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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4. 말 잘하는 것과 아리따움을 칭송하는 세상을 미워하다 6-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축타의 말재주와 송조의 미모가 없으면 요즈음 세상에선 환난을 면키 어렵다.” 6-14. 子曰: “不有祝鮀之佞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 공자가 어지럽고 더럽게 느껴지는 세상을 한탄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해석에는 제설이 분분하다. 더러운 세상이 정말 아니꼬와서 두고 못 보겠다는 식의 분노가 서린 공자의 푸념이야말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위대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자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러한 메시지도 ‘성인의 말씀’으로서 거룩하게만 새기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 발랄한 로기온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미 서막에서 이야기했지만 송조는 송나라의 미..
13. 패주할 땐 후미에서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맹지반 6-1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맹지반(孟之反)은 공을 자랑하지 않는구나! 노 나라의 군대가 퇴각할 때에 후미를 맡아 싸웠다. 노나라의 북성 문을 최후로 들어갈 때 말 궁둥이를 채찍질하면서 말했다. ‘내가 용감해서 후방을 맡은 것은 아니다. 말이 시원찮아 뒤처졌을 뿐이다.’” 6-13. 子曰: “孟之反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 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맹지반(孟之反, 멍 즈환, Meng Zhi-fan)은 공자 당대의 인물로서 노나라의 대부라고 한다. 이름이 측(側), 또는 자측(子側). 지반(之反)은 자(字)인데, 그냥 반(反)이라고도 쓴다. 맹자반(孟子反)이라고도 쓴다. 이 전투의 상황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2. 정치엔 인재를 구하는 게 먼저다 6-12.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읍제(邑)가 되었다. 공자께서 자유를 만났을 때 물으시었다: “너는 사람을 얻었느냐?” 6-12. 子游爲武城宰. 子曰: “女得人焉爾乎?” 자유가 대답하였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길을 다닐 적에 골목 지름길로 가는 법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공적인 일이 아니면 한 번도 제 방에 온 적이 없나이다.” 曰: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 공문(孔門)의 활약상의 다양한 면모에 관하여 풍요로운 정보를 제공하 는 위대한 장이라 할 것이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된 것은 애공 12년(BC 483) 전후의 일이며 공자의 귀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69세 ..
본서의 표기체계에 관하여 공자(孔子)는 ‘공쯔’로 표기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내가 198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부터 주장한 것이다. 13경이라는 고전은 어디까지나 중국고전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서 객관화되어야 할 외래문명이다. 수메르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인명을 ‘길가메시’라고 표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식의 독특한 발음으로 표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관한 표기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1985년 1월에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나의 저술을 통하여 발표한 ‘최영애-김용옥 표기법(씨케이 시스템 C.K.System)’은 중국어ㆍ일본어 표기의 문제를 음운학의 성과 위에서 일관된 원칙을..
11. 자하야 너는 군자유가 되어라 6-11. 공자께서 자하(夏)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는 군자유가 되거라. 소인유가 되어서는 아니 되나니!” 6-11.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자하(子夏)에 관해서는 1-7에서 충분히 논의하였다. 군자유와 소인유의 공통분모는 유(儒)이다. 따라서 군자와 소인이 모두 같은 유이며 계급적ㆍ신분적 차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유는 사(士)이며 배우는 자의 통칭이다. 군자와 소인은 같은 지식사회에서 분별되어질 뿐이다. 왜 하필 자하에게 공지는 이 말을 하였을까? ‘위자하왈(謂子夏曰)’이라는 것은 자하를 맞대놓고 얘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너[女]’라는 이인칭을 쓰고 있다. 자하는 문학으로 꼽힌다. 문학이란 요즈음의 문학(literature)이 아..
10. 하려는 의지도 없이 아예 선을 그어버리다 6-10. 염구가 말하였다: “저는 선생님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딸릴 뿐입니다.” 6-10.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힘이 딸리는 자는 중도라도 그만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을 뿐이니라.”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劃” 인간의 나태에 관한 통렬한 비판이다. 앞서 말했듯이, 염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실무형 관료였다. 이렇게 실무에 밝은 자들이 항상 삶의 지혜로 삼는 것은, 스스로의 가능성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여건에 관하여 한계를 긋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명하고 또 슬기롭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
9. 한 대나무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의 즐거움 6-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훌륭하도다! 안회는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청수로 누추한 골목에서 산다.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건만, 안회여! 그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도다. 훌륭하도다! 안회는.” 6-9.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한 인간에 대한 이 이상의 찬사는 없을 것이다. 제자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감동적으로 듬뿍 실려있다. 이 장의 감상 포인트는 ‘그 근심[其憂]’과 ‘그 즐거움[其樂]’이다. ‘그(其)’라는 말에 강조가 놓여있다. 바로 그 근심, 그 누추함에서 그 즐거움을 발견할 줄 아는 지혜, 그 현명함[賢哉!]을 상찬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지혜문학에..
8. 백우에게 이런 병이 들 줄이야 6-8. 백우가 몹쓸 병에 걸렸다. 공자께서 병문안을 가시었다. 6-8. 伯牛有疾, 子問之. 방안으로 들어가시지는 않으시고 창으로 그 손만 잡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맥이 없구나! 명이 다 했구나!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自牖執其手, 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참으로 중후한 공자의 인품과 삶의 비운의 한 장면을 가슴 저미게 보여주는 훌륭한 장이다. 이런 파편은 거의 공자 생전 그대로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 등장하는 염백우는 염구ㆍ염웅과 함께 노나라 염씨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십철(四科十哲)에 덕행으로 손꼽힌 공문의 무게있는 인물이다. 성이 염(冉) 이름이 경(耕), 자..
7. 계씨의 신하되는 걸 거절한 민자건 6-7. 계씨가 민자건(閔子)을 비읍의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였다. 6-7. 季氏使閔子騫爲費宰. 민자건은 심부름 온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해 말 좀 잘 해다오. 또다시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汶水)가에 있을 것이다.”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여기 민자건(閔子騫, 민 쯔치엔, Min Zi-gian)이 처음 나오고 있다. 우선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를 보자. 민손은 노나라사람이다. 자가 자건이다. 덕행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공자는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閔損, 魯人, 字子騫. 以德行著名, 孔子稱其孝焉. 그리고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논어』 기사를 편집한 것 외로는 다음과 같은 정보만 있다. 민..
6. 중유와 자공과 염구는 정치할 만한가 6-6. 계강자(季康子)가 여쭈었다: “중유(仲由: 자로)는 정치를 맡길 만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는 과단성이 있으니 정치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6-6. 季康子問: “仲由可使從政也與?” 子曰: “由也果, 於從政乎何有?” 여쭈었다: “사(賜: 자공)는 정치를 맡길 만합니까?” 말씀하시었다. “사는 사리에 통달했으니 정치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曰: “賜也, 可使從政也與?” 曰: “賜也達, 於從政乎何有?” 여쭈었다: “구(求: 염유)는 정치를 맡길 만합니까?” 말씀하시었다: “구는 다재다능하니 정치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曰: “求也, 可使從政也與?” 曰: “求也藝, 於從政乎何有?” 여기 공자에게 질문을 하는 계강자는 ..
5. 3개월 간 인을 떠나지 않았던 안회 6-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안회는 말이다, 그 마음이 석 달 줄곧 인(仁)을 어기는 법이 없나니. 석 달이 지나도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인(仁)한 채로 흘러갈 뿐이다.” 6-5.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이 구절도 대강의 뜻은 알아차릴 수 있으나 주어가 명료하지 않아 해석의 여지가 너무도 많다. 1 고주는 ‘기여(其餘)’를 공문에서 안회 이외의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풀었다. 타 제자들은 잠시만 인에 이를 때가 있고 오로지 안회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言餘人暫有至仁時, 唯回移時而不變也]. 나는 이 설이 매우 졸렬하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안회와 여타의 학생을 그런 식으로 분별심을 ..
