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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3.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굽타 제국이 붕괴한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또 다시 인도의 고질병이 도졌다. 특별한 중심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소국들이 공존하는 분열의 시대다. 다행스런 것은 이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태평성대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강적이었던 흉노는 인도 남하를 포기하고 터키와 유럽으로 가버렸다. 비록 소국가들 간의 충돌과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평화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통이 없이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듯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태평성대보다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세계 무대는 땅 밑에서 용암이 막 분출되려는 듯한 기세였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
가장 인도적인 제국②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종교 분야에서 볼 수 있다. 아소카 시절 이후 불교는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로 발달해왔다. 하지만 그런 불교가 인도에 널리 퍼지지 못한 이유는 바로 브라만교, 즉 힌두교 때문이었다(자이나교도 있으나 상인들을 중심으로 신도를 유지했을 뿐 교세가 불교와 힌두교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역대 제왕들은 대개 불교를 장려하고 포교에 힘썼으나 수천 년에 걸쳐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힌두교를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불교의 보급에 앞장선 바르다나의 하르샤 치세에는 북인도 동부의 파트나에 세워진 날란다(Nalanda) 사원이 불교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날란다는 불교 사원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 시설과 기숙사 등을 갖춘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날란..
가장 인도적인 제국 굽타와 바르다나 시절은 인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이민족의 침탈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토착 문화가 꽃을 피웠다. 중앙집권이 미약하고 속국들이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이미 인도의 고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마우리아부터 굽타에 이르기까지 그 점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후진을 면치 못했어도 학문은 전에 없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은 당시 세계 첨단의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은 당시에 세계 최초로 0의 개념을 발견했으며, 십진법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숫자 체계와 십진법은 사실 인도의 것을 아랍 세계에서 도입해 로마에 전한 것이었으니 근원을 찾..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② 그러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로 강적을 만나 장기전을 치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흉노의 남하를 간신히 막은 굽타 제국은 이후 쿠샨, 사산 등의 민족들에게 서부 변경을 계속 침탈당하면서 100년 동안이나 잦은 전쟁에 시달렸다. 그나마 전성기에는 유능한 군주들이 미약한 중앙집권을 보완해주었지만, 쿠마라 굽타 이후에는 그런 행운도 계속되지 못한다. 결국 굽타는 점차 추락하다가 5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굽타가 멸망한 뒤 또다시 100여 년 동안 인도는 분열과 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벌써 몇 번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인지 모를 일이지만 또다시 통일은 이루어졌다. 난립하던 소국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바르다나(Vardhana) 가문의 하..
2.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쿠샨 왕조가 무너진 이후 약 1세기 동안 지속된 분열 상태를 해소한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였다(마우리아의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와 이름이 같기에 보통 1세라는 말을 붙여 구분한다). 그는 320년 소국가들을 통일하고 굽타 제국을 세웠다.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지방의 지주출신이었다고 전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명문 귀족인 리치비 가문의 공주와 정략결혼하고 이후에도 그 혈연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을 보면 원래는 변변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는 쿠샨 왕조 때 생겨난 ‘마하라자 드히라자(maharia dhirajs, 왕 중의 왕)’, 즉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한 왕조의 건국자는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지만, 따지고 보면..
인도판 춘추전국시대② 쿠샨 왕조는 2세기 중반 카니슈카(Kanishka)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카니슈카 왕은 동쪽으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남인도의 상당 부분까지 손에 넣어 거의 통일 왕조에 맞먹는 강역을 구축했다. 특히 그는 정복 사업뿐 아니라 불교의 진흥에도 열심이었으므로 제2의 아소카라고도 불린다. 그는 학문 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한편 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표준 이론을 세우기 위해 카슈미르에서 최초의 불교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대승불교의 교리는 훗날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역사 교과서에는 아소카가 소승불교를 전파하고 카니슈카가 대승불교를 확산시켰다고 나오지만, 아소카의 시절에는 어차피 소승불교밖에 없었다. 실은 소승불교라는 명칭도 없었는데, ..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마우리아가 멸망한 뒤 4세기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인도는 500년간의 분열기를 겪게 되는데, 이 긴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분열된 상황에다 정치적 구심점조차 없었던 탓에 이 시기 인도에는 이민족의 침략도 잦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다. 그가 잠시 펀자브를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인들의 일부는 아예 인도의 서북부에 눌러앉아 그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숭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칸바(kanva) 왕조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계 민족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서북부 지역은 인도인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일찍이 아소카 왕 시절에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대월지)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
법에 의한 정복② 비록 영토는 넓었지만 마우리아 제국 전역이 황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우리아의 통치 방식은 옛 마가다 왕국의 영토만 황제의 직할지로 두고, 나머지 영토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총독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었다. 각 지방에는 정기적으로 순회 감사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전반적으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총독들 간의 연락 시스템을 통해 국가 조직이 운영되는 식이었으므로 일종의 종주국 속국과 같은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상비군과 재판권, 관리 임면권, 조세제도 등을 중앙에서 관리한 점에서는 분명히 제국이지만, 비슷한 시기 중국의 진 한 제국과 같은 중앙집권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중국의 통일 제국과 달리 문자나 화폐의 전국적인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배자는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1.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제국이 400년 이상이나 수를 누린 것에 비하면 마우리아는 미니 제국인 셈이다(인도 역사에서는 무굴제국을 제외하면 나중에도 수명이 2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성격도 크게 다르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인도 반도)까지 포함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역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사실 인도 역사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강력..
