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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6. 계씨, 분수를 넘어서는 제사를 지내다 3-6.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祭)를 지내었다. 공자께서 염유(冉有)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느냐?” 3-6. 季氏, 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 不能救與.” 염유가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對曰: “不能.”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 슬프도다! 일찍이 태산의 하느님이 임방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子曰: “嗚呼, 曾謂泰山, 不如林放乎?” 우선 이 장에는 새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염유(冉有)라는 이름의 사나이 다. 우선 『공자가어(孔子家語)』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 1의 기사를 살펴보자. 염구의 자(字)는 자유(子有)이다. 중궁(仲弓, 염옹冉雍)과 같은 집안사람이다. 본시 재주와 예능이 뛰어났다..
5. 오랑캐 나라에 임금 있는 것과 중국에 임금 없는 것에 대해 3-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랑캐에게 군주가 있다 해도 그것은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군주가 없는 것만도 같지 못하다.” 3-5.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우선 텍스트의 배열상, 임방(林放)이 언급되고 있는 4장과 6장은 하나의 세트로 간주되는 편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禮)의 테마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는 콘텍스트에서 4장과 6장 사이에 오랑캐(이적)와 중국(제하諸夏)【주(周) 나라의 봉건질서 속의 제국(諸國)】의 우열을 가리는 어떤 정치적 언급이 끼어든다는 것은 좀 어색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브룩스는 이 장을 착간으로 간주해 제14편 「헌문」 18에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4. 예(禮)의 근본을 묻다 3-4. 임방이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3-4. 林放問禮之本.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훌륭하도다, 그 질문이여! 예는 사치스럽기 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하고, 상(喪)은 형식적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야 한다.” 子曰: “大哉 問. 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여기 등장하는 임방(林放)이라는 인물은 이 편의 4장과 6장에 그 이름이 올라있을 뿐, 전혀 어떤 인물인지 알 길이 없다. 고주(古注)에 정현(鄭玄)의 말로서 ‘임방(林放), 노인야(魯人也)’라고 적혀 있는 것이 그 단서의 전부다. 『궐리문헌고(闕里文獻考)』에는 성이 임(林)이고 이름이 방(放)이며 자가 자구(子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속에는 ..
3. 인(仁)하지 않으면 예악(禮樂)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3-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이면서 인하지 못하다면 예인들 무엇하리오? 사람이면서 인하지 못하다면 악인들 무엇하리오?” 3-3.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전통적으로 비교적 논란의 대상이 될 바가 없는 아주 평범한 공자님의 말씀에 속하는 장구이지만, 나는 이 장을 심히 좋아한다. 공자의 사상을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초기 파편의 전송으로 간주하며, 또 공자의 생각의 철학적 구조를 잘 나타내는 심오한 표현으로 해석한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예(禮)와 악(樂)은 이미 「학이(學而)」 12 유자(有子)의 말을 해설할 때 자세히 말했던 것이다. 이 편의 일관된 주제의식인 예(禮)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통적으로 예(禮..
2. 삼가(三家)가 옹(雍)이란 천자의 음악으로 제사를 마치다 3-2. 맹손ㆍ숙손ㆍ계속의 삼가 사람들이 옹의 노래로써 제사를 마치었다. 3-2. 三家者以「雍」徹.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후들이 제사를 돕네. 그 가운데 천자의 모습이 그윽히 빛나도다’라는 저 가사의 노래를 어찌 삼가의 당(堂)에서 부를 수 있겠는가?”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 ‘삼가(三家)’란 노(魯)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 대부가문, 노나라 의 장공(莊公)-민공(閔公)-희공(僖公) 삼대(三代)군주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정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립된 환공(桓公)의 세 아들의 적통에서 비롯된 세 대부가문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2-5) 자세히 논술한 바와 같다. 이 세 대부가문이 모두 자신의 사가(..
1. 계씨, 팔일무를 추게 하다 3-1. 공자께서 계씨를 일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여덟 줄로 뜰에서 춤추게 하니, 내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으리오!” 3-1.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고주나 신주 모두 이 ‘계씨(季氏)’의 주인공을 공자 47세에 계씨(季氏)가문의 영주가 된 계환자(季桓子)로 보고 있으나, 나는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그 이전의 영주 계평자(季平子, 계손의여季孫意如)로 간주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춘추좌씨전』의 기록에 미루어 볼 때, 계평자(季平子)야말로 포악하고 참월을 좋아하는 인간이었으며 공자의 개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리얼리티가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언급은 계평자(季平子)의 집권기간인 BC 532년부터 BC 505년 ..
팔일 제상(八佾 第三) 편해(篇解) 「팔일(八佾)」 편 역시 최초의 장에 공자의 말로서 나타나는 두 글자를 가지고 편 전체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통례와 같다. 그런데 이 편의 특징은 편 전체가 매우 단일한 주제를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편찬된 내음새를 강렬하게 풍긴다는 것이다. 이 「팔일」 편이야말로 『논어』 전편 중에서 단일한 주제(monothematic)를 중심으로 통일성이 가장 높은 편임에 틀림이 없다고 주자는 말한다. 그 단일한 주제는 ‘예악(禮樂)’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를 구성하는 제식적 질서(ritual)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제식적 질서는 새롭게 태동하는 혁신적인 국가체제에는 권위를 부여하며, 또 격동하는 사회에는 어떤 심리적 안정성이나 역사적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
24. 아첨과 용기 없음에 대해 2-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사를 지내야 할 하느님이 아닌데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2-24.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여기 ‘귀(鬼)’를 정현고주(鄭玄古注)에 ‘조고(祖考)’로 본 것을 다산(茶山)이 통렬히 반박하고 있는 것에 나는 동감이 간다. 여기서 귀(鬼)라는 것은 단순히 내 조상귀신만을 말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귀(鬼)는 천신(天神), 지시(地示), 인귀(人鬼)를 총칭하는 일반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응당히 받들지 말아야 할 산천제사를 지낸다든가(부당한 태산제사 등), 받들지 말아야 할 타종족의 제사라든가, 하는 등등의 상황을 폭넓게 수용하는 명제라..
23.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2-23. 자장이 여쭈었다: “열 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2-23. 子張問: “十世可知也?”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본받아 덜고 보태고 한 바 있어 열세 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본받아 덜고 보태고 한 바 있어 열 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자가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백 세대의 일일지라도 미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이 장은 많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해석해 넘기지만, 실상 자세히 뜯어보면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심히 명료하지 않다. 이 장의 해석에 있어 나는 다산(茶山)의 설(說)..
22.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2-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으로서 신실함이 없으면, 그 사람됨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큰 수레에 큰 멍에가 없고, 작은 수레에 작은 멍에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 수레를 가게 할 것인가?” 2-22.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여기 ‘신(信)’이라 함은, 계속 공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언어생활에 관한 것이다. 신(信)이란 언어의 신험성, 그 신빙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엄밀한 요구, 그것은 공자의 삶을 일관하고 있는 주제이다. 그리고 이 ‘신(信)’이라는 주제는 『논어』에 나오는 정치관련 언급기사를 훑어보면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정치를 하는 군자에게 있어서 신험 성 있..
21. 꼭 벼슬을 해야지만 정치인가 2-21.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2-21.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서경』에 ‘효성스럽도다, 효성스럽도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도다. 이를 정치에 베풀도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치함이 아니겠는가? 어찌 내가 직접정치를 하는 것만이 정치라 할 수 있겠는가?” 子曰: “書云: 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혹위공자왈(或謂孔子曰)’이란 표현은 우선 우리의 주목을 끈다. 공자에게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황이란, 이 기록이 질문이 오간 당장(當場)의 현장기록이라고 한다면 있기 어려운 상황이다. 누군가 공자에게 질문하였다라는 식의 ..
