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돌베개 (164)
건빵이랑 놀자
우리 한시를 읽다 목차 이종묵(李鍾默)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정조 - 綱目講義 湘素雜記 - 推敲 이규보 - 驅詩魔文 이황 - 陶山十二曲跋 이종묵 - 16~17세기 한시사 연구 1.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맛 을지문덕 - 與隋將于仲文 정법사 - 詠孤石 고운 - 十二乘船渡海來 / 최치원 - 巫峽重峯之歲 최치원 - 秋夜雨中 이백 - 獨坐敬亭山 도연명 - 詠貧士 최치원 - 題伽倻山讀書堂 김종직 - 紅流洞 홍만종 – 소화시평 상권65 황정욱 - 送人赴遂安郡 2. 잘 빚은 항아리와 잘 짜인 시 김지장 - 送童子下山 정법사 - 詠孤石 박인량 - 使宋過泗州龜山寺 박인범 - 徑州龍朔寺 정지상 - 開聖寺 八尺房 정지상 - 題邊山蘇來寺 최치원 - 登潤州慈和寺 김부식 - 觀瀾寺樓 惠文 - 普賢院 3. 시 속에 울려 ..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① 시의 본령은 아름다움이며 음풍농월이다 (정조의 『강목강의(綱目講義)』) 정조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절목(資治通鑑綱目)』을 열람하고 그 가운데 의문스러운 것들을 뽑아 문목(問目)을 만들었는데, 모두 695개 항목이었다. 그것을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한 사람이 각기 한 항목씩 조목별로 답을 짓도록 하고, 다시 초계문신(抄啟文臣) 심진현(沈晉賢) 등에게 답한 말을 산삭(산삭)하고 요약하여 문목 밑에 붙여 책자로 만들게 한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5年 5月 3日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가 되고, 산과 천과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가 되니, 글에도 무늬가 있음이 또한 그러하다. 반드시 씻어내고 닦아 윤택하게 하며 환하게 노출시키며, 찬란하게 드..
과정록(過庭錄) 목차 1권 꿈에 붓을 얻다 자서 1 2 3 4 5 6연암의 성향을 걱정한 장인 이보천 7 8 9 10 11 12 13 14 15과거급제엔 전혀 관심도 없어라 16어렵게 금강산에 가다 연암이 지은 총석정시를 보고 놀란 홍상한叢石亭觀日出17 18 19 20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모시다 21 22급제시키려는 사람들과 피해 다니는 연암 23‘연암’으로 자호를 삼은 사연 24 25돈독한 친구 홍대용 손기술이 뛰어난 석치와 토론을 밤새도록 했던 무관ㆍ혜풍ㆍ재선과 제일 아낀 강산26 27음악을 좋아한 연암ㆍ담헌ㆍ효효재ㆍ풍무자「伐木」28 29 30권력자 홍국영을 거슬러 연암으로 피하다 31학문의 즐거움을 연암협에서 전수하다 32 33 34아버지의 세초된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 35홍국영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11. 윤음을 멋대로 유포하는 사람에게 충고하다 丙申冬, 先君適在鄕舍, 有鄕人士來謁曰: “有綸音行京洛, 故錄來耳.” 出諸袖中以進之, 先君覽其首語數行, 還與其人, 而誡之曰: “子是鄕人也. 儻有朝綸, 早晚自縣道頒布, 得而讀之, 可矣. 私錄公家文字, 流布鄕曲, 出入京洛, 傳說京洛音耗, 此亂民之事, 切不可爲也.” 其人憮然而去. 未幾, 有僞綸音傳布之獄, 上親鞫, 株連甚衆. 해석 丙申冬, 先君適在鄕舍, 병신(1776)년 겨울에 선군은 마침 시골집에 계셨는데 有鄕人士來謁曰: “有綸音行京洛, 故錄來耳.” 시골 선비가 뵈고서 “서울에서 배포된 윤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하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出諸袖中以進之, 先君覽其首語數行, 소매에서 꺼내 드리자 선군께선 첫 몇 줄을 보시고 還與其人, 而誡之曰: 다시 그 사람에게 ..
10. 선경지명으로 사람을 꿰뚫어 보다 先君先見之明, 往往有出人意表者. 少時, 在遺安公座, 有一姻婭人, 來拜而去. 先君曰: “噫! 某其死矣.” 公正色曰: “何其言之易也?” 後數日, 果死而訃至, 公呼先君曰: “君何以知某之死也?” 先君曰: “疇昔, 見其進止, 形與神已離矣.” 해석 先君先見之明, 往往有出人意表者. 선군께선 선견지명이 있어 이따금 사람의 의표를 벗어나는 생각이 있으셨다. 少時, 在遺安公座, 어렸을 적에 유안공 이보천의 집에 계실 적에 有一姻婭人, 來拜而去. 친척 한 사람이 와서 절을 하고 떠나갔다. 先君曰: “噫! 某其死矣.” 그러자 아버지는 “아! 아무개가 죽겠는데요.”라고 말했다. 公正色曰: “何其言之易也?” 유안공은 정색하며 “어째서 말을 쉽게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後數日, 果死而訃至..
9. 처남 이재성에 대한 평가 先君嘗言: “芝溪之文, 沉容典則, 不露鋒穎. 少時多讀『戴記』所致, 若與吾文, 性不相契合, 而其於論文, 有隻眼, 能知古人苦心處.” 每一篇出, 必曰: “爲我評隲之.” 芝溪公嘗曰: “燕岩筆力雄强, 識致精到, 近代諸作家, 所未有也.” 半生一室, 有偲怡ㆍ塤篪之樂, 論文知心, 一人而已. 해석 先君嘗言: “芝溪之文, 선군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지계공 이재성의 문장은 沉容典則, 不露鋒穎. 침착하고 용의주도하며 법칙이 있지만 자기의 생각은 붓끝으로 드러나질 않는다. 少時多讀『戴記』所致, 어렸을 적에 대부분 『예기』를 읽은 것이 지극했던 것이니 若與吾文, 性不相契合, 나의 문장과는 성격이 서로가 맞지가 않다. 而其於論文, 有隻眼, 그러나 문장을 논한 것에 있어선 식견이 있어 能知古人苦心..
8. 글을 쓸 때의 모습과 다 쓴 후의 모습 先君之爲文也, 每遇題締構, 輒專心致思. 苟於自己議論有未契者, 雖先儒斷論, 亦不欲阿隨苟同. 必用烏絲欄紙, 操筆淨書, 點畫不草率. 其有字句, 當塗改處, 雖篇將垂畢, 必從頭更寫, 易藁而新之. 每一篇出, 便可編入★弓+二縛. 不若此則如病在躳, 雖在忙遽中, 亦然. 해석 先君之爲文也, 每遇題締構, 선군께서 글을 지으려 매번 제목을 짓는 순간에 마주치거나 구성을 엮으려는 순간엔 輒專心致思. 갑자기 마음을 전일하게 하셨고 생각을 집중하셨다. 苟於自己議論有未契者, 만약 자기의 의견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게 있다면 雖先儒斷論, 비록 선배 유학자들의 확고한 논리가 있더라도 亦不欲阿隨苟同. 또한 아부하며 따르거나 구차하게 같아지려 하진 않으셨다. 必用烏絲欄紙, 操筆淨書, 반드시 오사..
7. 남보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연암 先君看書甚遲, 日不過一卷書. 常曰: “吾記性甚短, 每看書, 掩卷卽忘, 胸中茫然, 若無一字. 至或臨事處宜, 或命題構思, 始也頭頭現出, 終焉森森羅布. 古人往蹟及先輩格言之襯當於目前情境者, 有左右逢原, 不可勝用之意.” 芝溪公嘗言: “燕岩看書甚遲, 我下三四板之頃, 僅下一板. 且其記誦之才, 若差損於我, 而至如上下商論, 較絜長短, 則有如酷吏斷獄, 無微不勘. 始知公之遲看, 蓋有所究竟到底者故耳.” 해석 先君看書甚遲, 日不過一卷書. 선군께선 책을 보는 속도가 매우 느려 하루에 한 권의 책도 채 읽지 못하셨다. 常曰: “吾記性甚短, 每看書, 항상 말씀하셨다. “나의 기억력은 매우 짧아 매번 책을 보다가 掩卷卽忘, 胸中茫然, 若無一字.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려 머릿속에 아득히 한 글자도..
5. 「주공탑명」에 대한 여러 사람의 이현령비현령 先君少時, 著有「麈公墖銘」, 輩行金公魯永讀之曰: “此至精之文.” 遂記誦焉, 每凉宵晴朝, 輒朗咏一過. 後內從李正履爲余言: “近者更讀「麈公墖」, 得知其爲闢佛文字, 金公所云至精之文, 深得旨意也.” 不肖每聽人論此篇, 未嘗有此解. 一日示一老衲, 老衲一讀, 便憮然曰: “是乃闢佛文.” 해석 先君少時, 著有「麈公墖銘」, 선군께선 어렸을 적에 「주공탑명」을 저술한 적이 있는데 輩行金公魯永讀之曰: “此至精之文.” 일행인 김노영이 이것을 읽고 “이것은 지극히 정밀한 문장이다.”라고 말했다. 遂記誦焉, 每凉宵晴朝, 마침내 기억하고 암송하며 매일 서늘한 밤이 갠 아침에 輒朗咏一過. 갑자기 낭낭하게 한 번 지나치듯 읊조렸다. 後內從李正履爲余言: 훗날 사촌인 이정리가 나를 위해서 ..
4. 초년과 중년과 만년의 문장 차이 先君初年得力, 專在於『孟子』ㆍ『馬史』. 故氣槩之發越於文章者, 可知其根基之所在也. 至如『左』ㆍ『國』ㆍ韓ㆍ歐, 亦嘗心摹手追, 深得其神理義法. 中年以後, 脫畧世網, 隱居ㆍ遠遊, 往往寓言諧笑遊戱之作, 出入『莊』ㆍ『佛』二家者有之. 晚年最好賈陸奏議之文ㆍ朱子論事之書, 公私書牘多出於此, 此先君文章初晚之別也. 해석 先君初年得力, 專在於『孟子』ㆍ『馬史』. 선군께서는 초년에 힘을 얻음이 온전히 『맹자』와 『사기』에서 있었다. 故氣槩之發越於文章者, 그러므로 기의 뼈대가 문장에서 발산되어 초월하는 것은 可知其根基之所在也. 근본이 있는 것임을 알 만하다. 至如『左』ㆍ『國』ㆍ韓ㆍ歐, 『좌전』과 『국어』와 한유와 구양수의 경우에 이르러서 亦嘗心摹手追, 또한 일찍이 마음으로 모방하고 손으로 따라 ..
