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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역사 연표(선사~위만조선) 한국 동양서양30000~10000경 황해가 바다로 바뀜. 공주 석장리 유적기원전1000010500년경 일본, 최초의 토기 제작10000년경 신석기 혁명(농업혁명)의 시작 6000년경 타이, 벼농사 시작7000년경 최초의 도시 예리코 건설5000년경 서울 암사동 유적50004000년경 중앙아시아, 말을 기르기 시작 3500~2000년경 황허 문명, 인더스 문명 발생3500~2000년경 이집트 문명 발생, 최초의 문자 사용 30003000년경 타이, 청동기 사용3100년경 메네스의 이집트 통일 2570년경 이집트 쿠푸 왕이 대피라미드 건설2333 단군 조선의 건국 2350 ‘사계절의 왕’ 사르곤 1세가 수메르와 아카드 일대 통일 2000 2000년경 아리아인의..
종횡무진 서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선사 ~ 위만조선삼국건국 ~ 신라통일남북국고려조선 건국~연산군중종~임란 발발임란~정조순조~조선 말기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1부 씨앗 1장 두 차례의 혁명산에서 내려온 사람들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2장 충돌하는 두 문명신국의 역사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최초의 국제사회아리아인의 등장 3장 새로운 판 짜기수수께끼의 해적들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4장 통일, 그리고 중심이동고대의 군국주의열매를 주운 페르시아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2부 뿌리① 1장 그리스 문명이 ..
에필로그서양 문명의 전 지구적 이동, ‘글로벌 문명’ 다음은 ‘로컬 문명’으로 1. 명령과 계약 서양사의 길고 거친 탐색이 끝났다. 보통 서양사라고 하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끝나고, 그다음은 역사라기보다 시사에 속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대, 즉 현대는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역사로 분류될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서양이나 동양이라는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사가 된다. 서양사와 동양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맨 끝장(7장)에서는 전후 지금까지 세계사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1만 년에 달하는 장구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했으니 아무래도 거칠 수밖에 없다. 역사 읽기를 ..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전혀 다른 전후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수백 년간 유럽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의 종착역이라는 점은 종전 직후부터 드러났다. 무엇보다 전후 처리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서유럽 각국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뒤 매번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고 새 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왔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엑스라샤펠 조약을, 7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나폴레옹 전쟁은 빈 회의를,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을 낳았고, 이 조약들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는 게 유럽 근대사의..
6장 최후의 국제전 ‘전범’들의 등장 애초부터 큰 힘을 쓰지 못한 베르사유 체제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로 타격을 받은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신생국들만 빼고는 1930년대부터 일제히 약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체제로 국내를 안정시킨 뒤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파시즘과 대척적인 사회주의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은 신생국답지 않은 노련한 국가 운영을 선보였다.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한 소련은 과감히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합하고 공업을 육성시켰으며, 농업의 집단화로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레닌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트로츠키를 누르고 승리한 스탈린(losif Stal..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중세 이래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에서도 늘 그랬듯이, 유럽 세계의 전쟁은 상대방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지면 전쟁을 끝맺고 타협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조약을 맺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이라고 해서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 열강과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바로 국제연맹이다. 하지만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는데 왜 하필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기구를..
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세계대전 빌헬름 2세는 초조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영국과 프랑스가 쳐놓은 두터운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오스만에까지 접근했다.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멀리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 바그다드에서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은 비잔티움이었으므로 이른바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3B 정책이었으나, 이것은 케이프(남아프리카)-카이로(이집트)-캘커타(인도)를 잇는 영국의 더 넓은 3C 정책에 가로막혔다【아프리카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굶주린 이리처럼 저돌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운 데서도 알 수 있지만, 독일의 허기가 더 극명하게..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유럽의 판도는 다 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내에서는 이제 영토 분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1870년대의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위상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이 무렵이면 이미 오늘날 유럽의 구도가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우선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더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대륙에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외교전 - 비스마르크가 항상 그 중심에 있었기에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 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
2장 완성된 유럽 세계 드러나지 않은 제국 빈 체제 하에서 유럽의 낡은 중심인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이 시민혁명의 혼돈을 겪고 있는 동안, 러시아와 미국이 명암을 달리하면서도 각기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려 애쓸 무렵, 유달리 잠잠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17세기에 일찌감치 시민혁명의 홍역을 치른 영국은 18세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19세기부터는 복잡한 대륙의 정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만약 섬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초 막강한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에스파냐에 뒤이어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거느..
7부 열매② 유럽 세계는 영토 분할이 끝나자 자연히 시선을 바깥으로 향한다. 영국을 비롯해 갓 태어난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활발히 세계 정복에 나선다. 그러나 빵은 제한되어 있고 입은 많다. 뒤늦게 국민국가를 이루고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자신의 몫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남의 것을 빼앗는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분할이 완료된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영토 재편을 획책하는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의 와중에 또 하나의 구체제인 러시아가 제국의 명패를 버리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민 사회의 역사가 짧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다시 유럽의 질서에..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변혁의 세기인 18세기에 프랑스의 추락은 역력했다. 세기 벽두에 에스파냐 왕위를 놓고 겨루었다가 그 왕위만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은 프랑스는 이후 거듭된 전쟁에서도 좀처럼 형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서유럽 국가가 아닌 ‘준’ 이교도국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으며 애썼으나 별무신통이었다. 결국 신흥국 프로이센에마저 추월할 지경에 이르렀고, 영국과 한 세기에 걸쳐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맞붙은 결과 모두 패배했다. 이제 프랑스는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비록 미국의 독립을 지원함으로써 영국에 다소나마 앙갚음을 했지만, 중세 내내, 그리고 근대의 문턱에서도 서유럽의 선두 주자이자 터줏대감이던 프랑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프랑스가 ..
4장 변혁의 18세기 제국의 꿈 일찌감치 영토 국가의 관념을 깨우친 덕분에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리슐리외가 사실상 전권을 지배한 루이 13세 치하처럼 ‘총리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왕이 직접 나선다면 사태는 달라질 터였다. 과연 절대왕권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황에 걸맞은 절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는 후대에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를 배후 조종한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어 6년 뒤에 벌어진 베스트팔렌 논공행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루이 13세도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유럽의 17세기 전반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였다. 대륙에서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왕과 의회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무수한 사람이 죽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와 사회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문명의 종말인가? 물론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럽 문명은 종말을 맞기는커녕 이후 더욱 성장하고 더욱 힘을 키워 나중에는 세계 정복에 성공하니까. 그럼 그 죽음과 파괴, 혼란은 어떤 의미였을까?? 배고프면 단결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빵 덩어리가 작을 때는 그것을 키우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먹을 만큼 커지면 거기서 각자 제 몫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17세기 전반의 유..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화재를 부른 불씨 절충과 타협은 원래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니다. 잘되어야 문제를 오래 묶어둘 뿐이고, 잘못되면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전형적인 절충과 타협이었던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바로 그랬다. 가장 큰 불씨는 바로 루터파에 한해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황제파와 가톨릭 측은 당장 불거진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불만을 달래는 방식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으나 그것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문제로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만약 시대의 추세를 따라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더라면 적어도 종교의 외피를 두른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반성도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를 공인하게 된 것은..
6부 열매① 중세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는 각개약진밖에 없다. 새로 탄생한 유럽 국가들은 영토와 주권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각인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선두로 각국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아직도 중세의 잔재를 버리지 못한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패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바꾸어 달고 로마 가톨릭이 지배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고자 애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던 에스파냐는 불운하게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본거지가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 한 반면, 영국은 활발한 시민혁명으로 가장 먼저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대외 진출에 나선다. 구체제의 상징이던 프랑스는 뒤늦게 시민혁명을 이루는데, 이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메가톤..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고향에서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쓰고 있을 때, 또한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조토가 새로운 사실성의 세계를 화폭에 구현하고 있을 때,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납치하고 아비뇽에 자기 마음에 맞는 새 교황청을 열었다. 이 아비뇽 사태는 당시 추락 일로에 있던 교황권이 몰락하는 속도를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가 출범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중세 사회에 통합성을 부여해온 로마 교황청은 이제 제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렇잖아도 교황청의 간섭을 싫어하던 서유럽의 군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실 끊어진 연처럼 일제히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고자 했다. 프랑스는 교황청을 아예 접수하는 방법을 구사했고, 영국은 적국인 프랑스의 교황청을 거..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폴리스 체제의 종말 아테네의 시대를 대체한 스파르타의 시대는 짧았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해 무력에서는 그리스의 패자가 될 만한 자격을 보였으나 아테네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그리스를 지배하던 시절보다 더욱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폴리스들에 군대와 감독관을 파견하고 공납금의 액수도 더 올린 것이다. 그리스 세계의 체질에 맞지 않는 군국주의에다 민족적인 이질성, 그리고 지나친 독재와 간섭에 폴리스들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스파르타의 지배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터졌다. 기원전 394년 페르시아에서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생기자 스파르타는 그 참에 이오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
4장 사상의 시대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 서양의 역사가들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간주한다. 그 이전의 크레타와 더 이전의 오리엔트에서 발달한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선구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서양 문명의 골격이 갖추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스가 오늘날 유럽에 속하기 때문일까? 천박한 유럽 중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더 충실한 근거를 든다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의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그리스 고전 시대의 사상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로 부활했으며,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정치사상은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
3장 전란의 시대 최초로 맞붙은 동양과 서양 페르시아가 안정을 찾고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을 이루자 다리우스의 마음은 다시 서방으로 향했다. 동쪽으로 인도, 남쪽으로 이집트와 리비아를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서쪽뿐이다. 인도 내륙은 오지여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한편, 다리우스는 북방의 스키타이와 싸워 곤욕을 치른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을 북쪽으로 몰아내 이후 침략을 줄이는 데는 일조했다). 물론 다리우스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더 멀리 가면 동북아시아 지역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문명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서방의 지중해 세계만 정복하면 다리우스는 ‘천하 통일’을 이루는 셈이었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까지 정복할 마음은 별로 없었고 이오니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페르..
2장 폴리스의 시대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이오니아는 오리엔트와 가까운 만큼 그리스 본토보다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데 유리했으나, 원래 그리스 땅이 아니라 이민족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개척이 쉽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이오니아에 온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딜까? 바로 해안이다. 그리스인은 원래부터 바다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무슨 사태라도 벌어지면 언제든지 배를 타고 도피해야 했으므로 해안에 근거지를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피난 살림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거지 주변에 튼튼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다. 밀레투스와 에페소스 같은 도시들이 이 무렵에 건설된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인데, 특히 밀레투스는 예전부터 있던..
2부 뿌리① 크레타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오리엔트 문명의 한 자락을 거머쥘 수 있었으나 큰 문명을 담을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의 뿌리는 곧바로 그리스 반도로 넘어간다. 포도와 올리브밖에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해상 활동에 나서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주름잡으며 수많은 식민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문명의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을 되찾으려는 오리엔트의 강력한 도전을 물리쳐야 했는데, 그것이 페르시아 전쟁이다. 여기서 승리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는 오리엔트와 질적으로 다른 문명을 건설한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서양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장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신화가 말해주는 역사 오리엔트에서 배태된 문명의 씨앗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 그리고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오리엔트 세계를 다시금 여러 세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여전히 존재했으나 건재하지는 않았다.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오히려 기원전 10세기~기원전 7세기까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스라엘 왕국과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났고, 히타이트의 잔존 세력은 옛 고향 근처인 아나톨리아 동남부로 돌아가 카르케미시, 밀리드, 타발 등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이루고 근근이 살아갔다.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서쪽의 유럽에서 온 프리지아와 새로 통일을 이룬 우라르..