20. 다스리려는 사람이여, 자신이 먼저 실천하라 2-20. 계강자가 여쭈었다: “백성으로 하여금 경건하고 충직하여 스스로 권면하게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2-20. 季康子問: “使民敬, 忠以勸, 如之何?”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신을 장엄케 하여 사람을 대하면 백성이 경건하게 되고, 자신이 효성스러움과 자비로움을 실천하면 백성이 충직하게 되고, 능력있는 자들을 등용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들을 잘 교화시키면 백성들이 스스로 권면하게 될 것이요.” 子曰: “臨之以莊, 則敬; 孝慈, 則忠; 擧善而敎不能, 則勸.” 계강자(季康子, 지 캉쯔, Ji Kang-zi)는 대부 계씨가문의 7대 영주, 이름은 비(肥), 강(康)은 추증된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 6대 영주 계환자(季桓子)는 공자 가 ..
19. 인재를 잘 쓰면 백성들이 따른다 2-19. 애공이 물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따릅니까?” 2-19.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공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곧은 사람을 들어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백성이 따를 것이며, 굽은 사람을 들어 곧은 사람 위에 놓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애공(哀公)은 문자 그대로 슬픈 군주,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공자의 조국 노나라의 마지막 군주다. 아버지 정공(定公)이 죽고 나서 왕위를 계승한 해가 BC 494년, 공자의 나이 58세였다. 그때 애공은 10세 전후의 어린아이였다. 그의 재위 16년에 공자는 세상을 떴다. 이 대화가 이루어진 시기를 공자말년으로 본다면, 애공은 스물을 갓 넘은..
18. 자장이 녹봉을 구하는 방법을 공자에게 묻다 2-18. 자장이 공자에게 녹을 구하는 법을 배우려 하였다. 2-18. 子張學干祿.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어진다. 많이 보되 위태로운 것은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후회가 적어진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녹이 바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12ㆍ13ㆍ14장이 군자의 덕성, 군자됨의 기준을 말하고 있다면, 15ㆍ16ㆍ17ㆍ18장이 모두 학문하는 방법, 다시 말해서 배움의 길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지식을 획득해야 할 것인가라는 매우 인식론적인 ..
17. 안다는 것에 대해 2-1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2-17.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의 말씀 중에서 그 말씀이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발설되었을 때, 우리는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역사적 맥락을 일차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논어』 중에서, 일평생 공자의 공자다움을 지켜준 애 제자 자로(子路)와의 애증어린 관계에서 발생된 대화의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 말이 자로(子路)라는 인격체를 전제로 하는 맥락에서 일차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한다. 그러한 해석의 지평 위에서 우리..
16.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된다 2-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단을 공부하는 것은 해가 될 뿐이다.” 2-16.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여기서 말하는 이단(異端), 지금 현재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쓰이는 맥락에서 규정되고 있는 의미로 해석될 수는 없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이단(異端)이란 ‘unorthodoxy’나 ‘heterodoxy’의 의미로 해석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자시대에는 ‘orthodoxy(정통)’의 개념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양묵(楊墨)이니 노불(老佛)이니 하는 따위가 모두 공자 후대에 형성된 대비된 개념들이요, 공자 시대에 공자를 괴롭혔던 어떤 이단학파의 개념이 아니다. 공자는 창조적 시대(creative age)를 살았지 호교적 시대(apologetic age)를..
15. 배우되 생각하고, 생각하되 배우라 2-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으면 맹목적으로 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2-15.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칸트는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의, 인식성립에 있어서의 상 보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Kritik der Reinen Vernunft, B75). 우리의 심성이 그 어떠한 방식에서 촉발되는 한에서 표상을 받아들이는 심성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한다면, 이와 반대로..
14. 자기편만 만드는 인간과 어우러지는 인간 2-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두루 마음쓰고 편당 짓지 아니하며, 소인은 편당 짓고 두루 마음쓰지 아니한다.” 2-14.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앞서 서막에서도 논의한 바 있지만,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대비적 가치판단은 반드시 동일한 가치평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라는 것이 확실히 인식되어야 한다. 군자(君子)는 사(士)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며 소인(小人)은 사(士)가 극복해야 할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소인(小人)에 대한 비판은 사(士)에 대비되는 서민(庶民)에 대한 경멸의 언사가 아니라, 사(士)임을 자처하는 사회리더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군자와 소인은 계급 적으로 준별되는 개념이 아니며, 둘..
13. 자공아, 말보단 행동으로 보이라 2-13. 자공이 군자에 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먼저 실행하라. 말은 실행한 후 그 행동을 따르게 하라.” 2-13.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而後從之.” 보통 이 장은 ‘먼저 그 말을 실천에 옮기고, 그 후에 따르게 한다[선행기언(先行其言), 이후종지(而後從之)]’로 끊어 읽는 것이 상례이지만, 내가 다르게 끊은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내가 끊는 방식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해준다. 자공(子貢)은 앞서 말했듯이 비교적 연소한 제자로서 탁월한 외교관이요, 비지니스맨이었다. 「선진(先進)」편의 사과십철(四科十哲)에 자공(子貢)은 재아(宰我)와 함께 ‘언어(言語)에 능한 자’로서 분류되어 있다. 범순부(范淳夫, 1..
12. 군자는 한정된 쓰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2-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2-12. 子曰: “君子不器.” 공자의 말씀으로서 전해 내려오는 이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은, 본 옛부터 유교전통의 핵심적 윤리로서 존중되어온 명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20세기 세계학술계의 쟁점(爭點)으로서 지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이 말을 그의 역저, 『중국의 종교(The Religion of China)』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 아필시킨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순결한 초월주의의 인정이 오히려 현실을 제어하는 힘을 잉태시켰지만, 유교의..
11. 온고지신(溫故知新) 2-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옛 것을 온양하여 새 것을 만들어 낼 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 2-11.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溫)’은 고주와 소(疏)에 의거하여 ‘심역(尋繹)’과 ‘심난(燖煖)’의 두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첫번째 해석은 ‘옛 것을 캐어들어간다’는 의미고, 두 번째 해석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옛 것을 다시 뎁힌다’는 뜻이다. 두 개의 해석이 모두, 옛 것을 잊지 않고 다시 복습함으로써 그 옛 것에서 항상 새로운 것을 얻는다는 함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주자(朱子)는 ‘고(故)라는 것은 예전에 들은 것이요, 신(新)이란 지금에 새로 터득하는 것이다[故者, 舊所聞; 新者, 今所得].’라고 하였다. 다산(茶山)은 ‘심온(..
고문효경의 모습 이것이 내가 준거로 삼은 고문효경이다. 고문효경으로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본일 뿐 아니라 가장 정밀한 본래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판본에는 「공서(孔序)」는 들어있지 않다. 인치(仁治) 2년(1241), 키오하라노 노리타카(淸原敎隆, 1199~1265)의 교점본인데 동양사학자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 1866~1934)의 소장이 되었다가 1934년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키요하라노 노리타카는 카마쿠라 학문 융성에 크게 기여한 대학자로서 본명은 중광(仲光), 쇼오군(將軍)의 시강(侍講) 노릇을 했다. 카마쿠라 중기의 무장 호오죠오 사네토키(北條實時, 1224~76)를 가르쳤는데, 사네토키는 키요하라의 도움을 입어 카네사와문고(金澤文庫)를 건립하였다. 키요하라는 대대로 박사 집안으로서..
내가 참고한 고문경 판본 나는 동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치열한 고증학의 방법을 배웠다.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의 대석학적 학식과 그 인품을 생각하면 항상 옷깃을 여미게 되고, 나도 후학들을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할 텐데 하는 사명감이 가슴에 서리지만 이미 은퇴를 한 구각(軀殼)으로 어찌 할 바가 없다. 일본 근세석학들의 책을 보면 나는 내가 직접 배운 선생님들이거나, 그들의 사우관계에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 향기를 직접 느낄 수 있다. 그들이 기여한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존숭의 염은 우리가 지닐 필요가 없겠지만, 그들의 학문의 정직성과 엄밀성은 우리가 본받고 또 본받아야 한다. 나는 중국고전에 있어서 금문과 고문의 전통을 편견없이 수용하려고 노력하지만 대체적으로 고문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효경』을 ..
