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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연암을 읽는다 목차 박희병 서문: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1. 큰누님 박씨 묘지명총평(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2. 말 머리에 무지개가 뜬 광경을 적은 글자연을 담아내는 표현(馬首虹飛記)동양화 식으로 묘사한 구름깔끔하고 절제된 미학총평 3. ‘죽오’라는 집의 기문대나무 기문을 써주지 않다(竹塢記)상투적인 언어에 생기를(연암과 패관소설)양호맹의 진실한 대나무 사랑(『過庭錄』 1권 30)대나무를 닮아 간 사내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총평 4.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작은 규모의 집에 다 있네(晝永簾垂齋記)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개인 취향에 빠진 사대부양인수의 취미가 다른 점총평 5.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총평(醉踏雲從橋記) 6. 소완정이 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
6. 총평 1 연암은 글의 거죽만 읽으려 들지 말고 글에 깃들여 있는 글쓴이의 마음을 읽으라고 말하고 있다. 연암의 이 말은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연암이 쓴 글들의 거죽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환호할 것이 아니라, 그 심부深部에 깃들여 있는 연암의 마음, 연암의 고심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연암의 글을 피상적으로 읽고 망발을 일삼거나 대중을 위한다면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은 없는가?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연암의 이 말에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하리라. 2 이 글 2단락의 나비 잡는 아이의 비유는 그 표현이 썩 참신하다. 연암은 글쓰기에서 비유나 은유를 퍽 잘 활용했는데, 이런 데서 연암의 기발한 상상력이 잘 드러난다. 3 연암이 인간 심리를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
5. 높은 수준의 글을 쓰도록 만드는 결락감 연암은 10대 때부터 『사기』에 매료되었다. 연암 문장의 드높은 기세는 『사기』가 보여주는 기운찬 문장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연암과 사마천은 그 문장만 상통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심리적 기저에 있어서도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앞서 말했듯 사마천 글쓰기의 기저부에는 자욱한 분만감이 깔려 있는데, 연암 글쓰기의 밑바닥에도 이 비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연암은 자신의 글쓰기를 ‘유희遊戲’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분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뜻을 얻지 못한 채 소외되어 있던 연암으로서는 울분을 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감정으로 인해 그의 글은 더욱 파격적이고 불온하게 되어 갔다. 사마천과 연암은 둘 다 ‘결락감缺落感’을 지녔다는 점에서 또 다..
4. 수치심과 분만감으로 쓴 『사기』 『사기』라는 저술의 심연에는 어찌해서 수치심과 분만감이 깃들여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사마천의 생애를 간단하게라도 살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 시대의 군주인 무제武帝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전제군주였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복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을 침공하고 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리고 흉노와 줄창 싸웠다. 당시 이릉李陵이라는 20대의 용맹한 장수가 있었다. 그는 흉노와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불행히 흉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부하들이 전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이릉이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구족九族을 멸해 버렸다. 사마천은 당시 궁정의 ..
3. 『사기』를 쓸 때 사마천의 마음과 나비를 놓친 아이의 마음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는 광경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사외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丫아’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사방을 돌아봐도 아무도 없자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가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 手猶然疑, 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갑자기 문의文意가 바뀌어 나비 잡는 어린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나비를 잡으러 살금살금 다가갔다가 막판에 놓쳐버린 아이의 복잡한 심리..
2. 작가는 고심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 단락의 첫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은 그 글만 읽는 것이요, 작가의 ‘마음’을 읽는 것은 못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글의 거죽만 읽었지 글 쓴 사람의 마음자리를 읽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어법으로는 글쓴이의 마음자리를 특히 ‘고심苦心’이라고 한다. 고심이라는 말은, 작가의 고민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입장, 삶과 세계에 대한 감정을 두루 포괄하는 말이다. 요컨대, 그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이거나 실존적인 태도와 관련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작가의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원점 혹은 어떤 최저 지점을 뜻한다. 작가는 바로 이 고심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적 의제議題나 이념과 관련된 것일 수도 ..
1.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을 비판하다 그대는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를 읽었으되 그 글만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사외다. 왜냐고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堡壘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구경하던 광경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느니, 「자격열전刺客列傳」을 읽을 땐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던 장면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늙은 서생의 케케묵은 말일 뿐이니, 부엌에서 숟가락 줍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嘗讀其心耳. 何也? 讀項羽, 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아마 경지가 지난번에 연암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항우본기」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
5. 총평 1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글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기실 글쓰기의 문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이 글은 문자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연암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자를 그냥 문자로만 알아서는 안 되고, 문자에 생기와 온기 및 사물의 다채로운 뉘앙스를 채워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문자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관점은 『과정록』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아버지는 이공(이광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평생 독서했는데 아는 글자가 몇 자나 되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비웃었다. ‘이공이 글을 잘하고 박식한 선비라는 걸 누가 모른단 말야!’ 이공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겨우 서른 자 남짓 아는..
4. 사물을 잘 관찰하는 것이 훌륭한 독서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운 뜨락에 여름새들이 찍찍 짹짹 울고 있더이다. 나는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이렇게 외쳤소이다. “저것이야말로 ‘날아가고 날아온다’라는 문자이고, ‘서로 울며 화답한다’라는 문장이다! 갖가지 아름다운 문채를 문장이라고 한다면 저보다 더 나은 문장은 없으리라. 오늘 나는 진정한 글 읽기를 했노라!” 朝起, 綠樹蔭庭, 時鳥鳴嚶. 擧扇拍案胡叫曰 : “是吾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 五釆之謂文章, 則文章莫過於此. 今日僕讀書矣. 다시 문세를 전환해 연암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독서가 참된 독서인가? 이 단락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다. 연암의 답인즉슨, ‘사물’을 읽으라는 것이다. 사물..
3. 새를 글자 속에 가두다 저 하늘을 날아가며 우는 새는 얼마나 생기가 있습니까? 그렇건만 적막하게도 새 ‘조鳥’자 한 글자로 그것을 말살하여 새의 고운 빛깔을 없애버리고 그 울음소리마저 지워 버리지요. 이는 마을 모임에 가는 촌 늙은이의 지팡이 머리에 새겨진 새 모양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새 ‘조鳥’자의 진부함이 싫어 산뜻한 느낌을 내고자 새 ‘조鳥’자 대신에 새 ‘금禽’자를 쓰기도 하지만, 이는 책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의 잘못이라 할 거외다.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 抹摋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或復嫌其道常, 思變輕淸, 換箇禽字, 此讀書作文者之過也. 연암은 시선을 갑자기 하늘로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앞 단락에서 언급한 천지 사방 혹은 만물의 한 예로서..
2. 맹목적인 독서로 헛 똑똑이가 되다 이 편지글은 그 서두가 퍽 도발적이다. 다짜고짜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讀書精勤, 孰與庖犧?)”라고 묻는 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포희씨만큼 글을 잘 읽은 사람은 없다는 건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연암의 생각을 따라가면 이렇다. 포희씨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세밀히 관찰하여 그 근본 원리를 8괘라는 기호에 집약해냈다. 포희씨가 삼라만상을 관찰한 행위는 바로 글(혹은 책)을 읽은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글의 에센스, 즉 글의 정수精髓(이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글의 ‘정신’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는 바로 사물과 세상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을 잘 관찰하여 그 정수를 포착해 8괘..
1. 천지 사이에 있는 게 책의 고갱이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뜻이 천지사방에 펼쳐 있고 만물에 두루 있으니, 천지사방과 만물은 글자로 쓰지 않은 글자이며, 문장으로 적지 않은 문장일 거외다. 후세에 글을 부지런히 읽기로 호가 난 사람들은 기껏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말라붙은 먹과 문드러진 종이 사이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면서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은 데 불과하외다.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를 먹고서 취해 죽겠다고 하는 격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麁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이 단락의 취지는 앞에서..
5. 총평 1 그리움이라든가 누군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모두 망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설사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립고 아련한 마음을 우리는 어찌할 수가 없다. 2 이 글은 짤막한 편지지만 글 쓴 사람의 진정이 오롯이 담겨 있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운이 참 깊다. 일생에 이런 편지를 한 통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3 옛날의 편지에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격식을 갖추어서 쓰는 비교적 긴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크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안부나 소회所懷를 전하는 짤막한 편지이다. 전자는 보통 ‘서書’라고 부르고, 후자는 ‘간찰簡札’이나 ‘척독尺牘’이라고 부른다. 경지에게 보낸 답장 세 통은 모두 후자에 속한다. 척독은 ‘서’에 비해 글쓰기가 자유롭고 격식에..