3장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 카데시 전투 이후 오리엔트의 쌍웅인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묘하게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한 탓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만 카데시 전투 이외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내부의 문제가 있었다. 이집트는 종교 사제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국가의 기틀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원래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신은 태양신인 레(또는 라)였는데, 여기에 테베를 수도로 삼은 중왕국 초기에 테베의 수호신이던 아몬을 덧붙여 아몬-레 신앙이 생겨났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4세는 수백 년간 섬겨오던 아몬-레를 버리고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또 다른 태양신인 아톤..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3000년 동안 수십 개의 왕조가 등장하고 퇴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결코 단일한 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편의상 그것들을 뭉뚱그려 이집트 왕국이라고 부르고 각 왕조에 일련번호를 매겨 구분하지만, 각각의 왕조는 사실상 별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고대 삼국과 고려, 조선을 ‘한반도 왕국’이라고 통칭할 수 있을까?). 당시 이집트인들은 단일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진행한 게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이 곧 천하였듯이, 이집트인들에게 이집트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 전체였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천하의 주인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였다. 반면 이집트인들의 ‘천자’는 바로 파라오였다. 사실 파라오는 천자..
1부 씨앗 문명의 빛이 처음 내리쬐인 지역은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추정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남쪽 나일 삼각주에서도 이집트 문명이 싹튼다. 두 문명은 초승달 모양의 이 일대를 점차 환하게 밝힌다.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나면서 오리엔트 문명이 생겨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사회가 형성되지만, 이 지역은 갈수록 확대되는 문명을 담당할 중심지가 되지 못한다. 오리엔트 문명은 점차 서쪽으로 중심을 이동하면서 유럽 대륙의 동쪽 끝자락인 크레타와 그리스에 전해진다. 이후 오리엔트는 문자(알파벳)와 종교(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큰 선물을 서양 문명에 전함으로써 뿌리의 역할을 다한다. 1장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인류는 마치 500만 년 전에 탄생한 이..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바람에 날려간 씨앗이 인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을 쓰지만, 실은 2대 문명이라고 해야 한다. 먼저 하나는 황허 문명인데, 이것은 지금 동양 문명의 뿌리다. 나머지 세 문명은 황허 문명처럼 궤적이 확실하지 않다. 인더스 문명은 도시 유적만 남겼을 뿐 후대에 전승되지 않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한데 합쳐져 서양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명은 크게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두 가지인 셈이다(물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아메리카에도 고대 문명이 있었지만, 오늘날과의 관련성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마이너’ 문명일 수밖에 없다). 동양 문명은 곧 중국 문명이다. 중..
중국사(中國史) 목차 개요: 중국역사개관 1) 고대시대(古代時代)중국역사십팔사략삼황(三皇) 시대천황씨 & 지황씨인황씨 & 유소씨 & 수인씨복희씨 & 신농씨오제(五帝)의 시대황제씨황제의 아들태평성대를 누린 요순시대‘격양가’와 요(堯) 임금효로 선양 받은 순임금하왕조와 상왕조의 흥망치수를 잘한 우왕 2) 은주시대(殷周時代)중국역사십팔사략상나라의 탕왕과 주왕은혜가 새에게도 미친 탕왕주나라의 고공단보와 문왕공평무사한 문왕은나라 정벌과 백이숙제은나라 폭군 주왕백이와 숙제태공망 여상의 이야기문왕, 여상을 만나다주공의 치세와 유왕과 포사의 폭정신중하게 행동한 주공 단포사에게 빠진 유왕 3) 춘추시대(春秋時代)중국역사십팔사략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관중제환공의 등극관중과 포숙아고난을 겪고 등극한 진문공송양공초장왕오나라..
95. 원나라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문천상 江西提刑文天祥, 募兵勤王. 天祥吉州人, 丙辰魁進士第. 後州郡連降, 德祐二年, 元兵距都城三十里, 天祥爲右丞相, 辭不拜. 出使軍前, 辭氣慷慨, 議論不屈. 元將伯顔留之, 元兵入臨安, 天祥得間逸去. 衛王祥興元年, 天祥屯潮陽, 方飯五坡嶺被執. 元將張弘範乃命天祥, 爲書招張世傑. 天祥書所過「零丁洋」詩與之, 其末有云: “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弘範笑而置之. 厓山旣破, 弘範等置酒大會, 謂天祥曰: “國亡, 丞相忠孝盡矣, 能改心以事元, 不失爲宰相.” 天祥泫然出涕曰: “國亡不能救, 爲人臣者, 死有餘罪, 況敢逃其死, 而貳其心乎?” 弘範義之, 遣送于燕京. 道經吉州, 痛恨不食八日, 猶生, 乃復食. 天祥至燕, 不屈繫獄, 勵操愈堅. 해석 江西提刑文天祥, 募兵勤王. 강서의 제형(提刑..
94.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야율초재 元中書令耶律楚材卒. 楚材天資英邁, 夐出人表. 雖案牘滿前, 酬答不失其宜, 正色立朝, 不爲勢屈. 欲以身徇天下, 每陳國家利病, 生民休戚, 辭色懇切. 太宗嘗曰: “汝又欲爲百姓哭耶?” 楚材每言: “興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減一事.” 平居不妄言笑, 及接士人, 溫恭之容溢于外, 莫不感其德焉. 해석 元中書令耶律楚材卒. 원나라의 중서령(中書令)인 야율초재(律楚材卒)가 숨졌다. 楚材天資英邁, 夐出人表. 야율초재의 천부적 자질이 뛰어나고 고매해 남보다 뛰어났다. 雖案牘滿前, 酬答不失其宜, 正色立朝, 不爲勢屈. 비록 공문서가 앞에 가득해도 처리함에 마땅함을 잃지 않았고 얼굴색을 바로하고 조정에 설 적엔 세력 때문에 굽히지 않았다. 欲以身徇天下, 每陳國家利病, 生民休戚, 辭色懇切. 몸..
93.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한 사마광의 죽음 神宗崩, 太子卽位. 司馬光, 門下侍郞, 光居洛十五年, 兒童走卒, 皆知司馬君實. 元祐元年, 光爲相, 八閱月而薨, 贈太師溫國公, 諡文正. 光在位遼人夏人使來, 必問光起居. 而遼人戒其邊吏曰: “中國相司馬矣, 切毋生事開邊隙.” 及卒, 京師民罷市, 及葬四方來會者, 哭之如哭其親戚. 光嘗語曰: “吾無過人, 但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 人問光一言可以終身行之者, 光曰: “其誠乎!” 해석 神宗崩, 太子卽位. 신종이 붕어(崩御)하자 태자가 즉위했다. 司馬光, 門下侍郞, 光居洛十五年, 兒童走卒, 皆知司馬君實. 사마광은 문하시중이 되었고 사마광이 서울에 산 지 15년에 아이들과 심부름꾼까지 모두 사마군실【사마군실(司馬君實): 군실(君實)은 사마광의 자이다.】을 알 정도였다. ..
92. 주돈이의 인품과 기질 周惇頥, 字茂叔. 博學力行, 聞道早, 遇事剛果, 有古人風. 爲政嚴恕, 務盡理, 以名節自勵, 雅有高趣. 牕前草不除曰: “與自家意思一般.” 黃庭堅稱其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 有『太極圖』ㆍ『通書』, 行于世. 해석 周惇頥, 字茂叔. 주돈이(周惇頥)는 자(字)가 무숙(茂叔)이다. 博學力行, 聞道早, 遇事剛果, 有古人風.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여 도 듣길 빨리 했으며 일을 처리함에 강직하고 과단성 있게 하였고 옛 사람의 풍모가 있었다. 爲政嚴恕, 務盡理, 以名節自勵, 雅有高趣. 정치를 할 땐 엄격하면서도 용서하며 모든 이치에 힘썼고 명예와 절개에 스스로 힘써 우아한 높은 뜻이 있었다. 牕前草不除曰: “與自家意思一般.” 창 앞에 풀을 없애지 않고서 “우리 집에서의 뜻과 일반이구나..
91. 논어로써 2대의 황제를 섬긴 조보 趙普初以吏道聞, 寡學術. 太祖嘗勸以讀書, 普遂手不釋卷. 每朝有大議輒闔戶, 自啓一篋, 取一書閱之. 及卒, 家人視其篋, 則『論語』也. 嘗謂上曰: “臣有『論語』一部, 以半部, 佐太祖, 定天下; 以半部, 佐陛下, 致太平.” 해석 趙普初以吏道聞, 寡學術. 조보(趙普)는 애초에 관리의 도로 이름 났지만 학문과 재술엔 과문했다. 太祖嘗勸以讀書, 普遂手不釋卷. 태조가 일찍이 독서하길 권면하자 조보는 마침내 손에서 책을 놓질 않았다. 每朝有大議輒闔戶, 自啓一篋, 取一書閱之. 매번 조정에서 큰 회의가 있을 적엔 문득 문을 닫고 스스로 한 상자를 열어 한 책을 가져다 그걸 보았다. 及卒, 家人視其篋, 則『論語』也. 숨지자 집 사람들이 상자를 보니 『논어』였다, 嘗謂上曰: “臣有『論語..
90. 송태조(宋太祖)를 도와 남당을 멸망시킨 조빈 太祖開寶八年, 曹彬圍金陵急. 南唐主李煜遣徐鉉入貢, 求緩兵, 鉉言: “江南無罪.” 上怒按劍曰: “不須多言, 江南亦有何罪? 但天下一家臥榻之側, 豈容他人鼾睡乎?” 鉉惶恐而退. 金陵受圍, 自春徂冬, 勢愈窮蹙, 彬一日忽稱病. 諸將來問, 彬曰: “諸公若共爲信誓, 破城不妄殺一人, 則彬病愈矣.” 諸將皆許諾, 焚香約誓. 翌日城陷, 彬還, 舟中惟圖籍衣衾. 閤門通榜子曰: “奉勅幹事回.” 其不伐如此. 해석 太祖開寶八年, 曹彬圍金陵急. 태조 개보 8년에 조빈(曹彬)이 금릉을 포위하길 급하게 했다. 南唐主李煜遣徐鉉入貢, 求緩兵, 남당의 임금인 이욱(李煜)이 서현(徐鉉)을 보내 공물을 드리며 병사들을 늦춰주길 구하자, 鉉言: “江南無罪.” 서현은 태조에게 “강남은 죄가 없습니다...
89. 신하들이 떨었던 당선종 宣宗臨朝對群臣, 未嘗有惰容. 每宰相奏事, 旁無一人, 威嚴不可仰視. 奏事畢, 忽怡然閑語一刻許, 徐復整容曰: “卿輩善爲之, 常恐卿輩負朕, 不得再相見.” 令孤綯嘗謂人曰: “吾十年秉政, 最承恩遇, 每延英奏事, 未嘗不汗沾衣也.” 해석 宣宗臨朝對群臣, 未嘗有惰容. 당 나라 선종(宣宗) 조정에 와서 여러 신하를 대할 적에 일찍이 나태한 모습이 없었다. 每宰相奏事, 旁無一人, 威嚴不可仰視. 매번 재상이 일을 상주(上奏)할 때 곁에 한 사람도 없더라도 위엄이 있어 우러러볼 수 없었다. 奏事畢, 忽怡然閑語一刻許, 徐復整容曰: 정사를 상주하길 마치면 갑자기 화색이 감돌며 짧은 시간동안[一刻] 한가롭게 말하다가 천천히 다시 용모를 정제하고서 말했다. “卿輩善爲之, 常恐卿輩負朕, 不得再相見.” “..
88. 당선종의 뛰어난 기억력 宣宗聰察强記. 嘗密令學士韋澳纂次州縣境土風物, 及諸利害, 爲一書號曰處分語. 刺史有入謝而出者曰: “上處分本州事, 驚人.” 建州刺史入辭, 上問: “建州去京師幾何?” 曰: “八千里.” 上曰: “卿到彼爲政, 朕皆知之, 勿謂遠. 此階前, 則萬里也.” 해석 宣宗聰察强記. 당나라 선종(宣宗)은 귀 밝고 살필 줄 알며 잘 기억했다. 嘗密令學士韋澳纂次州縣境土風物, 及諸利害, 爲一書號曰處分語. 일찍이 비밀스레 학사 위오(韋澳)에게 주와 현의 경계 내의 풍물(風物)와 모든 이해(纂次)를 편집[纂次]하도록 명령해 한 책을 짓게 하고선 처분어(處分語)라 이름지었다. 刺史有入謝而出者曰: “上處分本州事, 驚人.” 자사가 들어가 사례하고 나오며 “선종께서 우리 고을의 일을 적절히 처분해주어 사람을 놀래키..