4. 중궁은 자질이 있기에 쓰일 것이다 6-4, 공자께서 중궁(仲弓)을 평하여 말씀하시었다: “보통 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어 아름답고 각진 뿔이 웅장하다면 사람들이 제물로 쓰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산천의 하느님께서 어찌 그것을 내버려 두겠느냐?” 6-4. 子謂仲弓曰: “犂牛之子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남면할 만하다고 평한 중궁에 관하여서는 본 편 첫머리(6-1)에서 설진(說盡)하였다. 중궁은 염옹(冉雍)의 자(字)이다. 염웅은 앞서 말했지만 비천한 집 안의 소생이다. 따라서 ‘황소의 새끼[리우(犂牛)]’로 비유한 것은 그 천한 소생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공가(公家)에서는 제물로 쓰는 특별한 소를 길렀다. 그러나 그러한 소가 모자랄 때에는, 민가에서도 털에 붉은 기가 돌며 뿔이 아주 ..
3. 공서적과 원헌의 행동방식 차이 6-3A. 자화(子華: 공서화의 자字)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였다. 염자(冉子)가 자화의 홀로 남을 어미를 위하여 곡식을 청하였다. 6-3A. 子華使於齊, 冉子爲其母請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한 말이나 주려무나.” 子曰: “與之釜.” 더 많이 청하자, 말씀하시었다: “그럼 한 가마 정도 주렴.” 그런데 염자는 곡식 다섯 섬을 주고 말았다. 請益. 曰: “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공자께서 내심 불쾌히 여겨 말씀하시었다: “적(赤: 공서화의 이름)이 제나라로 가는데, 살찐 말수레를 타고 가볍고 호사한 가죽옷을 입고 가는구나. 나는 들었지. 군자는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어도 부유한 사람을 보태주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 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
2. 안연의 호학 6-2. 애공(哀公)이 물었다: “제자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6-2.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공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안회顔回)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은 두 번 다시 반복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가 지금은 이 세상에 없으니, 아직 배우기를 좋아한다 할 만한 자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우리 또래의 사람들만 해도, 좀 고전의 소양이 있는 집안에서 큰 사람이라면, 공자의 안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공자가 그리는 안회의 모습에 서 얻어지는 교훈은 항상 몸에 배이도록 들었던 『논어』의 ..
1. 중궁은 남면할 수 있겠구나 6-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옹(雍: 중궁의 이름)은 남면케 할 만하다.” 6-1. 子曰: “雍也可使南面.” 중궁(仲弓)이 자상백자(子桑伯子)에 관하여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의 간솔함은 괜찮다.” 仲弓問子桑伯子, 子曰: “可也簡.” 중궁이 말하였다: “자기는 공경함에 거(居)하면서 남에게 간솔하게 행동하고, 그렇게 백성들을 살핀다면 괜찮다고 할 만도 하겠지요? 그러나 자기도 간솔함에 거(居)하면서 남에게도 간솔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간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仲弓曰: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大簡乎?”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옹의 말이 옳다.” 子曰: “雍之言然.” 『논어』의 모든 장이 그러하듯이, 본 장의 의..
옹야 제육(雍也 第六) 편해(篇解) 이 편의 대체적 구성에 관하여 주희는 매우 재미있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옹야」편은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편의 제14장 이전은 그 대의가 「공야장(公冶長)」편과 같다[범이십팔장(凡二十八章). 편내제십사장이전(篇內第十四章以前), 대의여전편동(大意與前篇同)]’ 이것은 곧 「옹야」편의 28장이 앞의 14장과 뒤의 14장으로 그 성격이 대별되며, 앞 14장은 전편인 「공야장」과 그 대의가 연속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주희는 「공야장」편의 성격을 ‘옛과 지금의 인물들의 현부 득실을 논함[논고금인물현부득실(論古今人物賢否得失)]’이라 규정했으므로, 이것은 「옹야」편의 전14장 또한 고금인물들의 현부 득실을 논하는 성격에서 그 대의가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
27. 호학(好學)해야만 한다 5-2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열 가호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와 같이 충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27.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논어』 전체 중에서 참으로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명구 중의 명구로서, 나 도올이 항상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는 대목이다. ‘십실지읍(十室之邑)’이란 열 가호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邑]이다. 읍(邑)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강조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작은 마을에도 충직하고 신험있는 말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충신(忠信)한 자들이란 좋은 사람들이요, 착한 사람들이다. 충(忠)과 신..
26.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자책하는 사람 5-2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 절망스럽구나!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내심 스스로 자책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5-26.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여기 ‘이의호(已矣乎)’라는 표현은 「위령공」 12, ‘오미견호덕여호색자야(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라는 구문 앞에 한번 다시 나오고 있다. 이것은 주자가 주석 한 대로 종내 그러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마는 것을 깊게 탄식하는 말이다[已矣乎者, 恐其終不得見而歎之也]. ‘아~ 정말 이젠 틀렸구나!’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현대 중국어의 표현으로는 ‘쑤안러(算了)’정도의 느낌이 될 것이다. ‘송(訟)’이란 원래 공자의 시대에도 재판의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장은 그러한 법제적 용어를..
25. 안연과 자로와 공자가 각자의 포부를 얘기하다 5-25.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각기 품고 있는 뜻을 한번 말해보지 않으련?” 5-25. 顔淵, 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자로가 말하였다: “원컨대, 수레와 말, 웃 도리와 값비싼 가벼운 가죽외투를 친구와 함께 쓰다가, 다 헤지더라도 유감이 없고자 하옵니다.”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안연이 말하였다: “원컨대, 잘함을 자랑치 아니하고, 공로를 드러내지 아니하고자 하옵니다.”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자로가 말하였다: “이제는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하옵니다.” 子路曰: “願聞子之志.”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늙은이로부터는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친구로부터는 믿음직..
24. 좌구명이 부끄럽다고 여긴 사람 5-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번지르르한 말, 꾸민 얼굴빛, 지나친 공손, 이것들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 싫어하는 감정을 감추고 그 사람을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 5-24. 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14장에서 24장까지, 21장 한 장을 예외로 한다면, 모두 공자의 제자 이외의 인물에 대한 공자의 평어이다. 그 중에서 14장 ~ 20장의 일곱 장은 공자보다 앞선 동시대 열국의 대부에 대한 인물평이라는 의미맥락에서는 매우 동질적이다. 그런데 21장부터 24장까지는 각 장이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21..
23. 미생고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옆집에서 빌려서주다 5-2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 이르는가? 어떤 사람이 미생고에게 초를 좀 얻으려 하자, 없으면 없다 말할 것이지 얼른 옆집에서 빌어 다가 주는구나!” 5-23.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鄰而與之.” 미생고(微生高)라는 사람은 문맥으로 보건대 공자 당대에 정직한 사람으로 평판이 높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는 공자가 사는 생활권에서 이름이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 동네사람이었기 때문에 옆집에서 무엇을 꾸어오는 것까지도 다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공자는 미생고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주변사람들의 평판에 찬물을 끼얹는다.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고 말하는가? 미생고는 정직하지 않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이..
22. 백이와 숙제는 묵은 원한으로 괴롭히지 않았다 5-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이와 숙제는 사람들이 저지른 지난 잘못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5-22. 子曰: “伯夷ㆍ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임마누엘 칸트의 신(神)의 실존(實存, die Existenz Gottes)에 대한 문제의식은 바로 인간의 도덕성(Sittlichkeit)과 행복(Glückseligkeit)의 불일치라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으로 선업(善業)을 쌓는 인간에게 그 선업에 비례하여 행복이 보장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행복이란 현세에 사는 이성 존재자가 자기의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Glückselig..
