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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 자신의 과거시험지를 자신이 채점하다 드디어 동곽東郭의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쳤다. 소경은 점을 치며 말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갓끈이 끊어져 구슬이 흩어졌구나. 저 올빼미를 불러다가 헤아려보게 하자꾸나.” 둥근 동전이 잘 구르다가 문지방에 부딪쳐 멈추자, 동전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축하하며 말하였다. “주인은 놀러 나갔고, 객은 깃들어 쉴 곳이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 뒤에는 돌아오겠구나. 이 점괘가 크게 길하니 마땅히 과거에 높이 붙겠구려.” 遂占之東郭之瞽者, 瞽者占之曰: “西山大師, 斷纓散珠, 招彼訓狐, 爰計算之.” 圓者善走, 遇閾則止. 囊錢而賀曰: “主人出遊, 客無旅依. 遺九存一, 七日乃歸. 此辭大吉, 當占上科.” 점장이는 주인은 놀러가고 없고, 객만 남아 깃들어 쉴 데도..
1. 송욱이 송욱을 찾아다니다 송욱宋旭이 취해 자다가 아침에야 술이 깼다. 드러누워 듣자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우짖으며 수레 끄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울타리 아래서는 방아 찧는 소리, 부엌에서는 설거지 하는 소리. 늙은이가 소리치고 아이가 웃는 소리, 계집종이 잔소리하자 사내종이 헛기침 하는 소리, 무릇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모를 것이 없는데, 유독 제 소리만은 없는 것이었다. 宋旭醉宿, 朝日乃醒. 臥而聽之, 鳶嘶鵲吠, 車馬喧囂. 杵鳴籬下, 滌器廚中. 老幼叫笑, 婢僕叱咳. 凡戶外之事, 莫不辨之, 獨無其聲. 이에 그만 멍해져서 말하였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있는데, 나만 어째 혼자 없는 걸까?” 눈을 둘러 살펴보니, 저고리는 옷걸이에, 바지는 횃대에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나의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軆를 모아 엮어 열 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이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 섞여 있지만 제각금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를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 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 우후虞詡가 부뚜막..
7. 주제를 뚜렷하게 세우고 글을 쓰라 대저 갈 길이 분명치 않으면 한 글자도 내려 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것이 병통이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헤아림을 비록 꼼꼼히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성글고 새는 것을 근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추騅도 나아가지 않고, 굳센 수레로 겹겹이 에워싸도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는 이미 달아나 버린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蔡 성을 침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 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夫蹊逕之不明, 則一字難下, 而常病其遲澁; 要領之未得, 則周匝雖密, ..
6. 글쓰기에 상황만 있을 뿐 정해진 법칙은 없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篇과 장章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비유컨대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아마득하기 굳센 성과 같은지라, 눈앞의 붓과 먹은 산 위의 풀과 나무에 먼저 기가 꺾여 버리고, 가슴 속에 외웠던 것들은 벌써 사막 가운데 원숭이와 학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글을 잘하는 자는 그 근심이 항상 혼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彼評字句之雅俗, 論篇章之高下者, 皆不識合變之機, 而制勝之權者也. 譬如不勇之將, 心無定策, 猝然臨題, 屹如堅城, ..
5. 글이 좋지 않은 건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夫長平之卒, 其勇㥘非異於昔時也, 弓矛戈鋋, 其利鈍非變於前日也, 然而廉頗將之, 則足以制勝, 趙括代之, 則足以自坑. 이렇게 해서 글쓰기와 병법을 일대일로 대응하여 설명한 연암은, 이어지는 둘째 단락에서 다시 전고典故와 비유, 억양반복의 방법을 활용하여 글쓰기와 병법의 관련성을 보다 더 긴밀하게 다진다. 여기서 병법의 예로 든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이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는 진나라 왕흘의 군대를 맞이하여 저들을 지치게 할 양..
4.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Ⅲ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鏖戰撕殺]이라고 했다. 억양이란 한 번 높이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낮추거나, 반대로 낮추기 위해 한 번 추켜 주는 것을 말한다. “얼굴은 못생겼는데 마음씨는 착하다”와 같은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억양은 문장 단위에서 뿐 아니라 단락 단위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억양이 점층되어 마침내 주제가 완전히 피력될 때까지 반복되고 나서 글은 끝난다. 적군과의 전투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이거나 투항하기 전에는 끝난 것..
3.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Ⅱ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韻以聲之, 詞以耀之, 猶金鼓旌旗也;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고 했다. 별도의 통신수단이 없던 과거 전쟁에서 명령의 전달은 나팔과 북, 그리고 깃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군나팔은 전진을 명령하고, 북은 퇴각 명령을 전달한다. 나팔과 북소리로도 혹 부족할까하여 깃발을 가지고 또 명령을 전달한다. 깃발이 시각의 배려라면, 북소리 나팔소리는 청각의 배려이다. 멋있는 군악대의 취주吹奏는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북과 나팔이 적군을 무찌를 수는 없지만, 이것 없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2.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Ⅰ 먼저 그 각각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善爲文者, 其知兵乎? 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글자는 비유하면 병사이고, 뜻은 비유컨대 장수라 했다. 한편의 글이 수없이 많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듯, 하나의 부대는 수많은 병사들로 구성된다. 병사가 아무리 씩씩하고 수가 많고 지닌 무기가 훌륭해도 지휘관이 우왕좌왕 허둥대고 보면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문장력이 제 아무리 좋고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도 주제의식이 분명치 않고 보니 지리멸멸하여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부대에 유능한 지휘관이 없어서는 안 되듯이, 한편의 글에는 뜻, 즉 주제가 없어서는 안 된다. 주제가 없는..
1. 모범답안을 모아 합격집을 만들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처남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열 권으로 묶은 『소단적치』란 책에 써준 글이다. ‘소단적치’란 ‘문단의 붉은 깃발’이란 뜻이고 붉은 깃발은 대장군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과거에서 높은 등수로 합격한 모범 답안만을 엮어,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글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면 어떤 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답안 작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해마다 출제되는 문제는 같지가 않고, 채점하는 사람의 기준 또한 서로 다르니, 예전 모범 답안을 외우는 것이 과연 수험 준비에 어떤 도움이 될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논술고사를 준비하..
6. 연암의 개성 넘치는 표현이 담긴 편지들 이제 연암의 『영대정승묵』에 실린 편지글 세 편을 읽으며 이번 글을 마무리 하겠다. 어린아이들 노래에 이르기를,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는 것은 바늘 가지고 눈동자 찌름만 같지 못하네”라 하였소. 또 속담에도 있지요. “삼공三公과 사귈 것 없이 네 몸을 삼갈 일이다”라는 말 말입니다. 그대는 잊지 마십시오. 차라리 약한 듯 굳셀지언정 용감한 체 하면서 뒤로 물러 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오. 하물며 외세의 믿을만한 것이 못됨이겠습니까? 孺子謠曰: “揮斧擊空, 不如持鍼擬瞳.” 且里諺有之: “无交三公, 淑愼爾躬.” 足下其志之. 寧爲弱固, 不可勇脆. 而況外勢之不可恃者乎? 「여중일與中一」, 즉 중일中一이란 이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의 ..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대저 공경한다고 하여 예를 갖춰 서서 엄숙하고 위엄 있는 자태로 근엄하게 서 있는 것은 어버이를 모시는 도리가 아니다. 만약 다시금 옷소매를 넓게 펴서 마치 큰 손님을 보듯 하며 간단히 춥고 더운 것만을 묻고 다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공경스럽기는 공경스러워도 예를 안다고는 못할 것이다. 즐거운 낯빛과 기쁜 목소리로 어버이를 봉양함에 곳을 가리지 않는다 함이 어찌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빙그레 웃으면서, 앞서 한 말은 농담일 뿐일세.”라고 한 것을 보면 공자께서도 농담을 잘 하신 것이며, “아내가 닭 울었다 하자, 남편은 날이 밝지 않았다 하네”는 시인의 척독尺牘일 뿐이다. 夫敬以禮立, 而嚴威儼慤, 非所以事親也. 若復廣張衣袖, 如見大賓, 略敍寒..
