諫官) 이라고 하며, 사헌부의 관원인 대관(臺官)과 병칭해 대간(臺諫)이라 한다.

관원은 대사간(大司諫, 3, 1), 사간(司諫, 3, 1), 헌납(獻納, 5, 1), 정언(正言, 6, 2).

간관의 자격은 당해원(當該員)과 그 내외사조(內外四祖)에 흠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강개(慷慨)한 언론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일단 간관이 되면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신분의 보장과 특별한 예우가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예로 대간은 포폄(褒貶)을 받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당상관도 정중히 답례를 하도록 한 것을 들 수 있다. 간관은 대관과 병칭해 대간이라 하지만 집무하는 분위기는 크게 달랐다. 대관은 부() 안에서 상하관(上下官) 사이에 예의와 의식이 엄격했으나 간관은 상하관 사이에 존비(尊卑)의 예가 없고, 직무 중[完議席]에 술을 취하도록 마셔도 문책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간관에 대한 특별한 대우는 직책상 그들이 당하는 위험부담에 대한 반대급부라고도 할 수 있다. / 인용: 용재총화(성현)

 

사갈(事葛)

()은 옛날 나라 이른다. ()의 성덕(聖德)으로도 초년에 갈백(葛伯)을 섬긴 일을 말하는데, “()은 갈을 섬겼고 문왕(文王)은 곤이(昆夷)를 섬겼다.”라고 말했다. 맹자(孟子)』 「앙혜왕(梁惠王)

 

사갈생서정숙현(死葛生蜍定孰賢)

사람은 인품(人品)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제갈량(諸葛亮)은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이며 충신으로서 훌륭한 명성이 천하 후세에 드날렸는데, () 나라 조여(曹蜍)라는 사람은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필적할 만큼 잘 썼으나, 인품이 워낙 용렬하여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다는 논평을 받은 데서 온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品藻, 黃庭堅書右軍帖後

 

사강(士剛)

김집(金集)의 자이다.

 

사강락(謝康樂)

강락공(康樂公)에 봉해진 남조 송(南朝宋) 때의 문장가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그는 시를 잘하고 산수(山水)를 좋아해서 수령(守令)으로 있으면서 산수에 노는 시()를 많이 지었다. 처음 진무제(晉武帝)에게 벼슬, () 나라가 서자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로 옮기고, 뒤에 영가 태수(永嘉太守)가 됨. 뜻에 맞지 않자 소요 유람, 글짓기로 자적(自適)한다. 송 문제(宋文帝)가 부르자 비서감(祕書監)이 되고, 또 시중(侍中)이 되는 등 후대를 받았으나 또 뜻에 차지 않아 칭병(稱病)하고 휴가를 얻어 돌아와, 동생 혜련(惠連)ㆍ하장유(何長瑜) 등과 함께 문장으로 교유하였는데, 뒤에 모반의 혐의로 죽음.

 

사객(謝客)

어릴 때의 이름이 객아(客兒)였던 남조 송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사객(詞客)

()나라 때 사부가(辭賦家)양웅(揚雄)을 가리킨다.

 

사거이도(舍車而徒)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는 뜻으로, 불의(不義)의 지위를 버리고 청빈(淸貧)에 만족함을 이르는 말이다.

 

사경(邪徑)

길을 바꾸다.

 

사경국(司經局)

경적과 도서를 맡은 관서.

 

사경첩(仕逕捷)

은사(隱士)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높은 벼슬을 얻는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은 처음에 종남산(終南山)에 은둔하여 자못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뒤에 나와서 벼슬하였다. 이때 사마승정(司馬承禎)은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가니, 장용은 종남산을 가리키면서 여기에도 아름다운 운치가 있는데 굳이 천태산을 찾을 것이 있나?” 하였다. 승정은 웃으면서 내가 보기에는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뿐이네.” 하니, 장용은 부끄러워하였다. 신당서(新唐書)卷一百九十六 司馬承禎傳

 

사계(沙界)

불교에서 쓰는 말로, 항하사(恒河沙)의 모래 숫자만큼 많은 모든 세계를 말한다.

 

사계(社禊)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토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사계사야(使鷄司夜)

닭으로 하여금 밤을 맡긴다는 뜻으로, 닭에게 밤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기는 것처럼, 알맞은 인재에 적합한 일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사고(四苦)

사람의 네 가지 괴로움. 즉 생노병사(生老病死)

 

사고(四庫)

() 나라에서 출간한 사고전서(四庫全書). 본디 궁중에서 경()ㆍ사()ㆍ자()ㆍ집()을 따로 분류하여 네 군데의 서고에 보관했다는 데서 나온 말로, 많은 서책을 뜻하기도 한다.

 

사고무인(四顧無人)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하다는 뜻이다.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한 이가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는 외로움을 의미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총서의 이른다. () 나라 건륭(乾隆)에 수집(蒐集)된 일대 총서로 약 168천여 책인데 경()ㆍ사()ㆍ자()ㆍ집()의 네 가지로 나누어 사고(四庫)에 수장(收藏)하였다.

 

사공(謝公)

남조(南朝) ()나라 양하(陽夏)사람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영가 태수(永嘉太守)로 있으면서 산수를 유람하길 좋아하여 각처를 다니며 산수시를 많이 지었다.

 

사공(司空)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로서 신라 때에 사공을 지낸 이한(李翰)을 말한다.

 

사공(社公)

토지(土地)의 신()을 가리킨다.

 

사공극(謝公屐)

남조(南朝) 시대 송() 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산에 올라 노닐기를 좋아하여 항상 나막신을 신고 등산을 하였는데, 산에 오를 적에는 나막신 앞굽을 빼고, 내려올 적에는 뒤쪽 굽을 뺀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서(宋書)卷六十七

 

사공대(謝公臺)

() 나라 때의 시인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살던 곳으로, 강소(江蘇) 강녕현(江寧縣) 북쪽에 있는 사공돈(謝公墩)이란 산 이름을 말한 듯하다. 곧 시인 묵객이 살고 있는 산을 말한다.

 

사공도(司空圖)

시의 품격을 24종으로 나누어 논한 이십사품(二十四品)을 지은 당 나라 때 인물.

 

사공돈(謝公墩)

이백(李白)의 시 등금릉야성서북사안돈(登金陵冶城西北謝安墩)’, 자주(自注)이 돈대는 바로 진()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과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가 함께 올라가 초연히 고세(高世)의 뜻을 품었던 곳이다. 그래서 내가 장차 이곳에 동산을 꾸밀 생각을 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태백집(李太白集)20 사공돈은 사안돈(謝安墩) 혹은 사부돈(謝傅墩)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공등해교(謝公登海嶠)

사공(謝公)은 명산(名山)의 유람을 즐겼던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키고, 해교(海嶠)는 사영운이 등정했던 임해군(臨海郡)의 산 정상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엄자릉(嚴子陵)은 동려의 시내에서 낚시를 했고, 사영운은 임해의 산 정상에 올랐어라[嚴光桐廬溪 謝客臨海嶠].”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23 翰林讀書言懷 呈集賢諸學士

 

사공유흥유쌍극(謝公遺興唯雙屐)

동진(東晋) 사령운(謝靈雲)이 등산하기를 좋아하여 산에 오를 적에는 나무신의 뒷굽(後齒)를 떼고 내릴 적엔 앞굽을 떼었다.

 

사공중곡(射空中鵠)

허공에 대고 쏘았는데 과녁에 적중한다는 뜻으로, 무턱대고 한 일에 성공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공증영중서계(謝公曾詠中書階)

사공은 남제(南齊)의 문장가 사조(謝朓)를 가리킨다. 그의 자는 현휘(玄暉)로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였는데, 일찍이 중서성(中書省) 당직이 되었을 때 작약시(芍藥詩)를 읊었다.

 

사공지(謝公池)

남조(南朝) ()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이 그의 종제(從弟) 혜련(惠連)을 높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시를 지을 때마다 혜련을 대하기만 하면 아름다운 싯구가 나온다.” 하였는데, 일찍이 영가(永嘉)의 못가에서 시를 지을 때 하루종일 시상이 떠오르지 않다가 갑자기 꿈속에서 혜련을 보고난 뒤에 못가에는 봄풀이 돋아나고요. 동산 버들 우는 새 재주부리네[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라는 명구(名句)를 지었다고 한다. 남사(南史)卷十九 사혜련전(謝惠連傳)

 

사공편(謝公篇)

동진(東晉)의 명상(名相) 사안(謝安)이다. 풍류 재상으로 시()에도 능했다.

 

사공한사(司空閑事)

()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화주 자사(和州刺史)에서 면직되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사공(司空) 이신(李紳)이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주었는데, 유우석이 가기(歌妓)에게 마음이 끌려 궁중 미녀처럼 곱게 꾸민 머리 모습, 봄바람처럼 두위랑 한 곡조 들려주네. 사공께선 실컷 즐겨 들어서 시들하겠지만, 강남 땅 자사는 애간장이 끊어지오[髾髮梳頭宮樣妝 春風一曲杜韋娘 司空見慣渾閑事 斷盡江南刺史腸].”라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부르자, 이 사공이 그 가기를 그에게 내주었던 고사가 있다. 본사시(本事詩)情感

 

사공행악지(謝公行樂地)

남조(南朝) 남제(南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宣城)의 태수로 있으면서 산수 풍경을 읊으며 즐겼다는 데서 경치 좋은 지방을 가리킨다.

 

사공휴기(謝公携妓)

동진(東晉) 때 명신(名臣) 사안(謝安)의 고사. 그는 벼슬하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할 적에 항상 기생을 끌고 산에 올라 노닐었다.

 

사공휴취환(謝公攜翠鬟)

사공은 진() 나라 때의 재상 사안(謝安). 풍류를 좋아하던 사안은 기생을 데리고 동산(東山)에 은둔하고는 나라에서 불러도 가지 않으니, 고영조(高靈祖)는 말하기를 사안이 나오지 않으니 백성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하였다. 그 후 사안은 다시 세상에 나와 많은 공을 세우고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사관방(謝關防)

관문 방어의 뜻이다. 마음대로 돌아다녀 구애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광(師曠)

춘추(春秋)시대 진()의 태사(太師)로 오음(五音)ㆍ육률(六律)을 다루는 데 있어 남보다 월등한 청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사광(思曠)

() 나라 완유(阮裕)의 자이다. 성품이 호방하고 덕행으로 이름난 사람으로, 한때 대장군 왕돈(王敦)의 주부(主簿)가 되어 그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그가 반역할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는 온종일 술에 취해 직무를 보지 않자, 왕돈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하여 율양령(溧陽令)으로 내쫓았다가 다시 파면시켰는데, 이로 인해 왕돈의 재난을 모면하였다. 그 뒤에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대부분 은거하고 나가지 않았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유전(阮裕傳)

 

사광무옥(思光無屋)

사광(思光)은 남제(南齊) 때의 장융(張融)을 이른다. 사광은 그의 자. 장융은 매우 가난하여 거주할 집도 없었으므로, 조그마한 배를 끌어다 놓고 안상(岸上)에 거주했다고 한다. 남제서(南齊書)卷四十一

 

사괴(絲蒯)

사마(絲麻명주실과 삼실)관괴(菅蒯)를 말한다.

 

사구유(沙丘囿)

주왕(紂王)이 사구(沙丘)에다 꾸며둔 유원지. 주왕이 사구에다 원()을 크게 꾸미고 누대를 세워 주지육림(酒池肉林)을 하여두고는 밤이면 남녀가 모여 옷을 벗고 나체로 서로 즐기게 했던 곳.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사국(射鞫)

병기(兵器) 혹은 탄핵으로 해석됨.

 

사국(史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를 말하는데 사기(史記)용문사(龍門史)’라 부르기도 한다.

 

사군(使君)

()나라 때에는 태수(太守)를 부군(府君)이라 칭한다.

자사(刺史)를 사군(使君)이라 칭한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온 지방관리를 높이어 일컫던 말이다. / 인용: 四月十五日(이안눌)

 

사군비석(使君飛舃)

후한 때 왕교(王喬)가 섭현령(葉縣令)으로 있으면서 거기(車騎)도 없이 머나먼 도성을 자주 왕래하므로, 임금이 그 연유를 알아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때 쯤에 물오리 두 마리가 날아오므로 이를 그물로 잡아놓고 보니 신 한 짝만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군승사(使君乘槎)

사군은 수령의 별칭이고, 뗏목을 탄다는 것은 중국의 전설에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하수(河水)의 근원까지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써 한다는 뜻으로, 신라(新羅) 때에 화랑(花郞)의 다섯 가지 계율(戒律)인 세속오계(世俗五戒)중의 하나.

 

사군자(四君子)

네 군자라는 뜻으로, 군자의 고결함과 비유될 수 있는 네 식물, 곧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이른다. 혹은 묵화(墨畵)에서 네 나무를 그린 그림을 이르기도 함

 

사군자(士君子)

학문과 덕행이 높은 사람. / 유의어: 신사(紳士)

 

사궁(四窮)

네 가지 삶의 궁한 경지.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老而無妻曰’. 老而無夫曰’. 老而無子曰’. 幼而無父曰’].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유의어: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노이무처(老而無妻)

노이무부(老而無夫)

()자식 없는 노인

()고아

노이무자(老而無子)

유이무부(幼而無父)

 

 

사궁부(賜弓鈇)

왕으로부터 생살권(生殺權)을 부여받는 일. 전하여 일군(一軍)의 대장(大將)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왕제에 제후(諸侯)는 궁시(弓矢)를 받아야만 정벌할 수 있고 부월(鈇鉞)을 받아야만 죽일 수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궁지수(四窮之首)

홀아비. 사궁 중에서 제일 앞서는 환()을 말한다.

 

사극(謝屐)

앞쪽과 뒤쪽에 굽을 단 나막신을 말한다. 사씨는 남송(南宋) 때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사영운이 산을 유람하면서 산을 오를 때에는 나막신의 앞굽을 빼고 오르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빼고 내려왔다고 한다. 남사(南史)19 사령운전(謝靈運傳)

 

사극(四極)

하늘의 사방.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 사방 끝에 하늘을 떠받치는 4개의 기둥인 天柱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근교원(舍近交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과 사귄다는 뜻으로, 가까운 친척은 버리고 소원(疏遠)한 사람과 사귄다는 의미이다.

 

사근취원(捨近取遠)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한다.

 

사금투계장(賜錦鬪鷄場)

당나라 시대에는 민중들 사이에 닭싸움시키는 것이 성행하였는데, 현종 때에는 그것을 궁중에까지 들여다가 황족과 외척들에게 닭싸움을 시키고 그것을 구경하다가 이긴 편에는 비단을 몇 백 필씩 상으로 하사하였다.

 

사급계생(事急計生)

일이 다급하면 계책이 생긴다는 뜻으로, 일이 급박(急迫)하면 좋은 계책(計策)이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사기(謝妓)

동진(東晉) 사람 사안(謝安)으로 그가 기생을 데리고 동산(東山)에 살면서 나라에서 불러도 응하지 않으니, 고영조(高靈祖)안석(安石)이 나오지 않으니 창생(蒼生)을 누가 건질꼬.”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요취선(史要聚選)相國 謝安

 

사기(私忌)

사가(私家)의 기일(忌日)이란 뜻이다. 수령 개인의 제사를 말한다.

 

사기(四氣)

춘하추동 사시의 온()ㆍ열()ㆍ냉()ㆍ한()의 네 기후를 말한다.

 

사기상(四起賞)

조선시대 중국에 파견되었던 사행(使行)에 대하여 중국 조정에서 내려주던 답례품이다. 조선이 네 번에 걸쳐 중국에 정기적으로 파송하던 성절사(聖節使), 연공사(年貢使), 동지사(冬至使), 정조사(正朝使)는 모두 방물(方物)을 가져가 바치게 되고 이에 대한 의례적인 상사(賞賜)가 있었는데 이를 사기상이라 한다.

 

사기절매(思幾折梅)

남조 송()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를 꺾어 장안에 있는 벗 범엽(范曄)에게 역로(驛路)로 부치면서 그리운 정을 표한 고사가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970

 

사기충천(士氣衝天)

군사들의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음

 

사기포서(使驥捕鼠)

천리마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한다는 뜻으로, 사람을 쓸 줄 몰라 유능한 사람을 말직(末職)에 임명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나쌍수(沙羅雙樹)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장소에 서 있었던 나무 이름으로, 사찰 경내에 있는 거목을 가리킨다.

 

사난(四難)

사미이난(四美二難)의 준말로, 사미는 즉 양신(良辰)ㆍ미경(美景)ㆍ상심(賞心)ㆍ낙사(樂事)이고, 이난은 두 가지 갖추기 어려운 것으로, 즉 현주(賢主)와 가빈(嘉賓)을 말한다.

 

사낭(絲囊)

승로사랑(承露絲囊)의 준말로, 명절 선물을 가리킨다.

