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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7부 유교왕국의 완성 유교왕국이란 원래 왕과 사대부를 축으로 하는 이중 권력 체제다. 초기의 승자는 왕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사대부 체제를 이룩하고자 했던 정도전(鄭道傳)의 구상은 당연히 왕국 체제를 선호하는 왕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세종까지는 국왕이 사대부를 관료로 거느리는 정상적인 왕국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머리가 커진 사대부들은 점차 왕권에 대한 도전을 꿈꾸게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이냐, 건국이냐 이색(李穡)이 창왕의 옹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쿠데타 세력이 사대부와 손을 맞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은 최영과 운명을 함께 했고(여기에는 원나라가 재기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점도 배경이 되었다), 사대부 세력은 즉각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접근해서 신군부와 인연을 맺으려 들었다. 그동안 물리력에 취약점이 있어 권력에 다가가지 못했던 그들이었으니 이제 한풀이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대부는 동질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권문세족이 집권하던 시기에 그들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었으므로 친명반원(親明反元)의 이해관계로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저마다 색깔을 드러낼 것은 당연하다. 개혁이라는 대의에서는 모두가 같은..
구국의 쿠데타?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와 친원파가 장악하고 있는 고려,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두 나라의 관계는 결국 영토 분쟁으로 번진다. 갑자기 웬 영토 문제일까? 사실 여기에는 가깝게는 100년, 멀게는 고려의 개국 초기부터 수백 년간에 달하는 역사가 관련되어 있다. 우선 명나라는 원나라를 정복한 만큼 원나라의 옛 영토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정당한 주장이니까 고려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원나라의 그 옛 영토 중에 고려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동녕부(東寧府)에 속했던 땅이 쟁점 지역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몽골 지배가 시작된 이래 함경도와 평안도는 원나라의 두 지배기관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전까지 고려의 영토였던..
수구와 진보 신돈(辛旽)이 실각의 조짐을 보이던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고 실로 오랜만에 한족 제국인 명(明)을 세웠다. 그리고 신돈이 처형된 뒤 고려의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이 장악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중국의 신흥국 명나라와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고려의 관계가 장차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반원을 내세웠던 공민왕(恭愍王)은 명나라의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명 태조(太祖, 재위 1368~98)에 즉위하자 곧바로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명나라를 섬길 뜻을 전한다(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또 다른 모국을 찾은 격이니, 고려의 반원 운동이 결코 자주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대해 명 태조는 공민왕의 책봉 문서와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권문세족의 태생적 결함은 결국 현실로 드러났다. 원나라와 운명공동체로 출발한 그들이었으니 몰락도 원나라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원나라가 급작스럽게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세조 이래 원 황실은 한화 정책에 열심이었으나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탈바꿈할 수는 없었고 유목문명이 농경문명을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일찍부터 제위의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제위 계승을 위한 고정된 제도가 없었으므로 권력다툼이 더욱 심했다. 장기 집권했던 세조 이후 14세기 후반까지 70여 년 동안 즉위한 황제만도 10명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웠던 원 황실은 국가재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
식민지적 발전Ⅱ 몽골 지배기가 남긴 ‘혜택’은 새 시대의 주역을 탄생시킨 것 이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건국 초부터 고려는 여러 이민족 국가들의 간섭과 지휘를 받았고 때로는 자발적이거나 반강제로 그들을 섬겼지만 정식으로 남의 지배를 받은 일은 없었다. 이제 처음으로 속국 신세를 경험하면서 고려인들, 특히 생각있는 지식인들은 새삼 고려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속국이나 식민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때였으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나라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상류층은 자발적으로 몽골풍을 따랐고 백성들도 대부분 몽골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였으나, 상당수 지식인들은 원나라에 사대하..
식민지적 발전Ⅰ 일국의 왕실에서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았을 정도라면 나라꼴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장장 30년간의 무모한 대몽 항쟁으로 전 국토는 피폐해졌고 더 무모한 일본 정벌의 준비로 백성들의 삶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기업은 망해도 사장은 살아남는다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격언만이 아니다. 왕실이 그랬듯이 고려 사회의 지배층도 나라와 백성의 처지와는 무관하게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영화를 누렸다.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을 누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진국의 첨단 유행을 맨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상류층이다.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몽골 복장을 몸에 걸치고 몽골식 변발을 했다. 게다가..
황제의 사위들 2차 일본 정벌이 전개되기 1년 전인 1279년 남송이 멸망함으로써 고려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정작 충심을 바쳐 섬기고 싶은 대상인 중국의 한족 왕조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오랑캐 몽골을 ‘모국’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고려의 신세도 여간 딱한 게 아니다. 그나마 남송처럼 오랑캐의 손에 멸망하는 것보다는 오랑캐의 속국으로라도 존속하는 편이 낫다고 할까? 물론 몽골의 관점에서는 고려가 남송과 달리 변방에 불과했기에 그냥 놔둔 것이지만. 사실 고려 왕실은 불만이 없다. 왕실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원나라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 덕분에 지긋지긋하던 무신집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적 왕권?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개국 초부터 주변 강대국들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 이민족 왕조..
반군과 용병 마치 종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몽골 황제 몽케 칸과 고려 국왕 고종은 1259년에 함께 죽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황제와 왕이라는 신분 차이보다도 컸다. 오히려 고종과 비슷한 삶을 산 인물은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조선의 고종이다. 두 임금이 같은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같은 운명을 암시한 걸까? 고려의 고종은 내내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고 30년을 강화도에서 보내야 했으며, 조선의 고종은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아버지와 마누라에 휘둘려 바지저고리로 지내다가 급기야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까지 했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고종 모두 예순일곱 해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은 채 죽었다. 그래도 일제 식민지 시대와 달리 몽골 식민지 ..
무모한 항쟁 설사 강화도 천도가 항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국토와 백성을 버리고 싸우자는 격이니 그건 항쟁이라 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항복은 굴욕적인 것이지만 일단 항복을 했으면 자신의 처지와 역할에 충실해야만 실익이라도 거둘 수 있다. 치욕을 씻고 복수를 꾀하는 것은 그 다음의 수순이다【그런 점에서 강화도 천도를 반대한 참지정사 유승단(兪升日, 1168~1232)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몽골에 사대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현실에서는 단연 그게 더 현명한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도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고집하는 게 기백 있는 태도인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유승단은 강화도로 천도하면 ‘변방의 백성들은 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다시 부는 북풍 처음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이 첫 대면을 한 것은 1218년 몽골에 쫓긴 거란이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어왔을 때다. 몽골군은 서경 동쪽의 강동성에 거란을 몰아넣고 고려에 군량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고민했으나 당시 서북면 원수(元帥)를 맡고 있던 조충(趙沖, 1171~1220)이 군량을 보내자 정부에서도 김취려(金就礪, ?~1234)를 지휘관으로 삼고 병력을 보내 이듬해 1월에 양측이 함께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는 형식을 취했다(당시 조충은 고려로 보내진 거란 포로들을 북부의 각 주현으로 분산시켜 특정 구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거란장契丹場으로 불리게 된다). 이렇듯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충과 김취려는 몽골 ..
격변의 동북아 최우(崔瑀)가 정작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자기 집 바깥이 아니라 나라 바깥이었다. 그에게 최소한의 역사적 안목만 있었더라도, 고려의 대내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외적인 국제질서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송과의 국교를 트면서 광종(光宗) 대에 왕권 강화의 기회가 주어졌고, 거란의 요나라에 복속되면서 현종 대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회를 맞을 수 있었던 고려가 아니었던가? 비록 여진의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이후에는 안정을 누리는 대신 내란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권력 구조 내부에 누적되어 오던 외척 세력과 문치주의의 모순이 분출되고 해소되는 과정이었으니 나름대로 필요한 단계였고 긴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고려 왕조가 틀을 갖추고 발전해 오는 ..