4.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곳 어제 당신께서는 정자 위에서 난간을 배회하셨고, 저 역시 다리 곁에 말을 세우고는 차마 떠나지 못했으니, 서로간의 거리가 아마 한 마장쯤 됐을 거외다. 모르긴 해도 우리가 서로 바라본 곳은 당신과 제가 있던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하외다. 昨日足下, 猶於亭上, 循欄徘徊, 僕亦立馬橋頭, 其間相去已爲里許. 不知兩相望處, 還是那際. 당시 연암은 경지와 유별留別했던 듯하다.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을 ‘유별’이라 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송별’이라 한다. 연암이 떠나왔으니, 연암은 유별한 게 되고, 경지는 송별한 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작별이 퍽 아쉬웠던 모양이다. 경지는 말을 타고 떠나가는 연암을 정자 위 난간에서 ..
3. 석별의 아쉬움을 잇는 ‘사이’ 이야기 지난번 백화암百華菴에 앉아 있을 때 일이외다. 암주菴主인 처화處華가 멀리 마을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비구 영탁靈托에게 이렇게 게偈를 읊더이다. “탁탁 하는 방망이 소리와 툭툭 하는 다듬잇돌 소리, 어느 것이 먼저인고?” 그러자 영탁은 합장하며 이렇게 말했사외다.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니 그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옵나이다.” 頃坐百華菴, 菴主處華, 聞遠邨風砧, 傳偈其比丘靈托曰: “椓椓礑礑, 落得誰先?” 托拱手曰: “不先不後, 聽是那際?” 갑자기 문세가 확 전환되면서 앞서 「『말똥구슬』 서문蜋丸集序」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이상한 일화가 제시되고 있다. 뭘 말하려는 걸까? 처화가 툭 던진 물음은 방망이 소리가 먼저냐 다듬잇돌 소리가 먼저냐는 것이다. 어느..
2. 첫 시작부터 본론으로 들어간 편지 전의감동 시절 연암은 자신이 살던 집 건물에 ‘방경각放瓊閣’이라는 이름과 영대정映帶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전하는 연암의 문집에는 ‘방경각 외전放璚閣外傳’이라는 이름하에 「양반전」 등 이른바 9전九傳을 수록해놓고 있다. 연암은 전의감동에 살 때 이전에 창작한 전들을 모아 『방경각 외전』이라는 책을 엮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의감동 시절 연암은 이 책 말고 또 하나의 창작집을 스스로 엮었으니,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이 그것이다. ‘영대정 잉묵’이란 영대정에서 엮은 하잘 것 없는 편지글이라는 뜻이다. ‘하잘 것 없는’이라는 말은 겸사로 한 말이다. 연암 자신의 편지글 모음집인 이 책은 정확히 1772년 10월에 편찬되었다. 연암은 이 책에 자서(映帶亭賸墨自序)를 붙..
1. 경지란 누구인가? 이 편지는 경지京之라는 사람에게 보낸 답장이다. 경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가 혹 당대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퉁소 연주자인 이한진李漢鎭(1732~?)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한진은 호가 경산京山이고, 자는 중운仲雲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경지’는 그의 또 다른 자字가 아닐까 한다. 이한진은 감역監役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을 뿐이다. ‘감역’이라는 벼슬은 대개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이 음직蔭職으로 하는 벼슬이다. 홍대용과 박지원도 감역 벼슬로부터 벼슬을 시작했다. 이한진은 전서篆書와 퉁소에 능하고 아취가 있었으며, 성대중成大中(1732~1809)ㆍ홍대용ㆍ이덕무ㆍ박제가ㆍ홍원섭洪元燮(1744~1807) 등과 교유했다. 성대중의 문집인 『청성집』에 실려 있는..
12. 총평 1 이 글은 당시 보수적인 문예관을 지닌 사람의 눈에는 경망스럽고 상스러운 글로 보였을 테지만, 제문의 매너리즘을 깨뜨리면서 인간의 진정眞情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빛이 바래지 않으며, 퍽 감동적이다. 2 이 글에서는 정작 슬픔이라든가 애통함이라든가 이런 말은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친구의 죽음을 앞에 한 채 비탄과 슬픔에 잠겨 있는 인간 연암의 마음이 약여하게 느껴진다. 3 이 글은 연암의 심리적 추이에 따라 글이 구성되어 있다. 1단락은 석치의 죽음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럼에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연암의 착잡하고 당혹스런 마음을 빠른 필치로 적고 있다면, 2단락은 너무나 큰 슬픔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하여 멍한 눈으로 우두커니 빈소를 바..
11. 파격적인 제문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 이제 끝으로, 연암이 정석치의 제문을 왜 그리도 파격적으로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하나는, 제문의 대상 인물인 석치 자체가 몹시 파격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문의 대상 인물이 음전하고 순순한 인간이었다면 굳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석치는 방달불기放達不羈(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고 예법 따위에 구속되지 않는 태도)한 인간 타입이었다. 박제가가 그를 “청동 술잔으로 3백 잔을 마신 술꾼이어라(靑銅三百酒人乎)”라고 읊었듯이, 그는 당대의 주호酒豪였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연암이 처해 있었던 상황과 그 심경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앞에서 말했듯 연..
10. 울울하던 그날 함께 하던 벗 홍국영은 1780년 2월 권력에서 축출된다. 박지원은 더 이상 연암협에 은거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해 5월 중국 여행길에 올라 동년 10월에 귀국한다. 박지원은 귀국 후 서울과 연암협을 오가며 『열하일기』의 집필에 힘을 쏟는다. 『과정록』은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는 경자년(1780)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谿에 거처하셨으니 곧 지계공芝溪公(연암의 처남인 이재성)의 집이었다. 이때 홍국영이 실세하여 화근은 사라졌지만 점잖은 옛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떴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해 옛날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욱 뜻을 잃고 스스로 방달하게 지내셨는데 그것이 몸을 보존하는 비결임을 도리어 기뻐하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
9.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친구 탈락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혹 그 부분에 대한 보충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여기서 잠시 연암과 정석치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정석치의 인간적 특성과 재예才藝에 대해 조금 언급해두기로 한다. 연암과 정석치는 언제부터 알게 된 걸까? 『과정록』 초고본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아버지는 임진년(1772)과 계사년(1773) 사이에 가족을 석마石馬(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돌마 일대)에 있는 처가로 보내고 늘 홀로 서울의 전의감동 집에 거처하셨다. 홍담헌 대용, 정석치 철조, 이강산李薑山 서구書九와 때때로 서로 왕래하셨고, 이무관 덕무, 박재선朴在先 제가齊家, 유혜풍 득공이 늘 아버지를 좇아 노닐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암이 정철조와 알게 된 것은 적..
8. 사라져 버린 본문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읽는다. (이하 글을 잃어버렸음) 爲文而讀之曰 缺 “글을 지어 읽는다”라는 말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제문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부분은 현재 탈락되고 없다. 아마 4언으로 된 운문이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묘지명의 ‘명’이 보통 아주 짤막한 운문인 것과는 달리 제문의 운문은 아주 길어 60구句 내지 100여 구에 이르는바 제문의 중심부분을 이룬다. 가령 연암이 그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을 위해 쓴 제문의 경우 4언구가 96구이며,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을 위해 쓴 제문의 경우 61구이다. 이 두 제문은 4언구를 통해 고인의 인품과 생전의 언행, 고인에 대한 연암의 특별한 추억과 애통한 심정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4언구가 끝나면 ‘상향’이라..
7. 진짜로 네가 죽었구나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 귓바퀴는 이미 문드러지고 눈알도 이미 썩었으니, 이젠 진짜 듣지도 보지도 못하겠지. 잔에 술을 따라 강신降神해도 진짜 마시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못할 테지. 평소 석치와 함께 술을 마시던 무리를 진짜로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정말 우리를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우리끼리 모여 큼직한 술잔에다 술을 따라 마시지 뭐. 石癡眞死. 耳郭已爛, 眼珠已朽, 眞乃不聞不覩, 酌酒酹之, 眞乃不飮不醉. 平日所與石癡飮徒, 眞乃罷去不顧. 固將罷去不顧, 則相與會酌一大盃. 이 단락은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라는 말로써 시작된다. 1단락의 맨 끝 문장이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今石癡眞死矣)”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단락은 1단락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
6. 머리로 아는 죽음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죽음 이 단락의 포인트는 평소 석치를 저주하던 자들에게 대한 역설적 조소에 있다고 해야겠지만, 이 단락의 가장 미묘한 대목은 석치의 죽음에 대한 도인의 반응을 언급한 구절이 아닌가 한다(世固有夢幻此世, 遊戱人間, 聞石癡死, 固將大笑, 以爲歸眞,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 이런 도인은 『장자』라는 책에 허다하게 등장한다. 『장자』는 이런 인물을 내세워 삶이란 한낱 꿈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죽음이야말로 삶의 근원이라는 것, 따라서 죽음이란 특별한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며 자기의 원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단락 끝 부분에서 도인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런 생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생사관은 그야말로 아..