87. 안녹산을 토벌한 안진경과 안고경 平原太守顔眞卿, 起兵討賊. 上始聞河北從賊, 嘆曰: “二十四郡, 曾無一人義士邪?” 及眞卿奏至, 大喜曰: “朕不識眞卿何狀, 乃能如此.” 常山太守顔杲卿, 起兵討賊, 河北諸郡皆應之. 十五載, 賊將史思明陷常山, 執杲卿, 送洛陽. 祿山數其反己, 杲卿曰: “我爲國討賊, 恨不斬汝, 何謂反也? 臊羯狗, 何不速殺我?” 祿山大怒, 縛而冎之, 比死, 罵不絶口. 해석 平原太守顔眞卿, 起兵討賊. 평원 태수 안진경(顔眞卿)이 병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했다. 上始聞河北從賊, 嘆曰: “二十四郡, 曾無一人義士邪?” 현종이 처음 하북지방이 적을 따른다는 걸 듣고 “24군에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의로운 이가 없는가?”라고 탄식했다. 及眞卿奏至, 大喜曰: “朕不識眞卿何狀, 乃能如此.” 안진경의 상주문에 ..
86. 정사를 전횡한 간신 이임보 玄宗天寶十一載, 李林甫卒. 林甫媚事上左右, 迎合上意, 以固寵, 杜絶言路, 掩蔽聰明. 嘗語諸御史曰: “不見立仗馬乎? 一鳴輒斥去.” 妬賢嫉能, 排抑勝己, 性陰險, 人以爲口有蜜, 腹有劍. 每夜獨坐偃月堂, 有所深思, 明日必有誅殺. 屢起大獄, 自太子以下, 皆畏之. 在相位十九年, 養成天下亂, 而上不悟. 然安祿山畏林甫術數, 故終其世, 未敢反. 해석 玄宗天寶十一載, 李林甫卒. 현종 천보(天寶) 11년에 이인보(李林甫)가 숨졌다. 林甫媚事上左右, 迎合上意, 以固寵, 杜絶言路, 掩蔽聰明. 임보는 현종[上]의 측근[左右]에 아첨하며 섬겨 현종의 뜻에 영합함으로 총애를 굳힘으로 언로를 막고 끊어 현종의 총명함을 덮고 가리었다. 嘗語諸御史曰: “不見立仗馬乎? 一鳴輒斥去.” 일찍이 여러 어사(御..
85. 당현종이 두려워한 한휴 玄宗開元二十一年, 韓休同平章事. 休爲人峭直, 上或宴遊小過, 輒謂左右曰: “韓休知否?” 言終諫疏已至. 左右曰: “休爲相, 陛下殊瘦於舊.” 上歎曰: “吾雖瘠, 天下肥矣.” 休罷 張九齡繼之 해석 玄宗開元二十一年, 韓休同平章事. 현종(玄宗) 개원 21년에 한유(韓休)가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었다. 休爲人峭直, 上或宴遊小過, 輒謂左右曰: “韓休知否?” 한유의 사람됨이 올곧고 정직해 당현종이 혹 연회에서 놀다가 조금의 잘못이 있으면 갑자기 좌우의 신하에게 “한휴가 아느냐 모르느냐?”라고 말했는데 言終諫疏已至. 말이 끝나자마자 간하는 소장(疏狀)이 이미 이르렀다. 左右曰: “休爲相, 陛下殊瘦於舊.” 좌우의 신하가 “한휴가 재상이 되고서 폐하께선 유달리 예전보다 야위었습니다.”라고 말씀..
84. 좋은 신하가 되도록 해달라고 청한 위징 魏徵嘗告太宗曰: “願使臣爲良臣, 勿使臣爲忠臣.” 上曰: “忠良異乎?” 徵曰: “稷ㆍ契ㆍ皐陶, 君臣協心, 俱享尊榮, 所謂良臣; 龍逢ㆍ比干, 面折廷爭, 身誅國亡, 所謂忠臣.” 上悅. 해석 魏徵嘗告太宗曰: “願使臣爲良臣, 勿使臣爲忠臣.” 위징이 일찍이 당태종에게 “원하기론 저를 좋은 신하가 되게 해주시되 저를 충성스런 신하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씀드렸다. 上曰: “忠良異乎?” 당태종이 “충성스런 신하와 좋은 신하는 다른가?”라고 말했다. 徵曰: “稷ㆍ契ㆍ皐陶, 君臣協心, 俱享尊榮, 所謂良臣; 위징이 말씀드렸다. “후직(后稷)과 설(契)과 고요(皐陶)와 같은 경우는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모아 함께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누렸으니 소위 좋은 신하이고 龍逢ㆍ比干, ..
83. 당태종을 성군으로 이끌었던 위징 貞觀十七年, 鄭公魏徵卒. 太宗曰: “以銅爲鏡, 可正衣冠; 以古爲鏡, 可見興替; 以人爲鏡, 可知得失. 徵沒, 朕亡一鏡矣.” 徵葬, 上自製碑書石. 東征之役, 不能成功, 上深悔之, 歎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此行也.” 해석 貞觀十七年, 鄭公魏徵卒. 정관 17년에 정공(鄭公)【정나라에 제후로 봉해졌다는 의미로 위징을 이렇게 부르지만, 실제로 위징은 측근으로 간관의 역할을 하다 숨졌다】이 위징이 숨졌다. 太宗曰: “以銅爲鏡, 可正衣冠; 以古爲鏡, 可見興替; 以人爲鏡, 可知得失.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정제할 수 있고 옛날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볼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지. 徵沒, 朕亡一鏡矣.” 위징이 숨졌으니 짐은 하나의 거울을 잃었다.”..
82. 수성과 창업의 어려움 太宗嘗問侍臣: “創業守成孰難?” 房玄齡曰: “草昧之初, 群雄竝起, 角力而後臣之, 創業難矣.” 魏徵曰: “自古帝王, 莫不得之於艱難, 失之於安逸, 守成難矣.” 上曰: “玄齡與吾共取天下, 出百死得一生, 故知創業之難; 徵與吾共安天下, 常恐驕奢生於富貴, 禍亂生於所忽, 故知守成之難. 然創業之難, 往矣, 守成之難, 方與諸公愼之.” 해석 太宗嘗問侍臣: “創業守成孰難?” 당 태종이 일찍이 측근의 신하에게 “나라를 세우는 것과 나라를 지키는 것 중 무엇이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房玄齡曰: “草昧之初, 群雄竝起, 角力而後臣之, 創業難矣.” 방현령(房玄齡)이 “창업의 초기엔 여러 영웅이 아울러 일어나 힘을 다투며 이후에 그를 신하로 삼으니 창업이 어렵나이다.”라고 말씀드렸다. 魏徵曰: “自古帝王..
81. 당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 有上書請去佞臣者, 曰: “願陽怒以試之, 執理不屈者直臣也, 畏威順旨者佞臣也.” 上曰: “吾自爲詐, 何以責臣下之直乎? 朕方以至誠治天下.” 或請重法禁盜, 上曰: “當去奢省費, 輕徭薄賦, 選用廉吏. 使民衣食有餘, 自不爲盜, 安用重法邪?” 自是數年之後, 路不拾遺, 商旅野宿焉. 해석 有上書請去佞臣者, 曰: “願陽怒以試之, 執理不屈者直臣也, 畏威順旨者佞臣也.” 글을 올려 아첨하는 신하를 없애길 청하는 사람이 “원하기론 거짓으로[佯] 화를 내어 그들을 시험하여 도리를 잡고 굽히지 않는 이는 정직한 신하이고 위세에 떨며 뜻을 따르는 이는 아첨하는 신하입니다.”라고 말했다. 上曰: “吾自爲詐, 何以責臣下之直乎? 朕方以至誠治天下.” 당 태종이 “내가 스스로 거짓을 행하고서 어찌 신하의..
80. 당태종의 욕망을 자제시킨 위징 太宗嘗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刻民以奉君, 猶割肉以充腹, 腹飽而身斃, 君富而國亡矣.” 又嘗謂侍臣曰: “聞西域賈胡, 得美珠, 剖身而藏之, 有諸?” 曰: “有之.” 曰: “吏受賕抵法, 與帝王徇奢欲而亡國者, 何以異此胡之可笑邪?” 魏徵曰: “昔魯哀公, 謂孔子曰: ‘人有好忘者, 徙宅而忘其妻.’ 孔子曰: ‘又有甚者, 桀紂, 乃忘其身.’ 亦猶是也.” 해석 太宗嘗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당 태종이 일찍이 말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한다. 刻民以奉君, 猶割肉以充腹, 腹飽而身斃, 君富而國亡矣.” 백성을 해쳐 임금을 받든다는 것은 육신(肉身)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으니 배는 부르지만 몸은 피폐해지고 임금은 넉넉해지지만 나라는 망한다.” 又嘗謂侍臣曰:..
79. 관직을 버린 도연명 宋文帝時, 晉徵士陶潛卒. 潛字淵明, 潯陽人, 陶侃之曾孫也. 少有高趣, 嘗爲彭澤令, 八十日, 郡督郵至. 吏曰: “應束帶見之.” 潛歎曰: “我豈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卽日解印綬去. 賦「歸去來辭」, 著「五柳先生傳」, 徵不就. 自以先世爲晉臣, 自宋高祖王業漸隆, 不復肯仕. 至是終世, 號靖節先生. 해석 宋文帝時, 晉徵士陶潛卒. 송나라 문제(文帝) 때에 진(晉)의 징사(徵士)【나라의 부름을 받은 학덕이 높은 선비를 일컫는다. 동진(東晉)에 저작좌랑(著作佐郞)의 관직으로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다】인 도잠이 죽었다. 潛字淵明, 潯陽人, 陶侃之曾孫也. 도잠의 자(字)는 연명(淵明)으로 심양(潯陽) 사람인데 도간(陶侃)의 증손이다. 少有高趣, 嘗爲彭澤令, 八十日, 郡督郵至. 젊어서 고상한 의..
78. 큰 뜻을 품었던 왕맹 王猛字景略, 倜儻有大志, 隱居華陰. 聞桓溫入關, 被褐謁之, 捫蝨而談當世之務, 傍若無人. 溫異之, 問猛曰: “吾奉命除殘賊, 而三秦豪傑, 未有至者, 何也?” 猛曰: “公不遠數千里, 深入敵境, 今長安咫尺, 而不渡㶚水. 百姓未知公心, 所以不至.” 溫黙然無以應. 其後, 有薦猛於秦王苻堅者, 一見如舊, 自謂, 如玄德之於孔明. 一歲中五遷官, 擧異才, 修廢職, 課農桑, 恤困窮, 秦民大悅. 해석 王猛字景略, 倜儻有大志, 隱居華陰. 왕맹(王猛)의 자(字)는 경략(景略)인데 성격이 호탕하여 큰 뜻이 있었지만 화산(華山)의 북쪽에 은거했다. 聞桓溫入關, 被褐謁之, 동진(東晉)의 정서장군(征西將軍)인 환온(桓溫)【전진(前秦)의 왕 부건(苻健)이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중국 북부에 나라를 세우자 토벌하기..