 

사녀영서(謝女詠絮)

() 나라 왕응지(王凝之)의 아내 사도온(謝道蘊)이 총명하여 재주가 있었는데, 그가 어릴 때 숙부 사안(謝安)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분분한 하얀눈이 그 무엇과 흡사한고[紛紛白雪何所似]”하자, 형의 아들 낭()이 말하기를 공중에다 소금 뿌림 그런 대로 비슷하네[撒鹽空中差可擬]”하니, 도온이 말하기를 버들개지 바람 따라 일어남과 안 같은가[未若柳絮因風起]”하였다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사년서새재병진(四年西塞再兵塵)

인조(仁祖) 2년의 이괄(李适)의 난과 인조 5년의 정묘호란을 가리킨다.

 

사노(沙老)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킨다.

 

사농(司農)

동한(東漢) 개봉(開封) 사람으로 춘추ㆍ주역(周易)시경(詩經)에 정통하였으며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던 정중(鄭衆)을 말한다.

 

사농(司農)

() 나라 때 9()의 하나로 농정을 맡은 벼슬인데, 우리나라의 호조(戶曹)의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선비와 농민, 장인, 상인의 뜻으로, 과거 계급제 사회의 신분 계급의 순서처럼 여겨지던 바로잡아야 할 중 세 관념.

 

사단(四端)

네 가지 실마리라는 뜻이다. (), (), (), ()의 단서가 되는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선천적인 네 가지 마음씨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가리킨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사단취장(舍短取長)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한다는 뜻으로,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은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 칠정은 희()ㆍ노()ㆍ애()ㆍ구()ㆍ애()ㆍ오()ㆍ욕().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사달이이의(辭達而已矣)

말이 통달할 뿐이라는 뜻으로, 말은 그 뜻이 남에게 전달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의 정교함(辭巧)보다는 의미의 전달(辭達)에 역점을 둔 공자(孔子)의 입장이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사당(沙棠)

곤륜산에 있는 나무 이름인데 신선의 배를 만드는 재목. 이백(李白)의 시에 목란지사당주(木蘭之沙棠舟)”란 구절이 있다.

 

사당(謝塘)

사영운(謝靈運)의 지당(池塘)으로,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흔히 쓰인다. 남조(南朝) 시대 송() 나라의 시인인 사영운이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사영운이 시를 짓다가 막혔는데, 꿈속에서 사혜련을 보고 연못에는 봄풀이 새로 돋았네[池塘生春草].’란 시구를 얻었다고 한다.

 

사당양자(祠堂養子)

사당의 양자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대를 잇게 하는 일의 의미이다. 백골양자(白骨養子)

 

사대(四大)

모든 육신을 이루고 있는 지()ㆍ수()ㆍ화()ㆍ풍()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사대가 화합하는 것은 모두 망상(妄相)으로서 이것을 분리하여야 진여(眞如)의 경지인 공적(空寂)에 돌아간다 한다.

 

사대가합(四大假合)

불가(佛家)에서는 우리 몸이 지()ㆍ수()ㆍ화()ㆍ풍()4대 요소가 결합된 것이라고 하다. 법화경(法華經)譬喩品

 

사대부(士大夫)

사와 대부라는 뜻으로, 관직이 있는 사람이나 군대의 장교 등을 의미하거나 우리나라에서는 글 읽는 선비()와 벼슬하는 관리(大夫) 등의 개념으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의 사람인 사족(士族)의 의미로 사용된다.

 

사대주의(事大主義)

큰 것을 섬기는 주의라는 뜻으로, 일정한 주견도 없이 세력이 큰 쪽을 붙좇아 섬기면서 자기의 안전을 꾀하려고 하는 주의를 말한다.

 

사덕(四德)

옛날에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규범으로 꼽혔던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을 말한다. 주례(周禮)』 「천관(天官)九嬪

 

사도(師道)

진사도는 송() 나라 때의 시인인데, 특히 청빈(淸貧)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사도사(司稻士)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속한 도인(稻人)을 이름이다. 도인은 전지(田地)를 다스리고 벼 심는 일을 관장하였다.

 

사도소팽(司徒所烹)

사도 채모(蔡謨)가 강남(江南)에 이르러 팽기(彭蜞))를 게()로 오인하고 크게 기뻐하여 삶아 먹었다가 구토(嘔吐)가 극심하여 혼이 났다. 그 뒤에 사상(謝尙)이 이 사실을 듣고 그대가 이아(爾雅)를 잘못 읽었다가 하마터면 지레 죽을 뻔했다.”고 조롱했다. 진서(晉書)卷七十七

 

사도운(謝道韞)

() 나라 때 사안(謝安)의 질녀(姪女)로서 뛰어난 여류 문인(女流文人)이었다.

 

사독(四瀆)

중국에 있는 네 개의 큰 강. 즉 양자강(揚子江)ㆍ황하강(黃河江)ㆍ회수(淮水)ㆍ제수(濟水)를 말한다. 이 강들은 모든 냇물을 받아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이들이 곧 제후왕에 비유된다.

 

사독사(射毒沙)

(𧌒)이 물가에서 독한 모래를 입에 물고 사람을 쏘는데, 맞으면 부스럼이 나고 병이 난다 한다. 이것은 남을 음해(陰害)ㆍ중상(中傷)하는 데 비유한 것이다.

 

사돈(謝墩)

사공돈(謝公墩)의 준말로, () 나라 때 사안(謝安)이 항상 노닐었던 돈대(墩臺)를 말한다.

 

사돈(査頓)

혼인한 두 집의 부모끼리, 또는 그 두 집의 같은 항렬되는 친족끼리 서로 부르는 말이다.

 

사돈팔촌(査頓八寸)

사돈의 팔촌이라는 뜻으로, 소원(疎遠)한 친척으로 남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우리나라 속담.

 

사동산(謝東山)

동진(東晉)의 명신(名臣)으로 일찍이 동산(東山)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당시 사안이 매양 자기 내외 자질(內外子姪)들과 기녀들을 거느리고 동산의 별장에서 주연을 푸짐하게 베풀고 풍류를 한껏 즐겼던 데서 온 말이다. / 인용: 柳居士(홍신유)

 

사두(射斗)

기운이 솟구쳐서 하늘에 뻗치는 것을 말한다. 두우는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즉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이다.

 

사두(槎頭)

사두축경편(槎頭縮頸鯿)의 준말로, 사두편(槎頭鯿)이라고도 하는 물고기 이름이다. 등이 활처럼 휘고 청색을 띠고 있으며 회맛이 특히 좋다고 하는데, ()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현담작(峴潭作)’두보(杜甫)해민(解悶)’이라는 시에서 소개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사두검기(射斗劍氣)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 나라가 멸망당하기 전에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라색 기운이 감돌았으므로 뇌환(雷煥)을 불러 바로보게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보검의 정기가 위로 하늘에 통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하였다.

 

사두잔전(沙頭殘篆)

옛날에 조적전(鳥跡篆)이란 자체(字體)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래 위에 찍힌 새의 발자취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사두축항편(楂頭縮項鯿)

사두(楂頭)는 낚시를 하기 위하여 물고기가 있는 곳의 물길을 배로 막아 놓은 곳을 말한다. 축항편(縮項鯿)은 머리가 편평(扁平)하고 목이 오그라든 형상의 물고기로 방어(魴魚) 종류이다. 두보(杜甫)의 시 해민(解悶)다시 생각나누나 양양 맹호연, 맑은 시 구구절절 영원히 전해지리. 지금 노인들 새로운 시어(詩語) 하나 없이, 그냥 사두에서 축항편만 낚누나[復憶襄陽孟浩然 淸詩句句盡堪傳 卽今耆舊無新語 漫釣楂頭縮項鯿].”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맹호연(孟浩然)이 지은 현담작(峴潭作)대 낚시 드리워 시험삼아 낚아 보니, 정말 사두의 축항편이 올라오네[試垂竹竿釣 果得楂頭鯿].”라는 시구를 참작한 것이다.

 

사라(絲蘿)

새삼. 매꽃과의 일년초로 나무에 붙어사는 기생 식물이다.

토사(免絲)와 송라(松蘿)를 말하는데, 고시(古詩)그대와 새로 혼인을 했으니, 토사가 송라에 부침이로다.[與君爲新婚 免絲附松蘿]” 한 데서, 혼인의 뜻으로 쓰인다.

 

사라밀장(沙羅密藏)

원래 석가모니불이 사라수(沙羅樹) 숲에서 열반에 들 때의 오묘한 말씀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부처님의 위력을 말한다.

 

사라천(紗羅川)

곡산(谷山)에 있는 시내의 이름이다.

 

사락(絲絡)

예물로 보내는 옷감을 말한다. / 인용: 有客行(성해응)

 

사랑(四郞)

사선(四仙). 신라(新羅) 때의 네 사람의 국선(國仙)으로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詳)ㆍ남석행(南石行)을 말한다.

 

사력(社櫟)

역사수(櫟社樹). 즉 지신(地神)의 신주로 삼아 제사지내던 상수리나무를 가리킨다. 옛날 어떤 목수가 제() 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이란 곳에 이르러 그곳 사당 앞에 서있는 상수리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의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리울 만하고 둘레를 재어보니 백 아름이나 되었지만, 그 목수는 그 나무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여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재목으로는 아무 쓸모없는 상수리나무()가 사당() 안에 빌붙어 살면서 잘도 장수를 누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사령(四靈)

()ㆍ봉()ㆍ귀()ㆍ용()을 말하는데, 사령이 나타나는 것은 곧 제왕(帝王)이 출현할 상서라고 한다.

 

사령운(謝靈運)

남북조 시대 남송(南宋)의 시인. 별명 사강락(謝康樂).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치적(治積)을 쌓지 못하자 그의 글재주를 아끼는 문제(文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이다. 이후 막대한 유산으로 연일 수백 명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산야(山野)에서 호유(豪遊)하다가 반역죄에 몰려 처형됨. 서정(抒情)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문화 사상에 산수시(山水詩)의 길을 열어 놓음에 따라 산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산수시, 산거적(山居賊) 등의 시집을 남김.

 

사례(司禮)

명 나라 때 궁중의 예의를 관장하던 직책인 사례감을 말한다. 사례감 위충현(魏忠賢)이 희종(熹宗)의 유모인 객씨(客氏)와 더불어서 손을 잡고는 어진 선비들을 동림당(東林黨)으로 몰아 몰살시키는 등 온갖 전횡을 하다가 의종(毅宗)이 즉위한 뒤에 그 죄가 드러나서 복주(伏誅)되었다. 명사(明史)卷三百五 위충현열전(魏忠賢列傳)

 

사로(四老)

귤을 가리킨다. 파공인(巴邛人)의 귤밭이 있었는데, 서리가 내린 뒤 귤을 따서 저장하였다. 그 중에 크기가 서말들이 그릇만한 큰 귤이 있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어 쪼개보니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살결이 붉은 두 노인이 서로 장기를 두며 담소하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귤 속의 즐거움이 상산사호(商山四皓)에 못지 않으나, 다만 깊은 뿌리와 단단한 꼭지가 못 되었기로 어리석은 사람의 손으로 따게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하였다. 서언고사(書言故事)

 

사로(斯盧)

경주(慶州)의 고호이다.

 

사로(師魯)

() 나라 때의 유학자인 윤수(尹洙)의 자인데, 그는 일찍이 범중엄(范仲淹)이 참소에 의해 폄척되었을 적에 급히 상주(上奏)하여, 자신도 범중엄(范仲淹)의 당()이니 함께 처벌을 받겠다고 직언을 하였다. 그는 특히 주로 군직(軍職)에 종사하면서 변방의 군비(軍備)에 심혈을 기울였다. 송사(宋史)卷二百九十五

 

사로(四老)

()의 학정을 피해 산 속에 숨어 산 동원공(東園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의 네 사람의 현로(賢老). 상산(商山)의 사호(四晧)라고도 한다. 사기(史記)卷五十五 유후세가(留侯世家)

 

사록(沙麓)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산명이다. 노 희공(魯僖公) 14년에 이 산이 무너지자, 진 나라 사관(史官)이 점을 쳐보고는 후세에 성녀(聖女)가 이 땅에서 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뒤에 한 원제(漢元帝)의 왕후가 여기에서 탄생하였으므로, 전하여 왕후의 탄생을 말한다.

전설상의 산 이름인데, 성녀(聖女)가 태어날 조짐을 미리 보임을 말한다.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80년 후에 사록 땅에서 귀녀(貴女)가 태어나 천하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사록(沙鹿)

하북(河北) 대명현(大名縣)에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토산(土山)인데 재앙의 조짐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僖公 十四年가을 8월 신묘에 사록이 무너졌다. 진 나라 복자(卜者) ()이 말하기를 ‘1년 후에 장차 큰 재앙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것이다[秋八月辛卯 沙鹿崩 晉卜偃曰 斯年將有大咎 幾國亡].” 하였다.

 

사록(祠祿)

() 나라 제도에, 대신이 파직될 경우 도교(道敎)의 궁관(宮觀)을 관리하도록 하여 특별한 직무가 없이 녹을 지급함으로써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특별히 맡은 일이 없이 예우로 받는 녹을 말한다.

 

사록경(沙麓慶)

사록(沙麓)은 산 이름인데 그 산이 무너졌는데, 후일에 그 땅에서 성녀(聖女)가 탄생하리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 그 후에 한나라의 원제(元帝)의 황후인 왕황후(王皇后)가 그 땅에서 낳다.

 

사롱(紗籠)

먼지가 덮히지 않도록 현판에 씌워놓은 사포(紗布)를 말한다. 귀인과 명사가 지어 벽에 걸어 놓은 시문을 청사(靑紗)로 덮어 장식해서 오래도록 보존하며 존경의 뜻을 표했던 벽사롱(碧紗籠)’의 고사가 있다.

 

사롱수불(紗籠袖拂)

() 나라 때 위야(魏野)가 일찍이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승사(僧寺)에 가 놀면서 각각 시()를 지어 유제(留題)하였는데, 뒤에 다시 구준과 함께 그 절에 가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싸 놓았고, 위야의 시는 싸지 않아 먼지가 가득 끼었으므로, 수행한 관기(官妓)가 소매로 그 먼지를 떨었다. 그러자 위야가 다시 시를 지어 쓰기를, “다만 그때마다 미인 소매로 떨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싼 것보다 나으리라[但得時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롱유구재(紗籠有舊裁)

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왕파(王播)가 젊어서 빈궁(貧窮)하여 양주(揚州)의 혜소사(惠昭寺)에 기식(寄食)을 하고 있자 중이 그를 무척 싫어하므로, 시 한 수를 남기고 그 절을 떠났다가 뒤에 그 지방의 장관(長官)이 되어 그 절을 찾아가 보니, 옛날 자기가 써 놓고 갔던 시를 사롱(紗籠)에 잘 보관해 놓았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롱정호(紗籠正護)

장래 재상이 될 것을 말한다. 사롱(紗籠)은 깁을 바른 농인데, () 나라 때 재상 이번(李藩)이 아직 벼슬하기 이전에 어떤 중이 그에게 말하기를 ()은 바로 사롱 가운데 있는 사람(紗籠中人)이다.”고 하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중이 대답하기를 재상이 될 사람은 저승에서 반드시 그의 상()을 세워서 사롱으로 그것을 보호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롱호구시(紗籠護舊詩)

당 나라 왕파(王播)가 일찍이 빈천하여 절에 가서 기식(寄食)하고 있었을 때 중들이 이를 미워하여 식사 종을 식사 후에 울리므로, 왕파가 그 뜻으로 시를 지어 그 절에 남겨 두었었는데, 그 후에 파가 귀히 되어 그곳을 다시 찾으니, 그 시가 모두 비단에 싸여있었다는 고사. 상우록(尙友錄)

 

사롱호상인(紗籠護像人)

재상(宰相)의 위치에 오를 사람을 말한다. 재상이 될 사람은 명사(冥司)에서 반드시 그의 상()을 세우고 사롱으로 이를 보호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사룡(士龍)

() 나라 문인 육운(陸雲)의 자. 그는 시문에 능하여 형인 육기(陸機)와 이륙(二陸)으로 병칭되는데 순은(荀隱)을 만났을 때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운간 육사룡(雲間陸士龍)’이라고 한 적이 있다.