틀을 갖춘 군사독재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했을 때 아마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틸까였을 것이다. 정중부 이래로 30년 남짓 지나는 동안 권좌의 임자는 벌써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경대승(慶大升)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후임자의 손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비록 최충헌이 나름대로 소신있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본색이 드러날 테고 누군가에 의해 칼로 일어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러나 최충헌은 난세의 리더답게 잔머리와 냉혹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봉사 10조를 이용해서 임금을 갈아치운 게 잔꾀라면, 동생인 최충수(崔忠粹, ?~1197)를 죽인 것은 그의 단호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동생(터무니없게도 그들 형제는 이의민의 아들이 최..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하극상은 정치 무대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도 맑을 수 없는 건 당연할뿐더러, 원래부터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사회였으니 한복판이 혼탁해진 판에 변두리가 멀쩡할 리 없다. 정계에서 권력을 놓고 무신들이 푸닥거리 굿판을 벌이는 동안 그 혼란스런 분위기는 금세 사회 전반으로 전염되었다.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은 그나마 관료 집단이 이끈 반란이었고, 따라서 권력을 목표로 한 쿠데타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 다음부터는 일반 농민이나 천민이 들고 일어났으니 말 그대로 ‘민란(民亂)’, 즉 하극상의 극치다. 봉기의 신호탄이 터진 것은 조위총의 난이 미처 끝나기도 전인 1176년 1월이었다. 공주의 명학소에 살던 천민인 망이와 망소이는 동료 천민들을 이끌고 공..
하극상의 시대: 윗물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군사쿠데타의 대명사인 박정희가 온몸으로 증명해준 격언이지만, 그의 까마득한 선배격인 정중부도 역시 그 철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1953년 장성이 되고 나서 8년 동안 겨우 별 하나 늘렸다가 쿠데타 이후 2년 만에 별 두 개를 제 손으로 갖다 붙인 게 박정희라면, 정중부 일당은 한 술 더 떠서 집단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정중부의 벼슬 자체는 종2품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머물렀지만 드디어 그때까지 ‘신성불가침’이었던 2품의 관문을 뚫은 데다 문관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제 무관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 정권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통성의 결여에 있다. 쉽게 말해 한 번..
한 세기를 끈 쿠데타 역사적 대형 사건은 대개 사소한 계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사건을 촉발시킨 배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된 것이지만 실제로 일이 터져나오는 계기는 필연이라기보다는 우연이다. 기원 전 264년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 메시나가 시라쿠사와의 다툼으로 로마 원로원에 SOS를 치지 않았다면 포에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원후 303년 서진의 사마영이 흉노 족장 유연을 팔왕의 난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계기들이 없었다 해도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어차피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을 테고 기원후 4세기에 중국은 오랜 분열기로 접어 들었겠지만, 어쨌든 계기로만 보면 지극히 사소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그 계기를 만든 자들은 ..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 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쉽다.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답이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건 사실이나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므로 명장이든 졸장이든 장수는 아니다. 이렇듯 문관이 안팎에서 벌어진 전란의 해결사로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터이다. 960년에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자신이 후주의 절도사라는 신분으로 새 왕조를 건국했기에 처음부터 문치주의를 앞세웠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5ㆍ16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군에서 전역하면서 “두 번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
6부 표류하는 고려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대내적 문제와 시대착오적인 중화세계의 일원으로 남으려 한 대외적 문제는 결국 고려 사회의 붕괴를 앞당긴다. 내부 문제는 무신정변을 불러 때이른 ‘군사독재’를 성립시켰고, 외부 문제는 몽골의 침략을 불러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 시대를 열었다. 몽골이 물러가자 고려는 부활의 기회를 잡았으나, 신진사대부들은 다시금 중화세계의 낡은 우산 밑으로 기어든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삼국사기』 미스터리 묘청(妙淸)이 자랑스런 독립당이 아니라 ‘위장된 사대당’이었다는 사실은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 사대주의의 핵심 인물은 물론 묘청이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이다.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은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졌다. 이자겸(李資謙)의 몰락으로 외척 세력이 제거되었고, 묘청(妙淸)의 몰락으로 서경의 라이벌이 뿌리 뽑히면서 이제 세상은 개경 귀족들의 것이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김부식은 정지상(鄭知常)이라는 학문적 라이벌이자 최대의 정적도 제거했고 반란 진압의 공로로 최고위직인 문하시중 자리까지 따냈다【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정지상(鄭知常)을 즉각 살해한 데서도 보듯이 김부식(金富軾)은 ‘점잖은 유학자’ 답지 않게 정적을 제거..
북벌의 망상 척준경을 탄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자겸(李資謙)이 제기되고 나서 잠시 척준경은 이자겸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했다. 비록 그는 이자겸의 파트너였다는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신발을 거꾸로 신지 않았다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전력을 문제삼기 어려웠다. 하긴, 인종 스스로가 애초에 그의 과거를 용서하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라고 해서 처벌할 수 없다면 쿠데타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다. 언제든 정권이 바뀔 수 있는 나라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람을 반쯤 죽여놓고도 치료만 해주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면 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척준경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
국왕의 쿠데타 금나라의 전광석화 같은 팽창 정책으로 한때 동아시아의 삼각 정립을 이루었던 3국의 신세는 처량해졌다. 요나라는 완전히 멸망했고 송나라는 망명정권으로 전락했다. 홀로 남은 고려는 이미 여진과 형제 관계를 약속한 바 있지만 동아시아의 새 주인이 그 정도의 계약에 만족할지는 의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송을 멸망시킨 뒤 여진은 그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강요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유독 한 사람 당대 최고의 실력자만 홀로 금을 섬기자는 사금책(事金策)을 주장해서 마침내 관철시켰는데, 그는 바로 이자겸(李資謙, ?~1126)이라는 자였다. 당시 그는 지군국사(知軍國事, 앞서 ‘권지국사權知國事’의 경우처럼 ‘知’란 ‘맡는다’는 뜻이니, 군대와 국가의 총책임자라고 보면 되겠다)..
북방의 새 주인 성공하지 못한 개혁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용의 머리로 시작했다가 뱀의 꼬리로 끝나자 그렇잖아도 좌초할 지경인 송나라 호는 더욱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더구나 송 나라가 낭비해 버린 ‘찬스 카드’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힘의 공백 상태였던 북방에서 새 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란을 대체한 여진이 바로 그들이다. 거란과 고려가 압록강 일대를 두고 흥정을 벌일 무렵 여진은 두 강대국의 손아귀에 운명을 맡긴 약소 민족의 처지였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북풍이 거세어지는 시대인 데다 더구나 그들은 거란과 고려보다 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민족이었다.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리지 못하면 좋은 연장을 얻을 수 없는 법, 카이펑을 함락시..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고려 왕조는 왕건이 세웠으나 광종(光宗)과 성종(成宗)이 다듬었고 문종이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여 완성된 나라다. 국가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 제도를 비롯하여 지방행정구역 재편, 법 체계 등 제반 국가 체제를 완비한 게 문종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나라꼴을 갖추게 되는 데는 무려 150년이나 걸린 셈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때까지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왕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정복국가의 수준에 머물렀을 뿐 행정국가는 이루지 못했던 고대 삼국,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서 존재했던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는 이제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것이다. 또한 비록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이긴 하나 그래도 송, 요와 더불어 고려는 동아시아 국제..