3-2. 시대적 옳음을 담아내는 글을 써라 嘗言: “惟忠武侯, 識其大者. 爲文之道, 亦貴乎識其大者.” 해석 嘗言: “惟忠武侯, 識其大者. 일찍이 선군께선 말씀하셨다. “오직 충무후 제갈량은 큰 도를 아는 사람이었으니 爲文之道, 亦貴乎識其大者.” 글을 짓는 방법이란 또한 그 큰 도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인용 목차
3-1. 옛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글짓는 자세 차이 嘗言: “今人學八家文, 不能得其神理, 徒習粗跡. 凡作一篇文字, 其起伏照應, 關鎖結尾, 務要歷歷, 分明模索, 可知其工者爲之, 已不足喜. 況拙者, 只得以字眼彌縫, 尤無足論矣. 古人有許大心胸, 許大學問, 發言吐辭, 只要明鬯典雅, 不是用意安排, 而自然有成章之妙. 後來批評家, 段分句析, 挑出層節, 不害爲拈示古人精神注處, 俾初學之士有所開發. 但謂古人操䉉臨紙, 胸中先具此一篇排鋪, 則不可. 學古文者, 當求自然層節. 生出在自家文字, 不宜竊古人言語去, 塡寫格子上耳. 難易之分, 於是乎在, 而眞贋之辨, 隨而定焉. 留下一副格子, 千篇萬篇, 一範榻出者, 其唯今人科體文字乎!” ▲ 김홍도의 [화첩평생도] 중 '소과응시' 부분이다. 해석 嘗言: “今人學八家文, 선군께선 일찍이 말씀..
33-2. 야만스러움을 변화시키려는 사람 時有客在松園金公座, 談胡服之說. 金公遽曰: “君曾見綰髻之胡乎?” 曰: “未也. 胡辮.” 金公又曰: “曾見衣純之胡乎?” 曰: “胡衣無純.” 金公曰: “吾聞燕岩衣玄純之衣, 印童皆令解辮綰髻. 然則, 燕岩用夏變胡者也.” 해석 時有客在松園金公座, 談胡服之說. 당시 손님 중 송원 김이도의 댁에 있던 사람은 ‘호복임민(胡服臨民)’의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金公遽曰: “君曾見綰髻之胡乎?” 김공이 갑자기 “그대는 일찍이 관을 쓰고 상투를 튼 오랑캐를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曰: “未也. 胡辮.” 그러자 손님이 “아닙니다. 오랑캐는 변발을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金公又曰: “曾見衣純之胡乎?” 김공이 또한 “일찍이 옷에 가선을 두른 오랑캐를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曰: “胡衣無..
33-1. 안의에 있을 때 ‘오랑캐를 따른다’는 비난을 받다 1. 몽고의 풍속을 바로잡았지만 비난을 사다 先君嘗病吾東婦人服飾及童子辮髮專襲蒙古. 盖高麗忠宣王, 自元而歸也, 效其俗, 辮髮而出. 當時士大夫郊迎者, 皆飮泣不忍見. 其後國俗因襲不改, 流弊至今. 吾東雖嚴於尊攘, 而此等陋俗, 恬不知恥. 及宰安義, 義乃桐溪鄭先生之鄕也. 先生之斥和歸鄕也, 童子皆令解辮雙髻. 尤菴先生之居巴串也, 亦用此制, 盖深痛一世之不復識華制也. 又其鄕之賢士劉君處一, 遵林葛川ㆍ盧玉溪之所嘗被服者, 倣朱子野服, 爲素衣玄純之制, 先君愛其高雅, 荷堂竹館, 時或以燕居焉, 知印童子之辮髮者, 皆令解而丱之. 不肖亦以四袿雙丱髻, 侍側焉, 皆先君好古曠惑之意. 而鄰宰過客, 皆瞠其駭俗也. 且荷堂甎築, 亦涉刱見, 或戲問曰: “此皆胡制歟?” 先君哂鹵莽也, 而不與辨...
1. 몽고의 풍속을 바로잡았지만 비난을 사다 先君嘗病吾東婦人服飾及童子辮髮專襲蒙古. 盖高麗忠宣王, 自元而歸也, 效其俗, 辮髮而出. 當時士大夫郊迎者, 皆飮泣不忍見. 其後國俗因襲不改, 流弊至今. 吾東雖嚴於尊攘, 而此等陋俗, 恬不知恥. 及宰安義, 義乃桐溪鄭先生之鄕也. 先生之斥和歸鄕也, 童子皆令解辮雙髻. 尤菴先生之居巴串也, 亦用此制, 盖深痛一世之不復識華制也. 又其鄕之賢士劉君處一, 遵林葛川ㆍ盧玉溪之所嘗被服者, 倣朱子野服, 爲素衣玄純之制, 先君愛其高雅, 荷堂竹館, 時或以燕居焉, 知印童子之辮髮者, 皆令解而丱之. 不肖亦以四袿雙丱髻, 侍側焉, 皆先君好古曠惑之意. 而鄰宰過客, 皆瞠其駭俗也. 且荷堂甎築, 亦涉刱見, 或戲問曰: “此皆胡制歟?” 先君哂鹵莽也, 而不與辨. 해석 先君嘗病吾東婦人服飾及童子辮髮專襲蒙古. 선군께서 일찍이 ..
32-1. 박지원을 불편하게 여긴 정조 1. 순정한 글을 지어 올리라고 분부하다 時上以文風不古, 屢下嚴旨. 詞垣諸臣, 皆有訟愆之作. 一日上下敎于直閣南公轍曰: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熱河日記』, 予旣熟覽, 焉敢欺隱? 『日記』行世後, 文體如此, 自當使結者解之. 斯速著一部純正之書, 卽爲上送, 以贖『日記』之罪, 雖南行文任, 豈有可惜者乎? 不然則當有重罪, 須以此意, 卽爲貽書.” 南公書畧曰: “此實出於我聖上敦世敎ㆍ振文向ㆍ正士趨之苦心至德, 敢不對揚其萬一? 况執事則其在訟愆贖罪之道, 尤不容暫緩”云云. ⇒해석보기 2. 주상의 분부에 답한 내용 先君答書畧曰: “天地之大, 無物不育, 日月之明, 無微不燭, 豈意兎園之遺册, 上汚龍墀之淸塵哉? 疎野一个之賤, 而恩敎無間於近密. 不惟不加以兩觀熒惑之誅, 乃反命贖其一部純正之書,..
4. 글을 지으란 하교를 어기는 이유 時在衙諸文士, 皆欣踊. 操管札攤書卷, 將以替勞草寫及攷證之事. 先君語之曰: “上之此敎, 固曠絕恩眷也. 上方以此爲罪, 其在臣分, 惟當受而爲罪, 可也. 安有荷譴之蹤, 作爲文字, 自許純正, 要掩前愆? 且况以文任二字, 開其自新之路, 若因此揚揚著作進呈, 則此希覬也. 希覬, 人臣之大罪也. 不復以著進爲計畧, 選著作若干篇, 幷南中所著幾篇, 作數卷册子, 若更有俯索之敎, 將以黽勉承膺, 粗伸臣分而已.” 해석 時在衙諸文士, 皆欣踊. 당시 안의현에 있던 선비들이 모두 기뻐하며 뛰었다. 操管札攤書卷, 將以替勞草寫及攷證之事. 붓을 잡고 책을 펼쳐 장차 대신하여 베껴 쓰거나 고증하는 일을 하려 했었다. 先君語之曰: 선군께서 말씀하셨다. “上之此敎, 固曠絕恩眷也. “주상이 이번 하교는 참으로 전에도..
3. 순정한 글을 쓰라는 편지가 쇄도하다 先是, 上進覽『武藝圖譜通志』, 指李德懋著「禦倭」諸論, 敎曰: “諸篇皆圓好.” 又敎曰: “此燕岩體也.” 是以京中諸公, 皆以爲: “此實非怒之敎, 將有格外異數. 且聖敎中, 歷數諸人之愆, 而特擧朴某爲罪魁者, 乃大聖人抑而進之, 推任文權之意. 又况擧『熱河日記』爲眞贓, 而加以熟覽字以寵之乎! 是必有一部文字趁早撰進.” 皆書勸其著作, 芝溪公書畧曰: “執事之文, 筆力高强, 而用字則不甚矜古, 何嘗是明淸小品? 特其典則之作, 人未嘗見, 而『日記』盛行一世故耳. 盖其不自珍惜, 放倒不矜重, 則有之矣, 何嘗纖靡委弱如近時諸人之爲耶? 若曰: ‘學執事而文風至此’ 則誠冤矣. 愚意則就『日記』中, 揀別其一分詼氣而去之, 則此便是純正之書”云云. 해석 先是, 上進覽『武藝圖譜通志』, 이에 앞서 주상께서 『무예도보..
2. 주상의 분부에 답한 내용 先君答書畧曰: “天地之大, 無物不育, 日月之明, 無微不燭, 豈意兎園之遺册, 上汚龍墀之淸塵哉? 疎野一个之賤, 而恩敎無間於近密. 不惟不加以兩觀熒惑之誅, 乃反命贖其一部純正之書, 蟣蝨賤臣, 何以得此? 僕中年以來, 落拓潦倒, 不自貴重, 以文爲戱, 有時窮愁無聊之發, 無非駁襍無實之語. 性又懶散, 不善收檢, 旣自誤而誤人, 或以訛而傳訛. 文風由是而不振, 士習由是而日頹, 則是固傷化之災民, 文苑之棄物也, 得兎憲章, 亦云幸矣. 究厥本情, 雖伎倆之所使, 是誠何心? 自楚撻而爲記, 敢不亟圖黥刖之補, 無復作聖世之辜民也”云云. 해석 先君答書畧曰: “天地之大, 無物不育, 선군께서 답한 편지는 대략 이렇다. “천지가 커서 사물마다 기르지 않은 게 없고 日月之明, 無微不燭, 해와 달아 밝아 미물이라도 밝히지 ..
1. 순정한 글을 지어 올리라고 분부하다 時上以文風不古, 屢下嚴旨. 詞垣諸臣, 皆有訟愆之作. 一日上下敎于直閣南公轍曰: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熱河日記』, 予旣熟覽, 焉敢欺隱? 『日記』行世後, 文體如此, 自當使結者解之. 斯速著一部純正之書, 卽爲上送, 以贖『日記』之罪, 雖南行文任, 豈有可惜者乎? 不然則當有重罪, 須以此意, 卽爲貽書.” 南公書畧曰: “此實出於我聖上敦世敎ㆍ振文向ㆍ正士趨之苦心至德, 敢不對揚其萬一? 况執事則其在訟愆贖罪之道, 尤不容暫緩”云云. 해석 時上以文風不古, 屢下嚴旨. 당시에 주상께서 문풍이 예스럽지 못하다고 여겨 자주 엄한 교지를 내리셨다. 詞垣諸臣, 皆有訟愆之作. 한림원의 뭇 신하들은 모두 잘못을 다스려 바로잡는 글을 지어야 했다. 一日上下敎于直閣南公轍曰: 하루는 주상께서 직각 남..