 

사룡(射龍)

이 태조의 조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이 백룡(白龍)과 흑룡(黑龍)이 싸울 때에 흑룡을 활로 쏘아 죽였으므로, 그곳의 연못을 사룡연(射龍淵)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1 太祖朝故事本末

 

사루(謝樓)

남조 제()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부임해서 높은 누대(樓臺)를 짓고 앞 산의 경치를 감상하였으므로, 후대에 이 누대를 사공루(謝公樓), 사루(謝樓) 혹은 북루(北樓)라고 일컬었는데, 일반적으로 시흥이 도도하게 우러나는 정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집은 청산에 가까우니 사조와 같고, 문 앞에 드리운 푸른 버들 흡사 도잠일세[宅近靑山同謝朓 門垂碧柳似陶潛].”라는 표현이 있다. 이태백집(李太白集)24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

 

사륙(四六)

변문(騈文) 또는 변체(騈軆)라고도 한다. 글귀마다 4자 또는 6자로 문장을 이루는 것으로, 안짝과 바깥짝이 서로 대()가 되고 또 평측(平仄)으로 그 성운(聲韻)을 고르는 문체. 이 문체는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처음 성립되고, ()의 말기에 와서 사륙(四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사륙문(四六文)을 말한다. 육조(六朝)와 당() 나라에서 유행하던 문체인데,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법(對句法)을 쓰며, 압운(押韻)이 많은 변려문(騈儷文)이다.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한다. 유취(類選)卷十下 詩文篇 論文門

 

사륜(絲綸)

임금의 조서(詔書)를 뜻하는 말로, 예기(禮記)치의(緇衣)왕의 말은 처음엔 실오라기 같다가도 일단 나오면 굵은 명주실처럼 되고, 왕의 말은 처음엔 굵은 명주실 같다가도 일단 나오면 밧줄과 같이 된다[王言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綍].”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인용: 軍丁歎(정민교)

 

사리(闍梨)

범어(梵語)로 아사리(阿闍梨)의 약칭인데, 불자(佛子)들의 사범이 되는 큰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사리(賜履)

군주가 하사하는 봉지(封地), 여기서는 방백(方伯)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사리부재(詞俚不載)

속된 거리의 노래는 책에 싣지 않는 것.

 

사리사복(私利私腹)

사사로운 이익으로 배를 채움.

 

사리사욕(私利私慾)

사사로운 이익과 사사로운 욕심이라는 뜻으로, 공리(公利)를 버리고 자기 일신의 이익을 탐하는 행위의 의미이다.

 

사리자(舍利子)

부처의 제자 가운데 지혜(智慧) 제일(第一)인 사리불(舍利佛)을 말하는데, 맨 처음에는 외도(外道)인 사연(沙然)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뒤에 석존(釋尊)에게 귀의하자 석가(釋迦)의 교단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사림(詞林)

문인들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사림기사(詞林紀事) 따위를 가리킨다.

 

사립고주(蓑笠孤舟)

유종원(柳宗元)강설(江雪)이란 시에서 외로운 배의 도롱이 갓 쓴 늙은 이 홀로 찬 강 눈에 낚시질하네[孤舟簑笠翁 獨釣寒江雪].”라고 했다. .

 

사마(駟馬)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

 

사마(絲麻)

명주와 삼베 등 귀중한 것을 말한다.

 

사마(司馬)

한 나라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부가(詞賦家)로 항상 소갈병을 앓았는데, 아름다운 문장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사마(司馬)

한나라의 사마천(司馬遷)은 그가 지은 사기(史記)로 하여 천고의 대문장이라고 지목했다.

 

사마가사벽(司馬家四壁)

집이 너무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탁문군(卓文君)이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반하여 도망 나와 상여에게로 가자 상여는 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달려 왔는데, 문군이 보기에 상여의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벽이 사방에 막혀 있을 뿐이었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사마관괴(絲麻菅蒯)

춘추좌전(春秋左傳)성공(成公) 9년에 사마가 있다 하더라도, 관괴를 버리지 말 일이라[雖有絲麻 無棄菅蒯].”는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아무리 귀한 게 있다할지라도 모자를 상황에 대비하여 하찮은 것도 버려선 안 된다라는 뜻이다. / 인용: 花王誡

 

사마군실(司馬君實)

군실은 사마광(司馬光)와 자()이다.

 

사마난추(駟馬難追)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사마로 쫓아도 붙들지 못한다[駟馬不能追]’는 말로. , 말을 조심하라는 비유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

 

사마능운부(司馬凌雲賦)

한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神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마상여가 대인부(大人賦)를 지어 올리자, 무제가 보고는 몹시 기뻐 마치 자신이 직접 표표히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서 천지 사이를 유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사기(史記)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사마독(司馬督)

북제(北齊) 때 좌복야(佐僕射) 양음(楊愔)이 번손(樊遜)을 부좌(府佐)로 삼자, 번손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문족(門族)이 한미하고 비속하니 원외사마독(員外司馬督)에 보임해주기 바란다.”고 하니, 양음이 말하기를 재주가 높은 사람에겐 상례(常例)를 따르지 않는다.” 하고, 상께 아뢰어 그를 부좌로 등용했던 데서 온 말이다. 북제서(北齊書)卷四十五

 

사마문성봉선기(司馬文成封禪起)

한 무제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죽기 전에 책 한 권을 남기면서 황제의 사자(使者)가 와서 찾거든 주라고 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봉선서(封禪書)였다고 한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장경(長卿)은 그의 자()이다.

 

사마문왕(司馬文王)

사마소(司馬昭).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의 권신(權臣). ()는 자상(子上), ()의 대장군(大將軍)ㆍ대도독(大都督). 260년에 위나라의 황제 모()를 멸망시키고 원제(元帝)를 앙립(仰立)하였으며 촉한(蜀漢)을 멸망시켜 진왕(晉王)에 봉립되었다. 위실(魏室) 탈위의 야심이 있었으나, 265년에 사망. 그의 아들 염()이 원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진국(晉國)을 세웠다.

 

사마사(司馬師)

사마의(司馬懿)의 장자이다. ()는 자원(子元). 경제(景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젊었을 때는 하후현(夏侯玄), 하안(何晏) 등의 청담가(淸淡家)와 이름을 같이하고 특히 하안으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역에 즈음하여 그는 은밀히 계략을 꾸며, 25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의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국내에서는 반사마씨운동(反司馬氏運動)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오()의 제갈격(諸葛挌)과 싸워 승리하였다. 안질(眼疾)을 앓아 급사하였다.

 

사마상객유(司馬嘗客遊)

사마천(司馬遷)20세 때 강호(江湖)를 주유(周遊)하였고, 공자(孔子)는 늘 타국에 손()으로 돌아다녔다.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년까지 살았던 한나라 초기의 저명한 문장가다. 특히 ()’라는 장르의 글을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무제(武帝)에게 유렵부(游獵賦)라는 제목의 를 바친 적이 있다. 이 글은 허구적인 인물인 없다라는 님과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의 문답을 통해, 임금이 동산을 화려하게 꾸며 거기서 사냥을 즐기는 일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원문에는 없다라는 님이 무시공(無是公)’으로 되어 있고,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이 오유선생(烏有先生)’으로 되어 있다. ‘무시그런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오유어찌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사마수(司馬瘦)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인데,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한 무제(漢武帝)에게 부()를 지어 바쳐 벼슬을 받을 정도로 글에 능하였는데, 항상 소갈병으로 고생하였다. 사기(史記)117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사마씨(司馬氏)

() 나라의 왕족이다.

 

사마안거(駟馬安車)

네 필의 말이 끄는 편안한 수레로, 상고 때 임금이 초야에 있는 현인을 초빙할 때 예우를 극진히 하는 뜻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곧 임금의 정중한 초빙을 말한다.

 

사마온공(司馬溫公)

() 나라 유학자. 이름은 광(), 자는 군실(君實), 호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한다. 죽은 뒤에 온국공(溫國公)에 추증(追贈)되었으므로 온공(溫公)이라 한다.

 

사마자미(司馬子微)

자미(子微)는 사마승정(司馬承禎)의 자()이다. 사마승정은 당() 나라 사람으로 호는 백운(白雲)ㆍ백운자(白雲子)ㆍ중암도사(中巖道士)이고, 시호는 정일선생(貞一先生)이다. 반사정(潘師正)을 따라 벽곡도인술(辟穀導引術)을 받아 개원(開元) 중에 소명(召命)을 입고, 조명(詔命)에 의해 왕옥산(王屋山)에 단실(壇室)을 쌓음. 세 가지 서체(書體)로 노자(老子)를 베껴 구문(句文)을 간정(刊正)한다.

 

사마주(司馬柱)

진취적으로 뜻을 세워 기필코 공명(功名)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 장안(長安)에 갈 때 촉도(蜀都)인 성도(成都)의 승선교(升仙橋)를 지나면서 그 기둥에 대관(大官)이 되어 으리으리한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썼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사마지려(司馬知呂)

사마는 사마광(司馬光), 여는 여공저(呂公著)를 이른다. 사마광이 위독했을 때 여공저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가 내 몸은 의원에게 맡기면 되고, 집안 일은 자식에게 맡기면 되지만 나라 일은 맡길 곳이 없어 걱정하다가 지금 공()이 맡도록 부탁하오.” 하였다. 송사(宋史)卷三百三十六

 

사마참석(司馬鑱石)

아무리 묘를 화려하게 꾸며도 후세 사람이 파헤치니 모두 소용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자유(子游)부자(夫子)가 송() 나라에 있을 적에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석곽(石槨)을 아름답게 조각하느라고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자 부자가 이렇게 사치하게 꾸밀 바에야 죽어서 일찍 썩는 것이 낫다.했다.’ 하였다.” 했다.

 

사마천(司馬遷)

전한의 역사가. 지는 자장(子長). 경칭은 태사공(太史公). 젊었을 때 전국 각처를 주유(周遊)하며 전국시대(戰國時代) 제후(諸侯)의 기록을 수집 정리한다. 기원전 104년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曆法)의 기틀을 마련한다. 아버지 사마담(史馬談)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됨. 흉노(匈奴) 토벌 중 포로가 되어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받음. 기원전 97년 불후의 명저 사기(史記)130권을 완성한다.

 

사막(思邈)

()의 은사(隱士) 손사막(孫思邈)이다. 음양(陰陽)ㆍ의약(醫藥)에 정통하였다.

 

사만보대(獅蠻寶帶)

사만보대(獅蠻寶帶)는 띠쇠()에 사자(獅子)와 만왕(蠻王)을 새겨 넣은 것으로, 고위직(高位職)의 무관(武官)이 허리에 두르는 요대(腰帶)이다.

 

사매지갈(思梅止渴)

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曹操)가 한더위에 행군하는데 모두 목이 타서 애쓰는 양을 보고 내가 전에 이 고개를 넘을 때 저 너머에 커다란 매화나무밭이 있었는데 지금쯤 매실(梅實)이 한창 열었을 것이라.” 하자, 군사들은 그 신 매실을 입에 넣을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아 갈증을 잊었다 한다.

 

사맹(謝孟)

사영운(謝靈運)과 맹교(孟郊)를 가리킨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린다. ()나라 군사가 초나라 군사를 포위한 채 오랜 시간이 흘러 양쪽 진영이 다 지쳐 있을 때,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의 민요를 불러서 초나라 군사들이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켰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방이 다 적에게 싸여 도움이 없이 고립됨.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의견을 반대하여 고립된 상태를 의미한다. 초한(楚漢)의 싸움에서 초의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한에게 모두 투항해 초의 노래를 구슬프게 부른다고 생각한 탄식.

 

사면춘풍(四面春風)

사방으로 봄바람이 분다는 뜻으로, 항상 좋은 얼굴로 남을 대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것을 말한다.

 

사면팔방(四面八方)

사면과 팔방. 모든 곳.

 

사명(辭命)

춘추시대(春秋時代) 제후들간에 왕래하던 외교 문서이다.

 

사명(司命)

세상 만물의 운명을 맡은 신()을 말한다.

 

사명광객(四明狂客)

당 나라 시인 하계진(賀季眞)의 자호이다. 늙어서 고향인 오중(吳中)으로 돌아올 때에 현종황제(玄宗皇帝)가 경호(鏡湖) 한 구비(一曲)를 하사(下賜)하였다.

 

사명하감(四明賀監)

() 나라 하지장(賀知章)의 벼슬이 비서감(秘書監)이었다. 그가 만년에 사명산(四明山)에 은퇴하여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자호했으며, 일찍 이백(李白)의 시를 보고 자네는 천상에서 인간으로 귀양온 신선(謫仙)이라고 격찬했었다.

 

사모(四牡)

네 마리의 수말로,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이 타고 가는 말을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사모(四牡)사모 달리고 달리니, 큰 길이 멀고 멀다[四牡騑騑 周道倭遲].” 하였는데, 이는 멀리 가는 사신을 천자(天子)가 위로한 시이다.

 

사모판포(紗帽版袍)

사모ㆍ판포는 조선 시대 사대부의 관복. 사모ㆍ판포란 말은 청 나라 이불(李紱)의 목당시집(穆堂詩集)紗帽版袍春人貢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사목지신(徙木之信)

나무를 옮긴 것에 대한 신의라는 뜻으로, 위정자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 백성에 대한 신의를 밝힌다는 의미이다. 진의 상앙(商鞅)이 법령을 제정할 때 남문에 큰 나무를 세워놓고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는 소문을 내고는 짐짓 옮기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자 사람들이 법령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고사.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專)

 

사무(使無)

재판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공평정대하게 정치를 하겠다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顔淵)대학(大學)4송사를 처리하는 것은 나도 남만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하겠다[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라는 말이 나온다.

 

사무두불행(蛇無頭不行)

뱀이 머리가 없으면 나아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무리를 지어 횡행하는 자는 두목이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사무사(思無邪)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공자(孔子)는 이 구절을 시경의 요지(要旨)라 하였다. “공자가 시경(詩經)3백 편을 한 글귀로 포괄한다면 생각에 사가 없는 것이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하였다. 시경(詩經)노송(魯頌) (), 논어(論語)』 「위정(爲政)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어도 남은 한이 없다는 뜻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을 정도로 간절한 바램이나 그 바람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사무외(四無畏)

불교(佛敎)의 설법(說法)에 두려움 없는 네 가지(四無畏)가 있으니, 모든 보살(菩薩)들이 모든 것을 잘 기억하는 것, 모든 사람의 마음과 자질을 다 알고 있는 것, 문답(問答)을 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의심되는 것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다.

 

사무이성(事無二成)

일은 두 가지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번에 두 가지 일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어 적어도 한 가지는 실패한다는 의미이다.

 

사문(斯文)

공자(孔子)의 말에서 나온 문구인데, 문왕(文王)이 죽은 뒤에 자신이 이어받은 이 도()라는 뜻이다. 후세의 선비들은 유학(儒學)을 사문(斯文)이라 한다.

이 글ㆍ이 학문ㆍ이 도()란 의미로, 유교(儒敎)의 학문ㆍ도의ㆍ문화 또는 유학자 즉, 선비를 말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사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거니와……하였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이 학문(유교)을 어지럽히는 적이란 말로 즉, 유교의 교리나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종의 이단자를 가리킨다. 중세 유학이념이 지배하던 사회 속에서 다른 이념을 불인정한 상태를 반영한 용어이다. / 인용: 연암의 글에 반하다, 전통이란 이름의 폭력, 인생을 말한 정약용, 주희가 왜곡한 대학을 바로잡다

 

사문미상(斯文未喪)

공자(孔子)가 광() 땅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곤욕을 당하면서,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상실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광인(匡人)이 나를 어찌하랴[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하였다. 사문은 곧 이 도()라는 뜻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사문부산(使蚊負山)

모기로 하여금 산을 지게 한다는 뜻으로, 적은 힘으로 무거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문유취(事文類聚)

()ㆍ후()ㆍ속()ㆍ별()ㆍ신()ㆍ외()ㆍ유()집 총 236권으로서 전 후ㆍ속ㆍ별집은 송 나라 축목(祝穆)의 찬이고, 신ㆍ외집은 원() 나라 부대용(富大用), 유집은 축연(祝淵)의 찬이다. 축목이 편찬한 것은 부류(部類)를 나누어 군서(群書)의 요어(要語)ㆍ시구(詩句)ㆍ고금(古今)의 사실ㆍ고금 문집의 순으로 배열했다. 그는 사문유취(事文類聚) ()에서, “因考歐陽詢徐堅所著類書 採摭事實及詩文 合而成編이라 하여, 당 나라 구양순의 예문유취(藝文類聚)와 서견의 초학기(初學記)의 체재를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부대용과 축연의 것은 축목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그것에 증보한 것이다.

 

사미(沙彌)

범어로 막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수행중인 어린 중을 가리킨다.

 

사미(四美)

() 모임에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아름다운 것으로, 좋은 때(양신(良辰)), 아름다운 경치(미경(美景)), 마음에 유쾌한 것(상심(賞心)), 즐거운 일(낙사(樂事))을 사미라 한다. 왕발(王勃), 등왕각서(滕王閣序)

 

사미수잔포(賜米酬殘圃)

장헌세자를 호위했던 금군(禁軍)의 말들이 민간인의 수박밭을 짓밟아 수박이 깨지고 덩굴이 뽑혔는데, 세자가 그 말을 듣고 그 피해를 후하게 보상했던 일을 말한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

 

사미인(思美人)

그리운 사람의 뜻이다. 한문학의 미인은 군주(君主)의 뜻 외에 일반적으로 현인(賢人), 군자(君子), 애인 등을 통칭하는데, 우리말의 임에 해당한다.

 

사민이시(使民以時)

백성을 부리는 것은 때에 맞게 한다는 뜻으로, 농번기를 피하여 백성들을 사역(使役)시킨다는 의미인데, 공자(孔子)가 말한 백성을 올바로 다스리는 그 첩경의 하나이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사바세계(娑婆世界)

석가가 교화하는 곳. 인간 세계.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

 

사반공배(事半功倍)

일은 반이면서 공은 배라는 뜻으로,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둠을 이르는 말이다.