새로운 남북조시대? 송 제국이 당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요에도 강적이 출현했다. 요가 한창 강성할 때 복속되었던 여진족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은 몽골계의 거란과 달리 만주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유민들도 여진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니, 여진은 우리 민족과 대단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초반 요의 국세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완안부(完顔部)의 족장 아골타(阿骨打)는 여진 부족들을 통합해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100년이 넘도록 요에 세폐(歲幣)를 바치고 있던 송은 금의 등장을 반겼다. 어차피 제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송은 계책을 통해 요의 손아귀를 벗어날 마음을..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② 왕안석(王安石)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자 갈등은 어느덧 부국강병과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송 제국의 정치를 좀먹게 되는 당쟁(黨爭)이 등장했다. 사실 당쟁은 당 시대에도 크게 일어난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그때는 환관들의 당쟁이었다) 그 생리 상 어느 시대든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송대에 당쟁이 특히 치열한 데는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제(科擧制)였다. 과거제는 전통적인 귀족 집단의 혈연 대신 ‘학연(學緣)’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자는 자신을 길러준 스승보다 뽑아준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존경했고, 함께 시험에 합격한 동기와 선후배 등과 부지런히 연고를 맺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고관의 보증이..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화려한 문화의 선진국인 송이 물리력이 약하다는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일찌감치 쇠미의 징후를 보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건국한 지 100년밖에 안 되는 젊은 나라이므로 반전의 실마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스무 살의 청년 황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의 적극 지원으로 발탁된 왕안석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부국강병책을 전개했다. 조공이 야기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왕안석은 부국책의 목적을 농민 생활의 안정, 생산력의 증가, 국가 재정난 타개로 삼고, 이를 위해 ..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② 아직 신생국인 송의 입장에서 북방의 동향은 잠재적 위기 상황이었다. 그저 대외적으로 안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요와 무역을 계속하면서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로 제위를 물려받은 태종(太宗, 939~997)은 같은 정세를 다르게 판단했다. 애초에 의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는 형의 뜻을 거슬러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다시피 했고 황제가 된 뒤 조카를 사실상 살해했으므로 권력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태종은 미수복지 연운 16주가 못내 아까웠다. 그래서 979년과 986년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요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일패도지(一敗塗地)였다.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송은 이후 국경을 폐쇄하고 통상을 단절하는 노선으로 바꾸었는데, ..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송대에는 학문과 예술만 발달한 게 아니었다.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서민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해외 무역도 활발해 광저우(廣州)와 항저우 등 항구 도시들이 크게 번영했다. 또한 조선업과 제철업, 군수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도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송대의 발명품은 거의 다 세계 최초의 것들이다. 동양 세계의 4대 발명품 가운데 종이는 후한대인 2세기에 발명되었으나 화약과 나침반, 활판인쇄술은 모두 송대에 발명되었다. 지폐를 사용한 것도 세계 최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했고 학문과 예술, 산업과 과학기술까지 두루 발달했으니 송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강국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꽃피운 문화의 시대③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송의 문치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적 현상은 학문의 발달이다. 송대에는 특히 유학(儒學)이 크게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의 유학을 송학(宋學)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부르면서 유학 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앞서 말했듯이 유학은 원리부터 현실 참여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유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한대에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으나, 당 시대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침투하지는 못했다. 사실 충효의 예를 강조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수직적 상하 질서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삼는 유학의 성격은 지배자라면 누구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제국 이래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늘 유학을 정치와 사회의 지도 사상으로 도입..
꽃피운 문화의 시대② 문치주의를 실시한 덕분에 송은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제국이 되었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그 이후까지 포함해 중국 역사상 송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특히 회화는 송대부터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당 시대까지 회화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거나 건축물을 장식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에서 제작되는 등 기능적이고 장식적인 역할이 위주였다. 그러나 송대에 와서는 회화 자체가 독자적인 예술 활동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직업적 화공이 아닌 사대부 출신 문인들의 문인화가 발달했으므로 주제나 기법도 매우 다양해졌다. 과거에 회화 과목까지 포함시킬 정도였다고 보면 시절이 한참 달라졌다. 는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12세기 초반의 황제 휘종(徽宗)은 권력자이기 전에 뛰어..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벌 귀족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 사격이라도 하듯이, 송 태조는 당의 최고 행정기관인 3성 6부에서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버렸다. 이에 따라 문하성이 지니고 있던 황제 명령에 대한 거부권도 없어져 황제의 전제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보강된 중서성과 더불어 군사권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을 두어 중서성과 추밀원의 2부(二府)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한 지방 행정 기구로는 전국에 15개의 로(路)를 설치했는데, 절도사가 전횡하던 시대처럼 지방 권력이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로(路)를 관장하는 책임자는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에도 중앙 관제를 도입해 각 로를 부서별로 나누고 행정을 전문화하는 방..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② 송 태조 조광윤의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 제국이면 당연한 의무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자신은 절도사로서 새 제국을 열었으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만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돌팔매질은 하나, 문치(文治)에 입각한 군주 독재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중앙집권은 태조 자신이 절도사들의 우두머리였으므로 가능했지만, 문치주의는 다른 때 같으면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문치주의를 위해서는 전문 관료 집단이 필요한데, 당시까지 수백 년 동안 전통의 귀족 가문이 득세하면서 관료 집단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송을 건국한 시기의 주변 환경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우선 5호16..
4.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거대 제국 당이 쓰러지면서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이래 40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까지의 분열기를 5대10국 시대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5호16국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떴다 지는 양상도 닮은 데가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남북조시대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제국의 심장을 쏜 주전충(朱全忠)은 후량(後梁)을 세워 5대의 첫 단추를 꿰었다. 5대는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로 이어지는 북방 이민족들의 다섯 개 중원 왕조이며, 10국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형남(荊南)ㆍ초(楚)ㆍ오(吳)ㆍ남당(南..
쓰러지는 세계 제국 균전제(均田制)의 붕괴로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중앙에서는 환관, 지방에서는 절도사의 전횡이 나날이 심해지자 당 제국은 이제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사실상 당은 이 무렵(9세기 초반)에 무너졌어야 하는데, 그나마 양세법(兩稅法)과 환관들의 당쟁이 멸망을 지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당 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후 중화 제국들의 원형이었다. 각종 법과 제도도 그렇지만 붕괴하는 과정도 그랬다. 개국 초기에는 너무도 완벽했던 제국이 쓰러지는 과정은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서 자주 보게 되는 전형적인 드라마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믿었던 양세법마저 약효를 잃자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재정을 늘리려는 일념에서 지극히 단기적인 처방을 내세웠다. 이를테면 소금의 전매를 강화하는 조치다. 소금 전매는 일..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⑤ 이렇듯 사회경제가 무너지자 더 이상 율령 정치도 불가능해졌다. 당 제국을 있게 한 율령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치 현실은 더욱 혼탁해졌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외척과 환관은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인 정치 불안 요소였다. 측천무후와 위씨 황후의 몰락을 계기로 외척 세력은 잡았다 싶더니 이번에는 환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원래 환관은 개국 초부터 황실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던 집단이었는데, 현종 때부터는 직접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안사의 난에서 교훈을 얻은 후대의 황제들은 절도사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감군사(監軍使)를 보내 그들을 감독했는데, 환관들이 주로 그 업무를 맡았다. 이래저래 환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당 말기인 9세기에 이르면 환관들의 세력은 황제도 ..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④ 새로운 세금 제도가 좌초한 것과 더불어 병역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부병제(府兵制)는 원래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본으로 하는 징병제다. 