21. 우리 학단의 소자들이 광간하구나 5-21.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시었을 때, 말씀하시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오당의 어린 제자들이 박력있고 뜻이 커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를 모르는구나.” 5-21. 子在陳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모든 교육자들에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멋드러진 『논어』의 한 구절이다. 교육자로서 이와 같은 설레임을 느낄 수 없다면 어찌 그를 교육자라 이를 수 있을까보냐! 이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귀로(歸魯)라는 사건을 직면하고 있는 공자의 인간적 ‘그리움’을 묘사한 탁월한 파편이다. 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문장을 발하고 있다. 후학의 교육이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
20. 영무자의 지혜로움은 따라할 수 있지만, 어리석음은 따라할 수 없다 5-20.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영무자(甯武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을 따를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르기 어렵다.” 5-20. 子曰: “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영무자(甯武子)의 실명은 영유(甯兪)다. 춘추 초기, 공자보다 약 1세기를 앞선 진문공(晋文公)의 시대, 위(衛)나라의 가로(家老)였다. 진문공(晋文公)은 제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춘추의 제2의 패자가 된 사람으로, 19년의 기나긴 유랑생활 끝에 군위(君位)에 오른 그 유명한 헌공의 아들 공자 중이(重耳)이다. 이때 위(衛)나라는 북방의 진(晋)나라와 남방의 초(楚)..
19. 세 번 생각하지 말고 두 번이면 된다 5-19. 계문자(李文子)는 세 번 곰곰이 생각한 뒤에야 행동하였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두 번이면 충분하다.” 5-19.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 曰: “再, 斯可矣.” 계문자(李文子, ?~BC 568)는 삼환(三桓) 중의 막강한 계씨가문의 제3대 영주로서 노나라의 문공(文公)ㆍ선공(宣公)ㆍ성공(成公)ㆍ양공(襄公), 4대를 섬기면서 깊은 신뢰를 쌓은 인물이다. 그는 계씨가문의 대부(大夫)라는 우리의 상식적 편견과는 달리 노나라의 현인으로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훌륭한 인물이었다. 매우 상식적인 사람으로서 재지(才知)도 있었고, 매우 질소(質素)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의 명(名)은 행보(行父)이고, 문자(文子)는 시호이다. 『춘추경』..
18. 영윤인 자윤은 충성스럽고 진자문은 청렴하다 5-18 자장이 여쭈었다: “영윤 자문이 세 번 벼슬하여 영윤이 되었는데도, 그때마다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그때마다 서운해 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아보던 영윤의 정사를 반드시 새로 부임해온 영윤에게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이만하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충성스럽다 할 만하다.” 5-18. 子張問曰: “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인하다고 할 만합니까?”하고 다시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까지야 말할 수 있으리오?”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장은 또 여쭈었다: “최자가 ..
17. 장문중은 지혜롭지 못하다 5-1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장문중이 큰 거북딱지를 걸어두었고, 기둥머리 두공에는 산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동자기둥에는 수초모양을 그렸으니, 어찌 그를 지혜롭다 하겠는가?” 5-17. 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장문중(臧文仲)의 성(姓)은 장손(臧孫)이요, 명(名)은 진(辰), 중(仲)은 자(字)요, 문(文)은 시호(諡號)이다. 장손진(臧孫辰)은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대부였다. 그러나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은 아니고, 춘추 초기 진문공(晋文公)이 패자(覇者)가 되었을 시기의 인물이다. 장공(莊公)ㆍ민공(閔公)ㆍ희공(僖公)ㆍ문공(文公) 4대에 걸쳐 50년 가까이 노나라의 대부로서 활약하였다. 『춘추(春秋)』 경문(經文), 문공십년춘(文公十年春, ..
16. 공자가 존경하던 선배님 안영 5-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안평중(晏平仲)은 사람과 잘 사귀는 구나! 오래 사귈수록 오히려 공경하니.” 5-16.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안평중(晏平仲, 옌 핑쫑, Yan Ping-zhong)이란 공자(孔子)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공자보다 약간 선배며, 자산(子産)보다는 약간 후배인, 당시의 대국 제(齊)나라의 재상 안영(晏嬰)을 가리킨다. 안(晏)은 성이요, 영(嬰)은 이름이요, 평(平)은 시호며, 중(仲)은 자이다. 평중(平仲)이 자라는 설도 있다. BC 567년에 제나라에 멸망당한 내(萊)나라의 이유(夷維)【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고밀현(高密縣)】 사람으로 제(齊)나라의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섬겼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15. 선배 정자산을 평가한 공자 5-15. 공자께서 자산을 평하시어 말씀하시었다: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으니, 자기의 몸가짐이 공손하며, 윗사람을 섬김이 공경스러우며, 백성을 기름이 은혜로우며, 백성을 부림이 의로운 것이다.” 5-15.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자산(子産, 쯔 츠안, Zi-chan)은 정(鄭)나라의 왕족출신의 재상인 공손교(公孫僑)의 자(字)이다. 자를 자미(子美)라고도 한다. 교(橋)는 그의 명(名)이다. 그는 정나라 목공(穆公)의 손(孫)이며, 자국(子國)의 아들로 태어나, BC 554년에 경(卿)이 되었고, BC 543년에 정권을 장악하였다. 공자보다 1세대가 빠른 명망 높은 정치가였다. 자산이 죽은 것이 노(魯)나라 소..
14. 공문자가 문(文)이란 시호를 받은 이유 5-14. 자공이 여쭈어 말씀드렸다: “공문자(孔文子)를 어찌하여 문(文)이라 시호 하였습니까?” 5-14.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영민한 사람인데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문이라 일컬은 것이다.”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이 14장에서부터 분위기는 일신된다. 여기서부터 24장까지는 당대 혹은 과거의 사회적 전범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공자의 평어가 수록되어 있다. 공자의 학내의 가까운 제자의 범위를 벗어난 인물들에 대한 평론이 수집되어 있는 것이다. 21장만이 공자의 삶의 역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예외적이다. 잘못 삽입된 파편일 수도 있다..
13. 자로는 실천하지 못하고선 다시 듣는 걸 두려워하다 5-13. 자로는 좋은 가르침을 듣고 아직 미처 실행하지 못했으면, 행여 또 다른 가르침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 5-13.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의 우직함과 진실함을 잘 나타내는 명구로서, 듣는 이의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깊은 파편이다. 이것은 자로의 독백도 아니요, 자로에 대한 공자의 평어도 아니다. 자로를 관찰해온 어떤 사람이 자료에 관하여 평한 것을 여기 담아놓은 것이다. 브룩스는 이 파편이 자로에 관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실려있는 「선진(先進)」편으로 삽입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자로에 관한 평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공자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평론이므로, 공자의 제자평론과 양식은 다를지라도 앞의 컬렉션과 동일한 맥락..
12. 성과 천도를 거의 말하지 않던 공자 5-12.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의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께서 인간의 본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얻어 들을 수가 없다.” 5-12.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1장부터 11장까지는 모두 공자가 주변의 친근한 제자들을 평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12장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이 공자를 평한 이야기다. 1장부터 13장까지를 공자의 제자에 대한 평어 모음이라고 말한다면, 그 중 12장과 13장은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11장까지의 편집에 대한 부록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브룩스는 본 장을 양화편 뒤로 재편시켰다. 아마도 이것은 자 공이 훗날에 그의 스승을 회상하면서 한 이야기로서 후대에 구성..
11.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다 5-11. 자공이 말하였다. “저는 남이 저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남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5-11.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야! 그것은 네가 쉽게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이 장에 대한 해석은 미묘한 차이 같지만, 신주와 고주의 해석이 크게 다르다. 나는 고주의 해석을 따랐다. 고주와 신주의 차이는 자공의 제1문장과 제2문장을 단절적으로 보느냐, 연속적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고주는 양자를 단절적으로 파악하는데 반하여, 신주는 양자를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고주는 우선 ‘가(加)’라는 동사를..