4. 편지에 으레 쓰던 문장을 쓰지 말라 이어서 다시 한편의 글을 더 읽기로 한다. 「영대정승묵자서映帶亭賸墨自序」이다. 당시 척독尺牘, 즉 편지글의 병통에 대해 쓴 글인데, 문집에 이미 앞의 60자가 결락되어 있어 문맥을 소연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뢴다’는 이른바 ‘우근진右謹陳’이란 말은 진실로 속되고 더럽다. 유독 모르겠거니와 세상에 글 짓는 자를 어찌 손꼽아 헤일 수 있으리오만, 판에 찍은 듯이 모두 이 말을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욱 늘어놓듯이 쓰니, 공용 격식의 글머리나 말 머리에 으레 쓰는 투식의 말 되기에야 어찌 해가 되겠는가? 「요전堯典」의 ‘옛날을 상고하건데’란 뜻의 ‘왈약계고曰若稽古’나, 불경佛經의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란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바로 지금의 ‘우..
3. 알맹이는 갖추되 수사도 신경 쓴 작품집 이 책을 보는 자는 소천암小川菴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노래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이에 있어 잇대어 읽어 가락을 이루게 되면 성정性情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화보畵譜를 붙여 그림을 그린다면 수염과 눈썹까지도 징험해낼 수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䏁睞道人이 일찍이 논하기를, ‘석양 무렵 한 조각 돛단배가 잠깐 갈대숲 사이에 숨어 있으니, 뱃사공과 어부가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라 해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노라면, 심지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인가 의심하게 된다’고 한 적이 있네. 아아! 도인道人이 나보다 먼저 얻었도다.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모셔야겠네. 찾아가서 징험해보게나!“ 覽斯卷者, 不必問小川菴之爲何人..
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내가 다 읽고 나서 돌려주며 말하였다. “장주莊周가 나비로 된 것은 믿지 않을 수가 없지만, 이광李廣이 바위를 쏜 것은 마침내 의심할 만하거든. 왜 그렇겠는가? 꿈이란 것은 보기가 어렵지만, 실제 일은 징험하기가 쉽기 때문일세. 이제 자네가 낮고 가까운데서 말을 살피고, 구석지고 더러운 데서 일을 주워 모았으나, 어리석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천박스레 웃고 일상으로 차 마시는 일은 실제 일이 아님이 없고 보니, 시도록 보고 질리도록 들은 것이어서 거리의 용렬한 자들도 본시 그러려니 하는 것들일세. 비록 그러나 해묵은 장도 그릇을 바꾸면 입맛이 새롭고, 일상적인 정리情理도 경계가 달라지매 마음과 눈이 모두 옮겨가는 법일세. 余旣卒業而復之曰: "莊周之化蝶, 不得不信, 李廣之射..
1. 밤과 쌀 같은 문집을 내밀며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두루 기록하였는데, 심지어 종이연에도 계보가 있고, 아이들 수수께끼에도 풀이를 달아 놓았다. 후미진 뒷골목의 흐드러진 인정과 익숙한 모습들, 문에 기대서거나 칼을 두드리거나, 어깨짓으로 아양 떨고 손바닥을 치며 맹세하는 시정市井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제각금 조목조목 엮어 놓았다. 입과 혀로는 분변하기 어려운 것도 반드시 드러내었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바도 책을 열면 문득 실려 있다. 무릇 닭 울고 개 짖으며 벌레가 날고 좀이 꿈틀대는 것도 모두 그 모습과 소리를 얻었다. 이에 있어 십간十干으로 배열하고는 이름 지어 『순패旬稗』라 하였다. 小川菴雜記域內風謠民彛方言俗技, 至於紙鷂有譜, 丱謎..
8. 연암은 고문가일까?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은 나이가 스물 셋인데 문장에 능하여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며 나를 좇아 배운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그 글을 지음은 선진양한先秦兩漢의 글을 사모하였으나 그 자취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다 보니 간혹 근거 없는데서 잃고, 논의를 세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간혹 법도에 어긋남에 가까웠다. 이는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와 창신에 있어 서로서로를 헐뜯으면서도 함께 바름을 얻지 못하고 나란히 말세의 자질구레함으로 떨어져서, 도를 지키는데 보탬이 없이 한갖 풍속을 병들게 하고 교화를 손상시키는 데로 돌아간 것이니, 나는 이것을 염려한다. 새것을 만들어 교묘하기 보다는 차라리 옛것을 본받아 보잘 것 없는 것이 더 나으리라. 朴氏子齊雲,..
7. 해답은 법고와 창신의 조화로운 결합에 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 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 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각금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중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靈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芝草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예禮에는 송사訟事가 있고 악樂에는 의논이 있으며,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어진 이가 이를 보면 인仁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가 이를 보면 지智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리더라도 의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선 성인..
6. ‘法古而知變’과 ‘刱新而能典’의 또 다른 예 그런 까닭에 배우지 않음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노남자魯男子의 홀로 지냄이고, 부뚜막 숫자를 늘이는 것을 부뚜막 숫자를 줄이는 것에서 본떠온 것은 우승경虞升卿의 변화를 앎이다. 故不學以爲善學, 魯男子之獨居也; 增竈述於减竈, 虞升卿之知變也. 이렇게 ‘법고이지변’과 ‘창신이능전’의 예를 하나씩 든 연암은 다시 노남자와 우승경의 이야기로 논지를 더 다진다. 옆집 노총각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이웃의 과부가 밤중 비에 제 집 담이 무너지자, 노총각의 집 문을 두드리며 하루 밤 재워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이 고지식한 청년은 예禮에 남녀는 60 이전에는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했으니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과부는 현인 유하혜는 예전에 곤경에..
5.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게 한 예 물을 등지고 진을 치라는 것은 병법에 보이지 않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자 회음후 한신은 말하기를, “이것이 병법에 있는데 생각건대 그대들이 살피지 않은 것일 뿐이다. 병법에 ‘죽을 땅에 놓인 뒤에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까닭에 배우지 않음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노남자魯男子의 홀로 지냄이고, 부뚜막 숫자를 늘이는 것을 부뚜막 숫자를 줄이는 것에서 본떠온 것은 우승경虞升卿의 변화를 앎이다. 背水置陣, 不見於法, 諸將之不服, 固也. 乃淮陰侯則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 兵法不曰: ‘置之死地而後生’乎?” 故不學以爲善學, 魯男子之獨居也; 增竈述於減竈, 虞升卿之知變也. 한신이 오합지졸들을 이끌고서 강한 조나라를 치러 갔을 때,..
4. 옛 것을 본받되 변할 줄 아는 예 옛 사람에 책읽기를 잘 한 사람이 있는데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 사람에 글을 잘 지은 이가 있으니 회음후 한신韓信이 그 사람이다. 왜 그럴까? 古之人, 有善讀書者, 公明宣是已. 古之人, 有善爲文者, 淮陰侯是已. 何者? 공명선이 증자에게서 세 해를 배웠는데 책을 읽지 않자 증자가 이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선생님께서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것을 뵈었고, 선생님께서 손님 접대하시는 것을 보았으며, 선생님께서 조정에 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웠지만 아직 능히 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도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 公明宣學於曾子三年, 不讀書, 曾子問之, 對曰: “宣見夫子之居庭, 見夫子應賓客, 見夫子之居朝廷也, 學而未能, ..
3.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 것을 만들되 법도에 맞게 하라 아아! 옛것을 본받는다는 자는 자취에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 되고, 새것을 창조한다는 자는 법도에 맞지 않음이 근심이 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噫! 法古者病泥跡, 創新者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猶古之文也. 새것을 추구해서도 안 되고, 옛것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아예 그만 두는 것이 어떨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다소 심각해진 이 질문 앞에 연암은 비로소 처방을 슬며시 내놓는다. 그것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란 열 글자이다. 옛것을 본받으라고 하면 겉껍..
2. 새 것을 만든다는 건 기이한 걸 만드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창신은 괜찮은가? 세상에는 마침내 괴상하고 허탄하며 음란하고 치우치면서도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이는 석자의 나무가 관석關石보다 낫고, 이연년李延年의 목소리를 청묘淸廟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니 창신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그렇다면 어찌 해야만 괜찮을까? 내 장차 어찌 할까? 그만 둘 수는 없는 걸까? 然則, 創新可乎? 世遂有怪誕淫僻 , 而不知懼者, 是三丈之木, 賢於關石; 而延年之聲, 可登淸廟矣. 創新寧可爲也. 夫然則如之何, 其可也? 吾將奈何! 無其已乎! 그래서 연암은 첫 단락의 결론을 ‘법고는 해서는 안 된다’로 못 박는다. 옛 것을 본받지 말아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옛것을 따르면 안 된다고 했으니, 새것을 ..
