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정민 (378)
건빵이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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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두보(杜甫)는 “시 짓고 용사(用事)함은 마땅히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 물속에 소금이 녹아 있어도 물을 마셔 보아야 소금의 짠 맛을 알 수가 있듯이.”라고 말했다. 물속에 소금을 넣으면 소금은 물에 녹아 보이질 않는다. 입을 대고 마셔 보면 그제서야 짠 맛이 드러난다. 시의 언어는 물속에 녹아든 소금의 맛과 같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맛,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뜻, 선가(禪家)의 언어가 또한 그렇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보인다. 당나라 때 시승(詩僧) 제기(齊己)는 그의 「유시(喩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日用是何專 吟疲卽坐禪 날마다 힘쓰는 일 무엇이던가 읊조리다 지치면 좌선(坐禪)을 하지. 하루 종일 시에 ..
7. 선기(禪機)와 시취(詩趣)④ 閱過行年六十七 더듬어 지나온 길 예순 일곱 해 及到今朝萬事畢 오늘 아침 이르러 모든 일 끝나도다. 故鄕歸路坦然平 고향 돌아가는 길 평탄도 한데 路頭分明曾未失 갈 길이 뚜렷하여 길 잃지 않겠구나. 手中纔有一枝笻 수중엔 겨우 지팡이 하나지만 且喜途中脚不倦 도중에 다리 품 덜어줌 기뻐하노라. 충지(沖止)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이다. 어떤 삶 끝에서 이렇듯 투명한 정신의 자락이 펼쳐지는가. 스님은 이 게송을 남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대로 입적하였다. 생사(生死)의 바다를 훌쩍 건너 저승길을 마치 소풍 가듯 떠나가고 있다. 보우(普愚) 스님의 「사세송(辭世頌)」 또한 생사(生死)의 바다를 단숨에 뛰어넘는 장엄함이 있다. 人生命若水泡空 인생은 물거품 부질없는 것 八十餘年春夢中..
6. 선기(禪機)와 시취(詩趣)③ 白雲堆裡屋三間 흰 구름 쌓인 곳에 세 칸 초가집 坐臥經行得自閑 앉아 눕고 쏘다녀도 제 절로 한가롭네. 澗水冷冷談般若 시냇물은 졸졸졸 반야(般若)를 속삭이고 淸風和月遍身寒 맑은 바람 달빛에 온 몸이 서늘하다. 고려 말의 선승(禪僧) 혜근(慧勤)의 「산거(山居)」란 작품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는 생활이지만 무위도식과는 엄연이 다르다. 흰 구름 속 초가삼간에서도 일말의 누추를 찾을 길 없다. 시냇물은 졸졸졸 흘러가며 반야(般若)의 설법을 들려주고, 맑은 바람과 흰 달빛은 내 정신을 쇄락케 한다. 卷箔引山色 連筒分澗聲 구슬 발 걷어서 산 빛 들이고 대통 이어 시냇물 소릴 나누네. 終朝少人到 杜宇自呼名 아침내 아무도 오지를 않고 두견새 제 홀로 이름 부른다. 충지(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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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일본의 타쿠안(澤庵) 화상은 유명한 검술가였다. 그는 제자인 야규우에게 검술에 대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그 충고의 핵심은 항상 마음을 ‘흐르는’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술적 기교를 넘어서는 것이다. 높은 경지의 검술가는 적과 마주하여 서 있을 때, 적도 자신도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기교를 잊고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기고 서 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실제 어떤 검술가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스즈키 교수의 『선(禪)과 정신분석(精神分析)』이란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항상 ‘흐르는’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
3. 산은 산, 물은 물③ 효봉(曉峯) 스님의 다음 법어(法語)에서도 이러한 ‘반상(反常)’은 계속된다. 若人欲越四相山 누구든 사상산(四相山)을 건너랴거든 也要須杖兎角杖 토끼 뿔 지팡이를 짚어야 하고, 若人欲渡生死海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려 하면 也要須駕無底船 밑 빠진 배를 타야 하리라. 토끼에게 무슨 뿔이 있으며, 설사 있다 한들 상아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지팡이로 만들 수 있으랴. 밑 빠진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바다는 어떤 바다인가?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고 들을수록 해괴하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사상산(四相山)과 생사해(生死海)를 건널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 행간의 뜻은 찾을수록 첩첩산중이다. 斫來無影樹 燋盡水中漚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는 물속의 거품에다 태워 버린..
2. 산은 산, 물은 물② 혜심(慧諶)은 위 같은 글에서 회양선사(懷讓禪師)의 시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懷州牛喫草 益州馬腹脹 회주(懷州) 땅의 소가 풀을 뜯는데 익주(益州)의 말이 배가 터졌네. 天下覓醫人 炙猪左膊上 천하에 의원을 찾아가 보니 돼지의 어깨 위에 뜸질을 하네. 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풀은 회주(懷州)의 소가 먹었는데, 수 천리 떨어진 익주(益州)의 말이 배가 터진다. 고쳐 달라고 의원을 찾아가니 엉뚱하게 돼지의 어깨에다 뜸질을 한다.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니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아니 혜심(慧諶)은 아예 갈피를 잡을 생각은 버리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이언절려(離言絶慮)’,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곳, 그곳의 소식은 언어로 설명하려 하면 이렇듯 헛김이 샌다. 언어..
19. 선시(禪詩), 깨달음의 바다 1. 산은 산, 물은 물 노승(老僧)이 30년 전 참선(參禪)하러 왔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뒤에 와서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고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게 되자,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몸뚱이 쉴 곳을 얻으매 예전처럼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일뿐이로다. 성철(性澈) 스님의 법어(法語)로 해서 유명해진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공안(公案)이다. 선사(禪師)는 30년간의 수행 끝에 처음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다. 그러고 보면 30년의 공력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고초일뿐이었다. 한때 눈앞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의 빛 속에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때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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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속인(俗人)과 달사(達士)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된 사람은 의심스런 바가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을수록 괴이함도 많다는 것이다. 대저 어찌 달사(達士)라 하여 물건마다 쫓아가서 눈으로 본 것이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앞에 열 가지가 펼쳐지고, 열을 보면 마음에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을 도로 사물에 부칠 뿐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는 까닭에 마음은 한가로와 남음이 있고, 응수(應酬)함은 다함이 없다.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제 스스로 괴이함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성을 내며,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만물을 온통 의심한다.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
12.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③ 花開因雨落因風 비를 맞고 피어나서 바람 따라 떨어지니 春去春來在此中 봄 오고 가는 소식 이 가운데 있구나. 昨夜有風兼有雨 간밤에 바람 불고 비까지 내리더니 桃花滿發杏花空 복사꽃 만발하고 살구꽃은 다 졌다오. 권벽(權擘)의 「춘야풍우(春夜風雨)」이다. 물리(物理)의 순환하는 이치를 절묘하게 꼬집어 내었다. 비가 와서 꽃을 피우면, 바람은 와서 이를 떨군다. 어제 만발했던 살구꽃은 진흙탕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엔 어느새 복사꽃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슬퍼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만발한 복사꽃을 바라보는 경이와, 비바람에 져버린 살구꽃 빈 가지를 바라보는 허탈을 함께 포착했다. 봄은 그렇게 와서 또 그렇게 가버릴 것이고, 우리네 인생도..
11.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②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 나무 끝 부용꽃 산 속 붉은 떨기 피웠네. 澗戶寂無人 紛紛開且落 시내가 집 적막히 사람 없는데 분분히 피었다간 또 떨어지네. 역시 왕유(王維)의 「신이오(辛夷塢)」란 작품이다. 산속 가지 끝에 붉은 부용꽃이 망울을 터뜨렸다. 그 옆으로 졸졸 흘러가는 시내, 다시 시냇가엔 초가집 한 채. 집에는 하루 종일 사람의 기척이 없다. 자태를 뽐내어도 보아줄 이 없는 적막한 이 산중에서 무엇이 바쁜지 꽃들은 어지러이 피고 진다. 시간도 숨을 멈춘 것만 같다. 꽃이 피고 또 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시의 화면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시인은 단지 화면의 바깥에서 독자를 자기 옆에 정답게 앉혀 놓고 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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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관물(觀物)의 정신이 미학(美學)의 경계로 넘어오면 앞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가 된다. 청말(淸末)의 왕국유(王國維)는 소옹(邵雍)의 관물론에서 개념을 빌려와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설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이 있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 있다. “눈물 어린 눈으로 물어봐도 꽃은 말이 없고, 붉은 꽃잎 어지러이 그네 위로 떨어지네[淚眼問花花不語, 亂紅飛過鞦韆去].”와 “외론 여관 문을 걸고 봄 추위를 견디니, 두견새 소리 속에 기운 해가 저무네[可堪孤館閉春寒, 杜鵑聲裏斜陽暮].”는 유아지경(有我之境)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와 “차가운 ..
9. 생동하는 봄풀의 뜻④ 牛無上齒虎無角 소는 윗니 없고 범은 뿔이 없거니 天道均齊付與宜 천도(天道)는 공평하여 부여함이 마땅토다. 因觀宦路升沈事 이로써 벼슬길의 오르내림 살펴보니 陟未皆歡黜未悲 승진했다 기뻐말고 쫓겨났다 슬퍼말라. 고상안(高尙顔)의 「관물음(觀物吟)」이다. 단순히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자기 위안이 아니다. 일찍이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에서 “천지는 만물에 있어 그 아름다움만을 오로지 할 수는 없게 하였다. 때문에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 뿐이며,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天地之於萬物也, 使不得專其美. 故角者去齒, 翼則兩其足, 名花無實, 彩雲易散].”고 하였다. 뿔 달린 소는 윗니가 없고, 이빨이 날카로운 범에게는 ..
8. 생동하는 봄풀의 뜻③ 芸芸庶物從何有 많고 많은 사물들 어데서 왔나 漠漠源頭不是虛 아득한 저 근원은 허망치 않네. 欲識前賢興感處 전현(前賢)의 흥감처(興感處)를 알고 싶은가 請看庭草與盆魚 뜨락 풀과 어항 고기 자세히 보게. 이황(李滉)의 「관물(觀物)」이다. 원두(源頭)는 아득하여 허망한 듯 하지만 끝까지 궁구하여 ‘일리(一理)’와 만난다. 많고 많은 ‘서물(庶物)’들의 말미암은 바가 바로 이 지점이 아니던가. 전현(前賢)은 그 어디서 ‘막막원두(漠漠源頭)’와 만났던가. 뜨락에 돋은 풀과 어항에 노니는 고기에서다. 4구의 ‘정초(庭草)’ ‘분어(盆魚)’는 정호(程顥)가 뜰의 풀을 베지 않고, 어항에 물고기를 기르며 그 생의(生意)를 관찰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부를 닦았던 일을 두고 한 말이다. ..