10. 나는 굳센 사람을 보질 못했다 5-10.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아직도 참으로 강(剛)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 5-10. 子曰: “吾未見剛者.”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장(申棖)이 있지 않습니까?” 或對曰: “申棖.”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신장은 항상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니 어찌 그를 강하다 하리오?” 子曰: “棖也慾, 焉得剛?” 고주는 신장(申棖)을 단지 노(魯)나라 사람이라고만 했을 뿐 그 외의 정보를 주지 않았다[苞氏曰: “申棖, 魯人也”]. 신장(申棖)이라는 사람이 과연 공자의 제자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주자는 신장(申棖)을 ‘제자성명(弟子姓名)’이라 했으나 별 근거는 없다.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는 신(申)씨 성을 가진 제자로서 신적(..
9. 재아, 낮잠을 자다 5-9.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가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은 흙손질할 수가 없다. 내 재여에 대하여 뭔 꾸짖을 일이 있겠는가?” 5-9. 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於予與何誅.”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처음에는 남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으나, 이제 나는 남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재여 때문에도 이 같은 습관을 고치게 되었노라.”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논어』 전편을 통하여 재여는 공자에게 미움을 사는 제자의 모습으로 거의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다. 재여의 자(字)는 자아(子我)이며..
8. 자공과 안회, 둘 중에 누가 나은가? 5-8. 공자께서 자공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와 안회, 누가 더 나으냐?” 5-8.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나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이옵니다.”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래,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그래! 나와 너 두 사람 모두 안회만 같지 못하다.”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안회를 공자보다 30세 연하라고 한다면, 자공은 31세 연하이니까, 자공은 안회보다 한 살 어릴 뿐이다. 즉 이 두 사람은 동년배의 사람들로서 공자의 총애를 받았던 탁월한 동량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공자문하..
8년의 역사가 담긴 임고반을 나가며 당연히 ‘임용고시 공부=임고반에서 공부’를 생각했다. 예전에 공부를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임고반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었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2018년부터도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기에 ‘전주에 내려와 공부하고 싶은 이유 = 임고반에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던 임용고시반을 임용고시도 보기 전에 나가려는 것이니, 이제 임용공부를 더 이상 안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사정이 생긴 것인지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 21년 3월 25일에 임고반에 입실했다. 늘 좋아하는 창가자리에 배정받아 정말 기뻤다. 8년의 역사가 알알이 새겨진 장소 전주대 사범대에 임용고시반이 생긴 건 2005년이나 2006년쯤으..
종횡무진 한국사 목차 남경태 연표 선사 ~ 위만조선 삼국건국 ~ 신라통일 남북국 고려 조선 건국~연산군 중종~임란 발발 임란~정조 순조~조선 말기 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 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며 1부 깨어나는 역사 제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단군) 누락된 시대(단군신화) 두 번째 지배집단(기자조선) 중국과의 접촉(위만조선) 지배인가, 전파인가(한4군) 제2장 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새 역사의 출발점(주몽, 온조, 박혁거세)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삼한, 유리왕, 대무신왕, 낙랑공주) 고구려의 성장통(민중왕,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물보다 흐린 피(고국천왕..
역사적 반성을 위해 과거가 비관적이라 해서 미래도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굴곡과 질곡이 많은 역사일수록 미래에는 더 큰 도약을 꿈꿀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그것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자각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대개의 나라들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한 번쯤은 모든 질서가 뒤집어지는 ‘혁명’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숱한 고통을 넘겼으면서도 정작 생산적인 혁명의 진통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민중처럼 지배층의 잘못에 너그러운 경우도 보기 드물다. 다른 나라의 역사 같으면 얼마든지 쿠데타나 민중의 반란으로 지배층이 교체되어야 마땅했을 상황에서도 우리 역사에서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고려의 현종(顯宗)과 조선의 선조(宣祖)가 북쪽..
에필로그: 한국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행중인 역사 1948년 남북한의 경쟁적인 단독 정부 수립으로 한반도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우선 이제부터는 하나가 아닌 둘의 역사다. 더욱이 이 현대사는 아직 진행중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에 가깝다. 이 책을 이 시점에서 끝맺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적어도 남한에 관한 한 1948년부터 지금까지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유사 이래 최대의 비극이라 할 소모적인 내전이 있었는가 하면, 이승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겪었고, 그 뒤에도 다시 군사독재와 문민독재가 되풀이되는 간단치 않은 굴곡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1997년부터 몰아친 경제 위기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향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주목..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③ 이제 거칠 게 아무것도 없어진 이승만과 김일성은 집권을 향한 탄탄대로에 들어선다. 이승만은 곧바로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해서 제헌국회를 구성했으며, 7월 17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발표했고, 8월 15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더 꿈에 그리던 대통령이 되었다【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대통령이 된 셈인데, 아마 임시정부 시절은 그로서도 잊고 싶은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헌법 전문(前文)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 채택된 제1공화국의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전문의 내용을 보면,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②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마음은 착잡하고 초조하다【그들과 답답한 심정을 함께 나눌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되었다. 남한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그는 1946년 초부터 김규식, 허헌 등과 함께 좌우 합작을 도모했으며, 여기서 성과를 얻어 미 군정청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아마 남북 분단도 극복될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여운형은 평양에까지 가서 김일성을 만났으나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다(이때 이미 김일성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합작이 아니면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이후 그는 온건 좌파로 세력을 재편하고 계속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가 한지근이라는 자에게 암살당했는데, 범인은 이승만 계열의 똘마니였..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 더 나은 후보들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결격사유가 가장 크고 가장 권력욕에 찌든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한반도 전체로 볼 때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조금만 더 역사 의식을 갖추었거나, 조금만 더 권력욕이 덜한 인물들이 집권했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과 김일성이 대권후보로 자리잡으면서부터 즉각 분단화 작업이 시작된다. 하기야, 혹시라도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그들의 권력은 보장받을 수 없을 테니 그들로서는 필사적으로 분단을 바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때마침 민족적인 과제로 부상한 남북협상을 그들이 내심으로 환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 서로 다른 주둔..
분열로 날린 기회③ 그러나 북한으로 건너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인물들의 팔자도 편한 것은 못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이 실력자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원래 김일성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을 때 북조선 분국을 맡은 책임자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만주의 유격대였지만 공산당 조직의 정통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었으므로 북조선은 ‘분국’의 위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실세인 김일성이 마냥 조선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려 할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남한의 공산당은 미 군정청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세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1946년 4월 김일성은 북조선 분국을 북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독립하는데, 이때부터 원래의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으로 불리게 ..
분열로 날린 기회② 이제 남은 것은 아직 취약한 대국민적 인기를 높이는 일인데, 때마침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를 향후 5년간 신탁통치하자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없던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이승만에게는 더없이 좋은 건수다.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한국민들에게 신탁통치란 그 지긋지긋한 식민지 지배의 연장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탁통치가 시행된다면 이승만이 바라고 바라던 대통령의 꿈은 무기한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민적 여망과 개인적 야망을 한데 모아 이승만은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계획한다. 여기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명망가들이 가세하면서 이승만의 반탁 운동은 ..
분열로 날린 기회 미 군정청의 의도는 어떻든 간에 한국민의 손에 남한을 맡겨두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한을 일본에 부역한 준전범국으로 보던 태도는 곧 사라졌으나 그런 미군의 기본 입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마 미군은 남한 정치 세력들의 수권 능력도 의문시했겠지만, 여기에는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예상 외로 남한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해진 것도 한몫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정청은 인공을 거부한 데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오랜 망명과 항일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여운형의 인공과 김구의 임시정부는 둘 다 결격사유는 좀 있지만 어쨌든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반도의 정권 담당자로서 큰 ..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② 이런 미군의 의도를 모르는 채(혹은 무시한 채) 건국 과정을 지휘하던 건준은 1945년 9월 초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대표자들을 뽑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이 일방적인 선언만으로 세워질 수 있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일단 건준은 그것으로 모든 활동을 마치고 발전적으로 해산했지만, 문제는 한반도의 오너인 미군이 모든 변화를 곧 ‘말썽’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인공이 내각 인선을 마친 9월 11일 같은 날에 미 군정청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공과는 별도로 미 군정청은 미군 장교들을 각 부처의 장관으로 임명해서 또 하나의 ‘내각’을 급조했으며, 미 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아니나 다..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남의 손으로 맞은 해방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리라고 믿은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일본이 세계 최강인 미국을 물리치기 어렵다는 것은 객관적인 전력상 명백했으나 40년이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해방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회의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일본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어도, 또 1945년 초에 미군이 유황도와 오키나와까지 진출해서 일본 열도의 직접 공략을 눈앞에 두었어도, 사람들은 일본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막바지에 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시퍼런 서슬에 눌려 변변한 투쟁을 ..