즉 변방의 농민들에게 다른 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농한기에 군사 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해버리면 부병제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부병제의 가혹한 부담으로 인해 도망치는 농민들도 많았으니 뭐가 원인이고 뭐가 결과인지 모를 일이다). 병역 의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상비군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병역제도는 점차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와 직업군인 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종의 용병이므로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게 마련이다. 당 초기에는 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지..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③ 우선 세금 제도에서는 조용조(租庸調)를 버리고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했다. 기본적인 골격은 토지를 부과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1년에 두 차례 징세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세’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 취지는 두 가지다. 첫째, 조용조는 먹을 것[租]과 입을 것[調], 그리고 국가사업이 있을 때 노동력을 부리는 것을 뜻하므로 모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이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고 다변화됨에 따라 농민만이 아니라 상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백성도 많아졌다. 조용조를 고집하면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방법이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게 양세법이다. 둘째, 토지가 거의 사유화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토지 소유가 엄존하고 있는 마당에 애초에 농민들에게 분급한..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② 언제나 그렇듯이 계기는 대토지 겸병이 성행하면서 농민들이 몰락하는 것이었다. 무릇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항상 토지가 남아돌게 마련이다. 이전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새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기쯤 되면 새로 분급할 토지가 사라진다. 미개간지를 개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나라 살림은 갈수록 커진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넘기고, 그 토지를 부패한 지방 관리나 대토지 소유자 들이 사들이거나 빼앗아 겸병한다. 중기에 든 당 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관리의 횡포와 상업 자본, 고리대 자본의 압박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빈궁해졌다. 게다가 관료 기구가 팽창하고 변방에서 전란이 끊임없..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태종이 ‘정관의 치’를 펼쳤다면, 현종의 치세는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외척 정치를 직접 깨부수고 황제가 된 현종은 당연히 외척과 환관을 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일까?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인륜을 저버리는 게 당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탓일까? 치세 40년 가까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원래 양국충과 사이가 좋지 않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은 양국충..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② 여제가 이상하다면 아예 나라를 바꿔주마. 제위에 오른 무후는 대담하게도 신성황제(神聖皇帝)라고 자칭하면서 국호를 주(周)로 바꾸었다(여기서도 주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들의 이상향이자 영원한 고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위를 잠시 찬탈한 것일 뿐 실제로 혁명적인 성격은 없었다. 측천무후의 지배는 15년간에 불과했다. 705년에는 아들 중종이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다시 황제로 복귀하면서 무후의 정치 실험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비해 그녀의 치세는 이후의 권력 구조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측천무후로 인해 관롱(關隴) 집단이 몰락했다는 점이다. 관롱 집단이란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일대의 ..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아무리 관료제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천자라는 별칭(別稱)처럼 하늘에 이르는 것이었다【르네상스를 거치며 종교적ㆍ정신적 굴레를 벗고서야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체제인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서양 역사와 달리, 이미 고대부터 합리적인 관료제와 절대적인 황권이 공존한 중국의 역사는 서구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과업을 마무리했을 뿐 개인적으로는 병약하고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신생국의 중앙 권력이 미흡하다면 아무래도 문제다. 이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권력자로 나선 인물은 놀랍게도 무조(武曌)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실권을 장악한 그 여성은 바로 역사에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수ㆍ당 시대는 진 한 시대와 비슷한 출발을 보였으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국가의 성립은 수ㆍ당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진ㆍ한 제국은 다분히 봉건적 질서에 의존한 반면, 수ㆍ당 제국은 처음으로 율령(律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율령이란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데, 수 제국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당 제국 때는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이연은 수 양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반란 세력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3성 6부와 어사대(감찰 및 사법), 구시(九侍, 제사 주관), 감(監, 황실의 교육 담당) 등 중앙 행정 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핵심 관..
반복되는 역사④ 오랜만의 통일로 중국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수 양제에게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중국의 분열기에 힘을 쌓고, 강성해진 북방의 ‘오랑캐’였다. 중원의 북방에는 한 무제 이래 오랜 토벌과 동화 정책으로 흉노가 사라진 대신 돌궐(突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국자 수 문제는 탁월한 이간책을 구사해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킨 바 있었다【흉노의 경우도 그랬듯이, 수 제국이 돌궐을 압박한 것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규모 민족이동을 낳았다. 서돌궐은 옛 흉노처럼 비단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로 가서 그곳의 작은 나라들을 짓밟았다. 게다가 명칭도 돌궐에서 음차되어 튀르크(Türk: 오늘날 터키의 어원)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튀르크는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 융화되어 족장의..
반복되는 역사③ 과거의 진 제국을 연상시키는 또 한 가지 닮은꼴은 대운하의 건설이다. 진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건국자인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煬帝)는 옛날의 진시황(秦始皇)처럼 여러 가지 대형 토목 사업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진의 만리장성에 해당하는 업적이 대운하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서쪽에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드는 세 개의 큰 강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황허(黃海), 화이허(淮河), 양쯔 강(揚子江)의 세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큰 강이므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선박을 이용한 운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남북 방향의 운송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단점을 해소하려 한 것이 바로 대운하였다. 남조와 북조로 분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통일 제국이 들어섰으니, 수 양제로..
반복되는 역사② 관료제를 완성하려면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해야 한다. 종래의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위나라가 도입한 9품 중정제는 그 핵심인 중정이 부패한 인물일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많은 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귀족 세력은 9품 중정제를 악용해 세력을 키우고 관직을 기의 독점한 터였다. 귀족의 그런 전횡을 막으면서 더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관리 임용 제도는 없는 걸까? 고민 끝에 절묘한 답이 나왔다. 바로 과거제였다. 관리 후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고득점자를 관리로 선발하면 된다. 귀족의 자의적인 관리 임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 점수는 객관적이므로 누구도 합..
3.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 중국 역대 왕조는 망할 무렵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 외적의 침입이나 농민의 반란과 같은 말기적 증상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의 부패와 대토지 겸병 같은 사회적 모순이 수백 년씩 덧쌓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모순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의 귀족 양견(楊堅, 541~604)이 새로운 통일 제국 수(隋)를 세우는 과정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넣어 외척 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제위를 양도받아 581년에 손쉽게 수 제국을 세웠다(5호16국이나 남북조시대의 여느 ..
문화의 르네상스② 이 시대의 문화 현상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한 제국의 지도 이념이었던 유가 사상은 고문학과 금문학의 대립을 통해 큰 발달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가의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허식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유가 사상은 원리상으로 현실 정치와 깊은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은 남북조시대의 분방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마찰을 빚었다(개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6조시대의 문화는 이후까지 통틀어 가장 서양 문화와 가까웠을 것이다). 더욱이 후한 말기에 유학자들이 현실 정치의 참여를 위해 국가 권력에 도전했다 패배의 쓴잔을 맛본 경험은 지식인들의 좌절을 가져왔다. 유가에 대한 반발로 성행한 것은 도가, 즉 노장(老莊) 사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
문화의 르네상스 남조의 네 나라(송ㆍ제ㆍ양ㆍ진)는 평균 수명이 40여 년밖에 안 된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나라는 전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도 북조의 이민족 국가들보다 약했다. 그러나 중원의 호족과 지식인 들이 이민족 치하를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 지역의 귀족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처음으로 강남에 중원을 능가하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남조(南趙)의 네 나라를 합쳐 보통 6조(六朝)라고 부른다. 이 6조시대에 남중국에서 발달한 귀족 문화(6조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시대로보면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오히려 르네상스를 ‘서양의 6조시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와 ..