3장 안정의 대가 전성기 코리아 1010년 요나라의 2차 침략을 받았을 때 현종은 대장경을 조판할 것을 명했다. 그 의도는 부처의 힘을 빌려 전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거란도 역시 독실한 불교 국가였으니 부처라 해도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이 대장경의 판은 나중에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 전하는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략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새로 조판한 것이다). 차라리 현종으로서는 나주까지 도망치지 말고 개경에 남아 궁성과 수도의 백성들을 구하는 게 훨씬 당당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대장경의 조판 이외에도 현종은 성종(成宗)이 중단시켰던 거국적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으니 불교에 대한 신심이 상당히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
동북아 국제사회 비록 드라마는 조기 종영되었어도 아직 미니시리즈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스토리가 2부작으로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출자인 요 성종은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이 인기 없는 시리즈를 끝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고려의 현종이 입조의 약속을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종결을 지으려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현종은 사신을 보내 병 때문에 출연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한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갓 배우가 감독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생각에 성종은 열받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3부를 제작할 구실은 된다. 그러나 이미 2부작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성종은 가급적이면 여기서 시리즈를 끝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출연 거부에 따른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 즉 사전에 출연..
전란에의 초대 도덕성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고려의 입장에서 국가적 위기를 외교로 넘긴 서희(徐熙)의 성과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실리외교’의 전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명분이 실리보다 중요하던 시대에 실리외교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법이다. 과연 고려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서희의 외교를 폄하하거나 반대한다. 신라계 귀족들의 그런 태도는 사실 예견된 것이었다. 한족 왕조인 송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인 거란에 굴복하다니, 그런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론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서희가 ‘굴욕적인’ 외교를 강행한 데는 아마도 그가 지방 토호 출신이라는 배경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서희에게는 신라계가 장악한 중앙정부를 다른 색깔로 바꿔 보려는 ..
외교로 넘긴 위기 성종이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뿌듯해 하던 그 해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은 머잖아 요나라 황제 성종이 침공해 오리라는 불길한 소식을 고려 측에 전한다(고려의 왕은 成宗이고 요의 황제는 聖宗이지만 공교롭게도 한글 발음으로는 같다). 당시 여진은 랴오둥의 요나라와 대동강 이남의 고려 사이에 해당하는 중립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나 아직 부족 통일을 이루어 국가 체제를 형성할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이렇듯 랴오둥은커녕 옛 고구려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압록강 주변 지역조차 관장하지 못했으니, 영토적으로 봐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이 중립이지 실상 여진은 이 지역을 제패하려는 거란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고려에 친화적이었다. 고려에 거란의 준동을 경고해..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 송나라 초기에 고려가 잠시 중국과 교류를 단절한 이유는 새로 생긴 송나라가 과연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기야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뒤 50년도 채 못되는 기간에 벌써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다. 게다가 당시 광종(光宗)은 5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와 우호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후주의 무관으로 있다가 제위를 빼앗고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그랬기에 광종은 연호를 별도로 정하고 황제를 자칭하며 한껏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윤이 대륙의 새 임자라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진다. 그래서 972년에 광종은 송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하는데, ..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 또 하나의 모순이 없었다면 고려 왕조는 그런 대로 별탈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첫째 모순 때문에 완벽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고 둘째 모순으로 인해 정상적인 관료제 사회조차 이룰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셋째 모순은 고려 사회 내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훨씬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요 10조」의 4항과 5항에서 왕건은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규정하고 배척하라고 가르치면서 서경을 중시하라고 한다. 거란이라면 당시 랴오둥을 장악하고 있던 북방 민족이므로 고려와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왕건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들을 적대시하고 그 적대감을 시위하듯이 서경을 ..
소유권과 수조권 광종(光宗)은 왕위계승 문제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해결했다. 경종은 광종의 맏아들이니까 고려 왕실로서는 개국 이래 처음으로 평온한 왕위세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갓 스물의 이 젊은이는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추진한 개혁의 후유증에 심하게 시달려야 했다. 광종 대에 대대적으로 숙청된 호족 세력들이 자기들끼리 살벌한 복수극을 펼친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한 목소리로 결집되어 왕을 탓하고 나서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그랬더라면 경종은 불과 6년밖에 안 되는 재위 기간마저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짧은 치세 동안 경종은 유일한 치적이자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업적 하나를 남기는데, 그게 바로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다. 통일왕조답지 않게 고려는 그..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과거의 핵심이 유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광종(光宗)이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데는 단순히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흥 왕조인 고려를 유학 국가로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요컨대 과거제의 ‘형식’은 (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 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 (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광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군주였으며,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쉽게도 그의 성적표는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문제는 고려 사회 자체가 과거제와 어울리지 않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과거제..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즉위한 처지였으니 광종(光宗)은 당연히 은인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배다른 형 혜종은 불과 2년, 친형인 정종은 겨우 3년간 재위했고, 둘 다 한창 젊은 나이에 죽었다. 왕권을 능가하는 호족들의 권력, 광종으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왕위는커녕 목숨조차 위협받을지 모른다. 그가 즉위 후 7년간이나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광종(光宗)은 결코 왕위 유지에만 급급한 쭉정이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이 즉위하는 데도 호족의 도움을 입기는 했지만 호족들의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고려는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형들의 재위 기간을 훌쩍 뛰어넘고 어느 정도 왕권이 공고해지자 이윽고 광종은 서서히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킹메이커들의 내전 왕건이 각지에 뿌려놓은 혈연의 씨앗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불화의 씨앗으로 변한다.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아들을 얻은 것까지야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보면 복 받았다 하겠지만, 그 때문에 상속자가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이인 무(武)가 혜종(惠宗, 재위 943~945)으로 즉위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비록 맏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더구나 그는 그 왕자들의 실제적 서열을 가르는 기준에서 결격 사유가 있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이므로 진짜 킹메이커는 어머니 집안의 세..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 무혈 쿠데타로 고려를 세웠고, 평화롭게 신라 정권을 인수했으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후백제마저 접수해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은 정말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였다. 그러나 역시 공짜란 없는 걸까? 두꺼비한테도 헌 집을 줘야 새 집을 얻을 수 있듯이 대개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허무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됐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건국자 왕건은 죽을 때까지 승자의 행복한 삶을 누렸지만 그가 생전에 심어놓은 모순의 씨앗 때문에 이후 고려는 재건국이나 다름없는 진통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이다. ..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당 - 신라에서 송 - 고려로 멤버를 교체한 중화세계는 어느새 강성해진 비중화세계의 거센 도전에 시달린다. 왕건의 모순에 찬 「훈요 10조」는 중화 대 비중화의 대결 구도를 예고한다. 하지만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세계의 만만한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러키보이 왕건 이제 신라는 사실상 멸망하고 후삼국시대는 후백제와 고려가 대립하는 이국 시대로 바뀌었다. 실제로 이후 견훤은 신라 지역에 성들을 쌓으면서 신라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게다가 경순왕(敬順王) 김부 역시 견훤을 맹렬히 비난하던 경애왕과는 달리, 자신을 권지국사로 봉해준 견훤을 상왕(上王)으로 받들면서 왕건과의 관계를 멀리 하려 한다. 그러나 비록 견훤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다 해도 왕실을 유린하고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견훤에게 진심 어린 복종심이 우러나올 수는 없다. 따라서 경순왕은 여러 가지로 착잡한 심정이다. 그러나 왕건의 심정은 착잡을 넘어 참담하다. 어느새 이 지경이 되었을까? 눈치빠른 호족들은 벌써 대세를 좇아 견훤에게 투항하기 시작한다. 신중하기 그지없던 그였으나 이제 더 이..
후삼국의 쟁패 비록 공식적인 출범으로는 후삼국의 막내격이 되었지만, 후삼국시대의 초기를 주도한 것은 궁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후고구려가 정복 국가에만 머문다면 오래 갈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궁예는 젊은 시절에 승려가 되어 선종이라는 법명까지 얻었다. 게다가 그는 미륵불을 자처하기까지 했으므로 마진이라는 국호는 불교 용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크다. 위대하다’는 뜻의 수식어인 마하(maha)라는 말은 보통 한자로 마하(摩訶)라고 표기되는데(물론 음역이다), 마진의 ‘마’는 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은 ‘진단(震旦)’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진단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인데, 원래는 동방이라는 뜻으로..