 

사발(沙鉢)

우리나라에서 사기로 만든 밥그릇을 말한다.

 

사발농사(沙鉢農事)

사발에 짓는 농사라는 뜻으로, ‘빌어먹는 일을 이르는 우리나라 성어.

 

사발통문(沙鉢通文)

사발처럼 쓴 통문이라는 뜻으로, 누가 주모자(主謀者)인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필두(筆頭)가 없이 관계자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삥돌려가며 적은 통문.

 

사방(莎房)

승방(僧房)을 말한다.

 

사방석(四方石)

수도(隧道)를 석회로 축조(築造)하고 흙을 덮은 다음 그 위를 덮는 네모난 넓은 돌을 말한다.

 

사방지(舍方知)

사천(私賤) 신분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모친이 그에게 여아(女兒)의 옷을 입히고 화장을 바르고 옷 짓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가 자라서는 조사(朝士)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여시(女侍)들과 많이 간통을 했었다. 사인(士人)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李氏)는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이었는데, 과부로 지내면서 사방지를 끌어들여 옷을 짓는다고 칭탁하고 밤낮으로 함께 거처한 지가 거의 10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천순(天順; 明英宗 연호) 7년 봄에 사헌부에서 그 소문을 듣고 그를 국문하다가 그와 평소에 통해왔던 한 비구니(比丘尼)를 신문하기에 이르렀는데, 비구니가 양도(陽道 남자의 성기를 뜻함 )가 매우 장대했다.”고 하므로, 여의(女醫) 반덕(班德)에게 그것을 만져보게 한 결과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상()이 승정원 및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하성위의 매()가 바로 이씨의 며느리가 되었었으므로, 하성위 또한 놀라 혀를 널름거리며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장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웃고는 특별히 더이상 추문하지 말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순지의 가문(家門)을 오멸시킬까 염려된다.” 하고, 사방지를 순지에게 알아서 처벌하도록 하니 순지가 사방지에게 장() 10여 대만을 쳐서 기내(畿內)에 있는 노자(奴子)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이윽고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여왔다. 그리하여 순지가 작고한 뒤에는 더욱 끝없이 방자하게 굴므로, 사방지를 신창현(新昌縣)으로 장배(杖配)하였다.

 

사방지(四方志)

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옛 풍속에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예기(禮記)』 「내칙(內則)

 

사방지문(四方之門)

증성의 문이 44개나 있었다 한다.

 

사방팔방(四方八方)

네 방향 여덟 방면이라는 뜻으로, 모든 방향이나 방면을 의미한다.

 

사배공반(事倍功半)

많은 노력에도 효과가 적다는 뜻이다.

 

사백(詞伯)

시문을 잘 짓는 사람. 문단의 거장(巨匠)을 말한다.

 

사벌(沙伐)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고호이다.

 

사벽(四壁)

집안 네 주위의 벽. 전하여 아무 가구(家具)도 없는 가난한 집을 말한다. “탁문군(卓文君)이 밤에 도주하여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로 오자, 상여는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의 살림살이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사벽(四壁)만이 서 있었다.” 하였다. 사기(史記)卷一百十七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사벽독립(四壁獨立)

집이 가난함을 뜻하는 말이다.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집이 가난하여 집안에 값진 물건이 하나도 없고 네 벽만 서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十七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사변요명기양신(肆辯邀名起兩臣)

괴통(蒯通)이 제() 나라 처사(處士)인 동곽 선생(東郭先生)과 양석군(梁石君)을 조참(曹參)에게 추천하여 기용하게 한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卷四十五 괴오강식부열전(蒯伍江息夫列傳)

 

사복(射覆)

엎어놓은 그릇 속에다 목표물을 놓아두고 쏘아 맞히게 하는 것.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

 

사본치말(舍本治末)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일의 본말이 전도된 상황을 의미한다.

 

사봉(槎峯)

나무로 깎아 만든 봉우리. 곧 솔과 돌을 예술적으로 조각해 놓은 것.

 

사부(斜付)

노비(奴婢) 등을 본디 소속한 곳에서 빼내어 다른 역()에 종사하게 하는 것.

 

사부(謝傅)

동진(東晉)의 사안(謝安).

 

사부(射鮒)

물이 매우 적음을 말한다. 주역(周易)』 「정괘(井卦)구이효(九二爻)작은 우물 구멍의 물이라, 붕어에게나 부어 줄 만하다[井谷射鮒].” 한 데서 온 말이다.

 

사부고(四部藁)

왕세정(王世貞)의 저서. 부부(賦部)ㆍ시부(詩部)ㆍ문부(文部)ㆍ설부(說部)로 분류되었는데, 원집이 174, 속집이 218권이다.

 

사부동산(謝傅東山)

사부는 진()의 사안(謝安)으로 자는 안석(安石)인데, 태부(太傅)에 증직(贈職)되었으므로 사부라 한 것이다. 동산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에 있는데, 사안은 여기에 은거해 있다가 뒤에 세상에 나와 충성을 바쳐 진 나라를 안정시켰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사부동산회(謝傅東山懷)

사부는 진()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인데 동산(東山)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

 

사부막상위(思婦莫傷蝛)

멀리 떠나 있으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상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시경(詩經)빈풍(豳風) 동산(東山), “쥐며느리가 방에 있으며, 납거미가 문에 있네[伊威在室 蠨蛸在戶].”하였는데, 이는 방을 청소하지 않아서 쥐며느리가 방에 있으며,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서 문에 거미줄이 쳐졌다는 것으로, 황폐해진 집을 형용한 말이다.

 

사부사감당(乍復舍甘棠)

백성이 시정자(施政者)의 덕을 앙모(仰慕)하는 것을 말한다. ()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에 감격한 백성들이, 소공이 일찍이 쉬어 갔던 감당(甘棠 )을 소중히 여긴 데서 온 말이다. 시경(詩經)소남(召南) 감당(甘棠)저 팥배나무를 베지 말라. 소백(召伯)이 쉬어간 곳이다.” 하였다.

 

사부풍류(謝傅風流)

사부는 진()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을 가리킨 말로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퇴하여 기녀(妓女)의 손을 잡고 산수(山水)를 즐겼던 일을 말한 것이다.

 

사분(蛇分)

한 고조(漢高祖)가 미시(微時)에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 술에 취하여 밤에 가는 길에 큰 흰 뱀을 만나 검()을 빼어 베니 뱀이 나뉘어져 두 동강이 되었다. ()을 멸하고 그가 한제(漢帝)가 될 전조(前兆)라 한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사분오열(四分五裂)

넷으로 나누어지고 다섯으로 찢어짐. 하나의 집단이 이념ㆍ이익 등에 따라 갈라져 혼란스러움.

 

사불급설(駟不及舌)

아무리 빠른 사마(駟馬)라도 자기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도 따라잡지 못하듯이 뜬소문이 쉽게 퍼짐을 비유하는 말조심을 하라는 의미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

 

사불여의(事不如意)

일이 뜻과 같지 않다는 뜻으로, 일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사불주(沙弗州)

상주(尙州)의 고호이다.

 

사붕(射堋)

화살을 쏠 때 화살을 받치는 터.

 

사비성(泗沘城)

부소산을 감싸고 있는데, 백마강 쪽으로 반달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사빈(泗濱)

사수(泗水)의 물가. 이곳에서 나는 돌로 경()을 만든다.

 

사빈(司賓)

서경(書經)』 「요전(堯典). “돋는 해를 큰 손님처럼 공경한다.” 하였다.

 

사사(蛇梭)

금사(金蛇)와 척사(擲梭)를 합칭한 말인데, 금사는 전광(電光)의 별칭이고, 척사는 베를 짤 때 북을 이쪽저쪽으로 던지는 것을 이른 말로, 빠른 것을 말한다.

 

사사(査査)

까치 우는 소리

 

사사(楂楂)

까치의 우는 소리

 

사사(咋咋)

꽥꽥. 의성어로 귀신이 외치는 소리. 큰소리.

 

사사(沙射)

남을 음해(陰害)하는 일을 말한다. 물여우는 독벌레로,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를 모래를 머금어 쏘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린다고 한다.

 

사사(俟俟)

많은 사람이 천천히 걷는 모양

 

사사(師師)

송 휘종이 당시의 이름난 기생 이사사(李師師)의 집에 놀러 다닌 일이 있었다.

스승으로 하여 본받음, 또는 그러한 사람, 본받을 만한 훌륭한 용의의 형용, 많음

 

사사(寺寺)

여러 곳의 절

 

사사(沙沙)

옷이 너울거리는 모양,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모양

 

사사(漇漇)

함치르르한 모양, 물에 젖어 윤기가 나는 모양

 

사사(司射)

향사례(鄕射禮)에서 주인(主人)을 보좌하는 사람인데, 그는 특히 삼조(三組)로 된 6인의 사수(射手)들이 활쏘기에 앞서 그 시범을 보인다고 한다. 의례(儀禮)』 「향사례(鄕射禮)

 

사사건건(事事件件)

일마다 사건 마다라는 뜻으로, 모든 일 또는 온갖 사건을 의미하거나 일마다의 부사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사곡진령(蛇死哭秦靈)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의하면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죄수들은 압송(押送)하는 도중 기병(起兵)을 결심하고 술에 취하여 밤길을 가게 되었었다. 마침 그의 앞에 큰 뱀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자, 고조는 술김에 칼을 빼어 뱀을 베었다.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그곳에 이르니 한 노파가 울면서 하는 말이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마침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였다[, 白帝子也, 化爲蛇, 當道, 今爲赤帝子斬之].” 한다.

 

사사삼출(士師三黜)

사사(士師)유하혜(柳下惠)를 말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유하혜가 사사가 되어 세 번 쫓겨났다.” 하였다.

 

사사여의(事事如意)

일마다 뜻대로 다 된다는 뜻이다.

 

사사오입(四捨五入)

4는 버리고 5는 들인다는 뜻으로, 수학에서 우수리를 처리할 때 4이하면 잘라 버리고 5이상이면 잘라 올리는 셈법인데, 우리 현대사에서 자유당의 부정 개헌(改憲) 파동에 사용되었던 용어로 알려짐.

 

사상(使相)

감사(監司)의 별칭이다.

 

사상(士尙)

민성휘(閔聖徽)의 자()이다.

 

사상(四象)

사상은 구수(九數)의 노양(老陽), 육수(六數)의 노음(老陰), 칠수(七數)의 소양(少陽), 팔수(八數)의 소음(少陰)을 말한다.

 

사상(使相)

상신(相臣)에 걸맞은 신분으로 군대를 감독, 지휘하는 신하를 말한다.

 

사상객(槎上客)

뗏목을 타고 은하수를 오가는 사람으로,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옛날에 은하수와 바다가 서로 통해 있어서 해마다 8월이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뗏목을 타고 올라갔는데, 어떤 사람이 10여 일을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한 성()에 이르러서 어떤 장부(丈夫)가 물가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보고는 여기가 어디인가를 물으니, 그 장부가 답하기를, “그대가 촉군(蜀郡)에 가서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어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촉군에 가서 엄군평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수(牽牛宿)를 범하였다.” 하였는데,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은하수에 도착한 때였다고 한다. 박물지(博物志)卷十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누각이라는 뜻으로,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여 오래 견디지 못할 일이나 물건, 헛된 것을 의미한다.

 

사상무(謝尙舞)

() 나라 때 사상은 총명이 뛰어났고 음악(音樂)도 매우 잘하였는데,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어떤 모임을 인하여 사상에게 그대가 구욕무(鴝鵒舞)를 잘 춘다 하니, 그 춤을 좀 춰볼 수 없겠는가?” 하자, 사상이 좋습니다.” 하고는 문득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진서(晉書)卷七十九

 

사상제자(泗上弟子)

사수가의 제자라는 뜻으로, 공자(孔子)가 사수(泗水)의 근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의미에서 공자의 제 자나 공자의 학파를 의미한다.

 

사상지위(死喪之威)

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常棣), “죽어서 장사 지낼까 하는 두려움에, 형제간에 몹시 걱정해 준다[死喪之威 兄弟孔懷].”하였다.

 

사상채(謝上蔡)

이름은 양좌(良佐), 자는 현도(顯道). 그가 상채에 살았으므로 상채 선생이라 부른다. 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에게 수학하고, 저서에는 논어설(論語說)상채어록(上蔡語錄)이 있다.

 

사상포도(槎上葡萄)

() 나라 사람 장건(張騫)이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오손(烏孫)과 대완(大宛) 등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포도(葡萄)를 가지고 왔다. 박물지(博物志)

 

사상포증가(謝相蒲增價)

동진(東晋)의 명상(名相) 사안(謝安)의 포규선(蒲葵扇)으로, 시골로 가는 사람이 있어 돌아가려는 차에 사안에게 가 뵈었는데, ()이 돌아갈 노자가 있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포규선(부들 잎으로 만든 부채) 다섯 자루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안이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쥐니, 경향(京鄕)의 사서(士庶)들이 다투어 사서 값이 몇 배나 더 올라갔다. 진서(晋書)』 「사안전(謝安傳)

 

사새(四鰓)

농어의 별칭으로, 아가미뼈가 네 개라 하여 이른 말이다. 본초(本草)』 「노어(䲐魚)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의 지세가 험하여 쉬이 넘보지 못할 땅을 말한다.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음과 삶을 놓고 결단을 내린다는 뜻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대들어 끝장을 낸다는 의미이다.

 

사생관두(死生關頭)

죽느냐 사느냐의 위태한 고비를 말한다.

 

사생도(寫生圖)

실물(實物)이나 실경(實景)을 그대로 잘 그려 놓은 그림을 말한다.

 

사생영욕(死生榮辱)

죽음과 삶과 영예와 치욕의 뜻으로, 인간 삶의 파란만장(波瀾萬丈) 인생 역정의 의미이다.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뜻으로, 비록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은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사생편(寫生篇)

사생도의 수법을 써서 그림 그대로 잘 묘사한 문장을 말한다.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사서(社鼠)

사당에 사는 쥐는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없으므로, 전하여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신을 비유한다.

 

사서(司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 6품 관원이다.

 

사서불가훈거(社鼠不可熏去)

사당의 쥐는 사당을 태울까봐 불로 쫓을 수 없다는 말로, 권력의 비호(庇護)하에 녹봉(祿俸)만 축내는 관리는 신전에 사는 쥐처럼 불을 피워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서성호(社鼠城狐)

사당의 쥐와 성곽의 여우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신전이나 성곽에 깃들어 사는 쥐나 여우처럼 임금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

사서와 오경이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경전(經傳)을 의미한다.

 

사석위호(射石爲虎)

돌을 범으로 잘못 보고 화살을 쏘았다는 말로, 일념을 가지고 하면 어떤 일이든 간에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사석음우(射石飮羽)

돌을 쏘았는데 터럭에 박혔다는 뜻으로, 돌을 범인 줄 알고 쏘았는데 깃까지 들어가 박혔다는 초()양유기(養由基)와 한()이광(李廣)의 고사에서 열성(熱誠)을 다하면 어떤 일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기(史記)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유의어: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사선(四善)

관리(官吏)의 네 가지 선행(善行). 즉 덕의가 널리 알려지는 것[德義有聞], 청신함이 밝게 드러나는 것(淸愼明著), 공평함을 칭송할 만한 것(公平可稱), 각근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恪勤匪懈]등이다. 구당서(舊唐書)』 「직관지(職官志)

 

사선(四仙)

신라 시대의 사선(四仙)으로 일컬어지는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을 말한다. 이들이 사흘 동안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여 삼일포라는 이름이 생겼다.

 

사선봉(四仙峯)

총석정은 통천(通川)에 있다. 전설에 신라의 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영랑(永郞)ㆍ안상(安詳)이 여기에서 유상(游賞)하였다 하여 사선봉(四仙峯)이라 한다.

 

사선성(謝宣城)

남제(南齊) 사조(謝眺), 자 현휘(玄暉). 선성(宣城) 태수(太守)를 지냈으므로, 사선성이라 일컬었다. 글이 맑고도 화려하며 시()에 능했다.

 

사선양거(謝仙煬炬)

사선(謝仙)은 뇌신(雷神)을 말한다. () 나라 진종(眞宗) 때 왕진궁(王眞宮)에 화재가 발생하여 기둥 하나만 남기고 전소되었는데 그 기둥에 사선이 불을 질렀다[謝仙火].’는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선정(四仙亭)

신라 시대에 국선(國仙)으로 불렸던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祥)ㆍ남석행(南石行) 네 사람이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에 와서 3일을 놀았다 하여 후인이 그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삼일포의 작은 섬에 정자를 세우고 사선정이라 이름한 것이고, 또 삼일포의 북쪽 벼랑에 단서(丹書)로 쓴 영랑도 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여섯 자가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四十五卷 高城

 

사성(四聖)

네 성인(聖人). 처음으로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그린 복희씨(伏羲氏), 육십사괘(六十四卦)를 그리고 괘사(卦辭)를 붙인 주() 나라 문왕(文王), 효사(爻辭)를 지은 주공(周公), 상전(象傳)ㆍ단전(彖傳) 등의 십익(十翼)을 지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사성(私省)

내가 회()와 함께 온종일 이야기할 때는 어리석은 것 같더니, 물러가서 그 사생활을 살펴보면 그대로 행하니 회는 어리석지 아니하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에서 나온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사성(四聖)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孟子)이다.