7. 생동하는 봄풀의 뜻② 김시습(金時習, 1435-1493)도 「관물(觀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南枝花發北枝寒 남쪽 가지 꽃 피워도 북쪽은 차니 强道春心有兩般 봄 마음 두 가지라 굳이 말하네. 一理齊平無物我 한 이치 나란타면 물아(物我) 없으리 好將點檢自家看 점검하여 제 스스로 봄이 좋겠네. 따사로운 봄볕과 마주한 양지녘엔 이미 꽃망울이 부펐어도, 그늘진 저편은 아직도 꽃소식이 감감하다. 한 가지에 나고도 이럴진대 봄은 어느 한편만을 편애하는 것이냐. 그러나 떳떳한 한 이치가 분명히 밝아 있으니 어찌 ‘양반(兩般)’의 뜻이 있으랴. 3구에서 슬며시 ‘아(我)’를 끌어들인 것을 보면, 세도(世道)의 불공(不公)을 언외에 투탁하는 마음이 잡힐 것도 같다. 唐虞事業巍千古 당우(唐虞)의 사업은 천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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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동하는 봄풀의 뜻 소옹(邵雍)의 이물관물(以物觀物)의 설이 있은 이래 그 정신을 이어받아 관물(觀物)을 주제로 한 시를 남긴 시인들이 적지 않다. 여러 문집에 실려 전하는 관물시(觀物詩) 몇 편을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이색(李穡)의 「관물(觀物)」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大哉觀物處 因勢自相形 크도다 사물을 바라보는 곳 형세를 인하여 꼴지워 지네. 白水深成黑 黃山遠還靑 흰물도 깊으면 검게 변하고 황산도 멀리 보면 푸르게 뵈지. 位高威自重 室陋德彌馨 지위가 높고 보니 위엄 무겁고 집이사 누추해도 덕은 더욱 향기롭네. 老牧忘言久 笞痕滿小庭 늙은 몸 말 잊은 지 이미 오래니 이끼 자욱 작은 뜰에 가득하도다. 만물(萬物)의 태(態)는 일정함이 없어 형세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한다. 한 마음의 ..
5.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③ 관물(觀物)함으로써 그 속에 구현된 리(理)를 읽어내고, 그 리(理)를 체법(體法)함으로써 인간 삶과 연관 짓는 것은 유가(儒家) 인식론의 바탕이 된다. 송대의 이학자 소옹(邵雍)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관물(觀物)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리(理)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의 물(物)은 리(理)를 담지 않은 것이 없고, 성(性)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명(命) 없는 것이 없다. 그는 눈으로 사물의 외피만을 보는 것을 ‘이아관물(以我觀物)’에, 심(心)으로 리(理)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이물관물(以物觀物)’에 견주고, ‘이물관물(以物觀物)’을 ‘반관(反觀)’이라 하여..
4.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② 일찍이 조식(曺植)이 지은 「무제(無題)」란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雨洗山嵐盡 尖峯畵裏看 산안개 말끔히 비 씻어 가니 그림 같이 드러나는 뾰족 묏부리. 歸雲低薄暮 意態自閑閑 저물녘 녈 구름은 낮게 깔리어 그 모습 제 절로 한가롭구나. 비가 지나가자, 자욱하던 이내가 말끔히 걷히었다. 그래도 산허리엔 저물녘 하루 일과를 마친 구름이 귀가를 준비하고 있고, 그 위로 뾰족한 묏부리가 발묵(潑墨)의 그림처럼 새틋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바쁠 것 하나 없는 구름의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깊은 편안함에 잠겨든다. 유유자적하다. 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容 산과 구름 모두 다 희고 희거니 구름인지 산인지 분간 못하네.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峯 구름 가자 산만이 홀로 섰구나 일만이야 이천봉 금강이라네..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12월 8일 아침. 매화 분에 물을 주라 하셨다. 날씨는 맑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다. 조금 뒤 선생께서 누울 자리를 정돈하라 하시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으신 채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구름이 흩어지고 눈은 걷혔다. 문인(門人) 이덕홍(李德弘)이 쓴 「퇴계선생고종기(退溪先生考終記)」이다. 묘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 본 제자의 기록으로는 투명하리만치 담담하다. 슬픔이 묻어날 빈틈이 없다. 스승의 용태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창밖의 날씨로 쏠려 있었다. 그는 과연 무슨 마음으로 스승이 서거하던 날의 기후 변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임종하던 날 아침, 스승은 방안 매화에 물..
2.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② 물고기와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희로애락의 감정은 물고기도 있다. 편안함을 기뻐하고, 눈앞의 이익을 탐하며, 강한 적을 두려워한다. 물고기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는가? 염치와 부끄러움,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는가? 없다. 이것이 인간과 물고기를 갈라놓는 기준이 된다. 인간에게 이런 마음이 없다면 미물과 무엇이 다른가? 다시 한 두 예화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어떤 이가 야생 거위를 길렀다. 불에 익힌 음식을 많이 주니까 거위가 뚱뚱해져서 날 수가 없었다. 그 뒤 문득 먹지 않으므로, 사람이 병이 났다고 생각하고, 더욱 먹을 것을 많이 주었다. 그런데도 먹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몸이 가벼워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옹(翁)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지혜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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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관물론(觀物論), 바라봄의 시학(詩學) 1.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지렁이를 두고 사람들은 수미(首尾)도 없고 배도 등도 없다고들 말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실지로는 수미(首尾)와 복배(腹背)가 있어 해를 피하고 리(利)에 나아가며, 정욕(情欲)을 모두 갖추고 있다. 옹(翁)은 말한다. 물건의 어리석고 굼뜬 것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사람과 같이 칠규(七竅)와 오장(五臟)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것에게 있어서이겠는가? 말을 듣고 빛깔을 보아 지각함이 어둡지 않은데도, 사람 가운데는 간혹 방향을 잃어 길을 잃는 자가 있으니 슬프다.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 쪽인가? 바닥에 닿는 쪽이다. 앞에 소금을 뿌려두면 지렁이는 고개를 돌..
13.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② 우리말과 한자를 뒤섞어 쓰는 시는 구한말에 오면 다음과 같이 진전된다. 舍廊곗집處女在 사랑 문간에 처녀가 있는데 무던顔色가는腰 무던한 얼굴에다 가녀린 허리. 사람一見얼는隱 사람을 한 번 보고 얼른 숨으니 마치雲間月明消 마치 구름 사이 달이 숨는 듯. 이기(李沂, 1848~1909)가 『대한자강회월보』에 소개한 것이다. 앞에서는 구절마다 한글이 2자씩 일정한 위치에 들어갔는데, 여기서는 2자 또는 4자까지 들어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구문을 만들어낸다. 그 사이에 김삿갓의 “데걱데걱등남산(登南山), 씨근벌떡식기산(息氣散). 醉眼朦朧굽어관(觀), 울긋불긋화난만(花爛漫)”이나, “청송(靑松)등성듬성립(立), 인간(人間)여기저기유(有). 소위(所謂)엇뚝빗뚝객(客), 평생(平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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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 해체시는 전통미학과 기존문화를 해체하고 기존의 인간관도 해체시키려는 일종의 무규범성으로서의 소외 양상이었다. 해체시는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세계에 대한 불신을 효과적으로 표명했다. 욕설, 야유, 아이러니의 비틀린 언어도 소외의 주목할 만한 시적 양상이다. -115쪽 可憐門閥皆佳族 슬프다 문벌은 모두 훌륭한 집안으로 虛老風塵獨可悲 세월에 헛되이 늙으니 홀로 구슬프도다. 五老峯下論理坐 오로봉 아래에서 이치 논하며 앉았자니 世人皆稱道也知 세상사람 모두 도를 안다 일컫네. 위 시는 『한중기문(閒中記聞)』에 실려 있다. 한 사람이 시덥잖은 제 집안과 학문을 지나치게 뽐내므로 임제(林悌)가 조롱하여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노봉(五老峯) 아래에서 리(理)를 논하며 앉아 있는 늙은..
11. 슬픈 웃음, 해체(解體)의 시학(詩學)④ 그렇다고 김삿갓이 ‘비천한 재담’만을 일삼았던 광대였던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천박한 재담만으로 일관했다면 애초에 그의 시는 문자로 기록되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四脚松盤粥一器 네 다리 소반에다 죽이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 하늘빛에 구름이 함께 떠도네. 主人莫道無顔色 주인아 면목 없다 말하지 마오 吾愛靑山倒水來 얼비쳐 오는 청산 내사 좋으니. 가난한 살림에 지나는 과객에게 먹다 남은 묽은 죽 한 그릇을 내오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이다. 죽이 얼마나 묽었으면 앞산의 그림자가 얼비쳤을까. 이런 시도 점잖은 체면에서 보면 되잖케 보이기 마련이어도, 자신의 인생을 물끄러미 관조하는 잔잔한 서글픔이 있어 좋다. 天皇崩乎人皇崩 천황씨가 죽었느냐 ..
10. 슬픈 웃음, 해체(解體)의 시학(詩學)③ 『도시시와 해체시』라는 책에서 이러한 시엔 “풍자정신 앞에 신성한 것, 숭고한 것, 초월적인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생각해 보았는가’하는 세계에 대한 지적 반응이다. 지적 반응은 희극적 태도다.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p.21)”가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스운 것 앞에서 뜻밖에 진지해지고, 진지한 것을 단번에 희화화해버리는 시인의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서당을 진작부터 알고 있나니 방 가운덴 모두 다 존귀한 물건뿐.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생도는 모두 열 살도 안 되어 선생이 와도 인사할 줄 모른다. 김삿갓이 고약한 시골..
9. 슬픈 웃음, 해체(解體)의 시학(詩學)② 그러나 김삿갓이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지었다는 「무제(無題)」를 보자. 吉州吉州不吉州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한 고장 아니요 許可許可不許可 허가 허가 해봐도 허가하지 않는구나. 明川明川人不明 명천 명천 하건만 사람은 현명찮코 漁佃漁佃食無魚 어전 어전 하여도 식탁엔 고기 없네. 길주에 와서 허씨 성을 가진 집에 묵기를 청했는데 거절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 분풀이를 명천과 어전의 지명에 대로 풀었다. 똑같이 땅 이름으로 장난쳤지만 진지함은 없고 가벼운 말장난에 그쳤다. 邑號開城何閉門 고을 이름 개성(開城)인데 어찌 문을 닫으며 山名松嶽豈無薪 산 이름 송악(松嶽)인데 어이 땔감 없느뇨. 黃昏逐客非人事 황혼의 축객(逐客)은 사람 인사 아닐래라 禮義東方自獨秦 예의 동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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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슬픈 웃음, 해체(解體)의 시학(詩學) 김준오는 자신의 저서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이런 말도 남겼다. “해체주의는 자명한 이치와 질서와 도덕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세계를 가변적이고 일상적이며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한다. 자아도 더 이상 일관되게 세계와 교섭하고 대결하는 심리적 통일체나 종합적 기능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해체시는 무질서한 세계를, 파편화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한다.(p.152)” 1980년대의 해체시를 두고 한..