2-2. 고문은 그 당시엔 금문이었다 又曰: “古人爲文, 在當時, 何嘗義奥而旨微耶? 『書』之「典」ㆍ「謨」, 『詩』之「風」ㆍ「雅」, 『易』之「彖」ㆍ「象」, 『春秋』諸傳, 卽當時之今文, 人皆曉之, 後來世彌降而義漸晦, 所以有傳箋註疏也. 今人不知此義, 必模擬依樣, 强作險澀之態, 自以爲簡古也, 可笑哉! 若使他人讀自家文, 便費自家註釋, 將焉用是文爲哉?” 해석 又曰: “古人爲文, 선군께서 또 말씀하셨다. 옛 사람이 지은 문장이 在當時, 何嘗義奥而旨微耶? 당시대에 있었지 어찌 일찍이 뜻이 심오하고 내용이 미세한 데 있었던가? 『書』之「典」ㆍ「謨」, 『詩』之「風」ㆍ「雅」, 『서경』의 「요전(堯典)」과 「대우모(大禹謨)」, 『시경』의 「풍」과 「아」와 『易』之「彖」ㆍ「象」, 『春秋』諸傳, 『주역』의 「괘사」와 「효사」, ..
2-1. 지금 사람이 지은 비지문은 너무 진부하다 先君又嘗言: “吾於文無他長, 惟紀事狀物之才, 稍勝於今人. 今人碑誌之作, 大抵多印板例套, 一篇之作, 可移用於人人. 而其人之神精典型, 從何想見? 此三淵翁所謂: ‘東人文集, 如人家哭婢聲’者, 是也. 古人所謂: ‘貌圓方寫, 貌長短寫’者, 馬傳韓碑所以可讀, 而今人不知此義. 但取累累滿紙陳談死句曰: ‘如此然後, 可謂典實.’ 吾不知此爲何許文法.” 해석 先君又嘗言: “吾於文無他長, 선군께서는 또한 일찍이 말씀하셨다. “나는 글에 대하여 다른 장점은 없지만 惟紀事狀物之才, 稍勝於今人. 오직 사태를 기술하고 사물을 형상하는 재주는 조금 지금 사람보다 낫다. 今人碑誌之作, 大抵多印板例套, 지금 사람의 묘지명 작품은 대체로 많이들 판을 찍어낸 듯 상례(常例)되어 진부하기만 해서..
36. 음악을 좋아했지만 악기를 없애버린 사연, 안의현을 음악고을로 만든 사연 家中舊有笙琴諸器, 或風舞輩來, 使之彈吹. 及哭湛軒, 遂有絃斷之悲, 不復入耳也. 後五年, 偶過湛軒宅, 歸而忽愴然, 竝散其器以與人. 是以不肖幼時, 未得見匏絃之屬. 及宰安義也曰: “山水旣絶勝, 且時屬昇平, 宜有以賁飾之.” 適有梨園老樂師流落嶠南者, 召而廩置之, 使敎習工伎歌樂數月間, 並傳京腔, 時稱此邑絲管爲一道最. 해석 家中舊有笙琴諸器, 집 안엔 오래된 생황과 거문고 등의 악기들이 있어 或風舞輩來, 使之彈吹. 간혹 풍무 김억의 무리들이 오면 그들에게 연주하게 했다. 及哭湛軒, 遂有絃斷之悲, 담헌이 돌아가시자 마침내 거문고 줄을 끊는 슬픔이 있어 不復入耳也. 다시 귀로 듣지 않으셨다. 後五年, 偶過湛軒宅, 5년이 지나 우연히 담헌의 집을..
31. 안의현에서의 치적과 연회에 관심 갖던 정조 時上嘗語閣臣某曰: “朴某平生無一畝之宅, 流離栖屑於窮鄕江干, 今白首一麾, 宜若汲汲於求田問舍, 而聞構亭鑿池, 邀致文酒之朋於千里之外, 文人事, 信是不俗, 難矣哉! 且聞其吏治極善.” 後數日, 敎朴齊家曰: “朴某之邑, 文人多往遊, 而汝獨縻公不能往, 宜有向隅之歎. 乞暇一往, 可也.” 齊家遂承命來會, 誦致前後恩敎如此. 해석 時上嘗語閣臣某曰: 이때에 임금께서 일찍이 각신 아무개에게 말씀하셨다. “朴某平生無一畝之宅, 流離栖屑於窮鄕江干, “박지원은 평생 한 넓이의 집도 없이 궁벽한 시골이나 강가에서 유리걸식하며 살다가 今白首一麾, 宜若汲汲於求田問舍, 이제 늙어서야 한 번 고을수령이 되었지만 마땅히 밭과 집에 대한 일에만 급급할 것이다. 而聞構亭鑿池, 邀致文酒之朋於千里之外,..
29. 안의현감이 되어 친구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열다 邀芝溪公及金公箕懋光瑞ㆍ李甥鍾穆維肅ㆍ李甥謙秀益之, 以爲溪山文酒之遊. 及癸丑春, 倣蘭亭故事, 流觴咏詩, 一世傳誦爲盛事. 按芝溪與人書有曰: “僕到花林邑之別號, 四十日處荷風竹露之館. 主人使君, 時豐政簡, 封篆可有, 三分日晷, 輒來居客位. 琴樽古雅, 書劒整暇, 韵釋名姬, 動在左右, 酒酣縱談千古文章事, 此樂可敵百年. 不知僕他日能擁麾專城如花林之勝, 安能得客如燕岩其人乎?” 同時來者, 有李喜經聖緯ㆍ尹仁泰五一, 皆門下士也, 韓惠仲ㆍ梁元聘諸人, 皆燕峽時門生也. 時設妓樂於別館, 必撰屨先歸, 任其跌蕩. 芝溪公邀臨, 凡三度. 해석 邀芝溪公及金公箕懋光瑞ㆍ李甥鍾穆維肅ㆍ李甥謙秀益之, 선군께서는 지계공과 광서 김기무ㆍ큰 사위 유숙 이종목ㆍ작은 사위 익지 이겸수를 맞이하여 以爲溪山文酒..
37-2. 『열하일기』를 비판하는 사람들 人有囫圇說「渡江」諸編句語, 妄有評論. 不肖出「筆談」一編, 試使讀之, 不識其爲何語, 亦不能屬其句讀. 文理疎短如此, 而尙復論評人文字, 殊令人無限慚愧然, 而此猶無足道者. 至如以虜號之藁四字, 造謗而劫辱者, 大爲鹵莽. 嗚呼, 尙何足言哉! 說見下. 해석 人有囫圇說「渡江」諸編句語, 사람 중에 우물쭈물 「도강록」의 여러 편과 구어를 말하며 妄有評論. 망령되이 평론하는 사람이 있었다. 不肖出「筆談」一編, 試使讀之, 내가 「혹정필담(鵠汀筆談)」 한편을 꺼내 시험삼아 그에게 읽게 하니 不識其爲何語, 亦不能屬其句讀. 무슨 말인지도 몰랐으며 또한 구도조차 떼질 못했다. 文理疎短如此, 而尙復論評人文字, 문리가 어설프고 짧은 게 이와 같은데 오히려 다시 남의 글을 논평하여 殊令人無限慚愧然,..
37-1. 『열하일기』가 탈고하기도 전에 세상에 유행하다 先君嘗歎息言: “吾中年以來, 灰心世路, 漸有滑稽逃名之意, 而末俗滔滔, 無可與語. 每對人, 輒以寓言笑談, 爲彌縫打乖之法, 而心界常鬱鬰, 無可自樂. 及其遊燕而還也, 大方所見聞, 頗有可述, 往來山中, 筆硯隨身, 檢取槖中散草而漫書之, 以爲老年消閑之資. 裒然成幾編書, 初未嘗以傳後爲計也. 誰料脫藁未半, 人已傳寫, 遂至遍行一世, 莫可收藏. 初甚怵然自悔, 撫心長歎, 末亦無可柰何, 亦復任之而已. 至於未見其書面目, 而輒隨衆訿毀者, 吾亦如之何哉!” 해석 先君嘗歎息言: 선군께서는 일찍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吾中年以來, 灰心世路, “나는 중년 이후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漸有滑稽逃名之意, 而末俗滔滔, 점점 골계와 이름을 숨기고자 하는 뜻이 늘어나 말세의 풍속이..
27. 음악을 좋아한 연암ㆍ담헌ㆍ효효재ㆍ풍무자 先君精於審音, 而湛軒公尤曉樂律. 一日先君在湛軒室, 見樑上掛歐羅鐵絃琴數張. 盖因燕使歲出吾東, 而時人無解彈者. 先君命侍者解下, 湛軒笑曰: “不解腔何用爲?” 先君試以小板按之曰: “君第持伽倻琴來, 逐絃對按, 驗其諧否也.” 數回撫弄, 腔調果合不差, 自是鐵琴始盛行於世. 時有琴師金檍, 號風舞子, 嘐嘐齋所命也. 爲娛新飜鐵琴, 會湛軒室, 時夜靜樂作, 嘐嘐公乘月不期而至, 聽笙琴迭作, 意甚樂, 扣案上銅盤以節之, 誦『詩』「伐木」章興勃勃也. 已而嘐嘐公起出戶, 久不入, 出視之, 不見公. 湛軒語先君, “吾輩恐有失儀, 令長者歸也.” 遂與共步月, 向嘐嘐宅, 至水標橋. 時方大雪初霽, 月益明, 見公膝橫一張琴, 岸巾坐橋上望月. 衆皆驚喜, 移設杯盤樂具, 陪遊盡歡而罷. 先君嘗語此而曰: “自嘐嘐公沒..
41. 이야기 벗 이광려 李叅奉匡呂, 文章奇偉士也. 先君之寓平谿也, 嘗與芝溪公, 聯袂過鄰衕, 見人家柴門內有小車. 制頗精工, 就視之. 主人下堂迎笑曰: “君豈非朴燕巖乎? 吾乃李匡呂也.” 遂上堂坐, 輒論文章. 先君問之曰: “君平生讀書, 識得幾個字?” 座客皆大駭, 心笑之曰: “孰不知李公文章博洽士也?” 李公點檢良久語曰: “僅識得三十餘字.” 座客又大駭, 不知其何謂也. 自是李公定爲一言知己, 頻頻來訪. 有新成詩文, 必袖以請評. 每先君過訪, 必盥手設時菓于案上曰: “此待尊賓禮也.” 談辨竟日, 未嘗一言及於黨論歧異者云. 해석 李叅奉匡呂, 文章奇偉士也. 참봉 이광려는 문장이 기이하고 위대한 선비다. 先君之寓平谿也, 嘗與芝溪公, 선군께서 평계에 사실 적에 일찍이 지계공 이재성(李在誠)과 함께 聯袂過鄰衕, 見人家柴門內有小車. 소매..