판본학의 바탕 없는 고전학은 구름누각 이상이 나 도올이 『효경』을 주해하기 위하여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사전정보이다. 나 도올은 본시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사소한 고증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고증학의 실증이 없는 고전학은 사상누각이요, 판본학의 바탕이 없는 고전해독은 구름누각이요, 필로로지(philology, 문언학)의 공독이 없는 필로소피(philosophy, 철학)는 위선누각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있는 중국고전이나 한국고전에 관한 논문들을 보면 너무도 터무니없이 빈곤하고 부정확한 정보들이 횡행하고 있다. 나 도올의 문학(問學) 이 아직도 미숙한데 그를 일일이 다 지적할 바가 아니나, 우리나라에 제대로된 국사사전 하나가 없다고 말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기초 공..
사마광의 『고문효경지해』로부터 주희 『간오』, 동정 『대의』까지 그리고 고문효경은 공전(孔傳)이 사라진 본문만 남아있는 좀 기묘한 판본이 송나라 비각(秘閣)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본문에 의거하여 『고문효경지해(古文孝經指解)』를 짓게 된 경위는 전술한 바와 같다. 사마광은 『지해』의 본문을 고문에 의거했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금문인 정주(鄭注)와 어주(御注)의 본문을 대폭 수용하였으므로 『지해』의 본문은 고문인 듯하면서도 고문이 아닌 좀 엉터리 잡탕이다. 도저히 고문효경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에서는 이 사마광의 『지해』 본문을 ‘송본효경宋本孝經’이라고 부른다. 이 아리까리한 송본효경을 가지고 주자가 고문경의 모범이라 착각하고, 『효경간오(孝經刊誤)』라는 불행한 책을 지었고, 그 책의 체제..
『공전』 『정주』의 망일과 쵸오넨의 『정주』 헌상 보통 ‘어주(御注)’라고 하면 ‘천보중주(天寶重注)’를 가리키며 ‘개원시주(開元始注)’는 중국에서도 망일되었다. ‘개원시주’는 다행히 일본에 보존되어 오늘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개원시주와 천보중주의 차이는 「서문」의 이동(異同)과 주문(注文)의 증감뿐이며, 경문(經文)의 변화는 없다. 하여튼 어주가 세상에서 통용되게 되자 공(孔)ㆍ정(鄭) 이주(二)는 모두 빛이 바래버렸고, 안타깝게도 오대(五代)의 난(亂)을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다. 그 후, 북송의 옹희(雍熙) 원년(984)에 일본의 승려 쵸오넨(奝然, ?~1016, 헤이안平安 중기의 토오다이지東大寺의 학승, 코오토京都의 사람. 983년에 入宋, 송태종을 알현)이 태종에게 『정주(鄭注)』한 책을 헌..
10. 공자가 말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 2-10.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행하는 바를 보고, 그 말미암은 바를 따지며, 그 지향하는 바를 살핀다면, 사람들이 어찌 자신을 숨길 수 있으리오! 사람들이 어찌 자신을 숨길 수 있으리오!” 2-10.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논어』에 수록되어 있는 공자의 말 중에는 구체적인 어떤 역사적 상황이 나, 공자의 삶의 과정의 어떤 시점에서 의미를 갖는 구절이 많지만, 전혀 그러한 구체적 상황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많다. 그러한 특수한 대상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는 보편적인 언명은 그 보편적인 의미만을 취하면 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말이란, 그것이 발설되어진 역사적 상황이 없을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
9. 안연은 바보가 아닌 진정한 학인(學人)이었다 2-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회와 더불어 온종일 이야기하였으나, 내 말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아 그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물러가고 나서 그의 사적 생활을 살펴보니 역시 나를 깨우치기에 충분하다. 안회는 결코 어리석지 않도다!” 2-9.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안회는 공자의 데미안, 그가 인(仁)하다고 심복(心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수제자 안회의 요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염(念)은 『논어』 곳곳에 스미어 있다. 그 안회에 대한 공자의 최초의 탄성이 바로 여기 이 구절이다. 안회(顔回)는 성(姓)이 안(顔)씨요, 명(名)이 회(回)다. 자(字)는 자연(子淵), 그래서..
8. 효도란 안색을 온화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2-8. 자하가 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어른의 안색을 살필 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어른에게 구찮은 일이 있으면 제자가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술과 밥이 있으면 어른께서 먼저 잡수시게 하는 것만으로 일찍이 효라 할 수 있겠는가?” 2-8.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앞의 2-7과 사실 그 주제의 맥락이 일치되는 것이다. 효(孝)의 본질이 단지 물리적 수고를 덜어드리거나, 음식을 먼저 드리거나 하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외면적 치레가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을 강력히 천명한 것이다. 자하(子夏)는 이미 1-7에 기출하였다. 그곳에도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 하여 ‘색(色)’자가 들어갔고,..
7. 잘 봉양해드리는 게 효도의 완성은 아니다 2-7. 자유가 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요즈음 효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잘 봉양하는 것만을 일컫는 것 같다. 허나 개나 말을 가지고 이야기 해도 또한 봉양해주기는 마찬가지인데, 공경함이 없다면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느냐?” 2-7.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우선 이 장의 질문자인 자유(子游, 쯔여우, Zi-you)는 「선진(先進)」편에서 언급한 사과십철(四科十哲)에 자하(夏)와 함께 문학(文學)에 능한 인물로 공문(孔門)에서 비교적 중후한 위치를 차지하는 제자이다. 나이도 35세 연하, 45세 연하의 두 설이 있으나, 사마천의 기록대로 45세 연하로 보통 설정하고 있다. 「열전」..
6. 부모는 자식이 병들지나 않을까 근심한다 2-6. 맹무백이 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이다.” 2-6.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은 누구인가? 맹무백(孟武伯, 멍 우뿨, Meng Wu-bo)은 맹의자(孟懿子)의 아들이다. 무(武)는 시호(諡號)이고, 백(伯)은 맏아들을 뜻하니 맹무백은 용맹스럽고 강강(剛强)한 맹의자의 맏아들일 것이다. 중손(仲孫) 체(彘)이다. 앞서 번지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애공(哀公) 11년(BC 484, 공자 68세) 제나라가, 노나라가 거년(去年)에 식(鄎)【몽음현(蒙陰縣)의 북(北)에 있는 제나라 땅이다】을 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노나라를 침공한 사건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좌사(左師)를 이끈 ..
5. 예(禮)로 섬기고,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라 2-5. 맹의자가 효를 물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거슬림이 없는 것이 외다.” 2-5.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번지가 수레를 몰고 있었는데, 그에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맹손씨 가 나에게 효를 물었는데, 나는 그냥 거슬림이 없는 것이라고만 대답했단다.”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가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樊遲曰: “何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살아계실 때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 지내는 것이다.” 子曰: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효에 관한 테마 앞의 편해(篇解)에서 말했듯이 1장부터 4장까지가 본편의 강령에 해당 되..
4. 멋있게 나이를 먹기 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우뚝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됨이 없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 살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2-4.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내면적 깊이가 담긴 회고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논어』 구절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 장이 후보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장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부분적으로, 특히 자기의 나이를 말할 때 마흔 살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불혹의 나이’라고 하든가, 쉰 살이라고 하지 않고 꼭 ..
3. 법치보다 덕치를 말하다 2-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정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면하기만 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있을 뿐 아니라 떳떳해진다.” 2-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유가와 법가 유가(Confucianism)와 법가(Legalism)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대비시키는 대구로서 늘상 인용되는 만고(萬古)의 명언이다. 그러나 유가와 법가가 과연 그렇게 날카롭게 대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지는 우리의 성찰을 요(要)하는 것이다. 유가의 정치철학의 근본이념은 덕치주의(德治主義)며, 이 덕치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을 감화시키는 것을 그 ..
2. 시 300편을 한 마디로 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시 삼백편을 한마디로 덮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 2-2.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공자와 육경 다산은 ‘시삼백(詩三百)’이라는 표현에 대해 성호선생(星湖先生)의 말을 이라는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주(補注)를 하고 있다. 보(補)하여 말한다: 시(詩)는 정확하게 311편이다. 그런데 그중 6개가 생시(笙詩)【주공(周公)이 당시의 노래를 기악곡화해서 생황으로 연주한 6편. 가사는 일찍 사라지고 그 제목만 남아있다】이고, 그 5개가 상송(商頌)이다. 생시(詩)는 본래 가사가 없는 것이고, 상송(商頌)은 주(周)나라 것이 아닌 전대(..