77. 제갈량의 선정과 읍참마속(泣斬馬謖) 諸葛亮病篤, 有大星, 赤而芒, 墜亮營中, 未幾亮卒. 楊儀整軍還, 百姓奔告司馬懿. 懿追之, 姜維令儀, 反旗鳴鼓若將向懿, 懿不敢逼. 百姓爲之諺曰: ‘死諸葛走生仲達’ 懿笑曰: “吾能料生, 不能料死” 亮嘗作八陣圖, 懿歎曰: “天下奇才也” 亮爲政無私. 馬謖素爲亮所知, 及敗軍, 流涕斬之, 而卹其後. 李平․ㆍ廖立, 皆爲亮所廢, 及聞亮之喪, 皆歎息流涕, 平至發病死. 해석 諸葛亮病篤, 有大星, 赤而芒, 제갈량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붉으면서도 꼬리가 있는 별이 墜亮營中, 未幾亮卒. 제갈량의 병영 가운데로 떨어지니, 얼마 있지 않아 제갈량은 죽었다. 楊儀整軍還, 제갈량의 죽음으로 전의를 상실한 군대를 양의가 정돈하고 물러서니, 百姓奔告司馬懿. 백성들이 달려가 사마의에게 그 상황을 ..
76. 후황제 유선에게 올린 상주문(上奏文) 漢丞相諸葛亮, 率諸軍伐魏, 臨發上疏曰: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危急存亡之秋也. 宜開張聖聽, 不宜塞忠諫之路. 宮中府中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姦犯科, 及忠善者, 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平明之治. 親賢臣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人, 此後漢所以傾頹也.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者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許先帝, 以驅馳. 先帝知臣謹愼, 臨崩寄以大事. 受命以來, 夙夜憂懼, 恐付託不效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興復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遂屯漢中. 해석 漢丞相諸葛亮, 率諸軍伐魏, 한나라..
75. 유비의 죽음과 제갈량의 정치 昭烈帝在位三年崩, 太子禪卽位, 年十七, 是爲後皇帝. 丞相諸葛亮, 受遺詔輔政, 昭烈臨終謂亮曰: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家, 終定大事. 嗣子可輔, 輔之, 如其不可, 君可自取” 亮涕泣曰: “臣敢不竭股肱之力, 致忠貞之節, 繼之以死” 亮乃約官職, 修法制. 下敎曰: “夫參署者, 集衆思廣忠益也. 若遠小嫌, 難相違覆, 曠闕損矣” 해석 昭烈帝在位三年崩, 소열제 유비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돌아가셨고, 太子禪卽位, 年十七, 是爲後皇帝. 태자인 유선이 즉위하였으니, 17살이었고, 이가 바로 후황제다. 丞相諸葛亮, 受遺詔輔政, 승상 제갈량은 유비가 남긴 조칙을 받고서 정치를 도우니, 昭烈臨終謂亮曰: 소열제가 임종 때에 제갈량에게 말했다.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家, “그대의 재주는 조비의 ..
74. 관우의 최후, 오나라 조자의 패기 魯肅已死, 呂蒙代之. 亦勸孫權圖關羽, 權將陸遜, 又襲羽後. 羽狼狽走還, 權軍獲羽斬之, 遂陷荊州. 昭烈帝恥羽之沒, 自將伐權, 權求和不許. 權遣使於魏, 魏封權爲吳王. 魏主問吳使趙咨曰: “吳王頗知學乎?” 咨曰: “吳王任賢使能, 志存經略. 雖有餘閑博覽書史, 不效書生尋章摘句” 魏主曰: “吳難魏乎?” 咨曰: “帶甲百萬, 江ㆍ漢爲池, 何難之有?” 魏主曰: “吳如大夫者, 幾人?” 咨曰: “聰明特達者, 八九十人, 如臣之比, 車載斗量, 不可勝數” 해석 魯肅已死, 呂蒙代之. 오나라의 노숙이 이미 죽자 여몽이 그걸 대신하였다. 亦勸孫權圖關羽, 또한 노숙은 손권에게 관우를 도모할 것을 권했고, 權將陸遜, 又襲羽後. 손권의 장군인 육손 또한 관우를 후방에서 기습했다. 羽狼狽走還, 權軍獲羽..
73. 주유의 통찰을 무시한 손권과 괄목상대인 여몽 劉備徇荊州ㆍ江南諸郡. 周瑜上疏於權曰: “備有梟雄之姿, 而有關羽ㆍ張飛熊虎之將. 聚此三人在彊場, 恐蛟龍得雲雨, 終非池中物也. 宜徙備置吳” 權不從. 瑜方議圖北方, 會病卒. 魯肅代領其兵, 肅勸權荊州借劉備, 權從之. 權將呂蒙, 初不學, 權勸蒙讀書. 魯肅後與蒙論議, 大驚曰: “卿非復吳下阿蒙” 蒙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해석 劉備徇荊州ㆍ江南諸郡. 유비는 형주와 강남 여러 고을에 군대를 파견하여 점령했다. 周瑜上疏於權曰: 주유는 손권에서 상소하였다. “備有梟雄之姿, 而有關羽ㆍ張飛熊虎之將. “유비는 영웅의 자태가 있고 그에겐 관우와 장비라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가 있습니다. 聚此三人在彊場, 恐蛟龍得雲雨, 이들 세 사람이 모아 변방에 있게 하면 교룡이 비구름을 ..
72. 적벽대전, 유종과 손권의 차이 曹操擊劉表, 表卒, 子琮擧荊州降操. 劉備奔江陵, 亮謂備曰: “請求救於孫將軍” 亮見權說之, 權大悅. 操遺權書曰: “今治水軍八十萬衆, 與將軍會獵於吳” 權以示群下, 莫不失色. 周瑜曰: “請得數萬精兵, 進往夏口, 保爲將軍破之.” 遂以瑜督三萬人, 與備幷力逆操, 進遇於赤壁. 瑜部將黃蓋曰: “操軍方連船艦, 首尾相接, 可燒而走也” 乃取蒙衝鬪艦十艘, 載燥荻枯柴, 灌油其中, 裹帷幔, 上建旌旗, 豫備走舸, 繫於其尾. 先以書遺操, 詐爲欲降. 時東南風急. 蓋以十艘, 最著前, 中江擧帆, 餘船以次俱進. 操軍皆指言 “蓋降” 去二里餘, 同時發火, 火烈風猛, 船往如箭, 燒盡北船. 烟焰漲天, 人馬溺燒, 死者甚衆. 瑜等率輕銳, 雷鼓大進, 北軍大懷, 操走還, 後屢加兵於權, 不得志. 操歎息曰: “生子當如孫..
71. 제갈량과 유비의 첫 만남 삼고초려(三顧草廬) 瑯琊諸葛亮, 寓居襄陽隆中, 每自比管仲ㆍ樂毅. 備訪士於司馬徽, 徽曰: “識時務者, 在俊傑. 此間自有伏龍ㆍ鳳雛, 諸葛孔明ㆍ龐士元也” 徐庶亦謂備曰: “諸葛孔明臥龍也” 備三往乃得見亮, 問策, 亮曰: “曹操擁百萬之衆, 挾天子, 令諸侯, 此誠不可與爭鋒. 孫權據有江東, 國險而民附. 可與爲援, 而不可圖. 荊州, 用武之國, 益州險塞, 沃野千里, 天府之土. 將軍帝室之冑, 信義著於四海. 若跨有荊ㆍ益, 保其巖阻, 天下有變, 荊州之軍, 向宛․洛, 益州之衆, 出秦川, 孰不簞食壺漿以迎將軍乎?” 備曰: “善” 與亮情好日密. 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해석 瑯琊諸葛亮, 寓居襄陽隆中, 낭야 지방의 제갈량은 양양의 융중산에 더부살이하며 每自比管仲ㆍ樂毅. 매일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70. 조조 간웅이란 자신의 평가에 만족해하다 曹操父嵩, 爲宦官曹騰養子, 或曰: “夏侯氏子也” 操少機警, 有權數, 任俠放蕩, 不治行業. 汝南․許劭, 與從兄靖, 有高名. 共覈論鄕黨人物, 每月輒更其題品. 故汝南俗, 有月旦評. 操往問劭曰: “我何如人?” 劭不答, 劫之, 乃曰: “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 操喜而去. 해석 曹操父嵩, 爲宦官曹騰養子, 조조의 아버지는 숭으로 환관 조등의 양자가 되었는데, 或曰: “夏侯氏子也” 혹은 “하우씨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操少機警, 有權數, 조조는 어려서 기지가 있고 영민했으며【기경(機警): 기지가 있고 영민하여 정황의 변화에 따라 매우 잘 살필 수 있음[機智靈敏, 對情況的變化覺察得很快]】, 권력을 장악하는 술수와 요령【권수(權數): 권력을 장악하는 술수와 요령[謂掌握權力的..
9. 삼국시대(三國時代) 1. 개요 ① 삼국시대의 정립(鼎立) 1.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으며, 이 가운데 천하를 삼분하여 대치하고 있던 촉한(蜀漢)ㆍ위(魏)ㆍ오(吳)를 삼국시대라 함. 2. 조조(曹操)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맞아들여 천자의 명을 빙자하였으며 당대 명문 출신인 원소를 격파하여 중원 통일의 기초를 마련함. 3. 208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군을 강동에 결집시켜 손권ㆍ유비 연합군과 적벽대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가 됨. ②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1. 삼분하여 대치해 있던 삼국은 위의 뒤를 이은 진(晉) 나라에 의해 멸망됨. 위(魏)를 정통으로 삼기에 위진남북조 시대라 부름. 2. 촉한을 토벌한 공로로 진왕(晉王)이 된 사..
7. 2차에 걸쳐 일어난 당고(黨錮)의 화(禍) ① 2차에 걸친 당고의 화 1. 양기의 부인인 손수(孫壽)는 남편의 권력과 동등할 정도로 위세를 부림. 2. 뇌물을 받고 죄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손수의 집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행렬이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함. ② 1차 당고(黨錮)의 화 1. 이런 혼란 가운데 양태후가 죽었으며 양기의 누이동생으로 환제(桓帝)의 황후였던 양씨도 세상을 떠남. 2. 환제는 이런 틈을 타 양씨 가족을 몰아내기로 함. 3. 환관 당형(唐衡)을 불러 몰아낼 계책을 물으며 모든 호위병들을 집결시켜 양씨 토벌 계획을 실행하여 성공시킴. 4. 그런 기쁨도 잠시 양씨 토벌에 공이 있는 다섯 환관이 열후의 자리에 올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함. 5. 대학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자 환관들은 ..
69. 위기를 기회로 만든 우허의 기지 安帝淸河王慶之子, 章帝孫也. 未冠迎卽位, 鄧后仍臨朝, 鄧騭爲大將軍. 時邊軍多事, 騭欲棄涼州, 竝力北邊, 郞中虞詡以爲不可曰: “關西出將, 關東出相, 烈士武夫, 多出涼州” 衆皆從詡議. 騭惡詡, 欲陷之. 會朝歌賊攻殺長吏, 州郡不能禁. 以詡爲朝歌長. 故舊皆弔之, 詡曰: “不遇盤根錯節, 無以別利器” 及到官, 募壯士, 攻劫者爲上, 傷人偸盜者次之, 收得百餘人. 使入賊中, 誘令劫掠, 伏兵殺數百人. 又潛遣貧人能縫者, 傭作賊衣, 以綵線縫其裾. 有出市里者輒禽之, 賊駭散, 縣境皆平. 해석 安帝淸河王慶之子, 章帝孫也. 안제는 청하왕 경의 아들이자, 경제의 손자다. 未冠迎卽位, 鄧后仍臨朝, 어릴 때 영접되어 즉위하였고 등후가 이 때문에 조정에 들어왔고 鄧騭爲大將軍. 등즐은 대장군이 되었다...