연암을 읽는다 목차 박희병 서문: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1. 큰누님 박씨 묘지명 1총평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2. 말 머리에 무지개가 뜬 광경을 적은 글 1자연을 담아내는 표현馬首虹飛記2동양화 식으로 묘사한 구름 3깔끔하고 절제된 미학 4총평 3. ‘죽오’라는 집의 기문 1대나무 기문을 써주지 않다竹塢記2상투적인 언어에 생기를연암과 패관소설3양호맹의 진실한 대나무 사랑『過庭錄』 1권 304대나무를 닮아 간 사내 5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 6총평 4.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1작은 규모의 집에 다 있네晝永簾垂齋記2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3개인 취향에 빠진 사대부 4양인수의 취미가 다른 점 5총평 5.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1총평醉踏雲從橋記 6. 소완정이 쓴 「여름밤 ..
6. 총평 1 연암은 글의 거죽만 읽으려 들지 말고 글에 깃들여 있는 글쓴이의 마음을 읽으라고 말하고 있다. 연암의 이 말은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연암이 쓴 글들의 거죽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환호할 것이 아니라, 그 심부深部에 깃들여 있는 연암의 마음, 연암의 고심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연암의 글을 피상적으로 읽고 망발을 일삼거나 대중을 위한다면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은 없는가?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연암의 이 말에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하리라. 2 이 글 2단락의 나비 잡는 아이의 비유는 그 표현이 썩 참신하다. 연암은 글쓰기에서 비유나 은유를 퍽 잘 활용했는데, 이런 데서 연암의 기발한 상상력이 잘 드러난다. 3 연암이 인간 심리를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
5. 높은 수준의 글을 쓰도록 만드는 결락감 연암은 10대 때부터 『사기』에 매료되었다. 연암 문장의 드높은 기세는 『사기』가 보여주는 기운찬 문장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연암과 사마천은 그 문장만 상통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심리적 기저에 있어서도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앞서 말했듯 사마천 글쓰기의 기저부에는 자욱한 분만감이 깔려 있는데, 연암 글쓰기의 밑바닥에도 이 비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연암은 자신의 글쓰기를 ‘유희遊戲’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분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뜻을 얻지 못한 채 소외되어 있던 연암으로서는 울분을 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감정으로 인해 그의 글은 더욱 파격적이고 불온하게 되어 갔다. 사마천과 연암은 둘 다 ‘결락감缺落感’을 지녔다는 점에서 또 다..
4. 수치심과 분만감으로 쓴 『사기』 『사기』라는 저술의 심연에는 어찌해서 수치심과 분만감이 깃들여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사마천의 생애를 간단하게라도 살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 시대의 군주인 무제武帝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전제군주였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복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을 침공하고 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리고 흉노와 줄창 싸웠다. 당시 이릉李陵이라는 20대의 용맹한 장수가 있었다. 그는 흉노와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불행히 흉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부하들이 전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이릉이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구족九族을 멸해 버렸다. 사마천은 당시 궁정의 ..
3. 『사기』를 쓸 때 사마천의 마음과 나비를 놓친 아이의 마음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는 광경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사외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丫아’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사방을 돌아봐도 아무도 없자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가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 手猶然疑, 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갑자기 문의文意가 바뀌어 나비 잡는 어린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나비를 잡으러 살금살금 다가갔다가 막판에 놓쳐버린 아이의 복잡한 심리..
2. 작가는 고심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 단락의 첫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은 그 글만 읽는 것이요, 작가의 ‘마음’을 읽는 것은 못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글의 거죽만 읽었지 글 쓴 사람의 마음자리를 읽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어법으로는 글쓴이의 마음자리를 특히 ‘고심苦心’이라고 한다. 고심이라는 말은, 작가의 고민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입장, 삶과 세계에 대한 감정을 두루 포괄하는 말이다. 요컨대, 그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이거나 실존적인 태도와 관련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작가의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원점 혹은 어떤 최저 지점을 뜻한다. 작가는 바로 이 고심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적 의제議題나 이념과 관련된 것일 수도 ..
1.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을 비판하다 그대는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를 읽었으되 그 글만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사외다. 왜냐고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堡壘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구경하던 광경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느니, 「자격열전刺客列傳」을 읽을 땐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던 장면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늙은 서생의 케케묵은 말일 뿐이니, 부엌에서 숟가락 줍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嘗讀其心耳. 何也? 讀項羽, 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아마 경지가 지난번에 연암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항우본기」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
5. 총평 1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글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기실 글쓰기의 문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이 글은 문자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연암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자를 그냥 문자로만 알아서는 안 되고, 문자에 생기와 온기 및 사물의 다채로운 뉘앙스를 채워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문자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관점은 『과정록』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아버지는 이공(이광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평생 독서했는데 아는 글자가 몇 자나 되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비웃었다. ‘이공이 글을 잘하고 박식한 선비라는 걸 누가 모른단 말야!’ 이공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겨우 서른 자 남짓 아는..
4. 사물을 잘 관찰하는 것이 훌륭한 독서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운 뜨락에 여름새들이 찍찍 짹짹 울고 있더이다. 나는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이렇게 외쳤소이다. “저것이야말로 ‘날아가고 날아온다’라는 문자이고, ‘서로 울며 화답한다’라는 문장이다! 갖가지 아름다운 문채를 문장이라고 한다면 저보다 더 나은 문장은 없으리라. 오늘 나는 진정한 글 읽기를 했노라!” 朝起, 綠樹蔭庭, 時鳥鳴嚶. 擧扇拍案胡叫曰 : “是吾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 五釆之謂文章, 則文章莫過於此. 今日僕讀書矣. 다시 문세를 전환해 연암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독서가 참된 독서인가? 이 단락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다. 연암의 답인즉슨, ‘사물’을 읽으라는 것이다. 사물..
3. 새를 글자 속에 가두다 저 하늘을 날아가며 우는 새는 얼마나 생기가 있습니까? 그렇건만 적막하게도 새 ‘조鳥’자 한 글자로 그것을 말살하여 새의 고운 빛깔을 없애버리고 그 울음소리마저 지워 버리지요. 이는 마을 모임에 가는 촌 늙은이의 지팡이 머리에 새겨진 새 모양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새 ‘조鳥’자의 진부함이 싫어 산뜻한 느낌을 내고자 새 ‘조鳥’자 대신에 새 ‘금禽’자를 쓰기도 하지만, 이는 책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의 잘못이라 할 거외다.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 抹摋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或復嫌其道常, 思變輕淸, 換箇禽字, 此讀書作文者之過也. 연암은 시선을 갑자기 하늘로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앞 단락에서 언급한 천지 사방 혹은 만물의 한 예로서..
2. 맹목적인 독서로 헛 똑똑이가 되다 이 편지글은 그 서두가 퍽 도발적이다. 다짜고짜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讀書精勤, 孰與庖犧?)”라고 묻는 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포희씨만큼 글을 잘 읽은 사람은 없다는 건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연암의 생각을 따라가면 이렇다. 포희씨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세밀히 관찰하여 그 근본 원리를 8괘라는 기호에 집약해냈다. 포희씨가 삼라만상을 관찰한 행위는 바로 글(혹은 책)을 읽은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글의 에센스, 즉 글의 정수精髓(이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글의 ‘정신’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는 바로 사물과 세상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을 잘 관찰하여 그 정수를 포착해 8괘..
1. 천지 사이에 있는 게 책의 고갱이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뜻이 천지사방에 펼쳐 있고 만물에 두루 있으니, 천지사방과 만물은 글자로 쓰지 않은 글자이며, 문장으로 적지 않은 문장일 거외다. 후세에 글을 부지런히 읽기로 호가 난 사람들은 기껏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말라붙은 먹과 문드러진 종이 사이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면서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은 데 불과하외다.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를 먹고서 취해 죽겠다고 하는 격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麁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이 단락의 취지는 앞에서..
5. 총평 1 그리움이라든가 누군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모두 망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설사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립고 아련한 마음을 우리는 어찌할 수가 없다. 2 이 글은 짤막한 편지지만 글 쓴 사람의 진정이 오롯이 담겨 있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운이 참 깊다. 일생에 이런 편지를 한 통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3 옛날의 편지에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격식을 갖추어서 쓰는 비교적 긴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크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안부나 소회所懷를 전하는 짤막한 편지이다. 전자는 보통 ‘서書’라고 부르고, 후자는 ‘간찰簡札’이나 ‘척독尺牘’이라고 부른다. 경지에게 보낸 답장 세 통은 모두 후자에 속한다. 척독은 ‘서’에 비해 글쓰기가 자유롭고 격식에..
4.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곳 어제 당신께서는 정자 위에서 난간을 배회하셨고, 저 역시 다리 곁에 말을 세우고는 차마 떠나지 못했으니, 서로간의 거리가 아마 한 마장쯤 됐을 거외다. 모르긴 해도 우리가 서로 바라본 곳은 당신과 제가 있던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하외다. 昨日足下, 猶於亭上, 循欄徘徊, 僕亦立馬橋頭, 其間相去已爲里許. 不知兩相望處, 還是那際. 당시 연암은 경지와 유별留別했던 듯하다.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을 ‘유별’이라 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송별’이라 한다. 연암이 떠나왔으니, 연암은 유별한 게 되고, 경지는 송별한 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작별이 퍽 아쉬웠던 모양이다. 경지는 말을 타고 떠나가는 연암을 정자 위 난간에서 ..
3. 석별의 아쉬움을 잇는 ‘사이’ 이야기 지난번 백화암百華菴에 앉아 있을 때 일이외다. 암주菴主인 처화處華가 멀리 마을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비구 영탁靈托에게 이렇게 게偈를 읊더이다. “탁탁 하는 방망이 소리와 툭툭 하는 다듬잇돌 소리, 어느 것이 먼저인고?” 그러자 영탁은 합장하며 이렇게 말했사외다.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니 그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옵나이다.” 頃坐百華菴, 菴主處華, 聞遠邨風砧, 傳偈其比丘靈托曰: “椓椓礑礑, 落得誰先?” 托拱手曰: “不先不後, 聽是那際?” 갑자기 문세가 확 전환되면서 앞서 「『말똥구슬』 서문蜋丸集序」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이상한 일화가 제시되고 있다. 뭘 말하려는 걸까? 처화가 툭 던진 물음은 방망이 소리가 먼저냐 다듬잇돌 소리가 먼저냐는 것이다. 어느..
2. 첫 시작부터 본론으로 들어간 편지 전의감동 시절 연암은 자신이 살던 집 건물에 ‘방경각放瓊閣’이라는 이름과 영대정映帶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전하는 연암의 문집에는 ‘방경각 외전放璚閣外傳’이라는 이름하에 「양반전」 등 이른바 9전九傳을 수록해놓고 있다. 연암은 전의감동에 살 때 이전에 창작한 전들을 모아 『방경각 외전』이라는 책을 엮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의감동 시절 연암은 이 책 말고 또 하나의 창작집을 스스로 엮었으니,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이 그것이다. ‘영대정 잉묵’이란 영대정에서 엮은 하잘 것 없는 편지글이라는 뜻이다. ‘하잘 것 없는’이라는 말은 겸사로 한 말이다. 연암 자신의 편지글 모음집인 이 책은 정확히 1772년 10월에 편찬되었다. 연암은 이 책에 자서(映帶亭賸墨自序)를 붙..