따로 또 같이② 북부의 이민족 정권들은 5호16국 시대부터 기본적으로 한화(漢化), 즉 중국화 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리력에서만 앞설 뿐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족 문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지배층은 중원을 차지한 참에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사회에 합류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중원에 입성하자 곧바로 부족제를 포기하고 유목민 부락을 해산한 것은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은 손에 쥐더라도 관료 행정에는 한족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민족 정권들은 한족 출신의 명문가를 정치와 행정에 참여시켜, 각종 관료제와 율령을 맡기고 조세 정책을 입안하게 했다. 특히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는 도읍을..
따로 또 같이 남중국의 주인이 송으로 귀착될 때까지 북중국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중원에 진출한 북방 민족들은 유연(劉淵)이 한(漢)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을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趙)ㆍ연(燕)ㆍ진(秦)ㆍ진(晋) 등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고, 심지어 삼대에 속하는 하(夏)까지 등장했다. 이 10여 개의 나라들을 ‘원조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국호 앞에 전(前)ㆍ후(後)ㆍ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 등의 접두사를 붙였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역사에는 통합과 분열의 시기가 교대하게 마련이지만 중국의 분열기는 특이한 데가 있다. 로마 제국 이후 분권화의 길을 걸은 유럽과 달리 중국 역사에서 분열은 늘 통일..
고대의 강남 개발② 한편 흉노에게 멸망당한 진의 귀족과 백성 들은 이듬해인 317년 강남으로 건너가 오나라의 도읍이었던 건업(建業, 지금의 난징)을 수도로 삼고 새 나라를 열었다. 뒤이어 중원이 북방 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자 중원의 명문 세가와 호족 들도 속속 남하해 새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서는 이때부터의 진을 동진(東晋)이 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진을 서진(西晋)으로 기록한다. 동진은 일찍이 삼국시대의 오나라가 닦아놓은 터전을 밑천 삼아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했다. 양쯔 강 이남은 원래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ㆍ한 시대부터 원시적 농업을 해왔을 뿐 물을 이용한 선진적인 관개농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호족들은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
고대의 강남 개발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하고도 오래가지 못했다. 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한 제국의 뒤를 이었지만, 한 황실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힘센 자가 나올 경우 위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강적 촉한을 물리치는 데 빛나는 공을 세운 호족 가문인 사마씨가 곧 그 실력자로 떠올랐다. 과연 그 가문의 사마염(司馬炎, 236~290)은 265년 위의 원제(元帝)에게서 다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晋)을 세우고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되었다. 춘추시대의 옛 제후국들 가운데도 서열 1위를 자랑하는 진이라는 국호를 재활용했다면 사마염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최대 문제는 정통성의 확립이었다. 진 무제는 ..
『삼국지』의 막후에는③ 특히 중요한 것은 둔전제(屯田制)였다. 이 제도는 한 무제가 처음 도입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변방에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했을 뿐이고 전국적으로 폭넓게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의 위나라였다. 병호제(兵戶制)처럼 이것도 역시 전란기였기에 가능한 제도였다. 잦은 전란으로 주인 없는 토지가 늘어난 게 문제였다. 자칫하면 또다시 후한 시대처럼 호족들이 겸병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호족을 대신해 국가가 그 토지를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주인 없는 토지나 새 개간지가 생기면 국가가 유민이나 가난한 농민들을 모집해 경작하게 하고 조세를 받는 것이다(국가가 지주로서 소작료를 받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둔전민은 군 태수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고 국가의 직접 관리를 받았으므로 ..
『삼국지』의 막후에는② 소설 『삼국지』는 이 과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그 막후에 있다. 삼국 정립기는 전란으로 얼룩진 시대였으나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내외적 개혁과 쇄신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삼국이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ㆍ한 시대의 경험에서 노출된 모순이 해결되고 새로운 통일을 위한 토대가 조성되었다. 특히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 병역제도인 병호제(兵戶制), 세금 제도인 호조제(戶調制) 등 본격적인 국가 체계의 골격이 모두 이 무렵에 만들어졌고, 둔전제(屯田制)도 새로이 정비되었다. 후한..
2.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 후한 말기 황건적(黃巾賊)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각 지방을 할거(割據)한 호족들의 세력 판도는 한동안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할과 정립의 구도가 고착되었다. ‘정립(鼎立)’의 ‘정(鼎)’이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 발은 위(魏)ㆍ오(吳)ㆍ촉(蜀)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소설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진수(陳壽)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와는 다른 책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같다】의 소재가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세력 판도에서도 선두를 달린 주자는 후한의 무관 출신인 조조(曹操, 155~220)가 세운 북중국의 위나라였다. 조조의 가문은 후한의 정치를 ..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② 부패한 외척ㆍ환관 정치에 호족들의 등쌀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영향으로 탐관오리들이 들끓게 되자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강력한 시황제의 진 제국도 진승과 오광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보다 훨씬 오래 존속한 한 제국의 말기도 비슷했다. 후한 중기부터 치솟던 농민들의 분노는 이윽고 184년에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이번의 농민 반란은 진승과 오광의 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선 중국 전역에서 36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농민이 일제히 봉기한 것은 규모로 보나 조직력에서 보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노란 깃발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린 이 반란군은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삼고 치밀한 모의 끝에 거사한 것이었다. 그럴 ..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후한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역시 황족이긴 했으나 원래부터 황위 계승권자인 게 아니라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이처럼 후한 시대에는 한 황실의 일족이나 옛 전국시대 명문가의 자손, 전직 고위 관리,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 등이 지방 호족으로 각지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호족은 전한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이 성장할 만한 여건이 좋았다. 철제 농구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관개시설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황무지도 많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통일 제국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대거 출현했..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② 2세기 초반부터 나이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전한을 멸망시킨 바오밥 나무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엷어졌다. 외척 정치가 부활한 것이다. 나이 어린 황제는 섭정을 필요로 했고, 섭정은 자연히 외척이 도맡았다. 하지만 여기서 전한과는 다른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어릴 때 즉위한 황제는 나이가 들면서 친정(親政)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당시 발달한 유학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척의 힘을 물리치려면 황제의 개인적 세력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왕당파(王黨派)가 있어야 한다. 외척이 아니면서 외척만큼 의지할 수 있는 세력, 황제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환관(宦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일지언정 정답은 아니었다. 외척은 밀어낼 수 있었으나 환관이 그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이 ..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 후한은 시기적으로만 전한과 구분될 뿐 권력 구조와 각종 제도 등은 전한 시대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답습했다. 이는 곧 전한시대의 문제점들이 후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왕망(王莽) 같은 모리배(謀利輩)조차 개혁을 구상했을 정도라면 다시 복귀한 제국 정부가 당장 개혁에 착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제는 제국을 재건하고 왕망 시대의 후유증을 치유한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 정권의 몫이었다.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관료 정치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한 무기는 역시 유학이었다. 후한 초기의 황제들이 유학을 적극 장려한 덕분에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겨나고 토론이 활성화..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이렇듯 강력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갖추었다면 한 제국은 오랫동안 존속하고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한은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나라다. 그러나 한은 무제의 지배 시절이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제국이 왜 일찌감치 퇴조기에 접어들었을까? 초기의 권력기관은 앞에서 말한 3공 가운데 우두머리인 승상이 관할하는 승상부(丞相府)였다. 그러나 무제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인데다 대외 정복 사업이라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명제가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승상부는 위축되었고 모든 것이 황제의 전권에 맡겨졌다. 하지만 거대한 통일 제국을 황제 혼자서 일일이 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제는 실무를 담당할 행정 기구를 측근에 두..