 

사성(使星)

사신(使臣)을 이른다. 한 화제(漢和帝) 때 이합(李郃)이 천문(天文)의 사성(使星)을 보고서 두 사신이 파견될 것을 미리 알았던 데서 온 말이다. ()나라 화제(和帝)가 각 지방에 민정(民情)을 순찰하는 사신(使臣)을 보내면서 미복(微服)으로 암행(暗行)하게 하였더니, 두 사신이 익주(益州)에 들어가서 이합(李郃)의 집에 자는데, 이합이 두 사람에게 묻기를, “두 분이 서울을 떠날 때에 조정에서 두 사신 보낸 것을 알고 오셨는가.” 하였다. 두 사신이 놀래어, “우리는 듣지 못하였다. 어찌 아는가.” 하니 이합이 하늘에 별을 가리키며 두 사신별(使星)이 익주의 분야(分野)로 향하였기 때문에 천문(天文)을 보고 안다.” 하였다.

 

사성(四聲)

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이니, 사성으로서 음운(音韻)의 고저(高低)와 강약(强弱)과 장단(長短)을 구분한다.

 

사성기(士成綺)

사성기라는 사람이 노담을 찾아가 말하기를, “나는 선생께서 성인(聖人)이라고 듣고 한 번 뵙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 않고 발을 싸매고 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성인이 아니로군요[吾聞夫子聖人也. 吾固不辭遠道而來願見, 百舍重趼而不敢息. 今吾觀子非聖人也].” 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노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한다. 장자(莊子)』 「천도(天道)

 

사성보(四聲譜)

상성ㆍ평성ㆍ거성ㆍ입성을 분류한 책으로 총 1권이다.

 

사성착족비(蛇成着足非)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나오는 이른바 화사첨족(畫蛇添足)”의 비유로, 훌륭하게 완성된 시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사성환입한(使星還入漢)

사성은 사자(使者)를 칭하며 한중(漢中)은 익주(益州)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 나라 화제(和帝)는 즉위한 다음 사자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미복(微服)으로 다니면서 사방의 풍속과 민요를 채집해 오게 하였는데 이때 두 명의 사신이 익주에 이르러 원인 이합(李郃)의 집에 투숙해 있었다. 여름철이라서 함께 밖에 나와 하늘을 보았는데 이합은 두 분께서 서울을 떠날 때 두 사신을 이곳에 파견한 사실을 모르는가? 천기를 보니 두 사성이 익주의 분야(分野)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안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이합전(李郃傳)

 

사수(死綏)

군대가 퇴각하면 장군이 그 책임을 지고 죽는 것을 말한다. 사마법(司馬法)將軍死綏라는 말이 있고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24 ‘진소유몽발빈 …… 인차기운시(秦少游夢發殯 …… 因次其韻詩)’관직에 몸담고 순직함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장군이 죽는 것과 같다[居官死職戰死綏].”라는 구절이 있다.

 

사수(謝守)

문재(文才)가 있는 고을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조 송()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일찍이 영가 태수(永嘉太守)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사수(泗洙)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공자가 사수(泗水)와 수수(洙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수(泗水)

() 나라에 있는 강 이름으로 흔히 수수(洙水)와 병칭되는데, 수수는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북쪽에 있고 사수는 그 남쪽에 있으며, 공자(孔子)가 그 근처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여 공자를 가리킨다. 곧 공자가 사람들을 교화시킬 때 봄바람이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듯이 하였다는 것이다.

사천(泗川)의 고호(古號)이다.

 

사수(社首)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에 있는 지명. 옛날 주 성왕(周成王)은 이곳에 터를 닦고 지신(地神)에 제사하였다.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

 

사수시(四愁詩)

후한(後漢) 때 장형(張衡)이 하간효왕(河間孝王)의 상()이 되어 나갔을 때, 세상이 점차 쇠폐해짐을 걱정하여, 네 가지 생각 즉, 일사(一思)ㆍ이사(二思)ㆍ삼사(三思)ㆍ사사(四思)로 나누어서 불평한 마음을 노래한 시를 말한다. 문선(文選)卷二十九

 

사수침정(泗水沈鼎)

() 나라 소양왕(昭襄王) 52년에 서주(西周)를 공격하여 보기(寶器) 구정(九鼎)을 탈취하였는데, 하나가 사수(泗水)에 빠졌으므로 여덟 개만 진 나라로 들여왔다 한다. 그 뒤에 진시황(秦始皇)이 사수의 주정(周鼎)을 꺼내려고 1천 인을 동원해서 물속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봉선서(封禪書)소식(蘇軾)의 시에 사수에서 주 나라 솥 잃어버리고, 위성은 한 나라 승로반(承露盤) 거절하였네[泗水逸周鼎 渭城辭漢盤].”라는 구절이 있다.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7 甘露寺

 

사숙(私淑)

직접 그분에게서 수업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학을 전수받은 이에게서 다시 자신이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離婁)나는 공자(孔子)의 문도가 되지 못하였으나 나는 사숙한 사람이다[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 하였다. / 인용: 大學章句序, 우치다 타츠루는 어려워

 

사슬기수흥(舍瑟沂水興)

공자(孔子)가 제자인 증점(曾點)에게 혹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하고 묻자, 증점이 비파를 타다가 내려놓고는[舍瑟] 대답하기를 따뜻한 봄날 봄 옷이 마련되면 관자[冠者] 5, 6인과 동자 6, 7인으로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浴乎沂] 무우(舞雩)에서 바람 쐰 다음 노래하며 돌아오겠다.” 한 고사가 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사슬자(捨瑟者)

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을 말한다. 자로(子路)ㆍ염구(冉求)ㆍ공서적(公西赤)ㆍ증점(曾點)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는 제자들에게 각각 뜻을 말하라 하였다. 자로(子路)를 비롯하여 염구ㆍ공서적은 각각 정치에 대한 것을 말했다. 공자는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에게 너도 말하라 하니, 증점은 비파를 놓고는 저의 뜻은 저들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며, 시를 읊고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공자는 외물(外物)에 구하지 않는 그의 높은 뜻을 가상히 여겨 나는 증점을 허여(許與)한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자(程子)그의 가슴속이 유연하여 곧바로 천지만물과 상하가 함께 통한다[其胸次悠然 直與天地萬物 上下同流]” 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사승(師承)

학문이나 기예의 맥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사승직(絲繩直)

과거 급제를 하고도 남을 출중한 문장 실력을 말한다. () 나라 마이(馬異)의 시 송황보식부거시(送皇甫湜赴擧詩)’청동의 거울 환히 밝혀 줄 것이요, 붉은 거문고 줄 직선으로 펴지리라[靑銅鏡必明 朱絲繩必直].”라는 표현이 있다.

 

사시(謝詩)

사조(謝朓)의 시.

 

사시(捨施)

사찰(寺刹) 등에 물품을 희사보시(喜捨布施)하는 것을 말한다.

 

사시마조(似是馬曹)

마조는 말을 관장하는 관서를 말한다. () 나라의 호방하기로 이름난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때 환충이 경은 무슨 관서에 벼슬하고 있소하자 대답하기를 아마도 마조인 듯합니다[似是馬曹].” 하고, 말을 몇 마리나 관리하고 있소하자 대답하기를 말을 잘 모르는데 무슨 수로 그 수효를 알겠습니까.” 하였다는 데서 인용한 것으로, 벼슬은 하고 있으나 자기의 직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卷八十 왕휘지전(王徽之傳)소식(蘇軾)차운장안도독두집시(次韻張安道讀杜集詩)’큰 문장은 용 잡는 솜씨이지만 미관말직 아마도 마조인 듯해[巨筆屠龍手 微官似馬曹].”라 하였다. 분류동파시(分類東坡詩)卷十七

 

사시반(四矢反)

화살 네 대가 반복된다는 것은 화살 네 대가 한 곳을 거푸 맞춘다는 뜻으로, () 나라 장공(莊公)이 활을 잘 쏘아서 화살 네 대가 한 곳을 맞추었다고 한다.

 

사시사(四時詞)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사시(四時)라는 시를 말한다[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峯 秋月揚明暉 冬嶺秀孤松].

 

사시이비(似是而非)

옳은 것 같으나 실은 틀림이란 말이다.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시절이 늘 봄빛이라는 뜻으로, 늘 잘 지내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시정윤여(四時定閏餘)

서경(書經)』 「요전(堯傳)요임금은 , 희씨와 화씨야, 기년(期年)366일이니 윤달을 두어야 사시(四時)를 정하여 해를 이룬다[帝曰 咨汝羲曁和 朞三百有六十有六日 以閏月定四時成歲].’ 하였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사시추탈불능평(四時推奪不能平)

한퇴지(韓退之)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대개 만물은 평정함을 얻지 못할 때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 사계절이 서로 밀어내어 그 자리를 뺏는 것 역시 평정함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 …… 四時之相推奪 其必有不得其平者乎].”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시춘풍(四時春風)

누구에게나 늘 좋은 낯으로 대하며 무사태평한 사람.

 

사시피(四時皮)

마음 속에 시비판단이 분명함을 말한다. ()의 저부(褚裒)는 고귀(高貴)한 풍도가 있었으며 기국(器局)이 뛰어났다. 환이(桓彛)피부 속에 포폄(褒貶)이 있다.” 하였으며, 사안(謝安)은 사시의 기후가 모두 갖춰졌다.” 하였는데 춘추(春秋)는 원래 봄은 양()으로서 포상(褒賞)에 해당하고 가을은 음()으로서 폄벌(貶罰)에 해당하므로 명명한 것임을 들어 말한 것이다. 진서(晉書)』 「저부전(褚裒傳)

 

사신(詞臣)

사신은 곧 임금 곁에서 윤언을 연역하는 시종신을 일컫는 말이다.

홍문관 관원 등 문학을 관장하는 신하를 말한다.

 

사신우귀(蛇神牛鬼)

바르지 못한 신들을 가리킨다.

 

사신위교령(使臣違敎令)

장헌세자가 온천의 서쪽 담장 밑에서 과녁에 다섯 개의 화살을 쏘아 명중시키고 그것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홰나무 한 그루를 손수 심은 뒤에 단()을 둘러쌓도록 분부하였는데, 세자가 떠난 뒤 그 고을 수령이 그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수령을 가리킨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

 

사심불구(蛇心佛口)

뱀 같은 간악한 마음에 부처 같은 자비로운 말이라는 뜻으로, 속은 악독하면서도 겉으로는 후덕(厚德)한 체 함을 의미한다.

 

사심수초부(思尋遂初賦)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 나라 손작(孫綽)이 회계(會稽) 땅에서 10여 년 동안 산수(山水)를 즐기며 살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는데 뒤에 산기상시(散騎常侍)의 관직에 몸을 담았을 때 환온(桓溫)이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하려는 것을 상소하여 저지하자, 환온이 불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어째서 수초부의 내용대로 행하지 않고서 남의 국사(國事)를 간섭하는가.”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진서(晉書)』 「손작전(孫綽傳)

 

사심알장교(邪心遏莊蹻)

장갹은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도둑인데, 성질이 포악하여 도척(盜跖)과 함께 흉악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사심자시(師心自是)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한다.

 

사심자용(師心自用)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스스로 쓴다는 뜻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일은 다 옳다 하여 그대로만 하고 남의 말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십구년비(四十九年非)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현대부(賢大夫)거백옥(蘧伯玉)이 나이 50이 되었을 때 49년 동안의 잘못된 행동을 깨달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장자(莊子)』 「칙양(則陽), 논어(論語)』 「헌문(憲問)위령공(衛靈公)/ 이태백(李太白)의 시 자극궁에는 이 구절이 지난 사십구 년 잘못된 생애, 한번 지나가니 돌이킬 수 없도다.(四十九年非 一往不可復)”로 되어 있다.

 

사십구재(四十九齋)

불교에서 죽은 이를 위한 의식 중, ()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삼가하며 맑게 하는 의식이고, ()는 죽은 이를 위해 음식을 바치며 정성을 들이는 의식이다. 재에는 7일재(七日齋)49(四十九齋)가 있는데 ‘7일재는 돌아가신 날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지내는 것이고, ‘497번째 돌아오는 7일재에 지내는 것이다. 7월 보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올리는 우란분재(盂蘭盆齋), 윤달에 죽기 전에 미리 공덕을 쌓기 위해 지내는 예수재(預修齋) 등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번의 生死를 거치는 중음신(中陰身)의 과정을 거치는데 49일째 되는 날은 드디어 중음신의 신세를 벗고 삼계(三界) 육도(六道)에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 한다. 남아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이 날을 기념하여 죽은 자가 三界(天界, 地界, 人界)에 가서 누리게 될 후생의 평안을 위해 독경과 공양으로 명복을 비는 것을 말한다. 칠칠재라고도 한다. 흔히 제사를 연상해 사십구제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나이 사십이 되어서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되어 어떠한 일에도 의혹되는 일이 없었다는 공자(孔子)의 말로, 불혹(不惑)은 나이 40세로 사용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유의어: 불혹지년(不惑之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패경(貝經)은 곧 불경(佛經)를 가리킨 것으로,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인도(印度)의 중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맨 처음 중국에 전한 데서 온 말인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란 곧 불교의 요지(要旨)42장으로 나누어 간명(簡明)하게 설명해 놓았음을 말한다.

 

사십자매(四十字媒)

궐문지기가 남이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고 벼슬에 오른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고려 예종(睿宗) 때 어떤 궐문지기가 정습명(鄭襲明)의 각촉시(刻燭詩)석죽화(石竹花)를 외었는데 예종이 듣고 즉시 옥당(玉堂)에 보직했다. 오언율시는 모두 40자이다.

 

사십초말(四十初襪)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늙어서야 마음먹은 일이 이루어짐을 비유하여 이르는 우리나라 성어.

 

사십팔자(四十八字)

구루비(岣嶁碑)의 글자 수.

 

사아도강(士雅渡江)

사아(士雅)는 진() 나라 조적(祖逖)의 자()이다. 중원(中原)이 호()와 갈()에게 점령되었을 때에 조적은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중원으로 향하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나는 맹세코 중원을 수복하여 황하(黃河)ㆍ낙양(洛陽)의 땅을 밝히겠다.” 하였다.

 

사악(四嶽)

대산(岱山)ㆍ곽산(霍山ㆍ화산(華山)ㆍ항산(恒山)

 

사악(四岳)

사악(四嶽)과 같은 말로, () 시대의 사방 제후(諸侯)의 관명(官名). 일설에는 사악(四岳) 제후(諸侯)의 일을 맡아보던 의화(羲和)의 네 아들 희중(羲仲)ㆍ희숙(羲叔)ㆍ화중(和仲)ㆍ화숙(和叔)이라 함.

 

사안(謝安)

동진(東晉)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자()는 안석(安石)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동산(東山)에 은거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비로소 벼슬길에 나가 외적(外敵)을 물리치고 내정(內政)을 닦는 데 탁월한 공을 세워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렀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수배령공증마상희(酬裵令公贈馬相戱)사안의 풍류는 또 어찌할 수 없나니, 준마를 내주어 미녀와 바꾸려 하였도다[安石風流無奈何 欲將赤驥換靑娥].”라는 구절이 있다.

 

사안불기(謝安不起)

()나라 사안(謝安)40세가 되기까지 동산(東山)에서 놀고 벼슬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안석(安石)이 일어나지 않으면 창생(蒼生)을 어찌하랴.” 하였더니, 뒤에 나와 명재상(名宰相)이 되었다.

 

사안비유(謝安比喩)

동진(東震) 명상(名相) 사안이 눈오는 날 자녀를 모아 놓고 글 뜻을 강론할 새, 이윽고 눈이 갑자기 오니 공이 말하기를, “흰 눈이 분분하니 무엇 같은가(白雪紛紛何所似).” 형의 아들 호아(胡兒)가 말하되, “공중에 소금을 뿌린 것과 비슷하지요[散鹽空中差可擬].” 형의 딸 도온(道蘊)이 말하되, “버들강아지가 바람에 일어남만 못하죠[未若柳繁因風起].” 하니, 공이 그의 영리함을 칭찬하였다.

 

사안석(謝安石)

() 나라 때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으로 안석은 그의 자. 그는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 계속 동산(東山)에 은거하다가, 대장군 환온(桓溫)의 천거에 의해 나이 40세에 처음 사마(司馬)가 되었었다. 그후로 점차 중용되어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백만군을 격파 평정하였고, 또 진실(晉室)을 찬탈하려던 대사마(大司馬) 환온의 음모를 깨뜨려 이루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나라를 반석같이 보호하였다. 진서(晉書)卷七十九

 

사안이와명유중(謝安以臥名逾重)

사안(謝安)이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회계(會稽)동산(東山)에 숨어살았으므로 명망이 더 높아졌었는데, 뒤에 환온(桓溫)의 부름을 받고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끝에 가서 태부(太傅)로 추증되었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사암(思菴)

고려 후기의 문신인 유숙(柳淑)의 호이다.