다시 분열의 시대로 효공왕(孝恭王)이 불명확한 태생과 불안정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국의 상황이 어수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왕권을 노리던 경주 귀족들은 효공왕(孝恭王) 대에 이르러 더 이상 왕권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라가 없다면 왕권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나라 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시작은 진성여왕이 김위홍을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889년에 전국적으로 터져나온 반란이었다. 반란이야 9세기 초부터 늘상 있어오던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의 반란은 색다르다. 그 전까지의 무수한 반란은 거의 대부분 중앙 관직을 가진 경주 귀족들이 왕권을 노리고 일으킨 것이..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왕실의 진통 만주에서 발해가 전성기의 마지막 단꿈에 취한 나머지 랴오둥 진출의 찬스를 놓치고 있을 무렵 한반도의 신라에게는 아예 아무런 찬스도 없었다. 중국이 힘을 잃자 신라는 마치 부모를 여린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崔致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미 신라는 경주 귀족들이 왕권마저 좌지우지하는 단계였으므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실 7세기 초반 두 여왕의 시대 이래 200여 년 만에 다시 여왕이 즉위하게 된 사정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00년 전의 두 여왕은 비록 비정상적이기는 해도 신라의 도약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로 기능했지만, 88..
북방의 새로운 기운 구심력이 약해지면 원심력이 작용하는 게 이치다. 소용돌이의 동아시아에도 중심인 남과 변방인 북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나라가 기침하고 신라가 몸살을 앓으며 동아시아 남쪽의 중화세계가 무너져갈 때 비중화세계인 북쪽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중국의 통일제국이 약화되면 항상 장성 이북의 이민족들이 흥기했던 것은 이제 동아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의 주고받음이라면 그 신호탄은 두 문명의 중간, 즉 반농반목 문명이라 할 수 있는 발해다. 남쪽의 신라에서 장보고의 야망과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무렵 발해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8세기까지 아홉 명의 왕을 왕명부에 올린 것 말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발해는 9세기 초 선..
두 명의 신라인 원래부터 경주 부근에만 중앙정부의 힘이 미칠 만큼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데다, 마땅히 등대가 되어줘야 할 중국이 당말오대에 접어들면서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취약한 신라 호가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은 뻔하다. 중앙이 약해지면 지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거의 물리적 법칙이다. 앞서 말한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은 이런 배경에서 터져나왔다. 물론 김헌창 개인으로서는 아버지(김주원)가 원성왕(元聖王)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따라서 자신도 왕위계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원한에 사무칠 수 있었겠지만, 이미 40년이나 지난 일인 데다 원성왕의 증손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이 재위하는 중에 새삼스럽게 해묵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어지러운 정세를 이용해서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 사실 원성왕(元聖王)이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상대등이었던 그는 다른 대권 후보였던 왕손 김주원(金周元, 김춘추의 6세손)을 누르고 즉위했던 것이다【이 문제는 한참 뒤인 822년에 반란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원한을 40년이나 잊지 않고 있다가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의 전북과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장안국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경주 귀족들에게 진압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중에..
중국화의 물결 국제정세가 안정되자 신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대내적 정비다. 비록 중국의 지방정권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단독정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행정제도와 관제를 대폭 손봐야 한다. 그래서 신문왕(神文王)은 우선 수도가 영토의 동남부에 치우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충주와 남원에 각각 소경(小京)을 두고 주민들까지 강제 이주시켰으며, 전국을 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관직도 신설했다【이 무렵의 신라는 사실상 신생국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왕권의 힘이 후대에 비해 오히려 강력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신문왕(神文王)은 689년에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관리의 봉급제도를 바꾸는 개혁을 실시한다. 녹음제에서는 관리들이 토지 생산물과 주민들을 모두 소유했으나 이제부터는 토지 생산물..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의 지방정권 노릇을 자임함으로써 적어도 한반도는 완전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들었지만,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가 탄생하는 과정은 중국이 바라는 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문제는 랴오둥이다. 한족 왕조인 당의 입장에서 볼 때 친소(親陳)의 스펙트럼은 확연하다. 우선 중원 북방 몽골 초원의 오랑캐들은 전통적으로 노골적인 적이므로 초지일관 적대시하면 된다. 또한 한반도의 오랑캐들은 늘 자발적으로 중국의 한족 왕조에 접근해 왔으므로 특별대우만 해주며 다독거리면 만사 오케이다. 그러나 그 스펙트럼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랴오둥 ― 압록강 이북 지역은 언제나 중국에 양면적인 태도, 중국의 힘이 강하면 사대하고 약하면 저항하는 태도 ― 를 취해왔으므로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태도 ..
지방정권의 한계 문무를 겸비했던 삼국통일의 주역 문무왕(文武王)은 681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을 따로 쓰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라는 특이한 유언을 남긴다. 불교가 융성하던 때였으니 화장이 이상할 건 없으나 일국의 왕이 무덤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왜구의 침략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의 동해안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지만 백제, 고구려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시기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라의 큰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이제 삼국통일을 이루고 신라가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았으니 문무왕은 그 ‘사소한 문제’나마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큰 통일과 작은 통일 당의 식민지 총독부 격인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옮겨간 것은 신라의 저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의 정책 변화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신라는 당에 정면으로 대립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만약 신라가 당에 저항하면서도 사대하는 양면 정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당은 필경 한반도의 지도에서 신라마저 지워 버리는 계획을 추진했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당이 서로에 대한 이중적인 노선을 취한 이면에는 중국 역대 제국의 전통적인 대한반도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이 정책은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단군과 고조선시대에까지 닿으며, 아래로 내려간다면 19세기 말까지도 이어진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중국의 대륙풍이 크게 작용했다는 ..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중화세계의 완성이다. 따라서 중화 질서의 변방인 신라는 중국이 붕괴하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중화의 질서가 정점에 달한 8세기 초반에 잠시 번영을 누렸던 신라는 중국이 당말오대의 위기에 빠지자 극심한 혼란기로 접어든다. 발해가 포기한 랴오둥을 무대로 거란이 비중화세계의 대표주자로 성장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단독정권은 고려에게로 넘어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삼국에서 일군으로 연개소문의 삼형제 중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둘째인 연남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기개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형 남생을 쫓아내고 대막리지가 된 그였으니, 항복한다고 해서 고구려 원정군으로 온 형의 용서를 받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성에 점령군이 들어오자 남건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했는데, 나중에 형과 아우는 당의 직책을 받은 반면 그는 혼자 유배형을 받아 줄을 잘못 선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백제의 선례를 좇아 고구려에도 즉각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한때 중국의 화북 왕조와 맞설 만큼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영토는 아홉 개의 도독부로 나뉘어 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당 군정청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20세기..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 김춘추 부자는 의자왕(義慈王)이 따르는 술을 마시고 매국노를 잡아죽인 것에 만족할 수 있었으나 소정방은 달랐다. 신라에게는 백제가 사슬이지만 당나라에게는 한반도 전체가 사슬이므로 백제는 그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정방은 또 하나의 더 튼튼한 고리를 끊어야 사슬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었다. 그래서 660년 8월 그는 의자왕의 술을 마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선 의자왕과 왕자들을 비롯하여 88명에 이르는 백제의 대신들과 장군들, 게다가 무려 1만 2천 807명의 백제 백성들까지 장안으로 압송한 다음에 소정방은 곧바로 고구려 공략 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해 11월에 고구려 원정군이 출발했으니 그는 가히 초인적인 체력의 소유자였던 듯하다(게다가 당시 그는 65세..