흉노 정벌의 도미노② 물론 당시 한 무제는 자신이 한 일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난적인 흉노를 물리쳤다는 게 중요했다. 그 뒤에도 무제는 팽창정책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는 월남을 복속시키고 동북 방면에서는 한반도를 공략했다. 당시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터를 잡고 있었다. 한에 대해 강경책으로 대응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적을 맞아 한껏 저항했지만 흉노마저 제압한 한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위만조선은 한에 의해 멸망하고 그 지역에는 네 개의 군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진번(眞蕃)ㆍ현도(玄菟)의 한4군(漢四郡)이다【한4군은 군이라는 이름만 보면 중국 내의 군현과 똑같았지만, 중국 본토가 아..
흉노 정벌의 도미노 한 무제는 내치에서 뒤늦게 국가 기틀을 만드느라 애썼지만, 정작 그의 야심은 바깥에 있었다. 바깥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이 튼튼할 수 없고, 바깥을 안정시키려면 정복과 복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대내적으로 분주한 상황에서도 대외 정복 사업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건국 이후 한을 괴롭혀온 흉노와의 대결이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단순히 방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멀리 고비 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정복을 지휘한 인물은 위청(衛靑)과 그의 조카인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흉노 정벌의 부산물로 무제는 바라던 것 이상의 큰 소득을 얻었다. 바로 서역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무제는 서역이..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② 이런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출한 황제 한 무제(武帝) 때였다. 고조가 신생 제국 한의 명패를 올렸다면, 무제는 오랜 통치 기간(기원전 141 기원전 87) 동안 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비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한 군주였다. 우선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부터 제정했다. 역사상 첫 연호답게 그것은 ‘기원을 세우다’라는 뜻의 건원(建元)이었다. 그전까지는 제후국마다 각기 나름대로 해를 셈했으므로 혼란이 많았다.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이상 공동의 연호를 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의 의도는 그보다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나중에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도록 강요했다. 연호는 단일한 중국 문화권..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전국시대를 거치며 초(楚)ㆍ오(吳)ㆍ월(越) 등 남중국의 이민족들도 중화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고, 때마침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서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세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원과 북중국에서 보기에는 오와 월보다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북방 민족들은 여전히 오랑캐로 배척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들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중원 세력이 일찌감치 그들을 배척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북방 민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 남중국 민족들은 중원의 질서를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고자 애썼지만, 북방 민족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생활 방식과 자주적이고 강인한 기질로 인해서 남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원의 선진 문화를 높이 평가했지만, 언제나 ..
촌놈이 세운 대제국② 잠시의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한의 고조(高祖)로 즉위했다. 새 세상이 되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했으나 워낙 진시황(秦始皇)이 기틀을 잘 잡아놓은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은 진의 중앙 관료 기구인 3공과 9경도 그대로 유지했고, 진의 관료 제도도 거의 답습했다. 손보아야할 것은 행정제도, 즉 군현제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수백 년간의 분열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는 이미 진의 군현제가 제시한 바 있었다. 다만 군현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중앙집권제는 필요하지만 군현제처럼 강력한 제도는 부작용이 컸다. 게다가 평민 출신의 한 고조는 진시황보다 권위도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군현제와 옛 봉건제를 병용해 새로이 군국제(..
촌놈이 세운 대제국 반란은 농민들이 먼저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뒤를 잇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기원전 209년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농민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일반 농민도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군은 황허 이남의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쳤다. 내친 김에 진의 타도를 목표로 삼은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국호까지 정하고 자신을 왕으로 자칭했다(국호에 초가 붙은 것은 옛날의 강국 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이듬해 반란은 간신히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은 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죽 쒀서 개 준 통일② 앞서 말했듯이,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남쪽의 오랑캐(초나라)’는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 서쪽 변방에서 발흥한 진이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중원 서부 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화 세계로 들어왔다. 끝까지 ‘오랑캐’로 남은 것은 북방의 이민족들뿐이었다. 북방 이민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중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 간에 벌어질 기나긴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만약 전국 7웅 중에서 북동부에 터를 잡은 연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면 북방 민족들도 중화 세계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사전 대비가 만리장성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의 중앙아시아까지 6000여 킬로미터나 길게 뻗은 만리장..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1. 중화의 축 죽 쒀서 개 준 통일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秦)의 왕인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王)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皇帝)였다.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짐(朕)’이라는 호칭도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尊周攘夷)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2부 자람 나라와 민족의 꼴이 제법 갖추어지면서 중국, 인도, 일본은 독자적 발전의 시대를 맞는다. 제국 체제로 접어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이자 국제 질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내내 분권화된 역사를 전개하다가 결국에는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를 끊고 치열한 내전의 역사로 접어드는데, 그 결과 무사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왜에서 일본으로② 그러나 어떤 나라든 개국 초기에는 정권이 불안정한 법이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669년 개혁의 일등공신인 가마코가 사망하고, 2년 뒤 덴지마저 죽자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두 인물이 사라졌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과 이후 정세마저도 쇼토쿠 태자-소가 우마코 페어를 재현한 셈이다. 덴지가 죽자 계승권자인 아들 오토모(大友)와 덴지의 동생인 오아마(大海)는 조카-삼촌 관계가 무색하게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다툼은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걸친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 내전은 한반도와 연관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당시 한반도에서는 신라에 의해 삼국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일본의 조정에는 백제계 유민들이 많이..
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는 만년에 들어 현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622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태자와 더불어 강력한 소가씨의 수장으로 군림한 소가 우마코도 4년 뒤에 사망했다. 이로써 약 30년 간 장기 집권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 고대사의 두 기둥은 사라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군림하는 법이다. 최고 세력가인 소가 가문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대흉작과 대기근이 들어 사회 전체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사회 불안은 사실 단기적인 흉년만이 원인인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왕족과 귀족, 세력가들이 각자 영지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고 재생산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
빛은 서방에서② 한편 야마토 정권은 부족 연맹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정식 고대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후기에 들어 왕권은 상당히 강화되었으나 아직 다른 부족장들을 경제적ㆍ군사적으로 굴복시킬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왕위 세습 역시 왕이 직접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왕가의 가계만 고정되어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왕족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족장들의 발언권이 강했다. 당연히 세력이 큰 씨족들 간에 다툼이 없을 수 없었다. 대규모 씨족 집단들은 군사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권력 다툼이 대단히 치열하고 살벌했다(『니혼쇼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 싼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6세기 중엽 불교를 공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한 끝에 불교 공인..