모두가 침묵한 때④ 조선공산당의 리더인 박헌영(朴憲永, 1900 ~ 55)은 1939년에 만기출소한 뒤 기와공장에 인부로 위장취업해서 동료 공산주의자들과 비밀리에 안부만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보다도 더 편하게 험한 시절을 보낸 사람은 김일성이다. 처음부터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던 그는 1940년 동북항일연군이 해체되자 이듬해 동료 대원들과 함께 소련으로 가서 소련군 장교가 되어 해방될 때까지 간부 훈련을 받으며 지냈다. 정작 조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을 때 그는 투쟁을 포기하고 차후 권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될 '이력서 만들기' 에 주력했던 것이다. 모두가 일어나서 가장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야 할 때 오히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죽여 버렸다. 해방 직후 연합국 측이 한반도를 ‘준전범국..
모두가 침묵한 때③ 총독부의 치졸한 일체화 정책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의 역사 전체를 식민사관으로 도배한 『조선사(朝鮮史)』 37권을 간행한 것은 그나마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이름으로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배하도록 한다거나, 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외우도록 한 것은 정책이라기보다는 조잡의 극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968년 박정희는 독재정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걸 만들어 국민들에게 외우도록 강요했는데, 필경 황국신민서사에서 커닝한 구상일 것이다). 그에 비해서는 차라리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이나 동척의 활동이 오히려 식민지 지배에 어울리는 정책이 아니었을..
모두가 침묵한 때② 1920년대 후반 한때 유화 분위기를 보였던 일본은 전쟁 일정이 가시화되면서 다시금 탄압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다. 그 다급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유사 이래 어느 억압자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교활하면서도 치졸하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던 총독부는 이를 위해 우선 일본과 조선이 한몸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내건 구호가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라는 것이다(‘皇國’과 ‘內’란 물론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선일체라면 일본과 조선이 차별과 구별이 없는 공동체라는 뜻일 텐데, 어찌 보면 취지는 괜찮은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공동체란 삶과 행복을 함께 하자는 게 아니..
모두가 침묵한 때 히틀러의 도발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이미 1938년에 일본 군부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아마 2차 대전에 연루되는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른 스타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빠르게 운신한 이면에는 사실 중대한 오판이 있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예상한 대로 중국군은 홍군과 조선 유격대까지 가세했어도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륙을 먹어들어갈수록 중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민중 전체를 상대로 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아무래도 장기화될 전망이 커졌다. 게다가 이미 장악한 중국의 동해안도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은 점령지를 수비할 병력조차 모자랄 정도였다. 자칫하..
홍군 속의 조선군② 물론 장제스는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따랐겠지만 마오쩌둥의 8ㆍ1선언은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적시타였다. 특히 그동안 만주 일대에서 턱없이 부족한 화력과 보급품에 오로지 불굴의 투지만을 불살라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조선의 독립군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통일적인 지도부가 생겼으니 이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 아니라 일본군과 정식으로 맞붙어 볼 수도 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다. 그래서 선언이 발표된 바로 다음 달인 1935년 9월 만주 지역의 모든 항일 조직들은 한데 뭉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이루었다. 모두 3로군으로 구성된 이 조직에서 조선 독립군은 주로 1로군에 편입되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최용건(崔庸健, 1..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 3ㆍ1운동이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을 낳았듯이 중국의 5ㆍ4운동도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항일운동의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다만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고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의 본산인 소련과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탓에 중국공산당은 한반도보다 5년 앞선 1920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했고, 중국은 대표적인 식민지ㆍ종속국으로서 반봉건(半封建) 사회였으니, 공산당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성격까지 같을 수는 없다. 일단 소련의 권유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우익의 국민당과 합작(1차 국공합작)을 이루고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곧 합작이 깨지면서 소련 측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
일본의 야망③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조선의 항일운동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 항일의 과제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게도 발등의 불이 된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비록 분열과 재집결을 거듭하는 문제점은 있으나 그래도 항일운동의 조직적 지도부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미 5년 전의 6ㆍ10만세운동을 통해 이 장점은 여실히 발휘된 바 있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장례식에 맞춰 권오설(權五卨, 1899 ~ 1930), 김단야(金丹冶)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학생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은 운동 지도부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순종은 아버지처럼 장례식을 통해 민족에게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사건에 힘입어 그 이듬해 젊은 조선공산당원들과 원로..
일본의 야망② 이제 일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독점 자본주의로의 길, 이미 일본은 유럽 열강 어느 나라에도 뒤질 게 없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양식 ‘정통’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자격이 충분하다. 다른 하나는 군국주의로의 길, 군사적으로도 세계 정상급인 일본은 경제적인 침략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실행할 힘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 경제적 노선과 군사적 노선, 이 두 가지 중 일본이 택한 것은 뭘까? 힌트는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수상이 군부의 손에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시점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1929년의 세계대공황이 없었다면 혹시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 즉 정상적인 제국주의화의 길로 나아갔을..
일본의 야망 1차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사실 커다란 역설이다. 비록 박쥐처럼 이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체질상’ 동맹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그런 점은 원래 독일에 붙으려 했다가 달마치야 해안지대를 주겠다는 연합국 측의 막판 제의에 마음을 돌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같은 색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트너를 이루게 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국의 주축은 시민혁명과 의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거친 ‘정상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인 데 반해 일본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시민사회의 토대가 취약하고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게다가 일본은 군국주의적 색채마저 농후한 나라였으니, 종전 후 평화를..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③ 그렇다면 국내에는 항일운동을 지도할 주체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3ㆍ1운동은 중국의 망명정부만 낳은 게 아니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몇 년 뒤인 1925년 4월 17일 김재봉(金在鳳. 1890 ∼ 1944), 김원봉(金元鳳, 1898 ~ ?), 이여성(李如星, 1901 ~ ?) 등의 젊은 청년들은 서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3ㆍ1운동의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임시정부는 기껏해야 의병 활동의 경력을 가진 노인네 정객들의 친목 조직에 불과한 데 비해 조선공산당은 독립에 대한 신념과 그 신념을 실천할 의지를 지닌 진보적 청년들의 조직이었으므로 두 단체는 단지 연배의 차이만이 아닌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실제로 그 전..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② 사실 조선에서는 10년 동안 일본의 강압적 지배에 대한 반일 감정이 축적되어 왔거니와 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될 만한 분위기도 팽배해 있었다. 1919년 1월 고종(高宗)이 70년에 가까운 욕된 삶을 마감하고 죽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던 것이다. 물론 근거없는 소문이었고 또 고종에게 조선 민중이 애정을 품을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식민지 세상에서 겪는 설움은 설사 헛소문이라 해도, 설사 못난 국왕이라 해도 폭발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가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저명 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는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원래 거사 일자는 3월 3일 고종(高宗..
세계적 모순의 집약지 한반도에서 동척의 활동과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0년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은 한반도의 사정도 아니었고 식민지ㆍ종속국의 문제도 아니었다. 당시 유럽 세계는 물론이고 멀리 극동의 중국과 일본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는 1914년 6월 28일 발칸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연합국)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동맹국)이 도전한 이 전쟁은, 이미 전 세기 말부터 증폭돼 오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간의 다툼이 빚어낸 사건이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4장 참조). 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도 그렇고 전장도 유럽이었으니 한반도에는 별 영향이 없어야겠지만, 중국과 일본이 참전을 선언했기에 문제가 된다. 중국..