1. 본받는다는 건 흉내내기가 아니다 일전 석사논문을 지도했던 제자에게서 E-mail을 받았다. 고문론을 주제로 쓴 제 논문을 누군가에게 주었다가, 연암을 고문가라고 한 논문 중의 언급 때문에 논란이 일었는데, 연암이 왜 고문가이냐? 그는 패관소품체를 썼다 해서 문체반정의 와중에서 정조에 의해 순정고문으로 된 반성문을 지어 제출하라는 견책을 입었다. 그렇다면 그는 반고문가임이 분명한데 무슨 근거로 고문가라고 했는가? 이것은 한양대학교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이 아닌가? 뭐 이런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요컨대 그런 상대의 계속된 힐난에 속수무책으로 신통한 대답을 못하고 물러선 녀석이 멀리 대만까지 글을 보내 내게 구조요청을 해온 것이었다. 연암은 고문가인가, 아닌가? 김택영이 『여한십가문초』에서 연암을 당당히 ..
6. 설렘 가득한 마음과 말없이 시를 빚어내는 마음 이제 시 두 수를 읽으며 이 글을 마무리 한다. 먼저 박제가朴齊家의 「위인부령화爲人賦嶺花」란 작품이다. 毋將一紅字 泛稱滿眼花 ‘붉다’는 한 글자만을 가지고 눈앞의 온갖 꽃을 말하지 말라. 花鬚有多少 細心一看過 꽃술에는 많고 적고 차이 있거니 꼼꼼히 하나하나 살펴봐야지. 산마루 위에 핀 들꽃을 보고 지은 시이다. 눈앞의 꽃을 보고 그저 ‘붉은 꽃’이라고만 말하지 말라. 시인이 사물을 보는 시선은 이래서는 안 된다. 꽃술의 모양은 어떤지, 붉다면 어떤 붉은 색인지, 그것이 주는 느낌은 어떤지를 말해야 한다. 그래야 그 꽃은 내가 만난 단 하나의 의미가 된다. 가슴으로 만나지 못하는 꽃은 꽃이 아니다. ‘이름 모를 꽃’은 꽃이 아니다. 떨림이 없는 만남은 만..
5. 잃어버린 시는 어디에 있나? 문장의 성대함을 알고 싶은가? 역관의 천한 인사에게 가서 찾아볼 일이다. 사대부들에게서는 찾아볼 길이 없으니, 나는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연암은 글을 이렇게 끝막는다. 이 서문을 받아든 이홍재의 표정은 어땠을까? 칭찬같기도 하고 비아냥 같기도 하구나. 그런데 연암이 넌즈시 던지는 이 말이 정작 내게는, 시인은 많은데 시다운 시는 찾아보기 힘든 오늘의 시단詩壇을 향한 일침一針으로 읽힌다. 연암의 말투를 좀 더 흉내내 보면, 어려서는 능히 사물을 바라볼 줄도 알고, 우주만물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줄 알다가도 자라면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에 필요한 공부에만 힘을 쏟는다. 그래서 대학에 합격하거나 직장에 취직하고 나면 그간 배운 지식들이란 마냥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
4. 고문은 역관에게, 전통복식은 기생에게 남다 내가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사대부가 태어나 어려서는 능히 책을 읽어도, 자라면 공령功令의 글을 배워 변려의 꾸미는 글을 익힌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고 나면 더벅머리를 가리는 임시변통의 고깔모자나 고기 잡는 통발, 토끼 잡는 올무 마냥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그나마 급제하지 못하면 흰 머리가 될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고 애를 쓴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고문사란 것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역관이란 직업은 사대부가 비루하고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천재千載의 사이에 도리어 저서著書하고 입언立言하는 실지를 서리 구실하는 말단의 기술로 보아버리게 될까 염려한다. 그렇게 되면 연극하는 마당의 검은 모자나 고을 기생의 긴 치마가 ..
3. 역관임에도 고전문장으로 문집을 만든 이홍재 이홍재李弘載 군이 젋어서부터 내게서 배웠다. 장성해서는 한어漢語 통역에 힘을 쏟았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譯官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다. 이군이 그 학업에 힘을 쏟더니 관대冠帶를 하고는 사역원司譯院에 벼슬나갔다. 나 또한 이군이 앞서 책을 읽음이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리를 능히 알았으나 이제는 거의 잊었으리라 생각하여, 그저 그렇게 없어지고 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었다. 하루는 이군이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하면서 제목하여 ‘자소집自笑集’이라 하고는 내게 보여주었다. 논論ㆍ변辨ㆍ서序ㆍ기記ㆍ서書ㆍ설說 같은 백여편은 모두 내용이 풍부하고 논리가 정연하여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는 의아히 여겨 말하였다. “본업을..
2. 촌스럽고 경박하다며 살아남은 전통을 멸시하다 해마다 가는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 남쪽 吳 땅의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吳 땅 사람이 말하였다. “내 고향에 머리 깎는 가게가 있는데, 간판을 ‘성세락사盛世樂事’라고 했습디다.” 인하여 서로 보고 크게 웃다가는 조금 있더니 남몰래 눈물을 흘리려 하더라고 했다. 歲价之入燕也, 與吳人語吳人曰: “吾鄕有剃頭店, 榜之曰盛世樂事.” 因相視大噱, 己而潛然欲涕云.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사신 가서 남쪽 오吳 땅 사람과 만나 이야기 하다 보니, 제 고향에 새로 생긴 이발소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간판이 이름하여 ‘성세락사盛世樂事’라는 것이다. 예전 법도로야 부모께 받자온 신체발부身體髮膚에 손대는 일이 가당키나 했으랴. 구한말 개화기 때조차도 ‘차두此頭는 가..
1. 사라진 예법은 시골깡촌에 살아있다 초등학교 4학년 난 딸아이는 날마다 일기를 쓰는데, 담임 선생님이 날씨를 그저 ‘맑음’ ‘흐림’으로만 적지 말고 설명적인 기술로 적어오라고 한 모양이다. 몇 달이 넘게 일기를 써오고 있지만, 그 날씨의 묘사가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노랗고 어여쁜 개나리같이 생긴 해가 허연 수염 난 구름과 둥실 둥실 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사뿐사뿐 뛰어 다니고, 하늘이 울적해 보인다.” “어두운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각자 심술을 내면서 귀엽고 아주 조그만 빗방울들을 하나하나씩 새나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듯이 떨어뜨린다.” “탱탱볼처럼 동그랗고, 오렌지처럼 상큼한 햇님이 방글방글 벙글벙글 신나게 수영하듯 저리 빙글 요리 빙글 거리며 파아란 하늘에 동동 떠 있다.” “어..
6.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시인의 고약한 입냄새 시대마다에는 참으로 다른 그 시대의 정신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생각하는 방식이나 표현 방법, 좋은 문학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가? 비슷한 것은 가짜다. 눈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가 있다. 집 짓는 데는 미장이도 필요하고 기와장이도 필요하다. 이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한국 한시사는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같은 시대 이용휴李用休는 “시를 지으면 당시唐詩가 아님이 없는 것이 근래의 폐단이다. 당시의 체를 흉내 내고 당시의 말을 배워서 거의 한 가지 소리에 가깝다. 이것은 앵무새가 하루 종일 앵앵거려도 자기의 소리는 없는 것과 같으니 나는 이것을 몹시 혐오한다”고 했다. 飢食而渴飮 歡笑而憂顰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
5. 큰 학자가 되려면 품이 넉넉해야 而我病陰虛 四年疼跗踝 그러나 내 음허陰虛한 병을 앓아서 발등과 복사뼈가 아픈지 네 해. 逢君寂寞濱 靜若秋閨姹 적막히 지내다 그댈 만나니 얌전하기 마치도 아가씨 같네. 解頤匡鼎來 幾夜剪燈灺 시 얘기 잘하는 광정匡鼎이 와서 몇 밤을 등불 심지 잘라냈던고. 論文若執契 雙眸炯把斝 문장을 논함은 내 생각 같아 술잔 잡은 두 눈동자 반짝였었지. 一朝利膈壅 滿口嚼薑葰 꽉 막힌 가슴이 하루 아침 뚫리니 한 입 가득 생강을 씹고 있는듯. 平生數掬淚 裹向秋天灑 평생의 몇 웅큼 눈물 방울을 가을 하늘 향해서 흩뿌리노라. 69구에서 끝까지는 서유본과 만나 이야기한 기쁨과 그에게 주는 당부로 시를 맺었다. 적막히 혼자 병 앓고 있던 나를 그대가 찾아주니 참으로 기쁘고 반가웠네. 얌전한 아가..