빛은 서방에서 조몬 문화처럼 채집과 어업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온전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야요이 문화의 도입으로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일본에서는 곳곳에 씨족사회들이 생겨났다. 일본은 가장 큰 섬인 혼슈만 해도 한반도 전체보다 조금 클 정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구 밀도는 적지 않았다. 이 인구가 씨족사회로 편제되자 이내 씨족들 간에 격심한 경쟁과 전쟁이 잇달았다. 제법 큰 규모의 씨족사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했다. 200~3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드디어 강력한 씨족국가가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고 직접 역사를 기록하지도 못했으므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이 문헌은 한반도의 상고사에 관..
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櫛文)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기 때문에 승문(繩文)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이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생략한 신석기시대를 일본의 역사에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은 문명의 발상(황허 문명)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라는 발달한 자생적인 문명이 있었으나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후에는 예전과 ..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③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된 것이다. 불교의 발생과 더불어 불교 예술도 발달했지만, 원래 인도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드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인도의 초기 불교 예술가들은 부처를 인간의 형체가 아니라 발자국이나 빈 의자 따위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마음대로 인간과 똑같이 묘사했다(세속과 거리를 둔 부처와 달리 그리스 신들은 인간처럼 사랑도하고 화도 내고 질투로 속도 끓이는 인격신이었던 탓이 크다). 처음 만드는 불상이니 모델이 필요했다. 그리스인들은 불상의 영감도 주었지만 기법도 제공했다. 그리스 조각상이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처음 등장한 불상은, 웅장하고 이상적인 묘사를 ..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② 인도를 가장 먼저 침공한 사람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였다. 한때 그는 펀자브 지방을 점령해 통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강국인 페르시아를 무찌른 자가 바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였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가 세상의 동쪽 끝이라 믿었고, 인도를 정복하면 아시아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히말라야를 넘기는 어려웠겠지만 혹시 인도를 침공한 뒤에도 동방 원정을 계속했더라면 전국시대 말기 한창 강성했던 진(秦) 제국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동쪽 끝을 정복한 뒤 말머리를 돌려 멀리 세상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원전 323년 병사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3만과 기병 5000의 군대로 동방 원정을..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카스트 제도가 처음 성립할 때와 같은 강력한 힘을 이후에도 내내 발휘했다면, 인도에는 고대국가의 성립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신분 질서가 워낙 강한 탓에 국가라는 질서의 중심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아인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카스트의 힘은 점차 약해졌다.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인도 원주민이 외양에서부터 현저한 차이가 나서 카스트의 구분도 쉬웠으나, 나중에는 서로 융화되면서 인종적 구별이 사라져 직업으로 카스트를 구분해야 했다(코가 뾰족하고 눈동자와 피부색이 검은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아리아인과 원주민이 혼혈을 이룬 결과다).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면서 그에 반비례해 각 도시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원시적 공화정과 같..
자이나교(Jainism) 자이나교도 힌두교나 불교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답게 윤회와 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교리는 힌두교보다 불교와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우선 『베다』 성전의 권위를 부인한 데다 종교 의식을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배척했으므로, 자이나교 역시 불교처럼 힌두교 질서에 반발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불교에서처럼 금욕을 강조하고 불살생의 계율을 중시했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그 점에서 불교보다 한층 극단적인 성격을 지녔다. 자이나교의 5대 계율은 살생, 거짓말, 도둑질, 음행, 소유의 다섯 가지를 금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었는데, 그 대상으로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바람이나 물, 흙, 불까지도 포함시켰다. 자연의 모든 ..
불교(佛敎) 불교를 창시한 석가(釋迦, 본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언저리에 있었던 카필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당시는 아직 영토 국가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많았는데, 카필라도 그중 하나였다. 싯다르타는 열여섯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평온하게 살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당시 출가는 널리 행해지던 사회적 관습이었으므로 출가 자체로 싯다르타의 사람됨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후 그는 6년여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현인들을 만나고 온갖 고행을 하지만, 애초부터 그가 품고 있던 생로병사의 문제에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고행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하고 명상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자 ..
인도와 종교 인도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종교다. 석가모니와 불교가 탄생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종교를 떼어놓고는 인도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인도에서 종교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교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현재 인도는 힌두교(브라만교를 모태로 하고 있다) 국가이기 때문이다(힌두와 인도는 같은 어원이니, 힌두교는 결국 인도의 전통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인도 서쪽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한 몸이었지만 20세기 중반에 종교 문제로 분리되었다. 또 인도 동쪽의 방글라데시도 이슬람 국가다. 그래서 현재 인도 아대륙 주변에서 불교 국가로 남아 있는 나라는 스리랑카뿐이다. 오히려 타이나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굴러온 돌의 승리② 인더스 문명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리아인은 문명보다 무력에서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정착 문명의 수준은 보잘것없었으나, 아리아인은 그 당시에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이라면 동서양 어느 곳에서도 철기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입한 것은 단기간에 작정하고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에 들어와서 한동안 정착 생활을 했다. 여기서 농경 생활을 익힌 그들은 이윽고 유목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인도 중부 지역과 동부 갠지스 강 유역에까지 진출했다. 당연히 원주민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원주..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의 서쪽 경계 부근을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은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작업을 벌인 끝에 인류 초기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사막 한가운데 있었던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모헨조다로 유적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에다 벽돌로 쌓은 주택, 도로와 하수도 시설, 커다란 목욕탕, 공회당 등 고대 로마에 못지않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비해 3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인도에는 이런 선진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 이후 1000여 년 동안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기원..
도가 사상(道家 思想) 도가 사상을 창시한 노자(老子)는 공자(孔子)보다 한 세대쯤 위의 인물이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공자와 만났다는 기록도 전하기는 하지만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짧은 책 한 권 이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가 사상이 발달한 것은 노자의 시대보다 수백 년 뒤인 전국시대 중기 장자(莊子)에 의해서였다. 도가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냄새가 강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유(有)다. 유는 경험 세계에 존재하며, 누구나 그 존재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를 만드는 것은 무(無)다. 유는 무에서 생성되어 운동하다가 다시 그 근원인 무로 되돌아간다. 이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과정을 관장하는 것이 곧 도(道)다. 그렇..
법가 사상(法家 思想) 법가 사상은 제자백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전국시대 중기에 현실 정치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의 개념은 춘추시대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춘추시대 정나라에서 제정한 법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진(晋)에서는 형법 서적을 편찬했다고 전한다. 법가는 원래 술(術)을 중시하는 파, 세(勢)를 중시하는 파, 법(法)을 중시하는 파로 나뉘었는데, 이 세 유파를 전국시대 말기에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년경~기원전 233)가 종합해 완성했다. 법가의 기본적인 정신은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본래 도덕을 내재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의 다스림을 필요로 한다.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는 질서는 유가..