5. 석치를 저주한 사람들 이 단락은 잠시 숨을 고르는 부분이다. 앞 단락이 아주 빠른 템포로 감정의 직절적直截的 분출을 보여주었다면, 이 단락은 망자亡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서술해놓고 있다. 앞 단락을 ‘급急’이라 한다면 이 단락은 ‘완緩’이다. 이렇듯 두 단락은 퍽 대조적이다. 이처럼 완급을 교대해가며 서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독자를 편안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급’으로만 일관하거나 ‘완’으로만 일관하는 글을 한번 상상해보라. 독자는 전자의 경우 숨이 가빠 죽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지루해 죽을 것이다. 한편, 앞 단락이 격렬함과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거쳐 체념의 감정으로 끝나고 있고, 그것을 받아 이 단락이 시작된다는..
4. 천문학ㆍ수학ㆍ지리학 등 학문에 뛰어났던 그대 석치가 죽자 시신을 둘러싸고 곡하는 이들은 석치의 처첩과 함께, 아들과 손자, 친척들인데, 그 곁에 함께 모여 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석치 유족의 손을 잡고 이렇게 위로한다. “훌륭한 가문의 불행입니다. 철인哲人이 어찌해 이렇게 되셨는지……” 그러면 그 형제와 아들과 손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꾸한다. “저희 집안의 흉액입니다.” 석치의 벗들은 서로 이렇게 탄식한다. “이런 사람은 정말 쉽게 얻을 수 없는데……” 함께 모여 조문하는 이들도 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는 법이니까...
3. 자유분방하게 감정을 토로하다 (A) (B) 살아 있는 석치라면 이러이러할 텐데, 그럴 수 없는 걸 보니 석치가 진짜 죽었구나.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A)의 가정문은 절묘하게도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하나는 이를 통해 연암과 석치의 개인적인 특별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석치의 죽음을 도무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암의 감정 상태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연암은 일상 속 석치의 부재를 통해 ‘석치가 진짜 죽은 게 맞긴 맞구나!(今石癡眞死矣)’하고 석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이 단락은 가정문 (A)와 그에 이어지는 단정문 (B)를 통해 친한 벗 석치의 죽음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연암의 심리 상태 및 그럼에도 결국 석치..
2. 일상 속 빈자리를 통해 너의 부재를 확인하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단락이 느닷없는 출발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산문 분석에서는 이런 시작 방식을 ‘sudden start’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으로 시작되는 서두는 독자의 심리에 강한 인상과 파문을 던지면서 초입에서부터 독자를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독자는 어떤 심리적 준비 과정도 없이 단박에 대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강요당한다. 그런데다가 이 단락의 문장은 그 호흡이 유장하고 느긋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짧고 촉급하다. 빠른 숨으로 단숨에 읽도록 씌어진 문장인 것이다. 왜 서두에서부터 이렇게 급한 템포의 문장을 서술한 걸까? 이는 연암의 심리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단락의 통사 구조統辭構造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1. 파격적인 제문 살아 있는 석치石癡라면 함께 모여 곡도 하고, 함께 모여 조문도 하고, 함께 모여 욕지거리도 하고, 함께 모여 웃기도 하고, 몇 섬이나 되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맨몸으로 서로 치고받고 하며 고주망태가 되도록 잔뜩 취해 서로 친한 사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인사불성이 되어, 마구 토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혀 어질어질하여 저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 生石癡, 可會哭可會吊, 可會罵可會笑. 可飮之數石酒, 相臝體敺擊, 酩酊大醉, 忘爾汝, 歐吐頭痛, 胃翻眩暈, 幾死乃已. 今石癡眞死矣. 제문祭文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서, 흔히 제물祭物을 올려 축문祝文처럼 읽게 되어 있다. 그 형식은 보통 글의 서두에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제문을 지은바..
11. 총평 1 공인 이씨가 열여섯에 시집올 때는 꽃다운 얼굴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내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파리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품 있는 여인이었으리라. 아픈 몸을 일으켜 빙긋이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하는 데서 그녀의 인간 됨됨이와 기품이 느껴진다. 2 이 글은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 집안에 시집 온 여성에 대한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연암 외에도 빈사처貧士妻의 생애를 기록한 문인들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연암의 이 글처럼 그런 여성의 내면 풍경과 심리 상황까지 냉철하게 그려 보인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암은 가난 때문에 사대부 집안의 한 여성이 절망과 낙담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놀랍도록 예..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나는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直提學 유언호俞彦鎬에게 묘지명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마침 개성 유수로 와 있었는데 개성은 연암골에서 가까웠다. 그는 장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명銘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이라 그 골짝은, 산 깊고 물 맑은데, 시동생이 유택幽宅을 마련했지요. 아아! 온 가족이 함께 은거하려 했거늘, 마침내 이곳에 머무시게 됐군요. 계시는 곳 편안하고 굳건하니, 아무쪼록 후손들 보우하소서. 趾源求銘於其友人, 奎章閣直提學兪彥鎬. 彥鎬方留守中京, 地接燕岩, 爲助葬且銘之, 其銘曰: “燕岩之洞, 山窈而水淥, 繄惟小郞之所營築. 嗚呼鹿門盡室之計. 竟於焉而托體. 旣安且固, 以保佑厥後.” 묘지명의 ‘지誌’와 ‘명銘’은 대개 한 사람이 짓는 법인데, 이 ..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형수는 몹시 위독했지만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으로 머리를 가누고선 한 번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 단락에서뿐만 아니라 이 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우리 눈에 박힌다. 20여 년을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힘이 소진하여 절망과 좌절감 속에 죽어가고 있던 형수에게 연암이 들려준 말은 그 말만으로도 기쁘고 가슴이 벅찼으리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한 번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것이리라. 사실 이 글 전체에서 형수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 발언한 것은 이 대목 한 군데밖에 없다. 비록 앞 부분에서 공인 이씨에 대해 많이 서술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를 검토하며 자세히 살핀바 있지만, 연암은 1771년에 처음 연암협을 답사한 이래 이곳에 작은 산장을 지어 놓고 수시로 머물곤 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가 온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1778년에 와서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는데, 연암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품고 장차 해코지를 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사정을 『과정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유공(유언호)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그리하여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나는 화장산華藏山의 연암골에 새로 터를 잡아 그 산수를 어여삐 여기며 손수 가시덤불을 베어 내 나무 곁에다 집을 세웠다. 趾源新卜居華藏山中燕岩洞, 樂其水石, 手剪荊蓁, 因樹爲屋. 언젠가 형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형님이 연로하시니 장차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사셨으면 합니다. 담을 둘러 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고, 집 뒤엔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문 앞에는 천 그루의 배나무를 심고, 시냇가에는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렵니다. 못에는 한 말 가량 치어稚魚를 풀어 놓고, 바위 절벽 밑에는 벌통 백 개를 놓아두며, 울타리 사이에 소 세 마리를 묶어 두렵니다. 제 처가 길쌈할 때면 형수님께선 그저 계집종이 기름 짜는 일이나 살펴 제가 밤에..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아아! 옛사람들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다. 조석朝夕도 보전키 어려운 상황에 놓인 기울고 망해가는 나라를 부지하며 조정에서 혼자 국사國事를 맡아 고군분투하듯 하셨고, 변변찮은 것이지만 정성스레 제수祭需를 마련해 선조의 혼령이 굶주리지 않게 하셨으며, 또 좋은 음식은 못 되더라도 음식을 장만해 손들을 잘 접대하셨으니, 이 어찌 이른바 ‘온 힘을 다해 죽은 이후에야 그만둔다’는 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嗟乎! 貧士之妻, 昔人比之弱國之大夫. 其拄傾支覆, 莫保朝夕, 猶能自立於辭令制度之間, 而澗繁沼毛, 不餒其鬼神, 不腆之廚庖, 足以嘉會, 豈非所謂: ‘鞠躬盡瘁, 死而後已’者耶? 내가 자식을 낳아 그 아이가 겨우 태胎를 벗었을 때 형수님은 그 ..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이 단락에서 가장 빼어난 서술은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라는 대목이다. ‘20년’이란 연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1759년부터 형수가 세상을 버린 해인 1778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문장은, 주부로서 공인 이씨가 살아온 삶과 그녀의 내면적 심리 상황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묘파해내고 있다. 가족과 집안을 위해 죽으라고 일하고 애썼지만 가난은 늘 그 자리에 있어 공인 이씨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다는 것. 이 절망감과 좌절감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터이다. “노심초사하여 뼈 빠지게(嘔膓擢..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歲且荐喪)”다고 했는데, 이는 1759년 연암의 모친 함평 이씨가 59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듬해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76세로 별세한 일을 말한다. 공인 이씨가 시어머니 상을 당한 것은 그 36세 때였다. 시집온 지 20년 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공인 이씨는 연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주부主婦’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부’란 오늘날의 ‘가정주부’라는 말과 다소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부에게는 한 집안의 살림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제사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한 집안의 경제와 제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공인 이씨가 이 역할을 맡기 전에는 시어머니 함평 이씨가 이 역할을 수행했을 터이..