6. 우허의 활약, 그리고 두태후와 양기(梁冀)의 횡포로 서서히 저무는 후한 ① 외척 두태후(竇太后)의 섭정과 환관 1. 화제(和帝)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두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됨. 2. 장성한 화제는 이러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인 환관 정중(鄭衆)에게 의지하게 됨. 3. 후한의 후반기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정권을 농락하는 일이 계속됨. ② 양기(梁冀)의 횡포 1. 양기(梁冀)는 순제(順帝) 황후의 오빠로서, 자신의 누이가 순제의 황후가 되어 서서히 권력을 손에 쥠. 2. 그는 아버지를 집금오(執金吾)에, 자신을 그 아래 자리인 양읍후에 봉한 후 차츰 관직을 높여 대장군 자리를 승계함. 3. 3년 후 순제가 30세로 죽자 두 살의 황태자가..
68. 서역에서 지내며 일생을 지낸 반초의 이야기 和帝徵班超, 還京師卒. 超起自書生, 投筆, 有封侯萬里外之志. 有相者謂曰: “生, 燕頷虎頭, 飛而食肉, 萬里侯相也” 自假司馬入西域, 章帝時爲西域, 將兵長史, 至上以超, 爲西域都護騎都尉, 平定諸國. 在西域三十年, 以功封定遠侯, 至是以年老乞歸, “願生入玉門關” 上許之. 任尙代爲都護, 請敎, 超曰: “君性嚴急. 水淸無大魚, 宜蕩佚簡易” 尙私謂人曰: “我以班君, 當有奇策. 今所言, 平平耳” 尙後果失邊和, 如超言. 해석 和帝徵班超, 還京師卒. 화제가 반초를 부르니 돌아와 낙양에서 생을 마쳤다. 超起自書生, 投筆, 반초는 서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붓을 던지고 有封侯萬里外之志. 만 리 밖에서 제후에 봉해지는 것에 뜻이 있었다. 有相者謂曰: “生, 燕頷虎頭, 관상가가 반초에..
67. 서역을 평정한 반초 永平十七年, 復置西域都護ㆍ戊ㆍ已校尉. 初耿秉請伐匈奴, 謂“宜如武帝通西域, 斷匈奴右臂” 上從之, 以秉與竇固爲都尉, 屯涼州. 固使假司馬班超使西域. 超至鄯善, 其王禮之甚備, 匈奴使來, 頓疎懈. 超會吏士三十六人曰: “不入虎穴不得虎子” 奔虜營斬其使及從士三十餘級, 鄯善一國震怖. 超告以威德, 使勿復與虜通. 超復使于寘, 其王亦斬虜使以降. 於是諸國皆遣子入侍, 西域復通. 至是竇固等擊車師而還, 以陳睦爲都護, 及以耿恭爲戊校尉, 關龕爲己校尉, 分屯西域. 해석 永平十七年, 復置西域都護ㆍ戊ㆍ已校尉. 영평(후한 2대 황제 명제의 연호) 17년에 다시 서역도호와 무와 기의 교위를 설치했다. 初耿秉請伐匈奴, 처음으로 경병이 흉노족을 정벌하길 청하며 말했다. 謂“宜如武帝通西域, 斷匈奴右臂” “마땅히 한무제 때에..
66. 뇌물을 받으면 하늘도, 너도, 나도 다 안다던 의로운 선비 양진 太尉楊震關西人, 時人稱之曰: “關西夫子楊伯起” 敎授生徒, 堂下得三鱣, 都講以爲, 有三公之象, 取以進曰: “先生自此升矣.” 後嘗爲郡守, 屬邑令有懷金遺之者曰: “暮夜無知者” 震曰: “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令慚而退. 及爲三公時, 宦者及上乳母王聖, 用事, 皆有請託, 震不從, 共搆陷之. 飮酖而死, 葬之日名士皆來會, 有大鳥高丈餘, 至墓前俯仰流涕而去. 해석 太尉楊震關西人, 時人稱之曰: “關西夫子楊伯起” 태위 양진은 관서 사람으로, 당시 사람들은 “관자의 부자는 백기 양진이다.”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敎授生徒, 堂下得三鱣, 생도를 교수할 적에 당 아래에서 세 마리의 전어를 얻으니, 都講以爲, 有三公之象, 取以進曰: 수제자【도강(都講): ..
65. 광무제 시기의 어진 신하들 上於臟罪, 無所貸. 大司徒歐陽歙, 嘗犯臟, 歙所授『尙書』弟子千餘人, 守闕求哀, 竟不免死於獄. 所用群臣, 如宋弘等, 皆重厚正直. 上姊湖陽公主嘗寡居, 意在弘. 弘入見, 主坐屛後. 上曰: “諺言, ‘貴易交, 富易妻’ 人情乎?” 弘曰: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上顧主曰: “事不諧矣.” 主有蒼頭, 殺人匿主家, 吏不能得. 洛陽令董宣, 候主出行奴驂乘, 叱下車格殺之. 主入訴, 上大怒, 召宣欲捶殺之. 宣曰: “縱奴殺人, 何以治天下? 臣不須捶, 請自殺.” 卽以頭叩楹, 流血被面. 上令小黃門持之, 使叩頭謝主, 宣兩手據地, 終不肯. 上勅, “强項令出” 賜錢三十萬. 當時州牧郡守縣令, 皆良吏. 해석 上於臟罪, 無所貸. 광무제는 횡령죄에 가차 없었다. 大司徒歐陽歙, 嘗犯臟, 대사구 구양흡..
64. 영토를 넓혀가는 광무제(光武帝) 득롱망촉(得隴望蜀) 十二年, 公孫述亡. 述茂陵人, 自更始時, 據蜀稱帝, 國號成. 上旣平隴右曰: “人苦不自足. 旣得隴復望蜀.” 遣大司馬吳漢等, 將兵, 會征南大將軍岑彭, 伐蜀. 彭戰船竝進, 所向無前. 述使盜刺殺彭. 吳漢繼進, 至成都, 擊殺述, 蜀地悉平. 漢在軍或戰不利, 意氣自若, 上歎曰: “吳公差强人意, 隱若一敵國矣.” 해석 十二年, 公孫述亡. 건무 12년에 공손술이 죽었다. 述茂陵人, 自更始時, 공손술은 무릉 사람으로 경시제의 시기로부터 據蜀稱帝, 國號成. 촉(蜀) 땅에 살며 황제를 자칭했고, 국호는 성(成)이라 했다. 上旣平隴右曰: 광무제가 이미 농우를 평정했고 말했다. “人苦不自足. “사람의 괴로움이란 자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旣得隴復望蜀.” 이미 농땅을 얻고서..
63. 외효가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내다. 建武初, 隗囂據天水, 自稱西州上將軍. 嘗遣馬援往成都, 觀公孫述. 援與述舊, 謂當握手歡如平生, 時述已稱帝四年矣. 援旣至, 盛陳陛衛, 以迎援. 援謂其屬曰: “天下雌雄未定, 公孫不吐哺迎國士. 反修飾邊幅, 如偶人形. 此何足久稽天下士乎?” 因辭歸謂囂曰: “述井底蛙耳. 而妄自尊大.” 해석 建武初, 隗囂據天水, 건무(광무제의 연호) 초에 외효가 천수에 의거하여 自稱西州上將軍. 스스로 ‘서주상장군’이라 일컬었다. 嘗遣馬援往成都, 觀公孫述. 일찍이 마원을 파견하여 성도로 보내어 공손술을 살펴보도록 했다. 援與述舊, 謂當握手歡如平生, 마원과 공손술을 옛 친구로 마땅히 손을 잡고 환대하기를 평생의 지기(知己)처럼 할 것이라 했는데, 時述已稱帝四年矣. 이때가 공손술이 이미 황제로 칭한..
8. 후한 시대(後漢時代) 1. 혼란의 시작과 한나라를 장악한 왕망 ① 호족의 대두 1. 향촌 사회는 자치 운영으로 유지되었으나, 화폐 경제의 유입으로 돈이 많은 호족이 등장함. 2. 농민들은 점점 빈곤해져 유랑민ㆍ도적이 되거나 대부분 호족의 농지를 소작하며 노비가 되기도 함. 3. 이와 같이 공동체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빈농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초래됨. ② 왕망의 명망과 관직 진출 1. 왕망(王莽)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동생인 왕안(王晏)의 아들로, 원제가 죽고 어린 나이로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황후인 왕씨가 실권을 장악함. 2. 왕씨의 일족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가난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음. 3. 왕망은 왕..
62.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분명하게 한 한나라 선제(宣帝) 宣帝者, 武帝之曾孫也. 帝興於閭閻, 知民事之艱難, 勵精爲治. 拜刺史守相, 輒親見問, 常曰: “民所以安其田里而無嘆息愁恨之聲者, 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惟良二千石乎. 以爲太守吏民之本, 數變易, 則民不安.” 故二千石, 有治理之效, 輒以璽書勉勵, 增秩賜金, 漢世良吏, 於是爲盛. 信賞必罰, 綜核名實, 政事文學法理之士, 咸精其能. 해석 宣帝者, 武帝之曾孫也. 선제는 무제의 증손자다. 帝興於閭閻, 知民事之艱難, 선제는 민가에서 생활해봤기에 일반인들의 어려움을 알아 勵精爲治. 정신을 가다듬고 정성껏 정치를 했다. 拜刺史守相, 輒親見問, 常曰: 자사와 태수와 재상을 임명할 적에 친히 보고 물었으며 항상 말했다. “民所以安其田里而無嘆息愁恨之聲者, “백성들이 ..
7. 전한의 기틀을 제대로 닦은 문경지치의 시대 ① 문제(文帝)의 국치 1. 손수 농사를 지으며 솔선수범했으며, 모두 농사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계몽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대여해 줌. 2. 고조의 1/15 세(稅)를 1/30 세(稅)로 바꿔 시행하고 농지와 조세를 12년 동안 면제하여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킴. 3. 검약을 기본으로 삼고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검약을 강조하였으며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한 왕실이 가장 융성해짐. ② 경제(景帝)의 국치 1. 문제(文帝)가 제위 23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경제가 즉위함. 2. 아버지를 본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고 법과 제도의 정비에 힘씀. 3. 노장사상인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실시하여 사회 경제는 전무한 발전을 이뤘고 사..
61. 초왕(楚王) 한신(韓信),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다 高祖六年, 人有上書告楚王韓信反. 諸將曰: “發兵坑孺子耳.” 上問陳平, 平危之曰: “古有巡狩會諸侯. 陛下第出僞遊雲夢, 會諸侯於陳, 因禽之, 一力士之事耳.” 上從之. 告諸侯會陳, “吾將遊雲夢” 至陳ㆍ信上謁, 命武士縛信, 載後車. 信曰: “果若人言, ‘狡兎死, 走狗烹, 飛鳥盡, 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臣固當烹.” 遂械繫以歸, 赦爲淮陰侯. ▲ 한신과 토사구팽. 한신의 인생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해석 高祖六年, 人有上書告楚王韓信反. 한고조 6년에 사람들이 한고조에게 초왕 한신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글을 올려 알렸다. 諸將曰: “發兵坑孺子耳.” 모든 장수들이 말했다.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 어린 놈인 한신을 묻어버리면 그만입니다.” 上問陳平..
60. 포로 19년을 버티고 버틴 소무(蘇武) 天漢元年, 遣中郞將蘇武, 使匈奴. 單于欲降之, 幽武置大窖中, 絶不飮食. 武齧雪與旃毛幷咽之, 數日不死, 匈奴以爲神. 徙武北海, 上無人處, 使牧羝曰: “羝乳乃得歸.” 二年遣李廣利, 擊匈奴, 別將李陵, 敗降虜. 始元六年, 蘇武還自匈奴. 武始徙北海上, 掘野鼠去草實而食之, 臥起持漢節. 漢使者至匈奴, 匈奴詭言武已死. 漢使知之言, “天子射上林, 中得雁, 足有帛書云 ‘武在大澤中.’” 匈奴不能隱, 乃遣武還. 武留匈奴十九年, 始以强壯出, 及還須髮盡白. 拜爲典屬國. 해석 天漢元年, 遣中郞將蘇武, 使匈奴. 천한(天漢) 원년에 중서 소무를 파견하여 흉노족에 보냈다. 單于欲降之, 幽武置大窖中, 선우는 소무를 투항하게 하고자 하여 소무를 가두어 큰 움 속에 두고서는 絶不飮食. 아무런 ..