묵가 사상(墨家 思想) 묵가는 전국시대 초기에 묵적(墨翟, 기원전 480년경~기원전 390년경)이 주창했다(묵적은 현인들을 ‘子’로 존칭하는 관습에 따라 墨子라고도 부른다). 묵가 사상가들은 주로 무기나 공구의 제작에 종사한 수공업자 집단이었다. 그래서 유가 사상이 예에 기초한 엄격한 신분 질서를 주장한 데 비해 묵가는 훨씬 평민적인 사상을 전개했으며, 이 점에서 유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묵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묵적은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차별애(差別愛)’를 버리고 화해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시대에 만연한 수많은 전쟁은 모두 자기만의 이익[自利]을 취하기 위한 차별애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겸애는 상호적인 이익[交相利]을 도모한다. 따라서 겸애를 ..
유가 사상(儒家 思想)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는 노나라 태생이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유서 깊은 제후국에서 성장한 만큼 공자는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가 사상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 복고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쓴 사람도 공자다. 그러나 그가 주로 염두에 둔 ‘과거’는 그의 시대보다도 1000년이나 더 전인 머나먼 요순시대가 아니라 그 바로 전대인 주나라, 즉 서주(西周) 시대였다. 하지만 공자가 오로지 과거에 대한 동경만 품고 있었다면 학문의 일가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테고 후대에 위대한 사상가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주(西周) 시대의 전통적 가치는 주나라의 건국이념이라 할 예(禮)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이 예의..
동양 사상의 뿌리 분열기라고 해서 내내 전쟁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수많은 전쟁이 전개되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졌다.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농업혁명이다. 서주(西周) 시대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던 농업 생산력은 춘추전국시대에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소를 경작에 이용하고 철제 농구를 사용하게 된 덕분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집단 농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가족 단위로 단독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서주 말기부터 씨족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단독 농경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전쟁과 관련된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사실 당장의 필요 때문에 살상용 무기를 개선하려는 각국의 노력이 없었다면 중국의 철기..
27. 天地尙無停息, 日月且有盈虧, 况區區人世能事事園滿而時時暇逸乎? 只是向忙里偸閑, 遇缺處知足, 則操縱在我, 作息自如, 卽造物不得與之論勞逸較虧盈矣! 인용목차
최초의 통일을 향해② 우선 전국시대의 전쟁은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면전이 많았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주로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졌지만,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직접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에 임했다. 말하자면 춘추시대에는 지배 엘리트들의 전쟁이었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본격적인 군대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술도 춘추시대에는 차전(車戰)이 위주였지만 전국시대에는 보병과 기마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목표도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적국을 복속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전쟁의 목표였다.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바뀌어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도 다양하게 개발되었고(이 시기에 손빈이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오늘날까..
최초의 통일을 향해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 계기는 남방의 초(楚)와 대립하던 전통의 강국인 진(晉)이 와해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법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희박해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진은 일찍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대폭 제거했으므로 주 왕실과는 다른 성의 귀족들이 세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분을 빚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진(晋)은 한(韓)ㆍ위(魏)ㆍ조(趙), 세 성씨의 세력가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로써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던 진은 사라지고 한ㆍ위ㆍ조의 3국이 생겨났다. 춘추시대에 춘추 5패가 있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들은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7웅이란 진이..
기나긴 분열의 시대④ 그러나 춘추시대의 후반기를 장식하는 초ㆍ오ㆍ월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세 나라는 황하는 물론 화이허보다도 더 남쪽인 양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남방 국가들이다. 하ㆍ은ㆍ주의 삼대는 전부 북중국의 중원을 기반으로 삼은 왕조였다. 그러므로 전통 제후국의 입장에서 보면 초ㆍ오ㆍ월은 원래 ‘양이(攘夷)’의 대상인 오랑캐들이었다. 초나라는 이미 제 환공 시대부터 남중국의 넓고 비옥한 영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중원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제 환공은 초나라의 위협을 받는 중원의 약소국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이를 무력으로 막아내고 중원을 지킨 바 있었다. 진 문공 역시 재차 북상을 추진한 초의 공격을 막는 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와 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제 초나라의 발목을..
기나긴 분열의 시대③ 하지만 주나라라는 중심은 상징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해졌다. 그래서 제후국들은 명칭만 제후국일 뿐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해 형식적인 예의만 갖추면서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춘추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교대로 패권을 잡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잠시 정(鄭)나라가 세력을 떨치지만 본격적인 패자의 시대는 제(齊)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이른바 춘추 5패로 불리는 제(齊)ㆍ진(晋)ㆍ초(楚)ㆍ오(吳)ㆍ월(越)이 번갈아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춘추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제와 진의 지배기는 아직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상당히 살아 있던 무렵이었다. 제의 환공(桓公, 기원전 ?~기원전 643)은 제후들의 맏형..
기나긴 분열의 시대② 주의 동천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침입이 주의 동천을 불러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렸다면, 그동안 강성해진 제후국들은 이렇게 마련된 무대에서 주나라를 조연으로 물러앉히고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를 가리키는데,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된다. 춘추시대는 주의 동천에서부터 당시 가장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晋)이 분열되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키며, 전국시대는 이때부터 중원 서쪽의 강국인 진이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가리킨다. 춘추와 전국이라는 말은 모두 문헌에서 따온 명칭이다. 춘추는 공자(孔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
기나긴 분열의 시대 주나라의 봉건제는 일찍 도입되었으나 일순간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봉건제는 주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하고 숙성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나라식의 종법 봉건제는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가장 끈끈하지만 생명력이 짧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혈연관계란 세대교체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엷어지게 마련이니까. 주나라가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는 종법 봉건제가 별 문제 없이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역(疆域)이 팽창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혈연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종의 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로 바뀌면서 종법 질서를 발전적으로 ..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④ 그러나 주나라는 중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인 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중심이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정치적ㆍ경제적 ‘사건’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체했다고 하지만, 사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은나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농업 생산에서는 은나라를 능가하지 못했고(농기구는 여전히 석기였고, 생산 방식도 은대와 같은 집단 경작이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그런 생산적인 분야에 기여한 게 아니라 정치 이념에서 후대에 길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말했듯이, 주나라는 건국할 때부터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강조했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해 은나라를 멸한 것은 천명이다. 심지어 주나라 문..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③ 그러나 주나라에서 아무리 애쓴다 해도 이웃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제후국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무왕이 동생들을 제후국에 파견했듯이, 주나라 왕실은 가족 관계와 혼인 관계를 이용해 인근 나라들과 봉건적 연관을 맺었다. 말하자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서양 중세의 봉건제처럼 계약에 의한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본가와 분가의 관계와 같았다. 이렇게 혈연에 기반을 둔 관계를 종법(宗法) 봉건제라고 부른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100개가 훨씬 넘었는데, 그 가운데는 주나라 왕실의 성인 희(姬)씨 제후국이 3분의 1 이상이었다(제후국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정식 국경을 가진 나라를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의 국가들은 서로 국경선을 맞..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② 신생국 주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은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국토부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어졌다. 그런 광대한 중원에는 여전히 수많은 씨족사회가 분립해 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엄청난 격전을 치렀는데, 이는 은나라의 잔존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은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어도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선진국 은나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서 무왕은 은나라의 옛 지배 집단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나라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도록 했다. 다른 귀족들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하나라와 은나라는 말기의 현상이 매우 비슷하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은 말희(妹喜)라는 미녀에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탐닉한 폭군이었다. 둘 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었다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인물들이다. 수백 년이나 존속한 두 왕조가 결국 한낱 여인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공교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 왕조가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쿠데타의 주역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전 나라의 마지막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중국 역대 왕조의 특기이기도 하다. 폭군인 걸왕(桀王)을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당연히 걸왕과..