주식회사와 토지조사③ 한일합병이 정식 조인되기 전인 1908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라는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곧이어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합자회사라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지만, 창립 당시 본사는 서울에 두었으므로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인 셈이다. 동척을 만든 일본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동척을 통해 한반도를 경제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물론, 장차 만주를 침략할 때 경제적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데 있었다. 우선 최고 책임자인 총재부터가 일본군 현역 육군 중장인 데서도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앞서 말했듯이 당시 일본 정부는 군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합병과 더불어 동척은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다. 1차 목표는 조선 내의 토지다. 우선 동척은 주로 곡창지대의 조선..
주식회사와 토지조사② 그에 비해 일본은 역사적으로도 봉건 영주들이 각자 자신의 장원을 소유하는 방식의 토지제도를 취하고 있었던 데다【중세 일본의 경우 한반도와 비슷한 제도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조세를 수취하는 반전제(班田制)가 있었으나, 이 제도의 적용 단위는 한반도의 경우처럼 나라 전체가 아니라 장원이었다. 즉 봉건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반전제를 시행하면서 독자적으로 조세를 수취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 역사에서는 이 장원을 ‘나라(國, 구니)’라고 불렀으므로, 정치적 위상으로만 비교해 보면 일본의 한 지방은 곧 한반도 왕조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경우처럼 ‘독자적인 천하’의 역사를 꾸려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적 토지 등기제도가 성..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주식회사와 토지조사 그 이름으로 보나, 조약의 취지로 보나 한일합병이란 일본과 조선을 한 나라로 통합시킨 조약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합병이라면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처럼 되었다는 뜻일 텐데, 일본 정부는 조선을 지방으로 대우하기보다는 착취하고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조약의 제1조는 ‘한반도 전체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으니 도저히 정상적인(?) 합병 조약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일본은 애초부터 한반도를 동반자가 아닌 소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도 순종(純宗)은 사직을 보존했고 이완용은 권력과 부를 챙겼으니 합병에서 밑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합병을 환영한 그들..
진정한 치욕이란③ 그럼 나라를 빼앗긴 데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당연히 순종과 이완용에게 물어야 한다. 비록 일본의 압력 앞에 그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아무리 바지 저고리라고 해도 일국의 왕과 전권대신이라면 그 상징에 걸맞는 현실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이 점은 앞서 살펴본 사대부(士大夫) 시대의 조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에 불과했다. 따라서 사대부 세력이 권력다툼의 과정에서 국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집권을 공식적으로 추인받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국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상황의 반전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게 중요하다(비록 사대부들의 입김이 컸다고는 하나 예컨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
진정한 치욕이란② 어쨌든 이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별도의 정부는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즉각 해체되고 그 대신 일본 제국정부의 위임을 받아서 한반도를 지배할 총독부(總督府)가 탄생한다.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자동 승격되었고,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그의 충실한 파트너인 이완용은 한 제국의 총리대신이란 직책에서 일개 총독부의 고문이 되었으니 강등된 것이었으나, 원래 제국보다 총독부가 높았으니 실은 승진인 셈이다. 또한 3년 전에 멋모르고 고종(高宗)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았던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지위가 한 급 낮아진다. 그래도 그로서는 왕실이 그렇게나마 존속하게 된 것에 감지덕지해야 했을까? 그렇게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 과연 의미..
진정한 치욕이란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에게로 넘어갔다.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러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군부가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는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1909년 가을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토벌작전’으로 한반도 내의 의병운동은 완전히 진압되었으므로 남은 절차는 합병 조약을 비준하는 것뿐이었다. 일본의 통감은 교체되었어도 일본의 조선 측 파트너는 죽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이제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이완용이 바로 그 영원한 파트너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비밀..
때늦은 저항③ 그러나 식민지화 일정이 가시화되자 의병 이외에 또다른 형태의 저항 방식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테러다. 어쩌면 일본과 친일파들은 의병보다 그것을 더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이념으로 삼고 유림에서 출발한 보수적 의병운동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위축되었으나,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저항 세력은 점차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런 항일운동가들 중에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이 있었다. 안중근은 열여섯 살 때 그리스도교에 입문해서 세례까지 받은 데다 유학의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황해도 출신이다. 그런 만큼 그는 전통적 이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진보와 보수를 논하기 전에 민족을 먼저 생각할..
때늦은 저항②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자본 진출을 통한 예속화’쯤으로 착각한 애국적 부자들이 이른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라는 명목으로 차관을 갚자는 캠페인을 벌일 무렵【물론 국채보상운동도 구국운동의 일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운동을 주도한 민족자본가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므로 별로 저항의 의미는 없다고 하겠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네 차례에 걸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는데, 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자금 용도였다. 그런 만큼 일본은 차관을 반환받을 의지가 전혀 없었으므로 채권자의 의도와 무관한 채무보상운동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캠페인은 무장투쟁보다는 참여하기가 쉬웠던 탓에 전국민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그 때문에 통감부는 이 운동을 『대한매일신보(大韓..
때늦은 저항 조선의 왕위 교체가 무의미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순종이 즉위했다고 해서 하등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일본으로서는 나이든 고종(高宗)보다 젊은 순종(純宗)이 훨씬 다루기 쉽다. 고종은 40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조선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이 굳어진 데다 러시아와의 친분도 두터울 뿐 아니라 드물긴 하지만 나름대로 실권을 행사한 경험도 있으니 아무래도 껄끄러운 데가 있지만, 순종은 조선 국민들에게 인지도도 비교적 약하고 외국과의 별다른 인맥도 없으니 과도기에 써먹기 딱 좋은 바지저고리다(게다가 그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하마터면 일본 깡패들의 손에 죽을 뻔한 적도 있으니 기합이 잘 들어 있었을 터이다). 과연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통감부의 프로그램은 한층 탄력을 받는다. 즉위한 지 불과 ..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③ 고종(高宗)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은 그의 친정집이나 다름없는 러시아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면서 고종에게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해소하자는 것이지만 니콜라이가 굳이 종속국의 지위에 있는 조선에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아마 일본에게 조선을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긴 탓일 터이다. 어쨌거나 국제사회에 조선의 사정을 알릴 ‘매체’가 전혀 없었던 고종(高宗)으로선 하늘이 내린 기회나 다름없다【당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은 독일이었다.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나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전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사실상 ..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② 강압적 분위기에서 달리 방법이 있었겠느냐고 을사오적을 두둔하는 건 옳지 않다. 그들과 달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고 나중에 일본이 인사치레로 주는 작위마저 거부한 참정대신(지금의 부총리급) 한규설(韓圭卨, 1848 ~ 1930) 같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사오적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역사를 진행해 온 필연적 귀결이지만, 당시의 인물 만으로 책임을 따진다 해도 가장 큰 책임은 단연 고종(高宗)에게 있다. 따라서 을사오적은 ‘고종과 을사오적’이라고 하든가, 마치 록밴드 이름 같아 거부감이 든다면 고종을 포함시켜 ‘을사육적’이라 불러야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휘둘리고 젊은 시절에 아내의 치마폭에 싸..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어쩌면 러일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전쟁에 임하는 두 나라의 자세가 그렇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를 불시에 기습하면서 그 이튿날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군대를 따라온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고종(高宗)에게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면서 일본을 도우라고 강요했다. 아직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이었다. 그 반면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2월 12일에 공관 수비대와 함께 일찌감치 서울을 빠져나갔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실상 조선의 임자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전쟁 중에도 하야시는 조선의 외부대신(외무장관)인 이지용(李址鎔, 1870~?)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식민지 시대에도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은 친일파로 변신하거나 독립운동의 명망가로 거들먹거렸다.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해야 할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투쟁의 불꽃이 사그러들었고, 그 결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한반도는 열강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북한의 정권이 권력욕에 가득한 음모가들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은 ‘혁명 없는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후보 단일화③ 그러나 초기에는 그런 배수진이 주효했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한계가 드러났다. 비록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았지만 개전 후 1년이 지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전국민이 전시 체제에 동원된 데다 흉작까지 겹쳤고 더 이상의 전쟁 비용마저 고갈되었다. 일본은 사력을 다해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도 전쟁이 지속될 경우 전쟁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숨통을 텄듯이 러시아의 차리즘은 국내의 정정 불안을 러일전쟁으로 타개하려 했으나 전쟁은 혁명운동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차르 정부의..