두 번째 멸망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했던가? 항복한 부여융에게 더 가혹하게 군 사람은 실제 정복자인 소정방이 아니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金法敏)이었다. 승자인 신라의 왕자는 패자인 백제의 왕자를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이다. “20년 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인 일이 있는데, 이제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는 642년의 대야성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항복을 받은 뒤 첫 마디가 20년 전의 이야기라면 김춘추 부자가 백제에 얼마나 큰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김법민은 정복자가 아니므로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부여융의 목숨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다. 따라서 그는 따로 화풀이 대상을..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행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위 초기 빛나는 대외 전과를 올린 것과 달리 후기에 가서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방탕해지는 것이다. 전쟁보다는 주로 외교에 주력하던 아버지 무왕(武王)과 달리 그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신라 공략에 나서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대야성 정복으로 기세가 최대로 올랐을 때 원래부터의 목표였던 한강 하류 수복을 시도했다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SOS를 치는 바람에 물러서긴 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으로 손이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시 신라의 일곱 성을 획득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곳곳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게 발목을 잡히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마 의자왕은 그 참에 한강 하류는 물론 신라 본토까지 ..
사대주의 원년 예나 지금이나 무장은 좋은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 연개소문은 개인적 권력욕만이 아니라 국가적 야망도 지닌 인물이었고 당나라의 총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영웅임에는 틀림없으나, 나라의 경영은 군사적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나라 이전에 집안의 경영에도 실패했다. 665년 그가 죽자마자 그의 세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맏이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당나라에 투항해서 고구려 토벌의 앞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그의 사후에 일어난 일이니 전적으로 연개소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의 진정한 잘못은 고구려가 취해야 할 근본적인 노선을 잘못 결정했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는 대중국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보다는 당나라와 타협하면서 전통적인 남진정..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두 영웅은 공존하지 못하는 걸까? 콤비를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營留王)과 을지문덕(乙支文德)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長壽王)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했으나, 그에 반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고구려는 아직 랴오둥의 성곽들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수나라의 침략 이후 랴오둥은 사실상 소유권이 불분명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당연히 영류왕에게 줄을 섰다. 아마 무관들은 상당수 을지문덕의 견해에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는 패기만만한 한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다【『삼국사기』..
새로운 동맹 백제 무왕(武王)은 아마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를 놓고 한참 저울질을 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백제는 그 세 나라와 모두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언제든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래야 할 대상이고, 고구려와는 신라에게 영토를 빼앗겼다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며, 신라와는 진평왕(眞平王)과의 친분이 있다. 그래서 그는 세 나라를 모두 확실한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다. 그런 대치 국면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훌륭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 정세는 마냥 그렇게 전개될 수 없었다. 특히 태풍의 핵과 같은 당나라가 곧 안정을 찾으면 언제든지 한반도를 복속시키려 들 것이며, 그때 가서는 백제도 어떻게든 분명한 노선을 정하지 않으면..
중국의 낙점 654년에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그때 그의 나이는 쉰이었고, 불과 7년간 재위하고 죽었다. 따라서 그의 즉위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김용춘의 맺힌 한을 풀었다는 것, 공적으로는 그동안 그가 세운 공로에 대한 포상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후 신라의 왕위계승이 매끄러워졌다는 것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처남인 김유신과 더불어 사실상 신라의 리더로서 중대한 시기에 신라의 중대사를 모두 처리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치세에 기록된 거의 모든 일은 그 두 사람의 업적이나 다름없다. 수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할 줄 알았던 고구려가 부활하자 한반도 삼국의 관계는 일단 예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618년에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가 아직 몸을 추스르기 전이니까 말하자면..
신라의 성장통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신라의 배신으로 깨지고 백제 성왕(聖王)이 전사한 게 불과 50년 전의 일인데도 백제 무왕(武王)이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에 접근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대고구려 정책에 관한 한 공동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백제는 신라와 앙숙인 데다 신라로부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무왕은 어떻게 진평왕과 보조를 같이 할 마음을 먹었던 걸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역사에 기록된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지만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서동이라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지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아닌가? 백제 왕자 서동이 마 장수로 변장하고 신라에 와서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
2장 통일 시나리오 동북아 네 나라의 입장 반도 북쪽에서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회전을 벌이던 무렵 반도 남쪽의 두 나라는 숨죽인 채로 그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쟁의 결과는 곧 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무엇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태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에 적대적이고 중국에 사대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그들이 응원하는 측은 당연히 수나라다(당시까지는 한반도 단일민족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와 신라의 입장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전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역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수 양제가 마음 속으로 원정 일정을 ..
고구려의 육탄 방어 같은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와 대책이 달라지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한반도 땅에서 서로 접경하고 있는 처지에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은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뜸 수나라의 침략을 걱정했으나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즉각 수나라의 천하통일을 치하하는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나아가 598년에 위덕왕(威德王)은 수 문제가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꺼이 길잡이가 되겠다고 나서기까지 한다. 지리적으로 백제가 중국의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를 맡을 수는 없는 데다 그 자신도 이미 일흔..
대륙 통일의 먹구름 사위가 남부 전선에서 고군분투할 즈음 평원왕은 서쪽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중국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소식이다. 북주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隋)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9년 전에 들은 바 있었고, 그때 평원왕은 즉각 수 문제(文帝)가 된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과 책봉을 교환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수 문제가 진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워낙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수나라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왕조려니 생각했었다. 당시 대륙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50년이 채 못 되었고 북주 같은 경우는 그 절반도 못 되었으니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싶은 게 평원왕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달랐다. 북주가 간신히 통일해놓은 화..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 6세기 중반 한반도에 신문이 있었다면 남부일보」의 톱기사는 단연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파괴와 백제 성왕(聖王)의 죽음,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이었겠지만, 북부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장수왕(長壽王) 시대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조공해 왔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북위가 534년에 동서로 분열된 소식이 일면 톱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150년 동안 중국 화북의 패자로 군림했던 북위가 사라진 것은 곧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크게 변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북위는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동위와 서위로 분리되었지만 더 이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으로 역할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위는 곧 북제로 명패를 바꾸었다가(이 때문에 남조의 제를 남제라고 부르게 된다) 서위에..
1장 역전되는 역사 밀월의 끝 지증왕과 법흥왕의 2대에 걸쳐 급속히 진행된 신라의 ‘재건국’ 과정을 보면 후발주자의 이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구려와 백제가 수백 년 동안 서서히 이룬 선진화 프로젝트를 신라는 불과 50년도 못되는 기간에 완수했다. 이것으로 새 나라의 하드웨어 정비는 끝났다. 뒤이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초기에 신라는 소프트웨어 분야까지 손을 댄다. 544년에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가 완공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최초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했다【지금까지 나온 삼국시대 인물들의 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이사부와 거칠부라는 희한한 이름도 역시 이두 이름이다. 한자로는 異斯夫, 居柒夫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자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
3부 통일의 바람 중국의 질서가 변한 것은 삼국 중 가장 후발주자인 신라에게 찬스를 제공한다. 백제와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의 영토를 손에 넣은 신라는 자연히 두 나라의 타깃이 된다. 신라를 이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중국의 새로운 통일제국인 수와 당이다. 변방 정리의 일환으로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고구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중국적 질서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신라가 한반도의 단독 정권으로 발돋움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제2의 건국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지 500년 이상이 지나도록 신라는 기나긴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그 오랜 시절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백제와 지난한 다툼을 벌였고 동해안을 수시로 침범하는 왜구에 시달렸는가 하면 고구려의 속령이 되는 경험까지 겪었다. 또 그런 가운데서도 꾸준히 강역을 늘리고 외부로부터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신라의 부족국가적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물왕(奈勿王) 이전까지 400여 년 동안 왕계조차 고정되지 못했다는 게 그 단적인 사례다. 이렇듯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처지게 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선진적인 대륙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라가 일찍부터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이루..