7. 김삿갓은 없다③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만년에 은퇴하여 향리에 물러나 있을 때 일이다. 그가 허름한 베잠방이 차림으로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경망한 선비 하나가 시내를 건너려다, “여보. 늙은이! 나를 좀 업고 건네게.” 했겠다. “그러시지요.” 하고는 젊은 것을 업고 시내를 건너는데, 이 친구 늙은이 등에 업혀 까닥까닥 냇물을 건너다보니 아뿔싸! 늙은이가 정승이나 할 수 있는 옥관자(玉貫子)가 하고 있지 않은가. 시골 무지랭이 늙은인 줄 알았다가 큰 경을 치르게 생겼다.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떨다가 창졸간에 시내를 건넜는데, 경망한 선비는 좀 전의 서슬은 간데없이 난짝 꿇어앉아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죽을 죄를 빌었다. 그러자 이 의뭉스런 늙은이는 시를 한 수 읊어주고는 다..
6. 김삿갓은 없다② 이응수에 의해 김삿갓의 시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그가 세상을 뜬지 근 70년 뒤인 1939년의 일이다. 이응수는 이곳저곳에서 구전되던 김삿갓의 시 183편을 모아 상재하였다. 대부분이 전문(傳聞)에 의한 기록이고 보면, 그 진위(眞僞)를 헤아려 따진다는 것은 애초에 무망한 일이다. ‘최불암 시리즈’가 그렇고 ‘덩달이 시리즈’가 그렇듯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의 시 또한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불특정 다수의 희작시들이 모두 그의 이름 아래 모인 것일 뿐이다.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다음 시를 보자. 是是非非非是是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옳음 아니고 是非非是非非是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옳지 않음 아닐세. 是非非是是非非 그른 것 옳다 ..
3. 김삿갓은 없다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가탁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 희작시들은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고, 시의 소재 또한 당시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비시적(非詩的) 대상을 시(詩)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표면 진술의 당의(糖衣)를 입혀,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월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전통 한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 희작의 파격시들은 시랄 것도 없는 희학질에 불과하다. 도대체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은 못 되는 것이다. 시시덕거리고 키득키득대는 정서에 더 가깝다. 희작시는 보통 전승의 과정에서 복수성을 띠면서 부연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삿갓이 어느..
4. 눈물이 석 줄② 조선후기 『어수신화(禦睡新話)』란 책에는 16자 시도 실려 있다. 月上柳梢頭 人約黃昏後 달님이 버들가지 끝에 떠오니 해진 뒤에 만나기로 약속합시다. 父母俱睡熟 偸 부모님 모두 곤히 잠들면 몰래. 아쉬운 데이트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 가버려 어느덧 달이 늘어진 버들잎 새로 떠올랐다. 그러나 뜨거운 청춘 남녀는 그것으로 만남을 끝내기엔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들통 나지 않게 한밤중에 다시 만나 밀회를 나누자는 약속을 주고받는 것이다. 意在不言中 低頭丢眼風 마음은 말없는 가운데 있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웃음 짓네. 今日來不得 紅 오늘 오지 못하게 되면 난 몰라. 다정한 님의 소곤거림에 그녀는 더욱 두근대는 가슴을 달랠 길 없었다. 혹시 부모님이 늦게 주무셔서 약속을 못 지키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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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눈물이 석 줄 한시의 어조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처럼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모순되고 복잡한 양태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규정하는 제반 사회조건에 길들여져 있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인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희극적 양상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결과 시는 진지성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른바 희작화(戱作化)의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전의 시화(詩話)에도 희작의 양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로원야화기」부터 김삿갓의 시에 이르러 극에 달하는 파격의 희작시들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집단적 양상을 띄고 등장하는 것은 주목되는 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 희작시의 작가들이 창작을 통..
2.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② ‘서울 것’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쪽같이 속았던 자신이 부끄럽고, 깜찍하게 속였던 ‘시골내기’가 맹랑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서울 것과 시골내기는 시 짓기 시합을 벌이는데, 여기에 동원된 시체(詩體)라는 것이 앞서 소개한 바 있던 잡체시들이다. 인명(人名)을 넣어 짓는 인명시(人名詩)로 겨루고, 연구(聯句)로 주거니 받거니 시합하고, 다시 육언(六言)으로 실갱이를 하다가, 종내 3ㆍ5ㆍ7(言)의 층시(層詩)로 옮겨 가고, 약명체(藥名體)로 승부를 결하였다. 서울 것은 시골내기에게 끝내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참패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번엔 거꾸로 시골내기가 오행시(五行詩)로 겨룰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짓는 방법은 첫 구 첫 자에 ‘목(木)’자를 넣고, 끝 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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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해체의 시학(詩學): 파격시의 세계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 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 김준오 『도시시와 해체시』 중에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는 숙종(肅宗)조의 한 시골 선비가 서울서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충남 아산 어름의 요로원에 잠자리를 찾아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든 말에 초췌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는 가는 곳마다 홀대와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가 여관방에서 서울의 행세하는 집안의 끌끌한 선비와 함께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
13. 선덕여왕의 자격지심② 작호도(鵲虎圖)와 노안도(蘆雁圖)의 속뜻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 보면 흔히 표범을 그려놓고 그 배경에 소나무와 까치를 그려 둔 민화와 마주하게 된다. 이 그림은 일종의 세화(歲畵)로서 정월에만 붙이는 것이다. 반드시 표범이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표범을 본 일이 없어 슬며시 호랑이로 둔갑해 그려져 있기도 한다. 이를 작호도(鵲虎圖)라 하여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까치를 친근하게 여겨왔고 운운하는 설명이 친절하게 붙어 있기도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표범과 소나무와 까치는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코드일 뿐이다. 표범을 나타내는 한자 ‘표(豹)’는 ‘빠오’로 읽혀지니, 알린다는 뜻의 ‘보(報)’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희작(喜鵲)’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5.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편에 보면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란 항목이 있다. 그녀가 재위 16년 동안 미리 알아 맞춘 세 가지 일을 적은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당 태종이 붉은빛과 자주빛, 그리고 흰빛 등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서 되를 보내왔는데, 여왕은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꽃이 피었는데 그 말과 같았다. 여러 신하가 어떻게 그럴 줄 알았느냐고 묻자, 여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혼자 지내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신하들을 탄복시켰다. 그런데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11.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③ 한시에는 이렇듯 새 울음소리를 음차하여 훈독(訓讀)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금언체(禽言體)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노고지리를 ‘노고질(老姑疾)’로 표기하여 늙은 시어머니의 병환을 노래한다든지, 아예 ‘부과자(負鍋者)’라 하여 ‘노구[鍋] 솥을 등에 질[負] 이[者]’라고 풀기도 한다. 소쩍새는 솥적다고 ‘정소(鼎小)’라 하고, 까마귀는 ‘고악(姑惡)’이라 하여 시어머니를 향한 며느리의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소쩍새의 다른 이름인 주걱새를 ‘死去’(죽어)鳥로 표기하여 ‘나 죽겠네’의 탄식을 털어 놓기도 한다. 모두 쌍관(雙關)의 묘미(妙味)를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鼎小 鼎小 솥적 솥적 飯多炊不了 쌀이 많아 밥 지을 수 없다지만 今年米貴苦艱食..
10.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② 布穀 布穀 뻐꾹 뻐꾹 布穀聲中春意足 뻐꾹새 울음 속에 봄은 무르익었는데 健兒南征村巷空 사내들은 전쟁 나가 시골 동네 텅 비었네. 落日唯聞寡妻哭 저물녘엔 들리느니 과부의 울음 소리 布穀啼 誰布穀 씨 뿌려라 울지만 누가 있어 씨 뿌리나 田園茫茫烟草綠 들판엔 아득하게 풀빛만 자옥해라. 권필(權韠)의 「포곡(布穀)」이란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이다. 때는 바야흐로 봄날, 뻐꾹새의 울음소리 속에 춘경(春耕)의 일손이 한창 바쁠 시절이다. 그러나 남정네들은 모두 남쪽 전장터로 징발되어 시골 동네는 텅 비고 말았다. 저물녘에 들려오는 과부의 울음소리는 이미 많은 남정네들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음을 알려준다. 뻐꾹새가 씨 뿌리라고 목청을 뽑을수록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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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凌晨走馬入孤城 새벽녘 말을 달려 외론 성에 들어서니 籬落無人杏子成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 布穀不知王事急 나라 일이 급한 줄을 뻐꾹새는 모르고 傍林終日勸春耕 숲 곁에서 종일토록 봄갈이를 권하네. 고려 때 시인 정윤의(鄭允宜)의 「서강성현사(書江城縣舍)」란 작품이다. 새벽녘에 말을 달려 성에 들어서고 있으니, 그는 지금 밤새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는 외로운 성뿐이다. 혹시나 사람이 있을까 싶어 울타리를 기웃거려 보아도 보이는 것은 주인 없는 마당에 잘 익어 매달린 살구 열매뿐이다. 그런데 뻐꾹새는 급한 나라 일도 알지 못한 채 철도 없이 숲가에서 봄 밭갈이를 어서 하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다. ..
8. 견우(牽牛)와 소도둑④ 만해 한용운의 「심은 버들」이란 작품도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뜰 앞에 버들을 심어 님의 말을 매렸더니 님은 가실 때에 버들을 꺾어 말채찍을 하였습니다. 버들마다 채찍이 되어서 님을 따르는 나의 말도 채칠까 하였더니 남은 가지 천만사(千萬絲)는 해마다 해마다 보낸 한(恨)을 잡아맵니다. 위 시에서 ‘남은 가지 천만사(千萬絲)’는 님을 향한 ‘남은 생각 천만사(千萬思)’와 쌍관(雙關)된다. 그러므로 ‘보낸 한(恨)’을 잡아매는 것은 ‘천만사(千萬絲)’의 얽히고설킨 버들가지이면서 동시에 ‘천만사(千萬思)’의 부질없는 기다림과 집착이 된다. 甲日花無乙日輝 오늘 핀 꽃이 내일 빛남 없음은 一花羞向兩朝暉 한 꽃으로 두 아침 햇살 부끄럽기 때문이라. 葵傾日日如馮道 해바라기 날마다 기..
7. 견우(牽牛)와 소도둑③ ‘갬[晴]’과 ‘정(情)’ 楊柳靑靑江水平 수양버들 파릇파릇 강물은 넘실넘실 聞郞江上唱歌聲 강 위에선 그 님의 노래 소리 들리네. 東邊日出西邊雨 동쪽엔 해가 나고 서쪽에는 비 오니 道是無晴却有晴 흐렸나 하고 보면 어느새 개였구나. 유우석(劉禹錫)의 「죽지사(竹枝詞)」이다. 수양버들 가지에 물이 오르니, 강물도 넘실넘실 물이 불었다. 청춘의 봄날, 사랑의 단꿈이 익어가는 강변의 스케치이다. 연잎 사이로 배를 띄웠던 아가씨는 저 건너 방죽가에서 그 님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듣고 있다. 아가씨는 갑자기 화제를 돌려 날씨 타령을 늘어놓는다. 저편에선 비가 오는데 또 이편에선 햇살이 비친다. 개였나 싶으면 흐린 날씨처럼, 아가씨의 마음도 싱숭생숭 한 게다. 요랬다조랬다 하는 날씨처..