59. 장량(張良)을 가르친 기이한 스승 留侯張良少時, 於下邳圯上, 遇老人. 墮履圯下, 謂良曰: “孺子下取履.” 良欲歐之, 憫其老. 乃下取履, 老人以足受之曰: “孺子可敎, 後五日, 與我期於此.” 良如期往, 老人已先在. 怒曰: “與長者期, 後何也?” 復約五日. 及往, 老人又先在, 怒復約五日. 良半夜往, 老人至乃喜授以一編書曰: “讀此可謂帝者師. 異日見濟北穀城山下黃石, 卽我也.” 旦視之, 乃『太公兵法』. 良異之, 晝夜習讀. 旣佐上定天下, 封於留, 後經穀城, 果得黃石焉, 奉祠之. 해석 留侯張良少時, 於下邳圯上, 유후 장량이 어릴 적에 하비(下邳)의 흙다리 위에서 遇老人. 어떤 노인을 만났다. 墮履圯下, 謂良曰: 그 노인은 다짜고짜 자신의 신발을 흙다리 밑으로 떨어뜨리며 장량에게 말했다. “孺子下取履.” “어린놈..
58. 한신(韓信)과 한고조(漢古祖)의 문답(問答) 上嘗從容問韓信, 諸將能將兵多少. 上曰: “如我能將幾何?” 信曰: “陛下不過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信曰: “臣多多益辨” 上笑曰: “多多益辨, 何以爲我禽?” 曰: “陛下不能將兵而善將將. 此信所以爲陛下禽. 且陛下所謂天授, 非人力也.” 해석 上嘗從容問韓信, 한고조가 조용히 한신에게 諸將能將兵多少. 모든 장수가 거느릴 수 있는 병사의 많고 적음에 대해 물었었다. 上曰: “如我能將幾何?” 한고조가 말했다. “나와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信曰: “陛下不過將十萬.”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10만 거느리는 것을 넘어서질 못합니다.” 上曰: “於君何如?” 한고조가 말했다. “그대라면 어느 정도요?” 信曰: “臣多多益辨” 한신이 대..
57. 한고조와 삼걸(張良ㆍ蕭何ㆍ韓信)의 문답 漢王卽皇帝位, 置酒洛陽南宮. 上曰: “徹侯諸將, 皆言. 吾所以得天下者何, 項氏所以失天下者何?” 高起ㆍ王陵對曰: “陛下使人攻城掠地, 因而與之, 與天下同其利, 項羽不然. 有功者害之, 賢者疑之, 戰勝而不豫人功, 得地而不與人利.” 上曰: “公知其一未知其二. 夫運籌帷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鎭國家撫百姓給饋餉, 不絶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衆, 戰必勝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爲我擒也.” 群臣悅服. 해석 漢王卽皇帝位, 置酒洛陽南宮. 한고조가 황제로 즉위하여 낙양 남쪽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上曰: “徹侯諸將, 皆言. 한고조가 말했다. “나열지어선 제후들과 모든 장수들은 다 말하라. 吾..
7. 전한시대(前漢時代) 1. 개요 ① 특징 1.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郡縣制)의 장점을 살린 군국제(郡國制)로 한왕조의 기틀을 접음. 2. 초기엔 한신과 팽월 등 창업 공신들을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엔 선정이 베풀어져 태평성대였음. 3. 무제(武帝)는 대내적으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운영할 방안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론 흉노를 정벌하고 변방을 개척하며 전성기를 구가함. 4.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재정이 궁핍해지고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혼란이 있어 14대 평제 때에 이르면 외척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움(이때부터 후한임). 5. 신은 제도개혁에 실패하여 15년 만에 망하여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다시 한왕조를..
56. 우미인과 이별하는 항우(項羽) 張良ㆍ陳平謂漢王曰: “漢有天下大半, 楚兵饑疲, 今釋不擊, 此養虎自遺患也.” 王從之. 五年, 王追羽至固陵, 韓信ㆍ彭越皆引兵來, 黥布亦會. 項羽至垓下, 兵少食盡. 信等乘之, 羽敗入壁, 圍之數重. 羽夜聞漢軍四面皆楚歌, 大驚曰: “漢已得楚乎? 何楚人多也.” 起飮帳中, 命虞美人起舞, 悲歌慷慨, 泣數行下. 其歌曰: “力拔山兮, 氣蓋世, 時不利兮, 騅不逝, 騅不逝兮, 可奈何, 虞兮虞兮, 奈若何” 騅者羽平日所乘駿馬也. 左右皆泣, 莫敢仰見. 羽乃夜從八百餘騎, 潰圍南出. 渡淮, 至東城, 乃有二十八騎. 羽謂其騎曰: “吾起兵八歲, 七十餘戰, 未嘗敗也. 今卒困此, 此天亡我, 非戰之罪. 今日固決死, 願爲諸君決戰, 必潰圍斬將, 令諸君知之, 皆如其言.” 於是, 欲東渡烏江, 亭長艤船待曰: “江東雖..
55. 정형구 전투와 배수진 漢三年, 韓信ㆍ張耳, 以兵擊趙, 聚兵井陘口, 趙王歇及成安君陳餘禦之. 夜半信傳發輕騎二千, 人人持赤幟, 從間道望趙軍. 戒曰: “趙見我走, 必空壁逐我. 若疾入趙壁, 拔趙幟立漢赤幟.” 乃使萬人先行背水陣, 平旦建大將旗鼓, 鼓行出井陘口, 趙開壁擊之. 戰良久, 信ㆍ耳佯棄旗鼓, 走水上軍, 趙果空壁逐之. 水上軍皆殊死戰. 趙軍已失信等歸壁, 見赤幟大驚, 遂亂遁走. 漢軍夾擊大破之, 斬陳餘禽趙歇. 諸將賀因問曰: “兵法右倍山陵, 前左水澤, 今背水而勝何也?” 信曰: “兵法不曰: ‘陷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乎.’” 諸將皆服. 해석 漢三年, 韓信ㆍ張耳, 한나라 3년에 한신과 장이가 以兵擊趙, 聚兵井陘口, 병사들로 조나라를 치려 정형구(井陘口) 군사를 모으니, 趙王歇及成安君陳餘禦之. 조나라 임금인 헐(歇..
54. 항우에게 삶아 죽임을 당한 한생 沛公至軍, 立誅曹無傷. 居數日, 羽引兵西, 屠咸陽, 殺降王子嬰. 燒秦宮室, 火三月不絶. 掘始皇冢, 收寶貨婦女而東, 秦民大失望. 韓生說羽曰: “關中阻山帶河, 四塞之地肥饒, 可都以覇.” 羽見秦殘破, 且思東歸曰: “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耳.” 韓生退曰: “人言, 楚人沐猴而冠, 果然.” 羽聞之, 烹韓生. 後羽自立爲西楚覇王, 立沛公爲漢王, 王巴ㆍ蜀ㆍ漢中, 是歲漢元年也. 해석 沛公至軍, 유방이 홍문회합에서 가까스로 도망 나와 군진에 이르자, 立誅曹無傷. 곧바로 이간질을 했던 좌사마 조무상을 죽였다. 居數日, 羽引兵西, 자리를 잡은 지 며칠 후에 항우는 병사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서 屠咸陽, 殺降王子嬰.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도륙하고 이미 항복한 진나라의 왕자인 영(嬰)을 ..
53. 유방을 피신시킨 장량과 번쾌 張良出, 告樊噲以事急. 噲擁盾直入, 嗔目視羽, 頭髮上指, 目眥盡裂. 羽曰: “壯士, 賜之巵酒.” 則與斗巵酒, “賜之彘肩” 則生彘肩. 噲立飮, 拔劍切肉啗之. 羽曰: “能復飮乎?” 噲曰: “臣死且不避, 巵酒安足辭. 沛公先破秦入咸陽, 勞苦而功高如此. 未有封爵之賞, 而將軍聽細人說, 欲誅有功人, 此亡秦之續耳, 竊爲將軍不取也.” 羽曰: “坐!” 噲從良坐, 須臾沛公起如厠, 因招噲出, 間行趨覇上. 留良謝羽曰: “沛公不勝杯杓, 不能辭. 使臣良奉白璧一雙, 再拜獻將軍足下, 玉斗一雙, 再拜奉亞父足下.” 羽曰: “沛公安在?” 良曰: “聞將軍有意督過之, 脫身獨去, 已至軍矣.” 亞父拔劍, 撞玉斗而破之曰: “唉! 豎子不足謀. 奪將軍天下者, 必沛公也.” 해석 張良出, 告樊噲以事急. 장량이 밖으로 나..
52. 유방을 죽이려는 범증(范增) 沛公旦從百餘騎, 見羽鴻門. 謝曰: “臣與將軍戮力而攻秦, 將軍戰河北, 臣戰河南, 不自意, 先入關破秦. 得復見將軍於此, 今者有小人之言, 令將軍與臣有隙.” 羽曰: “此沛公左司馬曹無傷之言.” 羽留沛公與飮, 范增數目羽擧所佩玉玦者三, 羽不應. 增出使項莊入前, 爲壽請以劍舞, 因擊沛公. 項伯亦拔劍起舞以身, 翼蔽沛公, 莊不得擊. 해석 沛公旦從百餘騎, 見羽鴻門. 유방은 아침에 백여명의 기마병을 따라 항우를 홍문(鴻門)에서 뵈었다. 謝曰: “臣與將軍戮力而攻秦, 유방은 사죄드렸다. “신하와 장군은 힘을 모아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將軍戰河北, 臣戰河南, 장군은 하북에서 싸웠고 저는 하남에서 싸워 不自意, 先入關破秦. 의도치 않게 먼저 함곡관에 들어와 진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得復見將軍於此, 다..
51. 항우(項羽)와 범증(范增)의 이야기를 장량(張良)에게 고하다 項羽率諸侯兵, 欲西入關, 或說沛公, 守關門, 羽至門閉, 大怒攻破之. 進至戱西, 期旦擊沛公. 羽兵四十萬, 號百萬, 在鴻門, 沛公兵十萬, 在覇上. 范增說羽曰: “沛公居山東, 貪財好色. 今入關, 財物無所取, 此其志不在小, 急擊勿失.” 羽季父項伯, 素善張良, 夜馳至沛公軍, 告良. 해석 項羽率諸侯兵, 欲西入關, 항우가 모든 제후를 거느리고 서쪽 함곡관으로 들어가고자 하자, 或說沛公, 守關門, 羽至門閉, 혹자가 유방을 설득하여 관문을 지켜 항우가 도착하자 문을 닫아걸었는데 大怒攻破之. (항우)가 크게 성내며 공격해 부셔버렸다. 進至戱西, 期旦擊沛公. 진격하여 희서(戱西)에 이르러 아침에 유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羽兵四十萬, 號百萬, 在鴻門, 항우의..
50. 한신, 유방의 책략가로 활짝 피다 初淮陰人韓信, 家貧釣城下. 有漂母, 見信饑, 飯信. 信曰: “吾必厚報母.” 母怒曰: “大丈夫不能自食, 吾愛王孫而進食, 豈望報乎.” 淮陰屠中少年, 有侮信者. 因衆辱之曰: “若雖長大好帶劍, 中情怯耳. 能死刺我, 不能出我胯下.” 信熟視之, 俛出胯下蒲伏, 一市人皆笑信怯. 後項梁渡淮, 信從之. 又數以策干項羽不用. 亡歸漢, 爲治粟都尉. 數與漢王臣蕭何語, 何奇之. 謂王曰: “信國士無雙.” 王乃設壇場具體, 諸將皆喜, 人人自以爲得大將. 至拜乃韓信也, 一軍皆驚. 王遂用信計, 襲秦諸將, 章邯敗死, 司馬欣等皆降. 해석 初淮陰人韓信, 家貧釣城下. 초반에 회음인인 한신은 집이 가난하여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有漂母, 見信饑, 飯信. 빨래터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걸 보고..