1. 경지란 누구인가? 이 편지는 경지京之라는 사람에게 보낸 답장이다. 경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가 혹 당대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퉁소 연주자인 이한진李漢鎭(1732~?)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한진은 호가 경산京山이고, 자는 중운仲雲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경지’는 그의 또 다른 자字가 아닐까 한다. 이한진은 감역監役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을 뿐이다. ‘감역’이라는 벼슬은 대개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이 음직蔭職으로 하는 벼슬이다. 홍대용과 박지원도 감역 벼슬로부터 벼슬을 시작했다. 이한진은 전서篆書와 퉁소에 능하고 아취가 있었으며, 성대중成大中(1732~1809)ㆍ홍대용ㆍ이덕무ㆍ박제가ㆍ홍원섭洪元燮(1744~1807) 등과 교유했다. 성대중의 문집인 『청성집』에 실려 있는..
12. 총평 1 이 글은 당시 보수적인 문예관을 지닌 사람의 눈에는 경망스럽고 상스러운 글로 보였을 테지만, 제문의 매너리즘을 깨뜨리면서 인간의 진정眞情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빛이 바래지 않으며, 퍽 감동적이다. 2 이 글에서는 정작 슬픔이라든가 애통함이라든가 이런 말은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친구의 죽음을 앞에 한 채 비탄과 슬픔에 잠겨 있는 인간 연암의 마음이 약여하게 느껴진다. 3 이 글은 연암의 심리적 추이에 따라 글이 구성되어 있다. 1단락은 석치의 죽음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럼에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연암의 착잡하고 당혹스런 마음을 빠른 필치로 적고 있다면, 2단락은 너무나 큰 슬픔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하여 멍한 눈으로 우두커니 빈소를 바..
11. 파격적인 제문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 이제 끝으로, 연암이 정석치의 제문을 왜 그리도 파격적으로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하나는, 제문의 대상 인물인 석치 자체가 몹시 파격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문의 대상 인물이 음전하고 순순한 인간이었다면 굳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석치는 방달불기放達不羈(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고 예법 따위에 구속되지 않는 태도)한 인간 타입이었다. 박제가가 그를 “청동 술잔으로 3백 잔을 마신 술꾼이어라(靑銅三百酒人乎)”라고 읊었듯이, 그는 당대의 주호酒豪였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연암이 처해 있었던 상황과 그 심경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앞에서 말했듯 연..
10. 울울하던 그날 함께 하던 벗 홍국영은 1780년 2월 권력에서 축출된다. 박지원은 더 이상 연암협에 은거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해 5월 중국 여행길에 올라 동년 10월에 귀국한다. 박지원은 귀국 후 서울과 연암협을 오가며 『열하일기』의 집필에 힘을 쏟는다. 『과정록』은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는 경자년(1780)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谿에 거처하셨으니 곧 지계공芝溪公(연암의 처남인 이재성)의 집이었다. 이때 홍국영이 실세하여 화근은 사라졌지만 점잖은 옛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떴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해 옛날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욱 뜻을 잃고 스스로 방달하게 지내셨는데 그것이 몸을 보존하는 비결임을 도리어 기뻐하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
9.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친구 탈락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혹 그 부분에 대한 보충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여기서 잠시 연암과 정석치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정석치의 인간적 특성과 재예才藝에 대해 조금 언급해두기로 한다. 연암과 정석치는 언제부터 알게 된 걸까? 『과정록』 초고본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아버지는 임진년(1772)과 계사년(1773) 사이에 가족을 석마石馬(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돌마 일대)에 있는 처가로 보내고 늘 홀로 서울의 전의감동 집에 거처하셨다. 홍담헌 대용, 정석치 철조, 이강산李薑山 서구書九와 때때로 서로 왕래하셨고, 이무관 덕무, 박재선朴在先 제가齊家, 유혜풍 득공이 늘 아버지를 좇아 노닐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암이 정철조와 알게 된 것은 적..
8. 사라져 버린 본문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읽는다. (이하 글을 잃어버렸음) 爲文而讀之曰 缺 “글을 지어 읽는다”라는 말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제문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부분은 현재 탈락되고 없다. 아마 4언으로 된 운문이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묘지명의 ‘명’이 보통 아주 짤막한 운문인 것과는 달리 제문의 운문은 아주 길어 60구句 내지 100여 구에 이르는바 제문의 중심부분을 이룬다. 가령 연암이 그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을 위해 쓴 제문의 경우 4언구가 96구이며,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을 위해 쓴 제문의 경우 61구이다. 이 두 제문은 4언구를 통해 고인의 인품과 생전의 언행, 고인에 대한 연암의 특별한 추억과 애통한 심정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4언구가 끝나면 ‘상향’이라..
7. 진짜로 네가 죽었구나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 귓바퀴는 이미 문드러지고 눈알도 이미 썩었으니, 이젠 진짜 듣지도 보지도 못하겠지. 잔에 술을 따라 강신降神해도 진짜 마시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못할 테지. 평소 석치와 함께 술을 마시던 무리를 진짜로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정말 우리를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우리끼리 모여 큼직한 술잔에다 술을 따라 마시지 뭐. 石癡眞死. 耳郭已爛, 眼珠已朽, 眞乃不聞不覩, 酌酒酹之, 眞乃不飮不醉. 平日所與石癡飮徒, 眞乃罷去不顧. 固將罷去不顧, 則相與會酌一大盃. 이 단락은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라는 말로써 시작된다. 1단락의 맨 끝 문장이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今石癡眞死矣)”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단락은 1단락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
6. 머리로 아는 죽음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죽음 이 단락의 포인트는 평소 석치를 저주하던 자들에게 대한 역설적 조소에 있다고 해야겠지만, 이 단락의 가장 미묘한 대목은 석치의 죽음에 대한 도인의 반응을 언급한 구절이 아닌가 한다(世固有夢幻此世, 遊戱人間, 聞石癡死, 固將大笑, 以爲歸眞,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 이런 도인은 『장자』라는 책에 허다하게 등장한다. 『장자』는 이런 인물을 내세워 삶이란 한낱 꿈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죽음이야말로 삶의 근원이라는 것, 따라서 죽음이란 특별한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며 자기의 원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단락 끝 부분에서 도인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런 생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생사관은 그야말로 아..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이 단락은 잠시 숨을 고르는 부분이다. 앞 단락이 아주 빠른 템포로 감정의 직절적直截的 분출을 보여주었다면, 이 단락은 망자亡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서술해놓고 있다. 앞 단락을 ‘급急’이라 한다면 이 단락은 ‘완緩’이다. 이렇듯 두 단락은 퍽 대조적이다. 이처럼 완급을 교대해가며 서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독자를 편안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급’으로만 일관하거나 ‘완’으로만 일관하는 글을 한번 상상해보라. 독자는 전자의 경우 숨이 가빠 죽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지루해 죽을 것이다. 한편, 앞 단락이 격렬함과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거쳐 체념의 감정으로 끝나고 있고, 그것을 받아 이 단락이 시작된다는..
4. 천문학ㆍ수학ㆍ지리학 등 학문에 뛰어났던 그대 석치가 죽자 시신을 둘러싸고 곡하는 이들은 석치의 처첩과 함께, 아들과 손자, 친척들인데, 그 곁에 함께 모여 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석치 유족의 손을 잡고 이렇게 위로한다. “훌륭한 가문의 불행입니다. 철인哲人이 어찌해 이렇게 되셨는지……” 그러면 그 형제와 아들과 손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꾸한다. “저희 집안의 흉액입니다.” 석치의 벗들은 서로 이렇게 탄식한다. “이런 사람은 정말 쉽게 얻을 수 없는데……” 함께 모여 조문하는 이들도 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는 법이니까...
3. 자유분방하게 감정을 토로하다 (A) (B) 살아 있는 석치라면 이러이러할 텐데, 그럴 수 없는 걸 보니 석치가 진짜 죽었구나.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A)의 가정문은 절묘하게도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하나는 이를 통해 연암과 석치의 개인적인 특별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석치의 죽음을 도무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암의 감정 상태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연암은 일상 속 석치의 부재를 통해 ‘석치가 진짜 죽은 게 맞긴 맞구나!(今石癡眞死矣)’하고 석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이 단락은 가정문 (A)와 그에 이어지는 단정문 (B)를 통해 친한 벗 석치의 죽음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연암의 심리 상태 및 그럼에도 결국 석치..
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단락이 느닷없는 출발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산문 분석에서는 이런 시작 방식을 ‘sudden start’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으로 시작되는 서두는 독자의 심리에 강한 인상과 파문을 던지면서 초입에서부터 독자를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독자는 어떤 심리적 준비 과정도 없이 단박에 대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강요당한다. 그런데다가 이 단락의 문장은 그 호흡이 유장하고 느긋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짧고 촉급하다. 빠른 숨으로 단숨에 읽도록 씌어진 문장인 것이다. 왜 서두에서부터 이렇게 급한 템포의 문장을 서술한 걸까? 이는 연암의 심리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단락의 통사 구조統辭構造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1. 파격적인 제문 살아 있는 석치石癡라면 함께 모여 곡도 하고, 함께 모여 조문도 하고, 함께 모여 욕지거리도 하고, 함께 모여 웃기도 하고, 몇 섬이나 되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맨몸으로 서로 치고받고 하며 고주망태가 되도록 잔뜩 취해 서로 친한 사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인사불성이 되어, 마구 토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혀 어질어질하여 저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 生石癡, 可會哭可會吊, 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忘爾汝, 歐吐頭痛, 胃翻眩暈, 幾死乃已. 今石癡眞死矣. 제문祭文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서, 흔히 제물祭物을 올려 축문祝文처럼 읽게 되어 있다. 그 형식은 보통 글의 서두에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제문을 지은바..
35. 홍국영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옛 친구도 모두 죽다 庚子撤還京師, 寓平谿, 卽芝溪公宅也. 時洪國榮敗, 禍色始熄, 而老成舊要, 凋謝殆盡. 風氣一變, 非復舊日者. 益濩落自放, 反喜其爲存身之訣. 然常鬱鬱, 有遐擧之想. 會先君三從兄錦城都尉, 以賀使赴燕, 要先君共行. 五月啓程, 六月渡江, 八月入燕京. 尋又轉向熱河, 是月復還燕京, 十月歸國. 及歸, 尤徜徉無韵况. 時獨入處燕峽, 或經年或半歲, 乃歸. 해석 庚子撤還京師, 寓平谿, 경자(1780)년에 서울로 철수하여 돌아와 평계에 사셨는데 卽芝溪公宅也. 곧 처남인 지계공 이재성(李在誠)의 집이었다. 時洪國榮敗, 禍色始熄, 당시 홍국영이 실각하여 재앙의 빌미가 비로소 식었지만 而老成舊要, 凋謝殆盡. 어른스럽던 옛 친구들 중 죽은 이들이 거의 다였다. 風氣一變, 非復舊日..