4. 지금ㆍ여기를 말하라 卽事有眞趣 何必遠古抯 눈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 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 漢唐非今世 風謠異諸夏 한나라 당나라는 지금 세상 아니요 부르는 노래도 중국과는 다르다네. 班馬若再起 決不學班馬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 난대도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新字雖難刱 我臆宜盡寫 새 글자 만들긴 어렵다 해도 내 품은 생각은 써내야 하리. 奈何拘古法 劫劫類係把 어이해 옛법에 얽매이어서 두고두고 여기에만 매달린단 말인가. 莫謂今時近 應高千載下 지금이 천근淺近타 말하지 말라 천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 이어 53구에서 64구까지 연암의 도도한 논설이 이어진다. ‘진취眞趣’, 즉 참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멀고 아득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지금 세..
3. 전적이 있다면 뭐든 좋단 말인가 靑靑陵陂麥 口珠暗批撦 푸릇푸릇 언덕엔 보리 돋아도 입속 구슬 남몰래 쳐서 꺼낸다. 不思腸肚俗 强覓筆硯雅 뱃속이 속된 것은 생각지 않고 붓 벼루 좋은 것만 굳이 찾는다. 點竄六經字 譬如鼠依社 육경의 글자를 훔쳐 모으니 사당에 숨어 사는 쥐새끼 같네. 掇拾訓詁語 陋儒口盡啞 훈고의 말들을 주어 섬기매 촌스런 유자들 입다물 밖에. 太常列飣餖 臭餒雜鮑鮓 제관이 제사 음식 진열하면서 절인 고기 젓갈 섞어 고약한 냄새. 夏畦忘疎略 倉卒飾緌銙 여름철 농사꾼이 제 꼴을 잊고 얼떨결에 끈 달고 혁대 박아 꾸민듯. 41구에서 52구까지는 옛것을 추구한다는 자들의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장자』 「외물」에 보면 시례詩禮를 외우면서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두 명의 유자가 나온다..
2. 칭찬을 듣고도 기쁘지 않은 이유 我亦聞此譽 初聞面欲剮 나 또한 이런 기림 들은 적 있어 맨 처음 들었을젠 낯을 도려내는듯. 再聞還絶倒 數日酸腰髁 두 번 째 듣고는 외려 배를 잡고서 며칠동안 엉덩이 뼈 시큰했었지. 盛傳益無味 還似蠟札飷 떠들어 댈수록 점점더 흥미 없어 마치도 밀랍을 씹는 듯 했네. 因冒誠不可 久若病風傻 헛된 기림 받는 건 안될 일이라 나중엔 풍 맞은 바보 되었지. 21구에서 28구까지 연암은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나도 예전에 이런 칭찬을 들은 일이 있었다. “자네의 문장은 꼭 양한의 풍격이 있네 그려. 시는 꼭 성당의 시와 같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두 번 듣고는 배를 잡고 뒹굴며 웃다가 엉덩이 뼈가 쑤실 지경이었다. 자꾸 그런 소리를 ..
1. 흉내내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군의 시고詩稿는 몹시 적어서, 고체와 금체시 모두 50수 뿐이다.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韓愈를 배웠는데 기이하고 험벽하기는 그보다 더 해서, 정경情境은 핍근하고 필력이 막힘이 없다. 율시와 절구 등의 시는 항상 성률에 구속되어 마음 속에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그래서 왕왕 한 두 구절만 이룬 채 그만 둔 것이 많다. -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태학사, 1997), p.279 연암이 시 짓기를 즐기지 않았던 것은 그러니까 운자니 평측이니 하는 성률에 얽매여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것이 싫어서였다. 이번에 보려고 하는 연암의 시 「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은 몇 ..
5. 동심의 중요성을 외친 이지 그런데 문학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천진과 진정의 모델을 동심童心에서 찾고 있는 것은 연암이나 이덕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명나라 이지李贄(1527-1602)의 「동심설童心說」과 무관하지 않다. 이지李贄는 이탁오李卓吾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국의 이단적인 사상가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했다는 비난 끝에 탄압을 받아 옥중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그는 「동심설」을 바탕으로 위선적인 도학道學과 가식적인 문학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동심설」은 당대에 워낙 큰 파장을 일으켰던 글이기에 조금 길지만 자료 소개 삼아 여기에 전문을 옮겨 소개한다. 용동산농龍洞山農이 『서상西廂』을 쓰며 끝에다 말하기를, “아는 이가 내가 여태도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4. 동심으로 돌아가자, 처녀로 돌아가자 아아! 『시경』 3백편은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 아닌 것이 없고, 뒷골목 남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패邶 땅과 회檜 땅의 사이는 지역마다 풍속이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위로는 백성의 풍속이 제각금이다. 그런 까닭에 시를 채집하는 자가 여러 나라의 노래로 그 성정을 살펴보고 그 노래의 습속을 징험하였던 것이다. 다시 어찌 무관의 시가 옛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겠는가? 만약 성인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의 노래를 살피게 한다면, 『영처고』를 살펴보아 삼한의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요, 강원도 사내와 제주도 아낙의 성정을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니, 비록 이를 조선의 노래라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嗚呼..
3. 지금ㆍ여기의 이야기를 담아낸 무관이 지은 시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하지만 또한 천승千乘 제후의 나라이고, 신라와 고려가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민간에는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다. 그럴진대 그 방언을 글로 적고 그 민요를 노래한다면 절로 문장을 이루어 참된 마음이 발현될 것이다. 남의 것을 그대로 답습함을 일삼지 않고 서로 빌려와 꾸지 않고, 지금 현재에 편안해 하며 삼라만상에 나아감은 오직 무관의 시가 그러함이 된다. 左海雖僻, 國亦千乘, 羅麗雖儉, 民多美俗, 則字其方言, 韻其民謠, 自然成章, 眞機發現. 不事沿襲, 無相假貸, 從容現在, 卽事森羅. 惟此詩爲然. 이상 살펴본 연암의 이야기는 이렇다. 배울 것을 배워라. 옛 것이라고 무작정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옛 것은 도리어 지금 것에 치명적인..
2. 동심으로 돌아가자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나고 붉고 수염이 달린 의젓한 관운장關雲長의 소상塑像이 있다. 사녀士女가 학질을 앓게 되면 그 좌상座床 아래에 들여놓는데,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겨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꼬맹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위엄스러운 소상을 모독하는데, 눈동자를 후벼 파도 꿈벅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대도 재채기 하지 않으니,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빚은 소상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수박의 겉을 핥는 자나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맛을 이야기할 수가 없고,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 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함께 계절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형상을 꾸미고 의관을 입혀 놓더라도 ..
1. 무관의 시는 옛날의 시가 아닌 지금의 시 자패가 말하였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의 시를 지음은. 옛 사람을 배웠다면서 그 비슷한 구석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않으니, 어찌 소리인들 방불하겠는가?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時俗의 잗단 것을 즐거워하니 지금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子佩曰: 陋哉! 懋官之爲詩也. 學古人而不見其似也. 曾毫髮之不類, 詎髣髴乎音聲. 安野人之鄙鄙, 樂時俗之瑣瑣, 乃今之詩也, 非古之詩也. 『영처고』는 이덕무가 젊은 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嬰處’는 영아嬰兒와 처녀處女를 가리키는 말이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운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 처녀처럼 순진한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다. 자패子佩는 앞서..
1.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을 비판하다 그대는 태사공太史公[각주:1]의 『사기史記』를 읽었으되 그 글만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사외다. 왜냐고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堡壘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구경하던 광경[각주:2]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느니, 「자격열전刺客列傳」을 읽을 땐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던 장면[각주:3]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늙은 서생의 케케묵은 말일 뿐이니, 부엌에서 숟가락 줍는 것[각주:4]과 뭐가 다르겠습니까?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嘗讀其心耳. 何也? 讀項羽, 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아마 경지가 지난번에 연암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항우본기」를 읽을 땐 제후들의 ..