6. 견우(牽牛)와 소도둑② 조원(趙瑗)의 첩 이씨(李氏, 이옥봉)가 능히 시를 잘 지었다. 마침 시골에 어떤 남자가 소를 훔친 혐의로 관가에 끌려갔다. 답답한 그 아낙이 이웃의 이씨(李氏)에게 남편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소장(訴狀)을 써달라고 부탁하니, 이씨(李氏)는 그 말미에 이렇게 써 놓았다. 妾身非織女 郞豈是牽牛 첩의 몸이 직녀(織女)가 아니옵거늘 낭군이 어찌 견우(牽牛)시리요. 견우(牽牛)는 글자 그대로 풀이 하면 ‘소를 끌다’가 되니 소를 끌고 간 도둑이 된다. 자신이 직녀(織女)가 아니니 낭군이 견우(牽牛)일 까닭이 없다는 말은, 곧 낭군은 결코 소를 끌고 가지 않았다는 호소가 되는 것이니, 그 언어의 재치가 놀랍고 뛰어나다. 이 시를 본 태수는 기특하게 여겨 그 사람을 바로 풀어주었다. 이..
3. 견우(牽牛)와 소도둑 기관염(氣管炎)과 처관엄(妻管嚴) 앞서 본 여러 예화들은 모두 희필(戱筆)에 불과한 것이지만, 언어를 구사하는 재치가 뛰어나고 기지가 반짝인다. 대개 시와 문자유희는 엄격하게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은 유희적 기분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동음사(同音詞)나 다의사(多義詞)를 활용한 쌍관(雙關), 즉 말장난 펀(Pun)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접하게 되는 기교인데, 예전 한시에도 이러한 펀(Pun)의 예는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애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 사람들이 쓰는 은어 가운데 기관지염에 걸렸다는 말은 공처가(恐妻家)라는 의미로 쓰인다. 왜냐하면 ‘기관염(氣管炎)’과 ‘처관엄(妻管嚴)’의 중국 발음이 서로 같기 때문..
4. 장님의 단청 구경② 광해군 때 평양 관찰사 박엽(朴燁)이 손과 함께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기 수가 자꾸 막히자 박엽은 곁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던 기생 소백주(小栢舟)를 쿡 찌르며 그러고만 있지 말고 노래나 한 수 지어 불러보라 하였다.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졸직(拙直)한 마음에 병들까 염려러니 이리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동포(百年同胞)하리이다. 나는 당신을 만난 뒤로 모든 일을 당신께 의탁고자 해도, 혹 님이 나를 버리시면 어쩌나 하여 병이 될 지경인데, 당신은 이리하마 저리하자는 딴청만 하시니 그러지 말고 함께 품어 백년해로하자는 말씀이다. 그런데 다시 시의 원문을 가만히 읽어보면 장기판의 짝패인 상(象)ㆍ사(士)ㆍ졸(卒)ㆍ병(兵)ㆍ마(馬)ㆍ차(車)ㆍ포(包)의 음이 다..
2. 장님의 단청 구경 고려 때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성명(聲名)이 천하에 크게 떨쳤다. 그가 한 절에 이르니 스님이 마중 나와 말하기를, “그대가 동방의 문장사(文章士)로서 중국의 과거에 장원하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이제 직접 만나 보니 큰 기쁨입니다[飽聞子東方文章士, 爲中國第一科, 今何倖見之].”라고 하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떡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니, 스님이 한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僧笑少來僧笑少 승소(僧笑)가 적게 오니 스님 웃음도 적네. 대개 ‘승소(僧笑)’는 떡의 별칭인데, 쟁반에 떡[僧笑]이 조금 밖에 없으니 스님의 웃음[僧笑] 또한 적다고 말한 것이다. 이색(李穡)이 갑작스레 대구를 지으려 하였으나 도저히 짝을 맞출 수가 없는지라 사과..
2.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② 김삿갓의 시 속에서도 이런 말장난의 예는 흔히 발견된다.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하늘은 길어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이 늙으니 나비도 오지 않네. 菊秀寒沙發 枝影半從地 국화는 찬 모래에 곱게 피었고 나뭇가지 그림자 반쯤 드리웠는데,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강 가 정자를 가난한 선비 지나다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어졌구나. 月移山影改 通市求利來 달이 옮겨가자 산 그림자 바뀌고 저자에선 利를 구해 사람들 돌아오네. 김삿갓이 방랑의 길목에서 한 집에 묵어갈 것을 청하니, 주인은 난처해하다 천장에 거미집이 어지러운 골방으로 안내하고는 식사라고 내 온 것이 국수 한 사발에 간장 반 종지가 전부였다. 창가에 흘러드는 달빛을 보다가 바로 앞에 칙간에서 나는 구린내에 코를 막으며 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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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詩)와 문자유희(文字遊戱): 한시(漢詩)의 쌍관의(雙關義) 1.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일손(金馹孫)이 젊어 산사(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띄운 편지 한 통이 장인에게 배달되었는데, 편지의 사연이 야릇하였다. 文王沒 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문왕(文王)이 돌아가시자, 무왕(武王)이 나오셨네. 주공(周公)이여 주공(周公)이여! 소공(召公)이여 소공(召公)이여! 태공(太公)이여 태공(太公)이여!” 예전 은(殷) 나라가 임금 주(紂)의 포학한 통치로 혼란에 빠지자, 제후였던 문왕(文王)은 어짊으로 백성을 다스려 모든 제후들이 그를 존경하여 따랐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주(紂)의 포학한 ..
11. 이합체(離合體)와 문자 퍼즐② 이제 본격적인 완성된 형태의 이합체(離合體) 시(詩)를 한 수 감상해 보기로 하자. 조선 중기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작품이다. 徂年糬已改 且可閑逍遙 흘러가는 세월 문득 이 몸 바꾸어 장차 한가로이 노닐만 해라. 聽取天幡鳴 耳邊喧調刀 천지의 소리를 귀여겨 들으니 귓가엔 떠들썩 칼 고르는 소리로다. 干時良已晩 二毛紛飄蕭 시대에 쓰임 구하려도 이미 늦었고 반쯤 센 터럭만 어지러이 흩날리네. 沓沓名利子 白日誇蟬貂 욕심 많은 저 명리(名利)의 사람은 밝은 해에 가벼운 갖옷 뽐내네. 弛置樂自便 也復觀漁樵 멋대로 놓아두니 즐거워 편안한데 다시 몸소 고기 잡고 나무를 하네. 倀鬼役於虎 人或遭昏妖 박귀(璞鬼)가 범에게 부림 당하듯 사람도 간혹 요귀를 만난다네. 結髮喜玄覽 吉凶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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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합체(離合體)와 문자 퍼즐 硏石猶在 峴山已頹 연석(硏石)은 그대로인데 현산(峴山)은 이미 무너져 버렸네. 姜女己去 孟子不來 강녀(姜女)가 떠나가자 맹자(孟子)는 오질 않네. 소동파(蘇東坡)가 자신의 벼루 뚜껑에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다. 현산(峴山)의 돌을 캐어 벼루를 만들었다. 하도 많이 캐고 보니 현산(峴山)은 모두 닳아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캐낸 벼루 돌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강녀(姜女)가 떠나가자 맹자(孟子)가 더 이상 오질 않는다는 말은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下)에서 ‘원급강녀(爰及姜女)’라 한 구절을 가지고 응용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보아도 ‘강(姜)’에서 ‘녀(女)’가 떠나니 ‘양(羊)’만 남고, ‘맹(孟)’에서 ‘자(子)’가 오지 않으니 ‘명(皿)’만..
9. 파자(破字)놀음과 석자시(析字詩)③ 고대 중국에는 이렇듯 글자를 떼었다가 다시 붙이는 파자(破字)나 합자(合字)의 방식을 활용한 은어(隱語)나 수수께끼가 많이 전해진다. 『후한서(後漢書)』 「오행지(五行志)」에는 한(漢)나라 헌제(獻帝) 때 서울에서 불리웠다는 동요가 실려 있다. 千里草何靑靑 천리초는 어찌 저리 푸르른가. 十日卜不得生 열흘 동안 점을 치니 살지를 못한다네. 무슨 말인가. ‘천리초(千里草)’를 한데 묶으면 ‘동(董)’이 되고, ‘십일복(十日卜)’은 ‘탁(卓)’자가 된다. ‘청청(靑靑)’은 푸르게 우거져 왕성한 모양이고, ‘부득생(不得生)’은 결국 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위 노래는 당시 전횡을 일삼던 간신 동탁(董卓)이 지금은 저렇듯 날뛰고 있지만 마침내는 머지않아 망하고 말 것이라는..
8. 파자(破字)놀음과 석자시(析字詩)② 出門遠觀山山翠 문을 나서 멀리 보니 산마다 푸르르고 朋友相送月月親 벗을 보낸 뒤부터 달만 보면 반갑구나. 위의 시에서는 ‘출(出)’을 ‘산산(山山)’으로, ‘붕(朋)’을 ‘월월(月月)’로 각각 파자(破字)하여 장난친 경우이다. 이러한 장난이 보다 더 진전되면, 다음과 같은 창작으로 이어진다. 日月明朝昏 山風嵐自起 해와 달 아침 저녁 환하게 밝고 산 바람에 이내가 절로 이누나. 石皮破仍堅 古木枯不死 돌 껍질은 깨뜨려도 단단만 하고 고목은 말랐어도 죽지 않았네. 可人何當來 意若重千里 보고 싶은 그대가 오지 않으매 마음은 천리나 떨어져 있는듯. 永言詠黃鶴 志士心未已 시를 지어 황학(黃鶴)을 노래하자니 지사(志士)의 마음은 끝이 없어라. 송(宋) 나라 때 무명씨의 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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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자(破字)놀음과 석자시(析字詩) 한시 중에는 앞서 장두체(藏頭體)와 같이 파자(破字)하여 장난을 친 문자 유희가 심심찮게 있다. 다음은 흔히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작품이다. 仙是山人佛弗人 신선은 산 사람이나 부처는 사람 아니요 鴻惟江鳥鷄奚鳥 기러기는 강 새지만 닭이 어찌 새리요. 氷消一點還爲水 얼음이 한점 녹으면 도로 물이 되고 兩木相對便成林 두 나무 마주 서니 문득 숲을 이루네. 말인즉 구구절절이 옳다. ‘선(仙)’은 ‘인(人)’과 ‘산(山)’이 결합된 것이니 이를 파자(破字)하면 ‘산인(山人)’이 되고, ‘불(佛)’은 ‘불인(弗人)’이 된다. 또 ‘홍(鴻)’은 ‘강조(江鳥)’ 두 글자를 합한 것이고, ‘계(鷄)’는 ‘해(奚)’와 ‘조(鳥)’를 묶은 것이다. 일단 이 네 글자를 파자(破字)하여 ..