25. 아버지의 친구들 1. 돈독한 친구 홍대용 先君天姿豪邁, 於名利戒愼若浼. 中歲旣不輒赴場屋, 而交遊亦簡, 惟洪湛軒大容ㆍ鄭石癡喆祚ㆍ李薑山書九, 時相往還, 而李懋官德懋ㆍ朴在先齊家ㆍ柳惠風得恭, 常從遊焉. 湛軒公長先君六歲, 學識精邃, 亦廢擧閑養. 與先君爲道義交, 最相親篤, 而言辭稱謂, 相敬如初交時也. 先君常病吾東士大夫, 多忽於利用厚生ㆍ經濟ㆍ名物之學, 類多因訛襲謬, 麤鹵已甚. 湛軒平日持論亦如此. 每相盍簮, 輒留連累日, 上自古今治亂興亡之故, 古人出處大節, 制度沿革, 農工利病, 貨殖糶糴, 與夫山川關防, 曆象樂律, 以至艸木鳥獸, 六書算數, 無不貫穿該括, 皆可記而誦也. ⇒해석보기 2. 손기술이 뛰어난 석치와 토론을 밤새도록 했던 무관ㆍ혜풍ㆍ재선과 제일 아낀 강산 石癡文雅, 有絕藝. 凡機轉諸器, 如引重ㆍ升高ㆍ磨轉ㆍ取水..
2. 손기술이 뛰어난 석치와 토론을 밤새도록 했던 무관ㆍ혜풍ㆍ재선과 제일 아낀 강산 石癡文雅, 有絕藝. 凡機轉諸器, 如引重ㆍ升高ㆍ磨轉ㆍ取水之類, 能心究手造. 皆欲倣古試今, 需諸世用也. 懋官ㆍ惠風ㆍ在先, 皆博學治聞之士, 每有攷據, 輒應口辨證, 於先君執禮惟謹. 每聚會談讌, 不覺焚膏以繼晷也. 薑山年最少, 而穎拔出羣, 沈靜有識量, 先君愛重之. 家中老傔僕, 亦往往說當時事, 多可聞. 해석 石癡文雅, 有絕藝. 석치 정철조는 문학에 대한 식견이 있고 예술적 수완이 뛰어났다. 凡機轉諸器, 대체로 기계가 움직이는 여러 기구들, 如引重ㆍ升高ㆍ磨轉ㆍ取水之類, 예를 들면 무거운 거 당기는 기계(引重), 높이 올리는 기계(升高), 갈며 도는 기계(磨轉), 물 끌어들이는 기계(取水) 등을 能心究手造. 마음에 연구하고서 손수 만들 ..
1. 돈독한 친구 홍대용 先君天姿豪邁, 於名利戒愼若浼. 中歲旣不輒赴場屋, 而交遊亦簡, 惟洪湛軒大容ㆍ鄭石癡喆祚ㆍ李薑山書九, 時相往還, 而李懋官德懋ㆍ朴在先齊家ㆍ柳惠風得恭, 常從遊焉. 湛軒公長先君六歲, 學識精邃, 亦廢擧閑養. 與先君爲道義交, 最相親篤, 而言辭稱謂, 相敬如初交時也. 先君常病吾東士大夫, 多忽於利用厚生ㆍ經濟ㆍ名物之學, 類多因訛襲謬, 麤鹵已甚. 湛軒平日持論亦如此. 每相盍簮, 輒留連累日, 上自古今治亂興亡之故, 古人出處大節, 制度沿革, 農工利病, 貨殖糶糴, 與夫山川關防, 曆象樂律, 以至艸木鳥獸, 六書算數, 無不貫穿該括, 皆可記而誦也. 해석 先君天姿豪邁, 선군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호탕하고 고매하여 於名利戒愼若浼. 명예와 이익에 있어 내 몸을 더립힐까 경계하고 삼가셨다. 中歲旣不輒赴場屋, 而交遊亦簡, 중년..
11. 총평 1 공인 이씨가 열여섯에 시집올 때는 꽃다운 얼굴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내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파리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품 있는 여인이었으리라. 아픈 몸을 일으켜 빙긋이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하는 데서 그녀의 인간 됨됨이와 기품이 느껴진다. 2 이 글은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 집안에 시집 온 여성에 대한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연암 외에도 빈사처貧士妻의 생애를 기록한 문인들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연암의 이 글처럼 그런 여성의 내면 풍경과 심리 상황까지 냉철하게 그려 보인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암은 가난 때문에 사대부 집안의 한 여성이 절망과 낙담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놀랍도록 예..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나는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直提學 유언호俞彦鎬에게 묘지명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마침 개성 유수로 와 있었는데 개성은 연암골에서 가까웠다. 그는 장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명銘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이라 그 골짝은, 산 깊고 물 맑은데, 시동생이 유택幽宅을 마련했지요. 아아! 온 가족이 함께 은거하려 했거늘, 마침내 이곳에 머무시게 됐군요. 계시는 곳 편안하고 굳건하니, 아무쪼록 후손들 보우하소서. 趾源求銘於其友人, 奎章閣直提學兪彥鎬. 彥鎬方留守中京, 地接燕岩, 爲助葬且銘之, 其銘曰: “燕岩之洞, 山窈而水淥, 繄惟小郞之所營築. 嗚呼鹿門盡室之計. 竟於焉而托體. 旣安且固, 以保佑厥後.” 묘지명의 ‘지誌’와 ‘명銘’은 대개 한 사람이 짓는 법인데, 이 ..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형수는 몹시 위독했지만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으로 머리를 가누고선 한 번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 단락에서뿐만 아니라 이 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우리 눈에 박힌다. 20여 년을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힘이 소진하여 절망과 좌절감 속에 죽어가고 있던 형수에게 연암이 들려준 말은 그 말만으로도 기쁘고 가슴이 벅찼으리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한 번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것이리라. 사실 이 글 전체에서 형수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 발언한 것은 이 대목 한 군데밖에 없다. 비록 앞 부분에서 공인 이씨에 대해 많이 서술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를 검토하며 자세히 살핀바 있지만, 연암은 1771년에 처음 연암협을 답사한 이래 이곳에 작은 산장을 지어 놓고 수시로 머물곤 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가 온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1778년에 와서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는데, 연암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품고 장차 해코지를 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사정을 『과정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유공(유언호)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그리하여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나는 화장산華藏山의 연암골에 새로 터를 잡아 그 산수를 어여삐 여기며 손수 가시덤불을 베어 내 나무 곁에다 집을 세웠다. 趾源新卜居華藏山中燕岩洞, 樂其水石, 手剪荊蓁, 因樹爲屋. 언젠가 형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형님이 연로하시니 장차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사셨으면 합니다. 담을 둘러 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고, 집 뒤엔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문 앞에는 천 그루의 배나무를 심고, 시냇가에는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렵니다. 못에는 한 말 가량 치어稚魚를 풀어 놓고, 바위 절벽 밑에는 벌통 백 개를 놓아두며, 울타리 사이에 소 세 마리를 묶어 두렵니다. 제 처가 길쌈할 때면 형수님께선 그저 계집종이 기름 짜는 일이나 살펴 제가 밤에..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아아! 옛사람들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다. 조석朝夕도 보전키 어려운 상황에 놓인 기울고 망해가는 나라를 부지하며 조정에서 혼자 국사國事를 맡아 고군분투하듯 하셨고, 변변찮은 것이지만 정성스레 제수祭需를 마련해 선조의 혼령이 굶주리지 않게 하셨으며, 또 좋은 음식은 못 되더라도 음식을 장만해 손들을 잘 접대하셨으니, 이 어찌 이른바 ‘온 힘을 다해 죽은 이후에야 그만둔다’는 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嗟乎! 貧士之妻, 昔人比之弱國之大夫. 其拄傾支覆, 莫保朝夕, 猶能自立於辭令制度之間, 而澗繁沼毛, 不餒其鬼神, 不腆之廚庖, 足以嘉會, 豈非所謂: ‘鞠躬盡瘁, 死而後已’者耶? 내가 자식을 낳아 그 아이가 겨우 태胎를 벗었을 때 형수님은 그 ..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이 단락에서 가장 빼어난 서술은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라는 대목이다. ‘20년’이란 연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1759년부터 형수가 세상을 버린 해인 1778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문장은, 주부로서 공인 이씨가 살아온 삶과 그녀의 내면적 심리 상황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묘파해내고 있다. 가족과 집안을 위해 죽으라고 일하고 애썼지만 가난은 늘 그 자리에 있어 공인 이씨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다는 것. 이 절망감과 좌절감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터이다. “노심초사하여 뼈 빠지게(嘔膓擢..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歲且荐喪)”다고 했는데, 이는 1759년 연암의 모친 함평 이씨가 59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듬해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76세로 별세한 일을 말한다. 공인 이씨가 시어머니 상을 당한 것은 그 36세 때였다. 시집온 지 20년 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공인 이씨는 연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주부主婦’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부’란 오늘날의 ‘가정주부’라는 말과 다소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부에게는 한 집안의 살림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제사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한 집안의 경제와 제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공인 이씨가 이 역할을 맡기 전에는 시어머니 함평 이씨가 이 역할을 수행했을 터이..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이 단락은 먼저 이씨의 가계家系를 밝힌 다음, 반남 박씨 집안에 시집온 일과 아이 셋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은 일,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20년을 뼈 빠지게 일을 하다 결국 병고 속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씨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이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 명문가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왜 그리 가난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연암은 이 단락의 중간부분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바, 곧 ‘청빈淸貧’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워낙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남긴 재산이 없어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 부정..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집안에 연거푸 상喪이 났지만 형수님은 힘써 가족 열명의 생계를 꾸려 나갔으며,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大家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赤貧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양 낙엽이 지고 추워지는 가을이면 형수님은 더욱 실망하고 낙심하여 병이 더욱 도졌다. 이렇게 몇 년을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마침내 금상今上 2년인 무술년戊戌年(1778) 7월 25일에 운명하셨다. 歲且荐喪, 恭人力能存活其十口, 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 且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 每値高秋木落天寒, 意益廓然霣沮,..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공인恭人 휘諱 모某는 완산完山 이동필李東馝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 후손이다. 열여섯에 반남潘南 박희원朴喜源에게 시집 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형수님은 평소 몸이 여위고 약해 온갖 병에 시달렸다.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희원의 할아버지는 당대에 이름난 고관高官이었는데, 선왕先王께서는 매양 한漢나라 탁무卓茂의 고사故事를 거론하며 그 벼슬을 올려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 청빈淸貧이 뼈에 사무쳤으니, 별세할 때 집안에는 돈이 몇 푼 없었다. 喜源大父, 爲世名卿,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
34. 연암가의 청렴결백 1. 선조 박상충과 박은의 청렴결백한 예화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吾先祖潘南先生, 旣以斥元尊明, 爲羣兇所阸, 卒於靑郊驛. 未能返櫬, 而葬于其地, 卽國東門外耳. 其貧無以爲力, 可知也. 平度公自言: ‘孤貧且疾, 志氣猶存.’ 及際會風雲, 久秉匀軸, 猶不免脫粟飯, 幾乎狼狽. 公家在駱山下. 一日, 太宗倉卒臨門, 怒公出迎之遲也. 公曰: ‘臣適得粟飯, 恐妨奏對, 水漱然後敢出也.’ 上命取而視之, 愈怒曰: ‘無亦公孫布被耶? 安有大臣而飯荒粟者?’ 左右言: ‘大臣之宗族親友, 待而擧火者甚衆, 祿米入室, 一夕散盡.’ 上憮然曰: ‘予之過也! 予爲國君, 使布衣故人, 不厭麤糲, 予不及卿之賢, 遠矣!’ 卽席賜興仁門外鼓巖田十結. ⇒..