 

사야교(士也驕)

시경(詩經)위풍(魏風) 원유도(園有桃),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더러 선비가 교만하다 하누나[不知我者 謂我士也驕].”하였다.

 

사양(謝楊)

사씨와 양씨. 송 나라 정명도(程明道)와 이천(伊川)의 문인인 사양좌(謝良佐)와 양시(楊時)이다.

 

사양장랑(使羊將狼)

양으로 하여금 이리의 장수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약자에게 강자를 통솔하게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의 근본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사양지심예지단야(辭讓之心禮之端也)

겸허하게 양보하는 마음은 예()의 근본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사양지월(四陽之月)

양이 넷인 달이란 주역(周易)』 「대장괘(大壯卦)2월을 말하는데, 양이 이미 과반수를 차지해 강성해지는 괘로서 우레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상징한다.

 

사어(舍魚)

맹자(孟子)』 「고자(告子)물고기 요리도 내가 먹고 싶고,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다. 하지만 한 가지만 택하라면, 나는 물고기를 버리고(舍魚)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나는 살고도 싶고, 의리를 행하고도 싶다. 하지만 한 가지만 택하라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舍生而取義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사어(史魚)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직신(直臣). 위 영공(衛靈公)이 현신(賢臣)거백옥(蘧伯玉)을 쓰지 않고 불초(不肖)한 미자하(彌子瑕)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을 극력 간함에도 듣지 않으므로 임종에 나는 신하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정례(正禮)를 쓰지 말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다. 이때 조문(弔問) 왔던 영공이 이를 보고 크게 깨달아 그의 말을 들었다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

 

사어지천(射魚指天)

물고기를 쏘는데 하늘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물고기를 잡는데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당치 않은 일을 하려 한다는 의미이다.

 

사어취웅(舍魚取熊)

어느 두 가지를 다 원하면서도 한꺼번에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의()에 맞는 쪽을 택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을 경우, 나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을 경우,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사언(謝偃)

당 태종(唐太宗) 때의 시인. 본래는 직륵(直勒)씨였는데, 뒤에 사()로 고쳤음. 그는 부()에 능해서 당시의 시인 이백약(李白藥)과 함께 이시 사부(李詩謝賦)로 일컬어짐. 신당서(新唐書)文藝志 上

 

사업(司業)

본디 수 양제(隋煬帝) 때 설치한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보조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는 벼슬인데, 흔히 우리나라의 성균관에 견주어 말한다.

 

사역(沙𧌒)

남을 은근히 해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귀신이고 물여우라면 말할 수 없다 하거니와[爲鬼爲𧌒則不可得].” 하였는데, 집주(集注)물여우는 모래를 머금어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쏘면 그 사람은 곧 병이 드는데 여우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사연(社燕)

제비로, 제비가 봄철 사제사(社祭祀)를 지낼 때 날아왔다가 가을철 사제사를 지낼 때 날아가므로 이렇게 칭한다.

 

사연추홍(社燕秋鴻)

제비는 춘사(春社)의 날에 왔다가 추사(秋社)의 날에 떠나가고, 기러기는 춘사의 날에 떠났다가 추사의 날에 돌아오기 때문에, 만나자마자 곧바로 헤어질 때의 표현으로 쓰게 되었다.

 

사염묵생비(絲染墨生悲)

묵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송 나라의 묵적(墨翟)을 말한다. 이 말은 사람은 습관에 따라 성()이 선하게도, 악하게도 되는 것을 비유한 말로, 묵적이 일찍이 실에 물들이는 것을 보고 울며 말하기를 푸른 물감을 쓰면 실이 푸르러지고, 누런 물감을 쓰면 실이 누레지나니, 물들이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묵자(墨子)』 「소염(所染)

 

사염비(絲染悲)

묵적(墨翟)의 고사. 묵적이 하얀 실을 놓고, 그것을 물들이기에 따라 색깔이 얼마든지 변해질 수 있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묵자(墨子)』 「소염(所染)

 

사영(槎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나 중국 사신을 접반(接伴)할 때 동악이 지은 시문을 가리킨다.

 

사영구공(思潁歐公)

구공은 송() 나라 때 명신(名臣)이며 문장가인 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키며, 사영은 영주(潁州)를 사억(思憶)한다는 뜻으로, 구양수가 일찍이 사영시(思潁詩)를 지은 데서 온 말이다.

 

사영운불(思靈運佛)

사영운이 부처를 신봉하던 맹의(孟顗)를 멸시한 것을 말한다.

 

사영지독(射影之毒)

물속에 있다는 역(𧌒)이라는 조그만 여우가 입에 머금었던 모래로 사람의 그림자에 뿜으면 헌데가 나거나 앓는다고 한다. 설문(說文)

 

사예(司隷)

추관(秋官)에 속하는 주() 나라 관직의 이름인데, 사례(司禮)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여겨진다.

()나라도 한 때는 왕망(王莽)이라는 찬탈자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것인데 황족들인 유씨(劉氏)가 다시 일어나서 왕망을 잡아 죽이고 다시 한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그 건국한 임금이라는 사람이 똑똑하지 못하여 그 아래에서 사예교위(司隸校尉)라는 벼슬로 있는 유수(劉秀)라는 사람이 다시 천하를 평정하고 완전한 국가를 건설하였으니, 그를 광무제(光武帝)라 한다.

 

사옹(沙翁)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가리킨다.

 

사옹(司饔)

조선 시대 어선(御膳) 및 대궐 안의 공궤(供饋)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옹원(司饔院)을 가리킨다.

 

사왕사래(乍往乍來)

갑자기 갔다가 갑자기 온다는 뜻으로, 변화(變化)가 심함을 이르는 말이다.

 

사우정(四雨亭)

이식(李湜)의 호이다.

 

사웅부(射熊賦)

양웅(揚雄)이 지은 부()에 사냥을 서())한 것이 많고, 곰을 쏘는 데에 관한 사구(辭句)가 많다.

 

사원(士元)

방통(龐統)의 자()이다.

 

사원(詞源)

글이 나오는 근원이란 뜻이다.

 

사월(使越)

() 나라 때 육가(陸賈)의 고사. 육가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훈신으로 구변(口辯)이 능하였는데, 고조의 명으로 남월왕(南越王) 위타(尉佗)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한 나라에 신복(臣服)하게 하였다. 전한서(前漢書)卷四十三

 

사위성(舍衛城)

석가(釋迦)가 설법하며 교화를 펼쳤던 북인도(北印道) 교살라국(憍薩羅國)의 서울로, 이곳에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다.

 

사위성(舍衛城)

옛날 인도(印度)에 있었던 성 이름으로, 명성(名聲)을 떨친 인물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한다. 금강경(金剛經)

 

사유(四維)

국가를 다스리는 네 가지 요령으로, 관자(管子)』 「목민(牧民), “()ㆍ의()ㆍ염()ㆍ치()를 사유(四維)라 한다[何謂四維? 一曰禮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하였고, “사유가 퍼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 하였다.

 

사유계성(似柳鷄聲)

고려 충선왕이 원 나라에 들어가 지은 시에 鷄聲恰似門前柳라는 글귀가 있다.

 

사유불조삼(死有不弔三)

예기(禮記)』 「단궁(檀弓)겁이 나서 자살한 경우와 압사(壓死)한 경우와 익사(溺死)한 경우는 죽어도 조문을 하지 않는다[死而不弔者三 畏厭溺].”고 하였다.

 

사유천목(辭幽遷木)

친구간에 연회(燕會)하는 악가(樂歌)시경(詩經)소아(小雅) 벌목(伐木)쩡쩡 나무를 찍는데, 앵앵 새가 울더니만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에 올라 앉네[伐木丁丁 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 한 데서 온 말이다.

 

사육(絲肉)

()는 악기, ()은 사람의 목청으로, 즉 인간 세상의 음악 소리를 말한다.

 

사율(師律)

군사를 통솔하는 군율(軍律).

 

사읍융준공(思揖隆準公)

한고조(漢高祖)가 코가 높았으므로 융준공(隆準公)이라 하였는데, 역이기(酈食其)가 처음 고조(高祖)를 뵈올 때에 절하지 않고 읍()하였다.

 

사의(徙倚)

머뭇거리다.

 

사의(四儀)

사위의(四威儀)’라는 불교 용어의 준말로, (), (), (), () 4종 신체의 자태가 법도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을 말한다.

 

사의(司儀)

주 나라 때 빈객에 관한 일들을 맡은 관명(官名)이다.

 

사이(四夷)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이(躧履)

신이 발꿈치에 닿지 않는다는 말로, 반갑고 급한 뜻이다. 한서(漢書)』 「준불의전(雋不疑傳)신 신을 사이도 없이 서로 맞는다[躧履相迎].”하였다.

 

사이(士以)

이행건(李行健)의 자()이다.

 

사이불사즉태(思而不學則殆)

생각만 하고 더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태롭게 된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사이비(似而非)

겉은 제법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것. 사시이비(似是而非)의 준말이다. 진짜같이 보이나 실은 가짜인 것을 가리킨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사이후이(死而後已)

죽은 뒤에야 그친다는 뜻으로, 죽을 때까지 노력하여 그치지 않음을 의미이다.

 

사인(舍人)

관직명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서 漢初까지 王公貴族들이 거느린 측근에 대한 통칭.

 

사인(寺人)

환관은 맹자(孟子)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항백(巷伯), “양원의 길이여, 높은 언덕에 얹혀 있도다. 환관인 맹자가 이 시를 짓는도다[楊園之道 猗于畝丘 寺人孟子 作爲此詩].”하였다.

 

사인(蛇蚓)

힘이 빠진 지렁이와 뱀 같다는 말로, 졸렬한 자체(字體)로 옮겨 쓴 글을 가리킨다. 왕희지(王羲之)가 남조 양()의 소자운(蕭子雲)이 쓴 서체(書體)를 보고는, 힘이 없이 유약하기만 할 뿐 장부의 기상이 없다면서 줄마다 봄날의 지렁이가 엉켜 있는 듯하고, 글자마다 가을날의 뱀들이 뭉쳐 있는 듯하다[行行若縈春蚓 字字如綰秋蛇].”고 혹평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80 왕희지전(王羲之傳)

 

사인검(四寅劍)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든 검.

 

사인명(舍人鳴)

한 무제(漢武帝) 때 곽사인(郭舍人)이 투호(投壺)를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는 특히 화살을 세차게 병에 던져 넣어 그 화살이 튕겨서 다시 나오게 하는 법을 썼던 바, 그 다시 나온 화살을 ()’라고 하였다.

 

사인명야부(斯人命也夫)

고치지 못할 몹쓸 병에 걸린 것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병에 걸린 염백우(冉伯牛)공자(孔子)가 찾아가서 창문을 통해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라고 한 기사가 전하는데, 염백우의 병은 문둥병이었던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

상대방을 쓰러뜨려 굴복시키려면 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것을 먼저 쓰러뜨려라.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라는 뜻으로, 사람들 사이의 서로 공경함을 한울님 공경하듯이 하라는 천도교(天道敎)의 윤리 강령.

 

사일(社日)

보통은 입춘(立春)이나 입추(立秋) 뒤의 다섯 번째 무일(戊日)을 가리키나, 사시(四時)에 치제(致祭)하는 날을 뜻하기도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늙은 농부 사일이 가까워지자, 나를 초청해서 새 술 맛보여 주네.[田翁逼社曰 邀我嘗新酒]”라는 표현이 있다.

 

사일(蜡日)

납제(臘祭) 지내는 날을 이르는데, 자공(子貢)이 납제 지낸 것을 보고 오자, 공자(孔子)가 묻기를 ()야 즐거웠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이 즐거워했으나, 사는 그 즐거움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므로 공자가 이를 백일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단 하루의 납제를 만났으니, 그 즐거움을 너는 알 바가 아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잡기(雜記)

 

사일(社日)

사직단(社稷壇)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하는 날. 입춘(立春) 후 다섯 번째의 무일(戊日)을 춘사(春社)라 하고, 입추(立秋) 후 다섯 번째의 무일을 추사(秋社)라 하는데, 특히 가을의 사일에는 제비가 둥지를 떠난다고 한다.

 

사일(射日)

태양을 쏜다는 것은 요() 임금 때에 태양이 10개가 함께 나타나서 곡식과 초목을 다 태워 백성이 살 수가 없게 되므로, 요 임금이 예(羿)를 시켜 태양 9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곧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함을 비유한 말이다.

 

사일포우육(死日飽牛肉)

두보(杜甫)가 일찍이 뇌양현(耒陽縣) 악사(岳祠)에 가 노닐 적에 갑자기 큰물이 져서 열흘이 넘도록 갇혀 밥을 먹지 못하다가 그곳 현령(縣令)이 구운 쇠고기와 탁주를 배에 실어 보내 주자 그것을 먹고 죽었다는 고사이다.

 

사자(沙觜)

강이나 바다 가운데 모래 무더기가 돌출(突出)한 곳을 이른다.

 

사자(師子)

불가(佛家)에서 부처를 이르는 말이다.

 

사자(四子)

사마표와 이이(李頤), “왕예(王倪)ㆍ설결(齧缺)ㆍ피의(被衣)허유(許由).” 했고, 이정(李楨), “실제로 사람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했다.

 

사자(四字)

중용(中庸)1에 나오는 계신공구(戒愼恐懼)’를 가리킨다.

 

사자불범(師者不範)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성제 때의 사부(師傅)가 되어,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전정(專政)함을 보고도 직언(直言)하지 못하고 아첨하므로 주운의 탄핵을 만났다.

 

사자심상빈(奢者心常貧)

사치하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가난하다는 뜻으로,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만족할 줄 몰라 마음이 항상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사자연(謝自然)

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중의 여도사(女道士)이다. 본디 과주(果州) 남충현(南充縣)의 한녀(寒女)인데 천태산(天台山)의 사마자미(司馬子微)에게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어 갔다. 한유(韓愈)의 시에 보인다.

 

사자제(四字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경남 하동(河東) 쌍계사(雙磎寺) 암벽에 새겨 놓은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를 말한다.

 

사자차시학(寫字此是學)

글자를 베끼는 것이 바로 배움이다라는 뜻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글자를 베껴 쓰면 그 베껴 쓰는 일 자체가 이미 갈고 닦는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사자화(師子花)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명마(名馬) 이름이다.

 

사자후(獅子吼)

사자의 부르짖음이란 말로써 웅변을 토한다는 의미이다. 부처의 설법에 뭇 악마가 굴복한 데서 부처의 설법을 의미하거나, 진리나 정도를 설하여 사설(邪說)을 갈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마경(維摩經) 불국품(佛國品)두려움 없이 설법하는 것이 마치 사자가 우는 소리와 같다.” 한 데서 나온 말로, 본래 설법하는 소리가 세계를 진동하여 마치 사자의 울음에 뭇 짐승들이 모두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사장(謝莊)

남송(南宋) 사람. 자는 희일(希逸). 사부(詞賦)로 유명하였다.

 

사장(詞丈)

문단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사장(社長)

한 마을의 우두머리. 이장(里長)과 같다.

 

사장군(謝將軍)

() 나라 사상(謝尙)이 우저(牛渚)에서 놀았다.

 

사장취거(詞場觜距)

취거(觜距)는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각각 역량을 뽑내며 선두를 다투는 문단(文壇)을 말한다.

 

사재(四載)

네 가지 타는 것. 물에서는 배를 타고, 뭍에서는 수레를 타고, 뻘밭에서는 널을 타고, 산에 오를 때는 나막신을 신음. 서경(書經)』 「익직(益稷)

 

사재(四材)

()ㆍ언()ㆍ서()ㆍ판()을 말한다.

 

사저수(死猪愁)

당 덕종(唐德宗) 때 노기(盧杞)가 괵주 자사(虢州刺史)로 있으면서, 괵주에 있는 관시(官豕) 3천 마리가 백성들에게 큰 걱정거리가 된다고 상주(上奏)하자, 덕종이 동주(同州)의 사원(沙苑)으로 옮기라고 하니, 노기가 동주도 폐하의 백성이니, 돼지를 잡아먹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던 고사에서 온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사전(社錢)

마을 또는 일정한 지방 단위의 조직을 사()라 하는데, 이를 통해 그 주민으로부터 거두는 돈을 말한다.

 

사전(師傳)

사승(師承)과 같은 말이다.

 

사전의발(師傳衣鉢)

사제(師弟)를 비유한 말인데, 의는 가사(袈裟), 발은 발우(鉢盂)로 선종(禪宗)에서 법통(法統)을 전수(傳授)할 때 신표(信表)로 사용하는 것이다. 전등록(傳燈錄)

 

사전춘추(四傳春秋)

원제(原題)는 춘추사전(春秋四傳)으로서 모두 38권으로 되어 있는데 편자(編者)는 미상이다. 맨 처음에 두예(杜預)ㆍ하휴(何休)ㆍ범녕(范寗)ㆍ호안국(胡安國)4()가 실려 있고 다음으로 강령(綱領)ㆍ제요(提要)ㆍ열국도설(列國圖說)ㆍ이십국년표(二十國年表)ㆍ춘추제국흥폐설(春秋諸國興廢說)이 기재되어 있는데, 경문 아래에 모두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3()의 주()를 내고 호전(胡傳)은 따로 표출(標出)하였다.