바뀌는 대륙풍 317년 진(서진)이 강남으로 터전을 옮기고 북중국이 이민족들의 세상으로 바뀌었을 때, 중국은 유사 이래 최대의 혼란기를 맞았다. 1차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그 기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실을 상징적 중심으로 섬기며 쟁패했으므로 이처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족’의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탓에 이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배척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북중국을 주름잡는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 왕조에 의해 ‘오랑캐’로 취급되며 적대시되던 자들이다【오랑캐의 개념은 중화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정벌로 이제 한반도의 서열은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충청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북위와 한층 돈독해진 우애를 유지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개인적으로 장수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다소 있었던 듯하다. 서열상으로는 고구려가 북위를 받드는 처지였으나 효문제는 특히 고구려에 대한 안배에 신경을 썼다. 당시 북위의 황실에 오는 사신들의 공식 서열을 보면, 물론 강남의 제(齊, 479년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강남의 남조는 제나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제라고도 부른다)나라 사신이 서열 1위였고 2위는 단연 고구려였다. 잘 나가는 고구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자의 단골..
백제의 멸망? 정복군주란 원래 요절하는 걸까? 서른셋에 죽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처럼 광개토왕(廣開土王)도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비록 정복의 규모로 보면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듯이 광개토왕도 짧은 생애 동안 이룰 수 있는 모든 정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닮은 점은 여기까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그의 세계제국은 후계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쪼개졌지만, 광개토왕은 훨씬 든든한 후계자를 두었다. 그의 아들 거련(巨連)은 아버지가 외형적으로 성장시킨 나라에 확고한 토대를 놓았으며, 무려 7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흔여덟 살까지 살아 여러모로 요절한 아버지를 섭섭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묘호가 장수왕(長壽王)이었을까? 앞..
뭉쳐야 산다 한편 신라는 백제와 달리 부모처럼 받들어 섬길 나라도,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낼 나라도 없다. 신라는 아직 중국과 교류할 루트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가야와 일본은 이미 백제 측으로 노선을 정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라도 응당 이웃인 백제에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백제는 건국 초부터 동진 정책으로 신라를 정복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적인 앙숙이었다. 『삼국사기』 유례왕(儒禮王) 조의 기사에는 백제에 대한 신라의 증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295년 왜구의 잦은 해안 침략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백제와 연합해서 일본을 쳐들어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당시에 말하는 일본은 전통적으로 왜구의 본거지였던 쓰시마를 가리킨다), 이때 홍권이라는 자가 나서서 ‘백제는 거짓이 많고 ..
믿을 건 외교뿐 고구려의 남진정책이라고 하면 대뜸 장수왕(長壽王)이 떠오르지만 앞서 본 것처럼 고구려가 남쪽의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한 시기는 상당히 오래다. 일찍이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랴오둥과 낙랑을 함께 공략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처음부터 서쪽의 랴오둥만이 아니라 남쪽의 한반도도 전혀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랴오둥이 생존에 필수적인 비타민이라면 한반도는 고구려의 성장을 돕는 단백질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늘 중국쪽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고, 남쪽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더욱이 낙랑이 멸망하면서 백제와 접경하고, 백제와 신라가 제법 살집이 붙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자 남쪽을 향한 고구려의 시선은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이래 고구려가 아직 불안정한 정세에..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원래 광개토왕(廣開土王)은 한반도를 평정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철갑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대와 더불어 탁월한 전략적 감각을 지닌 그가 왜 중국 대륙이라는 넓은 천하를 외면했을까? 여기에는 고구려의 역대 대중국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이 참에 그때까지 400년간 고구려가 취해온 대외 노선의 변화를 정리해보자. 건국 이후 고구려는 우선 생존을 위해 팽창해야 했다. 사방에 크고작은 부족국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압록강변에서 탄생한 약소국 고구려는 팽창을 통해 어느 정도의 영토 확보를 이루어야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몽의 초기 정복사업과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태조왕(太祖王)에 이르기까지 랴오둥 세력과 벌인 다툼은 그 일환이다. 중국에서 후한이 무너지고 랴..
불세출의 정복군주 비록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일찍 왕위를 승계하긴 했지만,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 ~384)은 이미 16년 동안의 태자 시절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후각을 체득하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용맹했으나 경솔했고 투지만큼 지혜가 따라주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연나라의 힘을 얕보았고 백제는 더욱 무시했다. 그러나 직접 뚜껑을 열어본 결과 전연, 백제, 고구려의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였다.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약해진 위상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전연이 전진에게 몰락한 것은 고구려에게 일단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새로운 사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게 위기인지 기회인지 판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판이 엄청난 화를 부른다는 사실..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백제의 최전성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시대였다. 이 무렵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와의 해묵은 불화를 해소했고, 북쪽으로는 강국 고구려와의 실력 대결에서 승리했다. 게다가 서쪽 바다 건너로는, 비록 통일제국의 지위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중국의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동진과 수교했고, 남쪽 바다 건너로는 일본과도 친교를 맺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강대국의 면모다. 형세가 유리할 때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건 바둑만이 아니다.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것은 판을 닦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였다. 아마도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말은 일찌감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초고왕(..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신라가 뒤늦게나마 김씨로 대권후보를 통일하고 단일한 왕계를 꾸리기 시작할 무렵 백제는 이미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신라와의 키재기는 여전했지만 반도 북부의 상황 변화로 인해 이제 백제에게는 동쪽보다 북쪽의 일이 더 궁금해지고 시급해진 것이다. 그 상황 변화란 말할 것도 없이 낙랑이 멸망한 사건을 가리킨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낙랑과 대방을 한반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 그러니까 지금의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국 국적의 두 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낙랑과 대방은 한나라가 무너지고 중국이 분열시대로 접어든 이후부터는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존속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지..
생존이 미덕 먼저 고구려가, 그 다음에는 백제가 차례로 선진 문명권에 합류하면서 한반도의 북부와 서부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에 비해 신라가 자리 잡은 동남부는 아직 잠잠하기만 하다. 이주민 국가로 시작한 출발부터 그랬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이질적인 성격이 다분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문명권의 막내로 생겨났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대륙을 향하게 된 것과 달리 신라는 처음부터 대륙 문명과는 별개로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장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이질성이 상당 부분 잔존해 있었다(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한반도의 토착 문명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역사에서 과연 어느 것을 토착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런 이질성 중 하나가 단일한 성씨로 고..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 한반도 중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정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측의 상견례는 영 험악한 분위기다. 고구려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쿠데타가 발생할 즈음, 그러니까 167년에 신라가 3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한강 중류까지 치고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히 신라의 병력을 보고 겁을 먹은 백제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전투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는 장차 백제와 신라가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될지를 말해주는 예고편인 셈이었다. 사실 두 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00년 전부터다. 백제의 다루왕(多婁王)과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시절이던 기원후 64년에 두 나라는 오늘날 충..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 일단 방침은 정해졌지만 고구려의 남행은 즉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건국 이후 내내 험난한 생존과 팽창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고구려는 아직 지리적 여건에 따른 태생적인 불안정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고구려는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270) 때인 259년에 아직까지도 정복의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위나라의 테스트를 한 번 더 치러내야 했다. 게다가 권력의 불안도 여전히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자 세습이 정착된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도 고구려의 왕위계승은 매끄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 맏아들 계승이 몇 대쯤 계속해서 착실히 진행된다면 아마 그 불안은 제거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운도 따라주지 않아 맏아들 승계는 동천왕(東川王)과 중천왕의 겨우 2대만 ..
대륙 국가의 성격 고구려는 특이한 나라다. 건국시조로 보나, 문명의 성격으로 보나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한반도 역사에 속한다고 해야겠지만 백제나 신라만큼 토박이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 랴오둥 동부에 두루 걸치고 있으므로 크게 보면 중국과 한반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 만큼 고구려는 애초부터 중국과 한반도 양쪽의 역사를 이어주면서도 단절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 역사의 일부로 치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중국사에 포함시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겠지만 실상 초기의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낙랑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이상 중국에..