5. 할아버지 박필균과 할머니의 청빈 曾王父有德無年, 尹夫人辛勤敎養, 成就王父兄弟. 王父纔釋褐, 而尹夫人下世, 未享一城之奉. 王父兄弟廬墓于通津之鳯翔邨, 此地本崔簡易別業, 忠翼公嘗買而居之. 以此王父兄弟, 亦有薄田一區, 瀕海斥鹵, 歲率失稔. 從姪章翼公居留沁都, 常繼米鹽醬豉之屬, 得行饋奠. 王父位躋列卿, 而屢空如寒士. 城西弊廬樸陋逼窄, 平生不易居. 嘗有頽圮甚處, 客請修葺之, 適除外任. 王父謂: ‘作守令而修室屋, 不可也.’已之. 通津薄田, 海溢堰缺, 方築之, 適拜畿伯. 又謂: ‘作道伯而治農庄, 不可也.’ 送人停其役. 客恨之曰: ‘爲方伯守宰, 將以撥貧也, 如公家則反有害焉.’ 傳以爲笑. 其時士大夫, 亦多廉白立家, 而吾家規模, 在當時亦以太過稱之. 然而猶避名不居. 外邑例有饋問, 時方屢空, 分裂其腒鱐之屬, 以代朝饍. 或..
4. 증조부 박미와 증조모 정안옹주의 검약 國朝儉德, 固出前代, 而亦吾祖妣, 性有所安. 仁穆后喪畢, 分賜服御器物諸王子女家, 率得金銀珍玩, 貞安主獨取宣廟御畵蘭竹一屛以歸, 所尚在此, 則所不屑可以知也. 文貞公雖早貴, 而車馬僕從不能備也. 嘗有詩云: ‘八十導前卒, 蹣跚鞚馬奴. 小童且隨後, 嚴沍尙無襦. 市井嘲儀簡, 妻孥愧跡孤. 試看呼唱處, 猶使路人趨.’ ‘八十導前卒’者, 引路卒, 歷事三世, 年將八十云. 盖分窶如此, 而處之泊如也. 公之風流文采, 輝映當時, 座客常傾一代之選. 性又喜酒, 然往往不得一醉, 鎭日淸坐而罷, 猶且急人之難, 脫驂分宅, 曾無吝色. 忠翼公久謫南荒, 全家隨往, 公旣抱隱痛, 疋馬短衣, 長在道路. 又遭母夫人之喪, 長姑叔弟, 皆卒於南千里之外, 三返旅櫬. 是時貞安主獨處京舍, 摒當拮据, 辦應有無, 甁罄槖倒, 鞠..
3. 충익공의 근검절약과 부마 문정공의 청렴함 及忠翼公, 早被上知, 歷敭顯要. 而皆在國步艱難之日, 身且不得自顧, 况家事乎哉? 搶攘八年之間, 吾家多在延安ㆍ遂安ㆍ安州之地, 流轉飄泊, 飢困萬狀. 中興以來, 公亦復出鎭雄蕃, 入掌邦計. 然長於謀國, 而短於謀家, 田畝之入, 不足以支數朔, 養生之具, 十闕七八, 終身銀盃, 乃策勳日賞賜也, 餘無一酒鎗茶鼎. 酷好書畵, 嘗遇良畵師, 篋無一絹之貯, 謀之又不得, 乃漂洗朝衣以繪之. 晚處謫籍, 蔬糟屢空, 見於詩牘者亦多. 蓋冢子文貞公, 駙馬也, 而其窘乏猶如此焉. 文貞公初被儀賓之選, 賜宅於貞洞, 以其侈大而辭之, 更占太平洞第, 亦爲近於親舍, 以便覲省也. 忠翼公舊宅, 今尙在倉洞, 其外堂爲房二間板廳一間而已. 文貞公最受宣廟眷愛, 然於王子女應給田結外, 別無私賜與. 貞安主被服, 雖垢汙渝黦, 命宮..
2. 야천 선생과 다섯 아들의 청렴결백 冶川先生, 慍于羣小, 遯跡流寓, 卒於嶺表, 竟亦不能返葬. 于時, 長子贊成公十九歲, 次子潘城公九歲, 三子文貞公八歲, 四子吾七世祖都憲公五歲, 季子都正公三歲, 啼號滿室. 洪夫人左提右挈, 間關北歸. 吾在嶺邑, 屢拜先生之墓, 獨立在萬疊空山, 追念當日情事, 每思之欲哭, 患難貧窮, 一至於此. 及夫五子登朝, 皆爲名公卿賢大夫, 而贊成公屢典郡邑, 往往不得挈家, 文貞公方食卿祿, 一半分獻邱嫂. 每公退, 不脫朝衣, 往問何有何無, 躬發甁甔而視之, 有空者, 辦而充之. 然文貞公冰蘖淸操, 畏服一世, 其食貧, 固自如也. 潘城公貴爲國舅, 而一室蕭然. 大婚時, 中外助資, 故事也, 獨不受一物, 儉以成禮. 而吾先祖都憲公, 時方有新進雅望, 乃自以地近戚畹, 謙約彌甚, 杜門掃跡, 唯以書史花竹自娛, 以此平生, ..
1. 선조 박상충과 박은의 청렴결백한 예화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吾先祖潘南先生, 旣以斥元尊明, 爲羣兇所阸, 卒於靑郊驛. 未能返櫬, 而葬于其地, 卽國東門外耳. 其貧無以爲力, 可知也. 平度公自言: ‘孤貧且疾, 志氣猶存.’ 及際會風雲, 久秉匀軸, 猶不免脫粟飯, 幾乎狼狽. 公家在駱山下. 一日, 太宗倉卒臨門, 怒公出迎之遲也. 公曰: ‘臣適得粟飯, 恐妨奏對, 水漱然後敢出也.’ 上命取而視之, 愈怒曰: ‘無亦公孫布被耶? 安有大臣而飯荒粟者?’ 左右言: ‘大臣之宗族親友, 待而擧火者甚衆, 祿米入室, 一夕散盡.’ 上憮然曰: ‘予之過也! 予爲國君, 使布衣故人, 不厭麤糲, 予不及卿之賢, 遠矣!’ 卽席賜興仁門外鼓巖田十結. 해석 嘗詔不肖輩曰: 일찍이 ..
47-2. 사라져버린 어머니를 애도하며 지은 시 先妣喪, 有悼亡詩二十絕句, 失稿不得承見, 嗚呼痛惜! 해석 先妣喪, 有悼亡詩二十絕句,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도망시 20 절구를 지으셨지만 失稿不得承見, 嗚呼痛惜! 원고를 잃어버려 받들어 볼 수 없으니, 아! 애통하고 서글프구나! 인용 목차
47-1. 두 편의 애도시와 이덕무의 비평 七月遭伯父喪, 窆于燕巖屋後子坐之兆. 戊戌伯母恭人李氏之喪, 先窆于此, 今祔焉. 先君後入燕峽也, 嘗臨流而坐, 悲摧不自勝, 有詩自悼云: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上.” 李懋官讀而揮涕曰: “情到語, 令人涙無從, 始得謂眞切. 吾於公詩, 讀而垂涙者再. 其舟送姉氏喪行云: ‘去者丁寧留後期, 猶令送者淚沾衣. 扁舟一去何時返, 送者徒然岸上歸’ 眼水自不禁潸然.” 해석 七月遭伯父喪, 窆于燕巖屋後子坐之兆. 7월에 큰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연암협 집 뒤 자좌의 자리에 하관했다. 戊戌伯母恭人李氏之喪, 先窆于此, 무술(1778)년 큰 어머니 공인 이씨께서 돌아가셔서 먼저 이곳에 하관했는데 今祔焉. 이제 합장한 것이다. 先君後入燕峽也, 嘗臨流而坐, 선군께서 ..
46. 아내와의 일화, 그리고 어려운 살림을 책임 진 형수님 丁未正月初五日甲戌, 遭先妣淑人全州李氏喪, 遺安處士諱輔天女. 先妣與先君同年生, 自幼薰陶遺安公敎訓, 已有女士行, 十六歸先君. 時章簡公, 位躋亞卿, 而淸貧如布衣時. 家舍狹窄, 無所容庇, 故少時多在遺安翁側. 中年以來, 食貧喫苦, 流離遷徙, 殆不堪其憂, 而未嘗皺眉, 如固窮讀書之君子也. 及先君筮仕未半歲, 而先妣下世焉. 嗚呼慟哉! 先君嘗言: “吾少時, 嘗有用餘錢二千, 念淑人衣具缺用, 齎衣襆以遺之. 淑人言: ‘伯嫂中饋常艱乏, 何乃以此入私室乎?’ 吾時甚慚其言, 至今不能忘也.” 伯母性度賢淑, 養育先君. 先妣友愛篤至. 而久經貧困, 晚來病在痰火, 言語之間, 或有不能忍煩者. 先妣輒溫顏左右, 默以待之, 得降辭色然後, 始歸私次執業. 及伯母卒而無育, 吾先兄年甫十許歲, 當入..
20.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모시다 王考喪後, 先君事伯兄及嫂氏如父母. 親戚知友間, 多擧溫公之事伯康以況之. 嫂氏李恭人, 飽經貧寒, 鞠瘁已甚, 有時躁鬱不能遣. 先君一以和顏好語慰藉之. 每有所得, 雖甚微細, 必不入私室, 敬納於嫂氏. 해석 王考喪後, 先君事伯兄及嫂氏如父母.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선군은 큰 형과 형수 섬기기를 부모 같이 했다. 親戚知友間, 多擧溫公之事伯康以況之. 친척들과 친구들은 많이들 사마온공이 백강을 섬긴 것을 들어 비유했다. 嫂氏李恭人, 飽經貧寒, 형수인 이공인은 실컷 가난함과 추위를 경험하여 鞠瘁已甚, 有時躁鬱不能遣. 몸이 야윈 게 너무 심하였고 이따금 조울증을 풀어낼 수 없었다. 先君一以和顏好語慰藉之. 선군께선 한결같이 온화한 표정과 좋은 말로 형수를 위로해드렸다. 每有所得, 雖甚微細,..