1. 경지란 누구인가? 이 편지는 경지京之라는 사람에게 보낸 답장이다. 경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가 혹 당대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퉁소 연주자인 이한진李漢鎭(1732~?)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한진은 호가 경산京山이고, 자는 중운仲雲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경지’는 그의 또 다른 자字가 아닐까 한다. 이한진은 감역監役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을 뿐이다. ‘감역’이라는 벼슬은 대개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이 음직蔭職으로 하는 벼슬이다. 홍대용과 박지원도 감역 벼슬로부터 벼슬을 시작했다. 이한진은 전서篆書와 퉁소에 능하고 아취가 있었으며, 성대중成大中(1732~1809)ㆍ홍대용ㆍ이덕무ㆍ박제가ㆍ홍원섭洪元燮(1744~1807) 등과 교유했다. 성대중의 문집인 『청성집』에 ..
5-1. 총평 1이 글은 1770년(34세) 아니면 1771년(35세)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이 백탑 부근에 살 때다. 연암은 이 시기에 쓴 자신의 글을 모아 두 권의 책을 엮었으니, 하나는 『공작관 글 모음孔雀館文稿』이고, 또 하나는 『종북소선鍾北小選』이다. 전자는 1769년 겨울에, 후자는 1771년 겨울에 엮었다. 이 글은 당시 『종북소선』에 수록했던 글이다. 『과정록』에 보면 연암은 중년 이후 『장자』와 불교에 출입했다고 했는데, 이 글은 『장자』의 어법과 사고방식이 아주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연암이 『장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상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는 사유를 혁신하고, 감수성을 쇄신하며, 관점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자』를 활..
7-1. 총평 1이 글은 ‘문장을 짓는 건 진실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여, 창작의 비의秘義와 비평의 독자적 의의에 대해 언급한 다음, 최종적으로 이 모두를 종합해 독자에게 당부하는 말로 끝맺고 있는바, 앞뒤로 아귀가 딱 맞다. 2이명과 코골이! 창작과 비평에 대해 말하기 위해 구사하고 있는 이 비유는 대단히 기발하고 참신하다. 한국문학사에서 길이 기억될 만한 창조적 비유가 아닌가 한다. 3이 글은 창작과 수용의 갭에 대한 예민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창작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연암의 깊은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작가만이 볼 수 있는 내밀한 지점이 존재한다는 점, 작가만이 듣는 은밀한 소리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한 설파는 창작의 독자적 의의 및 창작 주체의 내면에 대한 깊은 ..
4-1. 총평 1이 글은 연암이 그 제자인 이서구에게 독서의 방법을 설파한 내용이다. 아마도 연암은 이서구의 독서 태도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기에 이런 의론을 펼쳤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의 의의는 그런 쪽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글의 의의는 연암이 자기 시대의 독서법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암 당대의 조선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독서법이 있었으니, 하나는 성리학적 독서법이고, 다른 하나는 고증학적 독서법이며, 또 하나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독서법이었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연암의 시대에만 있던 독서법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왔던 독서법이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성리학을 하는 데 긴요한 책들의 목록을..
8-1. 총평 1연암은 문학론과 관련된 글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글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연암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2연암은 이 글을 서른두 살 때 썼으며, 4년 뒤에 개작하였다. 이를 통해 연암이 30대 초반에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 관점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3‘법고창신론’은 문학 창작방법론으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창조에도 유용한 원리가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포괄적 미학 원리다. 연암이 창안한 이 이론은 전통과 혁신, 과거와 현재, ‘고古’와 ‘신新’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 그것은 한국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4‘법고창신론’은 그 이론..
5-1. 총평 1이 글은 불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 연암은 불교와 관련된 글을 몇 편 남기고 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다. 2연암은 동자승과 대사가 주고받는 문답을 그 곁에서 듣고 있고, 독자는 그것을 다시 엿듣는다. 3연암은 동자승과 대사의 문답을 통해 심오한 이치를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의 개성까지도 잘 묘파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어려운 이치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은 여유롭고 생기가 넘친다. 4이 글은 퍽 파격적인 글이다. 기문記文으로 작성된 글임에도 글의 대부분은 엉뚱하게도 대사와 동자승의 문답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 문답 속에 기문을 부탁한 사람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그 문답은 엉뚱한 것이 아니요, 주도면밀한 고려의 결과..
7-1. 총평 1이 글은 서간문이다. 전근대 시기에는 서간문도 엄연한 문학 작품이었다. 연암의 서간문은 문예성이 퍽 빼어나다. 이 글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2이 편지는, 처음에 서울에 있는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중간에 친구의 소중함을 설파하고, 끝에 백아의 고사에 빗대어 벗을 잃은 사람의 지극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이 보여주는, 백아의 심리적 추이에 대한 묘사는 연암의 대가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이 글 중 가장 빼어난 부분이라 할 만하다. 3이 글은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인 1793년에 씌어진 것인바 연암 57세 때의 글이다. 노老 연암의 원숙미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4 이 작품은 ‘법고창신’이란 게 구체적..
1. 파격적인 제문 살아 있는 석치石癡[각주:1]라면 함께 모여 곡도 하고, 함께 모여 조문도 하고, 함께 모여 욕지거리도 하고, 함께 모여 웃기도 하고, 몇 섬이나 되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맨몸으로 서로 치고받고 하며 고주망태가 되도록 잔뜩 취해 서로 친한 사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인사불성이 되어, 마구 토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혀 어질어질하여 저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生石癡, 可會哭可會吊, 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忘爾汝, 歐吐頭痛, 胃翻眩暈, 幾死乃已. 今石癡眞死矣. 제문祭文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서, 흔히 제물祭物을 올려 축문祝文처럼 읽게 되어 있다. 그 형식은 보통 글의 서두에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공인恭人[각주:1] 휘諱[각주:2] 모某[각주:3]는 완산完山[각주:4] 이동필李東馝[각주:5]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각주:6] 후손이다. 열여섯에 반남潘南[각주:7] 박희원朴喜源[각주:8]에게 시집 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형수님은 평소 몸이 여위고 약해 온갖 병에 시달렸다.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희원의 할아버지[각주:9]는 당대에 이름난 고관高官이었는데, 선왕先王[각주:10]께서는 매양 한漢나라 탁무卓茂의 고사故事[각주:11]를 거론하며 그 벼슬을 올려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
2-1. 총평 1이 글은 처음에 ‘백동수가 왜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려 하는가?’ 물은 다음, 물꼬를 바꾸어 연암협에서의 둘만의 은밀한 일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단락에서 연암협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오지인 기린협으로 떠나가는 백동수를 보는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은 앞의 두 단락과 각각 호응하면서 독자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은 하나의 가난이 또 다른 가난과 오버랩 되면서 생겨난다. 그 때문에 떠나보내는 사람의 슬픔이 곱절이나 크게 느껴진다. 이처럼 이 글은 그 구성이 아주 정교하다. 소품이지만 물샐틈없이 삼엄해, 토씨 하나 바꿀 수 없고, 쓸데없는 말이 하나도 없다. 2이 글이 감동적인 것은 연암의 진정眞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떠..
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내가 동東으로 금강산을 유람할 적이다. 골짝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옛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써 놓은 게 보였는데 큼지막한 글씨로 깊이들 새겨 놓아 작은 틈도 없었으니 마치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거려 어깨가 부딪는 것 같기도 하고 교오의 묘지에 빽빽이 들어선 무덤 같기도 했다. 옛날에 새긴 이름은 이끼에 덮여 있었고, 새로 쓴 이름은 붉은 글씨가 환히 빛났다.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의 바위 위에 이르매 날아가는 새 그림자도 없었으며 오직 ‘金弘淵김홍연’이라고 새긴 세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심 참 이상하다고 여기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에로부터 관찰사의 위세란 족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하고, 또..