구름 속의 왕조를② 갑골문의 내용은 점괘였다. 점괘를 어떻게 역사 기록물로 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은나라의 성격을 알면 해소된다. 은나라는 점을 쳐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제정일치의 신정(神政) 국가였다(제정일치 사회의 종교를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종교로 여기면 곤란하다. 당시의 종교는 오늘날처럼 개개인이 신앙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 방식 자체였다). 그러므로 갑골문은 어느 것보다 은나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훌륭한 기록이다. 갑골의 재료로는 사슴ㆍ양ㆍ돼지ㆍ소 등의 뼈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갑골(甲骨)’이라는 뜻 그대로 거북의 등껍데기도 썼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을 때면 은나라의 지배 집단은 이런 동물 뼈의 한 면에 몇 개의 홈을 판 다음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뼈..
구름 속의 왕조를 치수(治水) 사업의 공적으로 선양을 통해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임금에 이르러 중국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중국의 첫 고대국가는 하(夏)나라다. 하나라는 기원전 약 23세기 말부터 기원전 18세기 중반까지 500년 가까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는 전하지만 그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공자(孔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 등장하지만, 공자 역시 자신의 시대보다 1000년 이상이나 앞선 옛날의 역사를 정확히 기록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공자가 상상만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 그의 시대까지는 전설이나 기록이 전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역사 자료라고 할 만한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황허 중류, 지금의 뤄양(낙..
신화와 역사의 경계② 황제도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로 어려울 정도라면 그 이전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황제 이전의 시대는 역사보다 신화에 속한다. 실제로 그 시대를 해주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건국신화에 당하는 삼황(三皇)의 전설이다. 삼황이란 농씨(神農氏)ㆍ복희씨(伏羲氏)ㆍ수인씨(燧人氏)를 리키는데,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화인 존재다. 신농씨는 농경을 발명했고, 씨는 수렵술을 발명했으며, 수인씨는 불을 발명했다. 이 삼황이 문명의 기반을 닦았고, 그 토대 위에서 황제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삼황은 신화적인 존재이므로 더 이상의 조상을 찾을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삼황은 인류 역사의 시작이고, 황제는 중국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 인신우두의 신. 삼황 가운데 하나인 신농의 초상이다...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나는 바오밥 나무란 교회만큼이나 큰 나무라는 것을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영리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오밥 나무도 크기 전에는 조그마할 거 아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추어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
1부 태어남 황허 문명을 계승한 중원 문명은 발상지를 중심으로 점차 문명의 빛을 밝힌다. 주나라는 중국 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 사상의 토대가 놓인다. 종교의 나라답게 인도의 역사는 처음부터 종교와 밀접하게 맞물린다. 일본은 대륙에서 문명을 전해받지만 중국과 다른 ‘작은 천하’를 이루면서 특유의 고립된 역사를 전개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어떻게 시대를 나눌 것인가 수천 년에 이르는 동양의 역사시대 전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살펴보기는 어려울뿐더러 섣부르게 달려들다간 산만해지게 된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사실 시기 구분의 문제는 역사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시대를 정치적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사회경제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시간 순서에 따라 편의적으로 고대, 중세, 근세, 현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역사를 ‘연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목적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구분을 택하기로 한다. 모든 개별 역사는 발생하고 성장하고 세계사에 섞이는 시대를 거친다. 마치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어 사회에 뛰어들게 되는..
동양사의 세 가지 축 동양이라는 말이 서양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 해서 무작정 폐기 처분할 것까지는 없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일본은 7세기 무렵에 그전까지 ‘왜(倭)’라고 불리던 자기들 이름을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당시 일본의 지배자였던 쇼토쿠(聖德) 태자는 중국 수 제국에 보내는 서신에 이렇게 썼다.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일본과 중국을 대등하게 간주한다는 말인데, 물론 수의 황제인 문제(文帝)는 크게 노여워했다. 그러나 해는 일본에서 떠서 중국에서 진다는 뜻이니, 당시 동양인들 역시 당시 서양인들처럼 자기네 지역을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 것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본다면 유럽인들이 ..
프롤로그: 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동양이라는 말 보통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말하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가 동쪽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 동양이라는 명칭은 사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나마도 그들이 아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와 인도에 불과했고, 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북에 국한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남쪽에 있으므로 동서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서쪽에 있다고 믿었고, 유럽에서 동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아시아를 동양(East)이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직 동방의 끝까지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주로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을 동..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깊으면 좁아지고 넓으면 얕아지게 마련이다. 그럼 깊으면서도 넓을 수는 없을까? 16년 전 종횡무진 시리즈를 시작할 때부터 늘 나를 괴롭혀온 질문이다.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이 시리즈는 전문가용 학술서가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를 위한 대중서다. 하지만 넓어지면 얕아진다는 대중서의 ‘숙명’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반 대중서에는 없는 요소들을 과감히 끌어들였다. 구어적인 서술 방식이라든가 빠른 진행은 대중서 특유의 생동감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였지만, 대담한 사건 연결이나 인물 비교는 역사 교과서나 대중서에서 볼 수 없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결과였다.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가는 봄, 오는 여름에도 한문공부 삼매경에 빠지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1년은 11월과 12월, 그리고 그 다음 해 1월과 2월만 기억에 남는다. 나머지 시간은 그저 하염없이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이니, 그날이 그날 같고 저날이 저날 같은 무색무취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그러니 1년이란 단위로 놓고 볼 땐 1월이 새해의 시작이란 의미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곧 다가올 2차 시험을 위한 맹렬한 준비기간이자 미련없이 2차 시험을 봐야 하는 시간이며 2월은 그 결과를 봐야만 하는 시간이다. 이때 붙게 되면야 3월부턴 전혀 새로운 인생의 장이 펼쳐질 테지만 나처럼 떨어진 경우엔 또 임용시험을 맹목적으로 준비해야 하니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러다 1차 시험이 있는 11월이 되어서야 다시 시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