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이 단락은 먼저 이씨의 가계家系를 밝힌 다음, 반남 박씨 집안에 시집온 일과 아이 셋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은 일,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20년을 뼈 빠지게 일을 하다 결국 병고 속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씨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이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 명문가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왜 그리 가난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연암은 이 단락의 중간부분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바, 곧 ‘청빈淸貧’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워낙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남긴 재산이 없어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 부정..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집안에 연거푸 상喪이 났지만 형수님은 힘써 가족 열명의 생계를 꾸려 나갔으며,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大家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赤貧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양 낙엽이 지고 추워지는 가을이면 형수님은 더욱 실망하고 낙심하여 병이 더욱 도졌다. 이렇게 몇 년을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마침내 금상今上 2년인 무술년戊戌年(1778) 7월 25일에 운명하셨다. 歲且荐喪, 恭人力能存活其十口, 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 且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 每値高秋木落天寒, 意益廓然霣沮,..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공인恭人 휘諱 모某는 완산完山 이동필李東馝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 후손이다. 열여섯에 반남潘南 박희원朴喜源에게 시집 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형수님은 평소 몸이 여위고 약해 온갖 병에 시달렸다.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희원의 할아버지는 당대에 이름난 고관高官이었는데, 선왕先王께서는 매양 한漢나라 탁무卓茂의 고사故事를 거론하며 그 벼슬을 올려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 청빈淸貧이 뼈에 사무쳤으니, 별세할 때 집안에는 돈이 몇 푼 없었다. 喜源大父, 爲世名卿,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
14. 총평 1 이 글은 전체적으로 ‘김홍연 알아 가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김홍연을 알아감에 따라 작자의 심리상태가 수시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작자는 호기심에서 시작하여 분노와 우호의 감정을 거쳐 연민의 마음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역으로 이 연민의 감정에서 출발해 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의 기저에서 연암은 김홍연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주 따뜻한 눈길을 주고 있다. 김홍연에 대한 작가의 감정 기복에 따라 글도 심하게 출렁거리며 기복과 파란波瀾을 보여준다. 2 만년의 김홍연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이런 존재는 어떻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의 기록이다..
13. 게(偈)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 글 끝에 다음과 같은 게偈를 붙였다.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 흑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 있어야 밝게 보일까?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도 있는데.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또한 저 관음보살은, 변신하여 눈이 일천 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에 쓰리?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몹쓸 병 걸려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大深이 뭇..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어느 날 그는 나의 우거寓居에 찾아와 이런 부탁을 했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 마음인즉슨 진작 죽었고 머리카락만 남아 있을 뿐이며, 거주하는 곳은 모두 중들의 암자입니다. 바라건대 선생의 문장에 의탁해서 후세에 이름을 전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슬펐다. 나는 마침내 그 옛날 함께 산에 노닐던 객과 주고받았던 말을 글로 써서 보내주면서 一日詣余寓邸而請曰: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願托子文而傳焉.”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이 단락에서 연암은 이 글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우거’란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그로부터 9년 뒤다. 나는 평양에서 김을 만날 수 있었다. 누가 그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김홍연입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의 자字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대심! 발승암 아닌가!” 김군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보더니, “어떻게 저를 아시지요?” 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옛날 만폭동에서 이미 자네를 알게 됐지. 집은 어딘가? 옛날에 수집한 물건들은 잘 간직하고 있는가?” 김군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가난해져 다 팔아 버렸지요.” “왜 발승암이라고 하나?” “불행히도 병 때문에 불구가 된 데다 늘그막에 아내도 없어 늘 절집에 붙어사는 까닭에 그렇게 자호自號하지요.” 그 말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옛날의 모습과 태도가 아직 남아 있었..
10. 김홍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백동수 그런데 이 단락에서 연암과 문답을 주고받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 앞 단락에 의하면 그는 본래 김홍연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사람이 백동수白東修(1743~1816)가 아닐까 생각한다. 백동수는 서얼 출신의 무반武班으로, 이덕무의 처남이다. 연암은 35세 때인 1771년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 자와 더불어 명산에 노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용력이 절륜하고 무예에 출중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미한 신분 때문에 몹시 불우하였다. 이 글은 1779년경에 쓴 게 아닌가 추측되는데, 당시 백동수는 건달 신세였다. 훗날 그는 무직武職인 장용영壯勇營 장교將校를 거쳐 박천 군수를 지냈다. 정조 때 왕명으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
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이상 살펴본 것처럼 이 단락은 그 필치가 경쾌하고 해학적이지만 그 속에 깊은 철리哲理가 담겨 있다. 한편 독자는 이 단락에 이르러 비로소 김흥연이 바로 발승이라는 사실을 고지告知 받는다. 그리하여 왜 이 글의 제목이 ‘발승암기髮僧菴記’인지를 간취하게 된다. 이 점 또한 묘미가 있다. 연암은 독자의 심리를 이리저리 저울질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대상 인물의 심리를 통찰하는 데 썩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 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할 만하다. 천하의 문장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이는 20대 중반 무렵에 연암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연암은 이런..
8. 이름이 남길 바라는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가 대꾸가 없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없다’라는 분과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을 허구적으로 설정해 서로 문답하게 하는 글을 쓴 적이 있거늘 지금 나와 그대가 우연히 절벽 아래 흐르는 물가에서 만나 서로 문답하고 있네그려. 먼 훗날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있을 리가 있나’ 선생일 터이니 이른바 발승암이란 자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러자 그는 발끈하여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내 어찌 황당한 말을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정말 김홍연은 존재하외다!” 나는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너무 집요하이. 지난날 왕안석王安石이 「진秦나라를 비판하고 신新나라를 찬미함(劇秦美新)」이라는 글에 대해 변증辨證하면서 ‘이건 필시 곡자운谷..
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이 뉜가?” “김홍연이외다.” “이른바 김홍연은 뉜가?” “그 자字가 대심大深이외다.” “대심이라는 이는 뉜가?” “자호自號를 발승암髮僧菴이라고 하외다.” “이른바 발승암은 뉜가?” 余問: “是人爲誰?” 曰: “金弘淵.” “所謂金弘淵爲誰?” 曰: “字大深.” 曰: “大深者誰歟?” 曰: “是自號髮僧菴.” “所謂髮僧菴誰歟?” 이 단락은 마치 선문답 같다. 단락 전체가 물음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통념과 지식을 허물어뜨려 깨달음, 즉 절대의 진리에 이르는 방편 아닌가. 이 단락에서 연암이 톡톡 던지는 물음은 이런 의미의 선문답적 물음이다. 연암은 먼저 ‘김홍연’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상대방은 ‘대심’이라고 답한다. 연암은 다..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지만 다시 본제本題로 돌아가자. 『사기』 열전 중에 「유협열전」과 「자객열전」이 있다. ‘유협’이란 협객을 말한다. 이 두 편의 열전에서 다룬 유협과 자객은 모두 유교적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부류로서, 질서와 예법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불온시 되거나 비판받아야 할 인간들이다. 그렇건만 사마천은 이들의 미덕을 찬양하고 기리어 역사에 편입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학자들은 두고두고 사마천을 비난하였다. 불온한 인물들을 미화하고 역사에서 다루었다는 게 비난의 이유였다. 연암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사기』 열전의 이 두 편, 특히 「유협열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바로 이런 독서 경험과 관련해 연암은 젊..
5. 왠지 남 같지 않다 했더니 조선 후기 부의 축적으로 협객이 출연하다 조선 후기 도시의 발달과 상업 발전은 중간계급의 성장을 가져왔다. 특히 중인 서리층은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많은 부를 축적해 갔다. 이들의 부富는 판소리를 비롯한 서민 예술의 물질적 기초가 되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은 유흥 공간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서화를 사 모으기도 하고, 골동품이나 값비싼 중국 물건, 사치품 따위로 집을 장식하기도 했다. 혹은 유협遊俠이나 협객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부富는 서유럽의 발흥기 시민계급처럼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그 출로를 찾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의 중간계급은 비록 물질적 힘은 획득했지만 정치적ㆍ사회적 진출의 가능성은 봉쇄되어 있었다. 이 때..