6.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③ 다른 구절들도 모두 비슷한 발상으로 지은 것이다. 舞臺小天地 天地大舞臺 무대(舞臺)는 작은 세상이요, 천지(天地)는 커다란 무대(舞臺)일러라. ‘소(小)’와 ‘대(大)’를 중앙에 두고 ‘무대(舞臺)’와 ‘천지(天地)’의 위치를 서로 바꾼 것인데, 의미는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축을 담았다. 思伊久阻歸期 靜 憶 轉漏聞時離別 위 시도 첩자시(疊字詩)이다. 지은이는 송(宋)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진소유(秦少游)이다. 이 시는 왼쪽 ‘정(靜)’에서 시계 방향으로 7언으로 끊는데, 뒤의 넉 자 또는 석 자가 다음 구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읽는다. 靜思伊久阻歸期 돌아올 기약 늦는 그대를 생각타가 久阻歸期憶別離 돌아올 기약 늦어지니 이별을 떠올리네. 憶別離時聞..
5.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② 장두체(藏頭體)란 글자 그대로 각 구절 첫 글자에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시체(詩體)이다. 이를 달리 말해 옥련환(玉連環)이라고도 하는데, 옥(玉)이란 ‘옥편(玉篇)’의 예에서도 보듯 글자를 말하니, 옥련환(玉連環)이란 글자가 이어져 고리를 이루는 ‘꼬리따기 노래’라는 뜻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한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감춰진 규칙을 고려하면 각 구의 끝 글자가 놓이는 순간 다음 구절의 첫 글자가 제한되니, 창작 상 고도의 기교와 언어 구사력이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운자는 엄격하게 지켰다. 木葉蕭蕭正着霜 낙엽 우엔 쓸쓸히 서리 내리고 相如多病臥虛堂 상여(相如)는 병 앓으며 빈 집에 누웠네. 土階荒草秋猶碧 흙 계단 황량한 풀, 가을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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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 한충(韓忠, 1486~1521)은 기개가 호방하고 비파 연주 솜씨도 뛰어났던 문사였다. 그가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용한 점장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평생의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 점쟁이는 그의 사주를 따져본 뒤,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年壯氣拔天摩 把龍泉幾歲磨 上梧桐將發響 中律呂有時和 傳三代詩書敎 起千秋道德波 幣已成賢士價 生何獨怨長沙 위 6자 8구의 시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예언한 것일까? 시를 받아든 한충(韓忠)은 뜻을 알 수가 없어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쟁이가 써준 것은 장두체(藏頭體)라고 불리는 일종의 잡체시이다. 문자 퍼즐의 한 종류로, 그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3. 빈 칸 채우기, 수시(數詩)ㆍ팔음가(八音歌)ㆍ약명체(藥名體)③ 개화기 「만주일보」 1919년 10월 1일자에는 사몽이란 필명자가 투고한 「고(苦)는 약(樂)의 종(種)」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는데, 팔음가(八音歌)와 비슷한 발상으로 지어진 실험시이다. 그 첫줄에 ‘자운’이라 하여 “지금의 우리 고생 장래의 락이로다”는 한 줄이 실려 있다. 시의 전문은 이러하다. 지금의 우리들은 고생 중에 싸였네 금음밤에 불없이 헐덕이는 우리들 의워싸고 있는 것 제일 못된 악말세 우리의 지금 고생 비관 말고 힘쓰면 리상저끝 결과가 불원간에 오리라 고생 끝에 락이란 예로부터 있는 말 생각하고 깨다라 락심 말고 해보소 장차고 무한하든 우리들의 고생이 래두에 끝 있을 것 자신하고 분발해 의리 없는 저 악마 죄 내쫓아 바..
2. 빈 칸 채우기, 수시(數詩)ㆍ팔음가(八音歌)ㆍ약명체(藥名體)② 「매일신보(每日申報)」 제1959호(1912. 5.1)에 실린 수원 사는 이원규(李元圭)란 이가 지은 「가루지 타령」이란 언문풍월도 수시의 발상을 십분 활용한 몹시 흥미로운 작품이다. 일지일지(一之一之) 글이나 일지(一之) 이지이지(二之二之) 금(金)을 이지(二之) 삼지삼지(三之三之) 집신이나 삼지(三之) 사지사지(四之四之) 브즈런해야 사지(四之) 오지오지(五之五之) 세월(歲月)가면 늙을 때가 돌아오지(五之) 육지육지(六之六之) 항업(航業)은 수로(水路)오 농업(農業)은 육지(六之) 칠지칠지(七之七之) 암컷이나 칠지(七之) 팔지팔지(八之八之) 쓰고 남거던 팔지(八之) 구지구지(九之九之) 궁교빈족(窮交貧族) 가난구지(九之) 십지십지(十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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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1. 빈 칸 채우기, 수시(數詩)ㆍ팔음가(八音歌)ㆍ약명체(藥名體) 부단한 언어의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織造)가 보여주는 현란한 아름다움, 잡체시는 단순히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오늘의 시단에 던진다. 또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실험되고 있는 형태시들이 기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세상은 이렇듯 돌고 도는 것이며,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一生苦沈綿 二月患喉撲 일생동안 병고에 괴로웠는데 이월에도 감기 들어 목이 쉬었네.三夜耿不眠 四大眞是假 삼일 밤을 끙끙대며 잠 못 이루니 사대 등신 멀쩡한 몸 헛것이로다.五旬尙..
12.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② 우리나라 문집을 읽다 보니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趙緯韓)의 문집에도 신지체 한 수가 실려 있다. 문집을 그대로 오려 붙이면 아래의 사진과 같다. 이를 어떻게 읽을까? 대개 신지체는 위의 예에서도 보듯 한 글자가 두 글자 또는 세 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모두 16자로 되어 있으니 대개 5언 8구의 율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퍼즐을 앞서의 방식을 따라 풀면 다음과 같다. 小郡臨湖上 危樓近太淸 작은 고을 호수 가에 임하여 있고 높은 누각 푸른 하늘 가까이 있다. 濃烟迷大野 片雨入荒城 짙은 안개 넓은 들에 어지럽더니 황량한 성 보슬비가 흩뿌리누나. 遠峀斜陽盡 橫塘細草平 먼 산에 지는 해도 스러져 가고 횡당엔 가는 풀만 우거졌구나. 空齋無一事 長嘯倚前楹 빈 집에 아무런 일이..
3.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골계총서(滑稽叢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날 한 원님의 첩이 총명하여 능히 문자를 이해했다. 그 고을에 문객 한 사람이 해학을 잘 하므로 원님이 아껴 우스개 얘기를 하며 서로 격의 없이 지냈다. 하루는 재상이 첩과 더불어 동산 정자에서 상춘 하고 있는데, 문객이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네 글자를 써서 재상에게 보내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님은 내용을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첩이 곁에서 그 글을 읽더니 웃으며 말했다. “무에 어려울 게 있답니까? ‘일(日)’ 자가 매우 기니 이는 ‘장일(長日)’입니다. ‘심(心)’ 자에 점 하나가 없으니, 바로 ‘무점심(無點心)’입지요. ‘인(人)’자를 조그맣게 썼으니 ‘소인(小人)’이구요, ‘복(腹)..
10. 바로 읽고 돌려 읽고⑦ 이런 형태가 한 단계 더 발전하면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된다. 烟 雨 冷 藏 雲 睄 山 望 紅 遠 花 水 流 春 老 吟 殘 蘂 窪 軟 東 鬪 含 隱 叉 香 荀 吐 尖 중국의 『이공시격(李公詩格)』이란 책에 수록된 「반복시(反覆詩)」이다. 이 시를 읽는 법 또한 절묘하기 짝이 없다. 겉 마름모꼴은 모두 20자로 되어 있는데, 아무 글자 아무 방향으로 읽어도 시가 된다. 대개 5언절구 30수 가량을 얻을 수 있다. 또 가운데 십자가 모양에는 모두 13개의 글자가 있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읽어 7언절구 4수가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내려오다가 가운데 ‘로(老)’자에서 왼편으로 혹은 오른편으로 읽던지, 왼편에서 읽어오다가 ‘로(老)..
9. 바로 읽고 돌려 읽고⑥ 비슷하지만 좀 더 복잡한 예를 하나 더 읽어보자. 명나라 장조(張潮)가 엮은 『해낭촌금(奚囊寸錦)』에 실린 「영기(令旗)」란 작품이다. 위 그림에서 보듯 깃발 안에 49자가 적혀 있고, 정중앙의 ‘영(令)’ 자만 검게 표시했다. 이 시를 읽는 방법은 좀 복잡하다. 중앙의 ‘영’자에서 출발해서 아래로 내려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7자씩 끊어 읽는다. 그리고 다음 구의 첫 자는 전 구의 끝 글자를 반으로 갈라서 따온다. 예를 들어 첫 구의 끝 글자 ‘명(銘)’에서 ‘금(金)’을 취하고, 둘째 구의 끝 글자 ‘쟁(琤)’에서 ‘왕(王)’ 자를 취하는 방식이다. 퍼즐을 풀면 다음과 같다. 令出功成好勒銘 영 내리면 공 이루어 공 새기기 좋은데 金戈鐵馬靜瑽琤 쇠 창과 갑옷 말이 고요히 쟁..
8. 바로 읽고 돌려 읽고⑤ 이제 그 한 예를 보기로 하자. 다음은 한나라 때 소백옥(蘇伯玉)의 아내가 멀리 촉 땅에 있는 남편을 그리며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쟁반 가운데 써서 보냈다는 「반중시(盤中詩)」이다. 이 시는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정 중앙의 ‘산(山)’자에서 아래 ‘수(樹)’자로 내려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다시 그 다음 원에서는 시계 방향으로 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 해 읽으면 다음과 같은 3자시가 된다. 山樹高 산엔 나무가 높이 솟았고 鳥鳴悲 새는 구슬피 울음 우누나. 泉水深 흐르는 샘물은 깊기도 한데 鯉魚肥 뛰노는 잉어는 살이 올랐네. 空倉雀 텅빈 창고에 사는 참새가 常苦飢 언제나 주림으로 괴로워 하듯, 吏人婦 벼슬살이 떠나간 이의 아내는 會夫稀 지아비 만나..
7. 바로 읽고 돌려 읽고④ 아래 그림은 거북 모양으로 수놓은 직금도의 일종으로 당나라 때 변방의 장수였던 장규(張壄)의 아내가 지은 시이다. 睽 鄕 離 還 已 早 是 敎 征 客 十 秋 强 天 子 願 對 鏡 那 獻 堪 形 龜 作 妝 理 重 繡 聞 腸 雁 砧 更 斷 幾 廻 修 調 尺 杵 拂 淚 霜 見 素 垂 先 練 製 爲 先 疊 衣 箱 裳 開 글자의 배열을 따라 선을 이으면 완연한 거북의 모양이 이루어진다. 남편 장규가 변방으로 떠난 지 10여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아내 후씨(侯氏)는 이 시를 수놓아 대궐에 가서 천자께 바쳤다. 이를 받아본 당 무종(武宗)은 그녀의 재주를 높이 사, 남편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다. 아울러 비단 삼백필의 부상을 내렸다. 위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제일 위 ..