1. 왜 중국사람에게 홍대용의 부고를 알리는가? 덕보德保[각주:1]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떤 객客이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가는 길이 삼하三河[각주:2]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이름은 손유의孫有義[각주:3]이고 호는 용주蓉州다. 3년 전[각주:4]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다[각주:5]는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토산품 두어 가지를 정표情表로 두고온바 용주는 그 편지를 읽어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떠나는 객에게 다음과 같은 부고訃告를 용주에게 전하게 하였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
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삼한三韓[각주:1] 서른여섯 도회지[각주:2]에 노닐다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가없는데 이름난 산과 높다란 봉우리가 그 사이에 솟아 있어 백 리 이어진 들이 드물고 천 호戶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땅덩어리가 참으로 좁다 하겠다.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與天無極, 而名山巨嶽, 根盤其中,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其爲地也亦已狹矣.대단히 거창하게 서두를 열고 있다. 아주 높은 곳에서 한반도의 땅덩어리를 내려다보면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 유언호ㆍ신광온申光蘊 등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 글은 그 이듬해인 176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東臨滄海)”..
2-1. 총평 1이 글은 연암 그룹의 예술 취향과 그 정신적 깊이를 썩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자유로움과 초속적超俗的 태도가 글 전편에 넘친다. 이 글은 길이는 짧되, 그 깊이는 아주 깊고, 그 운치는 한량없다. 2이 글은 유춘오 악회를 기념해 쓴 글이라 할 만하다.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연암은 유춘오에서 있었던 두 건의 일을 두 개의 단락으로 병치해 구성하고 있다. 이 두 건의 일은 유춘오 악회의 수준과 분위기를 잘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연암이 유춘오 악회와 관련하여 쓴 글은 이것이 유일하다. 3이 글은 이중二重의 교감과 소통을 보여준다. 하나는 인간 대 인간의 교감과 소통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 대 자연의 교감과 소통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연암의 예술철학이랄까 예..
5-1. 총평 1이 글은 서른여섯 살 무렵의 연암의 자화상이라 이를 만하다. 연암은 자신의 착잡한 심리 상태와 자의식을 기복起伏이 풍부한 필치로 솜씨 있게 그려 내고 있다. 2이 글은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힘겹게 버티며 저항하고, 또 힘겹게 버티고 저항하면서도 자신이 지치고 낙담에 빠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응시하는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슬프다. 연암의 산문 중 이 작품만큼 페이소스pathos가 그득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더보기호기로움만은 젊은 시절 못지 않네酬素玩亭夏夜訪友記 六月某日, 洛瑞夜訪不侫, 歸而有記. 云: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與廊曲賤隸相問答.” 所謂燕巖者, 卽不侫金川峽居, 而人因以號之也..
6-1. 총평 1이 글은 1773년(영조 49) 경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나이 37세 때이다. 당시 연암은 과거科擧를 포기한 채 곤궁하게 살면서 문학과 사상을 한층 더 높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가고 있었다. 이 글은 이 시기 연암의 감정과 태도를 잘 보여준다. 2이 글을 읽으며 우리는 어떤 대목에서는 빙그레 웃게 되고, 어떤 대목에서는 이 글 속 인물들의 처지에 공감되어 슬픈 마음이 되기도 하며, 어떤 대목에서는 그 아름다운 묘사에 마음을 빼앗겨 황홀해지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흐뭇해지기도 하며, 어떤 대목에서는 정신이 각성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글은 파란과 변화가 많아, 배를 타고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강안江岸의 풍경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감정에 잠기게..
1. 작은 규모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다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각주:1]는 양군梁君 인수仁叟[각주:2]의 초당草堂이다. 이 집은 오래된 소나무가 있는 검푸른 절벽 아래에 있으며 기둥이 여덟 개인데, 깊숙한 안쪽을 막아서 심방深房[각주:3]을 만들고, 격자창格子窓을 통하게 하여 탁 트인 대청을 만들었다. 높다랗게 다락을 만들고 아담하게 곁방을 둔 데다 대나무 난간을 두르고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으며 오른쪽엔 둥근창을 내고 왼쪽엔 빗살창을 내었으니, 집의 몸체는 비록 작아도 있을 것은 다 갖춰져 있어 겨울에는 환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집 뒤에는 배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대나무 사립문 안팎으론 모두 오래된 살구나무와 붉은 과실이 열리는 복사나무다. 개울 머리에 흰 돌을 두어 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세차게..
1. 대나무에 관한 글을 써주지 않으려는 이유 예로부터 대나무를 찬양한 사람은 무지하게 많다. 『시경』 「기욱淇燠」 시[각주:1] 이래로 읊조리고 찬탄하는 것만으론 부족해서 ‘차군此君[각주:2]’이라 일컬으며 숭상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에는 ‘죽竹’으로 자호字號를 삼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게다가 그런 호를 지은 까닭을 기문記文[각주:3]으로 적곤 하지만, 설사 채윤蔡倫[각주:4]이나 몽염蒙恬의 지필紙筆이라 할지라도, 대나무를 두고서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지조라느니 소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라느니 하고 서술하는 데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쓴 글이 죄다 진부한 글이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그 정채를 잃게 되었..
1. 자연을 담아내는 신채나는 표현 밤에 봉상촌鳳翔村[각주:1]에서 자고 새벽에 강화로 출발하였다. 5리쯤 가자 비로소 동이 텄는데 티끌 기운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해가 겨우 한 자쯤 떠오르는가 싶자 문득 까마귀 머리만 한 시커먼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를 반이나 덮어 버렸다. 침침하고 어둑하여 한을 품은 것 같기도 하고, 수심에 잠긴 것 같기도 한데, 잔뜩 찡그려 편치 않은 모습이었다. 햇살은 옆으로 뻗쳐 나와 모두 꼬리별을 이뤘으며, 하늘 아래로 방사放射되는 모양이 흡사 성난 폭포 같았다. 夜宿鳳翔邨, 曉入沁都. 行五里許, 天始明, 無纖氛點翳. 日纔上天一尺, 忽有黑雲, 點日如烏頭, 須臾掩日半輪. 慘憺窅冥, 如恨如愁, 頻蹙不寧. 光氣旁溢, 皆成彗孛, 下射天際如怒瀑. 글머리를 아..
3-1. 총평 1이 글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고 그런 연후에 다시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등 굴곡과 변전變轉이 심한 글이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연암은 의도적으로 기억과 현재의 풍경을 마주 세우고 있으며, 이 마주 세움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글에서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요, 과거와 현재의 관계, 더 나아가 현재에 대해 발언하는 하나의 미적 방식이 되고 있다. 연암은 묘지명의 상투적인 형식이나 일반적인 격식을 무시하고 마음의 행로에 따라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이 글은 형식적으로는 아주 파격적이되, 내용적으로는 더없이 진실하고 감동적인 글이 될 수 있었다. 2이 글은 연암의 누이에 대한 글이고, 삽입된 에피소드도 연암..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고古’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의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는 진정한 자기회귀自己回歸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고’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고’에 대한 탐구다. 텍스트에 대한 사유와 자아의 확장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1. 16살에 시집간 누이가 고생만 하다 43살에 죽다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 여섯에 덕수德水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鵝谷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 한다.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 孺人十六歸德水李宅模伯揆,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夫之先山曰鵝谷, 將葬于庚坐之兆.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곡진한 느낌을 십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 한편의 명문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과는 여덟 살의 터울이..
1. 좋은 골동품도 몰라보는 세대 옛날에 고기古器를 팔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 바탕은 딱딱한 것이 돌이었는데, 술잔으로나마 쓰려 해도 밖은 낮고 안이 말려있는데다, 기름 때가 그 빛을 가리고 있었다. 나라 안을 두루 다녀 보아도 거들떠 보는 자가 있지 않자, 다시금 부귀한 집을 돌았지만 값은 갈수록 더 떨어져 수백전에 이르게 되었다. 하루는 그것을 가지고 서여오徐汝五에게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여오가, “이것은 붓씻개이다.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온 것으로 옥 다음으로 쳐주니 민옥珉玉과 같은 것이다” 하고는 값의 고하를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8천을 주었다. 그 때를 벗겨내자 앞서 딱딱하던 것은 바로 돌의 무늬결이었고, 쑥색을 띤 초록빛이었다...