49. 범증의 회왕 옹립하기 居鄛人范增, 年七十, 好奇計, 往說項梁曰: “陳勝不立楚後而自立, 其勢不長. 今君起江東, 楚蜂起之將, 爭附君者. 以君世世楚將, 必能復立楚之後.” 於是項梁求得楚懷王孫心, 立爲楚懷王, 以從民望. 해석 居鄛人范增, 年七十, 好奇計, 거소(居鄛) 출신인 범증은 나이 70살이었는데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여 往說項梁曰: “陳勝不立楚後而自立, 가서 항량을 설득했다. “진승은 초나라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자립하고자 하였기에 其勢不長. 그 세력이 길게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今君起江東, 楚蜂起之將, 이제 그대는 강동에서 기병하여 초나라에서 봉기한 장수로, 爭附君者. (누구든) 다투어 그대에게 편입되려 할 것입니다. 以君世世楚將, 必能復立楚之後.” 그대가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
48. 항우의 어린시절과 항우의 시작 項梁者, 楚將項燕之子也. 嘗殺人, 與兄子籍避仇吳中. 籍字羽, 少時學書, 不成去, 學劍, 又不成. 梁怒, 籍曰: “書足以記姓名而已, 劍一人敵也, 不足學, 學萬人敵.” 梁乃敎籍兵法. 會稽守殷通. 欲起兵應陳涉, 使梁爲將, 梁使籍斬通, 佩其印綬. 遂擧吳中兵, 得八千人. 籍爲裨將, 時年二十四. 해석 項梁者, 楚將項燕之子也. 항량은 초나라 장수 항연의 아들이다. 嘗殺人, 與兄子籍避仇吳中. 일찍이 사람을 죽여 형의 자식인 적과 함께 오중으로 원수를 피해 달아났다. 籍字羽, 少時學書, 不成去, 적의 자는 우인데 어려서 글을 배울 때 성취도 없이 그만뒀으며, 學劍, 又不成. 검을 배울 때도 성취를 내지 못했다. 梁怒, 籍曰: 항량이 성내니, 항우가 말씀드렸다. “書足以記姓名而已, 劍..
47. 진나라의 멸망을 알린 진승과 오광의 반란 陽城人陳勝, 字涉. 少與人傭耕, 輟耕之隴上, 悵然久之曰: “苟富貴無相忘.” 傭者笑曰: “若爲傭耕, 何富貴也?” 勝太息曰: “嗟呼! 燕雀安知鴻鵠之志哉?” 至是與吳廣起兵于蘄, 時發閭左, 戌漁陽, 勝ㆍ廣爲屯長. 會大雨道不通, 乃召徒屬曰: “公等失期, 法當斬, 壯士不死則已, 死則擧大名. 王侯將相, 寧有種乎?” 衆皆從之. 乃詐稱公子扶蘇項燕, 稱大楚, 勝自立爲將軍. 廣爲都尉. 해석 陽城人陳勝, 字涉. 함양 사람 진승의 자는 섭이다. 少與人傭耕, 輟耕之隴上, 어려서 어떤 이와 함께 농사일에 고용되어 언덕 위에서 밭 갈다 그만두고 悵然久之曰: “苟富貴無相忘.” 쓸쓸히 “진실로 (훗날) 부귀해지면 서로 잊지 말자.”라고 말했다. 傭者笑曰: “若爲傭耕, 何富貴也?” 그랬더니..
6. 초한쟁패(楚漢爭霸) 1.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 1. 호해(胡亥)의 폭정: 반대파 숙청 및 이사까지 요참형(腰斬刑)으로 죽이고 잦은 장정과 징집으로 원성 높아짐. 2.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던 중 폭우로 기일 내 도착이 불가능해지자 인솔자 죽이고 항쟁 시작. 3. 진(陳)을 함락하고 진승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부하에 살해당함으로 6개월 만에 끝났고 반란은 계속 발생함. 2. 항우와 유방 ① 항우(項羽) 1. 초(楚) 귀족의 후예로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자,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지하여 병법을 배움. 2. 진시황의 순수(巡狩)를 보고 자신도 저 자리에 있겠다고 꿈을 키웠으며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접하고 회계군수를 죽이고 군사를 모음. ② 유방(劉..
46. 장남(長男) 부소(扶蘇)를 북방(北方)으로 쫓아내다 三十五年, 侯生盧生, 相與譏議始皇, 因亡去. 始皇大怒曰: “盧生等, 吾尊賜之甚厚, 今乃誹謗我. 諸生在咸陽者, 吾使人廉問, 或爲妖言, 以亂黔首.” 於是使御史悉按問諸生, 傳相告, 引乃自除, 犯禁者, 四百六十餘人. 皆坑之咸陽. 長子扶蘇諫曰: “諸生皆誦法孔子, 今上皆重法繩之, 臣恐天下不安.” 始皇怒. 使扶蘇, 北監蒙括軍於上郡. 해석 三十五年, 侯生盧生, 相與譏議始皇, 35년에 후생과 노생이 서로 함께 시황제를 기롱하며 의론을 하였고, 因亡去. 처벌될까 두려워하며 도망가 버린 사건이 있었다. 始皇大怒曰: 시황제는 매우 화내며 말했다. “盧生等, 吾尊賜之甚厚, “노생 등의 무리는 내가 존중하며 하사하길 심히 후하게 했음에도 今乃誹謗我. 이제 나를 비방하고 ..
45.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위한 이사(李斯)의 변 三十四年, 丞相李斯, 上書曰: “異時諸侯竝爭, 厚招遊學. 今天下已定, 法令出一, 百姓當家則力農工, 士則學習法令. 今諸生不師今而學古, 以非當世, 惑亂黔首. 聞令下, 則各以其學議之, 入則心非, 出則巷議, 率群下以造謗. 臣請. 史官非秦記, 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有藏詩書百家語者, 皆詣守尉雜燒之. 有偶語詩書者, 棄市, 以古非今者族. 所不去者, 醫藥卜筮種樹之書, 若有欲學法令, 以吏爲師.” 制曰: “可” 해석 三十四年, 丞相李斯, 上書曰: 34년 승상 이사가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異時諸侯竝爭, 厚招遊學. “다른 때엔 제후들이 함께 싸워, 후하게 유학하는 이들을 초빙했습니다. 今天下已定, 法令出一, 이제 천하는 이미 정해져 법령이 한 군데서 나오..
44. 통일제국을 위해 진시황의 명령 秦王政初幷天下, 自以‘德兼三皇, 功過五帝’ 更號曰皇帝. 命爲制, 令爲詔, 自稱曰朕. 制曰: “死而以行爲諡, 則是子議父, 臣議君也, 甚無謂, 自今以來, 除諡法. 朕爲始皇帝, 後世以計數, 二世三世, 至于萬世, 傳之無窮.” 收天下兵, 聚咸陽, 銷以爲鍾鐻金人十二, 重各千石. 徙天下豪富於咸陽, 十二萬戶. 해석 秦王政初幷天下, 진나라 왕 정은 초반에 천하를 병합하고 自以‘德兼三皇, 功過五帝’ 스스로 ‘덕으론 삼황을 겸했고, 공으론 오제를 뛰어넘었다’고 여겼기에 更號曰皇帝. 호칭을 고쳐 ‘황제’로 부르게 했다. 命爲制, 이때까지 써온 ‘명(命)’이란 호칭을 ‘제(制)’로, 令爲詔, 自稱曰朕. 이때까지 써온 ‘령(令)’이란 호칭을 ‘소(詔)’로, 임금 자신을 일컫는 말은 ‘짐(朕)..
5. 진나라 시대 1. 여불위(呂不韋)의 통일제국을 위한 큰 그림 ① 여불위(呂不韋)와 자초(子楚) 1. 전국 말기의 대상인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여 재산을 축적한 대부호임. 2. 어느 날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갔다가 인질로 와 있는 진나라 왕자로 진소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로 비중 없는 인물이었던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고, 사귀어 둠. ② 여불위의 큰 그림 1. 자초를 등극시키기 위해 빈객과 사귈 수 있는 돈을 줬고 안국군이 사랑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입김을 빌리기로 함. 2. 화양부인은 그의 언니 말을 잘 따른다는 걸 알고 제물을 주어 자초에 대해 좋은 평을 얘기하도록 언니를 구워삶음. 3. 언니는 자식이 없는 동생 화양부인에게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
43. 모수, 자신감으로 초나라 임금과 한판 떠서 동맹을 성사시키다 秦攻趙邯鄲, 趙平原君求救於楚. 擇門下文武備具者二十人, 與之俱得十九人. 毛遂自薦, 平原君曰: “士處世若錐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門下三年, 未有聞.” 遂曰: “使遂得處囊中乃脫穎而出, 非特末見而已.” 平原君乃以備數, 十九人目笑之. 至楚定從不決. 毛遂按劍歷階升曰: “從之利害, 兩言而決耳. 今日出而言, 日中不決何也?” 楚王怒叱曰: “胡不下, 吾與而君言, 汝何爲者?” 毛遂按劍, 而前曰: “王所以叱遂, 以楚國之衆也. 今十步之內, 不得恃楚國之衆也. 王之命, 懸於遂手. 合從爲楚, 非爲趙也.” 王曰: “唯唯, 誠若先生之言, 謹奉社稷以後.” 遂曰: “取鷄狗馬之血來.” 捧銅盤, 跪進曰: “王當歃血而定從, 次者吾君, 次者遂.” 左手持盤右手招十九人, 歃血於堂..
42. 맹상군을 존경받는 군주로 만든 풍환 齊襄王旣立, 而孟嘗君中立爲諸侯, 無所屬, 王畏之, 與連和. 初馮驩聞孟嘗君好客, 而來見, 置傳舍十日. 彈劍作歌曰: “長鋏歸來乎! 食無魚.” 遷之幸舍, 食有魚矣. 又歌曰: “長鋏歸來乎! 出無輿.” 遷之代舍, 出有輿矣. 又歌曰: “長鋏歸來乎, 無以爲家.” 孟嘗君聞不悅. 時邑入不足以奉客, 使人出錢於薛貸者, 多不能與息. 孟嘗君乃進驩, 請責之. 驩往不能與者, 取其券燒之. 孟嘗君怒, 驩曰: “令薛民親君.” 孟嘗君竟爲薛公, 終於薛. 해석 齊襄王旣立, 而孟嘗君中立爲諸侯, 제양왕(齊襄王)이 즉위했고, 맹상군(孟嘗君)은 중립에 서서 제후가 되어 無所屬, 王畏之, 與連和. 속한 지위가 없었음에도 왕은 맹상군을 두려워하여 함께 동맹을 맺었다. 初馮驩聞孟嘗君好客, 而來見, 초반에 풍환(..
41. 계명구도의 식객이 맹상군을 살리다 田嬰封於薛, 有子曰文, 食客數千人, 名聲聞於諸侯, 號爲孟嘗君, 秦昭王聞其賢, 乃先納質於齊以求見, 至則止囚, 欲殺之. 孟嘗君使人, 扺昭王幸姬求解. 姬曰: “願得君狐白裘.” 蓋孟嘗君嘗以獻昭王, 無他裘. 客有能爲狗盜者, 入秦藏中, 取裘以獻姬, 姬爲言得釋. 卽馳去變姓名, 夜半至函谷關. 關法, 鷄鳴方出客, 恐秦王後悔追之 客有能爲鷄鳴者, 鷄盡鳴, 遂發傳. 出食頃追者果至, 而不及. 孟嘗君歸怨秦, 與韓ㆍ魏伐之, 入函谷關, 秦割城以和. 해석 田嬰封於薛, 有子曰文, 전영(田嬰)은 설(薛)땅을 봉분 받았으며, 아들의 이름은 전문(田文)으로 食客數千人, 名聲聞於諸侯, 식객이 수천 명이나 되어 명성이 제후들에게 소문이 나 號爲孟嘗君, 맹상군(孟嘗君)이라 불렸다고 한다. 秦昭王聞其賢, 진..