6. 바로 읽고 돌려 읽고③ 회문시 중에는 글자를 하나씩 밀려서 읽어도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차 주전자에 흔히 써넣는 「다호시(茶壺詩)」이다. ‘가이청심야(可以淸心也)’라는 다섯 글자가 써 있는데, 이를 한 글자씩 밀면서 읽으면 이렇게 된다. 可以淸心也 마음을 맑게 할 수가 있고 以淸心也可 맑은 마음으로 마셔도 좋다. 淸心也可以 맑은 마음으로도 괜찮으니 心也可以淸 마음도 맑아질 수가 있고 也可以淸心 또한 마음을 맑게 해준다. 둥근 차 주전자에 돌려가며 쓴 글이니 사실 어느 글자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 글자부터 읽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것을 ‘자자회문시(字字廻文詩)’라고 한다.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문시는 제(齊)..
5. 바로 읽고 돌려 읽고② 먼저 기본 형태의 회문시를 한 수 읽어보자. 腸斷啼鶯春 落花紅蔟地 꾀꼬리 우는 봄날 애끊는 마음 진 꽃은 온 땅을 붉게 덮었네. 香衾曉枕孤 玉臉雙流淚 이불 속 새벽잠은 외롭기만 해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네. 郎信薄如雲 妾情搖似水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인 듯 제 마음은 일렁이는 강물 같네요. 長日度與誰 皺却愁眉翠 긴 날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근심 겨워 찡그린 상 물리쳐 볼까. 이규보(李奎報)의 「미인원(美人怨)」이란 작품이다. 창밖에는 이른 새벽부터 꾀꼬리가 울고, 방안 이불 속에는 이른 아침부터 두 뺨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누워 있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뒤숭숭한 꿈에서 막 깨어났는데, 그녀의 잠을 깨운 것은 꾀꼬리의 울음소리였다. 설레이는 마음에 일어나 창밖..
2. 바로 읽고 돌려 읽고 청나라 때 북경에 ‘천연거(天然居)’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건륭황제가 이것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客上天然居 居然天上客 나그네 천연거에 올라가더니 느긋히 천상의 객이 되었네. 두 구절의 글자 배열을 보면 둘째 구는 첫 구를 뒤집어 읽은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읽고 거꾸로 읽어 두 구를 만들었다. 그러자 기효람(紀曉嵐)이 이렇게 받았다. 人過大佛寺 寺佛大過人 사람이 큰 절간을 지나가는데 절의 부처 사람보다 훨씬 크더라. 역시 첫 구를 거꾸로 하여 둘째 구로 얹은 것이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雁飛平頂山 山頂平飛雁 기러기 평정산을 날아가는데 산꼭대기 기러기 떼 가지런하네. 花香滿園亭 亭園滿香花 꽃이 만원정에 향기로우니 정원이 꽃 향기로 가득하구나. ..
3. 글자로 쌓은 탑③ 개화기의 잡지 『청춘』 제 6호(1915.3)에는 매우 흥미로운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조판의 어려움 때문에 원래 상태로는 보여줄 수 없어 유감이지만,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 세로 14자씩 배열하여, 글자는 중앙을 향하도록 방사형으로 배치하였다. 제목은 「부벽루기(浮碧樓記)」이다. 읽는 법은 중앙의 글자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한 글자씩 차례로 늘려 읽는 것이다. 펼쳐 보면 이 작품은 1자로부터 10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1자까지 줄어드는 마름모꼴의 특이한 시형이 된다. 樓 樓 江岸 城頭 浮碧空 帶長流 壯觀四海 雄壓西州 側身窺宇宙 引手挽牛斗 仙人所以好居 騷客幾多來遊 風烟四節各殊狀 人事千年等幻漚乙密臺邊神馬不還 麒麟窟裏古跡空留 高登雕欄頓覺逸興生 逈挹平原便欣塵慮休 丹靑曜日一杯可消百憂..
2. 글자로 쌓은 탑② 다음은 고려 때 승려 시인 혜심(慧諶)의 시이다. 1에서 10까지 차례로 늘어나고 있다. 물론 운자도 지켰다. 원 제목은 「차금성경사록종일지십운(次錦城慶司祿從一至十韻)」이다. 人 人 隨業 受身 苦樂果 善惡因 不循邪妄 常行正眞 粃糠兮富貴 甲胄兮仁義 況須參玄得眞 自然換骨淸神 體不是火風地水 心亦非緣慮垢塵 沒縫塔中燈燃不夜 無根樹上花發恒春 風磨白月兮誰病誰藥 雲合靑山也何舊何新 一道通方爲聖賢之所履 千車共轍故古今而同進 사람 사람. 업을 따라 그 몸을 받네.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함 악함의 인과로다. 사악함 망녕됨 따르지 말고 언제나 바르고 참됨을 행하라. 부귀라 하는 것 쌀겨와 같다면 인의라 하는 것은 갑옷과 투구로다. 하물며 오묘한 이치 깨쳐 참됨 얻으면 저절로 바탕이 바뀌고 정신도 맑아지리. ..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啥豆巴 滿面花 雨打浮沙 蜜蜂錯認家 荔枝核桃苦瓜 滿天星斗打落花 뭐지 콩이야. 얼굴 가득한 꽃 모래밭 빗방울 자국. 꿀벌이 제 집인 줄 알겠네. 여지 열매와 복숭아 씨, 쓴 외 온 하늘의 별들이 지는 꽃잎 때렸나. 이것은 중국 사천 사람들이 곰보를 놀리는 노래이다. 한 글자에서 차례로 한 글자 씩 일곱 자까지 늘여 나갔다. 각 구절의 끝은 같은 운자를 쓰는 면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국음으로 읽어보면 그 자체로 매우 유쾌한 절주를 형성한다. 처음 무얼까? 하는 의문을 던져 놓고, 바로 콩이지 뭐야 하고 받는다. 다시 그 콩은 얼굴에 핀 꽃을 말하는데, 모래밭에 빗방울이 떨어진 형상과 같다. 벌집 같은 그 모습에 꿀벌도 제 집인양 착각할 ..
11.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② 성여학(成汝學)은 시재(詩才)가 높아 일세에 대적할 사람이 적었는데도 늦도록 벼슬 한자리 못했다. 양경우(梁慶遇)의 『제호시화(霽湖詩話)』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보면 늘 찢어진 옷에다 찌그러진 갓을 쓰고 있었으며, 귀밑머리는 더부룩하고 머리칼은 하얗게 세어 홀로 한 칸의 서재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말로 한 세상의 곤궁한 선비였다.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성여학 때문에 나온 말인가 싶다. 余嘗往來其家, 每見其破衣矮巾, 滿鬢衰髮, 獨依一間書齋, 盡日授書童子, 眞一世之窮士. 詩能窮人者, 殆爲成敎授而發也. 그의 시에 보면 다음과 같다. 露草蟲聲濕 風枝鳥夢危 ..
4.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 나식(羅湜)은 시사(時事)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자취를 감추는데 힘썼다. 그러나 정미년에 벽서(壁書)의 화가 일어나자 그의 형 나숙(羅淑)과 함께 화를 당했다. 일찍이 역귀를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儺鼓鼕鼕動四閭 역귀 쫓는 북소리 온 마을에 울리니 東驅西逐勢紛如 이리저리 쫓는 소리 그 형세 어지럽다. 年年聞汝徒添白 해마다 들었어도 흰 머리만 늘었구나 海內何曾一鬼除 나라 안의 한 귀신을 제거함 있었던가. 구나(驅儺)의 의식을 묘사했는데, 해마다 그렇듯 열심히 역귀를 쫓았건만 정작 없애야 마땅할 나라 안의 한 귀신을 몰아내지 못해, 그 근심으로 흰 머리만 날로 늘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4구에서 말한 ‘나라 안의 한 귀신’은 구체적으로 가..
9. 대궐 버들 푸르른데③ 이튿날 권필은 혹독한 형벌로 인해 들것에 실려 동대문을 나섰다. 그는 평소 몸이 약했던 데다 상처가 심해 바로 발행하지 못하고 동대문 밖 민가에 머물고 있다가 벗들이 권하는 막걸리를 마시고 장독(杖毒)이 솟구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시참(詩讖)이 전해진다. 처음 민가에 머물 때 주인 집 문짝에 시가 한 수 써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三月將盡四月來 삼월도 다 가고 사월이 오려는데 桃花亂落如紅雨 복사꽃만 붉은 비인 양 어지러이 떠지네. 勸君更進一盃酒 그대에게 한 잔 술 다시금 권하노라 酒不到劉伶墳上土 술도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는 이르지 못하리니. 그런데 시를 써놓은 사람이 첫 구의 ‘권(勸)’을 ‘권(權)’으로, 2구의 ‘유(劉)’를 ‘유(柳)’..
8. 대궐 버들 푸르른데② 이와 비슷한 예화가 하나 더 있다. 권필(權韠)이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安得世間無限酒 어찌하면 세간의 한없는 술 얻어서 獨登天下最高樓 제일 높은 누각 위에 혼자 올라 볼거나. 성혼(成渾)이 이를 듣고, “무한주(無限酒)에 취해 최고루(最高樓)에 오른다 하였으니, 심히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위언(危言)이다.”라고 말하였다. 뒤에 그는 과연 시안(詩案)에 걸려 죽었다. 『시평보유(詩評補遺)』에 나온다. 권필(權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시안(詩案)의 전말은 이러하다. 1611년(광해 3) 봄 전시(殿試)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포의의 선비 임숙영(任叔英)이 대책(對策)에서 외척의 교만 방자함과 후비(后妃)가 정사에 간여함을 직척(直斥)한 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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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궐 버들 푸르른데 還笑遊人心大躁 우습다 벗님네들 마음 너무 조급해 一來欲上最高峰 단번에 최고봉에 오르려 하는 도다. 望欲遠時愁更遠 멀리 바라보자 하면 근심 더욱 멀어지니 登高莫上最高峰 올라도 최고봉엔 오르지 말지니라. 앞의 것은 진화(陳澕)의 시이고, 뒤의 것은 정도전(鄭道傳)의 시이다. 같은 운으로 함께 ‘최고봉(最高峰)’을 노래하였다. 정상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산을 오른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닌가. 왜들 저리 조급하단 말인가. 이것이 진화 시가 말하고 있는 뜻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던가. 그러나 높이 올라 멀리 볼수록 자신의 왜소를 더 깨달을 뿐이니, 굳이 끝장을 보려 하지 말라. 최고봉은 아껴 두라. 이것은 정도전의 말이다. 이 두 사람의 시를 두..
6. 형님! 그 자 갔습니까?④ 다시 홍만종(洪萬宗)의 『시평보유(詩評補遺)』에는 허균(許筠)이 갑산(甲山) 귀양지에서 지었다는 시가 실려 있다. 春來三見洛陽書 봄 들어 세 번째로 서울 편지 받아보니 聞說慈親久倚閭 어머님은 문 기대어 나를 기다리신다네. 白髮滿頭斜景短 짧은 저녁 빛에 흰 머리 날리시리 逢人不敢問何如 어머님 어떠시던고 감히 묻지 못했네. 봄 들어서만도 서울 소식은 세 번째로 날아들었다. 변방에서 고생하는 자식 걱정에 어머님은 이제나 저제나 아예 마을 문에 나서 자식 돌아올 날 만을 기다리신다는 전언이다. 기우는 인생의 황혼에 자식의 봉양을 받으며 안온한 노경을 보내셔도 시원찮을 텐데 흰 머리의 노인께 이 무슨 막심한 불효란 말인가. 편지를 들고 온 사람에게 차마 어머님의 근황은 물어보지도 ..