14. 총평 1 이 글은 전체적으로 ‘김홍연 알아 가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김홍연을 알아감에 따라 작자의 심리상태가 수시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작자는 호기심에서 시작하여 분노와 우호의 감정을 거쳐 연민의 마음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역으로 이 연민의 감정에서 출발해 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의 기저에서 연암은 김홍연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주 따뜻한 눈길을 주고 있다. 김홍연에 대한 작가의 감정 기복에 따라 글도 심하게 출렁거리며 기복과 파란波瀾을 보여준다. 2 만년의 김홍연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이런 존재는 어떻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의 기록이다..
13. 게(偈)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 글 끝에 다음과 같은 게偈를 붙였다.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 흑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 있어야 밝게 보일까?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도 있는데.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또한 저 관음보살은, 변신하여 눈이 일천 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에 쓰리?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몹쓸 병 걸려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大深이 뭇..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어느 날 그는 나의 우거寓居에 찾아와 이런 부탁을 했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 마음인즉슨 진작 죽었고 머리카락만 남아 있을 뿐이며, 거주하는 곳은 모두 중들의 암자입니다. 바라건대 선생의 문장에 의탁해서 후세에 이름을 전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슬펐다. 나는 마침내 그 옛날 함께 산에 노닐던 객과 주고받았던 말을 글로 써서 보내주면서 一日詣余寓邸而請曰: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願托子文而傳焉.”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이 단락에서 연암은 이 글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우거’란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그로부터 9년 뒤다. 나는 평양에서 김을 만날 수 있었다. 누가 그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김홍연입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의 자字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대심! 발승암 아닌가!” 김군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보더니, “어떻게 저를 아시지요?” 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옛날 만폭동에서 이미 자네를 알게 됐지. 집은 어딘가? 옛날에 수집한 물건들은 잘 간직하고 있는가?” 김군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가난해져 다 팔아 버렸지요.” “왜 발승암이라고 하나?” “불행히도 병 때문에 불구가 된 데다 늘그막에 아내도 없어 늘 절집에 붙어사는 까닭에 그렇게 자호自號하지요.” 그 말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옛날의 모습과 태도가 아직 남아 있었..
10. 김홍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백동수 그런데 이 단락에서 연암과 문답을 주고받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 앞 단락에 의하면 그는 본래 김홍연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사람이 백동수白東修(1743~1816)가 아닐까 생각한다. 백동수는 서얼 출신의 무반武班으로, 이덕무의 처남이다. 연암은 35세 때인 1771년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 자와 더불어 명산에 노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용력이 절륜하고 무예에 출중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미한 신분 때문에 몹시 불우하였다. 이 글은 1779년경에 쓴 게 아닌가 추측되는데, 당시 백동수는 건달 신세였다. 훗날 그는 무직武職인 장용영壯勇營 장교將校를 거쳐 박천 군수를 지냈다. 정조 때 왕명으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
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이상 살펴본 것처럼 이 단락은 그 필치가 경쾌하고 해학적이지만 그 속에 깊은 철리哲理가 담겨 있다. 한편 독자는 이 단락에 이르러 비로소 김흥연이 바로 발승이라는 사실을 고지告知 받는다. 그리하여 왜 이 글의 제목이 ‘발승암기髮僧菴記’인지를 간취하게 된다. 이 점 또한 묘미가 있다. 연암은 독자의 심리를 이리저리 저울질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대상 인물의 심리를 통찰하는 데 썩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 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할 만하다. 천하의 문장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이는 20대 중반 무렵에 연암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연암은 이런..
8. 이름이 남길 바라는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가 대꾸가 없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없다’라는 분과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을 허구적으로 설정해 서로 문답하게 하는 글을 쓴 적이 있거늘 지금 나와 그대가 우연히 절벽 아래 흐르는 물가에서 만나 서로 문답하고 있네그려. 먼 훗날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있을 리가 있나’ 선생일 터이니 이른바 발승암이란 자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러자 그는 발끈하여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내 어찌 황당한 말을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정말 김홍연은 존재하외다!” 나는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너무 집요하이. 지난날 왕안석王安石이 「진秦나라를 비판하고 신新나라를 찬미함(劇秦美新)」이라는 글에 대해 변증辨證하면서 ‘이건 필시 곡자운谷..
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이 뉜가?” “김홍연이외다.” “이른바 김홍연은 뉜가?” “그 자字가 대심大深이외다.” “대심이라는 이는 뉜가?” “자호自號를 발승암髮僧菴이라고 하외다.” “이른바 발승암은 뉜가?” 余問: “是人爲誰?” 曰: “金弘淵.” “所謂金弘淵爲誰?” 曰: “字大深.” 曰: “大深者誰歟?” 曰: “是自號髮僧菴.” “所謂髮僧菴誰歟?” 이 단락은 마치 선문답 같다. 단락 전체가 물음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통념과 지식을 허물어뜨려 깨달음, 즉 절대의 진리에 이르는 방편 아닌가. 이 단락에서 연암이 톡톡 던지는 물음은 이런 의미의 선문답적 물음이다. 연암은 먼저 ‘김홍연’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상대방은 ‘대심’이라고 답한다. 연암은 다..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지만 다시 본제本題로 돌아가자. 『사기』 열전 중에 「유협열전」과 「자객열전」이 있다. ‘유협’이란 협객을 말한다. 이 두 편의 열전에서 다룬 유협과 자객은 모두 유교적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부류로서, 질서와 예법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불온시 되거나 비판받아야 할 인간들이다. 그렇건만 사마천은 이들의 미덕을 찬양하고 기리어 역사에 편입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학자들은 두고두고 사마천을 비난하였다. 불온한 인물들을 미화하고 역사에서 다루었다는 게 비난의 이유였다. 연암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사기』 열전의 이 두 편, 특히 「유협열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바로 이런 독서 경험과 관련해 연암은 젊..
5. 왠지 남 같지 않다 했더니 조선 후기 부의 축적으로 협객이 출연하다 조선 후기 도시의 발달과 상업 발전은 중간계급의 성장을 가져왔다. 특히 중인 서리층은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많은 부를 축적해 갔다. 이들의 부富는 판소리를 비롯한 서민 예술의 물질적 기초가 되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은 유흥 공간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서화를 사 모으기도 하고, 골동품이나 값비싼 중국 물건, 사치품 따위로 집을 장식하기도 했다. 혹은 유협遊俠이나 협객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부富는 서유럽의 발흥기 시민계급처럼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그 출로를 찾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의 중간계급은 비록 물질적 힘은 획득했지만 정치적ㆍ사회적 진출의 가능성은 봉쇄되어 있었다. 이 때..
4. 가뭄의 단비처럼 제공된 김홍연의 개인정보 어떤 이가 본래 김金의 행적을 잘 알아 나에게 얘기해줬는데, 그에 의하면 김은 곧 왈짜였다. 왈짜란 대개 여항의 허랑방탕하고 오활한 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른바 검객이나 협객俠客과 같은 부류를 말한다. 그는 젊은 시절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합격했으며, 힘이 세어 범을 때려잡거나 좌우 옆구리에 기생 둘을 끼고 몇 길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쩨쩨하게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이 본래 부유하여 돈을 물 쓰듯 하였고, 고금古今의 유명한 서첩書帖과 좋은 그림, 칼이며 거문고며 골동품, 기이한 꽃과 풀 따위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혹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준마駿馬와 송골매를 늘 ..
3.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무릇 명산을 유람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기이한 경치를 구경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평소 이전에 산에 오른 일을 회상할 적마다 오싹해지며 자신의 무모함을 뉘우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산에 오르면 그만 지난날의 경계를 소홀히 해 가파른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깊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기도 하며, 몸을 모로 하여 아슬아슬하게 썩은 잔도棧道를 밟고 낡은 사다리를 오르기도 하면서 왕왕 천지신명에게 무사하기를 빌며 살아 돌아가지 못할까봐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사朱砂로 사슴 정강이 크기는 될 정도로 큼지막하게 쓴 붉은 글씨가 늙은 나무 등걸과 오래된 등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서렸..
2. 가는 산마다 보이는 그 이름 그 후 나는 나라 안의 명산들을 두루 돌아다닌바,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서西로는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다. 깊숙하고 외딴 곳에 이르러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올 수 없는 곳까지 왔다고 자부할 양이면 그때마다 늘 김홍연이 새겨 놓은 이름자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욕을 했다. “홍연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리도 당돌한가!” 其後余遊歷方內名山, 南登俗離ㆍ伽倻, 西登天摩ㆍ妙香. 所至僻奧, 自謂能窮世人之所不能到, 然常得金所題. 輒發憤罵曰: “何物弘淵, 敢爾唐突耶?” 앞 단락에서 홍연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면, 이 단락에서는 홍연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분노가 명산의 외딴 곳에서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와 계속해서 조우..
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내가 동東으로 금강산을 유람할 적이다. 골짝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옛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써 놓은 게 보였는데 큼지막한 글씨로 깊이들 새겨 놓아 작은 틈도 없었으니 마치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거려 어깨가 부딪는 것 같기도 하고 교오의 묘지에 빽빽이 들어선 무덤 같기도 했다. 옛날에 새긴 이름은 이끼에 덮여 있었고, 새로 쓴 이름은 붉은 글씨가 환히 빛났다.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의 바위 위에 이르매 날아가는 새 그림자도 없었으며 오직 ‘金弘淵김홍연’이라고 새긴 세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심 참 이상하다고 여기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에로부터 관찰사의 위세란 족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하고, 또 저 ..
13. 총평 1 연암은 이 글에서 홍대용과 자신의 우정, 홍대용과 국내 지인들과의 우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하고 있지 않다. 이는 글의 초점을 중국인들고의 우정 쪽에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2 이 글의 주제가 ‘홍대용과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 글을 제대로 읽은 게 못 된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은 비록 몹시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암은 이 방편을 통해 홍대용에 대해, 그리고 당대의 조선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미 많은 말을 했으니 독자들께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3 이 글의 가장 밑바닥에..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런 일에 대해 추론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기는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왜 이 명이 이처럼 삭제되거나 변개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을까하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다. 정말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이 명에 내포된 불온함과 과격함 때문이다. 우선 이 명의 제1구인 ‘宜笑舞歌呼’를 보자. 이 구절은 ‘웃다(笑)’ ‘춤추다(舞)’ ‘노래하다(歌)’ ‘환호하다(呼)’라는 네 개의 동사로..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 명銘은 짧지만 대단히 문제적이다. 연암의 문집 전체가 간행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와서 였다. 당시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돈을 대고 출판을 주관하였다. 이 본本을 보통 박영철본 『연암집』이라 부른다. 그런데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이 명이 빠져 있다. 하지만 『과정록』에는 다음과 같이 이 명을 특별히 소개해 놓고 있다.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면 서호의 벗은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