1장 고구려의 역할 중국발 통신 다양한 미스터리와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2세기를 마칠 즈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의 왕조들은 그럭저럭 나라꼴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왕위 세습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관제를 비롯한 초보적인 제도들도 생겨났으니 이제부터는 버젓한 왕국이라 해도 별 하자는 없을 듯하다(거꾸로 말하면 그 전까지는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미비한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이 나라들은 서로 이리저리 얽히며 올망졸망 살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발전해 갔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한반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서쪽에는 이곳보다 훨씬 크고 일찍이 이곳에 문명의 빛을 전해주었던 중국 세계가 있다. 3세기부터 중국 대륙에 몰아친 격변의 회오리는 한반도 역사에 또 한 차례..
2부 화려한 분열 중국이 분열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난 고구려는 북조의 왕조들로부터 랴오둥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신 사대의 의무를 약속하고 한반도 방면의 진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노리는 한반도 중ㆍ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신흥 세력으로 착실히 성장해가고 있다. 고구려의 강력한 압박전술에 두 나라가 동맹으로 맞서면서 본격적인 삼국의 정립기가 시작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마지막 건국신화 2세기 왕계에 관한 미스터리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만 그것은 삼국의 왕계가 아니므로 여기서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그 미스터리는 한반도 왕조의 마지막 건국신화와 관련된다. 주인공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金首露王, 재위 42~99)이다. 김수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의 파사왕과 연루되면서부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의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나서 기쁜 나머지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씨로서는 최초의 왕이자 일본 출신이었으니 탈해가 굳이 박씨를 다시 후계로 삼지 않으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알지는 유리왕의 아들인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그 덕분에 신라는 다시 박씨 왕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왜 그랬..
미스터리의 세기 탈해왕(脫解王)으로 한 번 삐딱선을 탄 신라의 왕계는 그 다음부터 유리왕의 후손, 즉 박씨 세력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박씨 혈통이 파사-지마-일성-아달라까지 이어지다가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는 다시 석씨 집안으로 옮겨간다. 왕의 성씨가 여러 차례 달라지는데도 별다른 마찰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기 왕계로 미루어보면 기원후 2세기까지도 신라는 건국 당시의 이주민 국가적 성격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건국한 지 무려 200년이 넘어설 무렵에도 왕계가 고정되지 못했다면 사실 국가라고 보기에도 수준 미달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신라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의 노력(?) 덕분에 적어도 200년은 길어졌..
세 편의 건국신화 외래인 집단이 많았으니 신라의 초기 왕계가 일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왕이라는 직함의 명칭부터 혼란스럽다. 건국자인 박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을 칭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아들 남해왕(南解王, 재위 기원후 4~24)은 차차웅(次次雄)이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 이렇게 거서간과 차차웅을 한 명씩 배출한 뒤 그 다음 신라 왕들은 이사금(尼師今)이라는 직함을 가진다. 이사금이 4세기의 16대 흘해왕까지 약 300년간 사용되면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다음의 내물왕(奈勿王)부터 22대 지증왕까지는 또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쓴다. ‘왕’이라는 중국식 명칭을 쓰는 것은 6세기 초반의 지증왕 때부터다(여기서는 그 이전의 시기라 하더라도 간편하게 그냥 왕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이주민 국가 고구려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신라의 경우에도 나라가 있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신화에서 보았듯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여섯 마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그 지역의 원주민은 아니다. 『삼국사기』의 맨 첫머리에는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 와서 여섯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되어 있다. 이 점은 신라라는 국가의 독특한 성격을 암시한다. 우선 앞에서 보았듯이 건국신화도 독특하다. 신화적 성격이 유달리 강할뿐더러 같은 계통에서 출발한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와는, 의도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관련을 두지 않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 역사적인 요소만을 추출하면, 신라의 건국은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
포위 속의 생존 지금까지 살펴본 고구려 초기사에서도 연대나 사실에서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나마 고구려의 경우는 한결 나은 편이다. 한반도 중남부로 오면 상고사를 가리고 있는 안개층은 더욱 두터워진다. 왜 그런지는 알기 쉽다. 전등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흐려지듯이 중국 문명권에서 먼 중남부는 반도 북부보다 문명의 빛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부의 고구려와 낙랑이 동방으로 오는 문명의 빛을 흡수, 차단하고 있는 탓에 북부의 정세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 빛이 남부에까지 퍼질 수 없는 형편이다(그래서 백제와 신라의 역사가 선명해지는 시기는 고구려가 반도 북부의 확고한 패자로 떠오르는 4세기부터다). 하지만 지금 우리로서는 안개가 있으면 있는 대로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가 나라 꼴을 갖추는 2세기 말..
물보다 흐린 피 일단 신대왕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이 계승해서 왕위계승의 문제는 진정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왕위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고국천왕의 동생들에게도 과연 부자 상속의 의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말해주는 주요한 제도를 하나 보고 넘어가자. 우리에게 고국천왕은 진대법(賑貸法)이라는 획기적인 제도로 잘 알려져 있다. 194년에 처음 시행된 진대법은 사실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의 작품이지만, 원래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업적은 그 왕의 치적으로 기록되게 마련이니(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래 재위한 지배자는 거의 대부분 치적도 많다) 고국천왕의 업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을..
고구려의 성장통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정복군주였던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사실 대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신생국 고구려를 크게 업그레이드한 왕이다. 특히 좌보와 우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한 것은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위상을 지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다(좌보와 우보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인 대보大輔가 분리된 것인데, 조선시대의 좌의정과 우의정이라고 보면 된다). 왕이 전권을 가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모든 국사를 홀로 처리한다면 그것은 왕이 아니라 부족장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에는 대가(한자로는 ‘大加’라고 쓰지만 당시에 어떻게 발음했을지는 확실치 않다)라는 씨족장들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 중앙집권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므로 관직이 분화된 것은 초보적인 관료제로의 발돋움..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 앞서 고조선이 멸망하면서부터 한반도 역사는 독자적 정체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중국 역사와의 관련성도 한층 커지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고대 삼국이 신화로나마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달라진 덕택이 크다. 어떤 변화일까?) 한4군을 설치한 무제의 시대는 한나라의 최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이기도 하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이것은 중국 역대 왕조들의 기본 코스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은 건국한 뒤 초기에는 불안정하게 유지되다가 50년쯤 지날 무렵에 유능한 황제(이를테면 한 무제, 당 태종, 명나라의 영락제)가 등장해서 기틀을 잡고는 곧바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 200여 년쯤 더 지나면 멸망하는 게 공식이다. 그 점에서도 한나라..
새 역사의 출발점 시대가 달라졌으니 새 출발점이 필요하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대를 열었듯이 이제 한반도 역사의 새 시작을 맞아 새로운 건국신화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중국 측 사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삼국사기』에 ‘주몽(朱蒙)’으로 표기되어 있어 주몽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이 발음과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주몽의 이름은 그 밖에도 추모(鄒牟)ㆍ상해(象解)ㆍ추몽(鄒蒙)ㆍ중모(中牟)ㆍ중모(仲牟)ㆍ도모(都牟) 등으로 다양한데, 고구려 시대에는 한자의 음만 따서 발음을 표기하는 이두문을 썼다. 하지만 그 이름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추모’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광개토왕릉비에 ‘추모(鄒牟)’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건국시조 이름을 소홀히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
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신화로 시작해서 역사를 남긴 고조선과 함께 한반도 역사의 가장 초기 시대도 끝났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뭉뚱그려 고조선 시대라고 부르는 데, 어떤 면에서는 달리 이름을 지어 붙일 만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조선이 우리 역사에 남긴 흔적은 상당히 뚜렷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은 언제 있었다 사라졌나 싶을 만큼 자취가 묘연하다. 더구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은 고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문명적 연속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단군이라는 상징적인 시조..