4. 가뭄의 단비처럼 제공된 김홍연의 개인정보 어떤 이가 본래 김金의 행적을 잘 알아 나에게 얘기해줬는데, 그에 의하면 김은 곧 왈짜였다. 왈짜란 대개 여항의 허랑방탕하고 오활한 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른바 검객이나 협객俠客과 같은 부류를 말한다. 그는 젊은 시절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합격했으며, 힘이 세어 범을 때려잡거나 좌우 옆구리에 기생 둘을 끼고 몇 길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쩨쩨하게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이 본래 부유하여 돈을 물 쓰듯 하였고, 고금古今의 유명한 서첩書帖과 좋은 그림, 칼이며 거문고며 골동품, 기이한 꽃과 풀 따위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혹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준마駿馬와 송골매를 늘 ..
3.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무릇 명산을 유람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기이한 경치를 구경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평소 이전에 산에 오른 일을 회상할 적마다 오싹해지며 자신의 무모함을 뉘우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산에 오르면 그만 지난날의 경계를 소홀히 해 가파른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깊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기도 하며, 몸을 모로 하여 아슬아슬하게 썩은 잔도棧道를 밟고 낡은 사다리를 오르기도 하면서 왕왕 천지신명에게 무사하기를 빌며 살아 돌아가지 못할까봐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사朱砂로 사슴 정강이 크기는 될 정도로 큼지막하게 쓴 붉은 글씨가 늙은 나무 등걸과 오래된 등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서렸..
2. 가는 산마다 보이는 그 이름 그 후 나는 나라 안의 명산들을 두루 돌아다닌바,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서西로는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다. 깊숙하고 외딴 곳에 이르러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올 수 없는 곳까지 왔다고 자부할 양이면 그때마다 늘 김홍연이 새겨 놓은 이름자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욕을 했다. “홍연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리도 당돌한가!” 其後余遊歷方內名山, 南登俗離ㆍ伽倻, 西登天摩ㆍ妙香. 所至僻奧, 自謂能窮世人之所不能到, 然常得金所題. 輒發憤罵曰: “何物弘淵, 敢爾唐突耶?” 앞 단락에서 홍연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면, 이 단락에서는 홍연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분노가 명산의 외딴 곳에서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와 계속해서 조우..
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내가 동東으로 금강산을 유람할 적이다. 골짝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옛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써 놓은 게 보였는데 큼지막한 글씨로 깊이들 새겨 놓아 작은 틈도 없었으니 마치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거려 어깨가 부딪는 것 같기도 하고 교오의 묘지에 빽빽이 들어선 무덤 같기도 했다. 옛날에 새긴 이름은 이끼에 덮여 있었고, 새로 쓴 이름은 붉은 글씨가 환히 빛났다.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의 바위 위에 이르매 날아가는 새 그림자도 없었으며 오직 ‘金弘淵김홍연’이라고 새긴 세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심 참 이상하다고 여기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에로부터 관찰사의 위세란 족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하고, 또 저 ..
13. 총평 1 연암은 이 글에서 홍대용과 자신의 우정, 홍대용과 국내 지인들과의 우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하고 있지 않다. 이는 글의 초점을 중국인들고의 우정 쪽에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2 이 글의 주제가 ‘홍대용과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 글을 제대로 읽은 게 못 된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은 비록 몹시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암은 이 방편을 통해 홍대용에 대해, 그리고 당대의 조선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미 많은 말을 했으니 독자들께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3 이 글의 가장 밑바닥에..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런 일에 대해 추론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기는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왜 이 명이 이처럼 삭제되거나 변개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을까하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다. 정말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이 명에 내포된 불온함과 과격함 때문이다. 우선 이 명의 제1구인 ‘宜笑舞歌呼’를 보자. 이 구절은 ‘웃다(笑)’ ‘춤추다(舞)’ ‘노래하다(歌)’ ‘환호하다(呼)’라는 네 개의 동사로..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 명銘은 짧지만 대단히 문제적이다. 연암의 문집 전체가 간행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와서 였다. 당시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돈을 대고 출판을 주관하였다. 이 본本을 보통 박영철본 『연암집』이라 부른다. 그런데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이 명이 빠져 있다. 하지만 『과정록』에는 다음과 같이 이 명을 특별히 소개해 놓고 있다.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면 서호의 벗은 나를..
9. 홍대용의 신원(身元) 그 부친은 이름이 역櫟인데 목사牧使를 지내셨고, 조부는 이름이 용조龍祚인데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셨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숙潚인데 참판參判을 지내셨다. 모친은 청풍淸風 김씨金氏이니, 군수 방枋의 따님이시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으며,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고, 곧 돈녕부敦寧府 참봉參奉으로 옮겼으며, 다시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되고,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로 전임되었다가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갔으며,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처는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이다. 돌아가신 그해 12월..
8. 중국의 벗들이여 천하지사인 홍대용을 알려라 아아! 덕보는 생전에 이미 우뚝하여 옛사람의 기이한 자취와 같았으니, 훌륭한 덕성을 지닌 벗이 이 일을 널리 전해 그 이름이 한갓 강남에만 유포되는 데 그치지 않게 한다면 굳이 묘지명을 쓰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불후不朽가 되리라.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이 단락은 2편부터 6편까지의 서술을 총괄하면서 홍대용이 생전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었나 하는 점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런 다음,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은 이처럼 위대한 인간이 단지 중국의 강남에만 알려지게 하지 말고 천하에 알려지게 해 홍대용이 불후不朽하도록 해주기 바란다는 완곡한 말을 붙이고 있다. 여기서 ‘불후’라는 ..
7. 홍대용이 청의 위대한 학자인 대진을 만났다면 사실 항주의 세 선비는 문장과 예술에서 그리 빼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1879~1948)는 당시 홍대용이 대진戴震(1724~1777)과 같은 청나라의 석학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한 바 있다. 대진은 고증학자로서 기철학氣哲學을 토대로 다양한 학문 세계를 펼쳐 나갔다.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걸출한 교육가인 채원배蔡元培는 청대淸代의 가장 위대한 세 사상가로 황종희黃宗羲(1610~1695), 대진, 유정섭兪正燮(1775~1840)을 꼽은 바 있다. 홍대용 역시 기철학 위에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갔던 만큼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서로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대진의 사상은 크게 보아 구래舊來의 중국 철학의 틀..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그로부터 두어 해 뒤 엄성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였다. 반정균이 글을 써서 덕보에게 부음을 전하자 덕보는 애사를 짓고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쳤는데 그것이 전당에 전해진 그날 저녁이 마침 엄성의 대상大祥 날이었다. 서호西湖 주변의 두어 고을에서 대상에 참예하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해 마지않으며 혼령이 감응한 결과라고들 하였다. 엄성의 형인 과果가, 덕보가 보내온 향을 피운 뒤 그 애사를 읽고 초헌初獻을 하였다.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엄성의 아들 앙昻이 덕보를 백부伯父라 일컫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글을 모은 『철교유집..
5. 중국 친구인 엄성에게 출처관에 대해 얘기한 이유 덕보는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인 작은아버지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 육비, 엄성, 반정균을 유리창에서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집이 전당錢塘인데 다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덕보를 대유大儒로 떠받들며 심복心腹하였다. 덕보는 그들과 수만 글자의 필담을 나눴는데, 그 내용은 경전의 취지며 하늘의 명命이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이치며 고금古今 출처出處의 도리를 분변한 것으로, 그 견해가 웅대하고 걸출하여 기쁘기 그지없었다. 급기야 그들은 헤어질 때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천고千古에 다시 만나지 못할 테지요.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
4.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꼭꼭 숨겨라 하지만 덕보는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에도 그저 관아의 장부를 잘 정리하고, 일을 미리미리 처리하며,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연암은 홍대용이 일국을 경영할 만한 재상의 자질을 지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실제 홍대용의 삶은 어떠했는가? 이 점은 이 단락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바, 한두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관아의 장부나 정리하고,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있는가. 그런 학문과 재주와 식견으로 고작 작은 고을 수령을 하면서 장부나 정리했다..
3.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지닌 홍대용 그래서 덕보가 백사百事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는 걸 통 알지 못했다.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연암은 홍대용의 경세적 능력을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꼽아가며 명시하고 있다. “백사百事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여기서 ‘백사를 두루 잘 다스릴 수 있었다(綜理庶物)’는..