1. 정치를 덕으로 하면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 같아진다 2-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정치를 하되 덕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나머지 모든 별이 그를 중심으로 고개 숙이고 도는 것과도 같다.” 2-1.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이것은 「위정(爲政)」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유명한 구절이며 공자 자신의 말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공자가 과연 이러한 천문의 이미지를 비유로 들어 자신의 ‘덕치주의(德治主義)’적 위정관(爲政觀)을 직접 표방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이것은 유가와 도가를 대립적 사상체계로 파악하는 후대의 관념적 틀에서 볼 때는, 매우 위험한 해석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 장은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
위정 제이(爲政 第二) 편해(篇解) 「학이(學而)」 편해(篇解)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위정(爲政)」이라는 편명은 단 순히 ‘위정이덕(爲政以德)’, 이라는 첫 구절의 첫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특별한 주제의식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의 주제는 정치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어떤 일관된 주제의식이 있는 장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위정(爲政)」편은 비교적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전국시대의 백가쟁명(百家爭鳴)하던 시기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유가에 대한 어떤 아폴로제틱(apologetic, 변명의)한 주장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브룩스는 이 편을 「안연(顔淵)」 제십이(第十二), 「자로(子路)」 제십삼(第十三)의 두 편의 정치사상적 흐름을 계승하여..
16. 나에게 옳고 그름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가라 1-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1-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이 장은 별다른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이(學而)」편의 첫 장에서 이미 논파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을 이어 「학이」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 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인(人)의 간(間)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훌륭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5. 작은 성취에 만족치 말고 더 나가라 1-15. 자공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면 어떻겠습니까?” 1-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니라.”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군요?”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이제 비로소 너와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지난 것을 알려주니 올 것을 알아 차리는구나.” 子曰: “賜也, 始可與言..
14. 호학의 조건 1-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居)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 만하다.” 1-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의 오리지널한 발언 공자의 일생을 규정하는 말에서 호학(好學)이라는 한마디처럼 리얼하게 그의 삶의 역정을 그려내는 말도 없다. 인(仁)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호학(好學)이라는 동적 과정(dynamic process)이 훨씬 더 공자라는 인간을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학이(學而)」편이라는 편명은 우연히 결정된 이름이지만 공자의 호학정신을..
13. 종주(宗主)가 될 수 있으려면 1-13.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이 의로움에 가까워야 그 말이 실천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아니 하면 또한 본받을 만하다.” 1-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信近於義 ~ 遠恥辱也 『노자』 17장에 ‘신부족언(信不足焉), 유불신언(有不信焉)’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신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발굴된 마왕퇴 백서본과 곽점 죽간본의 출현은 이러한 평범한 해석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모두 ‘신부족(信不足), 안유불신(安有不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믿음이 ..
12. 예(禮)는 조화를 귀히 여기지만, 악(樂)으로 절제해야 한다 1-12. 유자가 말하였다: “예(禮)의 쓰임은 악(樂)의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 선왕의 도는 이 조화를 아름답게 여겼다. 그러나 작고 큰 일이 모두 이 조화로움에만 말미암는다면 때로 행하여지지 않는 바가 있을 수도 있다. 오직 조화만을 알고 조화를 도모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하여 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1-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예악사상(禮樂思想)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논어』를 읽었지만 본 장의 유약의 말과 같은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구구한 설명이 있어도 구체적인 레퍼런스(reference)가 없으면 ..
11. 효도의 방법 1-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그 하신 일을 살핀다.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으면 효라 이를 만하다.” 1-11.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그 뜻과 그 행실의 주체 ‘삼년무개어부지도(三年無改於父之道), 가위효의(可謂孝矣)’는 「이인(里仁)」 20에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다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삼년상의 문제와 더불어 공자가 살아 생전에 자주 이야기했던 말이 다양하게 전송(傳誦)된 파편들일 것이다. 우선 ‘부재관기지(父在觀其志), 부몰관기행(父沒觀其行)’의 해석은 역사적으로 고주(古注)나 신주(新注)나 ‘기(其)’의 지시체를 아버지[父]로 보지..
10. 임금들이 공자와 정치를 논하는 까닭 1-10. 자금이 자공에게 물어 말하였다: “부자(夫子: 선생님)께서는 한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를 들으시었습니다. 그것은 부자께서 스스로 구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1-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자공이 대답하였다: “부자께서는 따뜻하고 솔직하고 위엄있고 검소하고 사양하심으로써 그런 기회를 얻으셨다. 부자께서 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子貢曰: “夫子溫, 良, 恭, 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子禽)의 시니컬 이 장에는 두 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자..
9. 초상과 제사가 중요하다 1-9. 증자가 말하였다: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1-9.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愼終追遠) ‘신종추원(愼終追遠)!’ 이것은 증자의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논어』 전체를 통해 가장 많이 인용되고, 또 가장 심오한 의미를 함장하는 구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신종추원’이라는 한마디처럼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양식과 직결된, 그리고 유교의 문화적 가치(Confucian Paradigm)를 대변해 주는 『논어』의 구문도 없을 것이다. 이것을 증자가 말했는지, 공자 자신의 생전의 발설이 증자의 문하생들에 의하여 증자의 말로서 전이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증자 계열이 효(孝)의 전문..
8. 허물이 있다면 고치길 꺼려하지 말라 1-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무게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우러나오는 마음과 믿음있는 말을 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아니하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1-8.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구문 해석 ‘주충신(主忠信)’ 이하의 문장은 「자한」 24에 그대로 나오고 있으므로, 생각컨대 ‘군자부중즉불위(君子不重則不威), 학즉불고(學則不固)’와 그 이하의 문장은 본래 별도의 전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뜻에 맥락적 연관성이 있을 필요가 없다. ‘군자부즉불위(君子不重則不威)’를 독립된 하나의 유니트로 보고 ‘학즉불고(學則不固)’를 그에 ..
7. 배우지 않았지만 배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1-7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이를 어진이로서 대하기를 아리따운 여인을 좋아하듯해라. 부모를 섬길 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라. 임금을 섬길 때는 그 몸을 다 바쳐라. 친구와 사귈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여라. 그리하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1-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와 직하학파(稷下學派) 나는 2000년 6월, 산동성 치박시(淄博市)의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임치(臨淄, 린쯔, Lin-zi) 고성(故城)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였다. 임치 도성(都城)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데..
6. 기본이 갖춰진 후에 글을 배워라 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오. 말은 삼가하되 믿음 있는 말만 하시오.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 하시오.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남음이 있으면 곧 문자를 배우시오.” 1-6.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제자 뿐만 아닌 전체에 대한 메시지 앞 장의 전체해석에서 말했듯이 이 장은 특칭(特稱)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공문에 몰려오는 젊은이들을 향한 공자의 학훈(學訓)과도 같은 것이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 최소한 지켜야 할 덕목과 그 차서가 정중하게 진술되고 있다. 이 6장의 내용은 「학이(學而)」편 속에서 제14장..
5. 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 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 하며, 쓰임을 절도 있게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해야 한다.” 1-5.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문에 찾아올 사회 엘리트에 관한 메시지 앞서 말했듯이 4장과 5장 사이에는 ‘신(信)’이라는 개념이 공통되어 전송자에게 연상작용을 일으켰을 수도 있지만, 다시 공자의 말을 배열케 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학이(學而)」편 전체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제1장에서부터 표명했듯이 본 편은 공문학교에 오는 학생들에게 군자의 덕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군자의 양성이 공문(孔門)의 소이연(所以然)이..
4. 증자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의 몸을 살피다 1-4. 증자가 말하였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 본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벗 사귐에 믿음직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 1-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신(信)의 연속된 테마 제3장에서 공자의 말이 나오고 갑자기 제4장에서 증자의 말이 나오는데 외면적으로 보면 양자에는 연접되어야 할 필연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장에서 이미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하면서 반어적으로 인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하였다면, 그 인의 본질은 인간의 내면적 성실성에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4장의 증자 말은 충(忠)과 신(信)을 주제로 삼..