 

사절(使節)

관찰사의 별칭이다.

 

사절(死節)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다는 뜻이다. / 인용: 正氣錄序(윤근수)

 

사정(砂井)

단사정(丹砂井)의 준말이다. 고대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샘으로, 이 샘 밑에는 단사(丹砂)가 묻혀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장수하였다 한다. 포박자(抱朴子)』 「선약(仙藥)

 

사정(司正)

향음주(鄕飮酒)의 예에서 빈주(賓主)의 예를 바로잡아 주는 사람을 이른다. 의례(儀禮)』 「향음주례(鄕飮酒禮)

 

사제(蜡祭)

봄과 가을의 사일(社日)에 농촌에서 지내는 제사로, 이날에는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를 즐긴다.

사제는 납향(臘享) 제사라는 말인데, 연말(年末)에 올리는 감사(感謝)와 기원(祈願)을 위한 제()이다.

 

사제(沙堤)

새로 재상이 된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누구나 새로 재상이 되었을 때는 그의 사제(私第)로부터 성()의 동가(東街)에 이르기까지의 길에 모래를 죽 깔고 이를 모래 둑(沙堤)’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당서(唐書)』 「이덕유전(李德裕傳)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라는 뜻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사제동행(師弟同行)

스승과 제자가 함께 간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가 한 마음으로 배워나간다는 의미라서 학교에서 사제가 함께 하는 교육활동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사제로(沙堤路)

재상이 되었음을 의미한 것. ()나라 때의 풍속에 처음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그의 사제(私第)에서부터 성 동쪽 거리까지 모래로 길을 메웠는데, 그것을 일러 모래둑(沙堤)이라고 하였다. 당고사(唐故事)

 

사제조슬(仕齊操瑟)

제왕(齊王)이 비파를 싫어하는데, 제 나라에 벼슬하려는 사람이 비파를 가지고 문에 서 있는 지 3년이 되어도 들어가지 못했다. 객이 꾸짖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자네가 비파를 치니, 비파는 잘 쳐도 왕이 싫어함을 어쩌랴.” 하였다.

 

사조(姒姚)

조사(姚姒)를 거꾸로 쓴 것으로, ()는 하우(夏禹)의 성(), ()는 우순(虞舜)의 성, ()ㆍ우()성군(聖君) 때 말씀과 글. 한유(韓愈)진학해(進學解)위로 조와 사를 엿보건대 아득히 가이 없다[上規姚姒 渾渾無涯].” 하였다.

 

사조(謝眺)

남제(南齊) 사람. 자는 현휘(玄暉)이다. 시인(詩人). 특히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어 시가 청아하고 아름다웠으며 글씨도 잘 썼다. 일찍이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을 적에 산 남쪽에 높은 누대(樓臺)를 짓고 앞 산의 경치를 감상하였으므로, 후대에 이 누대를 사공루(謝公樓), 사루(謝樓)라 하고 그 산 이름을 사공산(謝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남제서(南齊書)47 사조열전(謝眺列傳)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청산과 가까운 집 사조와 한 가지요, 푸른 버들 드리운 문 도연명(陶淵明)과 흡사하네[宅近靑山同謝朓 門垂碧柳似陶潛].”라는 표현이 있다.

 

사조(射潮)

북몽쇄언(北夢瑣言)항주(杭州)에 해마다 조수가 밀려들므로 오월왕(吳越王) 전유(?)가 궁노(弓弩)를 설치하였다가 조수가 밀려들 적에 쏘니, 조수가 물러가 육지가 되었다.” 하였다.

 

사조(射鵰)

북제서(北齊書)』 「곡률우전(斛律尤傳)곡률우가 사냥하다가 한 마리의 큰 새를 발견하고 쏘아 그 머리를 명중시켰는데 마치 수레바퀴 같은 물체가 빙빙 돌면서 떨어졌다. 바로 보라매였다. 형자고(邢子高)가 보고 이는 옛날에 보라매 쏘던 사람의 솜씨이다.’고 감탄했다.” 하였다.

 

사조(謝祖)

() 나라 때 난리를 평정한 명장인 사현(謝玄)과 조적(祖逖)을 지칭한다.

 

사조구(謝眺句)

이백(李白)푸른 산에 가까운 집 사조와 같고, 푸른 버들 드리운 문 도잠과 비슷하네[宅近靑山同謝朓 門垂碧柳似陶潛].”라는 구절처럼 이태백집(李太白集)25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집 주위의 멋진 산 경치를 표현할 때에는 으레 사조를 떠올리곤 하는데, 이는 남조 제()의 시인인 사조가 종산(鍾山) 아래에다 별장을 지어 놓고는, ‘유동전(遊東田)’이라는 시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하는 바, 그 시의 말구(末句)향기로운 봄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푸른 산의 성곽만 머리 돌려 바라보네[不對芳春酒 還望靑山郭].”라는 표현이 나온다. 문선(文選)22

 

사조별(四鳥別)

모자(母子)가 서로 이별한다. 네 마리의 새끼 새가 그 어미를 떠난다는 고사에서 비롯됨.

 

사조산(謝脁山)

남제(南齊) 때의 시인(詩人) 사조(謝朓)가 일찍이 청산(靑山) 아래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이를 사공산(謝公山)이라 이름한 데서 온 말인데, 이백(李白)의 시에는 사조가 죽고 나니 청산이 비어버렸네[謝脁已沒 靑山空].”라고도 하였다.

 

사조산(謝脁山)

사조는 남제(南齊)의 시인으로, 종산(鍾山) 아래 동산에 별장을 지어 놓고 노닐면서 유동원(遊東園)’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매우 섬세한 감각으로 청신(淸新)한 시를 지어 이백(李白)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는데, 이백의 시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청산에 가까운 집 사조와 같고, 푸른 버들 드리운 문 도잠과 흡사하네[宅近靑山同謝朓 門垂碧柳似陶潛].”라는 표현이 있다.

 

사조선성(謝朓宣城)

남제(南齊)의 시인이었던 사조(謝朓)는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으면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몹시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사조위성증만리(射鵰威聲曾萬里)

사조(射鵰)는 물수리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뛰어난 활솜씨를 말한다. () 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이 일찍이 흉노(匈奴)와 싸울 적에 이광을 따라갔던 중귀인(中貴人)이 흉노 3인의 사격을 받아 상해를 입고 돌아오자, 이광이 이들은 반드시 물수리를 떨어뜨릴 만한 활솜씨가 있는 자들이다.” 하고는, 곧장 그 흉노 3인을 추격하여 2인은 사살하고 1인은 생포함으로써 위엄을 크게 떨쳤던 고사이다. 사기(史記)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사족(蛇足)

뱀의 발. 뱀을 그릴 때 발까지 그린다는 화사첨족(畫蛇添足)’의 준말로, 유해무익(有害無益)한 도로(徒勞)를 뜻하는 말이다. 뱀을 그리는데 실물에는 없는 발까지 더하여 그림. 쓸데없는 짓. 안 해도 될 쓸데없는 일을 덧붙여 하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족실배(蛇足失杯)

쓸데없는 짓을 하면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제사를 지낸 다음 그의 집에 사는 사람에게 술 한 잔 주었는데 두 사람이 마시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상의하기를 땅에다가 뱀을 그리기 시합하여 먼저 끝내는 자가 마시기로 하였다. 한 사람은 뱀을 다 그려 술을 먹게 되었는데, 왼손에는 잔을 들고 오른손에는 다시 땅을 그으며 나는 뱀의 발까지 그리겠다.” 하고 발을 그렸으나 끝나기도 전에 상대편 역시 뱀을 다 그리고는 잔을 빼앗으며 뱀은 원래 발이 없는데 자네가 어떻게 그리겠는가.” 하며 술을 마셨다 한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종(思宗)

명 장렬제(明莊烈帝)의 시호이다. 장렬제는 이자성(李自成)의 난에 북경이 함락되자 만세산(萬歲山)에서 자살하였다. 처음 사종이라 하였다가 후에 의종(毅宗)으로 개시(改諡)하였고, () 건륭(乾隆) 때에 다시 장렬제(莊烈帝)로 고쳤다.

 

사종(嗣宗)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진() 나라 완적(阮籍)의 자()이다.

 

사종곤슬유(嗣宗褌蝨喩)

편협한 견해로 일시적인 안일만을 구차하게 취하는 것을 말한다. 사종(嗣宗)은 진() 나라 완적(阮籍)의 자()이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군자가 이 세계 안에 처하는 것이 어찌 이가 잠방이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있으랴.”고 하였다.

 

사종백(嗣宗白)

사종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자. 완적은 본디 예의를 숭상하지 않아, 자기 모친상을 당했을 때 친구 혜희(嵇喜)가 예모를 갖추어 조문을 가자, 완적이 불쾌하게 여겨 그를 백안(白眼)으로 보았고, 그후 혜희의 아우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왔을 때는 완적이 크게 기뻐하여 그를 청안(靑眼)으로 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사종비(嗣宗悲)

세상 떠난 벗에 대한 추억이 간절해지리라는 말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진() 나라 왕융(王戎)이 황씨(黃氏)네 술집을 지나가면서 내가 옛날 완사종(阮嗣宗)과 혜숙야(嵇叔夜)와 함께 여기에서 질탕하게 마시며 노닐었는데, 이제 그들이 죽고 난 뒤에는 내가 그만 세상에 얽매어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다. 진서(晉書)』 「왕융전(王戎傳)

 

사종비달사(嗣宗非達士)

()나라의 완적(阮籍)의 자가 사종이다. 그는 세상 일을 피하노라고 술을 많이 먹고 취한 것으로 세상을 속였다. 그는 가다가 길이 막히면 통곡하고 돌아왔다 한다.

 

사주(社酒)

봄 가을 사일(社日)에 토지신(土地神)에 제사를 지내고 모여서 마시던 술.

 

사주(史籒)

선왕 때의 태사(太史). 그가 대전(大篆)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전을 일명 주문(籒文)이라고도 한다.

 

사주(賜酒)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내리는 것인데, 으례껏 술을 내리는 것을 사주라 한데 반해, 술과 함께 내찬(內饌)을 별도로 내리는 것을 선온(宣醞)’이라 한다.

 

사주문(史籒文)

사주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태사(太史)로서 대전(大篆) 15편을 지었는데, 여기서는 곧 대전체(大篆體)를 가리킨다.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주의 간지(干支)가 되는 여덟 글자. 생년(生年) 생월(生月) 생일(生日) 생시(生時)를 말한다. 타고난 신수(身數). 즉 사주에 의해 정해진 피할 수 없는 운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죽(絲竹)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왕희지(王羲之)가 회계(會稽) 산음(山陰)에서 그 유명한 난정(蘭亭)의 모임을 개최할 때, “풍악은 비록 울리지 않았어도 술 한 잔에 한 곡조씩 뽑으면서 그윽한 감회를 풀었다[雖無絲竹管絃之聲 一觴一詠亦足以暢舒幽情]”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

 

사준성경당여제(事遵誠敬當如祭)

어떤 일에든 정성과 공경을 다함을 말한다. 제사지낼 때에는 특별히 공경하므로 일을 받들기를 제사지낼 때처럼 한다[承事如祭].”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사중(四重)

중하게 여겨야 할 네 가지 일. 말을 중히 하고, 행동을 중히 하고, 얼굴 모양을 중히 하고, 좋아하는 것을 중히 하는 것[重言重行重貌重好]. 법언(法言)』 「수신(修身)

 

사중구활(死中求活)

죽음 가운데 삶을 구한다는 뜻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아냄을 의미한다. / 유의어: 사중구생(死中求生).

 

사중상호(紗中像護)

()의 이번(李藩)이 미천했을 때 한 중이 공은 사롱(紗籠) 안에 있는 사람이다.” 했다. 그 까닭을 묻자 명부(冥府)에서는 장래 재상될 사람의 화상을 사롱에 넣어 수호하고 있다.” 대답했다.

 

사중우어(沙中偶語)

모반(謀反) 또는 배신(背信)을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功臣) 20여 인을 봉하고 난 후, 그 나머지 사람들이 가끔 모래 위에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고조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가?”고 묻자, 장량(張良)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저들이 바로 모반을 하는 것입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사지(謝池)

남조(南朝) ()의 문장가 사혜련(謝惠連)10세에 벌써 글을 잘 지으므로, 족형(族兄)인 사영운(謝靈運)이 편장(篇章)을 지을 때마다 혜련에게서 좋은 말을 얻곤 하였다. 한번은 사영운이 영가서당(永嘉西堂)에서 종일토록 시()를 생각했으나 좋은 구절을 이루지 못했는데, 갑자기 꿈에 족제(族弟)인 혜련(惠連)을 만나 못 둑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라는 구절을 얻고는 매우 만족하게 여겼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남사(南史)卷十九

 

사지(四知)

후한(後漢) 양진(楊震)이 왕밀(王密)을 추천하였더니, 왕밀이 창읍령(昌邑令)으로 가면서 밤에 황금 10()을 품고 가 그에게 주며 어두운 밤에 알 자가 없다.” 하니, 그가 말하되,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니, 어찌 앎이 없다 하느뇨[天知神知子知我知 何得無知].”하였다 한다. 후한서(後漢書)54 양진열전(楊震列傳), 소학(小學)』 「선행(善行), 십팔사략(十八史略)

 

사지금(四知金)

전한(前漢) 말기 사람 양진(楊震)은 청렴하여 사()를 두지 않았다. 그가 왕밀(王密)을 천거하여 창읍령(昌邑令)을 삼았다. 왕밀이 고맙다고 찾아와 10()을 내놓으면서 밤이니 누가 알겠느냐고 하였다. 양진은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 또한 알지 않는가?” 하고 꾸짖었다. 후한서(後漢書)54 양진열전(楊震列傳), 소학(小學)』 「선행(善行), 십팔사략(十八史略)

 

사지당몽(謝池塘夢)

남조(南朝) () 나라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집안의 아우 사혜련(謝惠連)의 시를 늘 칭찬했는데, 하루는 뜨락의 연못가에서 종일 신음만 하며 시를 짓지를 못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혜련을 보고 깨어나서는, “연못가에 봄풀이 돋는구나[池塘生春草].”를 얻어 뛰어난 시구라고 감탄했다 한다.

 

사지오등(死之五等)

죽음의 다섯 등급이라는 뜻으로, 고대 시절 사람의 다섯 등급에 의해 죽음의 명칭을 달리한다는 의미이다. 곧 왕은 붕(), 제후는 훙(), 대부는 졸(), 선비는 불록(不錄), 서민은 사()라 칭한다.

 

제후

대부

선비

서민

()

()

()

불록(不錄)

()

 

 

사직(社稷)

토지신과 곡식신의 의미에서 종묘와 함께 국가의 근간의 의미한다.

 

사직위허(社稷爲墟)

사직(社稷)이 폐허가 된다는 뜻으로, 국가의 멸망을 이르는 말이다.

 

사직지기(社稷之器)

국가의 중임을 맡을 만한 인재.

 

사직지신(社稷之臣)

사직(社稷)의 신하라는 뜻으로,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맡은 중신(重臣)의 의미이다.

 

사직지역(社稷之役)

국가에 공이 있는 신하.

 

사직지환(社稷之患)

국가의 근심. 국난(國難).

 

사진(謝榛)

()의 임청(臨淸) 사람. 자는 무진(茂榛)이며 호는 사명산인(四溟山人)으로 시가(詩歌)에 능했으며 당시의 문장이었던 이반룡(李攀龍)ㆍ왕세정(王世貞)과 함께 연시(燕市)에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장()으로 추대되었다.

 

사진당유조장군(寫眞儻有曹將軍)

조 장군은 당()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패(), 말 그림을 잘 그려 조야백(照夜白)과 사자화(師子花)의 그림을 그렸다.

 

사차불피(死且不避)

죽어도 또한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도피하지 않는데, 하물며 딴 것에 있어서랴라는 강한 정신적 무장을 의미한다.

 

사차불후(死且不朽)

죽어도 또한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은 죽어 썩어지지만 명성(名聲)은 길이 후세에까지 남는다는 의미이다.

 

사창(社倉)

각 고을에 두어 환곡(還穀)을 받아 저장해두는 창고.

 

사책(射策)

옛날 선비를 시험하던 한 방법으로 경서(經書) 또는 정치상의 의문을 죽간(竹簡)에 쓰게 하여 이것으로 우열을 분별하던 제도인데 곧 과거를 가리킨 것이다. 한서(漢書)소망지전(蕭望之傳)사책갑제(射策甲第)낭관(郞官)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사책은 어려운 문제와 의심스러운 것을 책()에 써서 제출하게 하여 이것에 따라 우열(優劣)을 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천(史遷)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20세 때부터 중국 전토(全土)를 종횡무진 유력(遊歷)하며 견문을 넓혔다.