2.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학자를 멸시하다 중국 가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나는 항주杭州 사람들이 덕보에게 보낸 서화書畵며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詩文이며 이런 것 열 권을 손수 찾아내어 빈소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아아!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古雅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 특히 율력律曆에 정통하여 그가 만든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기구들은 깊이 생각하고 오래 궁구하여 슬기를 발휘해 제작한 것이었다.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는데 그 이론이 미묘하고 심오하였다. 그는 미처 이에 관한..
1. 왜 중국사람에게 홍대용의 부고를 알리는가? 덕보德保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떤 객客이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가는 길이 삼하三河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이름은 손유의孫有義이고 호는 용주蓉州다. 3년 전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토산품 두어 가지를 정표情表로 두고온바 용주는 그 편지를 읽어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떠나는 객에게 다음과 같은 부고訃告를 용주에게 전하게 하였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12. 총평 1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학자漢學者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솜씨가 걸출하며” “호방하며 깨끗함이 마치 태사공(사마천)의 글 같다”고 평한바 있다. 2. 이 글은 문예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사적 견지에서도 중요한 글이다. 북학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르며 탄생하는 역사적 현장을 보여주고 있음으로써다. 3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른바 ‘단안單眼’으로 청나라를 봤다면, 이 글에서 확인되는 홍대용의(그리고 박지원의) 청을 보는 눈은 이른바 ‘복안複眼’이라 할 만하다. 놀랍게도 만주족 지배층과 한족 인민, 외관상의 변화와 본질적 연속성, 명분과 현실 등을 구분해 파악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 중국인 벗들과의 친분을 무조건 동아시아적(혹은 국제적) 연대라고만 말할 것은 아..
11. 홍대용의 필담으로 벗 사귀는 도를 깨닫다 마침내 홍군은 항주의 세 선비와 이야기 나눈 것을 적은 세 권의 초고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며, “서문을 부탁하외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탄복하여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홍군은 벗 사귀는 법에 통달했구나! 나는 이제야 벗 사귀는 법을 알았다.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고, 누가 그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며, 또한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지 않는지를 보는 것, 이것이 나의 벗 사귀는 방법이다.” 迺出其所與三士譚者, 彙爲三卷以示余曰: “子其序之.” 余旣讀畢, 而歎曰: “達矣哉, 洪君之爲友也! 吾乃今得友之道矣. 觀其所友, 觀其所爲友, 亦觀其所不友, 吾之所以友也.” 어째서 이 서문을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홍대용이 보여주는 우도友道에..
10.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으로 비난받다 17세기 후반 이래 조선 사대부들은 중국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비린내 나는 땅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야만국인 중국에서 배울 점은 없으며 이제 조선이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조선 사대부들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복식과 두발의 모양이 만주족의 방식으로 바뀐 것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중화 문명의 빛나는 전통이 그로써 사라졌다고 본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인 조선이 청나라를 쳐서 다시 한족의 나라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자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북벌론北伐論이 그것이다. 하지만 북벌론은 허구였으며, 기실은 효종과 노론 세력, 이 둘은 공통된 이해관계에서 나온 통치용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가증..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아! 우리나라에서 항주까지는 거의 만 리이니 홍군은 이제 다시는 세 선비를 만나볼 수 없으리라. 그런데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 친구 하지 않더니 지금 만 리나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고,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사귀지 않더니 지금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살마들을 벗 삼고 있으며,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언어와 의관이 같아도 서로 벗 삼지 않더니 지금 갑자기 서로 말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른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니 어떻게 된 일일까? 嗟呼吾東之去吳幾萬里矣, 洪君之於三士也, 不可以復見矣. 然而向也居其國, 則同其里閈而不相知, 今也交之於萬里之遠; 向也居其國, 則同其族類而不相交, 今也友之..
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홍대용과 연암이 북학(=중국 배우기)을 제창했다고는 하나 이런 현상(慕華思想)을 희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경계심은 경계심대로 지닌 채, 헛된 명분론을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움으로써 조선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조선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들의 청나라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兩價的’이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를 학습하자는 것, 이것이 그들의 기본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어찌 보면 모순 같기도 하나, 바로 이 모순에서 조선적 주체성이 발아發芽할 ‘틈’이 생겨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본다면 홍대용과 연암의 입점立點은 아주 ..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홍대용의 경우 중국인들과의 교유는 명예나 이익 따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그것은 인격을 담보한 퍽 순수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박제가 등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지는 듯하다. 즉 박제가의 경우 중국인과의 교유는 단지 순수한 동기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중국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얻게 되는 명예나 이익에 대한 고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박제가는 이른바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아주 강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중국 문인이나 지식인과의 친교는 그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으리라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의 친교는 박제가의..
6. 중국인과의 교류로 우리 홍대용이 달라졌어요 홍대용이 체험한 1766년 초봄의 이 만남은 이후 홍대용이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며, 한중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홍대용은 귀국 후 박지원과 함께 이른바 ‘북학’에 제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흔히 오해되고 있듯, 홍대용의 사상적 고취가 고작 북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홍대용은 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즉 그는 오랜 숙고를 거쳐, 진리의 배타적 독점성을 주장하던 당대의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 서학西學, 불교, 노장老莊, 묵가 등 모든 이단 사상도 그것대로의 장점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징심구세澄心求世’, 즉 인간의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그 장점..
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그리하여 몰래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환담했으니, 하늘의 명命이 사람에게 성으로 품부稟賦된 이치라든가 주자학朱子學과 육왕학陸王學의 차이라든가 세도世道가 성하고 쇠한 기미라든가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일의 영광스러움과 욕됨의 분간 등등에 대하여 샅샅이 논하며, 근거를 들어 고찰하고 입증하니, 서로 마음에 맞지 않는 게 없었다. 서로간에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하는 말은 모두 지성스럽고 간절한 데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에 처음에 서로 지기知己로 허여하다가 종국에는 의형제를 맺었다. 서로 흠모하고 좋아함은 마치 성색聲色을 좇는 것 같았고, 서로 저버리지 않음은 마치 하늘에 맹세한 것 같았으니, 그 의義가 족히 사람들을 감읍感泣시킬 만했다...
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시가지를 배회하고 여항閭巷의 좁은 골목을 바장이다가 마침내 항주杭州에서 온 세 명의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이 단락은 홍대용이 작은 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곳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세 선비를 만나 한 달 가까이 사귀며 학문적 토론과 인간적 친교를 나눈 일을 말하고 있다. “시가지(街市)” 운운했는데, 바로 ‘유리창’을 가리킨다. 지금도 북경에는 유리창이 남아 있어 그곳에 쭉 들어서 있는 점포들이 미술품과 골동품, 서적 등을 판매하고 있지만, 당시의 유리창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유리창은 자금성紫禁城 가까이에 있었고 게다가 그 인근에 조선 사신들이 묵던 조선관朝鮮館이 있었기에 당시 사행使行의 일원으..
3. 연암이 홍군이라 호칭하는 이유 홍군洪君 덕보德保는 일찍이 한 필 말을 타고 사행使行을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다. 洪君德保, 嘗一朝踔一騎, 從使者而至中國. 이 단락에서 비로소 본론이 전개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홍대용을 “홍군 덕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아래부터는 덕보라는 말도 빼 버리고 아예 ‘홍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호칭 속에는 부르는 사람고 불리는 사람 양자의 관계와 친밀도 등이 함축되어 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지금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칭이 까다롭고 다양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에 따라 아주 섬세하게 호칭을 골라 쓰는 것이 일반적인 관레였다. 당시는 ‘예禮’를 강조하는 사회였던지라,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예’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옛날의 이른바 양자楊子ㆍ묵자墨子ㆍ노자老子ㆍ부처와 같은 유도 아니건만 네 가지 의론이 존재하고, 옛날의 이른바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도 아니건만 네 가지 신분이 존재한다. 단지 그 숭상하는 바가 같지 않아서일 뿐이건만 서로 헐뜯는 의론을 펼쳐 진秦 나라와 월越 나라가 소원한 것보다 더 소원하고, 그 처한 바가 달라서일 뿐이건만 신분에 차등을 둠이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다. 非古之所謂楊ㆍ墨ㆍ老ㆍ佛而議論之家四焉, 非古之所謂士農工商而名分之家四焉. 是惟所賢者不同耳, 議論之互激而異於秦越; 是惟所處者有差耳, 名分之較畫而嚴於華夷. 그리하여 그 의론이 다름을 꺼려, 이름은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 하지는 아니하고, 자체가 다름에 구애되어, 서로 접촉은 하면서도 감히 벗..