3. 말을 곱게 하고 얼굴색을 예쁘게 하는 게 나쁘다고? 1-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 잘하고 표정을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이가 드물다!” 1-3.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유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구문이 「양화(陽貨)」 17에 중출(重出)하고 또 「공야장(公冶長)」 24에도 나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Q라는 자료가 공유되었던 것처럼, 어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조형적 파편이 있고, 그 조형적 파편이 「학이(學而)」편 기자에게, 양화편 기자에게 「공야장(公冶長)」 편 기자에게 각각 공유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논어』의 편집과정에서는 이러한 발상은 별로 적합한 것 같지가 않다. 각 복음서는 한 사람의 작가가 실히 존재하며 그..
2. 효도와 공손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1-2. 유자가 말하였다: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손하면서도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 근본이 서면 도(道)가 끊임없이 생성된다. 효성스럽고 공손하다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1-2.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약에 대해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유약(有若, 여우 르우어, You Ruo)의 말이다. 유약이라 하지 않고 ‘유자(有子, You Zi, Master You)’라고 한 것은 유약을 스승으로 모시는 집단에 의..
1. 배우니 기쁘고, 찾아오니 즐겁고, 인정욕이 없으니 군자로다 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 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1-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子曰)의 의미 ‘자왈(子曰)’이라는 표현은 『논어』에서 모두 예외없이 ‘공자님께서 말씀 하신다’는 뜻이다. 이때 ‘자’라는 것은 제자들이 ‘선생님’을 높여 부른 말이다. 제자들이 아닌 타인들, 즉 방외(方外)의 사람들이 말할 때는 ‘공자왈(孔子曰)’과 같이 보다 객관화된 표현을 쓴다. 그리고 ‘자’라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
학이 제일(學而 第一) 편해(篇解) 『논어』의 편명이 언제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각편마다 성립시기가 다르다는 사실로 미루어, 각편에 이미 편명이 붙어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최초의 글자 두 개를 떼어내는 편명 결정방식이 20편에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어 있으므로 『논어』라는 서물의 총편집체제를 확정지을 때에 편명(篇名)도 일괄적으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형소(邢疏)가 그러한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제자들이 논찬하던 때에 논어(論語)로 이 책의 이름을 삼았다. ‘학이(學而)’ 이하는 그 편의 소제목으로 삼았다[當弟子論撰之時, 以論語爲此書之大名. 學而以下, 爲當篇之小目]】.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문장에서 ‘학이(學而)’를 떼어낸다는 것은 플룩수스(Flux..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이다. 그 선대는 송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숙량흘이요, 어머니는 안씨이다. 노나라 양공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21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현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어린이가 되어 소꿉장난을 좋아하였는데, 항상 제기그릇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예를 행하는 모습을 갖추었다. 史記世家曰: “孔子, 名丘, 字仲尼. 其先, 宋人. 父, 叔梁紇; 母, 顔氏.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장성하여 위리(창고지기)가 되어서는 재는 양을 공평하게 하였고, 사직리(가축 담당 관리)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케..
주자학의 근대성 나는 주자학을 전근대적(pre-Modem) 사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나는 근원적으로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상식적 맥락에 즉하여 이야기해도, 주자학이야말로 인류의 근대사조라고 단언한다. 주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나 루소의 ‘에밀’과 같은 정신과는 또 다른 하나의 인류의 근대정신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21세기에는 주자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상황을 떠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산은 그의 학우 김덕수(金德叟)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가 다소곳이 생각하여 보건대, 한유(漢儒)들은 옛 것을 높이고, 그 훈고가 서로 계승되어, 실제로 취할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논리들이 엉켜 착오를 일으키는 ..
주자학에 대한 혐오 이제 다산이 ‘후유(後儒)는 경을 해설하는데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삼아 고증이나 논거(考據)가 소홀할 수 있다[後儒說經而窮理爲主, 而考據或疎]’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 8에 누구나 잘 아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朝聞道, 夕死可矣. 이런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적’이란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우리의 상식 자체가 이미 우리가 속한 세계의 가치관의 패러다임 속에서 물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도를 듣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떤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으로 새긴다는 것 자체가 천리(天理..
소승유교와 대승유교 소승불교라는 것은 역사적 싯달타가 깨달은 도리를 소박하게 따르면서 정진(精進)하는 사부대중의 삶을 중시한다. 따라서 소승에는 허세가 없다. 그리고 삼장(三藏)으로 말하자면, 율(律)이 가장 중시되는 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대승이 되면, 역사적 싯달타는 중요치 않게 되고 그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논(論)이 부상하며, 모든 관심이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자각하여 부처가 된다고 하는 성불(成佛)의 논리로 모아지게 된다. 불타는 색신(色身)이 아닌 법신(法身)이 되고, 불타의 가르침 곧 불법(佛法)은 싯달타 개인의 법이 아니라 우주간에 편재하는 보편적 진리가 된다. 그리고 결론은 이러하다: ‘내가 곧 부처다.’ 소승불학에서 율(律)이 중시되었다면, 원시유학에서 중시된 것도 그 율(律)에 해당되는..
후유(後儒)의 주자학 여기까지가 다산이 말하는 한유(漢儒)의 개념 속에 들어가는 논의이다. 한유란 아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현주밖에는 별 신통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의 하안의 집해도 주 속에 들어가고 또 그 후의 소도 모두 주를 부연한 것이기 때문에, 보통 한유라 해도 실제적 함의에 있어서는 한당유(漢唐儒)를 총칭해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한당유가 모두 훈고에 치우쳐 있고 의미에 대한 깊은 생각을 결(缺)하고 있다는 것이 다산의 비판인 것이다. 한당유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그 상식적 관념의 배경에는 바로 한유(漢儒)와 대비되는 후유(後儒)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후유란 바로 남송정권의 주전파(主戰派)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며 경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
논어해석사강(論語解釋史綱) 주(注)와 소(疎)의 의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역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유(漢儒)는 경을 주석하는 데 고고(考古)를 기준으로 삼아 명변(明辨)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참위(讖緯)류의 사설(邪說)이 같이 끼어드는 것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것은 배우기만 하고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폐단이다. 漢儒注經以考古爲法, 而明辨不足. 故讖緯邪說, 未免俱收. 此學而不思之弊也. 후유(後儒)【후대의 유학자들, 송유(宋儒)를 가리킴】는 경을 해설하는 데 궁리(窮理)【이치를 궁구함. 송유의 이론적 성향을 가리킴】를 근본으로 삼아, 고증이나 논거가 소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도에 관한 것이나 사건이나 이름 같은 것이 틀릴 때가..
공자의 전기사상과 후기사상 공자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것처럼 14년 유랑을 전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사상의 틀의 대부분은 망명생활이 끝난 후, 대강 68세부터 73세까지 4ㆍ5년에 걸친 말년의 생각이 그 골간을 이루는 것이다. 거기에는 천(天)과 명(命), 인간의 종교적 심성, 그리고 감관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나 포용이 깃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은 『논어』 그 자체가 말할 것이다. 공자는 죽을 때, 자신이 은나라 후예의 사람임을 확인하고 죽었다. 관을 안치할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은나라 사람들은 양쪽 기둥 사이에 안치한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나는 양쪽기둥..
14년간 장정의 의미 사실 나는 공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독자들이 나의 편견의 전제가 없이 『논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를 밝혀 놓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편견을 제공하지 않는 첩경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세간의 논의는 문자 그대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다. 공자의 ‘거로(去魯)’【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길을 밟게 됨】에 대한 의견도 한없이 분분하다. 이러한 사견들을 여기 조정하여 다시 나의 사견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확실한 것은 거로를 계기로 이루어진 14년간【이것도 정확한 루트와 연수는 학자들에 따라 분분하다】의 유랑의 길이 그에게 어떤..