후보 단일화② 1903년까지도 만주의 러시아군은 여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의 목재와 광산에 관련된 이권을 노리고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했다. 만주라면 몰라도 한반도에 관계된 사건이라면 일본이 개입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1904년 2월 일본은 마침내 10년 동안 미뤄두었던 조선 쟁탈전의 결승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청일전쟁에서도 그랬듯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인천과 만주의 뤼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나서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다. 늙은 공룡을 상대로 했던 10년 전의 청일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은 두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그러나 일본에게 러시아는 청나라와는 급이 다른 강호였으므로 유럽 열강은 물론 파트너인 영국조차 일본이 러시..
후보 단일화 고종(高宗)은 적어도 몇 년간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친러 수구파 정부로 복귀한 조선은 이후 한동안 별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무참히 짓밟았어도 큰 홍역을 겪은 만큼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정부는 유럽 열강과 차례로 수교를 늘려가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친러 노선을 취하는 이상 조선 정부는 러시아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였다. 친러 정권이 부활함에 따라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여긴 러시아는 때마침 1899년 산..
기묘한 제국③ 그에 앞서 1896년 1월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마무리로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제정한 바 있었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대한제국도 그때 탄생했겠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늦어졌으니 고종은 스스로 황제 등극을 미룬 셈이다. 이렇게 황제 자리가 별로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대한제국도 과연 명실상부한 제국인지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좀 멀기는 하지만 건양의 ‘바로 전’에 한반도 왕조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던 경우는 무려 900여 년 전인 고려 광종(光宗) 때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광종은 중국이 5대의 분열기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제스처로서 독자적 연호를 제정했을 뿐이었고 중국의 신흥 왕조인 송나라가 안정되자 곧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 사..
기묘한 제국②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창립자인 서재필(徐載弼, 1864 ~ 1951)은 변신의 극치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사관생도로 일본에 망명했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물결이 한창이던 1895년에는 귀국해서 언론인이 된다(실은 한 개인이 이런 편력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조선 사회의 인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래도 급진적 개화론으로 출발했던 이념의 뿌리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뒤이어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독립협회가 내세운 개혁 노선은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개혁론의 집대성에 해당한다. 자주국권과..
기묘한 제국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는 동안 조선의 정세는 미묘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물러났으나 조선에서 발을 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정을 손에 넣은 친러파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사실 침략의 야욕이 아니더라도 그간 조선에 들인 정성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조선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조선을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기 위해 내정 개혁에 그토록 애쓴 것이나, 조선 민중의 거센 도전과 강호인 청나라마저 물리친 것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라는 놈이 오더니 다 잡아놓은 닭을 털도 뽑지 않고 삼키려 한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삼국간섭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와 독일은 들러리만 섰을 뿐, 실제 일본에 대한 국제..
어느 부부의 희비극③ 그러나 백성들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사무친 사람이 있다. 바로 일본에 의해 아내를 빼앗긴 고종(高宗)이다. 백성들은 일본을 혐오하지만 고종은 혐오를 넘어 일본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에게 민비(閔妃)는 사랑하는 아내라기보다 20년 동안이나 자신을 이끌어주던 정신적 스승이었다. 아내가 있었기에 그는 그 긴 세월 동안 국왕의 책무를 면제받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아내의 넓은 치마폭에 숨어 있는 한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랬으니 이제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된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에게는 상처받은 자신을 만져주고 보듬어줄 새 보호자가 필요하다. 물론 아버지 대원군은 싫다. 평소에도 엄하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권력에 미..
어느 부부의 희비극② 1895년 7월 민비 정권은 마침내 박영효를 내쫓고 친러파인 박정양과 어윤중을 내세워 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했다【민비 정권의 친일 - 친청 - 친러로 이어지는 눈부신(?) 노선 변화에서 철저한 무원칙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정권이 노선을 바꾸었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민비 정권의 변신은 자체 이념에 따른 게 아니라 언제나 적에 대한 반대로 취해졌다는 데서 일관성이 없다. 처음에는 대원군을 반대했기에 친일이었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한 급진적 개화파를 반대했기에 친청으로 돌았으며, 일본이 청나라를 제압하자 친러를 택했으니, 그 변화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보겠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단독 주인이 된 ..
어느 부부의 희비극 1895년 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았다.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에서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서양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 상대방이었다는 점에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서양 열강이 중국과 체결했던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망라하여 모방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대만 등을 빼앗았고 막대한 배상금도 받아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제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조선 내에서도 그 조항을 증명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화관이 문을 닫은 것이었다). 물론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킨 일본의 의도는 이제부터 청나라 대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③ 결국 주제를 모르고 주체성을 보였던 대원군은 한 달도 못 가 퇴출되고 만다. 일본이 다음 후보로 내세운 인물은 바로 김홍집(金弘集)이다. 온건 개화파였던 그는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수습한 뒤 10년 동안이나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이 짜준 개혁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 프로그램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 부르는데, 실상 김옥균(金玉均)이 10년 전에 시도했던 개혁이 당시에는 그것을 반대했던 김홍집의 손에 의해 추진되는 격이니 공교로울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개혁의 주체는 김홍집이 이끄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고문의 직함을 가진 오토리 공사이고, 더 알고 ..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② 동학 농민군이 해산한 뒤에도 일본이 자꾸 사태를 키운 이유는 어차피 본국의 사정상 조선에서 뭔가 한 판 크게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두 가지 과제를 설정한다. 하나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조선의 발전을 지원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장차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일단 더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어야할 필요성에서다. 다른 과제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입김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선을 맛있는 떡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입이 둘이라면 별로 맛있게 먹지 못할 테니까. 대원군을 경복궁의 주인으로 들어앉힌 지 이틀 만에 일본의 해군과 육군은 황해상의 청나라 함대와 아산에 주둔 중인 청나라 육군을 기습한다. 이렇게 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으나 ..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1894년 5월 31일, 농민군에 못지 않게 이를 기뻐해 준 자들이 있었다. 바로 현해탄 건너편 메이지 정부의 지도부다. 같은 날 제국의회는 정부 불신임안을 제기했던 것이다(아무리 ‘제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어도 ‘의회’인 이상 정부와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메이지 정부가 발족한 이래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으나 그 지속 기간은 극히 짧았다. 전주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민비 정권이 청나라에 진압 병력을 요청하자마자 톈진조약이 발효되었고, 이제 메이지 정부는 내부의 위기를 바깥으로 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한양발 급전을 듣고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기뻐했을 정도다(그는 바로 앞에 나온 요시..
내전의 국제화③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사건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만큼 키운 것은 정부의 태도다.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 1854 ~ ?)는 안핵(按覈)하기는커녕 봉기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붙였다. 동학(東學)은 실정법상 금지되어 있으니까 일단 처벌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농민들의 기세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가 되고 만다(물론 농민들 중에 동학교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봉기의 근본 원인은 종교 때문이 아니었으니 농민들이 격분한 것도 당연하다). 이제 분노의 화살은 지방의 탐관오리만이 아니라 중앙정부에게도 겨누어졌고, 농민 시위대는 농민군으로 탈바꿈했다.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金開南, 1853 ~ 95), 손화중(孫華仲, 1861 ~ 95)은 동학(東學)의 ..