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삼한三韓 서른여섯 도회지에 노닐다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가없는데 이름난 산과 높다란 봉우리가 그 사이에 솟아 있어 백 리 이어진 들이 드물고 천 호戶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땅덩어리가 참으로 좁다 하겠다.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與天無極, 而名山巨嶽, 根盤其中,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其爲地也亦已狹矣. 대단히 거창하게 서두를 열고 있다. 아주 높은 곳에서 한반도의 땅덩어리를 내려다보면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 유언호ㆍ신광온申光蘊 등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 글은 그 이듬해인 176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東臨滄海)” 운운한 말에 전년도에 있..
5. 총평 1 이 글은 ‘개성인 양인수의 하루’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연암의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당대 개성인의 내면 초상을 접할 수 있다. 2 이 작품은 1편에서는 집을 그리고 있고, 2편에서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 풍경과 사람은 서로 잘 부합된다. 흡사 산수화 속의 점경인물點景人物처럼, 그 풍경에 그 인물이다. 이 집 이름이 왜 ‘주영염수재’인지는 글 어디에도 언급이 없지만, 사실은 글 전체를 통해 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연암이 지어준 게 아닐까 싶은 이 집 이름은 하릴없는 양인수의 처지와 기분, 그 일상을 잘 집약해 놓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연암은 그 스스로도 평생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기에 양인수와 같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하릴없이 세..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사회적 출구가 닫혀 있는 양인수 주영염수재의 주인 양인수는 개성의 사족士族이다. 개성은 전 왕조인 고려의 수도인지라 조선 시대 내내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따라서 개성 사족은 비록 사족이라고는 하나 그 처지가 영남이나 기호畿湖 사족과는 지체가 달랐다. 그래서 인삼 밭을 경영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재理財 활동을 벌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삼은 대청 무역에서 우리 측이 중국에 가지고 간 물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양인수의 물적 기반, 그리고 그런 물적 기반으로 인해 가능했으리라 짐작되는 그 서화골동 취향은 일정하게 당대에 이루어진 대청 무역의 상업적 잉여와 연결되어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기는 하나, 양인수의..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중국지식인들 밀실로 들어가다 그런데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이 보여주는 이런 취향의 문화적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명말明末에 이런 취향이 대대적으로 성행했으니, 당시 중국 사대부들은 정원을 그럴 듯하게 조성하여 그 속에 누각이나 서재를 지어 놓고 거기다 각종 고기古器나 고서화를 비치하여 수시로 감상했으며, 고급 향을 피우고 좋은 차를 마시면서 고상하고 운치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리나 세속을 초월한 깨끗하고 담박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이런 태도나 취향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수성을 확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대부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다시 말해 ..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양군은 성품이 게으르고, 깊은 곳에 거처하길 좋아하는데, 권태로워지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오피궤烏皮几 하나, 거문고 하나, 검劒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고서화古書畵 두루마리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는 사이에 벌렁 눕는다. 梁君性懶而好深居, 倦至輒下簾, 頹然臥乎烏几一琴一劒一香爐一酒壺一茶竈一古書畵軸一碁局一之間. 매양 자다 일어나 주렴을 걷고 해가 어디쯤 걸렸는지를 보는데, 섬돌 위로 나무 그늘이 언뜻 옮겨가고 울타리 아래 한낮의 닭이 처음 운다. 그러면 안석에 기대어 검을 살피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 몇 곡조를 타 보기도 하고, 한 잔 술을 조금씩 마시기도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혹은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고, 혹..
1. 작은 규모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다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는 양군梁君 인수仁叟의 초당草堂이다. 이 집은 오래된 소나무가 있는 검푸른 절벽 아래에 있으며 기둥이 여덟 개인데, 깊숙한 안쪽을 막아서 심방深房을 만들고, 격자창格子窓을 통하게 하여 탁 트인 대청을 만들었다. 높다랗게 다락을 만들고 아담하게 곁방을 둔 데다 대나무 난간을 두르고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으며 오른쪽엔 둥근창을 내고 왼쪽엔 빗살창을 내었으니, 집의 몸체는 비록 작아도 있을 것은 다 갖춰져 있어 겨울에는 환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집 뒤에는 배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대나무 사립문 안팎으론 모두 오래된 살구나무와 붉은 과실이 열리는 복사나무다. 개울 머리에 흰 돌을 두어 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세차게 흐르게 했고 멀리 있는 물을 섬돌 아..
6. 총평 1 이 글은 전체적으로 볼 때 굴곡과 기복이 심하다. 그래서 글이 더욱 생기 있고, 재미있다. 그리고 1단락의 문의文意가 마지막 단락에서 뒤집히는 극적 반전의 구조를 취함으로써 글 전체의 파란波瀾이 풍부하게 되었다. 2 박지원은 정치적인 이유로 한 때 연암협에 은거하였다. 박지원은 이 무렵 양호맹을 알게 되고, 그의 신세를 지게 된다. 박지원이 연암협으로 옮겨 간 것은 42세 때인 1778년이다. 하지만 2년 뒤, 자신을 박해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홍국영洪國榮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 후에도 박지원은 연암협을 들락날락하지만, 이 글 중 양호맹이 기문을 부탁한 지 어언 10년이나 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 53세 때인 1789년에 이 글이 씌어진 게 아닌가 추..
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아아, 양직은 정말 대나무에 벽癖이 있어 그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 겉으로만 봐도 그는 마음이 우뚝하고 커서 마치 기암괴석 같은데 그 속에는 아마 조릿대 떨기와 그윽한 왕대가 무성하리라. 이러하니 내가 글을 안 지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 가운데 대나무를 숭상하여 ‘차군此君’이라 부른 이가 있었거니와, 양직과 같은 이는 백세百世의 뒤에 ‘차군’의 충신이 되었다 할 만하다. 이에 나는 대서특필하여 정려旌閭하기를, ‘고고하며 곧고 편안할손, 양처사梁處士의 집’이라 하였다. 嗚呼! 養直豈眞癖於竹, 而愛之至哉. 觀於外可見其肝腎肺胃, 磐矹犖确, 如奇巖巉石, 而叢篠幽篁, 森鬱其中也. 余之文至此而惡能已乎. 古之人旣有尊竹而‘君’之者, 則如養直者, 百世之下, ..
4. 대나무를 닮아 간 사내 양직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지 어언 10년이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천 번 좌절되고 백 번 억눌려도 그 뜻이 바뀌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절절해졌다. 심지어 그는 술을 따라주며 나를 달래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여 촉구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묵묵히 응하지 않자 발끈하여 화를 내며 팔을 쳐들어 노려보는데, 눈썹은 찡그려 ‘个개’ 자 같고 손가락은 메마른 마디 같아, 굳세고 뾰족한 게 홀연 대나무 모양이 되었다. 所以請余文者, 今已十年之久, 而猶不少變. 千挫百抑, 不移其志, 彌久而罙切. 至酹酒而說之, 聲氣而加之, 余輒默而不應, 則奮然作色, 戟手疾視, 眉拂个字, 指若枯節, 勁峭槎枒, 忽成竹形.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10년이 지났다. 이 단락은 크..
3. 양호맹의 진실한 대나무 사랑 양梁군 양직養直은 개결하고 곧으며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죽오竹塢’라 자호自號하고 그 호를 편액扁額에다 써서 자기 집에 걸고는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응하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대나무를 소재로 한 글들에 대해 정말 괴로워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만일 편액의 글을 고친다면 내 당장 글을 쓰리다.” 나는 그를 위하여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쓴 기이한 호나 운치 있는 이름, 이를테면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행화춘 우림정杏花春雨林亭, 소엄화계小罨畫溪,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 우금운고루雨今雲古樓 등등 수십ㆍ수백 가지를 뇌까리며 그 중에 하나를 골라잡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2. 상투적인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 예로부터 대나무를 찬양한 사람은 무지하게 많다. 『시경』 「기욱淇燠」 시 이래로 읊조리고 찬탄하는 것만으론 부족해서 ‘차군此君’이라 일컬으며 숭상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에는 ‘죽竹’으로 자호字號를 삼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게다가 그런 호를 지은 까닭을 기문記文으로 적곤 하지만, 설사 채윤蔡倫이나 몽염蒙恬의 지필紙筆이라 할지라도, 대나무를 두고서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지조라느니 소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라느니 하고 서술하는 데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쓴 글이 죄다 진부한 글이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그 정채를 잃게 되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사람도 대나무의 덕성을 찬양하..