1. 사흘을 굶고 머슴과 친해진 연암 윗글은 제자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연암 댁을 방문했던 일을 적은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란 소품 산문이다. 여기에는 연암이 사흘 굶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가난이 선비의 다반사라지만, 그 높은 뜻에 안쓰런 궁핍이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5월 그믐에 서편 이웃으로부터 걸어 연암 어른 댁을 찾았다. 때마침 희미한 구름은 하늘에 걸렸고, 숲속에 걸린 달은 푸르스름하였다. 종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은은하더니 나중엔 둥둥 점차 커지는 것이 마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어른이 댁에 계실까 생각하면서 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먼저 그 집 들창을 살펴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季夏之弦, 步自西隣, 訪燕巖丈人...
1. 무더운 여름밤 연주하고 춤추던 친구들 이번에 읽을 두 편 글은 연암과 그 벗들이 격의 없이 만나 예술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들이다. 암울한 시대를 건너기가 답답해 가슴 터지기야 그들이 우리보다 덜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풍류와 여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발광發狂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윗글의 제목은 「하야연기夏夜讌記」이다. 22일,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에게 갔다. 풍무風舞 김억金檍은 밤에야 도착하였다. 담헌이 슬瑟을 타자, 풍무는 금琴으로 화답하고, 국옹麯翁은 갓을 벗고 노래한다. 밤 깊어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자 더운 기운이 잠시 가시고, 현絃의 소리는 더욱 맑아진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요히 묵묵하다. 마치 내단內丹 수련 하는 이가 내관..
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그대를 장하게 여기리 현실에 좌절하고 가난을 못이겨 식솔들을 이끌고 강원도 두메 산골로 들어가는 벗 백영숙白永叔을 전송하며 써준 글이다. 친구를 전송하면서도 글을 써주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예전에는 그랬다. 그의 이름은 백동수白東修(1743-1816)이니 영숙永叔은 그의 자이다. 호는 인재靭齋 또는 야뇌당野餒堂이라 하였고 점재漸齋라고도 했다. 영숙永叔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그 선대에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죽은 이가 있으니, 지금까지 사대부들이 이를 슬퍼한다. 영숙은 전서와 예서에 능하고 장고掌故에 밝다. 젊어서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뛰어나 무과에 뽑히었다. 비록 벼슬은 시명時命에 매인 바 되었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뜻만은 선조의 공덕을 ..
1. 벗을 찾겠다고 하면서 상우천고를 외치다 옛날에 벗을 말하는 자는 벗을 두고 혹 ‘제이오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글자를 만든 자가 ‘우羽’자에서 빌려와 ‘붕朋’자를 만들고, ‘수手’자와 ‘우又’자로 ‘우友’자를 만들었으니,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이 양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古之言朋友者, 或稱第二吾, 或稱周旋人. 是故造字者, 羽借爲朋, 手又爲友. 言若鳥之兩翼, 而人之有兩手也. 벗은 ‘제 2의 나’이다. 나를 위해 온갖 일을 다 나서서 ‘주선해 주는 사람’이다. ‘붕朋’이란 글자는 ‘우羽’자의 모양을 본떴고, ‘우友’자는 ‘수手’자에 ‘우又’자를 포개 놓은 모양이다. 진정한 벗이란 새의 양 날개나, 사람의 두 손과 같이 어느 하나가 ..
1. 드넓은 자연에 대비되는 하찮은 존재 이번에 읽으려는 「호곡장好哭場論」은 『열하일기』의 한 부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드넓은 요동벌과 상면하는 감격을 적은 글이다. 본래 제목이 없으나 선학先學의 명명命名을 따랐다. 1939년 경성제국대학 대륙문화연구회가 북경과 열하 일대를 답사하고 펴낸 보고서, 『북경ㆍ열하사적관견北京熱河の史的管見』에서 결론 대신 이 글을 적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문장이다. 초팔일 갑신 맑음. 정사正使와 가마를 같이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십여리를 가서 한 줄기 산 자락을 돌아 나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몸을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말 머리를 지나더니 땅에 엎디어 큰 소리로 말한다. “백탑白塔 현신現身을 아뢰오.”태복이는 정진사鄭進士의 말구종..
1. 장서마다 도장을 찍어 자손에게 물려주다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는 유련柳璉(1741-1788)이 자신이 수집한 고금의 인장印章을 찍어 한 권의 인보집으로 만든 『유씨도서보柳氏圖書譜』의 서문으로 써준 글이다. 연옥連玉 유련柳璉은 도장을 잘 새긴다. 돌을 쥐고 무릎에 얹고, 어깨를 기우숙하게 하여 턱을 숙이고서, 눈을 꿈뻑이고 입으로 불며 그 먹글씨를 파먹어 들어가는데 실낱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입술을 삐죽 모아 칼을 내밀고 눈썹에 힘을 주더니만 이윽고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보며 길게 숨을 내쉰다. 連玉善刻章. 握石承膝, 側肩垂頤, 目之所瞬, 口之所吹, 蚕飮其墨, 不絶如絲. 聚吻進刀, 用力以眉, 旣而捧腰仰天而欷. 그는 전각篆刻에 취미가 있어 옥돌 위에 쓴 글씨가 끊어지는 법 없이 잘도 ..
1. 음산한 빛에 놀라 명문을 부탁하다 「주공탑명」은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엮은 『병세집幷世集』과 이규경李圭景(1788-1856)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 연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수록되었을 만큼 당대 문인들에게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행간이 미묘할 뿐 아니라, 전체 글이 중층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첫 단락은 명銘을 쓰게 된 전후 사실을 적고 있다. 주공麈公 스님의 입적 사실과 다비식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상한 일들, 그리고 사리 수습 및 부도탑浮圖塔을 세우려고 탑명塔銘을 자신에게 청탁해 온 일 등을 기술하였다. 주공麈公 스님이 입적한 지 엿새되던 날 적조암寂照菴 동대東臺에서 다비를 하였다. 그곳은 온숙천溫宿泉 노송나무 아래에서 열 ..
1. 사라지는 연기 담배가 방생한 연기는 지금어디쯤 자유로이 날아가고 있을까 우리들 삶을 연기와 같다고 말하지만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담배연기,담배연기를 보며허무와 자유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박상천의 「방생放生ㆍ5」란 작품이다. 시인은 삶이란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담배 연기와 같은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유롭지만 그러기에 허무한 거라고 말한다. 내 입에서 품어져 나간 담배 연기,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담배 연기, 분명히 있었지만 찾을 길 없는 담배 연기. 그는 왜 담배 연기를 보며 허무와 자유를 같이 떠올렸을까?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니 허무하고, 얽매임 없이 제멋대로 날아가고 있기에 자유롭다고 했다. 그런데 허무는 자유로운가? 자유는 과연 허..
1. 송욱이 송욱을 찾아다니다 송욱宋旭이 취해 자다가 아침에야 술이 깼다. 드러누워 듣자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우짖으며 수레 끄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울타리 아래서는 방아 찧는 소리, 부엌에서는 설거지 하는 소리. 늙은이가 소리치고 아이가 웃는 소리, 계집종이 잔소리하자 사내종이 헛기침 하는 소리, 무릇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모를 것이 없는데, 유독 제 소리만은 없는 것이었다. 宋旭醉宿, 朝日乃醒. 臥而聽之, 鳶嘶鵲吠, 車馬喧囂. 杵鳴籬下, 滌器廚中. 老幼叫笑, 婢僕叱咳. 凡戶外之事, 莫不辨之, 獨無其聲. 이에 그만 멍해져서 말하였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있는데, 나만 어째 혼자 없는 걸까?” 눈을 둘러 살펴보니, 저고리는 옷걸이에, 바지는 횃대에 있고, 갓은 벽에 걸려 ..
1. 모범답안을 모아 합격집을 만들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처남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열 권으로 묶은 『소단적치』란 책에 써준 글이다. ‘소단적치’란 ‘문단의 붉은 깃발’이란 뜻이고 붉은 깃발은 대장군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과거에서 높은 등수로 합격한 모범 답안만을 엮어,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글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면 어떤 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답안 작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해마다 출제되는 문제는 같지가 않고, 채점하는 사람의 기준 또한 서로 다르니, 예전 모범 답안을 외우는 것이 과연 수험 준비에 어떤 도움이 될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논술고사를 ..