내전의 국제화② 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부심하고 있는 동안 조선은 상대적으로 안정기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이 시기에 김옥균(金玉均)의 개혁ㆍ개화 정권이 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정상적인 행정이나마 꾸릴 수 있는 정권이었더라면, 혹시 조선은 다가올 암울한 미래에 대비한 체력을 어느 정도 비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리도, 정강도, 일관성도 없는 민비(閔妃) 정권은 그 소중한 시기를 기회로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1885년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터졌는데도 주체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각국 공사관에 도움을 호소하면서 갈팡질팡할 뿐이다(그래서 거문도에는 1887년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영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
내전의 국제화 애초부터 안 되는 싸움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조선 역사상 변방의 반란, 민란, 사대부(士大夫)의 반란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갑신정변(甲申政變)처럼 물리적 기반이 취약한 쿠데타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사정은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두 메이저가 간섭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내부 쿠데타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따라서 김옥균(金玉均)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두 나라 중 하나는 반드시 잡아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일본에 의존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개혁과 개화를 이루고자 했고 일본 측도 그가 일본을 활용 대상으로만 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당시의 조선은 내부 개혁을 꾀하는 일체의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조선에서 개..
사흘간의 백일몽③ 1883년부터 김옥균(金玉均)은 소장파 개화론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거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쿠데타의 지도부는 이미 구성되었으니 가장 필요한 것은 물리력인데, 이것은 박영효가 양성한 신식 군대와 김옥균이 사관학교의 설립을 위해 일본에 유학을 보낸 생도들이 담당한다(이 생도들 중에는 나중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는 서재필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옥균은 개화당에 호의를 보이는 일본 측의 동의를 얻어 유사시에는 일본 공사관 수비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조처한다. 이것으로 약소하나마 쿠데타의 3대 조건(이념, 지도부, 물리력)이 갖추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정뿐이다. 원래 쿠데타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는 행위이므로 큰 것에서 뭔가 균열이 생겨야만 일정을 잡을 수 있다. 그..
사흘간의 백일몽② 남의 나라에서 웬 유세냐 싶겠지만 실상 당시 청 나라는 조선을 ‘남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피를 나눈 혈맹으로 여긴다는 뜻일까? 물론 그건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고 청나라는 조선에게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통상조약을 강요했는데, 그 조약문에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정식으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의도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욕심이 점점 노골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수구로 돌아선 민씨 정권이 청의 그런 태도를 적극 환영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개화당은 당연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대당은 오로지 자파의 집권과 사리사욕에만 눈이 ..
사흘간의 백일몽 건수만 있으면 싸우는 게 원래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빛나는 전통이다. 조선이 왕국이었던 초기 100년을 제외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싸워왔다. 때로는 각기 다른 왕위계승권자를 끼고서 다뤘는가 하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이념 논쟁으로 갈라서기도 했고, 대외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이는 단일한 권력자(국왕)가 아닌 집단적 권력체가 지배하는 체제의 생리 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난에 처한 19세기 말에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개화와 위정척사로 맞서던 형국이 이제 개화당과 사대당의 대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애초에 개화를 주장하고 집권했던 민씨 정권이 노선을 선회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다. 전선이 달라지자 민씨 일파는 느닷없이..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④ 10년 만에 권좌에 컴백한 대원군은 당연히 모든 것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폐지하고, 맏아들인 이재면(李載冕, 1845 ~ 1912, 고종의 형)에게 병권과 재정권을 안긴 것은 어떻게든 옛 권력을 부활하려는 대원군의 안간힘이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한 그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오랜 정적인 며느리를 물리쳐 후련했겠지만, 그 덕분에 조선에게는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시어머니가 둘씩이나 달라붙어 버렸다. 임오군란을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은 때마침 미국과의 조미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베이징에 가 있던 김윤식(金允植, 1835 ~ 1922)과..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③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개화 정부가 서양식 군제(실은 그것을 모방한 일본과 청나라식 군제)로의 개편을 서두르자 결국 문제는 터지고 만다. 1881년 4월 정부에서는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맡겼다(그래서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이에 가장 불만이 큰 세력은 물론 이해 당사자인 구식 군대지만 그들은 일단 참았다. 그러나 정부는 무심하게도(?) 그 해 말에 5군영을 폐지하고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축소 개편한다. 구조조정으로 동료들이 실업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구식 군대는 또 참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정부가 별기군에게는 대우를 잘해주면서도 구식 군대에게는 마냥 급료를 체불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882년 6월 오..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② 『조선책략』의 방침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개화의 모델로 채택되었으며, 김홍집의 견해가 가장 권위 있는 개화론으로 인정되었다. 이제 개화의 과제는 민씨 가문에서 김홍집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정책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청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종합 행정기관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됨으로써 향후의 개화를 주도할 제도적 중심이 생겼다. 이 길고 괴상한 이름의 기관이 맨처음 착수한 업무는 일본과 청나라의 개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홍집(金弘集)은 1881년 1월 홍영식, 박정양(朴定陽, 1841 ~ 1904), 어윤..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타의에 의한 개화였지만 개화를 주장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민씨 가문의 조정 진출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대원군의 축출을 주도했던 민비(閔妃)의 오빠 민승호(閔升鎬, 1830~74)를 비롯해서 민규호(閔奎鎬, 1836~78), 민겸호(閔謙鎬, 1838~82) 등 가문의 중핵들은 거의 대부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여기서 흥미로운 인물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다. 그는 민비(閔妃)의 조카로 일찍부터 가문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는데, 아버지 민태호(閔台鎬, 1834~84)가 골수 위정척사파였던 것과는 반대로 개화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스물도 되기 전부터 그의 집 사랑방에는 홍영식(洪英植, 1855..
또 하나의 해법(문 열기)② 비록 타의에 의해 문을 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왕 개항하기로 했다면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단 개화(開化)를 총론으로 확정해 놓고도 개화에 필요한 구체적인 각론은 전혀 마련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개화란 오로지 일본만을 대상으로 할 뿐 다른 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형적인 형태였던 것이다(개항 뒤에도 조선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상 요구를 계속 거절하다가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다). 앞서 두 차례의 양요에서 서양인이라면 치를 떨게 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조선 정부의 그 편협한 자세를 보면 과연 개화의 의지가 있는지, 개화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똑같이 남의 손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당한 처지였지만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불과 20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항했으나 그 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개항되면서 신흥 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두 나라가 그렇듯 큰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는 뭘까? 단지 개항을 강요한 상대방이 달랐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일본은 선진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도약을 이루었고 조선은 후발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탓에 비참한 운명으로 전락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단기간에 비약적인 ..
잘못 꿴 첫 단추③ 일본의 의도대로 이듬해인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지난해에 있었던 ‘불미스런 사건’의 뒷처리를 하자는 것이었지만, 조선이나 일본이나 협상의 진정한 목적이 통상 여부의 결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협상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아직 정부에 남아있는 대원군 세력과 성균관 유림은 모처럼 만에 다시 한 목소리를 냈고, 유배형을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익현도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재야의 대원군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최익현은 또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반면 베이징에 가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효과를 목격한 적이 있는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잘못 꿴 첫 단추② 어쨌거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장난 것은 일단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잖아도 바깥 정세가 급박하면서도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의 핵심이 교체되었다는 것, 그것도 일인 독재에서 다수 독재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짐이 영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졸지에 세상이 바뀐 덕분에 정권을 쥔 풋내기 민씨들은 처음부터 대내외 정책에서 질척거린다. 대원군이 물러난 뒤에도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상소 금지라는 엉뚱한 조치를 내리는가 하면, 일본에서 정한론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푸느냐를 놓고도 갈팡질팡만 할 뿐 좀처럼 일관된 정책을 정하지 못한다. 일본이 노린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조선의 내부 혼란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실행할 조건..
잘못 꿴 첫 단추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국란을 맞았을 때는 이해관계가 같으니까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을 꿈꾸는 대원군과 사대부 체제의 좋았던 옛날에 향수를 품고 있는 조정 대신들이 언제까지나 찰떡궁합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과연 위기가 그런 대로 가라앉고 나서 갈등은 즉각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대원군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골수 성리학자들의 고리타분한 입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도 전후 복구와 경복궁 재건축 등으로 돈 들 데가 많은 마당에 여전히 많은 토지를 지닌 데다 면세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는 서원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