지배인가, 전파인가 어차피 한나라 초기의 권력 공백을 틈타 성립한 나라였기에, 위만조선은 처음부터 한시적 수명밖에 누리지 못할 운명이었다. 언제라도 제국이 안정된 기반 위에 오르면 동북 변방에 위치한 위만조선은 즉각 제국의 토벌 대상이 되리라. 과연 한 무제는 흉노를 멀리 내쫓은 다음 곧바로 동북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에게 고조선은 천자에 대한 충성을 팽개치고 반기를 든 나라일 뿐 아니라 랴오둥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부근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얄미운 존재였으며, 자칫 흉노의 잔당과 결합한다면 간신히 꺼놓은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골칫거리였다. 이윽고 한 무제는 칼을 뽑았다. 기원전 109년 그는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고조선 정벌을 명한다. 한 갈래는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통해,..
중국과의 접촉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진나라의 시황제였지만 진은 불과 14년 만에 멸망하고, 유방(劉邦)의 한(漢)나라가 항우의 초(楚)나라를 물리치고 새로운 통일 제국을 열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국 최초의 제국은 한나라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었다지만 아직 신생 제국의 힘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크게 확장된 넓은 대륙을 직접 통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고조 유방은 기존의 제후 세력들에게 복종과 충성을 서약받고 봉토를 주어 다스리게 한다. 이 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중국식 봉건제(封建制)의 원형이 만들어진 셈이다(유방보다 더욱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시황제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한 바 있다). 이 새로운 체제하에서 제후들은 황제인 천..
두 번째 지배집단 기자는 원래 중국 은나라의 신하였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역사상 유명한 폭군이다(원래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실제와 무관하게 폭군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이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난잡한 파티를 뜻하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을까? 그런 자에게 충신의 말이 통할 리 없다. 기자는 주왕에게 충언을 했다가 그만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힌다. 그러나 결국 무왕(武王)의 쿠데타로 은나라가 무너지자 기자도 석방되었다. 새로 주나라의 문을 연 무왕은 은나라의 정치범인 기자를 어떻게 대했을까? 당시 기자는 높은 경륜과 뛰어난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아마 무왕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
누락된 시대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잡는다면 그 후 한반도 역사에는 상당히 긴 누락 기간이 생기게 된다. 서력기원으로 셈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알려져 있다(후대에 문헌상으로 추정한 연대인데, 오늘날 우리 역사를 ‘반만 년 역사’라고 부르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 시기는 중국의 오제(五帝) 가운데 요(堯) 임금 시대에 해당한다. 물론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기원전 2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은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어쨌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그 연대로 가정하고 역사를 추적해보자. 고조선이 세워진 이후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사뭇 달라진다. 중국의 경우 요와 순 임금으로 신화적인 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 임금이 하나라를 열어 왕조 시대를 시작하며..
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조(始祖)를 둔 민족만큼 부러운 게 또 있으랴? 시조가 있으면 민족의 기원과 역사의 시작이 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분명한 시작은 역사가들에게 의지할 만한 출발점을 주지만, 그와 더불어 커다란 숙제도 안겨준다. 출발점 자체를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는 미궁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기원의 역사』 중에서 우리 역사는 처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단군(檀君)이라는 민족의 시조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를 봐도 우리 역사만큼 시조가 분명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단군은 시조보다 국조(國祖)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시조에 해당하는 존재는 흔히 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시조들은 거의 모두 인간..
1부 깨어나는 역사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쯤 단군이라는 외래인 집단이 한반도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고조선을 세우면서 역사의 문이 열린다. 이후 2천 년 동안 한반도 문명권은 조금씩 신화에서 탈피하는 한편 중국사와 접촉하는 것을 계기로 ‘알려진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중화 문명권의 변방으로 출발한 한반도는 중심인 중국 한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시기를 맞아 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그것이 삼국시대의 시작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사람과 땅 우리의 교육 과정에는 국사(國史)라는 과목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역사에는 국적이라는 게 없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따라서 ‘국사’ 즉 ‘national history’라는 것은 없고 그냥 ‘history’만 있다. 최초의 역사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역사』라는 책을 쓸 때부터 역사란 ‘지나간 이야기’라는 뜻일 뿐 특정한 국경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사나 프랑스사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 경우 영국이나 프랑스는 나라 이름이라기보다는 땅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뜻에 가깝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국사..
책 머리에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역사라는 말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다’는 부정적인 반응,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미있는 교양 지식’이라는 긍정적인 반응. 서로 정반대 평가지만 둘 다 옳다. 역사란 옛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다루는 것이니,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역사는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골치 아픈 인문학에 비해 그래도 쉽고 만만해 보이니, 학문 중에서는 그래도 재미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 입장 모두 옳지 않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으니, 역사란 실상 오늘의 모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사실 오늘의 일도 내일이면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역사..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깊으면 좁아지고 넓으면 얕아지게 마련이다. 그럼 깊으면서도 넓을 수는 없을까? 16년 전 종횡무진 시리즈를 시작할 때부터 늘 나를 괴롭혀온 질문이다.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이 시리즈는 전문가용 학술서가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를 위한 대중서다. 하지만 넓어지면 얕아진다는 대중서의 ‘숙명’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반 대중서에는 없는 요소들을 과감히 끌어들였다. 구어적인 서술 방식이라든가 빠른 진행은 대중서 특유의 생동감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였지만, 대담한 사건 연결이나 인물 비교는 역사 교과서나 대중서에서 볼 수 없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결과였다.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함흥차사(咸興差使) 심부름 간 사람이 오질 않는다 芳碩變後, 太祖棄位, 奔于咸興. 太宗屢遣中使, 問安, 太祖輒彎弓而待之, 前後相望之使, 未敢道達其情. 時問安使, 無一得還者. 太宗問: “群臣誰可遣?” 莫有應之者, 判承樞府事朴淳, 挺身請行. 『축수편(逐睡篇)』 太祖晩年, 有豐沛之戀, 禪位世子, 行北闕, 不肯回鑾. 朝廷每請奉還, 而不得請. 前後使者十輩, 皆不得還, 此所謂咸興差使也. 判承樞朴淳, 慷慨請行, 至咸興. 遙望行宮, 故以子馬繫于樹, 騎母馬而行, 馬回顧躑躅不能進. 及上謁, 淳上王布衣交也, 懽然道故款待. 仍問曰: “繫子馬于樹, 何也?” 對曰“ ”妨於行路, 故繫之, 則母子不忍相離. 雖微物, 亦至情也.” 固涕淚嗚咽, 上王亦汪然感涕. 一日與淳局戱, 適有鼠啣子, 墮屋至死, 不相捨. 淳復推局, 伏地而泣, 上王戚然,..
문체반정과 열하일기 정리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10년, 109~145쪽 1. 문체반정의 전개 1784년 - 정조, 명청 문집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이래의 문장은 많이 험하고 괴상하며 가시가 돋쳐 신랄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명청인의 문집 보길 좋아하니,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찌 또한 문장의 맛이 있으나 내가 그것을 맛볼 수가 없는 건가? 明淸以來, 文章多險怪尖酸, 予不欲觀. 今人好看明淸人文集, 不知何所味也. 豈亦有味, 而予不能味之耶? -『弘齋全書』 161 1. 정조의 눈에 소품체, 소설 등의 문체가 들어가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행함. 2. ‘내가 그것을 맛볼 수가 없는 건가?’라는 말을 통..
사화(士禍) 정리 1.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시기 내용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는 글을 남김(세조의 찬탈 비방) 결과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사림파 수십 명을 형벌에 처함. 2.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 시기 내용 성종 후궁으로 왕비가 된 어머니 윤씨가 모함으로 폐비가 되어 죽게 된 사실을 알게 됨. 결과 폐비 윤씨를 쫓아내는데 일조한 신하를 모조리 죽임. 중종반정(中宗反正) 난폭해진 연산군에 훈구파도 위기감을 느껴 이복동생을 왕위에 앉힘. 3.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시기 내용 기를 펴지 못하는 중종도 조광조의 개혁노선(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을 좋아했으나 남곤ㆍ심정 등이 역모한다고 모함함. 결과 조광조를 따르는 사림파를 잡아 귀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