공자의 정치적 입장 공자가 계씨의 ‘팔일무’를 놓고 통탄하는 모습에서,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입장을 시대착오적 복고주의라고 비판했다. 천자의 예일지라도, 일개 소국의 대부가 사정(私庭)에서 춤추어 무방하다면, 그런 예를 충분히 행할 수 있는 패권의 시대로 이미 진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계씨가 시대적 흐름을 타고 가는 진보세력이고, 그것을 탄(歎)하는 공자야말로 수구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비판이 ‘비림비공(批林批孔)’【1973년 8월 7일, 『인민일보』에 실린 ‘공자 - 완고하게 노예제를 옹호한 사상가’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문화대혁명 후기의 정치운동】시대의 일반적 논리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오늘의 관념을 과거에 덮어씌우는 폭력 이상의 그 아무 것도 아니..
도(盜)와 유(儒) 우리는 이러한 공자에 대한 힐난의 반면에 깔려있는 역설적인 공자의 힘과, 당대에 무(武)에서 문(文)으로 화(化)한 자로의 모습, 공자의 가르침의 정도를 지키기 위해 억울하고 또 평화롭게 죽어간 자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당대에 통념으로 깔려 있었다는 정황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盜)’의 문제에 관하여 재미있는 「외물(外物)」 4편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유(儒)와 직접 연결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유란 본시 『시경』을 읊으며 예를 운운하며 도굴을 일삼는 놈들이다. 오야붕인 대유는 밖에서 망을 보면서 무덤 안에 들어간 꼬붕 소유들에 말을 전한다. “이놈들아! 벌써 동이 트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냐?” 儒以『詩』ㆍ『禮』發冢, 大儒臚傳曰: “東方作矣, 事之何若?..
자로의 첫 대면과 비장한 최후 자로와 공자가 처음으로 상면하는 장면과, 자로의 최후를 기록한 두 장면은 공자 일생의 드라마를 가장 생생한 콘트라스트(contrast) 속에서 전달해주는 감동의 씬들이다. 첫 장면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장면은 『사기(史記)』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과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에 자세하다. 자로와 공자가 첫대면하는 장면을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6에서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스켓치하고 있다. 자로는 본성이 야인기질이 있어 거칠었다.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 심지가 강직하고 직설적으로 뒤받기를 좋아했다. 수탉의 꼬리를 머리에 꽂고 산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그리곤 공자를 업신여기며 공자를 때릴려고까지 하..
공자 집단의 성격과 구성원 공자의 집단의 성격은 애초에는 무(武)와 무(巫)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무(武)와 무(巫)의 성격 속에서 새로운 문(文)의 요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문의 요소야말로 향후의 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사는 신분적으로, 계급적으로 고정된 위(位)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문(斯文)의 획득자가 된 것이다. 공자가 새롭게 규정한 사문(斯文)을 공부(工夫)에 의하여 획득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士)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교단이야말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의 전문적 집단이다. 그것은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사(士) 무(巫) + 무(武) ⇒ 문(文) 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사의 집단이야말로 구..
민과 호학과 예와 사문 사(士)뿐만 아니라 ‘민(民, 庶人)’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우선 『논어』에서 말하는 ‘민’은 절대적인 다수의 대중을 종국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등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폴리스의 시민【시민은 상민(常民, the common people), 군인(the soldiers), 수호인(the guardians)의 세 계층을 합친 개념】과도 같이 광범위한 노예계층을 전제로 한 제한된 소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희랍의 민주제의 개념은 결코 ‘민’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민’이야말로 오히려 21세기 우리사회에 적응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종국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맥락..
사(士)의 새로운 의미 공자는 사(士)로 살고 사로 죽었다. 공자의 삶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코 이 사(士)라는 성격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 그의 제자 중에 나중에 대부가 된 자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공자의 교단은 사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어폐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라는 개념의 모든 속성을 최초로 구현한 자가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삶으로써 사를 규정해야지, 사로써 공자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공자에게서 최초로 ‘성(聖)’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났다면, 마찬가지로 ‘사(士)’도 공자에게 이르러서 새로운 의미맥락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전통적으로 공(公)ㆍ경(卿)ㆍ대부(大夫)의 계층과 민(民)의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관리계층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그것..
공자는 대부(大夫)가 된 적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대로, 공자가 50세 전후로 ‘대사구(大司寇, 따쓰커우, Da-si-kou)’라는 벼슬을 했다고 해서 아무 의식없이 그를 대부(大夫)라고 이야기한다. 요시카와 코오지로오(吉川幸次郞)와 같은 사계의 대가도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서 공자를 노나라의 대부로 기술하고 있다. 보통 공자를 ‘대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대사구라는 벼슬이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대부로서의 식습을 분봉받았으리라고 하는 전제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과연 공자가 정확하게 대부로서 분봉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대부에 준하는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는 순수한 조정의 관료로서 활약했다. 공자는 대부가 되어본 적이 없다. ..
르쌍띠망 아사노 유우이찌(淺野裕一)씨는 최근 중국철학 학계의 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는 『공자신화(孔子神話)』(岩波書店, 1997)에서 유교의 근원으로서의 공자의 삶 자체를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ressentiment)’【독일어로는 Empfindlichkeit가 이에 해당되지만 니체는 독일어 개념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 못한다 하여 보다 압축적이고 참신한 불어적 표현을 선호한다. 영어로는 resentment】으로 가득찬 종교적 신비주의의 한 전형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공자는 하급무사의 한 사생아로서 천한 신분의 인간이었으며 주공이 확립했다 하는 주(周)나라 예악의 사도(斯道)를 한 몸에 구현할 정도의 작위나 체험이나 연출이나 문화적 배경을 소유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나라 ..
다이애스포라송 공자는 송나라의 후예다. 공자는 분명 송나라 사람이다. 아무리 로스안젤레스에 오래 살았어도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인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공자는 은나라 사람인 셈이다. 송을 통해 내려오는 은나라 문화전통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노나라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니까 공자의 삶의 입각처(立脚處) 자체가 이미 태생부터 매우 미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 내면에서 유대교전통의 고수와 유대교전통의 강인한 부정, 그리고 헬레니즘의 보편주의적 언어와 사고가 묘한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동시에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도 바울이 헬레니즘이 만개한 소아시아 이방의 도시, 다소(Tarsus) 속의 유대인 다..
은나라와 주나라 우선 공자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일관된 거시적 축은, 바로 공자의 족보에 관련된 ‘송(宋)과 노(魯)’라는 두 문화의 패러다임이다. 송과 노는 곧 중국고문명의 쌍벽인 은(殷)과 주(周)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은(殷)은 상(商)나라의 마지막 수도이다. 반경(盤庚)이 현재 하남(河南) 안양(安陽) 소둔촌(小屯村)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상은 탕(湯)으로부터 반경에 이르기까지 이미 5천(五遷)을 했다고 하는데, 반경 이전의 사적은 정확히 구성되지 않는다. 상은 은에서 제신(帝辛, 紂)에 이르기까지 8세, 12왕, 273년간 존속했다. 혹자는 나라이름을 부를 때는 상(商)이라 해야 옳고, 은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을 멸망시킨 주(周)가 경멸의 뜻으로 지역이름을 따라 부른 ..
개비의 세계 우리 국악계에 통용되는 말로서 ‘개비’라는 말이 있다. 개비란 그 태생으로부터 국악인의 집안에서 큰 달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개비의 백퍼센트가 무속집안이다. 즉 개비는 모두 ‘성인(𦔻人)’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실상 모두 사마천의 기술대로 빈(貧)하고 천(賤)한 사람들이다. 이 개비들의 큰 특징으로서 우리는 두 측면을 들 수가 있다. 그 첫째가 그들은 상례(喪禮, 시킴굿)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째가 곧 그들은 가무(歌舞)의 달인이며, 또 탁월한 악사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시나위의 명인들이다. 시나위란 당골의 무용을 반주하기 위하여 고안된 계면길의 즉흥기악곡이다. 서로 다른 가락들이 동시에 연주되어 이루어가는 앙상블(ensemble)의 개념이 존재하는 유일한 음악이다. 보..