 

사천(司天)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사천(槎川)

조선 영조(英祖) 때의 문신(文臣) 이병연(李秉淵)의 호이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인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천(斜川)

중국 강서성의 호숫가에 있는 지명으로, 도잠(陶潛)이 일찍이 여기에서 이웃 사람들과 모여 노닌 적이 있었다.

 

사천구이릉(史遷救李陵)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태사공(太史公)이 이르기를, “그가 죽던 날 이 세상에서 그를 아는 이 모르는 이 할 것 없이 모두 너무 슬퍼하였다. 그의 충직하고 진실된 마음이 사대부(士大夫)들에게 평소 미쁨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사철(駟鐵)

검은 무쇠 빛깔의 사마(駟馬).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나라의 선조 비자(非子)는 말을 잘 길러 이 공로로 진 나라에 봉해졌으며 양공은 말을 잘 달려 서융(西戎)을 몰아내고 평황(平王)을 도왔는데, 이것을 읊은 시경(詩經)진풍(秦風) 사철(駟鐵)사철이 매우 크니 여섯 고삐가 손에 있다[駟驖孔阜, 六轡在手].” 하였다.

 

사총(四聰)

사방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간()하는 길을 여는 것. 서경(書經)』 「요전(舜典)

 

사총(思聰)

() 나라 승려. 7세 때 이미 거문고를 잘 탔고, 12세가 되어서는 거문고를 놓고 서()를 배우다가 15세 때는 많은 기어(奇語)를 남겼음. 신속고등전(新續高僧傳)卷四十二

 

사충(沙蟲)

전란(戰亂)의 희생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목왕(周穆王)이 남정(南征)할 때 군사들의 몸이 하루아침에 모두 바뀌어 장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사병은 모래와 벌레(沙蟲)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박자(抱朴子)內篇 釋滯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써 한다는 뜻으로, 세속오계의 하나.

 

사칠운대상(四七雲臺像)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남궁(南宮) 운대(雲臺)에 전대의 공신을 추념하여 등우(鄧禹) 28명의 장수 초상을 그려 놓은 것을 말한다.

 

사탈궁유(屣脫弓遺)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용이 수염을 드리우고 내려와서 황제(黃帝)를 맞았는데 황제가 타고 올라가며 활을 떨어뜨리니 백성들이 활을 안고 울었다.”는 말이 있다.

 

사태부(謝太傅)

() 나라 사안(謝安)은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인데 벼슬이 상서복야(尙書僕射)로 태보(太保)에 이르렀음. 태부를 증직하여 세상에서 사 태부라 칭한다. 사안이 동산(東山)에 숨어살면서 국가의 부름을 불고했는데 간문제(簡文帝)가 그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사안은 원래 즐거움을 남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므로 틀림없이 걱정도 남과 함께 나누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다.” 하고 불러서 오게 하였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사택향(麝澤香)

사향 향기란 곧 고인들이 먹의 향기를 사향의 향기에 비유하여 먹을 사매(麝煤)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통오달(四通五達)

길이나 교통망,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 없이 통한다.

 

사통팔달(四通八達)

사면 팔방으로 다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 막힘 없이 사면 팔방으로 모두 통해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 유의어: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달오통(四達五通).

 

사퇴산(四隤山)

초 패왕(楚覇王) 항우(項羽)가 단지 28()만을 가지고 한() 나라의 수천 군사와 최후의 일전(一戰)을 벌인 곳이다.

 

사파식근(事頗食芹)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뜻이다. 옛날 시골 사람이 미나리 맛이 천하에 제일이라고 여긴 나머지 높은 사람에게 바치려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열자(列子)』 「양주(楊朱)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부

 

사팔(四八)

사상 팔괘. 주역(周易)』 「계사(繫辭)이런 이유로 주역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是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에서 나온 것으로, 태양(太陽)ㆍ태음(太陰)ㆍ소양(少陽)ㆍ소음(少陰)과 건()ㆍ곤()ㆍ감()ㆍ이()ㆍ손()ㆍ진()ㆍ간()ㆍ태()이다. 사상에 대해 혹자는 금()ㆍ목()ㆍ수()ㆍ화()로 보아 사계절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편(絲編)

임금의 조칙

 

사표(四表)

사방

 

사표(謝表)

임금의 은혜에 사례하는 글.

 

사표광이상하격(四表光而上下格)

서경(書經)에 요()의 덕()을 칭찬하는 말에, “빛이 사표(四表)에 입혀서 상하에 이른다[光被四表 格于上下].”는 구절이 있다.

 

사필구수(死必丘首)

새는 날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토끼는 뛰어 굴로 돌아가며, 여우는 죽을 적에 제 살던 언덕으로 머리둔다[狐死首丘].”

 

사필귀정(事必歸正)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감. , 무슨 일이든 결국은 올바른 이치대로 된다는 말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 정의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말

 

사하변(祀河邊)

한무제(漢武帝)가 하동(河東)에 행차하여 후토사(后土祠)에 제사 지내고 돌아오다가 분하(汾河)에서 즐겁게 놀았다.

 

사학(師學)

스승을 통하여 배우는 것으로 곧 연원(淵源)이 있는 학문을 말한다. 순자(荀子)』 「정론(正論)사람을 모아서 사학을 세우고 문장을 이룬다.(衆人徒 立師學 成文典)” 하였다.

 

사한(詞翰)

사한객(詞翰客)의 준말로 뛰어난 문사(文士)를 말한다.

 

사한(司寒)

겨울을 맡은 신의 이름으로, 겨울철이 되었음을 말한다.

 

사해(沙海)

계신잡지(癸辛雜誌), “서역국(西域國)에 사해(沙海)가 있는데, 바로 요진(要津)을 점거하였고, 그 물 역시 더워서 끓어오를 정도다. 하늘이 이 물로써 화()와 이()를 한계한 것이다.” 하였다.

 

사해다루(四海多壘)

사방 곳곳에 전쟁이 많아 서로 경계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예기(禮記)곡례상(曲禮上)사방에 보루가 많은 것은 경대부의 수치이다.” 하였고, 그 주에 자주 침략을 받으면 보루가 많다.” 하였다.

 

사해동포(四海同胞)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포라는 뜻으로, 온 세계 사람들이 형제처럼 친밀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 유의어: 四海兄弟(사해형제).

 

사해오우(四海吾友)

온 천하가 형제처럼 친하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자하(子夏)공경하여 실수함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가 있으면, 사해 안이 모두 형제이다.’ 했다.” 하였다.

 

사해위가(四海爲家)

온 세상이 집이 된다는 뜻으로, 천하를 제 집안으로 만든다는 의미로는 제업(帝業)의 광대함을 이르고, 온 나라 어느 곳에도 집이 있다는 의미로는 떠돌아다니며 일정한 주거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사해형제(四海兄弟)

사해는 온 천하는 가리키는 것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사마우(司馬牛)가 근심스레 남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다.’ 하자, 자하(子夏)공경하고 예의를 지키면 사해의 안이 모두 형제이니 형제 없는 것을 근심하는가.’ 했다.” 하였다.

 

사행(射倖)

뜻밖의 행운을 바람을 말한다.

 

사행(士行)

() 나라 때 반란을 평정하고 대장군에 오른 도간(陶侃)의 자()이다. 범규(范逵)가 집을 방문했을 때, 도간의 모친이 머리카락을 잘라 주효(酒肴)와 바꾸었던 유명한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66

 

사행고류빈(士行苦留賓)

사행은 진() 나라 도간(陶侃)의 자. 도간이 젊어서 가난할 적에 범규(范逵)가 갑자기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아무 것도 대접할 것이 없자, 도간의 모친이 머리털을 깎아서 그것으로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마련하여 대접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六十六

 

사행삭질(射幸數跌)

요행(僥倖)을 노려 쏘는 화살은 번번이 차질(蹉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사행심(射倖心)으로 하는 행위는 성취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헌부(司憲府)

고려 말기 및 조선시대 언론 활동,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하던 관청.

이칭은 상대(霜臺)ㆍ오대(烏臺)ㆍ백부(柏府)ㆍ대관(臺官).

관원은 대사헌(大司憲, 2, 1) / 집의(執義, 3, 1) / 장령(掌令, 4, 2) / 지평(持平, 5, 2) / 감찰(監察, 6, 13)

정치적 언론과 백관을 규찰해 탄핵하는 언론은 대사헌ㆍ집의ㆍ장령ㆍ지평 등만이 참여함. 감찰은 중앙의 각 관서나 각 지방에 파견되어 일의 진행과 처리에 잘못이 있는지의 여부를 감찰하는, 이름 그대로 감찰관 임무만 수행. / 인용: 용재총화(성현)

 

사현(四懸)

천자(天子)의 사면(四面)에 설치하는 악기(樂器)를 거는 틀을 말한다.

 

사현(沙峴)

서울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던 고개 이른다.

 

사현벽상현(蛇懸壁上弦)

술을 마시다가 벽 위에 걸린 활이 잔에 비친 것을 뱀으로 알고 병이 났다는 고사(古事). 진서(晋書)』 「악광전(樂廣傳)

 

사현부(思玄賦)

고민하는 심정을 읊은 노래를 말한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장형(張衡)이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환관들이 전횡하여 뜻을 얻지 못하게 되자, 길흉 화복의 현원(玄遠)한 도를 생각하며 사현부를 지은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59 장형열전(張衡列傳)

 

사현부(思玄賦)

후한서(後漢書)59순제(順帝)ㆍ화제(和帝) 때 국가의 정사가 혼란해지자 장형(張衡)이 정사에 대하여 말하려 하였으나 이를 안 환관들의 참소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부를 지어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하였다.

 

사현휘(謝玄暉)

현휘는 남제(南齊) 때의 시인 사조(謝眺)의 자()이다. 오언시(五言詩)에 능했다. 선성 태수(宣城太守)를 지냈으므로 사선성(謝宣城)이라 한다. 저서에는 사선성집(謝宣城集)이 있다. 남제서(南齊書)』 「사현휘전(謝玄暉傳)

 

사혈가입(使穴可入)

구멍을 따라 들어갈 만 하다는 뜻으로, 부끄러워서 숨을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의 성어.

 

사형(士衡)

() 육기(陸機)의 자.

 

사혜련(謝惠連)

()의 문장가 사영운(謝靈運)의 종제(從弟)인데, 또한 문장이 뛰어났다.

 

사호(使乎)

전대(專對)는 사신이 외국에 나가 독자적으로 임기응변하며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백옥(蘧伯玉)의 사신이 전대를 잘 하자 공자(孔子)가 훌륭한 사신[子曰 使乎使乎]이라고 두 번이나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사호(四皓)

() 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살던 상산사호(商山四皓). 로 곧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인데, 이들은 뒤에 장량(張良)의 초청에 의하여 한 나라로 돌아와 당시 태자였던 혜제(惠帝)를 보필하였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인용: 感秋(이민구)

 

사호귀(四皓歸)

한 나라 고조(高祖) 때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이에 대해 간하였으나 고조의 뜻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때 진() 나라의 학정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 살던 상산사호(商山四皓), 즉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등이 장량(張良)의 권유에 의해 산에서 내려와 태자의 우익(右翼)이 되자, 그제서야 고조가 뜻을 돌려 태자를 폐하지 않았다. 사기(史記)55 유후세가(留侯世家)/ 인용: 感秋(이민구)

 

사호귀한(四皓歸漢)

한고조(漢高祖)장량(張良)의 기이한 꾀를 써서 황제의 공업(功業)을 이루어서 장량을 유후(留侯)에 봉하였다. 고조가 척부인(戚夫人)이 낳은 아들 여의(如意)를 사랑하여 여후(呂后)가 낳은 태자를 폐하려 하였으나, 여후가 장량의 꾀를 써서 상산(商山)에 숨어사는 사호(四皓)를 불러 와서 태자를 보좌하여 폐위(廢位)를 면하게 하였다.

 

사호장(四皓藏)

파공(巴邛)) 어떤 집에 귤()나무가 있었는데, 서리가 온 뒤에 귤을 다 따고 두 개가 남아 있는데 크기가 삼사 두(三四斗)가 들어가는 독만큼 컸다. 따 보니 무게도 보통 귤과 같았다. 쪼개어 본즉 귤마다 흰 수염에 살결은 홍명(紅明)하고 키는 한 자 남짓한 두 노인이 장기(象戱)를 두며 웃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말하기를, “이 가운데 즐거움이 상산(商山)보다 못하지 않은데 다만 오래 있을 수는 없구나.” 하고는 네 노인이 구름 속으로 올라가 버렸다.

 

사호전신(射虎前身)

영웅호걸의 기상을 지녔던 인물이라는 말이다. () 나라 이광(李廣)과 삼국 시대 오() 나라의 손권(孫權)과 송() 나라 육유(陸游)가 호랑이를 쏘아 잡았던(射虎)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사홍심(射鴻心)

젊은 시절에 매사를 전심치지(專心致志)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말로, 혁추(奕秋)가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칠 때 한 사람은 바둑에만 전심치지를 하고, 한 사람은 마음 한 구석에 홍곡(鴻鵠)이 이르거든 주살을 당겨 쏘리라고 생각을 할 경우, 똑같이 바둑을 배우더라도 그 전심치지한 사람에 미칠 수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사화(士華)

남곤(南袞)의 자.

 

사화우(四花雨)

부처가 설법할 제는 하늘에서 분타리화(芬陀利花)등 네 가지 꽃이 비 오듯 한다 하였다.

 

사환(賜環)

()은 임금의 뜻을 전달하는 옥으로 된 고리이다. 죄를 지은 신하가 변방으로 좌천되어 가게 되면 3년이 지나도 감히 올 수가 없는데, 임금이 환()을 주면 돌아오라는 것이요, ()을 주면 사사(賜死)한다는 것이다[絶人以玦, 反絶以環]. 순자(荀子)』 「대략(大略)

 

사활(司活)

연산군 때에 의술에 정통한 의원을 부르던 말이다.

 

사황(嗣皇)

뒤를 이어 즉위(卽位)한 황제를 말한다.

 

사회(謝晦)

남조(南朝) 시대 송() 나라 사람. 소제(少帝)가 즉위한 뒤 중서령(中書令)으로서 서연지(徐羨之) 등과 국정(國政)을 보좌하다가 이윽고 폐립(廢立)하는 계책을 세웠는데, 문제(文帝)가 즉위하여 서연지 등을 베므로 그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켜 반기를 들었으나 마침내 패하여 복주(伏誅)되었다.

 

사회남곽(死灰南郭)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있는 말이다. 남곽자기(南郭子綦)란 사람이 멍하니 의자에 기댄 채 한숨을 쉬고 있자, 시중들던 안성자유(顔成子游)몸은 본시 마른 나무처럼 만들 수 있으며 마음은 본래 불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남곽자기는 그렇다고 하였다.

 

사회부연(死灰復燃)

식은 재가 다시 탄다는 말은 곧 세력을 잃은 사람이 세력을 다시 회복함을 말한다. 양 효왕(梁孝王) 때의 장군 한안국(韓安國)이 죄에 걸렸을 적에 옥리(獄吏)전갑(田甲)이 그에게 곤욕을 주자, 한안국이 말하기를 식은 재는 다시 타지 않는다더냐.” 하니, 전갑이 말하기를 타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겠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八 한안국전(韓安國傳)

 

사효극왕융(死孝劇王戎)

어버이의 상()을 당해 멸성(滅性)을 면하지 못할 정도로 애훼(哀毁)의 정()을 극진히 한 것을 말한다. () 나라 왕융(王戎)이 모친상을 당해 예제(禮制)를 따르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피골이 상접하여 지팡이를 짚어야만 일어나곤 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두고 사효(死孝)라고 찬탄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43 왕융전(王戎傳)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은 뒤에 처방을 내려줌. 시기를 놓친 것을 의미한다.

 

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

죽은 뒤의 약. 시기를 놓친 것을 의미한다.

 

사훈(司勳)

관리의 훈적(勳績)과 고신(告身)을 맡는 관명(官名)인데, 두목(杜牧)이 일찍이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다.

 

사휴(四休)

자족(自足)하며 안락(安樂)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 나라 태의(太醫) 손방(孫昉)이 사휴거사(四休居士)라고 자호(自號)하였는데, 황정견이 그 뜻을 묻자 간단히 밥과 차를 들다 배부르면 그만 먹고, 옷을 기워 추위를 막다 따뜻하면 그만 입고,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과하다 싶으면 그만두고, 욕심도 질투도 내지 않다 늙어지면 그만 쉰다[麤茶淡飯飽卽休 補破遮寒暖卽休 三平二滿過卽休 不貧不妬老卽休].”고 말한 일화가 황정견(黃庭堅)사휴거사시서(四休居士詩序)’에 나온다.

 

사흉(四凶)

() 임금 시대의 흉악한 네 신하인 환도(驩兜)ㆍ삼묘(三苗)ㆍ공공(共工)ㆍ곤(). 이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므로 요 임금이 모조리 먼 곳으로 내쳤음. ()의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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