1. 대나무에 관한 글을 써주지 않으려는 이유 예로부터 대나무를 찬양한 사람은 무지하게 많다. 『시경』 「기욱淇燠」 시 이래로 읊조리고 찬탄하는 것만으론 부족해서 ‘차군此君’이라 일컬으며 숭상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에는 ‘죽竹’으로 자호字號를 삼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게다가 그런 호를 지은 까닭을 기문記文으로 적곤 하지만, 설사 채윤蔡倫이나 몽염蒙恬의 지필紙筆이라 할지라도, 대나무를 두고서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지조라느니 소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라느니 하고 서술하는 데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쓴 글이 죄다 진부한 글이니, 대나무는 그래서 마침내 그 정채를 잃게 되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사람도 대나무의 덕성을 찬..
4. 총평 1 동아시아에서의 고대 이래 무지개를 상서롭지 못한 자연 현상으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런 주류적 관점과는 달리 무지개를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삼은 문이나 예술가가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17세기에 활동한 중국의 걸출한 화가 석도石濤의 「수홍도垂虹圖」 같은 그림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나무 밑 석파石坡(평평한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두 고사高士는 무지개에서 어떤 황홀경을 맛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연암의 이 글은 석도의 무지개 그림처럼 무지개를 미적 관조의 본격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희귀한 글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2 이글에는 진부한 글자가 하나도 없고 모든 글자가 문맥 속에서 ..
3. 능청스러워 보일 정도로 깔끔하고 절제된 미학 말을 재촉해 10리 남짓 가자 문득 햇빛이 비치는데 점점 밝고 고와졌다. 조금 전의 험상궂던 구름은 모두 아름답고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해 오색이 영롱하였다. 말 머리에 한 길 남짓 무슨 기운이 어리는데, 누렇고 탁한 게 흡사 기름이 엉긴 것 같았다. 그것은 잠깐 새에 갑자기 청홍색으로 변하더니 높다라니 하늘까지 닿아 그것을 문으로 삼아 들어가거나 그것을 다리로 삼아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을 성싶었다. 처음 말 머리에 있을 때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멀어졌다. 이윽고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이르러 산기슭을 돌아 나오며 바라보니 강 따라 백 리 사이에 강화부 외성外城의 흰 성가퀴가 햇빛에 반짝거리고, 무지개 발은 아직..
2. 동양화의 화법으로 구름을 묘사하다 바다 밖의 뭇 산에는 저마다 작은 구름이 피어올라 멀리서 서로 응하며 마구 독기를 품고 있었다. 간혹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거렸고 해 아래에서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니 사방이 온통 컴컴해져서 한 치의 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번개가 번쩍여, 겹겹이 쌓여 있어 주름이 잡힌 구름 1천 송이와 1만 이파리가 비로소 보였는데, 흡사 옷의 가장자리에 선을 두른 것 같기도 하고, 꽃에 윤곽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모두가 농담濃淡이 있었다. 천둥소리는 찢어질 듯하여 흑룡이라도 뛰쳐나올 성 싶었다. 그러나 비는 그다지 심하지 않아서, 멀리 바라보니 연안延安과 배천白川 사이에 빗발이 흰 비단처럼 드리워 있었다. 海外諸山, 各出小雲遙相應, 蓬蓬有毒. 或出電..
1. 자연을 담아내는 신채나는 표현 밤에 봉상촌鳳翔村에서 자고 새벽에 강화로 출발하였다. 5리쯤 가자 비로소 동이 텄는데 티끌 기운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해가 겨우 한 자쯤 떠오르는가 싶자 문득 까마귀 머리만 한 시커먼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를 반이나 덮어 버렸다. 침침하고 어둑하여 한을 품은 것 같기도 하고, 수심에 잠긴 것 같기도 한데, 잔뜩 찡그려 편치 않은 모습이었다. 햇살은 옆으로 뻗쳐 나와 모두 꼬리별을 이뤘으며, 하늘 아래로 방사放射되는 모양이 흡사 성난 폭포 같았다. 夜宿鳳翔邨, 曉入沁都. 行五里許, 天始明, 無纖氛點翳. 日纔上天一尺, 忽有黑雲, 點日如烏頭, 須臾掩日半輪. 慘憺窅冥, 如恨如愁, 頻蹙不寧. 光氣旁溢, 皆成彗孛, 下射天際如怒瀑. 글머리를 아주 간결하게 열고..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고古’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의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는 진정한 자기회귀自己回歸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고’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고’에 대한 탐구다. 텍스트에 대한 사유와 자아의 확장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
5-1. 총평 1 이 글은 1770년(34세) 아니면 1771년(35세)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이 백탑 부근에 살 때다. 연암은 이 시기에 쓴 자신의 글을 모아 두 권의 책을 엮었으니, 하나는 『공작관 글 모음孔雀館文稿』이고, 또 하나는 『종북소선鍾北小選』이다. 전자는 1769년 겨울에, 후자는 1771년 겨울에 엮었다. 이 글은 당시 『종북소선』에 수록했던 글이다. 『과정록』에 보면 연암은 중년 이후 『장자』와 불교에 출입했다고 했는데, 이 글은 『장자』의 어법과 사고방식이 아주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연암이 『장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상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는 사유를 혁신하고, 감수성을 쇄신하며, 관점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자』를 활용햇..
7-1. 총평 1 이 글은 ‘문장을 짓는 건 진실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여, 창작의 비의秘義와 비평의 독자적 의의에 대해 언급한 다음, 최종적으로 이 모두를 종합해 독자에게 당부하는 말로 끝맺고 있는바, 앞뒤로 아귀가 딱 맞다. 2 이명과 코골이! 창작과 비평에 대해 말하기 위해 구사하고 있는 이 비유는 대단히 기발하고 참신하다. 한국문학사에서 길이 기억될 만한 창조적 비유가 아닌가 한다. 3 이 글은 창작과 수용의 갭에 대한 예민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창작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연암의 깊은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작가만이 볼 수 있는 내밀한 지점이 존재한다는 점, 작가만이 듣는 은밀한 소리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한 설파는 창작의 독자적 의의 및 창작 주체의 내면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는 불..
4-1. 총평 1 이 글은 연암이 그 제자인 이서구에게 독서의 방법을 설파한 내용이다. 아마도 연암은 이서구의 독서 태도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기에 이런 의론을 펼쳤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의 의의는 그런 쪽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글의 의의는 연암이 자기 시대의 독서법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암 당대의 조선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독서법이 있었으니, 하나는 성리학적 독서법이고, 다른 하나는 고증학적 독서법이며, 또 하나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독서법이었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연암의 시대에만 있던 독서법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왔던 독서법이다. 성리학적 독서법은, 성리학을 하는 데 긴요한 책들의 목록을 정..
8-1. 총평 1 연암은 문학론과 관련된 글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글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연암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2 연암은 이 글을 서른두 살 때 썼으며, 4년 뒤에 개작하였다. 이를 통해 연암이 30대 초반에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 관점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3 ‘법고창신론’은 문학 창작방법론으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창조에도 유용한 원리가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포괄적 미학 원리다. 연암이 창안한 이 이론은 전통과 혁신, 과거와 현재, ‘고古’와 ‘신新’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 그것은 한국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4 ‘법고창신론’은 그 이론 수준이 아주 높으며..
5-1. 총평 1 이 글은 불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 연암은 불교와 관련된 글을 몇 편 남기고 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다. 2 연암은 동자승과 대사가 주고받는 문답을 그 곁에서 듣고 있고, 독자는 그것을 다시 엿듣는다. 3 연암은 동자승과 대사의 문답을 통해 심오한 이치를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의 개성까지도 잘 묘파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어려운 이치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은 여유롭고 생기가 넘친다. 4 이 글은 퍽 파격적인 글이다. 기문記文으로 작성된 글임에도 글의 대부분은 엉뚱하게도 대사와 동자승의 문답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 문답 속에 기문을 부탁한 사람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그 문답은 엉뚱한 것이 아니요, 주도면밀한 고려의 결과라 할 것이다. 이 ..
7-1. 총평 1 이 글은 서간문이다. 전근대 시기에는 서간문도 엄연한 문학 작품이었다. 연암의 서간문은 문예성이 퍽 빼어나다. 이 글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2 이 편지는, 처음에 서울에 있는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중간에 친구의 소중함을 설파하고, 끝에 백아의 고사에 빗대어 벗을 잃은 사람의 지극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이 보여주는, 백아의 심리적 추이에 대한 묘사는 연암의 대가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이 글 중 가장 빼어난 부분이라 할 만하다. 3 이 글은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인 1793년에 씌어진 것인바 연암 57세 때의 글이다. 노老 연암의 원숙미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4 이 작품은 ‘법고창신’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