40. 진시황을 죽이지 못한 형가 燕王喜太子丹, 質於秦. 秦王政不禮焉, 怒而亡歸, 怨秦欲報之. 丹聞衛人荊軻賢, 卑辭厚禮請之, 奉養無不至. 乃裝遣軻, 軻行至易水, 歌曰: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于時白虹貫日, 燕人畏之. 軻至咸陽, 秦王政大喜見之. 軻奉圖進. 圖窮而匕首見, 把王袖椹之未及身, 王驚起絶袖. 軻逐之, 環柱走. 秦法群臣侍殿上者, 不得操尺寸兵, 左右以手搏之. 且曰: “王負劍” 遂拔劍斷其左股. 軻引匕首, 擿王不中. 遂體解以徇. 秦王大怒, 益發兵伐燕, 喜斬丹以獻. 後三年, 秦兵虜喜, 遂滅燕爲郡. 해석 燕王喜太子丹, 質於秦. 연나라 왕 희의 태자인 단(丹)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秦王政不禮焉, 怒而亡歸, 그런데 진나라 왕인 정(政)은 예우하지 않아 단은 화를 내며 도망하여 귀국하였고, ..
39. 소꼬리에 불을 붙여 싸운 전단 時齊城, 惟莒ㆍ卽墨不下, 卽墨人推田單爲將軍, 身操版鍤, 與士卒分功. 妻妾編於行伍. 收城中得牛千餘, 爲絳繪衣, 畵五彩龍文, 束兵刃其角, 灌脂束葦於尾, 燒其端. 鑿城數十穴, 夜縱牛, 壯士隨其後. 牛尾熱, 怒奔燕軍, 所觸盡死傷. 而城中鼓譟從之 聲振天地. 燕軍敗走, 七十餘城皆復爲齊. 迎襄王於莒, 封單爲安平君. 해석 時齊城, 惟莒ㆍ卽墨不下, 그때에 제나라 성 중에, 오직 거와 즉묵만이 항복하지 않았고 卽墨人推田單爲將軍, 즉묵의 백성들은 전단을 추천하여 장군이 되도록 했다. 身操版鍤, 與士卒分功. 전단은 몸으로 판과 삽을 가지고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적을 같이 분배했고, 妻妾編於行伍. 아내와 첩을 군대에 편입시켰다. 收城中得牛千餘, 성에서 수거하여 얻은 소가 천여 마리였는데..
38. 천리마의 뼈 이야기로 등용된 곽외와 제나라를 깨부순 악의 燕昭王弔死問生, 卑辭厚幣以招賢者. 問郭隗曰: “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 孤極知燕小不足以報. 誠得賢士與共國, 以雪先王之恥. 孤之願也. 先生視可者, 得身事之.” 隗曰: “古之君, 有以千金使涓人求千里馬者, 買死馬骨五百金而返, 君怒. 涓人曰: ‘死馬且買之, 況生者乎? 馬今至矣.’ 不期年, 千里馬至者三. 今王必欲致士, 先從隗始. 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 於是昭王爲隗改築宮, 師事之, 於是士爭趨燕. 樂毅自魏往, 以爲亞卿, 任國政. 已而使毅伐齊, 入臨淄, 齊王出走. 毅乘勝, 六月之間, 下齊七十餘城, 惟莒ㆍ卽墨不下 해석 燕昭王弔死問生, 연나라 소왕은 죽은 이를 조문하고 산 이를 위문하였으며, 卑辭厚幣以招賢者. 말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하여 어진 이를 불렀다..
37. 진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위험에 처한 조나라 趙惠文王子, 孝成王立. 秦伐韓, 韓上黨, 降於趙. 秦攻趙, 廉頗軍長平, 堅壁不出. 秦人行千金, 爲反間曰: “秦獨畏馬服君趙奢之子括爲將耳.” 王使括代頗, 相如曰: “王以名使括, 若膠柱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 不知合變也.” 王不聽. 括少學兵法, 以天下莫能當, 與父奢言, 不能難. 然不以爲然. 括母問故, 奢曰: “兵死地也, 而括易言之 趙若將括, 必破趙軍.” 及括將行, 其母上書言 “括不可使” 括至軍, 果爲秦將白起所射殺, 卒四十萬皆降, 抗於長平. 해석 趙惠文王子, 孝成王立. 조혜문 왕의 자식인 효성왕이 즉위했다. 秦伐韓, 韓上黨, 降於趙. 진나라가 한나라를 정벌하니, 한나라 상당은 조나라에 투항했다. 秦攻趙, 廉頗軍長平,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했는데 염파가 장평에 진..
36. 대의를 위해 수모를 무릎 쓰며 참아낸 인상여와, 그걸 알아봐서 문경지교가 된 염파 趙王以藺相如爲上卿, 在廉頗右. 頗曰: “我爲趙將, 有攻城野戰之功, 相如素賤人, 徒以口舌居我上. 吾羞爲之下, 我見相如必辱之.” 相如聞之, 每朝常稱病, 不欲與爭列, 出望見輒引車避匿, 其舍人皆以爲恥. 相如曰: “夫以秦之威, 相與廷叱之, 辱其群臣. 相如雖駑, 獨畏廉將軍哉. 顧念, 强秦不敢加兵於趙者, 徒以吾兩人在也. 今兩虎共鬪, 其勢不俱生, 吾所以爲此者, 先國家之急而後私讐也.” 頗聞肉袒負荊, 詣門謝罪, 遂爲刎頸之交. 해석 趙王以藺相如爲上卿, 在廉頗右. 조나라 혜문왕이 인상여를 상경으로 임명하여 염파의 상관이 되도록 했다. 頗曰: “我爲趙將, 有攻城野戰之功, 염파가 말했다. “나는 조나라 장군으로 성을 공격하여 야전에서 공이 ..
35. 진 소양왕과 한바탕 기싸움을 하며 ‘완벽’이란 성어를 만들어낸 인상여 趙惠文王, 嘗得楚和氏璧. 秦昭王, 請以十五城易之. 欲不與畏秦强, 欲與恐見欺. 藺相如願奉璧往, 城不入則臣請完璧而歸. 旣至秦, 王無意償城. 相如乃欺取璧, 怒髮指冠, 卻立柱下曰: “臣頭與璧俱碎.” 遣從者, 懷璧間行先歸. 身待命於秦, 秦昭王賢而歸之 해석 趙惠文王, 嘗得楚和氏璧. 조나라 혜문왕은 일찍이 초나라 화씨의 구슬을 얻었다. 秦昭王, 請以十五城易之. 진나라 소양왕이 15개 성으로 구슬을 바꾸자고 청했다. 欲不與畏秦强, 欲與恐見欺. 15개의 성을 주지 않자니 진나라가 강한 게 두렵고, 주자니 속임을 당할까 두려웠다. 藺相如願奉璧往, 이때 인상여가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에 가길 원하며 말했다. 城不入則臣請完璧而歸. “15개의 성을 주지..
34. 원교근공의 정책으로 성공한 범수 秦昭襄王立. 有魏人范睢者, 嘗從須賈使齊, 齊王聞其辯口, 乃賜之金及牛酒. 賈疑睢以國陰事告齊, 歸告魏相魏齊. 魏齊怒笞擊睢, 折脅拉齒. 睢佯死. 秦使者至魏, 潛載, 睢與歸. 薦于昭襄王, 以爲客卿, 敎以遠交近政之策, 爲丞相, 號應侯. 睢旣得志于秦, 一飯之德必償, 睚眦之怨必報. 해석 秦昭襄王立. 진나라에서 소양왕이 즉위하였다. 有魏人范睢者, 嘗從須賈使齊, 위나라 사람인 범수는 일찍이 수가를 따르며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齊王聞其辯口, 乃賜之金及牛酒. 제나라 왕은 범수의 말 잘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며 곧 금과 소고기와 술을 하사했다. 賈疑睢以國陰事告齊, 歸告魏相魏齊. 그러자 수가는 범수가 국가 기밀을 제나라에 알렸다고 의심하여 위나라 재상인 위제에게 알렸다. 魏齊怒笞擊睢, ..
33. 수모 속에 연형책을 완성시킨 장의 魏人有張儀者, 與蘇秦同師. 嘗遊楚, 爲楚相所辱. 妻慍有語, 儀曰: “視吾舌, 尙在否?” 蘇秦約從時, 激儀使入秦, 儀曰: “蘇君之時, 儀何敢言.” 蘇秦去趙而從解, 儀專爲橫, 連六國以事秦. 해석 魏人有張儀者, 與蘇秦同師. 위나라 사람인 장의는 소진과 같은 스승을 섬겼다. 嘗遊楚, 爲楚相所辱. 일찍이 초나라에 유세를 갔으나, 초나라 재상에게 수모를 당했다. 妻慍有語, 儀曰: “視吾舌, 尙在否?” 아내가 화를 내며 말하니, 장의는 “내 혀를 좀 봐주시오. 아직 건재하오?”라고 말했다. 蘇秦約從時, 激儀使入秦, 소진이 합종책을 맺을 때에 장의를 화나게 하여 진나라에 입국하도록 하니, 儀曰: “蘇君之時, 儀何敢言.” 장의는 “지금은 소진이 득의한 시기인데, 내가 어찌 감히 ..
32. 소진의 가족에 대한 탄식과 합종책의 해체 蘇秦者師鬼谷先生. 初出游, 困而歸, 妻不下機, 嫂不爲炊. 至是爲從約長, 幷相六國. 行過洛陽, 車騎輜重, 擬於王者. 昆弟妻嫂, 側目不敢仰視, 俯伏侍取食, 蘇秦笑曰: “何前倨而後恭也?” 嫂曰: “見季子位高金多也.” 秦喟然嘆曰: “此一人身, 富貴則親戚畏懼之, 貧賤則輕易之, 況衆人乎? 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豈能佩六國相印乎?” 於是散千金, 以賜宗族朋友. 旣定從約歸趙, 肅侯封爲武安君. 其後, 秦使犀首欺趙, 欲敗從約, 齊魏伐趙. 蘇秦恐去趙, 而從約解. 해석 蘇秦者師鬼谷先生. 소진은 귀곡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다. 初出游, 困而歸, 초반에 유세를 떠났지만, 등용되지 않아 곤궁한 상태로 돌아오니, 妻不下機, 嫂不爲炊.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고, 형수는 불 때어 밥을 ..
31. 합종책으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 秦人恐喝諸侯, 求割地. 有洛陽人蘇秦, 游說秦惠王不用, 乃往說燕文侯與趙從親, 燕資之以至趙. 說趙肅侯曰: “諸侯之卒十倍於秦, 竝力四向, 秦必破矣. 爲大王計, 莫若六國從親, 以擯秦.” 肅侯乃資之以約諸侯. 蘇秦以鄙諺, 說諸侯曰: “寧爲雞口, 無爲牛後.” 於是六國從合. 해석 秦人恐喝諸侯, 求割地. 진나라 사람이 제후들을 위협하며 땅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有洛陽人蘇秦, 游說秦惠王不用, 낙양 사람 소진은 진혜왕에게 유세하였지만 등용되지 않았고, 乃往說燕文侯與趙從親, 그래서 연문후에게 가서 유세하여 조나라와 동맹을 맺도록 했고 燕資之以至趙. 연문후는 소진에게 자금을 대어 조나라에 가게 했다. 說趙肅侯曰: “諸侯之卒十倍於秦, 조숙후에게 말씀드렸다. “제후들의 군사가 모이면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