5. 형님! 그 자 갔습니까?③ 최전(崔澱)은 소년 시절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관동 땅을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다. 蓬壺一入三千年 봉래도 한 번 든 지 삼천년이 흘렀어도 銀海茫茫水淸淺 은빛 바다 아득하고 물결은 맑고 얕다. 鸞笙今日獨歸來 난새의 피리 속에 오늘 홀로 돌아오니 碧桃花下無人見 벽도화 꽃 아래에 보이는 사람 없다. 홀로 돌아왔지만 보이는 사람 없다는 말이 시참이 되어, 그는 나이 20세쯤에 일찍 죽고 말았다. 시어에 자못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 이 예화는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려 전한다. 허균(許筠)이 죄를 입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친구들과 이별하는 시를 지었다. 深樹啼鴉薄暮時 까마귀 우는 숲에 엷은 어둠 깔려 올 제 一壺來慰楚臣悲 한 병 술로 귀양 슬픔 와서 위로 하는구려...
4. 형님! 그 자 갔습니까?② 조신준(曺臣俊)은 개성 사람인데 『서경(書經)』을 삼천 번이나 읽었는데도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어렵다는 「요전(堯典)」은 수만 번을 읽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고을 원을 여러 번 지냈고 수직(壽職)으로 정삼품에 올랐다. 그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練水淸如玉 明沙鋪似金 비단 같은 강물은 옥인 양 맑고 백사장은 금가루를 뿌린듯 하다. 誰能挽數斛 淨洗世人心 뉘 능히 몇 말을 담아가서는 세상사람 마음을 씻어 주려나. 옥같이 맑은 강물에 금가루를 뿌린 듯한 백사장. 이 맑은 옥과 금가루를 가득 담아 명리의 탐욕에 찌든 세상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고 싶다. 참으로 관후장자(寬厚長者)의 넉넉한 마음자리가 잘 나타나 있지 않은가. 또 이런 시도 있다. 晩起家何事 南窓日影移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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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형님! 그 자 갔습니까? 흔히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 하여 그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대개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들게 되니, 한 구절의 시만 가지고도 그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가 있다. 양파(陽坡) 정태화(鄭泰和)가 일찍이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은 춘첩(春帖)의 끝 구절에 이런 것이 있다. 關西老伯閑無事 관서 땅 늙은 수령 한가해 일 없는데 醉倚春風點粉紅 봄바람에 취해 눕자 분홍 꽃잎 점을 찍네. 늙은 수령이 일이 없어 한가로우니 태평시절(태평성대를 나타낸 시: 소화시평 상권34, 상권51)이 아니고 무엇인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취흥이 도도하여 슬쩍 기대니 꽃잎은 날려와 옷깃 위에 분홍의 수를 놓는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2.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②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예전 중국의 유명한 기생 설도(薛濤)가 어렸을 때 우물가 오동을 읊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가지는 지나는 새 마중을 하고 잎새는 오가는 바람 배웅하누나. 송나라 때 한 소녀가 들꽃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多情樵牧頻簪髻 다정한 목동들이 머리에 즐겨 꽂고 無主蜂鶯任宿房 주인 없는 꾀꼬리 벌 멋대로 묵어 자네. 결국 뒤에 모두 기생이 되었는데 대저 시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시구가 그의 운명을 이미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설도(薛濤)는 본래 양가의 딸이었다. 우물 가 오동을 읊는다는 것이 하필 오가는 새를 다 기뻐 맞이하고, 지나는 바람마다 잘 가라고 전송한다고 하였을까? 목동과 나무꾼이 제멋대로 머리에 꽂고,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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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씨가 되는 말, 시참론(詩讖論) 1.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人間細事亦參差 인간의 잗단 일들 언제나 들쭉날쭉動輒違心莫適宜 일마다 어그러져 마땅한 구석 없네.盛世家貧妻常侮 젊을 땐 집 가난해 아내 늘 구박하고殘年祿厚妓將追 늙어 녹이 후해지자 기생이 따르누나.雨陰多是出遊日 주룩주룩 비오는 날 놀러 갈 약속 있고天霽皆吾閑坐時 개었을 땐 언제나 할 일 없어 앉아 있다.腹飽輟飡逢美肉 배불러 상 물리면 좋은 고기 생기고喉瘡忌飮遇深巵 목 헐어 못 마실 때 술자리 벌어지네.儲珍賤末市高價 귀한 물건 싸게 팔자 물건 값이 올라가고宿疾方痊隣有醫 묵은 병 낫고 나니 이웃집이 의원이라.碎小不諧猶類此 자질구레 맞지 않음 오히려 이 같으니楊州駕鶴況堪期 양주 땅 학 탄 신선 어이 기약하리오. 이규보(李奎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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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족(自足)의 경계(境界), 탈속(脫俗)의 경지(境地) 다음에 소개하려는 시는 조선 중기의 유명한 학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족부족(足不足)」이란 작품이다. 모두 40구 280자에 달하는 장편으로 ‘족(足)’자만을 운자로 사용한, 중국에서도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그 형식 뿐 아니라 내용 또한 참으로 삶의 귀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송익필(宋翼弼)의 일생 학문이 이 한 수의 시에 무르녹아 있다 해도 조금의 지나침이 없다. 君子如何長自足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족하며 小人如何長不足 소인은 어찌하여 늘 족하지 아니한가. 不足之足每有餘 부족하나 만족하면 늘 남음이 있고 足而不足常不足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樂在有餘無不足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
10.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② 호방하기로는 다시 이런 시는 어떨까. 彈指兮崑崙粉碎 손가락을 퉁기니 곤륜산이 박살나고 噓氣兮大塊紛披 입김을 불어대자 땅덩이가 뒤집힌다. 牢籠宇宙輸毫端 우주를 가두어 붓끝에 옮겨오고 傾寫瀛海入硯池 동해 바다 기울여서 연지(硯池)에 쏟아 붓네. 장유(張維)의 「대언(大言)」이란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한껏 과장하여 붓을 뽐낸 시이다. 마치 엄청난 거인이 축구공 만한 지구를 손 위에 놓고 공깃돌 놀리듯 장난치는 형국이다. 이와 비슷하게 이백(李白)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오노봉(五老峯)을 붓으로 삼고 삼상(三湘)의 물을 연지(硯池) 삼아 靑天一張紙 寫我腹中詩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위에 내 마음에 품은 시를 써보리라. 뾰족한 오노봉(五老峯)을 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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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에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이라는 제목의 20수로 이루어진 연작시가 있다. 답답한 세상에 가슴을 후련하게 적셔주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몇 수를 소개한다. 跨月蒸淋積穢雰 한 달 남짓 찌는 장마, 퀴퀴한 기운 쌓여 四肢無力度朝曛 사지(四肢)도 나른하게 아침저녁 보냈는데, 新秋碧落澄廖廓 초가을 푸른 하늘 툭 터져 해맑더니 端軸都無一點雲 끝까지 바라봐도 구름 한 점 없어라. 不亦快哉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초가을에 꼭 맞는 시이다. 특히 금년 여름처럼 잔혹한 더위 끝에 맞이하는 초가을 하늘빛은 자못 경이적이다. 지루한 여름 장마와 끈적끈적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사지는 나른하기만 하고 일할 의욕은 아예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섭리는 어김없어, 어느덧 ..
8. 강아지만 반기고② 꼴도 보기 싫던 그때와 꼴조차 안 보여주려던 오늘 낙제하고 보니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내의 냉대이다. 당나라 때 두고(杜羔)가 과거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가려 하자, 그 아내가 시를 지어 보냈다. 良人的的有奇才 낭군께선 우뚝한 재주를 지니시곤 何事年年被放廻 무슨 일로 해마다 낙제하고 오십니까? 如今妾面羞君面 이제는 님의 낯을 뵙기 부끄러우니 君到來時近夜來 오시려든 밤중에나 돌아오시소. 이건 숫제 협박이나 진배없다. 누구는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졌느냔 말이다. 한낮에 말고 밤중에 들어오라니, 사실 자기가 남편 얼굴 보기 민망한 것이 아니라 이웃들 볼 면목이 없다는 타령이다. 대장부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제 집을 도둑고양이 들 듯할 수야 있으랴. 이에 발분하여 용맹정진을 거듭한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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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아지만 반기고 득의(得意)와 실의(失意)를 담은 시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중국 사람이 지었다는 「득의시(得意詩)」란 것이 있다. 久旱逢甘雨 他鄕遇故知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났을 때 타향에서 옛 친구를 만났을 때. 洞房花燭夜 金榜掛名時 동방(洞房)에 화촉을 밝힌 첫날 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걸렸을 때. 땅이 쩍쩍 갈라지는 긴 가뭄 끝에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내려 거북 등 같은 논바닥을 적실 때,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낯선 타관 땅에서 옛 친구와 약속도 없이 만났을 때, 그 기쁨이야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수줍기만 한 신부(新婦)와의 첫날 밤, 과거 급제의 방(榜)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였을 때의 설레임은 어떨까. 인간 세상의 유쾌한 득의사(得意事)를 노래한 것이다. 그러자 ..
6.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② 반면에 이런 시는 어떠한가. 帆急山如走 舟行岸自移 바람 머금은 돛에 산이 내달리는 듯 배가 달리니 언덕 절로 움직이네. 異鄕頻問俗 佳處强題詩 낯선 고장이라 자주 풍습을 묻고 좋은 곳 만나면 굳이 시를 남기네. 吳楚千年地 江湖五月時 오초(吳楚)라 천년의 예로운 땅에 강호(江湖)라 5월의 번성한 시절. 莫嫌無一物 風月也相隨 빈털털이 신세라고 구박치 마오 바람과 달 동무하며 나를 쫓나니. 고려 말 김구용(金九容)의 「범급(帆急)」이란 작품이다. 바람을 잔뜩 머금은 돛이 쏜살같이 수면 위로 미끄러지니, 배 안에서 보기는 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양 옆의 산이 달려가고 언덕이 뒤로 밀리는 형국이다. 3구에서는 낯선 풍물을 마주하여 끊임없이 샘솟는 호기심을, 4구에서는 산자수명(山紫..
3.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三年竄逐病相仍 세 해의 귀양살이 병마저 들어 一室生涯轉似僧 한칸 집의 살림이 중인 양 호젓해라. 雪滿四山人不到 눈 덮힌 깊은 산엔 찾는 이 없고 海濤聲裏坐挑燈 파도 소리 속에 앉아 등불 돋운다. 고려 때 시인 최해(崔瀣)의 「현재설야(縣齋雪夜)」이다. 호방불매(豪放不羈)의 기상과 재주를 지녀 오만했던 그는 그 재주로 인하여 당시 장사감무(長沙監務)라는 한직으로 쫓겨나 있었다. 장사(長沙)는 전라도 무장(茂長)의 옛 이름이다. 궁벽한 산 속에서 지낸 세 해 동안의 삶은 젊은 날의 자부와 기개 때문에도 말할 수 없이 괴로웠을 것이다. 세상에서 완전히 버려진 느낌, 더 이상 아무 쓸모없이 잊혀져버린 듯한 생각에 그는 잠 못 이루고 있다. 육신의 병이야 약으로 고친다지만 마음의 병..