맹이자가 말하는 성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세가」에, 공자가 17세 때, 노나라의 대부인 맹이자(孟釐子, 멍 리쯔, Meng Li-zi)【맹희자(孟僖子)와 동일인임】가 병으로 죽게 되어, 그의 후계자인 맹의자(孟懿子, 멍 이쯔, Meng Yi-zi)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실려 있다. 공자 17세 때라면 소공 7년인데 그때는 맹의자는 태어나 있지도 않았다. 맹이자(釐子)가 죽은 것은 소공 24년, 공자 34세 때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이벤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꼴라쥬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그 훈계의 내용이다. 이 훈계의 내용은 내가 죽은 후에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후계자인 맹의자에게 17세의..
야합과 비지팅 허스밴드 ‘야합(野合)’이란 표현은 내가 생각키로 요즈음의 인류학 용어를 빌리면, 아마도 ‘비지팅 허스밴드 매리지(visiting husband marriage)’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숙량흘은 첫 부인ㆍ둘째 부인과 이미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고, 셋째 부인인 안징재는 그와는 별도로 니구산(尼丘山) 산자락에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어, 숙량흘은 안징재가 있었던 그곳으로 가끔 통근을 했을 것이다【이런 제도를 인류학에서는 방혼(訪婚) 혹은 통혼(通婚)이라고 부른다】. 안징재라는 무녀가 왜 니구산 산자락에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의 무녀들이 삼각산과 같은 성산(聖山) 밑 바위자락에 촛불 켜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어떤 가옥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
숙량흘의 무용담 숙량흘에 관해서도 많은 무용담이 전하고 있다. 우리가 공자라는 한 인간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의 덩치다. 지금도 산동 사람들이 체구가 크기로 유명하다. 일메타 팔구십 되는 대한(大漢)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산똥따한(山東大漢, Shan-dong da-han)이라는 말이 있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 3절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공자는 키가 아홉척하고도 여섯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다. 정말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孔子長九尺有六寸, 人皆謂之長人而異之. 9척 6촌을 정확히 주제(周制)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주제의 1척은 약 22.5cm이다. 그렇다면 9척만 해도 ..
공자의 출생 앞서 누누이 말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공자의 삶의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나 그 사실성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한 사실(史實)들을 거점으로 해서 펼쳐지는 인간 공자의 가능한 심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공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선 그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 이해의 실마리를 추적해보자!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자는 ‘숙량흘(叔梁紇, 수리앙 허, Shu-liang He)’을 아비로, ‘안씨녀(顔氏女, 옌스뉘, Yan-shi-ni)’를 어미로 태어났다. 이 두 개의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비는 성(姓)이 없고 그 어미는 ..
무우풍영의 날조 『논어』를 읽을 때,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태를 취하거나, 제자들의 자(字)를 직접 호칭하거나, 노나라 밖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은 직전제자의 전승이나, 공자보다 일찍 죽은 안회나 자로가 등장하는 파편과 같은 것들은 대체로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공자왈(孔子曰)’한다는 것은 공자학단 밖의 사람들이 공자를 객관화시켜 부르는 말이므로 후대의 전승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사이에서 오가는 기다란 대화형식을 취한 것, 아규먼트(argument, 주제)의 성격이 강한 것, 그리고 드라마적인 구조를 갖춘 것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진(先進)」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자로(子路)ㆍ증석(曾晳)ㆍ..
「이인」과 「술이」, 상론과 하론 상식적 느낌 이상의 정밀한 논의는 아니지만, 언뜻 「이인(里仁)」 편이나 「술이(述而)」 편과 같은 것은 공자의 어록으로서는 매우 초기자료일 것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인(里仁)」 이 두 개의 파편(15, 26)을 빼놓고는 모두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든가, 「술이(述而)」 편의 내용 또한 중간 중간에 ‘자(子)’로 시작되는 공자의 일상적 삶의 자세나 용태(容態)가 삽입되어 독특한 편집양식을 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공자 스스로의 삶의 철학에 관한 자술(自述)이며, ‘자왈子日"의 간결한 형식으로 편집되어 순결한 공자의 원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노나라에서 비교적 초기에 편집된 공자격언집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각 편에 ..
논어의 Q와 안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논어』는 유교의 이단서이다. 『논어』야말로 성인공자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논어』가 유교의 이단이라 함은, 유교를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유교를 절대적인 권위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의 정직하고 비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이단으로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가 성인 공자의 걸림돌이라 함은,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에 비치는 너무도 인간적이고 변화무쌍한 희노애락의 공자상은 성인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어』에 있어서처럼 한 인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
인성과 신성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과연 악처(惡妻)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였다는 사실을 통해 반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인(哲人)으로서 위대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공자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극은 공자 삼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반사적 장치였을까? 나는 공자를 둘러싼 이와 같은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그 자체의 허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이든, 「단궁」의 기록이든, 『장자(莊子)』의 기록이든, 이 모든 것이 사실의 르뽀([reportage)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양식(Form)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록의 사실여부에 대한 추정에 앞서 근원적인 어떤 인식론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단..
공자가문 3대 이혼설 『예기』 「단궁」의 기록에 의하면 공짱구는 잉어를 낳은 부인 병관씨(幷官氏)와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出母, 정확하게 ‘내쫓긴 부인’의 뜻)이 죽었을 때 일 년이 지나도록 잉어가 슬피 울었다[期而猶哭], 잉어가 그토록 슬피 운다는 소리를 듣고 공짱구는 화가 나서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잉어는 곡을 뚝그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잉어[鯉]는 또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잉어가 죽은 후에 재가했다는 설도 있고, 이혼설도 있다】. 그 부인은 위(衛, 웨이, Wei)나라로 가서 서씨(庶氏, 수스, Shu-shi)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다가 위나라에 가서 재가(再嫁)한 그 잉어의 부인, 그러니까 『중용(中庸)』을 지은 자사(子思)의 엄마가 되는 셈인데, 그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짱구와 잉어 「공자세가(孔子世家)」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왕숙(王肅, 왕 쑤, Wang Su, AD 195~256)의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송(宋) 나라의 병관씨(幷官氏, 삥꾸안스, Bing-quan Shi)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백어(伯魚, 뿨워, Bo-yu)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국군(國君)이었던 노나라 소공(昭公, 자오꽁, Zhao Gong)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鯉魚] 한 마리를 담아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소공(昭公)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鯉]’라고 이름지었다. 백어(伯魚)는 리(鯉)의 자(字)이다. 그래서..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미자(微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孔子傳』, 東京: 中公叢書, p. 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자(微子)」편은 분명 『논어』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장자학풍에 노출된 공문의 사람들에 의하여 꾸며진 이야기들일 것이다. 공자와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오(大悟)의 계기들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
장자와 묵자와 맹자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 이전의 문헌으로 우리가 공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나는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예기』 이 네 개의 책을 들겠다. 이 네 개의 서물은 모두 그 나름대로 확고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장자(莊子)』라는 서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莊子)』를 유가와 대립하는, 유가와 전혀 무관한 독자적인 도가적 사상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莊子)』 속에는 공자에 관한 수없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희화(戱化)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이미 그것이 세가(世家)로 편입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명백한 어떤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지성(至聖)’이심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것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료가 된 많은 공자에 관한 기술의 파편들(fragments)이 모두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공자제자의 집단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것도 역시 공자 사후의 초기 교단(敎團, 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의 케리그마적 성격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기술은 신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초자연적 사태를 개입시킨다는 것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화적 기술의 유무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매우..
예수 탄생과 베들레헴 우리는 예수가 베들레헴(Bethlehem)의 어느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을 크리스마스설화의 주요테마로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 갈릴리(Galilee)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요셉도 분명 갈릴리의 나자렛(Nazareth)사람이고, 예수도 나자렛에서 성장하여 갈릴리 바다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Capernaum)에서 활동을 개시한 사람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남쪽 유대지방 예루살렘에서도 더 남쪽으로 6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편벽한 곳이다. 저 북방에 위치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그야말로 험준한 광야의 천리길이다. 그..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전기문학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결국 이 질문은 공자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나? 그런데 삶(Life)이란 행위나 사건, 느낌들의 복합적 연속체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공자의 삶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공자의 삶을 전달하는 가장 권위있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보의 집약 체계로서 우리는 사마천(司馬遷, 쓰마 치엔, Sima Qian, BC 145~c.86)의 『사기(史記)』 속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꼽는다. 사실 공자의 삶에 대한 한우충동(汗牛充棟)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기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천언만언(千言萬言)의..