1. 밤과 쌀 같은 문집을 내밀며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두루 기록하였는데, 심지어 종이연에도 계보가 있고, 아이들 수수께끼에도 풀이를 달아 놓았다. 후미진 뒷골목의 흐드러진 인정과 익숙한 모습들, 문에 기대서거나 칼을 두드리거나, 어깨짓으로 아양 떨고 손바닥을 치며 맹세하는 시정市井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제각금 조목조목 엮어 놓았다. 입과 혀로는 분변하기 어려운 것도 반드시 드러내었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바도 책을 열면 문득 실려 있다. 무릇 닭 울고 개 짖으며 벌레가 날고 좀이 꿈틀대는 것도 모두 그 모습과 소리를 얻었다. 이에 있어 십간十干으로 배열하고는 이름 지어 『순패旬稗』라 하였다. 小川菴雜記域內風謠民彛方言俗技, 至於紙鷂有譜,..
1. 본받는다는 건 흉내내기가 아니다 일전 석사논문을 지도했던 제자에게서 E-mail을 받았다. 고문론을 주제로 쓴 제 논문을 누군가에게 주었다가, 연암을 고문가라고 한 논문 중의 언급 때문에 논란이 일었는데, 연암이 왜 고문가이냐? 그는 패관소품체를 썼다 해서 문체반정의 와중에서 정조에 의해 순정고문으로 된 반성문을 지어 제출하라는 견책을 입었다. 그렇다면 그는 반고문가임이 분명한데 무슨 근거로 고문가라고 했는가? 이것은 한양대학교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이 아닌가? 뭐 이런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요컨대 그런 상대의 계속된 힐난에 속수무책으로 신통한 대답을 못하고 물러선 녀석이 멀리 대만까지 글을 보내 내게 구조요청을 해온 것이었다. 연암은 고문가인가, 아닌가? 김택영이 『여한십가문초』에서 연암을 당..
1. 사라진 예법은 시골깡촌에 살아있다 초등학교 4학년 난 딸아이는 날마다 일기를 쓰는데, 담임 선생님이 날씨를 그저 ‘맑음’ ‘흐림’으로만 적지 말고 설명적인 기술로 적어오라고 한 모양이다. 몇 달이 넘게 일기를 써오고 있지만, 그 날씨의 묘사가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노랗고 어여쁜 개나리같이 생긴 해가 허연 수염 난 구름과 둥실 둥실 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사뿐사뿐 뛰어 다니고, 하늘이 울적해 보인다.” “어두운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각자 심술을 내면서 귀엽고 아주 조그만 빗방울들을 하나하나씩 새나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듯이 떨어뜨린다.” “탱탱볼처럼 동그랗고, 오렌지처럼 상큼한 햇님이 방글방글 벙글벙글 신나게 수영하듯 저리 빙글 요리 빙글 거리며 파아란 하늘에 동동 떠 있다.”..
1. 흉내내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군의 시고詩稿는 몹시 적어서, 고체와 금체시 모두 50수 뿐이다.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韓愈를 배웠는데 기이하고 험벽하기는 그보다 더 해서, 정경情境은 핍근하고 필력이 막힘이 없다. 율시와 절구 등의 시는 항상 성률에 구속되어 마음 속에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그래서 왕왕 한 두 구절만 이룬 채 그만 둔 것이 많다.-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태학사, 1997), p.279 연암이 시 짓기를 즐기지 않았던 것은 그러니까 운자니 평측이니 하는 성률에 얽매여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것이 싫어서였다. 이번에 보려고 하는 연암의 시 「증좌소산인贈..
1. 무관의 시는 옛날의 시가 아닌 지금의 시 자패가 말하였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의 시를 지음은. 옛 사람을 배웠다면서 그 비슷한 구석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않으니, 어찌 소리인들 방불하겠는가?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時俗의 잗단 것을 즐거워하니 지금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子佩曰: 陋哉! 懋官之爲詩也. 學古人而不見其似也. 曾毫髮之不類, 詎髣髴乎音聲. 安野人之鄙鄙, 樂時俗之瑣瑣, 乃今之詩也, 非古之詩也.『영처고』는 이덕무가 젊은 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嬰處’는 영아嬰兒와 처녀處女를 가리키는 말이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운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 처녀처럼 순진한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다. 자패子佩는 앞..
1. 진짜 같아지려 하면 할수록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는 진짜와 가짜, 같고 다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은 글의 처음을 ‘방고倣古’, 즉 옛날을 모방하는 문제로 시작한다. 글을 짓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말과 뜻으로 하지 않고 옛것을 모방하여 짓는다. 옛것을 모방함은 옛 사람과 거의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꼭 같게 하면 되는가? 그 결과 읽는 이가 이것이 옛글인지 지금 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우리의 글쓰기는 성공한 것일까? 옛것을 본떠 글을 지음을 마치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 하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좌우가 서로 반대로 되니 어찌 비슷함을 얻으리요.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그려내듯 한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말이 거꾸로 보이니 어찌 비슷하다 하리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
1. 대나무도 없는 집인데 죽원옹이란 호를 짓다 사함士涵 유한렴劉漢廉이 죽원옹竹園翁이라 자호하고 거처하는 집에 불이당不移堂이란 편액을 걸고는 내게 서문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집에 올라보고 그 동산을 거닐어 보았지만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의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이 아니겠는가? 이름이란 것은 실질의 손님이거늘, 나더러 장차 손님을 위하란 말인가?” 사함이 머쓱해져서 한동안 있더니만, “애오라지 스스로 뜻을 부쳐본 것일 뿐이라오.”라고 하였다. 士涵自號竹園翁, 而扁其所居之堂曰不移, 請余序之. 余嘗登其軒, 而涉其園, 則不見一挺之竹. 余顧而笑曰: “是所謂無何鄕烏有先生之家耶? 名者實之賓, 吾將爲賓乎?” 士涵憮然爲間曰: ..
1. 세상을 보며 글자를 만들었던 포희씨 연암은 40세 전후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편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머물러 살았다. 이 시기 전후 몇 년간의 글을 묶어 『종북소선鍾北小選』이라 이름 짓는다. 이글은 이 묶음의 첫머리에 얹은 것이다. 연암 문학론의 최상승最上乘 문자로 그 문학 정신의 울결鬱結이 이 한편에 녹아 있다. ▲ 전의감동에 살 때의 울분은 醉踏雲從橋記에 담겨 있다. (사진 출처 - [연암을 읽다]) 우주라는 기호를, 만물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연암은 이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그 방법을 성색정경聲色情境이란 네 항목에 담아 이야기한다. 다시 처음의 원문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아아! 포희씨庖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
1. 나비 놓친 사마천의 심정으로 읽어라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筑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 보면 아무도 없고, 게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1. 같은 소리도 마음 따라 달리 들린다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 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대고 소리 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꺾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하니 저만치 떨어져 서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하여 마치도 물 밑에 있던 물귀신들이 앞 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고, 양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 채려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1. 바른 견식은 어디서 나오나? 진정지견眞正之見, 즉 참되고 바른 견식見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 살펴보려는 「낭환집서蜋丸集序」와 「공작관문고자서孔雀舘文稿自序」는 바로 이 진정眞正한 견식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의 글이 늘 그렇듯 이들 글 또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러 겹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글쓴이의 진의를 온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나가 놀다가 장님이 비단옷 입은 것을 보았다. 자혜가 휴우 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아! 제게 있는데도 보지를 못하는구나.”자무가 말하였다. “대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비교하면 어떨까?”마침내 서로 더불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이를 물어보았더니, 선생은 손을 내저으며 “나는 모르겠네. 나는 모..
2. 까마귀의 날갯빛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1. 달사와 속인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恠萬奇, 還寄於物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恠己, 廼生嗔一事不同, 都誣萬物.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噫! 錮烏於黑足矣, 廼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並黑而不知也. 何則? 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 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연암의 글을 읽고 붓 가는 대로 쓴 서문독연암필서(讀燕放筆序) “연암의 글은 한군데 못질 한 흔적이 없는데도 꽉 짜여져 빈틈이 없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다. 방심하고 돌진한 장수는 도처에서 복병과 만나고 미로와 만나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책갈피에 써둔 메모다. 92년 7월 27일이란 날짜가 쓰여 있다. 또 97년 6월 20일의 메모에는 “서늘함은 사마천을 닮았고 넉살 좋음은 장자에게서 배운 솜씨다. 소동파의 능청스러움, 한유의 깐깐함도 있다. 불가에 빠진 사람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노장으로 압도하고, 다시금 유자의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고 적혀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란 이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두 메모 사이에 놓인 몇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