4. 시로 쓴 자기 소개서② 당당할손 정습명 고려 예종 때 정습명(鄭襲明)도 기이한 재주와 웅위(雄偉)한 도량을 지녔으되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므로 「석죽화(石竹花)」란 작품을 지어 자신의 심경을 기탁하였다. 世愛牧丹紅 栽培滿園中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하여 동산에 가득히 심어 기르네.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뉘라 알리 황량한 들판 위에도 또한 좋은 꽃 떨기 있음을. 色透村塘月 香傳壟樹風 시골 방죽 달빛이 스민 듯 고운 빛깔 언덕 나무 바람결에 풍기는 향기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땅이 후져 공자님네 있지를 않아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기누나. 모란은 부귀(富貴)를 상징하는 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사랑함은 꽃을 사랑함이기보다 부귀(富貴)를 붙좇음이다. 붉고 농염한 자태, 동산 가득 대접을 받으며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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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로 쓴 자기 소개서 ‘문여기인(文如其人)’,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다. 무심히 내뱉는 말속에는 이미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나 있어,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遠客坐長夜 雨聲孤寺秋 나그네는 긴 밤을 앉아 새우고 외로운 절, 빗소리 듣는 가을 밤. 請量東海水 看取淺深愁 동해물의 깊이를 재어 봅시다 내 근심과 어느 것이 깊고 얕은지. 당나라 때 시인 이군옥(李群玉)의 시이다. ‘원객(遠客)’은 그가 고향을 떠나 먼 타관 땅을 전전하는 고단한 신세임을 말해 주고, ‘긴 밤을 앉아 있다’는 말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아예 잠자리를 차고 나와 앉아 있음을 뜻한다. 2구는 우성(雨聲)과 고사(孤寺), 추(秋)라는 세 개의 명사를 서술어 없이 그저 잇대어 놓았다. 가을..
2. 이런 맛을 아는가?② 호쾌한 임제 임제(林悌)는 또 「의마(意馬)」란 작품에서 사나이의 네 가지 통쾌한 사업을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 한 가지는 장안(長安)에 비 갠 뒤 오릉(五陵)에 봄볕이 따뜻할 때, 금 안장에 올라타 달빛에 취하고, 옥 굴레를 한 말은 바람에 힝힝거릴 때, 담비 갖옷을 술집에 전당 잡히고서 홍루(紅樓)에서 호희(胡姬)를 옆에 끼고 마음껏 노닐며, 지기(知己)에게 두 자루의 오구(吳鉤, 名劍)로 보답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유연(幽燕) 지방의 건아(健兒)들과 진롱(秦壟) 땅의 장사(壯士)를 이끌고, 용호(龍虎)의 기이한 계책으로 천지(天地)에다 진(陣)을 벌려 놓고, 철마(鐵馬)에게 발해(渤海)를 다 마시게 하여, 왕정(王庭)에 큰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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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시인(詩人)과 시(詩): 기상론(氣象論) 1. 이런 맛을 아는가? 정약용(丁若鏞)이 쓴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雲牋闊展醉吟遲활짝 펼친 운전지(雲箋紙)에 취중시(醉中詩)가 더디더니 草樹陰濃雨滴時수풀도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起把如椽盈握筆서가래 같은 붓을 손에 가득 쥐어 들고 沛然揮洒墨淋漓낚아채듯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不亦快哉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호탕한 임형수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가면, 긴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곧 활을..
7. 탄탈로스의 갈증 고전문학사(古典詩學史)를 통해 볼 때,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의 논의는 뚜렷한 하나의 시론이라기보다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각기 자기의 입장에 따른 찬반이 덧붙어 그 논의의 양상은 자못 흥미롭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의 논의는 서정이라는 문학 본래의 기능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접근이다. 시는 궁한 뒤에 좋다는 명제는 예외를 인정치 않는 사실 명제도 아니고, 의당 그래야만 할 당위명제도 아니다. 이것의 진리값을 놓고 역대로 많은 논란이 있어 온 것은 당연하다. 불평즉명(不平則鳴)ㆍ발분서정(發憤抒情)ㆍ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동일성(Identity)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동일성은 ‘자기 자신을 자기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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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詩)는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당나라 때 현종(玄宗)이 맹호연(孟浩然)을 불러 접견하고, 예전에 지은 시를 읊게 하였다. 이에 맹호연(孟浩然)이 다음 시를 외웠다. 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疎 재주 없어 밝은 임금 이 몸 버리고 병 많아 옛 벗도 멀어지누나. 이에 불쾌해진 왕은 “그대가 스스로 짐(朕)을 구하지 않은 것이지, 짐은 그대를 버린 적이 없노라.”하고는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다. 사려 깊지 못한 경박한 붓놀림 때문에 궁하게 된 경우이다. 『소화시평(小華詩評)』에 전한다. 장상례(張尙禮)가 「궁원(宮怨)」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庭院沈沈晝漏淸 정원은 깊고 깊어 낮 물시계 소리 맑은데 閉門春草共愁生 닫아건 문엔 봄풀이 시름처럼 자라누나. 夢中正得君王寵 꿈속에서 한창 임금의 총애 얻고 있는데 却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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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詩)는 궁달(窮達)과는 무관하다는 주장 시인은 궁(窮)의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가슴 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날카로운 촉수가 되어 이전보다 그의 시를 더욱 우수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궁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실제 궁한 이의 시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고, 달하였으면서도 시가 좋은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달한 처지에 있으면서 문필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우, 가만히 앉아서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의 논의에 승복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재분(才分)과는 관계없이 결코 공해질 수는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여기서 필연적으로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의 논의에 대한 이들의 반격이 예견된다...
6.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② 이색이 헤매며 알게 된 것 고려 말 이색(李穡)은 「유감(有感)」이란 작품에서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非詩能窮人 窮者詩乃工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할 수 없고 궁한 이의 시가 좋은 법이라. 我道異今世 苦意搜鴻濛 내 가는 길 지금 세상과 맞지 않으니 괴로이 광막한 벌판을 찾아 헤맨다. 氷雪砭肌骨 歡然心自融 얼음 눈이 살과 뼈를 에이듯 해도 기꺼워 마음만은 평화로웠지. 始信古人語 秀句在羈窮 옛 사람의 말을 이제야 믿겠네 빼어난 시구는 떠돌이 궁인(窮人)에게 있다던 그 말. 1ㆍ2구는 앞서 본 소동파(蘇東坡)의 시구를 그대로 딴 것이다. 옛 사람이란 바로 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킨다. 세상과 맞지 않는데서 비롯된 ‘궁(窮)’을 추스르고자 괴롭게 광막한 벌판을 헤맨다. 살과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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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과 시능궁인(詩能窮人) 궁해져야만 시가 좋아진다 예전 시화서(詩話書)를 들추다 보면 유난히 시인과 궁곤(窮困)의 관계에 대한 예화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크게 간추려 보면,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즉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의와, ‘시능궁인(詩能窮人)’ 즉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으로 대별된다. 엄밀히 말해 이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상반되는 명제이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은 궁핍한 환경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잘 쓰게 한다는 말이고, 시능궁인(詩能窮人)은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을 궁핍한 환경으로 몰아넣는다는 말이다. 대개 이러한 생각은 연원이 오랜 것이지만, 처음으로 이 말을 한 사람은 구양수(歐陽修)이다. 그가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
3.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發憤抒情)의 정신② 치욕조차 버텨내며 집필하게 만든 발분서정 일찍이 사마천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옛날 서백(西伯)은 유리(羑里)에 구금되어 『주역(周易)』을 부연하였고, 孔子는 진채(陳蔡)에서 곤액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다. 굴원(屈原)은 쫓겨나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 『국어(國語)』를 남겼다. 손자(孫子)는 다리가 잘리고 나서 병법(兵法)을 논하였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 땅으로 옮긴 뒤 『여람(呂覽)』이 세상에 전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진(秦)나라에 갇혀서 「설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다. 『시경(詩經)』 3백편은 대개 성현(聖賢)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바이다. 이 사람들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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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시를 향한 열정과 사물의 비밀을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 지금까지 시마(詩魔)와 시귀(詩鬼), 그리고 귀시(鬼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모두 시가 폐부에 깊이 박힌 고질(痼疾)이 되어, 시를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었던 옛 시인들의 시정신이 빚어낸 소화(笑話)들이다. 그러나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그 무엇이 이들 이야기 속에는 깃들어 있다. 시마(詩魔)는 한 마디로 옛 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말이다. 시귀(詩鬼)는 달리 말해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일 뿐이다. 사조제(謝肇淛)란 이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많으면 심화(心火)가 타오르고 심화가 타면 신수(腎水)가 고갈되어 심장과 신(腎)이 교통이 안 되므로 사람의 생리가 끊어진다..
10. 귀신(鬼神)의 조화와 시인(詩人)의 궁달(窮達)② 귀신이 시로 사람을 출세시키다 또 『성수시화(惺叟詩話)』에는 귀신이 시로써 김안로를 출세시킨 이야기도 실려 있다. 김안로가 어릴 적 관동지방을 유람하였는데, 꿈속에 귀신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春融禹甸山川外 우임금의 산천 밖엔 봄 기운이 한창인데 樂奏虞庭鳥獸間 순임금 뜰 짐승 사이에서 음악을 연주하네. 그러면서 “이는 네가 벼슬을 얻을 말일 것이다[此乃汝得路之語].”라고 하였다. 이듬해 그가 정시(庭試)를 치러 들어갔더니, 연산군이 율시 6수를 내어 시험 치는데, 그 가운데, “이원(梨園)의 제자(弟子)들이 심향정(沈香亭)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樂譜)를 들쳐본다[梨園弟子, 沈香亭畔, 閒閱樂譜].”는 제목이 있었는데, ‘한(閑)’자로 ..
5. 귀신(鬼神)의 조화와 시인(詩人)의 궁달(窮達) 정지상(鄭知常)이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밤에 달이 휘영청 밝아 홀로 범각(梵閣)에 앉아 있는데, 홀연히 허공에서 시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僧看疑有刹 鶴見恨無松 스님이 보면 절 있을까 의심하고 학이 보곤 소나무 없음 아쉬워 하네. 정지상은 혼자 생각에 귀신이 알려주는 것이려니 하였으나, 무엇을 노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뒤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갔는데, 고시관(考試官)이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峯)’, 즉 “여름 구름엔 기이한 봉우리 많네.”란 도연명의 시구를 시제(詩題)로 하여 ‘봉(峯)’자를 압운으로 내거는 것이었다. 퍼뜩 산사(山寺)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구가 생각난 그는 이를 이어 시로..