곡부로 가서 느낀 것 공자는 존재했는가? 살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나는 중요한 결단을 하나 감행하였다. 공자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활동하고 죽었다는 그의 고향 곡부(曲阜, 취후우, Qu-fu)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청도(靑島, 칭따오, Qing-dao)에서 기차를 타고 황하(黃河, 후앙허, Huang-he)와 태산(泰山, 타이산, Tai-shan) 앞의 광활한 대지를 달려 새벽의 여명을 깨뜨리고 연주(兗州, 옌저우, Yan-zhou) 후어츠어잔(火車站, huo-che-zhan)에 도착한 것이 이천년 유월 삼일 아침의 일이었다. 곡부에 공자가 있었는가? 곡부의 웅대한 대성전(大成殿)의 위용 속에 공자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간결하다. 곡부의 유적 어느 곳에도 공자는..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 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가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Symb..
유일한과 명동학교, 동아시아의 미래 이러한 나의 갈망과 진실을 이해하고 나의 작업에 대하여 문화콘텐츠사업 ― ‘인문학 살리기’의 일환으로 지원을 흔쾌히 허락한 유한킴벌리에 나는 감사할 뿐이다. 이러한 문화콘텐츠사업은 동아시아 문명의 미래에 대한 총체적 비젼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킴벌리는 우리나라의 신뢰받는 모범기업으로서 시민들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공적사업을 원대한 안목에서 실천해왔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복지를 실현하는 사원공동체의 다양한 시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러한 기업철학의 배면에는 무엇보다도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박사의 정신이 살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사료된다. 우리시대에 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학동으로서 유일한 박사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조선문명과 한문 본 서의 모두(冒頭)에서 이야기했듯이 고전이란 고(古)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금(今)에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땅에서 자라나는 나의 후학들이 옛 고전 만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000년 후에도 읽힐 수 있는 고전을 남겨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한 갑자를 돌고난 인생을 회고해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나의 학문세계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의 고전을 만들기에는 나의 학문세계가 너무도 소천(疎淺)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어서 확고한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중국의 고경인 13경 전체에 대한 주석이다. 중국역사를 통해서도 한 사람이 13경 전체를 주석한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대의 진보에 따라 막..
불교와 심리학, 그리고 공자 세부적인 언급은 회피하겠으나, 싯달타 역시 다원론적 신들의 세계가 교차하는 짙은 종교적 문명권에서 태어났다. 싯달타 이전에 이미 인도문명은 베다문학과 우파니샤드경전을 통하여 단 하나의 근원적인 우주의 실체에 접근하였고, 이미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일체가 되는 심오한 철학사상을 개발했으며, 업(karman)이라든가, 윤회(saṃsāra), 해탈(mokṣa)과 같은 기본개념을 확립했다. 그러나 싯달타의 근원적인 혁명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관심을 비실체화시키고, 모든 신적 존재를 그 존재론적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데 있다. 싯달타는 신의 존재를 무화(無化)시켰다. 신이라는 존재의 무화는 나라는 존재의 무화이다. 이 나라는 존재의 무화를 불교에서는 안아트만(anātman), 즉 무아..
신크레티즘(syncretism) 이집트의 문명에서는 신들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들의 태양숭배는 어떤 생명의 근원자에 대한 숭배이며 그 숭배의 본질은 무수한 로칼(local)한 신들의 형상으로 현현되기 때문에 신들 사이에는 서로간의 배타가 있을 수 없다. 후대 희랍의 제우스의 원형이 된(헤로도토스의 주장) 테베지역의 토착신인 아문(Amun)신은 멤피스지역의 태양신(Heliopolitan sun-god)인 라(Ra)신과 결합되어 아문라(Amun-Ra)신이 된다. 오시리스도 프타, 소카르와 결합하여 프타ㆍ소카르ㆍ오시리스(Ptah-Sokar-Osiris)가 된다.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퓨젼방식에 의하여 주변의【아시아, 누비아, 후대의 희랍 로마】 신들을 거침없이 수용하여 자기들의 토착신과 결합시..
알파벳 단원설 나는 본시 문명의 전파설(diffusionist theory)을 신봉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학이나 역사학에서의 실체적 사고의 한 측면이다. 즉 한 군데서 발생한 문명이 여러 곳으로 전파된다는 생각은, 문명을 실체화하여 그 실체화된 문명이 떠돌아다닌다는 생각인데, 이것은 근원적으로 제국주의 학문의 말엽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보편인간(Universal Man)의 보편적 가능성을 밀폐시키는 것이다. 물론 페니키아 알파벳으로부터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이 유래했다는 알파벳 단원설(單源說, the monogenesis of the alphabet)과 같은 특수한 주제에 관한 것은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언어라는 것은 음성체계로 시작하여 음성체계로 종료..
과학과 권력, 과학의 초극 과학의 객관성이 과학의 진리성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원자의 법칙을 이해하여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그 폭탄이 객관적으로 항상스러운 위력을 과시한다고 해서 그 폭탄을 인간의 대규모 살상무기로 쓴다면 과연 과학의 진리는 무엇으로 확보할 것인가? 너무 적나라한 특수사례인 것처럼 나의 이러한 지적을 비꼬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과학의 발전이 과연 인간세의 모습을 어떻게 끌고나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항상 유효하다. 현재, 명료한 결론은 과학이 부국강병의 가장 효율적 방편이라는 사실밖에는 없다. 동양인들은 서양인들의 제국주의적 무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고, 꿇은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과학이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세는 한없이 무력다..
이신론과 무신론 다시 말해서 자연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Truth)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인식체계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술어이다. 트루쓰(Truth)라는 것은 트루(true)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이다. ‘트루’라는 형용사는 ‘틀리다, 거짓이다’를 의미하는 ‘폴스(false)’라는 형용사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맞다. 진짜다’를 의미한다. 진리는 ‘맞음, 진짜임’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타난 현상(appearance)과 실재(reality)의 일치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타난 것과 실재로 있는 것, 그 양변이 모두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진리관계라는 것도 유동적일 수 밖에 없다. 현상과 실재의 일치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사변이성이 양변에서 추상된 요소들을 일치..
자연과학이라는 우상과 허상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을 분리해서 논한다면,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당(唐)제국이 도달한 수준은 서양의 여하한 문명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기술수준은 다방면에서 서양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를 과학의 진보라 말할 수 없다. ‘애니콜’을 잘 만들고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과학문명의 수준을 반영하는 사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삶의 방편으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변이성이 가설과 입증의 과정을 통하여 자연의 모든 개별적 사실들을 어떤 일반적 원리를 예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탐구해 들어가는 독자적인 관성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의 발전이 기술의 진보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이 3가지 중에서 가장 쉽게 습득되는 것은 자본주의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의 확대를 위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체제만 잘 갖추어지면 인간세는 그러한 체제에 거의 본능적으로 적응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의 폭력에 관하여 이미 서구사상 자체 내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 정당성에 관한 끊임없는 회의가 발생하였고, 그것이 지고의 선이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방문명도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라는 것의 규정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무엇이 과연 좋은 자본주의인가에 관하여서는 인류가 아직도 모색 중에 있다. 그 다음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은 정치제도로서 동방인들에게 충격과 매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이 여태까지 운영해왔던 어떠한 사회 제도보다도..
희랍문명의 강점 대체적으로 고문명세계(Old World)에 관하여 우리의 인식의 창구가 차단되어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고문명세계의 근원적 축을 이루는 지역들이 모두 공교롭게도 이슬람문명권이라는 표피로 덮여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계나 서방세계와 근린정책을 펴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아랍국가라 하면 악의 축으로 인식하거나 우호적이기 어려운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암암리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묘한 국제관계 역학의 산물인 이스라엘국가의 탄생으로 악화되었고, 십자군시대의 오류가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 고문명세계는 그 본질상 이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문명세계와 이슬람종교의 결합은 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